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만든 도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여러모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떠올리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두 도성을 이야기한다. 한 도성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도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만들어진다. 자기 사랑의 도시와 질서 잡힌 사랑의 도시라고 표현해도 좋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올바른 사랑을 ‘카리타스’(caritas)라고 불렀고, 사랑이 제자리를 찾은 상태를 ‘사랑의 질서’(ordo amoris)라고 생각했다. 결국 어떤 사랑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도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에서 선택한 두 도시는 런던과 파리다. 그러나 디킨스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두 도시의 지리적 차이가 아니다. 그는 산업화와 계급격차로 요동치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살아가면서, 반세기 앞서 유럽을 뒤흔들었던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만으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최고의 시대였고 최악의 시대였다. 디킨스는 처음부터 세계의 이중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도식으로 만들면 이렇다.

 

런던 / 파리

귀족 / 민중[

억압 / 혁명

생명 / 죽음

증오 / 사랑

복수 / 용서

시드니 카턴 / 마담 드파르주

 

1789년 이후 유럽은 혁명의 충격 속에서 요동쳤다. 왕정과 귀족의 특권은 거듭 도전받았고, 공화정과 왕정, 혁명과 반동이 반복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유럽의 정치적 상상력을 바꾸었다면,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은 그 혁명의 의미를 다시 묻게 했다. 디킨스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문학적으로 바라보았다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을 통해 근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분석했다.

 

디킨스가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견한 것은 혁명의 윤리적 비극이었다. 귀족사회의 오랜 억압과 폭력이 민중의 분노를 낳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억압받던 사람들이 권력을 손에 넣자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정의를 향한 분노는 복수의 열정으로 변해 갔다. 혁명은 낡은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바로 여기에서 디킨스의 질문이 시작된다. 무엇이 폭력의 도시를 생명의 도시로 바꿀 수 있는가.

 

찰스 디킨스가 자녀들에게 예수의 생애를 들려주기 위해 쓴 『예수의 생애』(The Life of Our Lord)가 보여주듯이, 그의 기독교적 상상력은 교리적 논쟁보다 예수의 사랑과 자비, 용서와 자기희생에 무게를 두었다. 디킨스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느냐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였다. 『두 도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도 바로 이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시드니 카턴이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구현된다.

 

카턴의 죽음은 디킨스가 제시하는 혁명의 윤리적 대안으로 읽을 수 있다. 소설 속 공포정치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복수의 논리로 치닫는다면, 카턴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내가 죽음으로 네가 산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다. 두 죽음이 있다. 죽여서 세상을 바꾸려는 죽음이 있고,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죽음이 있다. 디킨스가 믿었던 진짜 혁명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가.

 

AI의 출현과 함께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시를 꿈꾸고 있다. 더 편리한 도시, 더 효율적인 도시, 더 생산적인 도시, 무엇보다 더 ‘스마트한’ 도시다.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들은 사활을 걸고 AI 기술에 투자한다. 정부는 국가 경쟁력을 이유로 산업을 지원하고, 기업들은 경쟁하면서도 거대한 인프라를 함께 구축하며, 투자자들은 장밋빛 미래를 바라보며 돈을 쏟아붓는다. 서로의 목적은 다르지만 모두 거대한 AI 도시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디킨스라면 빛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도시의 찬란한 불빛 뒤에 가려진 사람들을 먼저 보았던 작가다.

 

AI가 작동하려면 서버가 필요하고, 서버를 돌리려면 거대한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데이터센터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고, 냉각을 위한 물과 토지, 송전망과 발전시설도 필요하다. 그래서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지역에서는 전력망의 부담과 전기요금, 물 사용, 소음과 환경문제, 토지 이용을 둘러싼 갈등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AI가 만들어내는 편리함은 전 세계로 흩어지지만, 그 편리함을 생산하기 위한 비용은 특정한 지역과 사람들의 삶 위에 집중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이 돌아온다. 이 도시는 어떤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기술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발전을 꿈꾸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사랑의 질서다. 기술을 인간보다 더 사랑하고, 효율을 공동체보다 더 사랑하고, 성장과 이윤을 누군가의 삶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사랑은 질서를 잃는다. 아무리 스마트한 도시를 건설해도 그 도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자기 사랑의 도시가 될 수 있다.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얼마나 똑똑한 기술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해 이 기술을 만드는가. 그 혜택은 누가 누리고, 그 비용은 누가 치르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희생하면서까지 이 도시를 건설하려 하는가.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를 보여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사랑이 두 도성을 만든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 앞에도 두 도시가 놓여 있다. 인간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도시와, 기술을 더 빨리 발전시키기 위해 인간을 비용으로 처리하는 도시. 우리는 어느 도시를 건설할 것인가. 도시는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 모양을 닮아갈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6. 8. 21. 07:04

[생명]

 

생명이

 

지고 있다

꺼져가고 있다

사그라들고 있다

 

생명 바깥은 벽

 

창문을 열어도

문을 열어도

 

 

생명 안에

갇혀버렸다

 

바깥으로 나갈 궁리를 한다

 

죽으면

나갈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벌써 하늘에는

달빛이 일렁인다

 

배가 고프다

 

밥 냄새가 난다

 

나는 왜

 

곡기를

끊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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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6. 8. 16. 11:39

야베스처럼 기도하기

(역대상 4:9-10)

 

