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3. 2. 8. 05:08

일사천리(一瀉千里): 신속하게 일을 처리함 / 말이나 글이 조금도 거침이 없음

 

중국의 長江(장강:양자강)黃河(황하)는 엄청난 스케일로 유명합니다. 각기 중국을 서에서 동으로 쌍둥이처럼 흐르면서 대륙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두 강은 예부터 시인묵객의 좋은 벗이 되어 명시나 명화에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남송의 학자 진량(陳亮)은 여신유안전찬(與辛幼安殿撰)이라는 글에서 장강의 위용(偉容)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長江大河 一瀉千里 不足多怪也 (장강은 대하이니 일사천리로 흐른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처럼 一瀉千里 본디 장강이 거침없이 천리를 내닫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장강의 흐름처럼 어떤 일을 매우 신속하고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습니다. - '엄산당별집' –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국가반란죄를 뒤집어 씌운 로마당국이나,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운 유대종교지도자들이나 모든 것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처리되기를 바랬습니다. 게다가 절대로 죽은 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죽은 시체를 어서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만 했습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빨리 돌아갑니다. 물론 옛날이 지금보다 모든 것이 훨씬 느리게 돌아갔겠지만 지구의 자전만큼이나 바뀌지 않는 것이 인간 마음의 조급함일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는 것이나, 자신을 높이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무엇인가 분주한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듣고 깨닫기에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일사천리로 진행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진리는 속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빠르게 가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잠깐 멈추어서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로마 당국자는 자신들이 표방하는 팍스 로마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됐던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됐던 하나님의 아들을 오히려 신성모독죄를 씌워 죽였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쳤던 민중들도 자신들의 과도한 구원의 욕망을 멈출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진짜 구원자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멈추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줄 알았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그리고 병들고 배고픈 민중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의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그분의 사랑은 멈추지 않으면 베풀어지지 못하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멈춤의 영성을 기르기 위한 가장 손 쉬운 일 한 가지는 자신의 두 발을 교통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쯤은 걸어보시지요. 무엇이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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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