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7. 09:08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출애굽기 1:1-14)

 

1. 2020년도도 다 못 산 것 같은데, 벌써 2022년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 중 가장 미스터리 한 것은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은데, 그 시간의 양과 질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시간의 본질은 같은 것일 텐데, 그 시간을 받아는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복된 시간을 살고 있기를 소망한다.

 

2.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출애굽기는 ‘베엘레’로 시작하는데, ‘베’는 접속사이다. 즉, 출애굽기는 창세기와 동떨어진 기록이 아니라 이어지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창세기 마지막에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축복이 출애굽기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접속사이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야곱을 통해 아들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어떻게 실현되고 보전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7절).

 

3. 여기까지만 보면, 야곱의 축복은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분위기가 드라마틱하게 전환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8절). 지금은 완전 사막으로 변하여 고대 문명의 문화재를 바탕으로 관광산업을 통해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고대 이집트(애굽)는 매우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는 거대한 강대국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피라미드만 보더라도 고대 이집트 문명이 얼마나 강성하고 풍성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4. 고대 이집트는 한 왕조가 연속적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지금은 정권교체를 할 때 같은 민족, 같은 나라의 어떠한 당이 집권하지만, 고대 이집트 당시에의 정권교체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 나라의 주인으로 등극하곤 했다. 그 정황이 8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이집트에도 극적인 변화가 생겼는데, 완전히 다른 민족이 이집트의 정권을 차지했고, 정권을 차지한 민족과 왕은 ‘요셉’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해서, ‘요셉의 신화’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 민족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5. 자료를 찾아보니까, 2016년도 5월쯤에 발생한 일인데, 그 당시 잘 나가던 어떤 걸그룹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퀴즈를 푸는 중 안중근을 알아맞히지 못해 대중들로부터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젊은 세대가 안중근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에 대한 퀴즈를 맞히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안중근의 신화’라고 하는 집단적 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뭇매를 맞은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국민적 영웅으로 ‘윤리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모르거나, 그에 대하여 합의되지 않은, 즉 비윤리적인 해석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면(가령,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으로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의 신화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풍요롭게 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을 하나로 모아주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한 나라의 윤리적 공공재인 것이다.

 

6. 이처럼, 요셉도 이집트에서 이러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이다. 창세기 41장 이후에 펼쳐지는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활약은 가히 민족적 영웅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요셉의 지혜를 통해 이집트는 가뭄 때문에 망하지 않고 존속했으며, 이집트의 주민들 뿐만 아니라 그 주변 나라들의 주민들까지도 기근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요셉의 신화는 가히 오래오래 사람들의 마음에 머물며 큰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7. 그런데, 그 신화가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안중근을 전혀 모르는 민족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해 보라. 안중근을 전혀 존경하지 않으며 안중근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여도 전혀 감흥이 없거나 영감을 얻지 못하는 민족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라. 안중근의 신화 아래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내 절망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요셉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애굽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요셉의 신화 아래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 어떨지, 눈에 보듯 훤하다.

 

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복을 받았는데, 바로 그 복 때문에 고난 당하게 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게 된다. 7절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인정하다시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복이다. 이스라엘은 비로소 약속의 성취를 맛본 듯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아주 이질적인 왕이 등장했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데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9-10절).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노동의 짐을 지워 괴롭게 하고 고통을 준다.

 

9.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 갑자기 저주로 바뀌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복 주셔서 번성하고 강해졌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고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요셉을 모르니,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이 내리신 복이 그들의 눈에 ‘귀하게’ 다가올 리가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복은 ‘찬양과 영광과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해야 할 두려움과 위협으로 다가온다.

 

10.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신앙은 그 어떤 것보다도 여정이다.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차츰차츰 알아가게 되고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 즉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깊어지고 있는가.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있는가.

 

11. 요셉과 그의 형제들 간에 발생한 일을 보면, 신앙이 무엇인지 좀 더 알게 된다. 요셉은 ‘꿈 꾸는 자’였다. 그 꿈은 요셉 자신의 헛된 꿈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 즉 비전이자 사명이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꿈을 무시하고 비난했다. 급기야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 질투하여 그를 애굽으로 향하던 노예상에게 팔아 넘기기까지 했다. 무슨 뜻인가? 그 당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신앙이 별로 깊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그들은 요셉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지 못했다.

 

12. 결국, 신앙이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는 것이다. 요셉을 노예상에 팔아먹을 때만 해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던 요셉의 형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갔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덕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았던 야곱은 부지런히 자식들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이끌었다. 즉 그들에게 신앙을 주었다(부모의 역할/사랑을 많이 주라. 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려주라.). 세월이 흘러, 요셉과 형제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복을 언급하며 울었을 때,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내리신 복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창세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13. 출애굽기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또는 하나님을 모르는 열방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출애굽’이 무엇인지를 여기에서 배우게 된다. 출애굽이란 어떤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 즉 신앙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상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출애굽이다.

 

14.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지 못해 하나님의 복을 두려워하고 그 복을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해 대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 서지 못한다. 출애굽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또다른 구약성경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불러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보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 설 수 없었다. 발락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가던 발람은 결국 하나님께 이런 음성을 듣는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

 

15.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자는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말에 익숙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더 익숙하고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말은 ‘원복(original blessing)’이다. 신학적으로 말해,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원죄를 넘어서 원복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최초의 축복은 무엇인가? 번성하고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삶을 가로막고 있어 여러분을 두렵게 하거나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거든, 오히려 하나님을 더 힘써 알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신앙이 더 깊어지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더욱더 풍성해지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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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