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7. 11:01

자기로 살기

(사무엘상 8:1-9)
 

오늘 본문은 위로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다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1-3절).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가? 위로가 된다. 사무엘이 어떤 사람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이면서 사사이다.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다. 굉장한 영성과 굉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지도자 중의 지도자였다. 게다가, 그의 엄마는 어떠한가? 그렇게 유명한 엄마를 두는 게 쉽지 않다. ‘한나(Hannah 해나)’. 얼마나 유명한지, 그녀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여성의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사무엘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유명한지, 그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남성의 이름도 너무 많다. 너무 유명해서, 그의 이름은 ‘개’에게도 잘 붙여진다. 내가 기억하는 나 어릴 적 우리집 개의 이름도 사무엘이었다. ‘Sam/쌤.’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 한나의 손자와 사무엘의 아들답게 이름도 멋지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고, ‘아비야’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개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서 짓는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한나와 사무엘의 자손답게, 요엘과 아비야는 ‘요와 야’, 즉 여호와의 약자, 여호와의 이름을 담아낸 이름이다.

 

이런 면에서 요즘 우리가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아서 지었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서 이름을 짓는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곧 찬양이고 영광이었는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곧 꿈이고 욕망이다. 이름에 꿈과 욕망을 담기보다 신앙고백이 담기면 좋겠다.

 

위대한 할머니와 위대한 아버지를 둔 요엘과 아비야, 그리고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을 가진 요엘과 아비야, 그런데 이들은 아버지처럼 훌륭한 제사장과 사사가 되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버지에 한참 미치지 못한 아들들로 역사에 기록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아무리 위대한 할머니라도, 아무리 위대한 아버지라도 그 자식들은 마음대로 못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자식 낳아서 기르는 것을 ‘자식 농사’라고 표현한 것 같다. 농사는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하늘이 제때 비와 햇볕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풍년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원래 농부들의 신앙이 깊은 것이다.

 

사무엘이 여러가지 면에서 스승 엘리 제사장보다 뛰어난 지도자였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함께 지냈다. 사무엘은 스승 엘리 제사장의 두 자녀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은 스승님보다 자식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나중에 자신의 자식들이 스승님의 자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 그때 비로소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위대한 사무엘이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도 자식 문제만은 어떻게 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몰라도 자식 문제만은 더욱더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패러디해서 자식에게 적용하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무릇 맡길 만한 것보다 더욱 자식을 주님께 맡기라.”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자식한테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모두, 맡길 만한 것보다 더욱 자식을 주님께 맡기라. 주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다.

 

사무엘의 두 아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이어서 장면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라마에 살고 있는 사무엘에게 찾아가 엄청난 요구를 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요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댄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5절). 이러한 요구를 하는 이유를 두 가지 대는데, 하나는,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는 달리 듬직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이유이다.

 

이들의 요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즉, 왕을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떼를 쓰며 표면적으로 댄 이유는 사무엘과 사무엘의 자식들 때문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겉으로는 사무엘의 연로함과 그의 두 아들의 부족한 지도력 때문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말에 들어 있었다. 즉, 그들은 나른 나라에 있는 ‘왕 제도’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무엘은 마음이 불편했다. 첫째,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말해서 빈정이 상했고, 둘째, ‘왕을 세워 달라는 것’ 자체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빈정상하고 속상할 때, 사무엘이 보인 반응이 참 은혜롭다. 그들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른 누구의 위로보다 하나님에게 위로 받을 때, 진정 마음에 평안이 오는 법이다. 빈정상하고 속상했던 사무엘도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위로를 받았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내를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절). 사무엘은 자신의 연로함과 자신의 자식들을 탓하며 왕을 세워 달라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으며 ‘이제 사람들이 나를 내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서운했을 그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들의 속내를 알게 되면서 위로 받는다.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사무엘을 내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사무엘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며 ‘모든 나라와 같이’라고 할 때 ‘모든 나라’는 주변국들이었다. 특별히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다섯개의 도시들(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이 연합해서 만든 블레셋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주변국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렸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원수처럼 굴었는데,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어놓으면 어김없이 와서 약탈해 갔다. 정말 못살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좀 더 자신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강력한 왕정 체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요구가 정당해 보인다. 누구든지, 안전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무엘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욕구, 즉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했다”는 문자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그것은 사무엘의 눈에 악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무엇이 악한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그 소임과 특권을 버리고, ‘다른 나라들처럼’ 되려고 한 것이 악한 것이다.

