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9. 18:40

어떤 어리석은 자 what kind of fool am I?

(호세아 11:1-11, 누가복음 12:13-21)

 

1. 솥뚜껑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배고픈 사람은 먹는 게 생각날 것이다. 가마솥에 끊인 국이 생각나든지, 아니면 솥뚜껑에 구워 먹는 삼겹살이 생각날 것이다. 또한 한국 속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를 떠올리며 자라나 거북이 같은 것을 생각할 것이다. 이는 모두 솥뚜껑과 연관된 언어들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매개로 다른 것을 연상하고 설명하는 것을 ‘비유’라고 한다.

 

2. 비유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다른 어떤 것을 설명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자라나 거북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려면 서로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설명해야 할 텐데, 서로 솥뚜껑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자라 또는 거북이는 솥뚜껑처럼 생겼어’라고 설명할 때, 자라나 거북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3. 비유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묘사해 주고 설명해 주고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지만,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솥뚜껑이 곧 자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호세아서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비유적이다.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랑에 빗대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4. 호세아서는 크게 두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남녀 간의 사랑(부부 간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다.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비이다. 우리가 온전히 경험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 빗대어 말해진다.

 

5.  호세아서 1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부모 같은 심정으로 자식 같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절절하게 사랑하시는 지를 알 수 있다. 호세아서 앞부분에서 비유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이라 격렬하다. 거기엔 격정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그런데 호세아서 후반부에서 비유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라 애달픔이 가득 배어 있다. 하나님은 자식 같은 이스라엘에게 걸음마도 가르치고, 품에 안아서 얼루기도 하고, ‘사랑의 줄’로 이끌기도 하고, 멍에를 벗겨 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주기도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양육했다. 아주 정성스럽게.

 

6. 대개 보통 이렇게 양육을 받으면 자식은 부모를 알아보고 부모의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가가 보여주고 있는 자식 이스라엘의 모습은 전형적인 배은망덕의 모습이다. 이런 자식을 후레자식(bastard/막돼먹은 놈)이라고 한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7). 한 마디로, 자식 같은 이스라엘은 부모 같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인데,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떠났을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로 간다.

 

7. 누가복음에 나오는 소위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는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 발생한 이야기이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한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재산이 많았던 집안인데, 아마 아버지가 죽고 나고나서 재산 분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재산 분쟁을 하고 있는 형제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1). 그리고 나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를 좀 더 깊게 설명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8.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20절에 나온다. “어리석은 자여!(You fool)” 비유 속의 부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왜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현실 속의 형제들, 즉 재산을 가지고 서로 분쟁하고 있는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라가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9.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삼가 모든 탐심(All kinds of Greed)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라는 말씀을 설명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용어는 ‘탐심(플레오넥시아)’이다. 탐심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핵심 포인트이다. 탐심하고 비슷한 용어는 탐욕, 욕심, 욕망 등이 있다. 탐심에는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을 의미하는 단어 ‘플레이온’이 들어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면서 산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질이 더 좋고 우수하고 더 탁월한 것을 사고 싶지, 질 나쁘고 형편없는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지향은 그 어리석은 부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와 똑 같은 삶의 방식 가운데 살면서 그를 욕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또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도 그렇게 ‘탐욕스럽게’ 살면서, 왜 아닌 척하는가? 곡식의 소출이 풍성하면 더 큰 곳간을 지어야 하고, 곳간이 가득 차면 평안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소망하며 산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여!’라는 소리 들어도 좋으니까, 부자로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11. 성경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모두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탐심이 구원을 방해한다. 그래서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탐심이 작동하는 방식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탐심이 작동한다.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욕망이 꿈틀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는 말로 포장하고, 삶의 구원을 위한 개인의 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이 노력한 만큼 ‘소출을 쌓아 놓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그 분배가 노력에 비례할 때는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반비례할 때는 불의하다고 생각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12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러한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신다. 부자는 자신이 소출이 많아 곳간을 크게 짓고, 큰 곳간을 가득 채운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 부자의 만족은 다른 만족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직장, 집, 자동차, 각종 재산들, 등을 보면서 우리는 만족해 한다.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감사를 ‘하나님’에게 드린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여전히 ‘소유’에 있다는 것이다.

 

13. 그런데, 어리석은 부자 비유 말씀에서 아주 기막힌 반전이 일어난다. 부자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원래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논리상 맞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소출을 도로 찾으리니 그래도 네가 평안하겠느냐?”

 

14 위의 두 가지 말씀 중, 우리는 어떠한 말씀에 더 분노할까?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아마도 모든 사람들)은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더 분노할 것이다. 왜 그럴까? 탐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확보한 구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후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후자처럼 산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느라, 힘들고 어렵게 산다.

 

15.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분노를 사고 있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들이 부모와 같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고, 결국 앗수르에게 기대어 살았다. 그런데 어떤가? 그들이 기댔던 앗수르는 영원히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만족할만한 구원을 베풀었는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기댔던, 구원을 간구했던 바로 그 앗수르에게 망한다. 그리고 앗수르는 영원했는가? 아니다. 앗수르는 얼마 안 가서 바벨론에게 망한다. 이스라엘은 영원하신 하나님, 그들에게 참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갈망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영원하지 못한 것에서 구원을 갈망하다가, 갈망하던 바로 그것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만다.

 

16.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자가 ‘어리석은 자여’라는 호칭을 들은 이유는 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단순히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뻔한 설교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스스로 확보한, 부자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다. (요즘 불평등의 문제는 최고로 심각하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서 수많은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삶에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근심 걱정 가운데 살아간다. 왜 그럴까?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확보한 ‘소출’을 구원의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17. ‘어리석은 부자’에 이어 나오는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 12:22-23). 그러면서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절)라는 말씀을 하신다.

 

18. 세상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라고 말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정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근심과 염려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목숨과 몸을 위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강 안에 머물라고 말한다.

 

19. 우리는 여기서 결단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했던 부자를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며 한탄하신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여 사는 듯한 부자를 부러워하고 그 사람처럼 열심히 살라고 부추긴다. 그러면서, 구원을 하나님께 맡기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한다. 이렇게 세상은 ‘어리석은 자’와 ‘어리석은 자’가 공존하고 대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자가 되고 싶은가? What kind of fool am I?

 

20.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었던 그 사람, 무리 중에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던 그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여전히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느라 형과 재산 분할 소송을 진행하여 자신이 소송을 통해 확보한 재산에 만족해하며 그 재산에 기대어 살았을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는 것을 깨닫고 넉넉한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사는 세상이 이해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을까?

 

21. What kind of fool are you? 여러분은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열심히 살고 기쁘게 살지만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삶이 기쁘고 즐거워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는 자에게는 불안이 엄습해 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를 평안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결국 구원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What kind of fool am I?

 

* 이 글은 2017년 11월 23일 포스팅한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의 확장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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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