핵심 메시지

야베스처럼 기도한다는 것은 고통 없는 인생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에 새겨진 고통이 나의 운명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이 나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1. 도입: 우리의 이름이 우리의 운명일 필요는 없습니다

ㅡ 역대상 4장은 족보입니다. 이름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9절에서 갑자기 족보가 멈추고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ㅡ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대비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에게 붙여 준 이름: 야베스
성경이 그에게 내려 주는 평가: 존귀한 사람

ㅡ 어머니는 그를 낳으면서 겪은 고통 때문에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본문의 히브리어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ㅡ PPT 1: 야베스와 고통

고통 / 슬픔

עֹצֶב

ʿōev — 오체브

자음:

עצב

아인 — 차데 — 베트

 

그런데 야베스는,

יַעְבֵּץ

yaʿbēṣ야베스

핵심 자음:

עבצ

아인 — 베트 — 차데

צב

고통’의 마지막 두 자음이 뒤집혀 있습니다.

 

ㅡ 야베스라는 이름에는 ‘고통’(오체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고통’(오체브)이라는 단어의 자음이 야베스의 이름 속에서 뒤집혀 있습니다.

ㅡ 이것을 문자 그대로 “어머니가 일부러 자음을 뒤집어 이름을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어머니가 지은 이름이라면, 그 어머니는 매우 지혜로운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ㅡ 아무튼, 역대기 기자가 분명히 두 단어를 연결해 언어유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음의 뒤집힘을 야베스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미지로 읽어보고 싶습니다. 고통이 뒤집혔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의 인생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ㅡ “너는 고통이야.” 어쩌면 이것은 어머니가 붙여 주신 이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를 낳을 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몰라!” 아마도, 야베스의 어머니는 분만할 때 죽다 살아났던 모양입니다.

ㅡ 그런데 하나님과 성경은 그에게 또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נִכְבָּד니크바드 — ‘존귀한 사람.’

ㅡ 사람들은 우리의 과거를 보고 우리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실패한 사람, 부족한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 어려운 집에서 태어난 사람, 상처 많은 사람….

ㅡ 그러나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는가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이 우리의 운명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ㅡ 야베스는 자기 이름 속에 새겨진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2. 야베스는 자기 운명을 하나님께 가지고 갔습니다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וַיִּקְרָא יַעְבֵּץ

wayyiqrāʾ yaʿbēṣ 와이크라 야베츠

야베스가 불렀다.” ‘아뢰어 이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입니다.

קרא(qārāʾ/카라)는 ‘부르다, 이름을 부르다, 호소하다’라는 말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을 붙들고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우리 집안은 원래 이래.” “내 인생은 여기까지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ㅡ 그리고 세 가지 큰 내용으로 기도합니다. 야베스가 드린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ㅡ PPT 2: 야베스의 세 가지 기도

1. 나를 복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2. 주님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소서.

3. 악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고통이 생기지 않게 하소서.

ㅡ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기도만 떼어 읽지 않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오랫동안 성공과 번영을 위한 기도처럼 소비된 이유는 첫 번째 문장, “나에게 복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ㅡ 그러나 야베스는 지경만 넓혀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경이 넓어질수록 하나님의 손이 필요하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 지경이 넓어지더라도 악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ㅡ 이것이 중요합니다. 영향력이 커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커진 영향력이 누구에게도 고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3. “나를 고통에서 지켜 주소서”에서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로

ㅡ 10절 마지막 부분의 히브리어입니다.

PPT 3: 문제가 되는 마지막 문장

לְבִלְתִּי עָצְבִּי

ləviltî ʿābî (러빌티 아츠비)

עצב — 고통스럽게 하다, 슬프게 하다
עָצְבִּי — 부정사 연계형 + 1인칭 접미사

여기에서 1인칭 접미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집니다.

ㅡ 해석 ① 목적어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게 하소서.”

나 = 고통을 받는 사람

KJV: “that it may not grieve me”

NASB·NET 등도 이 방향입니다.

ㅡ 해석 ② 의미상 주어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하소서.”

나 = 고통을 일으키는 사람

NKJV: “that I may not cause pain”

 

PPT 4: 한눈에 보여주기

  1인칭의 역할 의미
목적어 고통이 나에게 “내가 고통받지 않게 하소서”
주어 고통이 나에게서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

 

고통이 나에게 오지 않게 하소서”에서
“고통이 나에게서 나가지 않게 하소서”로 해석이 가능하다.

ㅡ 저는 이것이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우리의 기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ㅡ 처음에는 누구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아프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 아이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 가정에 문제가 없게 해 주십시오.”

당연한 기도입니다. 야베스도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ㅡ 그런데 신앙이 조금 더 깊어지면 새로운 기도가 생깁니다. 하나님,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의 욕심 때문에 가족이 아프지 않게 하시고, 나의 말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지 않게 하시고, 나의 성공 때문에 누군가 짓밟히지 않게 하시고, 나의 편리함 때문에 다른 생명이 고통받지 않게 하시고….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를 오늘 우리가 새롭게 드리는 방식입니다.

 

4.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 — 세 관계를 돌아보는 기도

하나님과의 관계

ㅡ 이 단어가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야베스의 ‘고통’과 같은 어근 עצב(오체브)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할 때도 사용됩니다.

ㅡ 시편 78편 40절은 광야의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슬프시게 하다’가 바로 같은 עצב (오체브) 어근입니다.

