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과의 결탁: 죽음에 이르는 길]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 결탁하는 것은 혁신하라는 6.3 민심에 대한 배반입니다.” 6월 5일, JTBC 뉴스룸 앵커 한마디의 마지막 멘트다. ‘부정선거 주장’은 허구다. 이미 과학적, 법적 검증을 거쳐, 부정선거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교안, 전한길 등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 온 인사들은 여전히 선거 불신을 조장하고 있다. 6.3 지방선거에서 선관위의 치명적인 실수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저항’의 빌미를 제공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모인 잠실 투표소에 가서 ‘함께 투쟁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모든 장면이 웃프다. 코미디 같다. 이 장면이 웃프고 코미디 같은 이유는 그들의 ‘결연함’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토대 때문이다. JTBC 앵커가 말했듯, 이 장면이 웃프고 코미디 같은 이유는 그들이 ‘반지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교계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에서 ‘유신진화론’에 대하여 ‘이단’이라고 명시하는 문구를 교단 헌법에 집어넣었다. 이 풍경이 웃프고 코미디인 이유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밟고 있는 토대와 같기 때문이다. 반지성. 반지성이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반지성은 검증 가능한 사실을 거부하고, 반증 가능성을 닫아버리며, 자기 확신을 애국이나 신앙의 이름으로 절대화하는 태도다. 이러한 현실이 절망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반지성주의는 단순한 정보 제공만으로는 잘 치유되지 않는다. 지성인들이 이러한 반지성적인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고 지성적인 호소를 해도 아무 소용없다. 반지성에 사로잡히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아무리 사실적인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다.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1990년대 이후 하나의 기괴한 흐름이 두드러진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이 미국의 자본주의에 깊이 포섭된 이래로 한국 사회의 정치와 종교 안에서 반지성주의가 점점 더 노골화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역사는 길다.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의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는 이 현상을 분석한 고전으로 꼽힌다. 서론의 한 부분을 옮겨 본다. “1950년대를 거치면서 그전에는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던 반지성주의라는 용어가 미국 사회에서 자기비난과 상호매도를 의미하는 일상어가 되었다. 호프스태터의 이 책은 1962년에 출간되었다. 그 이후,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 중에는 칼 세이건(Carl Sagan)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 Science as a Candle in the Dark)이라는 책도 있다. 세이건은 이 책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유사과학, 미신, 종교적 맹신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또한 과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키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지성인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여전히 반지성주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윤여일은 그의 책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1990년대는 지금 시대를 규정짓는 여러 조건들의 근기원이다… 특히 1990년대는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가 그 첫선을 보이고, 현재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다양한 위기가 출현하고, 현재 한국사회의 갖가지 논쟁들의 밑그림이 그려진 시대였다. 2020년대 속에서 1990년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10-11쪽).

 

1990년대를 거치며, 한국에 들어온 것은 미국의 자본만이 아니다. 자본과 함께 ‘반지성주의’가 함께 들어왔다. 한국교회의 세습 문제 역시 반지성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교회가 공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멈추고, 권력의 승계를 ‘은혜’와 ‘안정’의 이름으로 포장할 때, 지성은 침묵하고 공동체는 사유 능력을 잃는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를 강타한 것은 유사과학이다. 바로 창조과학. 현대 젊은 지구 창조론과 홍수지질학의 중요한 계보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였던 조지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가 있다. 그는 안식교 창립자 중 한 명인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가 본 환상에 기반하여 문자적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1923년 저서 『신지질학』을 통해 지구가 6,000~8,000년 전 6일 동안 창조되었으며, 현재의 지층과 화석은 노아의 홍수 때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지성적 창조론은 ‘창조과학’이라는 옷을 입고 한국에 유입되었고,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1981년에 설립되었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자신들이 안식교 교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지성이 토대가 된 곳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부정선거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반지성 때문이다. 교회 세습이 발생하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창조과학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한 교단의 총회에서 ‘유신진화론’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앵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 결탁하는 것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배반이다. 반지성의 근본은 미움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랑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진실을 미워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질문을 억압한다면, 그 사랑은 이미 폭력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래서 반지성은 근본적으로 미움인 것이다.

