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22. 08:59

평강이 필요해

(학개 2:1-9) 

 

1. 질문: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인가 다른 하나님인가? 구약은 기독교의 성경인가, 아니면 신약만 기독교의 성경인가?

기독교 역사에서 마르키온이라는 괴짜 신학자가 출현한 적이 있다. 아직 기독교 신학이 정교하게 다듬어지기 전이라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시작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주장을 했던 사람 중 하나이다.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폭력과 보복의 신이지만, 신양의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약에 등장하는 구약적 요소도 다 빼 버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마르키온 성경을 만들었다.

 

2. 또한 마르키온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은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집중했다. 마르키온의 이러한 생각은 가현설(도케티즘/docetism)으로 발전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신적 존재는 절대로 죽음을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마르키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영지주의 기독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3. 정통 기독교는 마르키온의 이러한 사상을 물리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뿐 아니라 인성을 동등하게 고백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기독교인의 성경이다. 우리는 신약의 복음서와 바울 서신만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구약성경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지만, 이 땅의 일들을 남몰라라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날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날아가는 존재이다.

 

4. 목회를 하면서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매우 편식한다는 것이다. 거의 20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마르키온 사상에 물든 것 같이, 기독교인들이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반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복음서와 바울 서신 설교는 많이 하지만, 구약 설교, 구약에서도 특히 예언서 설교는 잘 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매우 기이한 일이다.

 

5. 그래서 나는 언제나 구약과 신약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목회했다. 신약을 통해서만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구약을 통해서도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예언서 공부뿐만 아니라 예언서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편식하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게 어려운 것처럼 성경 말씀을 편식하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난 사순절 동안 12소예언서를 묵상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떤 분은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예언서를 이렇게 자세하게 본 적이 처음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소예언서를 가까이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소예언서를 가까이하는 시간을 가져서 매우 신선했고, 좋았습니다.)

 

6. 소예언서는 호세아로 시작해서 말라기로 끝난다. 호세아 때만 해도 아직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았을 때라,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호소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역사가 변해,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생활을 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질곡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성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7. 우리가 함께 읽은 학개서의 말씀은 명백하게 ‘성전 건축’을 촉구하고 있다.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든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8. 학개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의 말씀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에스라서를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던 일이다. 그런데, 에스라서에 보면 그 일을 진행하다가 성건 건축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막혀 주춧돌만 놓고 건축을 중단했다. 그리고 20년 정도 지난 후에,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건축을 마무리 지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9. 주춧돌을 놓고 20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다’라고 성전 건축하는 일을 손 놓고 있었다. 학개 선지자는 그것을 나무라면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든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괜히 찔리는 말씀이다. 판벽한 집이란, 잘 지어진 집을 말한다. 학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렇게 잘 지어진 집에서 두 다리 뻗고 잘 살고 있으면서, 폐허가 된 성전은 언제 건축할 것이냐?’

 

10. 왜 이렇게 학개 선지자는 강력하게 성전 건축을 촉구하는 것일까?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든 때가 언제인가? 누군가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 더 정확히 말해서는 사랑하고 신뢰하던 사람으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아이들은 평생 큰 트라우마 가운데 산다. 또 버림받을까봐 누군가를 선뜻 사랑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 또는 확신이 들도록 서로 보살펴 주는 것이다.

 

11.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충격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하는 트라우마였다. 포로기 때를 배경으로 하는 에스겔서 같은 예언서를 보면, 이 트라우마를 조심스럽게 다르고 있다. 나라가 망하고, 무엇보다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집단으로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데, 그 트라우마의 원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현실이었다. 힘센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을 불사르고 성전을 때려부수고 주민들을 죽이고 잡아가고 그래서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

 

12.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70년 간의 포로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일군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냉소적인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도비야를 비롯한 훼방꾼들이 성전 건축하는 것을 방해하는 바람에 그나마 좀 잘해 보려는 마음에 찬 물을 끼얹었다. 거기다가 그들이 냉소적인 마음을 가진 또다른 이유는 포로에서 귀환하여 다시 세우려 했던 성전은 그 이전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아주 보잘것없이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전을 건축하려 한 일을 비아냥거리며,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삐쭉 댔다.

 

13. 이런 상황 속에서 학개 선지자가 ‘성전 건축’을 촉구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을 지으라는 뜻이 아니다. 포로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의구심을 가졌다. 자신들은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하나님도 자신들과 함께 이곳 예루살렘에 돌아오셨을까?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며 그들은 도저히 그곳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으려고 노력했던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정말 보잘것없이 초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렇게 초라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4.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큰 것을 보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서 가치를 찾기 힘든 세상이다. 백향목으로 휘황찬란하게 지은 솔로몬 성전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거주하셨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에 비해 보잘것없이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리라고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주저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렇게 보잘것없이 초라한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주하실 리가 없다 생각하며, 성전 건축하는 일을 차일 피일 미루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라면서 말이다.

 

15. 이스라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안되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무엇보다 하나님이 거주하실 성전을 봐도 너무도 초라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학개의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그러한 냉소와 불신앙이 가득하고,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냉소와 불신앙이 얼마나 잘못됐고, 그들이 겪고 있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 보이지만 성전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돌아오셨고 그들과 함께하심을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이다.

 

16. 오늘 말씀은 낙심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를 준다.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굳세게 할지어다!’라고 말하며 격려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라고 말하며 격려해 준다. 그러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또한 이전 성전에 비해 정말 보잘것없이 초라한 성전의 기초를 보면서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에게는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바로잡아 주신다.

 

17. 오늘날 우리에게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구약시대와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전은 단순히 건물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해서 지어진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해서 우리는 지금 성전(교회)를 세워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믿음! 큰 것을 보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작은 것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믿음!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평강(peace)가 없으면 한발자국도 나가기 힘들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들 마음에 평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20년째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평강이 임했을 때 그들은 20년동안 손 놓고 있었던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학개 선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이곳에 평강을 주시겠다고! 그러니 우리, 힘을 내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춧돌 삼아,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나가자.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