ㅡ 이사야 63장 10절도 말합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그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역시 같은 עצב(오체브) 어근입니다.

ㅡ 그러므로 역대기의 역사 전체를 알고 있는 회중에게 이 기도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프게 했습니다.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고, 정의를 버리고,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ㅡ 그래서 포로기 이후 역대기를 읽는 공동체(역대기는 포로기 이후 씌어진 성경)가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우리가 주님을 아프게 하는 백성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ㅡ 두 번째는 이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고통받지 않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결국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사람.

ㅡ 얼마나 많은 고통이 거대한 악이 아니라 작은 자기중심성에서 발생합니까.

무심한 말 한마디,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 나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용하는 태도, 공동체는 어떻게 되든 내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는 무관심.

ㅡ 고통은 악한 사람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도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ㅡ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고통에서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를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인생이 되지 말게 하소서!)

 

지구와 자연과의 관계

ㅡ 그리고 오늘 우리는 야베스의 기도를 한 걸음 더 넓혀야 합니다. 지구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행성적 사고 / 기후위기 시대의 사고방식)

ㅡ 여기에서 야베스의 첫 번째 기도와 마지막 기도가 놀랍게 연결됩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인간은 실제로 끊임없이 지경을 넓혀 왔습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은 땅을 사용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더 멀리 이동하고, 더 편리하게 살았습니다. 우리의 ‘지경’은 엄청나게 넓어졌습니다.

ㅡ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악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고통이 생기지 않게 하소서.” 이 두 문장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라는 기도가 아래와 같이 확장될 것입니다.

 

PPT 5 — 우리 시대의 야베스의 기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그러나,

나의 넓어짐이
누군가의 좁아짐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의 풍요가
다른 생명의 고통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의 편리함이
지구의 신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오늘의 우리의 행복이
미래 세대의 재난이 되지 않게 하소서.

 

5. 맺음말

ㅡ 야베스의 이야기는 두 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절 안에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에게 붙은 이름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에게 붙여 준 이름은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ㅡ 그 둘 사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기도가 있었습니다.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가는 기도.

ㅡ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기도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드리고 싶습니다.

 

PPT 6: 오늘 우리의 야베스의 기도

 

주님, 나를 복되게 하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그러나 나의 욕망의 지경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주님의 손이 나와 함께하시고,
악에서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고통받지 않게 하시고,
또한 나 때문에
하나님이 아프지 않게 하시며,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하시며,
이 땅과 모든 생명이 아프지 않게 하소서.

 

ㅡ 야베스처럼 기도한다는 것은 고통이 없는 인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고통이 나에게서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가 또 다른 사람에게로 가지 않게 하소서.
인간의 욕망이 지구의 상처가 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근심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나를 복되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인해 누군가 아프지 않게 하소서.”

 

ㅡ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야베스에게 배우고 싶은 기도입니다.

 

 

[설교 마침 기도문]

 

주님,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그러나 우리의 욕망의 지경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악에서 우리를 지켜 주소서.

우리가 고통받지 않게 하시고,

또한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아프지 않게 하시며,

이웃이 아프지 않게 하시며,

이 땅과 모든 생명이 아프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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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예배자를 소비자에서 비평가로 바꾸는 교회]

ㅡ 브레히트 사망 70주년을 맞아

 

20세기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연극이 관객에게 너무 친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객이 극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 등장인물과 함께 울고 웃고, 마지막에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고 극장을 떠나는 전통적 연극을 의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비극의 중요한 기능으로 여겨졌던 ‘카타르시스’가 오히려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노동자가 비참하게 죽는 연극을 보았다고 하자. 관객은 그의 고통에 감정이입하고 눈물을 흘린다. “참 불쌍한 인생이구나.” 그렇게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마음 한켠이 후련해진다. 문제는 극장 밖의 세상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가난하고, 착취를 만들어낸 구조 역시 그대로다. 관객의 감정은 변화했지만 현실은 변화하지 않았다. 브레히트가 경계한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런 ‘예술을 통한 현실과의 화해’였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관객이 연극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거리를 만들어냈다. 배우가 갑자기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장면 중간에 노래를 삽입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자막으로 알려주기도 했다. 무대장치와 조명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노출하기도 했다. 관객이 계속해서 “나는 지금 연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한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것을 ‘낯설게 하기’, 곧 소격효과(疏隔效果, Verfremdungseffekt)라고 불렀다. 영어로는 ‘Alienation Effect’ 또는 ‘Distancing Effect’로 번역한다. 우리말로 쉽게 옮기면 ‘거리두기 효과’ 정도가 될 것이다.

 

그 목적은 관객을 냉담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현실을 다시 낯설게 보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왜 저 사람은 가난한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정말 다른 삶은 불가능한가?” 브레히트에게 좋은 연극은 관객을 울리는 데서 끝나는 연극이 아니라 관객에게 질문을 남기는 연극이었다. 관객을 소비자에서 비평가로 바꾸는 연극이었다.

 

나는 때때로 브레히트의 연극론을 떠올리며 오늘날 교회의 예배를 생각한다. 우리가 예배에서 행하고 있는 일이 브레히트가 경계했던 연극과 너무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의 많은 예배는 사람을 몰입시키는 데 탁월하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분위기를 만들고, 감동적인 간증과 설교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울고, 위로받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괜찮다. 다시 힘내자.” 그렇게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어 교회 문을 나선다.

