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시대의 기독교 신앙

ㅡ 미완성된 창조, 진화, 기술적 인간 향상, 그리고 새창조

 

1. 과학기술이 다시 묻게 하는구원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기독교 신앙은 오래된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구원에 관한 질문이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로 죄와 고통과 죽음을 이야기해 왔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고백해 왔다. 그러나 생명과학과 인공지능, 유전자 편집과 재생의학, 노화 연구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질문의 조건이 달라지고 있다. 인간이 기술을 통해 지금까지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한계들을 실제로 극복하기 시작한다면, 기독교가 말해 온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 인간이 죽음을 기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현재의 노화 연구 역시 인간의 수명을 급진적으로 연장하거나 노화를 근본적으로 역전할 수 있다는 확실한 임상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1] 그러나 신학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현재 기술의 성취 수준보다 방향이다. 인간은 죽음을 더 이상 단지 받아들여야 할 운명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개입하고 지연시키며 어쩌면 극복할 수도 있는 문제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기독교 구원론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무엇을구원이라고 불러왔는지를 더 깊이 성찰하도록 만든다. 만일 구원이 단순히죽지 않는 것이라면, 과학기술이 언젠가 죽음을 상당 부분 극복했을 때 기독교의 구원 언어는 기술로 대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과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우리는 무엇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는가?”이다.

 

2. Creation 이후에 New Creation이 필요한가

이 질문은 창조에 대한 기독교의 오래된 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대중적인 기독교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처음에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그 세계가 망가졌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망가진 세계가 마침내 새창조로 회복된다. 이를 단순하게 표현하면완전한 창조타락구속원상회복의 구조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라면 왜 처음부터 완성된 창조를 만들지 않았는가. Creation이 있었는데 다시 New Creation이 필요한가.

 

현대의 진화론적 세계관은 이 질문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인간이 등장하기 수억 년 전부터 생명세계에는 이미 탄생과 경쟁, 포식과 질병, 멸종과 죽음이 존재했다. 따라서 생물학적 죽음을 단순히 인간의 역사적 타락 이후 피조세계에 들어온 현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완전했던 자연이 아담의 죄로 죽음의 세계가 되었다는 설명은 적어도 생물학적 명제로서는 현대 과학과 조화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창조를 완성된 정적 질서가 아니라, 아직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3. 이레네우스와미완성된 창조

이 지점에서 2세기의 교부 이레네우스는 뜻밖에 중요한 신학적 자원을 제공한다. 그는 『이단 논박』 제4 38장에서하나님은 왜 인간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들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직접 다룬다. 그의 대답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갓 창조된 인간이 처음부터 완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성장과 훈련을 통해 성숙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다.[2] 이레네우스에게 피조성은 곧 과정성을 포함한다. 창조된 존재는 처음부터 완성된 신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 안에서 성장하여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물론 이레네우스를 현대 진화론의 선구자로 만드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을 알지 못했고 현대 생물학의 진화 개념을 말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는 창조를완제품의 제작이 아니라완성을 향한 성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 있다. 이 관점에서 새창조는 첫 번째 창조가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만드는 두 번째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과정 속에 있었던 창조가 자신의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는 종말론적 성취다. 따라서 전통적인 도식인완전한 창조타락파괴수리대신창조성장과 진화역사인간의 참여완성으로서의 새창조라는 구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관점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4. 진화하는 창조와 Teilhard de Chardin

현대 우주론과 진화론이 보여 주는 세계는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던 정적인 세계가 아니다. 우주는 변화해 왔고, 별과 행성이 형성되었으며, 지구에서 생명이 출현했고, 생명 가운데 의식이 나타났으며, 의식은 언어와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냈다. 인간도 이 과정 밖에서 갑자기 삽입된 존재가 아니라 오랜 생명의 역사 안에서 출현한 존재다. 이러한 세계관을 기독교 신학과 결합하려 했던 대표적인 사상가가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다.

 

Teilhard는 우주를 완성된 cosmos라기보다 계속 형성되고 있는 cosmogenesis로 이해했다. 진화는 물질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의식으로, 의식에서 더 높은 차원의 통합으로 진행되며, 그는 그 궁극적인 수렴점을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오메가를 우주적 그리스도와 연결했다.[3] 그의 진화론을 현대 진화생물학의 과학적 결론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진화가 필연적으로 더 높은 의식과 통합을 향한다는 강한 목적론은 과학적 합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직관은 여전히 중요하다. 창조는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 있으며, 종말은 창조의 폐기가 아니라 창조가 자신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5. 자연진화에서 기술적 인간 향상으로

인간에게 일어난 결정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진화의 결과인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 의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연선택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다. 의학을 통해 생존 조건을 바꾸고, 교육과 문화를 통해 뇌와 행동을 변화시키며, 유전자 편집을 통해 생명의 코드 자체에 개입하려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인지 능력을 기계와 결합시키고 있으며, 재생의학과 노화 연구는 인간 몸의 한계를 변화시키려 한다. 진화의 산물인 인간이 이제 자신의 진화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Philip Hefner는 이러한 인간을창조된 공동창조자’(created co-creator)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4] 이 표현에서 두 단어는 모두 중요하다. 인간은창조자이기 전에창조된존재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와 생태계, 유전적 조건과 문화적 역사 안에서 출현한 존재다. 그러나 바로 그 자연의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환경과 미래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자유와 능력을 갖게 되었다. ‘created’는 인간의 의존성과 유한성을, ‘co-creator’는 인간의 창조적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created를 잊으면 기술적 프로메테우스주의가 되고, co-creator를 잊으면 인간의 과학기술적 창조성을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 관점은 과학기술을 신앙의 경쟁자로 보는 단순한 사고방식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인간이 질병을 치료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빼앗는 것은 아니다. 항생제, 백신, 심장수술, 장기이식, 보청기와 같은 기술을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명공학이 노화를 치료하고 인간의 건강수명을 획기적으로 연장하는 순간부터 갑자기 그것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가 된다고 말할 근거도 분명하지 않다. 수명을 10년 연장하는 것은 괜찮지만 100년 연장하는 것은 왜 죄가 되는가. 암세포를 제거하는 것은 허용하면서 노화세포를 제거하는 것은 왜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이 되는가. 신학은 단순히 자연적인 것은 선하고 기술적인 것은 위험하다는 이분법에 머물 수 없다.

 

6. 트랜스휴머니즘과기술적 구원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기술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장 과감하게 주장한다. 질병을 제거하고, 인지능력을 향상시키고, 인간의 몸을 개조하며, 급진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일부 극단적인 전망에서는 인간 의식을 비생물학적 매체로 이전하는 것(마인드 업로드)까지 상상한다. 여기에는 분명 종교적 구원론과 유사한 구조가 있다. 현재의 인간은 불완전하며, 과학과 기술을 통해 지금보다 높은 존재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Ted Peters는 이러한 트랜스휴머니즘의 약속을 ‘techno-salvation’이라는 표현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급진적 수명연장(radical life extension)과 사이버네틱 불멸(cybernetic immortality)이 인간에게 사실상 종교적 구원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고 지적한다.[5] 또한 생물학적 향상이나 지능 증폭이 인간을 자동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향상된 인간(enhanced human)이 곧 구원된 인간(redeemed human)은 아니라는 것이다.[6] 이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한 걸음 더 물어볼 필요가 있다. 기술적 구원과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서로 경쟁하는가. 기술을 통한 치유와 생명 연장이 실제로 고통을 감소시키고 인간의 가능성을 확대한다면, 그것 역시 구원의 한 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은가.

