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12. 12:28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에스겔 16:1-6)

 

드라마에 단골 메뉴로 나오는 설정은 ‘출생의 비밀’이다. 대단한 성공을 이룬 주인공의 출생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드라마의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본문은 딱 그런 순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사람아,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그의 혐오스러운 일을 알게 하여라!” 지금,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겠다는 뜻이다. 벌써 ‘혐오스러운’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을 보니, 예루살렘의 화려함 뒤에는 어두운 출생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 보인다. 숨죽여 보게 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에게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 네 근본과 태생은 가나안 땅에서 비롯됐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 네 출생에 대해 말하자면 네가 태어난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자르지도 않았고 물로 깨끗하게 씻기지도 않았다. 소금으로 문지르거나 포대기에 싸주지도 않았다. 이런 것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네게 해줄 정도로 네게 인정을 베풀거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너는 네가 태어나던 날 미움을 받아 들판에 버려졌다.”(3-5절/우리말성경).

 

출생을 가나안, 아모리, 헷과 연관시키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처음부터 영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아모리, 헷은 대표적인 가나안의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말로 하면, 족보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 말은, 예루살렘은 그렇게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영광이 무너진 이후, 즉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이스라엘이 무너진 예루살렘의 영광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뜻이다.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예루살렘이 그토록 영광스럽게 된 이유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교만에 빠져 영광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전의 그 비천한 모습으로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에스겔을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해,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던 존재, 예루살렘.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5절). 참 가슴 아픈 문장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모두 버려진 존재이다. 이런 문장이 있다. 엄마는 나를 자궁에서 버렸다.”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 인간은 모두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들과 같은) 세상으로 버려진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서 운다. 버려진 존재는 그 안에 깊은 불안과 쓸쓸함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 안에 깊이 배어 있는 불안과 쓸쓸함은 바로 우리가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원초적 경험에서 온 것이다.

 

엄마들이 아기를 낳고 나서 겪게 되는 산후우울증은 자신의 자궁에 있던 생명을 바깥으로 버렸다는 죄책감과 이제 자유롭게 됐다는 해방감의 묘한 감정들의 섞임 속에서 오는 것이다. 그 우울증을 건강하게 잘 극복하는 엄마는 자궁에서 버려진 아이를 자궁이 품고 있던 것처럼 다시 품어 주지만, 극복하지 못하면 버려진 아이를 다시 품어주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발생하는 일들은 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아슬아슬한 일들이다. 자궁에서 버린 나를 다시 품어 키워준 엄마는 참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기적 같은 일이고 은혜이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힌 뒤, “배꼽의 탯줄도 자르지 않은 채, 물로 씻겨지지도 않은 채, 소금을 뿌리지도 않은 채, 강보로 싸지도 않은 채” 들에 버려진 아이를 ‘사랑의 마음으로’ 품에 안아준 이가 누구인지를 말해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때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네가 핏덩이인 채로 발길질하는 것을 보았다.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6절).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살던지 죽던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생명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외침이다. 애틋한 하나님의 마음.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내가 살던지, 죽던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세상에서 나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도록 나를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발가벗겨져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요즘 사람들의 고립감과 우울감과 위기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에 이렇게 집단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7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좀 더 탄탄해진 경제구조와 좀 더 민주화된 정치체제 덕분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지, 좀 더 이렇게 가다가는 모든 게 무너져 내릴 판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무너지면 다 소용없는 법이다.

 

요즘은 애틋한 하나님의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라는 이 음성이 참 절실한 때이다. 무엇인가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우리 생명들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이지만, 거기에 붙어있지 않을,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생명을 주시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버려진 것 같은 우리들을 다시 품에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다.

 

어렵고 힘들 때, 버려진 것 같이 불안하고 쓸쓸한 때에 성경처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 인생은 기쁘고 즐거울 때, 또는 아무 일 없이 평안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깊은 절망과 우울에 빠질 때가 있다. 지금처럼 불가항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사람들은 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성경은 이럴 때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드라마 보는 시간의 10분의 1만 떼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 시간을 써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어려운 시대를 잘 건널 수 있다. 이런 때는 성경을 기계적으로 필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마음이 너무 지쳐 있으면, 성경 보는 것도 다 귀찮은 법이다. 아무 것도 하기 싫어, 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이것 한 가지 만은 꼭 기억해 두면 좋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성경은 환란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큰 일을 통해서만 생명이 보존되도록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신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노년에 이삭을 주셔서 그들의 생명을 돌보셨다. 이삭이 엄마 사라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리브가를 주셔서 결혼하게 하심으로 돌봐주셨다.

 

모세가 왕궁에서 도망쳐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십보라와 장인 이드로를 만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돌봐주셨다. 나중에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어려울 때 계속해서 큰 힘이 되어준다. 가뭄 때문에 죽을 위치에 처한 롯과 나오미, 하나님께서는 롯과 보아스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하심을 통해서 그들을 돌아보셨다. 다윗이 죽음의 위협에 처해 도망 다닐 때, 하나님은 요나단의 우정을 통해서 그를 돌아보셨다.

 

엘리야 선지자가 죽음의 처지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통하여 그를 돌아보셨다. 요나가 물 속에 던져져 죽음에 처해졌을 때, 하나님은 바다의 생물(큰 물고기/고래?)을 통하여 그를 돌아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무엇이 예수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위로를 받으셨지만, 한 편으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환대를 통해서 위로를 받으셨다.

 

현재 우리의 삶 속에는 내가 생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돌보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손길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정경아 집사님) 궁금하다. 그것이 비록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다. 어떤 분이 정말 좋은 드라마라고 추천해 주어서 요즘 보게 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다. 거기를 보니까, 주인공 이지안(아이유)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것은 맥심커피 두 봉지를 끓는 물에 타서 먹는 것이다.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위로이고, 하나님의 손길이다.

 

우리가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 때,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를 품에 안아주신다. 의식을 하면, 그 사랑의 손길을 느낄 때마다 주님께 감사하고, 의식하지 못했다면, 한 번 곰곰이 현재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황인숙의 “우울”이라는 시를 나누며 마치고 싶다.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깍지 낀 두 손을 턱 밑에 괴고

 

짐짓 눈을 치켜떠보고

가늘게도 떠보고

끔벅끔벅, 골똘해보지만

도무지

부팅이 되지 않는다

 

풍경이 없다

소리도 없다

 

전혀 틈이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을

내 몸이 부풀며 채운다

 

알 수 없는 영역에

하염없이 뚱뚱한 나

덩그러니 붙박여 있다

 

시인은 ‘우울’을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 ‘알 수 없는 영역’에 들어와 있기에 더 우울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영역이지만,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는 영역은 없으시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영역에 들어온 것 같이 우울하고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곳에서 덩그러니 붙박여 있는 나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조금만 힘을 내자.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