 

물론 위로는 필요하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절망한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복음의 중요한 사역이다. 지친 사람이 예배당 한쪽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울다가 돌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 예배는 이미 제 몫을 다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문제가 생긴다. 예배 전에도 가난한 사람은 가난했고 예배 후에도 가난하다. 불의한 노동구조도 그대로이고, 차별받는 사람의 현실도 그대로이며, 사회의 폭력과 탐욕도 그대로다. 심지어 예배를 드린 나 자신의 욕망과 편견, 소비 습관과 권력욕도 조금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마음만 후련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예배 역시 일종의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극장이 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불의한 현실과 무비판적으로 화해하도록 만드는 경우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하나님께 맡기면 돼.” “천국 가면 다 해결될 거야.”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 갖지 말고 신앙생활이나 잘해.” 이런 말들은 신앙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때로는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제거한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고통을 견디라고 가르치고, 불의한 구조 속에 있는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며, 교회가 세상의 질서를 비판하기보다 그 질서에 적응하도록 도울 수도 있다. 그 순간 신앙은 해방의 힘이 아니라 순응의 기술이 된다.

 

설교하는 목회자로, 공부하고 글을 쓰는 신학자로 살아오며 발견한 것이 있다. 성경은 우리를 불의한 현실과 무비판적으로 화해시키기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책이다. 성경의 질문은 인간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경은 매우 정치철학적인 질문도 던진다.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지대한 관심을 둔다. “왜 가난한 자가 굶어야 하는가?” “왜 나그네를 밀어내는가?” “왜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짓밟는가?” “왜 우리는 부를 축적하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가?” “왜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끊임없이 현실을 바라보며 질문하게 만든다.

 

예언자들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 앞에서 “아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권력을 낯설게 만들고, 부자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재산을 낯설게 만들고, 종교인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제사를 낯설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거대한 ‘소격효과’를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예언자들이 낯설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였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오히려 더 깊이 엎드렸다. 성경의 소격효과는 하나님과 거리를 두게 하는 장치가 아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에게 세계가 문득 낯설어지는 사건이다. 브레히트가 관객과 무대 위 현실 사이의 무비판적 동일시를 끊어냈다면,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우리와 세상 사이의 무비판적 동일시를 끊어낸다. 방향이 정반대다.

 

예수님의 비유 역시 그렇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듣는 순간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익숙한 질문은 뒤집힌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공정성의 감각이 흔들린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는 인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온 적대의 질서가 낯설어진다. 복음은 현실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을 다시 보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 역시 사람을 단순히 감동시키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좋은 설교는 때로 회중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삶을 다시 보게 해야 한다.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 “왜 우리 사회는 이런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왜 우리 교회는 이 문제에 침묵하고 있지?” 이러한 질문이 생겨야 한다. 설교자가 답을 모두 제공할 필요도 없다. 때로는 질문을 품고 교회 문을 나가게 하는 것이 더 좋은 설교일 수 있다.

 

예배 역시 마찬가지다. 예배는 한 주 동안 힘들었던 마음을 달래주는 종교적 서비스로만 기능해서는 안 된다. 예배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현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자리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정말 정상인지 묻는 자리이며,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심문하는 자리다. 우리가 스스로 세워 놓은 ‘중심성’을 다시 생각해 보는 자리다.

 

그래서 나는 예배자를 ‘소비자’에서 ‘비평가’로 바꾸는 교회를 꿈꾼다. 좋은 음악을 소비하고, 좋은 설교를 소비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소비한 뒤 “오늘 예배 좋았다”고 평가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시 읽어내는 사람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비평가’란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비평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에 질문하는 행위다. 현실의 질서는 바뀔 수 없는 진리가 아니며,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달라질 수 있고, 공동체가 달라질 수 있고,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라는 말을 거부하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문제의식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브라질의 연극인 아우구스투 보알(Augusto Boal)은 관객을 객석에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극이 진행되는 도중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 올려 배우의 자리에 서게 하고, 기존과 다른 행동의 가능성을 직접 시험하게 했다. 그는 이런 존재를 관객이자 동시에 배우인 ‘스펙트-액터’(spect-actor)라고 불렀다.

 

예배가 우리를 데려가려는 자리도 결국 그곳이라고 생각한다. 비평가는 경유지일 뿐 종착지가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읽어낸 사람은 결국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된다. 그 무대는 대단한 무대가 아니다. 자기가 매일 살아가는 ‘삶의 자리’라는 무대다. 밥상에서, 일터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투표소에서, 지갑을 여는 순간에 세상을 다르게 읽어낸 사람은 자신의 일상에서 관객이자 동시에 배우인 사람으로 살아간다. 예배자가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극장에서 울고 나서 후련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 질문을 교회에 가져오고 싶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고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있는가. 나의 욕망은 달라지고 있는가.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고 있는가. 돈과 성공과 권력에 대한 태도는 달라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지고 있는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신앙을 너무 오래 ‘관람’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예배는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아편’이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살게 만드는 힘이어야 한다.

 

나의 사랑,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생각한다. 교회는 지금의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배가 끝났을 때 우리의 마지막 말은 “은혜받았다”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다음 문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을 시작하셨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를 이루는 것은 우리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일을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는 일이 어렵더라도 힘을 낼 수 있다.

 

“주님,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주의 뜻을 이루소서.”