 

기독교는 기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너무 성급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기 전에 먼저 기술이 무엇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려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암으로부터의 구원, 치매로부터의 구원, 장애가 만들어내는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조기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은 실제적인 구원이다. 그것을 단지기술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짜 구원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다. 따라서 신학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기술은 구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기술은 무엇을 구원이라고 부르는가?”이다.

 

7. 바울의 새창조: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존재의 변형

이 질문 앞에서 바울의새창조’(καιν κτίσις)는 과학기술 시대에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 17절과 갈라디아서 6 15절에서새창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개념은 개인의 내적 변화,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그리고 종말론적 우주의 갱신이라는 여러 차원을 함께 지닌 것으로 읽을 수 있다.[7] 특히 고린도후서 5장의 문맥은 중요하다. 바울은새창조를 말한 직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새창조와 화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새창조는 단지 인간이 죽지 않게 되는 사건이 아니다. 로마서 8장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피조세계 전체이며, 피조물은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린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지막으로 폐하여질 원수는 사망(죽음)이다. 이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 바울의 구원은죽어서 다른 장소인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공간적 모델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죄와 죽음, 썩어짐과 소외가 지배하던 창조질서가 새로운 생명의 질서로 변형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형이며, 개인의 불멸만이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와 피조세계의 회복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이 암을 치료하고, 노화를 지연시키고, 장애인의 신체적 능력을 확장하며, 인간의 지식과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피조세계의 파괴를 줄인다면 이러한 행위들을 새창조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생명의 연장도, 지능의 향상도, 죽음의 극복도 새창조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인간과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느냐이다. 새창조란 기술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죽음과 악과 지배가 더 이상 생명을 규정하지 못하는 세계다.

 

8. 새창조인가, 옛창조의 증폭인가

미래에 인간이 노화를 극복해 500년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만으로 새창조가 온 것은 아니다. 만일 부유한 사람들만 생명 연장 기술에 접근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일찍 죽어야 한다면, 기술은 죽음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것이다. 독재자가 수백 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이 몇 세기 동안 자본을 세습하며,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을 소유한 극소수의 사람들이 다른 인간의 삶을 통제하게 된다면, 인간의 수명이 늘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를 수 없다. 죽지 않는 인간이 반드시 새로운 인간은 아니며, 오래 사는 인간이 반드시 선한 인간도 아니다. 악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기술은 악의 제거가 아니라 악의 불멸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기술에 대한 신학적 질문은자연적인가 인공적인가가 아니라이 기술이 생명을 향하는가 죽음을 향하는가여야 한다. 향상된 능력은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 연장된 생명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증폭된 지능은 누구의 자유를 확대하는가, 새로운 기술은 권력을 분산하는가 집중시키는가를 물어야 한다. 기술은 인간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말해 줄 수 있지만, 무엇을 위해 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해 주지 못한다. , 기술은 기술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를 말해 줄 수 있지만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를 말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술적 진보와 종말론적 진보는 같은 것이 아니다. 기술은 새창조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옛창조의 욕망과 지배를 더욱 강력하게 증폭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비판적 기준은 분명해진다. 새로움 자체는 구원이 아니다. 더 강한 인간, 더 지능적인 인간, 더 오래 사는 인간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새창조가 아니다. 바울 신학의 관점에서 새창조의 기준은 생명과 화해다. 죽음의 권세가 약화되고, 생명을 파괴하는 관계가 회복되며, 배제되었던 존재가 공동체에 참여하고, 피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세계가 움직이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New Creation이 아니라 옛창조의 증폭’(Old Creation amplified)일 뿐이다.

 

9. 과학기술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쓸모

이레네우스, Teilhard, Hefner, 그리고 바울은 서로 다른 시대의 사상가들이지만 하나의 흥미로운 사유의 궤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레네우스는 인간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성숙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현대의 진화론은 생명의 역사가 실제로 변화와 출현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Teilhard는 이 진화적 세계를 신학적으로 받아들여 우주가 미래의 완성을 향해 열려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Hefner는 진화의 산물인 인간이 이제창조된 공동창조자로서 자신의 미래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울의 새창조는 그 미래가 단순한 능력의 증대가 아니라 생명과 화해의 완성이어야 한다는 종말론적 지평을 제공한다.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표현하면미완성된 창조진화하는 창조창조에 참여하는 인간기술적 인간 향상새창조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 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쓸모는 과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기적적으로 대신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질병은 의학이 치료하도록 해야 하고, 우주의 기원은 물리학이 연구하도록 해야 하며, 인간의 뇌는 신경과학이 탐구하도록 해야 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빈 공간에 하나님을 집어넣는틈새의 하나님은 과학이 발전할수록 설 자리를 잃는다. 오히려 과학이 성공할수록 신앙은 다른 차원의 질문을 더 분명히 담당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더 오래 살아야 하는가. 왜 더 똑똑해져야 하는가. 강해진 능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인간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만들고 있는 미래는 누구에게 좋은 미래인가.

 

과학기술이무엇이 가능한가를 묻는다면 신앙은무엇이 바람직한가를 묻는다. 기술이 인간에게 새로운 능력을 준다면 신학은 그 능력이 지향해야 할 목적, telos를 묻는다. 따라서 과학기술 시대의 기독교는 과거를 지키는 종교가 아니라 미래를 분별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인간이 지금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이 알고, 더 강력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다만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 더 오래 사는 인간이 더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가. 더 똑똑한 인간이 더 지혜로운 인간이 되는가. 더 강한 인간이 더 많은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가. 그리고 죽음을 정복한 세계가 정말 생명을 사랑하는 세계가 되는가.

 

그 질문에 대한 기독교의 오래된 이름이새창조. 새창조란 인간이 기술 이전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세계가 아니며, 기술이 사라진 세계도 아니다. 인간과 피조세계의 가능성이 더 풍성하게 열리면서도 그 가능성이 지배와 배제와 폭력으로 귀결되지 않는 세계, 질병과 고통과 죽음의 권세가 약화되면서도 그 혜택이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는 세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가 새롭게 되는 세계다.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인간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과학기술은 인간이 그 미완성의 미래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식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미래는 정말새로운창조인가.



[1] S. Jay Olshansky et al., “Implausibility of Radical Life Extension in Humans in the Twenty-First Century,” Nature Aging 4 (2024): 1635–1642, https://doi.org/10.1038/s43587-024-00702-3; “Anti-aging Interventions Need Less Hype and More Clinical Evidence,” Nature Medicine 32 (2026): 2693, https://doi.org/10.1038/s41591-026-04611-3. 전자는 현재의 인구학적 추세만으로는 급진적인 인간 수명 연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분석하며, 후자는 현재 인간에게 적용되는 항노화 치료의 임상적 유효성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여전히 제한적임을 지적한다.

[2] Irenaeus, Against Heresies 4.38.1–4.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들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갓 창조된 인간이 아직 그 완전을 받아들일 수 없는유아적존재였다고 설명한다. 그의 인간론에서 인간의 완성은 창조의 출발점이라기보다 성장의 목표에 가깝다.

