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신학의 해체
ㅡ 내가 역대기 신학을 좋아하는 이유
나는 역대기 신학을 좋아한다. 역대기는 망한 나라의 역사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왕조가 끊긴 뒤에 쓰인 역사다. 그래서 역대기가 붙들고 있는 질문은 절박하다. “우리는 왜 망했는가?”라는 질문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렇게 망한 뒤에 우리는 어떻게 다시 함께 살아갈 것인가?”
역대기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역대기는 과거의 영광을 복원하려는 복고주의 문서가 아니다.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해 기억을 재구성하는 책이다. 그래서 족보를 통해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고, 변방의 지파들을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불러들이고, 예배를 복원하고,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아래 모으려고 한다.
보통 역대기 하면 족보와 야베스의 기도,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 이야기,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떠올린다. 모두 중요한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역대기 신학의 백미는 역대하 28장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선지자 오뎃(Oded)의 이야기’다.
아하스 시대였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였다. 북이스라엘이 크게 승리했다. 유다 군사 12만 명이 죽고,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2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북이스라엘 군대는 승리의 전리품과 포로들을 끌고 사마리아로 돌아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선지자 오뎃이 길을 막아선다. 그의 말은 놀랍다. “너희가 이긴 것은 너희가 의로워서가 아니다.”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기셨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분노를 폭발시키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러면서 오뎃은 승리한 사람들에게 묻는다. “너희에게도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이것이 역대기가 보여준 승리 신학의 해체이다.
고대 세계에서 승리는 곧 신의 승인으로 읽히기 쉬웠다. 우리가 이겼다는 것은 우리 신이 더 강하다는 뜻이고, 따라서 우리가 옳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역대기는 승리와 정의 사이에 칼을 꽂는다. 승리했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사용되었다고 의로운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내가 자동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승리는 하나의 사실일 뿐, 의로움의 증명서가 아니다.
이 통찰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하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카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 근본적인 구별을 ‘친구와 적’의 구별이라고 보았다. 정치 공동체는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우리의 적인지를 구별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구별이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은 단순히 의견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이 된다.
오뎃은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한다. 북이스라엘의 눈에는 유다 사람들이 적이었다. 전쟁에서 패한 포로였고, 이제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오뎃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이름을 돌려준다. “그들은 너희 형제다.” 이 한마디가 중요하다. 선지자는 적을 없애는 사람이 아니라 적이라는 이름을 해체하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빼앗지 않는다. “그가 잘못했다”와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 사이에 선을 긋는다.
역대기가 기록된 포로기 이후의 역사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 메시지는 더욱 놀랍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공동체는 “누가 진짜 이스라엘인가”라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는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경계 설정이 나타난다. 이방인과의 혼인을 끊고, 공동체의 안과 밖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런데 역대기는 조금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역대기의 이스라엘』에서 윌리엄슨(H. G. M Williamson)은 역대기가 당시 일부 귀환 공동체의 지나치게 배타적인 태도에 맞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는 비전을 제시했다고 본다. 역대기는 북이스라엘의 잘못을 비판하지만 북쪽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에서 영원히 삭제하지 않는다. 오뎃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장면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유다 왕 아하스가 아니라 북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에브라임의 지도자들이 군대를 막아선다. 군인들은 포로와 전리품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포로들에게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먹이고, 마시게 하고, 상처에 기름을 바른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나귀에 태운다. 그리고 여리고까지 데려가 그들의 형제에게 돌려보낸다. 얼마 전까지 전리품이었던 것이 옷이 된다. 적군이 형제가 된다. 포로 행렬이 귀향 행렬로 바뀐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벗겼으면 입혀주고, 빼앗았으면 돌려주고, 상처 입혔으면 싸매주고, 쓰러뜨렸으면 일으켜주는 것이다. 역대기의 회개는 관계의 복원이다.
우리 시대의 정치가 특별히 귀담아들어야 할 말씀이다. 오늘의 정치는 너무 쉽게 적을 만든다. 상대 진영은 경쟁자가 아니라 악이 되고, 정치적 반대자는 함께 살아가야 할 시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된다. 정치 지도자는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생산한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방을 악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 정치의 문법을 너무 쉽게 배웠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복음을 전하기보다 적을 규정하는 데 더 익숙해졌다. 누구를 반대하는지가 신앙의 정체성이 되고, 누구를 미워하는지가 신앙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방식이 되었다.
오뎃은 그런 우리 앞에 서서 말한다. “그들은 너희 형제다.” 이 말은 모든 차이를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오뎃은 북이스라엘의 죄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러나 비판하면서도 형제라는 이름을 빼앗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하다.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형제라는 이름을 빼앗지 않는 것! 나는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정치적 덕목이자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역대기는 패배한 공동체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를 가르치는 책이다. 그 방법은 적을 더 많이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이름을 다시 부르고, 예배를 다시 세우고, 갈라진 사람에게 다시 형제라는 이름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역대기 신학을 좋아한다. 승리보다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순수성보다 회복을 꿈꾸며, 과거의 잘못 때문에 사람을 영원히 삭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어 놓은 경계보다 넓게 일하신다는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승리자가 너무 많고 형제가 너무 적다. 모두가 이기려고 한다. 정치도 이기려고 하고, 교회도 이기려고 하고, 개인도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함께 사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다. 역대기는 묻는다. 승리한 뒤에 무엇이 남았는가. 적의 시체만 남았다면 그것이 정말 승리인가. 상대방을 침묵시킨 뒤 공동체까지 무너졌다면 누가 이긴 것인가.
북이스라엘의 진짜 승리는 유다 군대를 무너뜨렸을 때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 힘을 스스로 멈추고, 포로에게 옷을 입히고, 그들을 다시 형제라고 부르며 집으로 돌려보냈을 때 비로소 일어났다. 적을 이기는 것보다 더 위대한 승리가 있다. 적을 다시 형제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대기 신학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신학이다. 교회가 역대기의 신학을 적극 수용하여 승리 신학을 해체하고 적을 형제로 다시 인식하도록 도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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