Posted by 장준식

영화 <오디세이> 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원작 파괴의 논란을 넘어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이 영화가 이미 개봉된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제 개봉된 거였다. 미국에서는 개봉된 지 한참 됐지만, 나는 어제 이 영화를 봤다. 결론적으로, 우연히 한국에서의 개봉일에 미국에서 본 것이다.

 

원작을 '재현'하는 일은 현대 예술 사상에 맞지 않다. 원작을 파괴했다고 핀잔을 주는 일은 무의미하다. 현대 예술의 시대정신은 '재현'이 아니라 '재해석'이다. 그리고 원래 원작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전은 원래 그렇다. 시대를 거듭하며 그 시대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편집과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현대 예술가다.

 

영화 <오디세이>를 통해 놀란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문명의 전환'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문명의 전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영화에서 미케네 문명의 종말을 가리키는 지표(sign)는 '크세니아'(Xenia/나그네 환대법)의 실종이다. 트로이 전쟁의 발발도, 오디세우스의 부재 동안 이카타의 궁전에서 발생한 혼란도 모두 '크세니아의 실종'을 보여준다.

 

크세니아는 제우스 신의 법이다. 신이 나그네(타자)로 변장해 우리를 찾아올지 모르니, 언제든지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법이다. 주인만 나그네를 환대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나그네도 주인을 환대해야 한다. 주인이 나그네를 환대했듯이, 나그네도 주인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상호친절이 크세니아법의 핵심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우리 시대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 시대를 보라. 환대가 파괴되었다. 마음의 환대만 파괴된 것이 아니다. 법적 환대도 파괴되고 있다. 온갖 법들이 '나그네'(타자)를 '호모 사케르'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문명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지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놀라운 이유는 영화 한 편으로 지구에 공부 열풍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놀란 감독은 관객들이 <오디세이>의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호머의 <오디세이>를 사서 읽거나 유튜브에 올라온 <오디세이> 관련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온라인이 온통 <오디세이> 영화 이야기로 가득 찼다.

 

재미로 따지자면, <오디세이> 영화는 드라마 <김부장>보다 재미없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나 톨킨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반지의 제왕>처럼 장엄한 전쟁 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놀란 감독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교차 편집되어 전개가 왔다 갔다 한다. 중간에 정신줄을 놓으면 스토리의 전개를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원작이 가지고 있는 고전의 무게와 감독이 가지고 있는 유명세가 합쳐지면서, 또한 영화를 보기 전 '공부'한 관객들의 적극적 참여가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관람 전 많은 말을 하게 되고, 관람 후 더 많은 말을 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것이 영화 <오디세이>가 일으키는 파란이다.

 

영화를 관람하지 못한/안한 사람은 있어도,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할 것이다. 부디, 현재 우리 시대에 발생하고 있는 문명의 종말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기를, 그래서 우리 시대의 문명을 좀 더 따뜻하게 재탄생시키는 일에 마음이 모아지기를,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좀 더 따뜻하게 환대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 삶의 현실을 바꾸어 나가게 되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Posted by 장준식

[BTS와 신자유주의 문화산업]

― BTS가 실제로 이룬 것은 공동체인가, 플랫폼적 팬덤인가

 

## 이 글은 박삼영 목사님의 BTS 활동에 대한 해석(BTS,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공동체를 노래하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며 BTS 현상을 분석한 글입니다. ##

 

한 시대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들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문화는 정치와 제도보다 먼저 한 시대의 욕망과 불안을 드러낸다. BTS 역시 21세기의 중요한 문화적 현상이다. 그러나 BTS가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아 주었다”는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BTS 현상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면서,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디지털 플랫폼의 구조를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BTS의 성공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 문화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에 가깝다. 음악, 춤, 외모, 성장 서사, 세계관, 소셜 미디어, 팬 참여, 상품과 공연이 하나의 거대한 문화적 생태계로 통합되었다. HYBE 역시 공식적으로 정보기술을 활용해 팬덤 문화를 재구성하고, 아티스트와 팬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플랫폼 사업을 전개한다고 설명한다. 위버스에서는 소통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멤버십, 독점 콘텐츠, 공연, 상품 구매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된다. 관계와 소비가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스펙터클을 단순히 화려한 이미지의 집합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스펙터클을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정의한다. 스펙터클의 핵심은 사람들이 이미지를 본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자체가 이미지와 상품을 통해 형성된다는 데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BTS 공연장에서 수만 개의 응원봉이 하나의 빛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공동체가 회복되었다는 증거라기보다 스펙터클이 완성되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모여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빛을 흔들지만, 서로를 향하기보다 모두 같은 무대와 같은 스타를 바라본다. 그들은 함께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책임이나 공동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와 브랜드다.

 

물론 그 경험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팬들이 받는 위로와 감동은 실제적이다. 그러나 스펙터클은 감정이 거짓이라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감정과 소속 욕망이 상품과 이미지에 의해 조직되고, 다시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기 때문에 스펙터클이다. 콘서트의 감동은 티켓, 응원봉, 영상, 멤버십으로 이어지고, 팬의 사랑은 스트리밍, 홍보, 구매로 이어지게 된다. 고립된 개인의 소속 욕망이 문화산업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ARMY를 곧바로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팬덤 안에서 실제 우정과 돌봄과 연대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에는 지속적인 상호 책임, 약한 구성원에 대한 돌봄, 갈등을 조정하는 규범, 그리고 함께 추구하는 공동선이 필요하다. 스타가 활동을 중단하고 신곡과 공연이 사라진 뒤에도 그 관계가 지속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한병철은 『무리 속에서』에서 디지털 소통이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지속적인 공동체와 공론장을 해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군집은 빠르게 모여 반응하고 공유하지만, 책임 있는 ‘우리’로 지속되기 어렵다. 그것은 공동체라기보다 관심과 감정이 일시적으로 집결한 무리에 가깝다.

