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31. 00:08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출 40:1-38)

 

1. 인간은 죄인이고, 세상은 죄로 물들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보존하고 싶지만, 때로,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 또는 우리가 저지르는 일들을 보면, ‘죄’라고 하는 용어는 인간에게, 또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 고개를 들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이 죄 많은 세상을 견딜 수 없기에, 이 죄 많은 세상을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간절함이 베어 있는 것이다.

 

2. 영국의 작가 존 번연이 1687년에 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라는 소설이 있다. 존 번연이 활동하던 시대는 가톨릭에 의한 개신교 박해가 난무하던 때이다. 존 번연 자신은 종교가 없었으나 청교도였던 여인(Mary)과 결혼하여 개신교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역경의 삶을 살았다. 박해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에, 그 당시 종교전쟁은 무서웠다.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 신앙을 갖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와 같았다. 요즘 우리가 헌법에 의해서 보장받고 있는 ‘신앙의 자유’는 오랜 세월 전쟁을 통해 일군 피의 열매이다.

 

3. 번연이 살던 시대의 국왕인 찰스 2세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제외한 기독교 교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침례교도였던 존 번연은 비밀집회(허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집회)를 연 혐의로 12년 동안 투옥되었다. <천로역정>은 감옥에서 탄생한 불후의 명작이다. 존 번연의 인생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17세기(1600년대) 영국의 종교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고, 어떠한 분위기(또는 어떠한 심정)에서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으로 이주해 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4. 그런데, 그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참 재밌는 사실이 있다. 종교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들은 미국 땅에서 또다른 박해를 저지르게 된다. 미국의 작가 나다나엘 호손이 쓴 <주홍글씨>라는 소설에 그 이야기가 잘 담겨 있다. 청교도들(Puritians)은 서방 기독교가 너무 제도화되고, 영국 국교회가 너무 국가중심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제도중심과 국가중심의 신앙을 거부하며 성경중심(복음중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겠다고 가톨릭, 또는 영국 국교회와 한 판 대결을 벌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미국 땅에서 자신들을 박해하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이들을 처참하게 박해 한 일들을 보면, ‘이건 뭐지’라는 어리둥절한 마음을 갖게 된다.

 

5. 신영복 선생이 <담론>이라는 책에서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미를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잉카와 아즈텍에는 전설이 있었는데, 수염이 하얗고 피부가 하얀 백인이 언젠가 자기들을 도와주러 나타나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미를 침략하러 갔던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그 전설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 전설 속의 인물인 양 행세한다. 남미는 콜럼버스가 상륙한 이래도 약 1,600만명이 살해당한다. 그래서 남미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점령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코르테스와 피사로를 원망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참으로 절묘했다.

 

6. 남미의 침략자들은 당연히 남미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부렸다. 침략자들과 함께 한 가톨릭 신부들은 전형적인 부패세력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남미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을 했고, 또한 남미인들과 혼혈을 이루어 살았다. 그러는 와중에 1,600만명의 남미인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북미를 점령한 청교도인들은 남미의 부패한 가톨릭 신부들에 비해서 엄청 청렴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 청교도인들이 북미를 점령하면서 죽인 인디언의 숫자는 4천에서 6천만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신영복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부패와 청렴의 의미가 역전되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334쪽).

 

7. 부패세력은 그래도 자신들의 점령지 시민들을 개종하려고 노력하고, 그들과 혼혈을 이루어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 청렴세력은 개종이나 혼혈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패한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보면 청렴한 사람들이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부패란 무엇이고, 청렴이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이렇게 알쏭달쏭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고, 이 세상은 죄에 물들어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8.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구약에서 출애굽기만큼 역동적인 복음을 증거하는 곳은 없다. 그래서 나는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라 부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출애굽기는 우리 삶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광야’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애굽을 죄인의 삶이라고 칭하고, 가나안을 의인의 삶이라고 칭한다면, 우리의 삶은 죄인의 삶과 의인의 삶 어디쯤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9.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부드러운 말로 고쳐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형편없는 삶이 되기도 하고 좋은 삶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세 오경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우리 앞에는 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다. 신명기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10.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하듯이,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절대적인 것이다. 시내산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광야’라고 하는 척박함과 무미건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애굽으로 되돌아 갔을 것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출애굽기의 또다른 버전일 뿐이다. 이 책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장망성/장차 망하게 될 도시/애굽)’을 떠나 천국(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또는 역경들을 담고 있다.

 

11. 출애굽기에서도 그렇고 천로역정에서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또는 크리스천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산에서 내려와 성막(성소)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일상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그저 척박한 광야 밖에 없었다.

 

12. 40장으로 되어 있는 출애굽기에서 장장 15장이 성막에 대한 이야기다. 열 다섯 장에 걸쳐 성막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누가 성막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일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아주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너무 꼼꼼해서 지루하고 재미없다. 게다가 우리는 성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성막이 가진 의미를 함께 상실하고 만다.

 

13. 하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출애굽기 25장에서부터 시작하여 40장에서 끝나는 성막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삶을 꼼꼼하게 돌아보는 것이다. 나의 일상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나의 일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 하나님 경험의 일상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내 삶 속에는 성막이 세워져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14.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꼼꼼하게 지어서 비로소 봉헌한 날, 즉,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친” 후, 시내산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진중, 즉 이스라엘의 일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넘쳤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4-38 부분). 이스라엘은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한걸음한걸음 옮기는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은혜를 두 눈으로 보았다.

 

15. 이스라엘은 성막을 만들어 광야에서 그것을 메고 다녔다. 성막은 단순히 ‘물건이나 물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성막은 ‘하나님’이었다. 그들이 메고 다닌 것은 단순히 성막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메고 다녔다. 하나님을 메고 다니니 그들이 아무리 광야 길을 걸었지만 광야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길은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광야 길을 인도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을 잃지 않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16. 너무 멋지고 장엄하지 않은가! 길을 잃어버리기 딱 쉬운 이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광야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길을 잃어 멸망의 도시로 되돌아 가거나, 길 가는 중에 죽어버리거나, 길 가는 중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휘말리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출애굽기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것’ 밖에는 없다. 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광야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주의 길로 들어서 멸망하지 않고 복의 길로 들어서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방법, 복음을 알고 있다.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17.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하나님을 메고 다니면,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여주실 것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우리로 하여금 마시게 하실 것이다. 가야 할 방향으로 온전히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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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