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9. 13:55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고린도후서 1:1-11)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이름이 등장하는 서신(letters)가 13개 있다. 보통 그들은 ‘바울 서신’이라 불린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중에서 일곱 서신만 실제 바울이 쓴 편지들이고, 나머지는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름을 빌어 다른 누군가가 쓴 편지들이다. 바울이 직접 쓰지 않았다고 성경으로서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후서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성경은 교회 공동체가 정경(canon)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직접 쓴 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은 매우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서신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디아 쎌리마토스 쎄우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디아’는 ‘~에 의해, ~를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쎄우’는 ‘하나님’의 속격’이고 ‘셀리마토스’는 ‘뜻(will)’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도직은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 인하여 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게 은혜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며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 선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 ‘꼰대’소리 듣는다. 꼰대 중에서도 상꼰대 소리를 듣는다. 요즘 가장 인기 없는 찬송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549장)”이다.

 

발명은 과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에서도 발생한다. ‘사적인 영역(privacy)’라는 말은 근대에 발명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사적 재산(property)의 개념도 동시에 불러왔는데, 사적 재산은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근대에 발명된 ‘사적(privacy)’ 개념에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신적 존재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적(privacy)’라는 말은 ‘나만의 고유 영역’이라는 뜻으로,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영역은 다른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도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은 지금도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현대인들은 그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사적 영역’을 건들면 그 존재가 누구든, 그게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국가든, 하나님이든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에서 보수정치란 바로 이 사적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 그 누구도 나의 ‘사적인 영역’ 또는 ‘사유재산’을 건들 수 없다. 이것은 ‘자유’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다. 이것은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보수정치의 근간이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이 보장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사적 영역’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바울의 사도직은 사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이런 의심을 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게 맞어? 그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야?” 바울은 이러한 의심에 대하여 단호하게,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 좋고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묻는 것이 쉽게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는 첫째, 우리가 너무 ‘사적 영역’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어 있어서 그렇고, 둘째, 자신의 사적 욕망을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 좋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사적 영역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욕망을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려는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고난과 위로를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독특한 고백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영광송을 부르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3-4절).

 

이 구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울이 의도적으로 단어를 배열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 – 아버지 – 하나님 – 우리”가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며 경험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아버지, 그리고 위로의 하나님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경험한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경험된다고 고백하는 중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5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에서 쓰인 헬라어 동사 “파쎄마(고난들)”는 복수형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한 모든 고난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한 사람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될까 싶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다. 모욕은 인격적인 모욕을 말한다. 감정이 상하는 모욕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모욕을 말한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을 때 사람은 쉽게 죽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 대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면서 밝혀낸,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누겠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채찍질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셨다. 이것은 신체에 당하는 모욕(고난)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음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마지막, 결정적인 모욕이다. 이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고난들)을 쉽게 보면 안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다. 인격적 모욕, 법적 모욕, 신체적 모욕,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 이 모든 것을 당하시고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특별한 고난의 이력을 지닌 분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은 이러한 특별한 고난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고난당하여 죽으신 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그 어떤 고난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깊은 고난과 연결되어 있다. 고난 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 고난들(인격적/법적/신체적/생명적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해 주실 수 있다.(룻기의 나오미(기쁨): 마라(쓰다) 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심: 오벳(효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으로, 위로의 하나님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고난을 당했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니, 그저 눈물만 주룩주룩 나올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즘, 현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할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만 무엇이든지 하려고 들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보니,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하면서 당하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들어설 여지가, 공간이 없어서 그런 것을 아닐까. 요즘 시대를 돌아보면, 현대인들에게 고난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경험하는 통로일 뿐,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려 하지 않고,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뜻, 자신의 의지 안에 머물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도된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불평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한 바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신 이유는 동일한 고난을 당하여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고난을 수치로 여겼던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고난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로 여기고, 자신이 고난 당한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이다.

 

바울은 8절에서 자신의 일행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은 나오지 않지만, 그 고난이 엄청난 고난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8b-9a).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래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했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 (주의: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가리킴)

 

이 부분을 놓아두고 학자들은 몇 가지 가설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이라는 구절과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에베소에서의 소요 사태를 연결한 가설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 일행에게 발생한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우상판매 업자 데메드리오와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거대한 아데미 신전이 있던 에베소에서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파는 상업행위가 성행했다. 데메드리오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 일행은 데메드리오와 그의 사람들이 은으로 만든 신상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행 19:26).

 

이게 단순히 우상숭배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계를 위협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해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19장을 자세히 보면, 적어도 그들은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9장에 소개되고 있는 일화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바울의 간헐적 질병의 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우리는 바울이 경험한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서의 환난을 경험하고 나서 바울이 하고 있는 고백이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we would not trust in ourselves, but in God who raises the dead)”(19b절).


요즘 우리가 뉴스 기사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는 ‘전례 없는(unprecedented)’이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기에 오히려 감각이 무덤덤한 듯하다. 이전에 경험해 본 것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텐데,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적 재난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기에 오히려 무감각한 것 같다.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 발생하면 인간은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법이다.

 

기후위기 같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일들 뿐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에게, 또는 공동체에게 발생한 고난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신경 써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인생이, 또는 우리의 어떠한 선택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발생하는 고난들(고통의 일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괴롭히는 고난들은 단순히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신앙의 원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도록,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 경험이 드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해 보인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 자기의 의지대로 할 뿐이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간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으니, 고난을 경험하더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손해다. 고난이 얼마나 괴로운가. 고난 속에서 괴로움만 당하고 만다면, 그것은 정말 큰 손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난이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경험은 놀라운, 아주 신비로운 경험과 마주하게 되는데, 당한 고난이 그냥 괴로움으로만 남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어준다. (성경의 스토리들은 모두 그것에 대한 증언 아닌가. 아브라함, 요셉, 모세, 나오미와 룻, 다윗 등등)

 

둘째, 우리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 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적 영역의 개념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유 재산(사적 영역)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여 그것에 의지해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개념은 근대가 만들어낸 허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적 영역, 사유 재산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러한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 하나님만이 구원하시는구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그것이 거룩하거나 죄악되거나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힘에 겹도록 심히 고난에 처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하여, 바로 그 한 순간을 위하여 수년간 피땀흘려 노력하듯이,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신앙생활에 정진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려고 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나의 사적 재산이나 또는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한 번 가만히, 오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를 짓누르는 영적 기운은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위로인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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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