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17. 02:38

예수 그리스도와 안식일

(마가복음 2:23-3:6)

 

오늘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두 가지 논쟁을 다루고 있다. 하나는 안식일에 밀이삭 자른 것과 다른 하나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 고쳐 준 것이다. 안식일에 두 가지의 행위를 한 것이 왜 논쟁거리인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지키는 것은 모세 언약(시내산)언약에 대한 징표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확인했다. , 안식일을 통해서 그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키는 언약백성으로 스스로를 이해했다.

 

게다가 바벨론 포로의 경험을 안고 있는 예수님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조상이 겪은 질곡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조상의 실패를 번복하고 싶지 않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집착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 입방에서는 이 문제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일이 이해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삶의 질곡(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상에 대한 제사는 그들에게 꼭 지켜내야만 하는 집착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복음 저자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마가복음 저가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몰랐을 리 없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벌어졌던 것처럼 죽음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일어난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고수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안식일 제정 원리는 이렇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사실, 유대인들이 이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악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을 알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나은 지 알았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초대교회 공동체에 따르면 이것은 안식일 법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단순히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까?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8, 10).

 

안식일 법 제정을 선포하는 출애굽기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안식은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기 보다, 창조의 완성이다. 창조의 완성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신 것이다. ,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안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인가? 하나님이 일을 끝내고 쉬셨으니까 우리도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이 안식일의 뜻인가? 그렇지 않다.

 

안식은 행복한 상태이다. 죄가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상태이다. 하나님과 합일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안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한마디로, 안식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상태이다.

 

우리는 오늘, 현실을 말해 주고 있는 두 가지 이야기 접했다. 첫째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이야기이다. 왜 이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랐는가? 배고픔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다.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모든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생명의 빵으로 묘사된다.

 

둘째로, 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마른 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전도여행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님은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배고픔과 질병은 안식을 헤치는 요소이다. 이것이 존재하는 한 안식이 없다. 배고픈 자에게는 빵이 필요하고, 질병 때문에 고생하는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죄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 배고픔, 질병, 죄가 존재하는 한 안식은 없다. 그러나, 반대로 배고픔과 질병과 죄가 없으면 안식을 누린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마가복음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배고픔과 질병을 없애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분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겼다는 것은 죄를 없애셨다는 뜻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공동체는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의 완성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안식을 누리는 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중요하다.

 

주일에 일 안 하는 것이 안식이 아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단순히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안식은 다시 노동으로 복귀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교회 와서 노동한다. 노동의 자리를 일터에서 교회로 옮기는 것을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는 노동의 자리에서, 그것이 일터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그 노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면서 산다. 감사하면서 산다. 행복하게 산다.

 

여전히 안식을 가로막는 질병이나 배고픔 같은 근심 걱정과 시기 질투 가운데 살면서, 주일(안식일)에 일 안 나가고 교회 나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바리새인의 믿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참된 안식이란 일 안하고 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종교적 의무를 행하면서 종교적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참된 안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고픔의 문제, 질병의 문제, 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 가운데 여전히 사로잡혀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서 안식일에 쉰 것을 통해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원을 싸구려로 만드는 불경한 행위에 불과하다.

 

안식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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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