[3] Pierre Teilhard de Chardin, The Phenomenon of Man, trans. Bernard Wall (New York: Harper, 1959); revised translation, The Human Phenomenon, trans. Sarah Appleton-Weber (Brighton: Sussex Academic Press, 1999). 특히 Teilhard에게 진화는 물질에서 생명, 생명에서 의식, 그리고 더 높은 통합으로 전개되는 우주적 과정이며, 그 궁극적인 수렴점을 Omega로 이해한다. 다만 이러한 목적론적 진화 이해를 현대 진화생물학의 합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4] Philip Hefner, The Human Factor: Evolution, Culture, and Religio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32, 255–277. Hefner는 인간을 “created co-creator”로 규정하면서, 인간이 진화와 자연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그의 개념에서 ‘created’는 인간의 의존성과 유한성을, ‘co-creator’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5] Ted Peters, “Radical Life Extension, Cybernetic Immortality, and Techno-Salvation. Really?” Dialog 57, no. 4 (2018): 250–256, https://doi.org/10.1111/dial.12432. Peters는 신체의 급진적 수명 연장과 의식의 디지털적 지속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적 전망이 기술적 구원의 약속으로 기능한다고 분석한다.

[6] Ted Peters, “Imago Dei, DNA, and the Transhuman Way,” Theology and Science 16, no. 3 (2018): 353–362, https://doi.org/10.1080/14746700.2018.1488529. Peters는 특히 미래로부터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proleptic’ 하나님의 형상론과 Hefner created co-creator 개념이 기술적 인간 변형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biological enhancement intelligence amplification 자체가 죄인을 성자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견해는 기술적 변형과 구원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비판적 기준을 제공한다.

[7] 바울의새창조에 관한 대표적 연구로 Moyer V. Hubbard, New Creation in Paul’s Letters and Though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Mark D. Owens, As It Was in the Beginning: An Intertextual Analysis of New Creation in Galatians, 2 Corinthians, and Ephesians (Cambridge: James Clarke & Co., 2016)를 참조하라. Hubbard는 특히 인간론적 변형의 측면을 강조하며, Owens는 바울의 새 창조를 인간론적/우주론적/교회론적 차원이 결합된 개념으로 해석한다. 바울에게 창조와 언약이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로 이어진다는 보다 넓은 틀에 대해서는 N. T. Wright의 바울 해석도 참고할 수 있다.

 

Posted by 장준식

책임의 인간론

ㅡ 기후변화와 AI의 조우

 

네팔-티베트 홍수 사건(2026년 8월 26일 발생)은 단순한 자연재해 사건이 아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는 끔찍한 자연재해로만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 사건은 기후변화와 깊이 연결된 재난이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인류는 끊임없이 같은 자연재해의 반복으로 인해 끝이 없는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9월 1일자 가디언에 기고된 저명한 기후학자 마이클 만(Michael Mann)의 글에 따르면, 네팔-티베트 홍수 사건은 이번 여름 내내 지구가 보내고 있던 경고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는 기후 귀속과학(attribution science)을 설명하며, 이제는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후 귀속과학은 특정 재난이 기후변화 때문에 ‘발생했는가’를 단순히 묻기보다, 인간이 초래한 지구온난화가 그 재난의 발생 가능성과 강도를 얼마나 높였는지를 분석하는 과학이다. 기후 귀속과학의 발전으로 이제 우리는 개별 재난과 기후변화의 관계를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확률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클 만에 의하면, 기후변화는 재난을 무에서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위험을 더 위험한 쪽으로 기울인다고 말한다. 마이클 만은 독자들에게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몰라서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기후행동을 보이라고 촉구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가장 두려운 요소를 설명하는 용어가 있다. ‘복합·연쇄 위험(compound and cascading risks)’이라는 용어다. 빙하 붕괴와 수력발전, 산불과 홍수, 폭염과 가뭄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하나의 재난을 크게 만드는 것뿐 아니라 서로 다른 위험들을 연결하는 시스템적 위험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우리를 더 두렵게 하는 것은 기후 재난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재해를 극복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재난이 연속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 국가에 실질적인 부담을 안겨준다. 국가 경제에 손실을 일으키고, 무엇보다 취약한 계층에 피해가 집중되면서 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폭동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자연의 불안정성이 사회의 불안정성으로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선진국들은 이러한 기후위기와 동시에 AI 경쟁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에서 열리고 있는 G20 기술장관 회의에서 미국 정부는 각국에 AI 규제를 최소화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른바 “Carolina Principles”를 제시하며 새로운 규제기관 신설을 피하고, 기존 규제로 해결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에만 추가 규제를 적용하며, AI 기초연구와 민간투자를 장려하자는 내용이다. 이에 반해 캐나다 등 일부 국가는 혁신과 함께 사회적 신뢰(public trust)와 안전(safety)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 AI 질서가 기술 경쟁만이 아니라 규제 철학의 경쟁으로 들어가고 있다.

 

AI 담론이 규제 철학의 경쟁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AI가 일을 수행하기 시작하자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해킹하면 누가 책임지는가. AI가 일을 빨리 하면 그 경제적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AI가 글을 쓰면 저자는 누구인가. AI 규칙은 국가가 정하는가, 기업이 정하는가. 이러한 실질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Morgan Stanley, Citigroup, Goldman Sachs 등 대형 금융기관들이 주요 로펌에 AI로 얻은 효율성만큼 법률비용을 낮추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법률 리서치와 문서 검토 같은 업무가 AI로 빨라지고 있는데도 기존의 시간당 청구제도(billable hour)가 유지되면서 고객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AI가 일자리를 없애느냐보다 더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일의 가격”이 바뀌는 것이다. 예전에는 시간이 곧 가치였다. 하지만 AI가 10시간 걸리던 일을 1시간에 수행하면, 시간당 보수를 기반으로 한 전문직의 경제 모델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진보가 새로운 능력을 만드는 동시에 책임의 위치를 다시 그리게 하고 있다.

 

AI 시대의 위기는 인간이 필요 없어지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책임을 회피하기 쉬워지는 데 있다. “AI가 그렇게 판단했다”, “알고리즘이 그렇게 추천했다”는 말은 앞으로 책임을 피하는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AI 시대의 인간론은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책임질 수 있는 존재,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다시 정의하는 방향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임의 인간론에서 AI와 기후변화가 만난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만든 세계에 대해 책임질 것을 요구하고, AI 시대는 우리가 만든 기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두 시대적 변화가 동시에 인간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네가 만들어낸 세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

승리 신학의 해체

ㅡ 내가 역대기 신학을 좋아하는 이유

 

나는 역대기 신학을 좋아한다. 역대기는 망한 나라의 역사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왕조가 끊긴 뒤에 쓰인 역사다. 그래서 역대기가 붙들고 있는 질문은 절박하다. “우리는 왜 망했는가?”라는 질문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렇게 망한 뒤에 우리는 어떻게 다시 함께 살아갈 것인가?”

 

역대기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역대기는 과거의 영광을 복원하려는 복고주의 문서가 아니다.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해 기억을 재구성하는 책이다. 그래서 족보를 통해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고, 변방의 지파들을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불러들이고, 예배를 복원하고,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아래 모으려고 한다.

 

보통 역대기 하면 족보와 야베스의 기도,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 이야기,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떠올린다. 모두 중요한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역대기 신학의 백미는 역대하 28장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선지자 오뎃(Oded)의 이야기’다.

 

아하스 시대였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였다. 북이스라엘이 크게 승리했다. 유다 군사 12만 명이 죽고,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2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북이스라엘 군대는 승리의 전리품과 포로들을 끌고 사마리아로 돌아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선지자 오뎃이 길을 막아선다. 그의 말은 놀랍다. “너희가 이긴 것은 너희가 의로워서가 아니다.”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기셨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분노를 폭발시키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러면서 오뎃은 승리한 사람들에게 묻는다. “너희에게도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이것이 역대기가 보여준 승리 신학의 해체이다.