반지성에 토대를 두고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죽도록 사랑해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반지성에 토대를 두고 창조과학을 신봉하며, 진화론을 반대하는 이들은 교회를 죽도록 사랑해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폭력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반지성에 토대를 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의로워 보일지라도, 아무리 간절해 보일지라도, 아무리 결연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의 결탁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반지성과 결탁하는 정치는 민주주의를 죽이고, 반지성과 결탁하는 종교는 신앙의 양심을 죽인다. 교회가 지성을 두려워하기 시작할 때, 교회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지성과의 결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의 길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6. 6. 2. 13:44

[창세기와 빛]

 

창세기를 읽으며

빛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빛은 좋은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빛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인지

전깃불에서 나오는 빛인지

아니면 아직 우리가 모르는

다른 빛인지

 

분명치 않은 것을 들여다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빛,

 

빛을 생각하다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일까요

 

눈을 감으면

보이는 빛을 가리는 것인데

 

기도는

빛을 빼앗는 일일까요

빛을 찾는 일일까요

 

창세기를 다시 읽으면

첫날에 지으신 빛은

눈에 보이는 빛만은 아닌 듯합니다

 

보이는 빛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빛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첫날에 지으신 빛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빛이 비추면

길을 잃지 않을 것 같은데

 

대낮에 활보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햇빛은 이렇게 환한데

전깃불은 이렇게 밝은데

 

사람들은 왜

자기 길을 잃고

남의 길 앞에 서고

세상의 길마저

어둡게 만드는 것일까요

 

환한 빛 속에서도 어둡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빛은

따로 있는지도 모릅니다

 

첫날의 빛은

눈을 감고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기다릴 때

 

우리 안쪽에서

조용히 밝아지는 빛인지도 모릅니다

 

그 빛이 비추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길을 잃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태양도

전깃불도 아닌지 모릅니다

 

첫날의 빛,

아직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빛

 

창세기를 읽으며

빛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길 잃은 자에게

성경은 빛입니까

 

잘 모르는 것을 알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빛,

 

아직 보지 못한 빛,

우리에게 필요한 빛,

 

생각이 멈추면

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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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설교 - 강해 - 주해]


1. 설교: 전례(예배) 도중에 행해지는 복음 해설 (homilia/sermo)
2. 강해: 일반적인 성경 풀이 특강 (tractatus)
3. 주해: 청중 없이 집필된 본격적 성경 해설서 (commentarium)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 서간 강해> 18쪽, 주석)

설교와 강해는 청중을 앞에 두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설교와 강해는 종종 동의어처럼 혼용된다. 설교는 '예배 도중'(전례 도중)에 행하는 것이다. 강해는 '성경공부'의 성격이 강하다. 청중을 앞에 두고 성경을 풀이하는 것이다. 예배 도중에 강해 설교도 가능하다. 강해 설교는 예배 도중에 성경공부하듯이 말씀을 풀어 전하는 것이다.

주해는 청중 없이, 하지만 청중을 상상하면서 말씀을 전하되, 글로 쓰는 것이다. 주해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글로 하는 것이기에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자세히,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다.

설교는 '예배 도중'에 행하여 지는 것이다. 예배 도중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설교는 주님을 예배하면서 행해지는 복음 해설이니 만큼, 무엇보다 설교자는 '주님의 마음'으로, 마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대언하는 마음으로 설교해야 할 것이다.

저명한 설교 학자 탐 롱(Thomas Long)은 그의 책 <설교자는 증인이다>(The Witness of Preaching)에서 설교자를 세 개의 이미지로 설명한다. The herald(전령), the pastor(목회자), and the storyteller(이야기꾼). 전령은 메시지(the Bible) 자체에 집중한다. 메시지를 잘 듣고, 그것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게 목적이다. 목회자는 회장에 집중한다. 그들의 삶의 자리를 잘 살핀다. 이야기꾼은 메시지를 회중에게 전달하는데, 그냥 아무렇게나 전달하는게 아니라 플롯(plot)을 가진 이야기 형태로 전달한다. 설교자는 이 세 가지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존재이다.

아무리 보아도, 설교자는 종합 예술인이다. 재능과 능력 없이는 설교자의 역할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텍스트를 깊이 파고들 줄 알아야 하고, 회중들의 삶의 자리를 면밀히 보살펴야 하며, 어떠한 플롯(생각이 들어 있는 이야기)을 가지고 텍스트를 회중들에게 전해야 한다.