 

ARMY 역시 이러한 디지털 군집의 특징을 일정 부분 보여준다. 팬들은 자발적으로 번역하고, 영상을 공유하며, 스트리밍 목표를 세우고, 차트 순위를 관리한다. 팬은 더 이상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그는 홍보자이자 번역자이며 콘텐츠 생산자이자 데이터 생산자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의 상당 부분은 무보수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플랫폼과 기업의 가치 상승으로 귀속된다.

 

한병철이 『심리정치』에서 분석한 신자유주의 권력의 특징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권력은 사람에게 강제로 노동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표현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열심히 활동한다. 사람은 자유롭다고 느끼면서 스스로를 동원한다. 팬에게 열정과 노동은 구분되지 않는다.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착취라고 느끼지 않지만, 그 사랑과 열정은 끊임없이 경제적 가치로 전환된다.

 

“Love Yourself”라는 메시지도 이러한 양면성 속에서 봐야 한다. 이 말이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불안과 결핍을 개인이 해결해야 할 심리적 문제로 환원할 위험도 있다. 청년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 입시 경쟁, 불안정 노동, 외모 산업, 주거 불안과 계급 격차는 그대로 둔 채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체제를 변화시키는 언어라기보다 체제 안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개인을 수리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더구나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음원 순위, 조회 수, 판매량, 팬덤 간 경쟁이라는 거대한 비교 체제를 통해 유통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을 적용한다면, BTS가 모방 욕망을 극복했다고 말하기보다 팬덤이 모방 욕망을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사람들은 다른 팬이 구매하기 때문에 구매하고, 다른 팬이 열광하기 때문에 더 열광하며, 더 충성스러운 팬으로 인정받기 위해 경쟁한다. 지라르의 이론은 BTS를 경쟁의 대안으로 미화하기보다 팬덤 내부의 욕망과 경쟁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찰스 테일러의 표현적 개인주의를 인용하면서 BTS가 현대인의 소속감 결핍을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성급하다. 테일러가 비판한 것은 단순히 현대인이 자기표현을 많이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개인의 진정성이 공동의 도덕적 지평과 사회적 관계에서 분리되는 문제는 심각하다. 브랜드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자신의 취향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표현적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연장일 수 있다. 공동체는 동일한 취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의 세계를 책임질 때 형성된다.

 

BTS가 그래미의 ‘아시아 팝’ 범주에 문제를 제기하고 2027년 그래미에 앨범을 제출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서구 음악산업이 비서구 음악을 별도의 지역적 범주에 가두는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문제 제기다. 그래미는 실제로 2027년 시상식부터 ‘Best Asian Pop Music Performance’ 부문을 신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조차 신자유주의 문화산업 안에서는 새로운 브랜드 가치가 될 수 있다. 제도에 대한 거부는 BTS를 “서구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적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팬덤의 결속을 강화한다. 이것은 그들의 결정을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마저 상품과 서사로 흡수하는 자본주의의 힘을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BTS가 실제로 이룬 성과는 무엇인가. 그들은 한국어 대중음악이 서구 음악시장의 주변부에 머물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디지털 플랫폼과 팬 번역, 참여적 팬덤과 연속적인 서사를 결합해 새로운 초국적 문화산업 모델을 만들었다. 서구가 독점하던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을 흔들었다는 점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공동체의 회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BTS가 이룬 것은 공동체의 회복이라기보다 공동체를 갈망하는 고립된 개인들의 감정과 참여를 세계적 네트워크로 조직한 것이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실제 우정과 연대가 탄생할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을 BTS 산업 전체의 본질로 바꾸어 말해서는 안 된다.

 

BTS는 현대 자본주의를 넘어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문법을 가장 창의적이고 성공적으로 구현한 문화적 현상이다. 현대 문명이 BTS를 필요로 했던 이유는 그들이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아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외로움과 소속 욕망까지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BTS라는 스펙터클을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BTS가 공동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은 BTS라는 상품화된 공간 안에서도 결국 서로를 찾고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다. BTS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 역설 속에서 찾아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AI,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류 최대의 화두는 기후위기였다.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물 부족, 산불과 폭염이 세계를 뒤덮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담론의 중심이 AI로 옮겨갔다. AI는 마치 인류를 구원할 기술처럼 이야기된다. 교육도, 의료도, 행정도, 기업 경영도, 심지어 예술과 종교의 영역까지 AI가 바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놓치고 있다. AI는 정말 인간을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토대, 곧 물과 전기와 땅과 지구를 더 빠르게 소모하고 있는가.

 

AI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기술이 아니다. “클라우드”라는 말은 가볍지만, 그 클라우드는 땅 위의 거대한 데이터센터로 존재한다. 데이터센터는 전기를 먹고, 열을 내며, 그 열을 식히기 위해 물을 필요로 한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2025년 485TWh에서 2030년 950TWh로 거의 두 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AI 중심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는 같은 기간 세 배로 늘어날 것으로 보았다. AI가 똑똑해질수록 지구는 더 많은 전기와 물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는 셈이다.