 

고대 세계에서 승리는 곧 신의 승인으로 읽히기 쉬웠다. 우리가 이겼다는 것은 우리 신이 더 강하다는 뜻이고, 따라서 우리가 옳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역대기는 승리와 정의 사이에 칼을 꽂는다. 승리했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사용되었다고 의로운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내가 자동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승리는 하나의 사실일 뿐, 의로움의 증명서가 아니다.

 

이 통찰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하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카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 근본적인 구별을 ‘친구와 적’의 구별이라고 보았다. 정치 공동체는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우리의 적인지를 구별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구별이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은 단순히 의견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이 된다.

 

오뎃은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한다. 북이스라엘의 눈에는 유다 사람들이 적이었다. 전쟁에서 패한 포로였고, 이제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오뎃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이름을 돌려준다. “그들은 너희 형제다.” 이 한마디가 중요하다. 선지자는 적을 없애는 사람이 아니라 적이라는 이름을 해체하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빼앗지 않는다. “그가 잘못했다”와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 사이에 선을 긋는다.

 

역대기가 기록된 포로기 이후의 역사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 메시지는 더욱 놀랍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공동체는 “누가 진짜 이스라엘인가”라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는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경계 설정이 나타난다. 이방인과의 혼인을 끊고, 공동체의 안과 밖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런데 역대기는 조금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역대기의 이스라엘』에서 윌리엄슨(H. G. M Williamson)은 역대기가 당시 일부 귀환 공동체의 지나치게 배타적인 태도에 맞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는 비전을 제시했다고 본다. 역대기는 북이스라엘의 잘못을 비판하지만 북쪽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에서 영원히 삭제하지 않는다. 오뎃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장면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유다 왕 아하스가 아니라 북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에브라임의 지도자들이 군대를 막아선다. 군인들은 포로와 전리품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포로들에게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먹이고, 마시게 하고, 상처에 기름을 바른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나귀에 태운다. 그리고 여리고까지 데려가 그들의 형제에게 돌려보낸다. 얼마 전까지 전리품이었던 것이 옷이 된다. 적군이 형제가 된다. 포로 행렬이 귀향 행렬로 바뀐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벗겼으면 입혀주고, 빼앗았으면 돌려주고, 상처 입혔으면 싸매주고, 쓰러뜨렸으면 일으켜주는 것이다. 역대기의 회개는 관계의 복원이다.

 

우리 시대의 정치가 특별히 귀담아들어야 할 말씀이다. 오늘의 정치는 너무 쉽게 적을 만든다. 상대 진영은 경쟁자가 아니라 악이 되고, 정치적 반대자는 함께 살아가야 할 시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된다. 정치 지도자는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생산한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방을 악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 정치의 문법을 너무 쉽게 배웠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복음을 전하기보다 적을 규정하는 데 더 익숙해졌다. 누구를 반대하는지가 신앙의 정체성이 되고, 누구를 미워하는지가 신앙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방식이 되었다.

 

오뎃은 그런 우리 앞에 서서 말한다. “그들은 너희 형제다.” 이 말은 모든 차이를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오뎃은 북이스라엘의 죄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러나 비판하면서도 형제라는 이름을 빼앗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하다.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형제라는 이름을 빼앗지 않는 것! 나는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정치적 덕목이자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역대기는 패배한 공동체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를 가르치는 책이다. 그 방법은 적을 더 많이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이름을 다시 부르고, 예배를 다시 세우고, 갈라진 사람에게 다시 형제라는 이름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역대기 신학을 좋아한다. 승리보다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순수성보다 회복을 꿈꾸며, 과거의 잘못 때문에 사람을 영원히 삭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어 놓은 경계보다 넓게 일하신다는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승리자가 너무 많고 형제가 너무 적다. 모두가 이기려고 한다. 정치도 이기려고 하고, 교회도 이기려고 하고, 개인도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함께 사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다. 역대기는 묻는다. 승리한 뒤에 무엇이 남았는가. 적의 시체만 남았다면 그것이 정말 승리인가. 상대방을 침묵시킨 뒤 공동체까지 무너졌다면 누가 이긴 것인가.

 

북이스라엘의 진짜 승리는 유다 군대를 무너뜨렸을 때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 힘을 스스로 멈추고, 포로에게 옷을 입히고, 그들을 다시 형제라고 부르며 집으로 돌려보냈을 때 비로소 일어났다. 적을 이기는 것보다 더 위대한 승리가 있다. 적을 다시 형제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대기 신학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신학이다. 교회가 역대기의 신학을 적극 수용하여 승리 신학을 해체하고 적을 형제로 다시 인식하도록 도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Re: 역대기를 읽다』를 읽고

 

재밌게 읽었다. 마침 [역대기] 말씀으로 새벽기도회 설교를 하고 있어 유용했다. 저자가 나한테 ‘부족한 책’이라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아니, 이렇게 훌륭한 책을 세상에 내어놓다니, 기쁘고 감사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 “역대기는 끝까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세우는 말씀”인데, 저자의 겸손함을 주님께서 기뻐 받으신 듯하다. 덕분에 한국교회의 역대기 이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 같다.

 

책의 구성은 역대기 (신학)을 이해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역대기가 어떤 책인지 개괄적인 설명으로 시작해, 역대기의 설계도를 통해 역대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자세히 보여준다. 이 책의 압권은 ‘역대기의 히브리어’에서 시작되는데, ‘다라쉬’와 ‘마알’이 역대기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또한 저자는 역대기 안에서 다윗과 솔로몬의 평가가 열왕기에서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며, 역대기 신학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특별히 다윗의 예배 혁명과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해석, 그리고 성전 건축 이야기는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동안 상식적으로 알던 것을 교정해 줄 뿐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게 갖도록 도와준다. 마지막 장, 역대기의 개혁 프로그램은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레위인들을 향한 히스기야의 사랑과 열왕기와는 다른 결을 지닌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는 예배와 교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레위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내어놓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이중직 이슈와 담임목사 중심의 교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담론은 한국 교회 공동체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커버 투 커버 밑줄을 쳐 가며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2장 ‘역대기의 설계도’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 다시 생각하기’였다. 기존의 야베스 기도 해석은 매우 기복주의적으로 느껴지지만, 이 책에서 재해석한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신앙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주일에 설교를 했는데, 이 책의 해석에 힘입어 야베스의 기도가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창조적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그 설교문은 아래 글 '야베스처럼 기도하기'에 있다.)

 

올 들어 새벽기도회 때 역대기 설교를 해 오고 있는데, 현재 31번째 역대기 설교를 마쳤다. 역대기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열왕기에 비해 관점이 독특해서 해석을 잘해야 한다. 역대기는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중요한지 지혜를 전달해 주고 있다. 그 중심에는 성전과 율법이 있다. 『Re: 역대기를 읽다』는 역대기 신학이 왜 성전과 율법이 공동체 재건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를 차근차근 알려주는 좋은 안내서이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면, 우리 시대의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적지 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교회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양서이다.

 

 

Posted by 장준식

[사랑이 만든 도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여러모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떠올리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두 도성을 이야기한다. 한 도성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도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만들어진다. 자기 사랑의 도시와 질서 잡힌 사랑의 도시라고 표현해도 좋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올바른 사랑을 ‘카리타스’(caritas)라고 불렀고, 사랑이 제자리를 찾은 상태를 ‘사랑의 질서’(ordo amoris)라고 생각했다. 결국 어떤 사랑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도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에서 선택한 두 도시는 런던과 파리다. 그러나 디킨스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두 도시의 지리적 차이가 아니다. 그는 산업화와 계급격차로 요동치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살아가면서, 반세기 앞서 유럽을 뒤흔들었던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만으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최고의 시대였고 최악의 시대였다. 디킨스는 처음부터 세계의 이중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도식으로 만들면 이렇다.