요즘 이러한 일을 가장 잘 하는 부류는 '드라마 작가'가 아닐까? 설교자보다 드라마 작가가 이 일을 더 잘하는 것 같다. '모자무싸'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교자들이 드라마 작가에게 특강을 좀 들어야 하는 시대인 듯싶다. 작가에게 특강 듣는 게 힘들다면, 드라마라도 열심히 보면서 텍스트를 회중들에게 어떠한 플롯으로 전달하는지, 잘 관찰하면서 배우면 좋겠다.

그래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열심히 하고자 '모자무싸'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설교자들이여, 힘냅시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6. 5. 23. 05:11

인비디아의 저녁

 

그녀는
남의 집 창문에 불이 켜질 때마다
자기 방의 등을 껐다

 

식탁 위에는
식은 수프 한 그릇,
입술 자국 없는 컵 하나,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얇은 칼처럼 놓여 있었다

 

그녀는 좀처럼 먹지 않고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보았다

 

옆집 아이가 상장을 들고 돌아오자
그녀의 화분에서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하나가
스스로 목을 꺾었다

 

누군가 새 차를 몰고 골목에 들어오면
그녀의 이빨 사이에서
녹슨 못 냄새가 났다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연인을 보면
그녀는 거울 앞으로 가
자기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 여자는
점점 말라갔다
눈동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고
가슴 한복판에는
푸른 멍이
천천히 돋아났다

 

그날 밤,
멀리서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서
자기 입술이
조용히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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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질투하면 지는 게 아니라, 인생이 망가진다]

 

젠슨 황은 “모든 사람이 질투할 만한 멋진 회사를 만들자”는 포부 아래 회사 이름을 '엔비디아'로 지었다. 엔비디아는 라틴어 invidia, 곧 ‘질투’에서 온 말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바로 그 질투의 여신 ‘인비디아’가 등장한다. 로마 신화에는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인비디아만큼 끔찍하게 그려진 신은 없다. 오비디우스는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인비디아의 안색은 창백했고 몸은 형편없이 말라 있었다. 게다가 인비디아는 지독한 사팔뜨기였다. 이빨은 변색된 데다 군데군데 썩어 있었고,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이 묘사는 단순한 신화적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질투가 한 사람의 내면에 들어와 오래 머물 때, 그 영혼이 어떤 형상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정직한 그림이다. 창백한 얼굴, 메마른 몸, 사팔뜨기의 눈, 썩은 이, 멍든 가슴. 이 모든 것은 바깥에서 누가 입힌 상처가 아니다. 질투하는 자가 스스로의 몸에 새긴 흔적이다.

 

특히 사팔뜨기라는 표현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질투하는 사람의 눈은 정면을 보지 못한다. 자기 앞에 펼쳐진 자기 삶을 바라보는 대신, 곁눈으로 끊임없이 남을 흘깃거린다. 그 시선은 비뚤어져 있고, 자기 자신에게도 닿지 못한다. 질투는 그렇게 시선을 빼앗는 병이다. 자기 인생을 똑바로 응시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병이다.

 

오비디우스는 인비디아에 대하여 한 문장을 덧붙인다. “이 인비디아의 입술에 미소가 감돌게 할 수 있는 것은 남이 고통받는 광경뿐이었다.”

 

이 문장은 우리를 좀 더 오래 머물게 한다. 마치 우리가 애써 감추고 있는 진실을 폭로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잘되었다는 소식 앞에서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 적은 없었는가. 가까운 이의 성공을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돌아서서는 까닭 모를 피로감에 휩싸인 적은 없었는가. 반대로 한때 나를 앞서갔던 그 사람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입가에 잠깐 떠올랐다가 황급히 지워버린 그 옅은 웃음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그 미소를 자기 자신에게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비디아의 얼굴은 바로 그 순간, 거울 속에서 우리를 마주 본다.

