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26. 02:52

적그리스도와 기름부음 

(안티크리스토스와 크리스마)

(요한일서 2:18-29)

 

글의 전개: 적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기름부음에 대한 이해, ‘적그리스도는 왜 요한 공동체를 떠났을까’의 질문에 대한 답변, 그리고 우리의 신앙 들여다 보기

 

1. 몇 절 안 되는 짧은 구절인데, 아주 무거운 단어들이 몇 개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적그리스도(안티크리스토스/안티크리스트)’이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말이었다. 지금도 일부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적그리스도’라 칭하고 있고, 한 때는 가톨릭, 특별히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난무한 때도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공격하고 비판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비난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던 이승복 어린이의 말처럼 개신교인들의 마음에 가톨릭을 향한 적대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2. 또한 모든 서구적 가치의 전복을 꿈꿨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적그리스도>라는 책을 써서 서구 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기독교적 요소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서구 사회의 기독교적 요소를 비판했기에 기독교인으로부터 ‘악마’라는 비난을 들었고, 지금도 기독교인들은 그를 좋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니체를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독교 역사에서 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우리는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성경 곳곳에 있는 말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1서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나올 법한 곳, 요한계시록에도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서로 사랑하라’를 그토록 강조하는 요한1서에만 이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4. 요한일서의 화자, 요한 할아버지는 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누구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일서에서만 등장하지만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용어들은 성경 곳곳에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데살로니가 후서의 ‘불법의 사람’ 또는 ‘멸망의 아들’(살후 2:3-9)이 있고,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포학하여 가증한 것’(단 9:27)이 있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막 13:14) 등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표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사람 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5.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데에는 특별한 정황이 있다. 요한 공동체는 매우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이므로, 아직 분열이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 교회(the church)’라 생각할 만큼,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신앙 위에서 진리 그 자체를 품고 있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공동체에 시련이 닥친다. 함께 세례도 받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 스스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분열(schism)이 요한 공동체를 강타했다. 할아버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거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19절).

 

6. 할아버지는 아주 명시적으로, 콕 집어서, 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일컬어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를 떠난 이들에게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교회가 엄청나게 나뉜 이 때에 교회를 떠난 이에게 적그리스도라는 부르는 일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개신교가 가톨릭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은 유체이탈 화법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회로부터 나온 것은 개신교이지, 가톨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물론 프로테스탄트들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톨릭과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며 비난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분열이 있을 때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계속해서 소환되었다.

 

7. 이런 아픈 역사성을 가진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 공동체의 특별한 정황 속에서 살펴봐야 엉뚱한 상황에서 엉뚱하게 쓰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요한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요한이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서 떠나 거짓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이고, 적그리스도가 말하는 거짓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알면 거짓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법이다.

 

8.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그가 만들어낸 진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다. 그것을 사도적 전승(사도로부터 전해진 복음/그래서 교회는 사도적 교회라 불린다)이라고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경험한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전해준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진리의 표현이다. 요한 공동체를 비롯한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이 진리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고, 주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마 16:15-18).

 

9.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렇다면, 거짓은 무엇인가? 이 진리를 부인하는 자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할아버지가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자들은 요한 공동체를 떠나갔다.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진리를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들은 것에’ 더 이상 거하지 않았고,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났다는 뜻은 그들이 더 이상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일 뿐이다.

 

10. 본문에는 ‘적그리스도’처럼 문제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것과 매우 대조되는 신비한 용어가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기름부음(크리스마/anointing)’이라는 용어이다. 이 편지는 요한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에게 쓰는 편지가 아니라,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지체들에게 쓴 편지이다.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와는 달리 그들이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안에는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 할아버지가 말하고 있는 ‘기름부음’은 무엇인가?

 

11. 지금 개신교 전통에는 이러한 것이 별로 없지만, 구약성경을 보거나 기독교의 다른 전통을 보면 기름을 바르는 전통들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기름부음’의 전통은 선지자나 제사장 또는 왕을 세울 때 나타난다. 그들에게 기름(올리브 오일)을 붓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메시아라는 말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뜻이다. 아직 일곱개의 성례전(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을 모두 가지고 있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같은 곳에서는 ‘병자성사’라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바르며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전통도 있다. 이처럼 ‘기름부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보여주는 성례전적인 성격을 가진다.

 

12.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이러한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 기름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 16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6장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데, 요한 공동체가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출교 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출교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법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출교 당한 이들을 누군가 죽여도 살인자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 공동체는 출교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유대인들이 출교 당한 요한 공동체를 죽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요한 공동체를 죽이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것이다.

 

13. 이러한 무시무시한 일을 앞에 놓아두고 떨고 있는 제자들(요한 공동체)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면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불린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부르고, 그 진리의 영이 요한 공동체에 임할 것이라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의 제자들(요한 공동체)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백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제자들에게 그들의 고백이 헛된 것이 아니며 진리를 행하는 것이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거짓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옳다!’고 하나님이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이라면 박해를 받더라도, 설사 죽임을 당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언제나 ‘진리’를 구하는 법이다.

 

14.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요한일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요한일서에서 할아버지가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너희는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말할 때의 ‘기름부음’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기름부음, 즉 성령을 받은 요한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15.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에 머물지 못하고 떠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적그리스도’, 그리고 ‘기름 부음’과 함께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용어 ‘거함(abide/메노)’이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요한일서에서도 ‘거함’이 강조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거함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거함’에 대하여 강조한다.

 

16. 거한다는 것’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에 ‘mindfulness’가 있다. 나는 이 단어를 컴퓨터에 붙여 놓고 일한다. 정신이 하도 딴 데로 가서, ‘바로 지금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mindfulness’란 정신이 빈 데 없이 꽉 찰 정도로 딴 생각하지 않고 그 마음이 한 곳에 집중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지금 바로 여기에 100% 머물러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한다’라는 뜻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함(abide/메노)’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즉 한 인간이 전인적으로, 온 인격체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17. 본문을 보면, 우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것을 요한일서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고 은혜이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선포를! 부흥회 용어, 또는 범퍼 스티커 같은 용어로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약장사가 약파는 느낌으로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렇지,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한 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에게 집중하시고 우리에게 헌신하신다. 이것을 좀 더 말랑말랑한 용어로 바꾸면,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이란 머물러 있고 집중하고 헌신하는 것 아닌가.

 

18. 요한 할아버지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는 것, ‘성령이 우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 즉 복음, 다시 말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머물러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나의 육체가, 나의 마음이, 나의 영혼이, ‘예수는 그리스도다!’에 ‘충만히/fully’ 머무르고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19. ‘기름부음’은 정말 중요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우리가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우리의 전인격/인간성)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만이 진리이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 안에 있는 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떠난 ‘적그리스도’가 아닌, 진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