 

런던 / 파리

귀족 / 민중[

억압 / 혁명

생명 / 죽음

증오 / 사랑

복수 / 용서

시드니 카턴 / 마담 드파르주

 

1789년 이후 유럽은 혁명의 충격 속에서 요동쳤다. 왕정과 귀족의 특권은 거듭 도전받았고, 공화정과 왕정, 혁명과 반동이 반복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유럽의 정치적 상상력을 바꾸었다면,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은 그 혁명의 의미를 다시 묻게 했다. 디킨스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문학적으로 바라보았다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을 통해 근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분석했다.

 

디킨스가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견한 것은 혁명의 윤리적 비극이었다. 귀족사회의 오랜 억압과 폭력이 민중의 분노를 낳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억압받던 사람들이 권력을 손에 넣자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정의를 향한 분노는 복수의 열정으로 변해 갔다. 혁명은 낡은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바로 여기에서 디킨스의 질문이 시작된다. 무엇이 폭력의 도시를 생명의 도시로 바꿀 수 있는가.

 

찰스 디킨스가 자녀들에게 예수의 생애를 들려주기 위해 쓴 『예수의 생애』(The Life of Our Lord)가 보여주듯이, 그의 기독교적 상상력은 교리적 논쟁보다 예수의 사랑과 자비, 용서와 자기희생에 무게를 두었다. 디킨스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느냐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였다. 『두 도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도 바로 이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시드니 카턴이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구현된다.

 

카턴의 죽음은 디킨스가 제시하는 혁명의 윤리적 대안으로 읽을 수 있다. 소설 속 공포정치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복수의 논리로 치닫는다면, 카턴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내가 죽음으로 네가 산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다. 두 죽음이 있다. 죽여서 세상을 바꾸려는 죽음이 있고,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죽음이 있다. 디킨스가 믿었던 진짜 혁명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가.

 

AI의 출현과 함께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시를 꿈꾸고 있다. 더 편리한 도시, 더 효율적인 도시, 더 생산적인 도시, 무엇보다 더 ‘스마트한’ 도시다.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들은 사활을 걸고 AI 기술에 투자한다. 정부는 국가 경쟁력을 이유로 산업을 지원하고, 기업들은 경쟁하면서도 거대한 인프라를 함께 구축하며, 투자자들은 장밋빛 미래를 바라보며 돈을 쏟아붓는다. 서로의 목적은 다르지만 모두 거대한 AI 도시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디킨스라면 빛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도시의 찬란한 불빛 뒤에 가려진 사람들을 먼저 보았던 작가다.

 

AI가 작동하려면 서버가 필요하고, 서버를 돌리려면 거대한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데이터센터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고, 냉각을 위한 물과 토지, 송전망과 발전시설도 필요하다. 그래서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지역에서는 전력망의 부담과 전기요금, 물 사용, 소음과 환경문제, 토지 이용을 둘러싼 갈등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AI가 만들어내는 편리함은 전 세계로 흩어지지만, 그 편리함을 생산하기 위한 비용은 특정한 지역과 사람들의 삶 위에 집중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이 돌아온다. 이 도시는 어떤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기술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발전을 꿈꾸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사랑의 질서다. 기술을 인간보다 더 사랑하고, 효율을 공동체보다 더 사랑하고, 성장과 이윤을 누군가의 삶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사랑은 질서를 잃는다. 아무리 스마트한 도시를 건설해도 그 도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자기 사랑의 도시가 될 수 있다.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얼마나 똑똑한 기술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해 이 기술을 만드는가. 그 혜택은 누가 누리고, 그 비용은 누가 치르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희생하면서까지 이 도시를 건설하려 하는가.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를 보여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사랑이 두 도성을 만든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 앞에도 두 도시가 놓여 있다. 인간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도시와, 기술을 더 빨리 발전시키기 위해 인간을 비용으로 처리하는 도시. 우리는 어느 도시를 건설할 것인가. 도시는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 모양을 닮아갈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6. 8. 21. 07:04

[생명]

 

생명이

 

지고 있다

꺼져가고 있다

사그라들고 있다

 

생명 바깥은 벽

 

창문을 열어도

문을 열어도

 

 

생명 안에

갇혀버렸다

 

바깥으로 나갈 궁리를 한다

 

죽으면

나갈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벌써 하늘에는

달빛이 일렁인다

 

배가 고프다

 

밥 냄새가 난다

 

나는 왜

 

곡기를

끊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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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6. 8. 16. 11:39

야베스처럼 기도하기

(역대상 4:9-10)

 

핵심 메시지

야베스처럼 기도한다는 것은 고통 없는 인생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에 새겨진 고통이 나의 운명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이 나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1. 도입: 우리의 이름이 우리의 운명일 필요는 없습니다

ㅡ 역대상 4장은 족보입니다. 이름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9절에서 갑자기 족보가 멈추고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ㅡ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대비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에게 붙여 준 이름: 야베스
성경이 그에게 내려 주는 평가: 존귀한 사람

ㅡ 어머니는 그를 낳으면서 겪은 고통 때문에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본문의 히브리어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ㅡ PPT 1: 야베스와 고통

고통 / 슬픔

עֹצֶב

ʿōev — 오체브

자음:

עצב

아인 — 차데 — 베트

 

그런데 야베스는,

יַעְבֵּץ

yaʿbēṣ야베스

핵심 자음:

עבצ

아인 — 베트 — 차데

צב

고통’의 마지막 두 자음이 뒤집혀 있습니다.

 

ㅡ 야베스라는 이름에는 ‘고통’(오체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고통’(오체브)이라는 단어의 자음이 야베스의 이름 속에서 뒤집혀 있습니다.

ㅡ 이것을 문자 그대로 “어머니가 일부러 자음을 뒤집어 이름을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어머니가 지은 이름이라면, 그 어머니는 매우 지혜로운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ㅡ 아무튼, 역대기 기자가 분명히 두 단어를 연결해 언어유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음의 뒤집힘을 야베스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미지로 읽어보고 싶습니다. 고통이 뒤집혔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의 인생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ㅡ “너는 고통이야.” 어쩌면 이것은 어머니가 붙여 주신 이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를 낳을 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몰라!” 아마도, 야베스의 어머니는 분만할 때 죽다 살아났던 모양입니다.

ㅡ 그런데 하나님과 성경은 그에게 또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נִכְבָּד니크바드 — ‘존귀한 사람.’

ㅡ 사람들은 우리의 과거를 보고 우리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실패한 사람, 부족한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 어려운 집에서 태어난 사람, 상처 많은 사람….

ㅡ 그러나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는가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이 우리의 운명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ㅡ 야베스는 자기 이름 속에 새겨진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2. 야베스는 자기 운명을 하나님께 가지고 갔습니다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וַיִּקְרָא יַעְבֵּץ

wayyiqrāʾ yaʿbēṣ 와이크라 야베츠

야베스가 불렀다.” ‘아뢰어 이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입니다.

קרא(qārāʾ/카라)는 ‘부르다, 이름을 부르다, 호소하다’라는 말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을 붙들고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우리 집안은 원래 이래.” “내 인생은 여기까지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ㅡ 그리고 세 가지 큰 내용으로 기도합니다. 야베스가 드린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ㅡ PPT 2: 야베스의 세 가지 기도

1. 나를 복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2. 주님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소서.

3. 악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고통이 생기지 않게 하소서.