 

질투는 남을 향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정확히 말하면, 질투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 실패한 마음이다. 내가 나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 내 자리가 너무 좁고 내 몫이 너무 적다는 느낌, 그 결핍의 자리에서 질투는 자란다. 그래서 질투는 늘 비교에서 시작된다. 비교는 감사를 갉아먹고, 감사가 떠난 자리에 불평이 들어서며, 불평이 깊어지면 원망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원망은 시간이 지나면 방향을 바꾼다. 처음에는 남을 향하던 화살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향한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가, 왜 내게는 저것이 없는가. 그렇게 질투하는 사람은 남의 인생을 바라보느라 정작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한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추방당한 자, 그가 바로 인비디아의 얼굴을 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흔히 “질투하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질투의 진짜 무서움은 승패에 있지 않다. 질투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영혼이 서서히 부패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작은 부러움으로 시작된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마음은 살짝 미끄러진다. “저 사람이 저렇게 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끄러진다. “저 사람이 차라리 무너졌으면 좋겠다.” 이 미끄러짐은 본인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용히 일어난다. 그러나 그 끝에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해야 할 이를 미워하고, 축복해야 할 이를 저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비디아의 시퍼렇게 멍든 가슴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질투는 노력으로 극복되기 어렵다. 질투에서 벗어나기 가장 좋은 길은 자족을 배우는 것이다. 자족은 체념이 아니다. 자족은 내 삶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내가 받은 계절, 내가 받은 토양, 내가 받은 햇빛의 양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일이다. 남의 꽃이 먼저 피었다고 내 계절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남의 열매가 크다고 내 삶이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같은 모양으로 빚지 않으셨다. 같은 속도로 자라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니 남의 정원을 흘깃거리느라 내 정원에 내리는 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인비디아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창백하고, 야위고, 비뚤어진 눈에, 썩은 이와 멍든 가슴을 가진 그 얼굴. 그것은 신화 속 어떤 여신의 얼굴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오래 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모두가 천천히 닮아갈 수 있는 얼굴이다. 마음은 결국 얼굴이 되고, 얼굴은 결국 그 사람의 삶이 된다. 질투의 칼을 내려놓는 일은 남을 살리는 일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을 살리는 일이다.

 

* 인용은 『변신 이야기』(이윤기 역, 민음사, 1998)에서.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6. 5. 23. 05:09

열리지 않는 창문

 

올 때마다 꽃을 물고 왔지

너는

 

노란 꽃

파란 꽃

하얀 꽃

어느 날은 보라 꽃

 

바람 부는 날은

이파리를 물고 오기도 했어

파르르 떨던 나무에서

떨어진 가엾은 아이라며

 

비 오는 날은 애벌레를 물고 와

같이 먹자고 했어

초록색 즙이 터지는

미슐랭급 음식이라 했지

 

햇볕을 몰고 온 날

나는 눈이 부셔 웃었지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수많은 빛이 들어왔어

 

빛은 피를 타고 들어가

마치 숨바꼭질 하듯

꼭꼭 숨었어

하루에 하나씩

나는 그 빛을 찾아내고 있어

 

눈이 내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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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문학의 쇠퇴와 교회의 쇠퇴: 좁은 길을 다시 생각하다]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교인 수가 줄고,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낮아졌다는 이야기도 반복해서 들린다. 이것은 단순한 체감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수십 년에 걸친 기독교 인구 감소를 보고해 왔고, 한국에서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하락을 보여주는 여러 조사가 반복해서 발표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좋은 프로그램, 더 세련된 예배, 더 강력한 전도 전략, 더 효과적인 미디어 활용을 고민한다.

 

물론 그런 고민도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쇠퇴를 조금 더 깊은 자리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교회의 쇠퇴는 단순히 사람들이 교회를 덜 찾게 된 현상만은 아니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인간과 시대를 읽는 능력, 권력의 언어를 의심하는 능력, 고통의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이것을 인문학의 쇠퇴와 연결해서 생각한다.

