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9. 8. 24. 06:35

오후 2시의 햇살

 

그림자도 그늘도

빛이 없으면 애초부터 생기지 않았을

어둠의 유물이다. 그러므로 그림자도 그늘도 그들의 존재에 책임이 없다.

 

동굴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빛은 동굴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동굴은 그저 어둠만을 유일한 존재로 생각하며 그것에 매달려 살았을 것이다.

 

하늘이 지독하게 맑은 날,

나무는 그 맑은 하늘에 기어이 구멍을 내고

빛을 얼마큼 덜어내려 한다.

 

그것은 하늘에게도 나무에게도 상처다. 하늘은 나무에 가리고 나무는 그늘에 가린다. 하늘의 풍경이 갑자기 슬퍼지는 것은 드러난 것들 때문이 아니라 가려진 것들 때문이다.

 

공간을 채우는 것은 빛이 아니라 소리다. 소리는 빛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고 빛은 소리를 통해 자기를 감춘다. 빛은 강렬하여 눈을 감게 만들고, 감은 눈은 귀에게 감각을 양보한다.

 

새들은 지금 속고 있는 것이다. 허공에는 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데, 그들은 빛 속을 가로지르며 소리를 내지른다. 그러나 그것을 들어주는 이들은 빛에도 속하지 않고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어둠의 유물들이다.

 

정확히 직각으로 꺾여 들어오는 오후 2시의 햇살은

빛도 소리도 만들어 내지 않는

연약한 우주의 추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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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