ㅡ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기도만 떼어 읽지 않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오랫동안 성공과 번영을 위한 기도처럼 소비된 이유는 첫 번째 문장, “나에게 복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ㅡ 그러나 야베스는 지경만 넓혀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경이 넓어질수록 하나님의 손이 필요하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 지경이 넓어지더라도 악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ㅡ 이것이 중요합니다. 영향력이 커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커진 영향력이 누구에게도 고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3. “나를 고통에서 지켜 주소서”에서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로

ㅡ 10절 마지막 부분의 히브리어입니다.

PPT 3: 문제가 되는 마지막 문장

לְבִלְתִּי עָצְבִּי

ləviltî ʿābî (러빌티 아츠비)

עצב — 고통스럽게 하다, 슬프게 하다
עָצְבִּי — 부정사 연계형 + 1인칭 접미사

여기에서 1인칭 접미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집니다.

ㅡ 해석 ① 목적어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게 하소서.”

나 = 고통을 받는 사람

KJV: “that it may not grieve me”

NASB·NET 등도 이 방향입니다.

ㅡ 해석 ② 의미상 주어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하소서.”

나 = 고통을 일으키는 사람

NKJV: “that I may not cause pain”

 

PPT 4: 한눈에 보여주기

  1인칭의 역할 의미
목적어 고통이 나에게 “내가 고통받지 않게 하소서”
주어 고통이 나에게서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

 

고통이 나에게 오지 않게 하소서”에서
“고통이 나에게서 나가지 않게 하소서”로 해석이 가능하다.

ㅡ 저는 이것이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우리의 기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ㅡ 처음에는 누구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아프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 아이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 가정에 문제가 없게 해 주십시오.”

당연한 기도입니다. 야베스도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ㅡ 그런데 신앙이 조금 더 깊어지면 새로운 기도가 생깁니다. 하나님,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의 욕심 때문에 가족이 아프지 않게 하시고, 나의 말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지 않게 하시고, 나의 성공 때문에 누군가 짓밟히지 않게 하시고, 나의 편리함 때문에 다른 생명이 고통받지 않게 하시고….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를 오늘 우리가 새롭게 드리는 방식입니다.

 

4.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 — 세 관계를 돌아보는 기도

하나님과의 관계

ㅡ 이 단어가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야베스의 ‘고통’과 같은 어근 עצב(오체브)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할 때도 사용됩니다.

ㅡ 시편 78편 40절은 광야의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슬프시게 하다’가 바로 같은 עצב (오체브) 어근입니다.

ㅡ 이사야 63장 10절도 말합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그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역시 같은 עצב(오체브) 어근입니다.

ㅡ 그러므로 역대기의 역사 전체를 알고 있는 회중에게 이 기도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프게 했습니다.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고, 정의를 버리고,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ㅡ 그래서 포로기 이후 역대기를 읽는 공동체(역대기는 포로기 이후 씌어진 성경)가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우리가 주님을 아프게 하는 백성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ㅡ 두 번째는 이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고통받지 않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결국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사람.

ㅡ 얼마나 많은 고통이 거대한 악이 아니라 작은 자기중심성에서 발생합니까.

무심한 말 한마디,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 나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용하는 태도, 공동체는 어떻게 되든 내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는 무관심.

ㅡ 고통은 악한 사람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도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ㅡ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고통에서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를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인생이 되지 말게 하소서!)

 

지구와 자연과의 관계

ㅡ 그리고 오늘 우리는 야베스의 기도를 한 걸음 더 넓혀야 합니다. 지구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행성적 사고 / 기후위기 시대의 사고방식)

ㅡ 여기에서 야베스의 첫 번째 기도와 마지막 기도가 놀랍게 연결됩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인간은 실제로 끊임없이 지경을 넓혀 왔습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은 땅을 사용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더 멀리 이동하고, 더 편리하게 살았습니다. 우리의 ‘지경’은 엄청나게 넓어졌습니다.

ㅡ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악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고통이 생기지 않게 하소서.” 이 두 문장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라는 기도가 아래와 같이 확장될 것입니다.

 

PPT 5 — 우리 시대의 야베스의 기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그러나,

나의 넓어짐이
누군가의 좁아짐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의 풍요가
다른 생명의 고통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의 편리함이
지구의 신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오늘의 우리의 행복이
미래 세대의 재난이 되지 않게 하소서.

 

5. 맺음말

ㅡ 야베스의 이야기는 두 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절 안에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에게 붙은 이름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에게 붙여 준 이름은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ㅡ 그 둘 사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기도가 있었습니다.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가는 기도.

ㅡ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기도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드리고 싶습니다.

 

PPT 6: 오늘 우리의 야베스의 기도

 

주님, 나를 복되게 하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그러나 나의 욕망의 지경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주님의 손이 나와 함께하시고,
악에서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고통받지 않게 하시고,
또한 나 때문에
하나님이 아프지 않게 하시며,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하시며,
이 땅과 모든 생명이 아프지 않게 하소서.

 

ㅡ 야베스처럼 기도한다는 것은 고통이 없는 인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고통이 나에게서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가 또 다른 사람에게로 가지 않게 하소서.
인간의 욕망이 지구의 상처가 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근심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나를 복되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인해 누군가 아프지 않게 하소서.”

 

ㅡ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야베스에게 배우고 싶은 기도입니다.

 

 

[설교 마침 기도문]

 

주님,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그러나 우리의 욕망의 지경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악에서 우리를 지켜 주소서.

우리가 고통받지 않게 하시고,

또한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아프지 않게 하시며,

이웃이 아프지 않게 하시며,

이 땅과 모든 생명이 아프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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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예배자를 소비자에서 비평가로 바꾸는 교회]

ㅡ 브레히트 사망 70주년을 맞아

 

20세기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연극이 관객에게 너무 친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객이 극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 등장인물과 함께 울고 웃고, 마지막에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고 극장을 떠나는 전통적 연극을 의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비극의 중요한 기능으로 여겨졌던 ‘카타르시스’가 오히려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노동자가 비참하게 죽는 연극을 보았다고 하자. 관객은 그의 고통에 감정이입하고 눈물을 흘린다. “참 불쌍한 인생이구나.” 그렇게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마음 한켠이 후련해진다. 문제는 극장 밖의 세상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가난하고, 착취를 만들어낸 구조 역시 그대로다. 관객의 감정은 변화했지만 현실은 변화하지 않았다. 브레히트가 경계한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런 ‘예술을 통한 현실과의 화해’였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관객이 연극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거리를 만들어냈다. 배우가 갑자기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장면 중간에 노래를 삽입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자막으로 알려주기도 했다. 무대장치와 조명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노출하기도 했다. 관객이 계속해서 “나는 지금 연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한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것을 ‘낯설게 하기’, 곧 소격효과(疏隔效果, Verfremdungseffekt)라고 불렀다. 영어로는 ‘Alienation Effect’ 또는 ‘Distancing Effect’로 번역한다. 우리말로 쉽게 옮기면 ‘거리두기 효과’ 정도가 될 것이다.

 

그 목적은 관객을 냉담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현실을 다시 낯설게 보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왜 저 사람은 가난한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정말 다른 삶은 불가능한가?” 브레히트에게 좋은 연극은 관객을 울리는 데서 끝나는 연극이 아니라 관객에게 질문을 남기는 연극이었다. 관객을 소비자에서 비평가로 바꾸는 연극이었다.

 

나는 때때로 브레히트의 연극론을 떠올리며 오늘날 교회의 예배를 생각한다. 우리가 예배에서 행하고 있는 일이 브레히트가 경계했던 연극과 너무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의 많은 예배는 사람을 몰입시키는 데 탁월하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분위기를 만들고, 감동적인 간증과 설교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울고, 위로받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괜찮다. 다시 힘내자.” 그렇게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어 교회 문을 나선다.