 

현재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제도적 위축은 뚜렷하다. 미국학술원(American Academy of Arts & Sciences)의 인문학 지표(Humanities Indicators)에 따르면, 2024년 미국 대학에서 인문학 학사학위는 전체 학사학위의 8.4%에 그쳤다. 이는 2012년 13.1%에서 크게 줄어든 수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같은 기간 인문학 안에서도 종교학(religious studies) 학사학위가 무려 59%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이 쇠퇴하는 가운데 종교를 학문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가장 가파르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쇠퇴는 단순히 문학, 역사, 철학을 덜 공부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이다. 문학은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역사는 권력과 폭력이 어떻게 반복되는지 보여주며, 철학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전제들을 의심하게 한다. 인문학은 인간이 무엇인지, 좋은 삶이 무엇인지, 공동체가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묻게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이 사라지면, 교회도 함께 가난해진다. 성경을 읽어도 인간을 읽지 못하고, 교리를 말해도 시대를 읽지 못하며, 복음을 전해도 고통의 자리를 읽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니라 권위를 정당화하는 문장 조각이 되고, 교리는 신앙의 깊이가 아니라 통제의 언어가 되며, 공동체는 사랑의 몸이 아니라 순응을 요구하는 조직이 되기 쉽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 내부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문학적 각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ad fontes, 곧 “원천으로 돌아가라”(back to sources)는 정신을 일깨웠다. 사람들은 성경 원전으로 돌아가려 했고, 교회가 말해 온 전통을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신약성서를 편집하고 출판한 일은 단순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의 언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이런 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인문학이 살아났을 때 사람들은 질문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정말 복음인가? 교회가 말하는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 혹시 복음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양심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종교개혁은 이런 질문의 힘에서 태어났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의 쇠퇴는 단순히 세상이 세속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읽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는 인간의 불안, 청년들의 절망, 노동의 피로, 경제적 불평등, 기술 문명의 폭력, 정치적 혐오, 생태 위기 앞에서 충분히 깊이 말하지 못했다. 때로는 세상을 비판하기보다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반복했다. 성장, 성공, 규모, 영향력, 효율, 성과라는 언어가 교회의 언어가 되었다.

 

이 지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말한 기술관료주의(Technocratic Paradigm)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교황은 기술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기술은 인간의 창의성과 지성의 산물이고, 많은 선을 이룰 수 있다. 문제는 기술이 도구의 자리를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전체가 될 때이다. 그것이 기술관료주의다.

 

기술관료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만든다. 자연은 선물이 아니라 자원이 되고, 노동은 삶의 자리라기보다 생산성의 단위가 되며, 인간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기능과 효율로 평가되는 존재가 된다. 관계도 네트워크가 되고, 시간도 관리 대상이 되고, 몸도 성과를 위한 도구가 된다. 기술관료주의는 인간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얼굴을 지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숫자, 성과, 효율, 생산성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기술 자체는 악하지 않다. 인문학은 기술을 반대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인문학은 기술에게 목적을 묻기 위한 공부다. 기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인문학은 “왜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기술은 “얼마나 빠른가?”를 묻는다. 인문학은 “그 속도가 인간을 살리는가?”를 묻는다. 기술은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묻는다. 인문학은 “그 효율 속에서 누가 지워지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신학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묻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뜻에 합당한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적대로, 기술관료주의에 깊이 매몰된 시대에, 이제 우리는 “좁은 길”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좁은 길을 너무 자주 개인적 고난이나 종교적 불편함 정도로 이해해 왔다.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교회 다니느라 세상 재미를 조금 포기하는 것,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 정도로 좁은 길을 생각해 왔다.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너무 모호하다. 오늘의 좁은 길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져야 한다.

 

인간이 기능으로 축소되는 시대에, 좁은 문은 다시 인간을 배우는 길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생각하기를 선택하는 길이다. 소비하면 되는 시대에 읽기를 선택하는 길이다. 빠른 답을 원하는 시대에 오래 묻고 깊이 성찰하는 길이다. 효율이면 충분하다는 시대에 인간의 얼굴을 바라보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단순한 교양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제자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을 잃어버린 시대에 인간을 다시 배우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좁은 길일 수 있다. 문학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들어가고, 역사를 통해 권력의 폭력을 분별하고, 철학을 통해 시대의 우상을 의심하고, 신학을 통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창조와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다시 해석하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좁은 길이다.

 

교회는 다시 읽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읽고, 인간을 읽고, 시대를 읽고, 고통을 읽고, 권력을 읽고, 자기 자신을 읽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나 교리 주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도들이 세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의 눈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설교도 정답을 주입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세계를 다시 보게 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인문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우리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복음이 도달해야 할 인간의 자리와 시대의 고통을 보게 한다. 신학 없는 인문학은 방향을 잃을 수 있고, 인문학 없는 신학은 인간을 잃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은 깊은 신학과 깊은 인문학이 만나는 자리다.

