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12. 13:43

이 교회를 보라!

(에베소서 3:1-13)

 

(에베소서를 보면, 교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주 필연적이다.)

 

본문을 보면,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은혜의 경륜, 계시, 그리스도의 비밀, 비밀의 경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하나님의 각종 지혜, 예정 등이 그것이다. 비밀, 계시, 경륜’ 이런 단어들은 본문의 분위기를 왠지 신비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에 걸려 넘어지면 안 된다. 단어 자체가 그러한 신비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렇지,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 수 있도록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워서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경륜’과 ‘비밀’이다. 헬라어로 각각 ‘오이코노미아’ 그리고 ‘뮈스테리온’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오이코노미아, 경륜은 직무, 사명, 살림살이 등으로 번역된다. 한자어 ‘경륜’으로 번역하다 보니, 한자어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진다. 오히려 영어가 쉽다. 오이코노미아는 영어로 economy이다. 오이코노미아는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와 다스림을 의미하는 ‘노미아’가 합쳐져 생긴 말이다. 오이코노미아를 풀어서 말하면, 집을 다스리는 것이다. 집안 살림을 잘 매니지먼트(관리하는 것)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2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라고 말할 때 이것을 풀어보면, ‘하나님이 나한테 너희를 위하여 맡겨 주신 일(직무/사명)을 잘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맡겨 주신 일을 잘 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 즉 경륜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맡겨 주신 일 자체를 비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밀은 ‘뮈스테리온’을 번역한 말인데, 일정기간 숨겨져 있다가 계시에 의해서 드러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정기간 숨겨져 있다가 계시에 의해 드러난 바로 그 일을 잘 감당하다가 지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게 참 재미 있는 건데, 그가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가 그가 얼마나 그 일을 잘 감당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계시로 인하여 드러난 비밀(뮈스테리온)이 무엇인가?’이다. 이것은 이미 바울이 2장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것을 3장 6절에 요약해서 적어 놓았다. 공동번역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그 심오한 계획(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공동 상속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정말 좋은 소식(복음)이다. 공동 상속자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헬라어로 ‘함께’를 뜻하는 ‘쉰’과 몸을 뜻하는 ‘쏘마’가 결합된 말인데, 이것은 ‘같은 몸에 속한, 같은 몸에 속한 지체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같은 몸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그 둘을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서로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가 된다. 바울 당시에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혁명적인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계시였다. 바울에게 이러한 계시가 알려지기 전까지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이 계시가 알려지고 난 뒤에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러한 비밀을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계시로 알려지는 하나님의 비밀(뮈스테리온)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받은 사람은 그것을 불가항력적으로 ‘믿음으로’ 밖에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무엇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오해한다. 믿음이 인간의 의지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인간의 의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것,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전달되면 인간의 의지는 온데 간데없어지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것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로 받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순종과 감사와 찬양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마리아(the Virgin Mary)이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전한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28-31).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뮈스테리온(비밀)을 계시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뮈스테리온이 계시로 임하면,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뿐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그리고 이어지는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와 더불어 나오는 것이 마리아 찬가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이렇게 순종과 감사와 찬양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믿음의 가치를 잘 모를 뿐더러 굉장히 낯설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을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것이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든지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좋다. 그 누구도 나의 의지와 반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롭다. 우리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 너무 젖어 있다 보니, 자유와 은혜를 구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 마저도 자신의 자유로, 자신의 의지로 받을지 안 받을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이만한 믿음’을 보기 힘든 것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의지(믿음)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음을 개인의 의지와 연결시키는 매우 근대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라고 할 때, 우리는 여기서도 믿음을 그 사람의 의지라고 잘못 해석한다. 우리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네가 그렇게 인정하니, 너의 그 의지 덕분에 구원받는 거야’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우리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에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와의 만남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고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믿음(신앙)으로 밖에 그 사건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반응하는 믿음인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결국, 은혜와 믿음은 한 켤레의 구두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인간의 믿음을 이끌어 낸다. 다른 말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밖에는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로 또는 다른 것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하자면, 믿음은 굉장히 수동적인 개념이다. 그냥 수동이 아니라, 신적 수동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은혜가 initiative(우선적으로 촉발)해서 생겨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은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난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마태복음은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가만히 끊고자’했다. 즉, 파혼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의 사자가 꿈 속에 나타나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0-21).