 

물 문제는 더 심각하다. 미국에서 새로 계획되는 AI 데이터센터의 상당수가 이미 가뭄을 겪는 지역에 들어설 예정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형 데이터센터는 하루 최대 수백만 갤런의 물을 냉각용으로 사용할 수 있고, 미국 데이터센터 전체의 물 사용량은 앞으로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농업용수이고, 어떤 지역에서는 식수이며, 어떤 지역에서는 이미 부족한 지하수이다. 기업은 “혁신”을 말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우리 물은 누가 지키는가”를 묻고 있다. 실제로 미국 여러 지역에서 주민들은 데이터센터가 전기요금을 올리고, 지하수를 고갈시키며, 조용한 삶의 터전을 거대한 산업 시설로 바꿀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들에게 AI는 미래의 추상적 기술이 아니라, 오늘 자신의 마을에 들어오는 물과 전기와 소음의 문제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AI 기업들은 이제 단순한 기술 기업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 행위자가 되고 있다. NPR 보도에 따르면 AI 관련 슈퍼팩들은 2026년 중간선거 국면에서 이미 수천만 달러를 쏟아부으며 의회 선거와 지역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규제를 받아야 할 산업이 규제자를 선택하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AI가 인간을 위해 쓰이려면, 인간 공동체가 AI를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AI 산업의 속도와 자본이 정치와 사회를 끌고 가는 형국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뉴욕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민주사회주의자들과 진보 후보들이 약진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기술 발전”이라는 말에 박수치지 않는다. AI와 데이터센터를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되며, 물 사용량과 전력 사용량, 탄소배출, 전기요금 영향, 세금 혜택, 지역 주민 동의 절차를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후보들은 데이터센터 건설을 일정 기간 멈추고, 물 재활용과 독립적인 청정 전력 공급, 지역 주민 부담 방지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일부 도시 지역과 젊은 유권자들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AI의 미래는 더 이상 실리콘밸리의 이사회와 투자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의 삶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AI,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이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 종은 기술의 승리를 알리는 종일 수도 있고, 인간이 자기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의 종일 수도 있다. AI 붐에 취해 있는 동안, 우리는 물과 땅과 전기와 기후라는 삶의 기본 조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위한 AI라면, 먼저 인간이 살아갈 지구를 지켜야 한다. 민주주의가 기술을 통제하지 못하면, 기술은 결국 민주주의를 통제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빠른 AI가 아니다. 더 깊은 민주주의이다.

 

Posted by 장준식

[트랜스휴머니즘과 구원]

 

H+. 휴머니티 플러스(Humanity Plus)의 약자다. 이 단체는 1998년 닉 보스트롬(Nick Bostrom)과 데이비드 피어스(David Pearce)에 의해 World Transhumanist Association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이후 2008년 Humanity+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기술과 증거 기반 과학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고, 인공지능, 장수, 인류의 미래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자신들의 중요한 사명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을 ‘트랜스휴머니스트’(transhumanist)라고 부른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묻는 철학적·문화적 운동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기술을 통해 자기 증강(enhancement)을 실현해 왔다. 과학기술은 인간이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기술을 통해 인간은 새보다 높이, 더 빨리 날 수 있게 되었고, 맹수보다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이 ‘변신’(trans)한다는 것은 일종의 ‘구원’처럼 작동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문제는 인간이 변화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어떤 변화가 인간을 참으로 구원하는가이다.

 

변신, 또는 변화(transformation)는 기독교 신학에서도 핵심적인 주제였다. 대표적인 개념이 ‘신화’(theosis)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변화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죄책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삶의 방향이 바뀌고, 사랑의 질서가 바뀌고, 존재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이다.

 

변신, 또는 변화의 주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발견된다. 로마 시대의 작가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는 온통 변신과 변화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변신은 구원이기도 하고 상처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사람이 나무가 되고, 새가 되고, 꽃이 되고, 돌이 되고, 별자리가 된다. 하지만 그 변신은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다프네는 월계수가 된다. 겉으로 보면 아름다운 자연의 기원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아폴론의 추격을 피하려는 몸부림의 결과이다. 필로멜라는 새가 된다. 그것은 해방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에는 끔찍한 폭력과 침묵의 강요가 있다. 나르키소스는 꽃이 된다. 아름다운 신화처럼 남지만, 그 안에는 자기 자신에게 갇힌 욕망의 비극이 있다.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달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그들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기술을 통해 인간의 더 밝은 미래를 꿈꾼다. 기술을 잘 사용하여 인간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변신’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한다. 기독교도 변화를 말한다. 그리스-로마 신화도 변신을 말한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최신 기술도 인간의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세 담론이 지향하는 변화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려 한다. 신화는 인간의 욕망과 상처를 변신의 이야기로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는 변화를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순히 “인간은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참으로 구원하는 변화인가?”

