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과의 결탁: 죽음에 이르는 길]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 결탁하는 것은 혁신하라는 6.3 민심에 대한 배반입니다.” 6월 5일, JTBC 뉴스룸 앵커 한마디의 마지막 멘트다. ‘부정선거 주장’은 허구다. 이미 과학적, 법적 검증을 거쳐, 부정선거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교안, 전한길 등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 온 인사들은 여전히 선거 불신을 조장하고 있다. 6.3 지방선거에서 선관위의 치명적인 실수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저항’의 빌미를 제공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모인 잠실 투표소에 가서 ‘함께 투쟁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모든 장면이 웃프다. 코미디 같다. 이 장면이 웃프고 코미디 같은 이유는 그들의 ‘결연함’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토대 때문이다. JTBC 앵커가 말했듯, 이 장면이 웃프고 코미디 같은 이유는 그들이 ‘반지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교계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에서 ‘유신진화론’에 대하여 ‘이단’이라고 명시하는 문구를 교단 헌법에 집어넣었다. 이 풍경이 웃프고 코미디인 이유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밟고 있는 토대와 같기 때문이다. 반지성. 반지성이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반지성은 검증 가능한 사실을 거부하고, 반증 가능성을 닫아버리며, 자기 확신을 애국이나 신앙의 이름으로 절대화하는 태도다. 이러한 현실이 절망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반지성주의는 단순한 정보 제공만으로는 잘 치유되지 않는다. 지성인들이 이러한 반지성적인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고 지성적인 호소를 해도 아무 소용없다. 반지성에 사로잡히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아무리 사실적인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다.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1990년대 이후 하나의 기괴한 흐름이 두드러진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이 미국의 자본주의에 깊이 포섭된 이래로 한국 사회의 정치와 종교 안에서 반지성주의가 점점 더 노골화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역사는 길다.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의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는 이 현상을 분석한 고전으로 꼽힌다. 서론의 한 부분을 옮겨 본다. “1950년대를 거치면서 그전에는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던 반지성주의라는 용어가 미국 사회에서 자기비난과 상호매도를 의미하는 일상어가 되었다. 호프스태터의 이 책은 1962년에 출간되었다. 그 이후,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 중에는 칼 세이건(Carl Sagan)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 Science as a Candle in the Dark)이라는 책도 있다. 세이건은 이 책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유사과학, 미신, 종교적 맹신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또한 과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키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지성인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여전히 반지성주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윤여일은 그의 책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1990년대는 지금 시대를 규정짓는 여러 조건들의 근기원이다… 특히 1990년대는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가 그 첫선을 보이고, 현재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다양한 위기가 출현하고, 현재 한국사회의 갖가지 논쟁들의 밑그림이 그려진 시대였다. 2020년대 속에서 1990년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10-11쪽).
1990년대를 거치며, 한국에 들어온 것은 미국의 자본만이 아니다. 자본과 함께 ‘반지성주의’가 함께 들어왔다. 한국교회의 세습 문제 역시 반지성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교회가 공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멈추고, 권력의 승계를 ‘은혜’와 ‘안정’의 이름으로 포장할 때, 지성은 침묵하고 공동체는 사유 능력을 잃는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를 강타한 것은 유사과학이다. 바로 창조과학. 현대 젊은 지구 창조론과 홍수지질학의 중요한 계보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였던 조지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가 있다. 그는 안식교 창립자 중 한 명인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가 본 환상에 기반하여 문자적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1923년 저서 『신지질학』을 통해 지구가 6,000~8,000년 전 6일 동안 창조되었으며, 현재의 지층과 화석은 노아의 홍수 때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지성적 창조론은 ‘창조과학’이라는 옷을 입고 한국에 유입되었고,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1981년에 설립되었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자신들이 안식교 교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지성이 토대가 된 곳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부정선거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반지성 때문이다. 교회 세습이 발생하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창조과학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한 교단의 총회에서 ‘유신진화론’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앵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 결탁하는 것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배반이다. 반지성의 근본은 미움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랑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진실을 미워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질문을 억압한다면, 그 사랑은 이미 폭력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래서 반지성은 근본적으로 미움인 것이다.
반지성에 토대를 두고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죽도록 사랑해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반지성에 토대를 두고 창조과학을 신봉하며, 진화론을 반대하는 이들은 교회를 죽도록 사랑해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폭력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반지성에 토대를 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의로워 보일지라도, 아무리 간절해 보일지라도, 아무리 결연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의 결탁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반지성과 결탁하는 정치는 민주주의를 죽이고, 반지성과 결탁하는 종교는 신앙의 양심을 죽인다. 교회가 지성을 두려워하기 시작할 때, 교회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지성과의 결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의 길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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