 

이때 요셉이 취한 것은 믿음이다. 그냥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주의 사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 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온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고 아들을 낳자 그 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처럼 믿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임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마치 이런 것이다. 바닷가에 있다가 거대한 쓰나미를 맞닥뜨리면, 거기서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쓰나미에 불가항력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란 그런 것이다.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믿음 외에 없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사랑은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다. 쓰나미처럼 임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은혜(하나님의 사랑)는 믿음(인간의 사랑)으로만 받을 수 있다.

 

에베소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났을 때 (“그 심오한 계획(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공동 상속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가 생겨났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한 몸에 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몸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렇게 교회는 인간의 의지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불가항력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에베소교회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서로의 적대감(이질감)을 내려놓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한 몸, 즉 교회가 되었다. 이제 에베소교회는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을 동일하게 전하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바울은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10절).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고 나니까, 거기에 교회가 생겨났다. 그리고 복음으로 구원받고 서로 화해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전달할 사명을 가진다.

 

이 교회를 보라! 이것은 내가 니체의 책 <이 사람을 보라!>를 따라서 정해 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원어의 제목은 ‘ecce homo 에케 호모’인데, 이것은 니체가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가져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쓴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어렵기로 유명한데, 그렇다 보니 지금도 니체의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 읽고나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니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니체는 수많은 책을 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에 별로 큰 수익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이 그동안 쓴 책에 대한 해설책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을 보라!>이다. 그의 마지막 책이지만, 니체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보시오 이 사람이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이 책은 크게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마다 붙은 제목이 매우 독특하다. 첫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현명한지”이고, 두 번째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영리한지”이다. 세 번째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좋은 책들을 쓰는지”이고, 마지막 챕터는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이다. 앞의 세 챕터의 제목 자체도 특이하지만, 네 번째 챕터도 특이한데, 거기에 속한 두 개의 장은 각각 ‘전쟁 선언’, 그리고 ‘망치가 말하다’다. 그런데 제목만 있을 뿐 내용이 없다.

 

<이 사람을 보라!>의 각 챕터에 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랬다. 현명하고 영리한 자가 쓴 좋은 책이니, 사람들이 많이 보고 뭔가 깨달음을 얻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책을 <이 사람을 보라!>로 정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교회를 보라!>로 외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담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지혜를 세상에 알려야 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로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히 성경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다른 집단도 성경을 교회처럼 전투적으로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전투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거기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 우리들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으로 그 은혜를 불가항력적으로 받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사명을 가지게 된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사도 바울처럼 사명을 감당하다 감옥에 갇혀도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그렇게 감옥에 갇힌 것을 자신이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증거로 삼는다.

 

성경인 에베소서를 연구하고 묵상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이 교회를 보라!>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여기서 ‘이 교회’는 지역교회라기 보다 보편적인 교회를 말한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좀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왜 요즘 우리 교회들은 세상을 향하여 <이 교회를 보라!>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에서 길게 설명한 것처럼, 믿음을 ‘자유로, 자신의 의지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믿음을 자유의지와 혼동을 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계시로 드러났을 때 우리가 그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꾸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걸러내려고 하고, 그렇다보니, 결국 우리의 삶 속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감사와 찬양이 없기 때문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말로 해서, 요즘 우리는 현저하게 하나님의 지혜의 ‘보물창고’인, 하나님의 비밀의 ‘보물창고’인,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창고’인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데 엄청 게을러졌을 뿐만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맞닥뜨리는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불가항력적인 믿음의 고백을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믿음의 신앙생활, 즉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이기적이고 미약한 자유와 의지에 근거한, 매우 세속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간절히 바라기는,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입한 자유와 의지를 겸손히 내려놓고, 진정 믿음으로 밖에는 반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될 때, 교회는 다시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이 교회를 보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같다. 우리, 그러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 위하여, 함께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임하기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믿음으로 응답하자.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찰 뿐 아니라, 삶의 의미가 넘쳐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 이러한 교회 공동체, 얼마나 행복한가. <이 교회를 보라!>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그날까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