 

물론 위로는 필요하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절망한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복음의 중요한 사역이다. 지친 사람이 예배당 한쪽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울다가 돌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 예배는 이미 제 몫을 다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문제가 생긴다. 예배 전에도 가난한 사람은 가난했고 예배 후에도 가난하다. 불의한 노동구조도 그대로이고, 차별받는 사람의 현실도 그대로이며, 사회의 폭력과 탐욕도 그대로다. 심지어 예배를 드린 나 자신의 욕망과 편견, 소비 습관과 권력욕도 조금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마음만 후련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예배 역시 일종의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극장이 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불의한 현실과 무비판적으로 화해하도록 만드는 경우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하나님께 맡기면 돼.” “천국 가면 다 해결될 거야.”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 갖지 말고 신앙생활이나 잘해.” 이런 말들은 신앙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때로는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제거한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고통을 견디라고 가르치고, 불의한 구조 속에 있는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며, 교회가 세상의 질서를 비판하기보다 그 질서에 적응하도록 도울 수도 있다. 그 순간 신앙은 해방의 힘이 아니라 순응의 기술이 된다.

 

설교하는 목회자로, 공부하고 글을 쓰는 신학자로 살아오며 발견한 것이 있다. 성경은 우리를 불의한 현실과 무비판적으로 화해시키기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책이다. 성경의 질문은 인간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경은 매우 정치철학적인 질문도 던진다.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지대한 관심을 둔다. “왜 가난한 자가 굶어야 하는가?” “왜 나그네를 밀어내는가?” “왜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짓밟는가?” “왜 우리는 부를 축적하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가?” “왜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끊임없이 현실을 바라보며 질문하게 만든다.

 

예언자들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 앞에서 “아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권력을 낯설게 만들고, 부자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재산을 낯설게 만들고, 종교인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제사를 낯설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거대한 ‘소격효과’를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예언자들이 낯설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였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오히려 더 깊이 엎드렸다. 성경의 소격효과는 하나님과 거리를 두게 하는 장치가 아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에게 세계가 문득 낯설어지는 사건이다. 브레히트가 관객과 무대 위 현실 사이의 무비판적 동일시를 끊어냈다면,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우리와 세상 사이의 무비판적 동일시를 끊어낸다. 방향이 정반대다.

 

예수님의 비유 역시 그렇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듣는 순간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익숙한 질문은 뒤집힌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공정성의 감각이 흔들린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는 인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온 적대의 질서가 낯설어진다. 복음은 현실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을 다시 보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 역시 사람을 단순히 감동시키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좋은 설교는 때로 회중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삶을 다시 보게 해야 한다.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 “왜 우리 사회는 이런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왜 우리 교회는 이 문제에 침묵하고 있지?” 이러한 질문이 생겨야 한다. 설교자가 답을 모두 제공할 필요도 없다. 때로는 질문을 품고 교회 문을 나가게 하는 것이 더 좋은 설교일 수 있다.

 

예배 역시 마찬가지다. 예배는 한 주 동안 힘들었던 마음을 달래주는 종교적 서비스로만 기능해서는 안 된다. 예배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현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자리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정말 정상인지 묻는 자리이며,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심문하는 자리다. 우리가 스스로 세워 놓은 ‘중심성’을 다시 생각해 보는 자리다.

 

그래서 나는 예배자를 ‘소비자’에서 ‘비평가’로 바꾸는 교회를 꿈꾼다. 좋은 음악을 소비하고, 좋은 설교를 소비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소비한 뒤 “오늘 예배 좋았다”고 평가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시 읽어내는 사람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비평가’란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비평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에 질문하는 행위다. 현실의 질서는 바뀔 수 없는 진리가 아니며,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달라질 수 있고, 공동체가 달라질 수 있고,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라는 말을 거부하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문제의식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브라질의 연극인 아우구스투 보알(Augusto Boal)은 관객을 객석에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극이 진행되는 도중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 올려 배우의 자리에 서게 하고, 기존과 다른 행동의 가능성을 직접 시험하게 했다. 그는 이런 존재를 관객이자 동시에 배우인 ‘스펙트-액터’(spect-actor)라고 불렀다.

 

예배가 우리를 데려가려는 자리도 결국 그곳이라고 생각한다. 비평가는 경유지일 뿐 종착지가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읽어낸 사람은 결국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된다. 그 무대는 대단한 무대가 아니다. 자기가 매일 살아가는 ‘삶의 자리’라는 무대다. 밥상에서, 일터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투표소에서, 지갑을 여는 순간에 세상을 다르게 읽어낸 사람은 자신의 일상에서 관객이자 동시에 배우인 사람으로 살아간다. 예배자가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극장에서 울고 나서 후련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 질문을 교회에 가져오고 싶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고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있는가. 나의 욕망은 달라지고 있는가.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고 있는가. 돈과 성공과 권력에 대한 태도는 달라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지고 있는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신앙을 너무 오래 ‘관람’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예배는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아편’이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살게 만드는 힘이어야 한다.

 

나의 사랑,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생각한다. 교회는 지금의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배가 끝났을 때 우리의 마지막 말은 “은혜받았다”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다음 문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을 시작하셨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를 이루는 것은 우리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일을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는 일이 어렵더라도 힘을 낼 수 있다.

 

“주님,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주의 뜻을 이루소서.”

Posted by 장준식

영화 <오디세이> 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원작 파괴의 논란을 넘어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이 영화가 이미 개봉된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제 개봉된 거였다. 미국에서는 개봉된 지 한참 됐지만, 나는 어제 이 영화를 봤다. 결론적으로, 우연히 한국에서의 개봉일에 미국에서 본 것이다.

 

원작을 '재현'하는 일은 현대 예술 사상에 맞지 않다. 원작을 파괴했다고 핀잔을 주는 일은 무의미하다. 현대 예술의 시대정신은 '재현'이 아니라 '재해석'이다. 그리고 원래 원작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전은 원래 그렇다. 시대를 거듭하며 그 시대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편집과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현대 예술가다.

 

영화 <오디세이>를 통해 놀란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문명의 전환'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문명의 전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영화에서 미케네 문명의 종말을 가리키는 지표(sign)는 '크세니아'(Xenia/나그네 환대법)의 실종이다. 트로이 전쟁의 발발도, 오디세우스의 부재 동안 이카타의 궁전에서 발생한 혼란도 모두 '크세니아의 실종'을 보여준다.

 

크세니아는 제우스 신의 법이다. 신이 나그네(타자)로 변장해 우리를 찾아올지 모르니, 언제든지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법이다. 주인만 나그네를 환대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나그네도 주인을 환대해야 한다. 주인이 나그네를 환대했듯이, 나그네도 주인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상호친절이 크세니아법의 핵심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우리 시대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 시대를 보라. 환대가 파괴되었다. 마음의 환대만 파괴된 것이 아니다. 법적 환대도 파괴되고 있다. 온갖 법들이 '나그네'(타자)를 '호모 사케르'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문명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지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놀라운 이유는 영화 한 편으로 지구에 공부 열풍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놀란 감독은 관객들이 <오디세이>의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호머의 <오디세이>를 사서 읽거나 유튜브에 올라온 <오디세이> 관련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온라인이 온통 <오디세이> 영화 이야기로 가득 찼다.

