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14. 13:38

2011 2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전 3:1-9

제목: 하나님의 동역자, ,

 

1장과 2장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강조해서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 앞에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끊임 없이 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나는 발견했는가!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뭐 그까짓 것 하기 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십자가의 도는 멸망 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한 것 같으나, 실상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발견하고 싶다고 해서 발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영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바울 사도가 가리키는 신령한 자들이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영적인 삶을 사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이 손에 잘 안 잡힙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영적인 삶이란 교회 열심히 잘 다니는 것을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리는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말도 아닙니다. 교회를 잘 다녀도 전혀 영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바울 사도는 그것을 지적합니다.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 입장에서 보면 좀 창피한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눈에 고린도 교회는 전혀 영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착각은 자유, 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각하는 것까지 어떻게 말리겠습니까마는 그 착각이 신앙의 성숙을 가로 막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보고 아직도 너희들은 멀었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 증거를 댑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가 아직도 영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증거가 바로 그들 가운데 있는 시기와 분쟁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 중에서 가장 사고뭉치였습니다. 요즘도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교회의 분쟁들, 다툼들, 싸움들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교회가 생겨난 지 2천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교회에 그러한 문제들이 있는 것을 보면 좀 신기합니다. 그만큼 사람이 변하는 것은 힘든 것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면서 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비로서 끝나는 문제들을 우리는 안고 삽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한 쪽은 교회의 창립자인 바울을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했고, 다른 한 쪽은 바울에 이어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했던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했습니다. 그렇게 고린도 교회는 갈라져서 싸웠습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할 교회가 선을 이루어 볼 겨를도 없이, 서로 싸우느라 바빴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가 단호하게 복음의 원리로 훈계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고린도 교회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리다, 미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복음을 받아 들였기는 했지만, 그래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긴 했지만, 아직도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성령이 아니라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바울 사도가 쓰고 있는 단어가 사르크스라는 말인데, 이것의 뜻은 육신또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이렇게 분쟁 가운데 있는 이유는 성령의 뜻 안에 있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죄 된 본성 가운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자꾸 보고, 병 고치는 등의 큰 능력을 행하고, 속세를 떠나는 수도자처럼 사는 삶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런 삶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무당들인데, 그들은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보고, 병도 고치고, 속세를 떠나서 삽니다. 그런 삶을 보고 영적인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주술적인 삶입니다.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환상을 보고, 병을 고치고, 금욕적인 삶이 기독교에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토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적인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그 능력에 우리의 삶을 맡기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있기 때문에, 즉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그리스도인은 점점 성숙해져 갑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성령의 능력에 사로 잡히지 않고 육신에 여전히 속한 사람, 즉 자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신앙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리켜, 젖먹이 또는 어린아이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젖먹이
, 어린아이의 특징은 본능적인 욕구를 따르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양보라든지 희생이라든지 헌신을 모릅니다. 인내하지도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투정부리고 소리지르고 울어버립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딱 이 수준이라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매우 큰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가 무슨 일을 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구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농부의 이미지를 들어서 사용합니다.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서 할 일은 먼저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물을 잘 주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만해도 농사가 나라의 기본 산업이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농사 짓는 것을 볼 수 있었죠. 농번기에 농부는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리느라 바쁩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서 먼저 논이나 밭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소에 쟁기를 매달아 땅을 갈았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되고 난 뒤에는 경운기(일명 딸딸이)가 그 일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논이 밭에 물을 대는 일입니다. 비가 오면 논이나 밭에 물을 잘 대기 위해서 수로를 잘 파놓아야 합니다. 가뭄을 대비해서 저수지 등을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한 여름, 비가 잘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풍성한 결실을 맺으면 처음 열매를 가지고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추석입니다.

 

이렇듯, 바울 사도는 농부의 이미지를 들어서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건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동역자, , 그리고 집입니다.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과 아볼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한 사역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농사 짓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인 농사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밭이 필요합니다. 그 밭이 바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었다는 것이죠. 그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대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씨를 뿌리고 물을 댄다고 해도 씨앗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씨를 뿌리고 물을 줘도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씨앗을 뿌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물을 준 아볼로도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것을 알아야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고 선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큰 일을 했고, 누가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누가 더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인물이고, 이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한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교회가 자라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헌금 많이 해서 교회가 이렇게 자라난 거야, 내가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한 덕분에 교회가 이렇게 자라난 거야, 내가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 덕분에 이렇게 교회가 자라난 거야, 등등 자신이 교회에 기여한 그것 때문에 교회가 자라났다고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더 큰 일을 했는지 겨루고 싸웁니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사역자, 즉 일꾼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8절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한 일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서 한 일은 굉장히 값진 일이고 하나님께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만족해야지 더 나가서 자신이 하나님이 된 양, 자기의 일이 교회를 자라게 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 곤란해 진다는 겁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나, 저 사람이 하는 일이나, 내 눈에 보기에는 달라 보이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열심히 하는 것 같고, 나는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빈둥빈둥 노는 것 같아 보여도 부르심에 따라, 그리고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일을 맡기시고 그것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워 나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인 삶,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고린도 교회 못지 않게, 바로 이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우리 교회에 고린도 교회 같은 분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눈에 보이는 분쟁이 없다고, 우리가 영적인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격려입니다. 그리고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합니다.

 

특별히 교회 성전 봉헌을 앞두고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이때, 절대로 영적인 긴장감을 늦추지 마십시오. 사탄이는 우는 사자처럼 어슬렁거리며 호시탐탐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게 만들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성전 봉헌이 되면 교회가 더 강해지고 더 열심을 내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영역이 줄어들 텐데 사탄이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무한히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과 은총을 무한히 내려주고 계는 것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씨를 뿌리고, 열심히 물 주면 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느라 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해서 이게 무슨 말인지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에 속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면 됩니다. 이것을 알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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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