 

교회의 쇠퇴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해석 능력의 문제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단순히 더 많은 사람을 모으는 방법을 찾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 해석 능력을 잃은 교회가 숫자만 키울 때, 교회는 세상을 위한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키는 집단이 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이미 미국과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교회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래야 교회는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하지 않은, 세상을 위한 따뜻한 숨구멍이 될 수 있다.

 

좁은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생각하기를 선택하는 것, 소비하면 되는 시대에 읽기를 선택하는 것, 효율이면 충분하다는 시대에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걸어야 할 좁은 길이다.

 

Posted by 장준식

[구원: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신앙]

 

구원은 비참함에서 벗어나 우아한 삶을 살게 된, 존재의 상승일 수 없다. 구원이 이렇게 사유되면 차등이 발생한다. 구원받은 자의 삶이 우월해진다. 이것은 전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사유해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공적인 선포이다. 구원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대속으로 사유하면 구원은 티켓이 되고 만다.

 

대속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거래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 안에서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누군가 대신 지불했다는 상업적 계산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폭력과 죄와 죽음의 자리까지 그리스도께서 함께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통과하심으로 우리를 그 고통 밖으로 빼내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사랑의 길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면제권이 아니라 참여의 부르심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과 다른 계급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나는 이제 안전하고, 너는 아직 위험하다”는 종교적 우월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려 더 이상 타인을 죄인 취급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자리로 함께 내려가는 사람이다. 십자가는 인간을 상승시키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더 고상한 존재로 꾸미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 의로 무장하는지를 폭로한다.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타인을 지배할 수 있으며, 진리를 말하면서도 다른 이를 모욕할 수 있다. 복음은 바로 이 자기 의(righteousness)의 구조를 무너뜨린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 이상 나의 의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관계의 회복이다. 다시 말해, 구원은 화해(reconciliation)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다시 사랑 안에서 열리는 사건이다. 죄는 인간 존재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관계를 왜곡하고 생명을 닫아버리는 권세이다. 그리스도는 그 권세를 십자가 위에서 폭로하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용서의 길을 여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죄인을 골라내는 기준이 아니라, 죄의 권세가 더 이상 마지막 말이 아님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특권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일은 정죄가 아니라 증언이다. “우리는 구원받았고 너희는 멸망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도는 타인을 굴복시키는 일이 아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미 그 사람의 삶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말보다 먼저 태도이고, 설득보다 먼저 환대이며, 교리보다 먼저 사랑이다.

 

구원은 도피가 아니다. 구원은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는 표(ticket)가 아니다. 구원은 이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을 혐오하지 않는다. 몸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화를 무시하지 않는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계 안에서, 그 세계의 신음에 귀 기울이며,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존재의 상승이 아니라 사랑의 참여이다. 구원은 타인보다 우월한 자리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 곁에 서는 자리이다. 구원은 나 혼자 안전해지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세계를 함께 사랑하도록 부름받는 일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구원받은 자의 우월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자의 겸손(케노시스/자기비움)이다. 그 사랑에 참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게 될 때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지 무슨 매직이 아니다. 그러니, 아주 작은 일부터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주께서 힘주시리!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6. 5. 2. 02:58

[죽음]

 

죄를 막아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죽음을 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은

복음일까

 

죽지 않는 것을 꿈꾸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불경한 일일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흠모해야 할까

미워해야 할까

 

죽음을 꿈꾸는 자가 있다

그는 반역자인가

의인인가

 

죽고 싶은 날

죽음은 가장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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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6. 4. 30. 10:26

[주님의 은총이 스며들도록]

나의 힘이신 주님,
우리를 불러 사명을 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창조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주어진 하루를 시작하며

잠시 멈추어,

받은 사명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사명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큰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야고보가 왕의 법이라고 부른

‘이웃 사랑’이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사명을 이루고 사는 것 아닐런지요.

주님,

나에게서 힘을 빼 주소서.

뭔가 이루려 하기 보다

뭔가 하지 않으려는 마음,

부족한 곳, 멈춰선 곳에

주님의 은총이 스며들도록,

쉬엄쉬엄 가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