 

재미로 따지자면, <오디세이> 영화는 드라마 <김부장>보다 재미없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나 톨킨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반지의 제왕>처럼 장엄한 전쟁 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놀란 감독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교차 편집되어 전개가 왔다 갔다 한다. 중간에 정신줄을 놓으면 스토리의 전개를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원작이 가지고 있는 고전의 무게와 감독이 가지고 있는 유명세가 합쳐지면서, 또한 영화를 보기 전 '공부'한 관객들의 적극적 참여가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관람 전 많은 말을 하게 되고, 관람 후 더 많은 말을 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것이 영화 <오디세이>가 일으키는 파란이다.

 

영화를 관람하지 못한/안한 사람은 있어도,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할 것이다. 부디, 현재 우리 시대에 발생하고 있는 문명의 종말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기를, 그래서 우리 시대의 문명을 좀 더 따뜻하게 재탄생시키는 일에 마음이 모아지기를,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좀 더 따뜻하게 환대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 삶의 현실을 바꾸어 나가게 되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Posted by 장준식

[BTS와 신자유주의 문화산업]

― BTS가 실제로 이룬 것은 공동체인가, 플랫폼적 팬덤인가

 

## 이 글은 박삼영 목사님의 BTS 활동에 대한 해석(BTS,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공동체를 노래하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며 BTS 현상을 분석한 글입니다. ##

 

한 시대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들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문화는 정치와 제도보다 먼저 한 시대의 욕망과 불안을 드러낸다. BTS 역시 21세기의 중요한 문화적 현상이다. 그러나 BTS가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아 주었다”는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BTS 현상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면서,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디지털 플랫폼의 구조를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BTS의 성공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 문화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에 가깝다. 음악, 춤, 외모, 성장 서사, 세계관, 소셜 미디어, 팬 참여, 상품과 공연이 하나의 거대한 문화적 생태계로 통합되었다. HYBE 역시 공식적으로 정보기술을 활용해 팬덤 문화를 재구성하고, 아티스트와 팬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플랫폼 사업을 전개한다고 설명한다. 위버스에서는 소통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멤버십, 독점 콘텐츠, 공연, 상품 구매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된다. 관계와 소비가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스펙터클을 단순히 화려한 이미지의 집합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스펙터클을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정의한다. 스펙터클의 핵심은 사람들이 이미지를 본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자체가 이미지와 상품을 통해 형성된다는 데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BTS 공연장에서 수만 개의 응원봉이 하나의 빛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공동체가 회복되었다는 증거라기보다 스펙터클이 완성되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모여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빛을 흔들지만, 서로를 향하기보다 모두 같은 무대와 같은 스타를 바라본다. 그들은 함께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책임이나 공동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와 브랜드다.

 

물론 그 경험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팬들이 받는 위로와 감동은 실제적이다. 그러나 스펙터클은 감정이 거짓이라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감정과 소속 욕망이 상품과 이미지에 의해 조직되고, 다시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기 때문에 스펙터클이다. 콘서트의 감동은 티켓, 응원봉, 영상, 멤버십으로 이어지고, 팬의 사랑은 스트리밍, 홍보, 구매로 이어지게 된다. 고립된 개인의 소속 욕망이 문화산업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ARMY를 곧바로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팬덤 안에서 실제 우정과 돌봄과 연대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에는 지속적인 상호 책임, 약한 구성원에 대한 돌봄, 갈등을 조정하는 규범, 그리고 함께 추구하는 공동선이 필요하다. 스타가 활동을 중단하고 신곡과 공연이 사라진 뒤에도 그 관계가 지속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한병철은 『무리 속에서』에서 디지털 소통이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지속적인 공동체와 공론장을 해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군집은 빠르게 모여 반응하고 공유하지만, 책임 있는 ‘우리’로 지속되기 어렵다. 그것은 공동체라기보다 관심과 감정이 일시적으로 집결한 무리에 가깝다.

 

ARMY 역시 이러한 디지털 군집의 특징을 일정 부분 보여준다. 팬들은 자발적으로 번역하고, 영상을 공유하며, 스트리밍 목표를 세우고, 차트 순위를 관리한다. 팬은 더 이상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그는 홍보자이자 번역자이며 콘텐츠 생산자이자 데이터 생산자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의 상당 부분은 무보수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플랫폼과 기업의 가치 상승으로 귀속된다.

 

한병철이 『심리정치』에서 분석한 신자유주의 권력의 특징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권력은 사람에게 강제로 노동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표현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열심히 활동한다. 사람은 자유롭다고 느끼면서 스스로를 동원한다. 팬에게 열정과 노동은 구분되지 않는다.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착취라고 느끼지 않지만, 그 사랑과 열정은 끊임없이 경제적 가치로 전환된다.

 

“Love Yourself”라는 메시지도 이러한 양면성 속에서 봐야 한다. 이 말이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불안과 결핍을 개인이 해결해야 할 심리적 문제로 환원할 위험도 있다. 청년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 입시 경쟁, 불안정 노동, 외모 산업, 주거 불안과 계급 격차는 그대로 둔 채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체제를 변화시키는 언어라기보다 체제 안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개인을 수리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더구나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음원 순위, 조회 수, 판매량, 팬덤 간 경쟁이라는 거대한 비교 체제를 통해 유통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을 적용한다면, BTS가 모방 욕망을 극복했다고 말하기보다 팬덤이 모방 욕망을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사람들은 다른 팬이 구매하기 때문에 구매하고, 다른 팬이 열광하기 때문에 더 열광하며, 더 충성스러운 팬으로 인정받기 위해 경쟁한다. 지라르의 이론은 BTS를 경쟁의 대안으로 미화하기보다 팬덤 내부의 욕망과 경쟁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찰스 테일러의 표현적 개인주의를 인용하면서 BTS가 현대인의 소속감 결핍을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성급하다. 테일러가 비판한 것은 단순히 현대인이 자기표현을 많이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개인의 진정성이 공동의 도덕적 지평과 사회적 관계에서 분리되는 문제는 심각하다. 브랜드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자신의 취향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표현적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연장일 수 있다. 공동체는 동일한 취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의 세계를 책임질 때 형성된다.

 

BTS가 그래미의 ‘아시아 팝’ 범주에 문제를 제기하고 2027년 그래미에 앨범을 제출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서구 음악산업이 비서구 음악을 별도의 지역적 범주에 가두는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문제 제기다. 그래미는 실제로 2027년 시상식부터 ‘Best Asian Pop Music Performance’ 부문을 신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조차 신자유주의 문화산업 안에서는 새로운 브랜드 가치가 될 수 있다. 제도에 대한 거부는 BTS를 “서구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적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팬덤의 결속을 강화한다. 이것은 그들의 결정을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마저 상품과 서사로 흡수하는 자본주의의 힘을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BTS가 실제로 이룬 성과는 무엇인가. 그들은 한국어 대중음악이 서구 음악시장의 주변부에 머물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디지털 플랫폼과 팬 번역, 참여적 팬덤과 연속적인 서사를 결합해 새로운 초국적 문화산업 모델을 만들었다. 서구가 독점하던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을 흔들었다는 점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공동체의 회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BTS가 이룬 것은 공동체의 회복이라기보다 공동체를 갈망하는 고립된 개인들의 감정과 참여를 세계적 네트워크로 조직한 것이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실제 우정과 연대가 탄생할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을 BTS 산업 전체의 본질로 바꾸어 말해서는 안 된다.

 

BTS는 현대 자본주의를 넘어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문법을 가장 창의적이고 성공적으로 구현한 문화적 현상이다. 현대 문명이 BTS를 필요로 했던 이유는 그들이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아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외로움과 소속 욕망까지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BTS라는 스펙터클을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BTS가 공동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은 BTS라는 상품화된 공간 안에서도 결국 서로를 찾고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다. BTS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 역설 속에서 찾아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