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7. 07:02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3:20-35)

 

오늘 말씀은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 ,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이야기 속에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구조다. 구조를 보자면,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간에 바알세불 논쟁이 들어가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로 끝나는 구조다. 이야기의 샌드위치 구조는 마가복음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붙들러 왔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또는 귀신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자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가 미쳤다는 헬라어의 엑세스테를 옮긴 것인데, ‘온전했던 정신을 다른 곳에 두다또는 정신이 나가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신천지 이만희: 자기 자신이 보혜사 성령이다. 자신만이 봉인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 사람은 미쳤거나, 진짜이거나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 가지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 자기가 주장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 확신범인가 2)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기꾼인가 3) 진짜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성경 전문가)은 바알세불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혹은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는 일을 주술로 이해했다. 그 당시 주술은 중범죄로 취급했다. (미쉬나 산헤드린 7:4). , 그들은 예수님이 치료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바알세불(사탄)의 힘을 빌어 주술을 시행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논리적인 대답을 펼치신다. ‘만약 하나님께 대항해 싸우고 있는 사탄이 다른 사탄을 사람에게서 내쫓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일이 되어 자신의 세력에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의 역사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같은 편끼리의 분쟁은 좋지 못하다. 자신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이야기 1)

작은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 툭하면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대판 싸웠다. 결국 그 중에서 많이 다친 금붕어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살아남은 금붕어 한 마리는 이제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죽은 물고기가 악취를 내면서 물을 썩게 만들더니, 결국 살아 있던 한 마리 금붕어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야기 2)

두 수도승이 오랫동안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의 생활이 단조롭다고 느낀 한 수도승이 말하였다. "매일매일의 따분한 이 생활을 한번 다르게 바꿔 봅시다.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게 어떨까요?" 너무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수도승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데요?"

"그들이 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분쟁이라는 것입니다."그러나 다른 수도승은 거룩한 사랑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데요?"

수도승이 말하였다.

"저 돌을 보십시오. 그것을 우리 사이에 두고 `이 돌은 내 것이야.'라고 서로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을 했던 수도승이 잠시 생각하고 나더니 자신들 의 오랜 우정에 위협을 느끼고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분쟁은 일어나기도 전에 끝났다.

( R. 리브)


둘 중의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감동적인가? 금붕어 이야기는 쓴 웃음을 유발하고, 수도승들의 이야기는 감동을 유발한다. 금붕어 이야기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비춰주고, 수도승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승들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왜 더 감동적인가?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도승들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다.

 

평화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평화로운 자아,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교회, 평화로운 나라,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부지런한 자기 비하에서 온다. 자기 비하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다.

 

 

성경은 인류의 평화를 깨는 요소를 세 가지 지목한다. 죽음, , 질병이 그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을 사탄이 지배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음, , 질병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강한자를 공격하심으로 사탄의 나라를 결박하시고, ‘죽음, , 질병이 없는 하나님 나를 가져오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강한자(사탄)를 결박하는 것은 유대 묵시 사상의 특징이고, 기독교 종말론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은 그저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확대되고 있음을 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알세불 논쟁을 하시며,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에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대조되고 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블라스페미아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특히 다른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죄 용서 능력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오늘 말씀의 문맥 상,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이 논쟁을 통해서 마가복음 공동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역시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여느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예수를 붙들러 온 것처럼 미친자가 아니다.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메시아이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님)로 인정하고 믿고 따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예수의 사역(하나님 나라 사역)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를 미친 자로 생각하는 자는 예수를 떠날 것이고,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공동체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근본적으로 성령에 의한 사역으로 보았고, 사람들에게 메시아이신 예수를 따를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관심, 교회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은 단순히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속에 예수를 끌어들여 이용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회심이란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 끌어들이지만, 결국에는 반대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여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예수님은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을 마무리 지으면서 누가 나의 가족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은 예수님께 아뢨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왔다는데, 나가서 맞이하거나 사람을 시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거나 해야 맞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이렇게 대응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예수님은 누가 하나님 나라의 가족인지 새로운 정의를 내려주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 이것은 오늘 말씀의 처음에 언급했던 성령을 모독하는 자와 대비되는 말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예수를 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운동에 동참하며 헌신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즉 믿음이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간다의 개념이 아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이고 동참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죽음과 죄와 질병을 몰아내는 일, 즉 사탄(귀신)을 몰아내는 일을 계속하여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가? 아니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진실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더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가족이라 칭하여 주신다.

 

주님의 가족이라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도대체 우리의 일이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주님은 평화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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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