 

뉴스에서 중국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중국의 인구가 13억 정도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구가 너무나 많다 보니까, 1980년도부터 중국은 산아제한 정책(birth limits policy)를 강제해왔다. 그런데, 요즘 중국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많아 짐에 따라서 경제활동이 가능한 연령대의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하기에, 인구가 13억 정도되니까,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가 엄청 많을 거라고 짐작하는데, 13억 인구가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폐지하고, 노동 가능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은퇴 나이를 올리기로 했다는 기사였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가 씁쓸했다. 중국이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는 중국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중국이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는 중국 정부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굴기 정책’ 때문이다. 중국은 나라를 ‘성공적인/번영하는 소비 사회’와 ‘세계적인 기술 선두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입장에서 인구의 고령화나 노동인구의 감소는 그러한 정부의 정책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구가 망가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비사회’와 ‘무분별한 기술개발’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이 바로 그 지구를 멸망하게 하는 대열에 합류해서, ‘다른 나라들’처럼 되겠다고, 그래서 이 세상의 최고 강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아쉽다. 중국이 중국답지 못하고, 그저 다른 나라들, 그것도 지구를 망치는 나라들을 따라하겠다는 것 자체가 실망인 것이다. 만약 중국이 중국의 유서 깊은 유가나 도가, 또는 묵가의 사상에 따라, ‘소비사회’나 ‘기술사회’가 아닌 ‘덕의 사회’를 세워 나가겠다고 자신들의 길을 걸었다면, 이 세상의 판도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미 멸망해가는 다른 나라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을 추월하겠다고 하니, 지구가 망가지는 속도는 더 가팔라 질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필요한 나라가 아니다. 왕정 제도가 있더라도 ‘나른 나라들’처럼 왕정 제도를 두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선택받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세우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왕이신 하나님이 ‘이미’ 계시기에, 다른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두지 않아도 된다. 만약 이스라엘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자기들의 소임과 책임을 다했다면, 오히려 주변 나라들이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기어코 왕정 제도를 갖추었고, 왕이 있으면 그 왕을 통해서 더 안전한 나라, 더 번영하는 나라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열왕기상하의 말씀이 전해주고 있듯이, 바로 그 왕정 제도 때문에 망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자기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살려고 했다가,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도 ‘자기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살려고 하면, 나를 지키지 못하고 만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조에/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내어놓으시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생명)’를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이들처럼’ 살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우리에게 무슨 왕이 필요한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살면 된다. 자기로 살기,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이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사무엘이 다른 것은 다 주님께 맡겼는데, 자식 문제만큼은 주님께 맡기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있는가? 지금 내가 힘쓰고 애쓰는 바로 그것,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을 위해 걱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간구는 했지만, 그것 자체를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나라도, 민족도, 개인도 모두 자기로 못살고 누군가를 따라가려 한다. 부탄 같은 나라, 얼마나 멋진가? 그 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 왜? 다른 나라를 따라가려 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보라, 얼마나 힘든가? 다른 나라, 특히 미국을 따라가느라 모든 게 종속되어, 거기가 한국인지, 아니면 미국의 51번째 주인지 모를 정도로 나라 자체의 정체성이 위기를 겪고 있다. 요즘 개인들의 삶을 보라. 얼마나 다른 이들을 따라 사는가? 다른 이들과 동일한 의식주를 누리지 못하면 수치스러워 한다. 남을 따라 사느라, 남 신경 쓰느라, 자기로 살지 못해, 행복하지 못하다.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모든 면에서 자기로 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나라를 따라서’, ‘다른 사람을 따라서’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냥 ‘자기로 살면’ 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사는’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는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지금 내가 힘쓰고 애쓰는 바로 그것,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을 위해 걱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힘들고 어려웠더라도 그들의 삶의 문제를 더욱더 주님께 맡겼다면, 사무엘이 늙었어도, 사무엘의 두 아들이 사무엘처럼 듬직하지 못했더라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를 저들에게 보내주실 것을 믿고, 그 문제를 주님께 맡겼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 열방들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그 실패의 역사가 구약성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담은 것이 성경이다. 우리는 주님께 맡기는 것을 실패하고 있는가, 성공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산다는 것은 곧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자기도 지키고, 주변의 사람들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