 

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해 ‘구원’의 의미가 다시 묘연해졌다. 인간은 더 강해질 수 있고, 더 오래 살 수 있고,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간은 구원받는가. 구원이란 무엇인지 곱씹어 보는 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Posted by 장준식

[반지성과의 결탁: 죽음에 이르는 길]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 결탁하는 것은 혁신하라는 6.3 민심에 대한 배반입니다.” 6월 5일, JTBC 뉴스룸 앵커 한마디의 마지막 멘트다. ‘부정선거 주장’은 허구다. 이미 과학적, 법적 검증을 거쳐, 부정선거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 온 인사들은 여전히 선거 불신을 조장하고 있다. 6.3 지방선거에서 선관위의 치명적인 실수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저항’의 빌미를 제공했다. 야당 대표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모인 잠실 투표소에 가서 ‘함께 투쟁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모든 장면이 웃프다. 코미디 같다. 이 장면이 웃프고 코미디 같은 이유는 그들의 ‘결연함’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토대 때문이다. JTBC 앵커가 말했듯, 이 장면이 웃프고 코미디 같은 이유는 그들이 ‘반지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교계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에서 ‘유신진화론’에 대하여 ‘이단’이라고 명시하는 문구를 교단 헌법에 집어넣었다. 이 풍경이 웃프고 코미디인 이유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밟고 있는 토대와 같기 때문이다. 반지성. 반지성이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반지성은 검증 가능한 사실을 거부하고, 반증 가능성을 닫아버리며, 자기 확신을 애국이나 신앙의 이름으로 절대화하는 태도다. 이러한 현실이 절망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반지성주의는 단순한 정보 제공만으로는 잘 치유되지 않는다. 지성인들이 이러한 반지성적인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고 지성적인 호소를 해도 아무 소용없다. 반지성에 사로잡히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아무리 사실적인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다.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1990년대 이후 하나의 기괴한 흐름이 두드러진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이 미국의 자본주의에 깊이 포섭된 이래로 한국 사회의 정치와 종교 안에서 반지성주의가 점점 더 노골화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역사는 길다.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의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는 이 현상을 분석한 고전으로 꼽힌다. 서론의 한 부분을 옮겨 본다. “1950년대를 거치면서 그전에는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던 반지성주의라는 용어가 미국 사회에서 자기비난과 상호매도를 의미하는 일상어가 되었다. 호프스태터의 이 책은 1962년에 출간되었다. 그 이후,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 중에는 칼 세이건(Carl Sagan)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 Science as a Candle in the Dark)이라는 책도 있다. 세이건은 이 책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유사과학, 미신, 종교적 맹신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또한 과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키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지성인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여전히 반지성주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윤여일은 그의 책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1990년대는 지금 시대를 규정짓는 여러 조건들의 근기원이다… 특히 1990년대는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가 그 첫선을 보이고, 현재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다양한 위기가 출현하고, 현재 한국사회의 갖가지 논쟁들의 밑그림이 그려진 시대였다. 2020년대 속에서 1990년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10-11쪽).

 

1990년대를 거치며, 한국에 들어온 것은 미국의 자본만이 아니다. 자본과 함께 ‘반지성주의’가 함께 들어왔다. 한국교회의 세습 문제 역시 반지성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교회가 공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멈추고, 권력의 승계를 ‘은혜’와 ‘안정’의 이름으로 포장할 때, 지성은 침묵하고 공동체는 사유 능력을 잃는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를 강타한 것은 유사과학이다. 바로 창조과학. 현대 젊은 지구 창조론과 홍수지질학의 중요한 계보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였던 조지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가 있다. 그는 안식교 창립자 중 한 명인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가 본 환상에 기반하여 문자적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1923년 저서 『신지질학』을 통해 지구가 6,000~8,000년 전 6일 동안 창조되었으며, 현재의 지층과 화석은 노아의 홍수 때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지성적 창조론은 ‘창조과학’이라는 옷을 입고 한국에 유입되었고,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1981년에 설립되었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자신들이 안식교 교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지성이 토대가 된 곳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부정선거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반지성 때문이다. 교회 세습이 발생하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창조과학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한 교단의 총회에서 ‘유신진화론’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이유는 반지성 때문이다. 앵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 결탁하는 것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배반이다. 반지성의 근본은 미움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랑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진실을 미워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질문을 억압한다면, 그 사랑은 이미 폭력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래서 반지성은 근본적으로 미움인 것이다.

반지성에 토대를 두고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죽도록 사랑해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반지성에 토대를 두고 창조과학을 신봉하며, 진화론을 반대하는 이들은 교회를 죽도록 사랑해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폭력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반지성에 토대를 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의로워 보일지라도, 아무리 간절해 보일지라도, 아무리 결연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목적에서든 반지성과의 결탁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반지성과 결탁하는 정치는 민주주의를 죽이고, 반지성과 결탁하는 종교는 신앙의 양심을 죽인다. 교회가 지성을 두려워하기 시작할 때, 교회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지성과의 결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의 길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6. 6. 2. 13:44

[창세기와 빛]

 

창세기를 읽으며

빛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빛은 좋은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빛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인지

전깃불에서 나오는 빛인지

아니면 아직 우리가 모르는

다른 빛인지

 

분명치 않은 것을 들여다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빛,

 

빛을 생각하다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일까요

 

눈을 감으면

보이는 빛을 가리는 것인데

 

기도는

빛을 빼앗는 일일까요

빛을 찾는 일일까요

 

창세기를 다시 읽으면

첫날에 지으신 빛은

눈에 보이는 빛만은 아닌 듯합니다

 

보이는 빛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빛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첫날에 지으신 빛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빛이 비추면

길을 잃지 않을 것 같은데

 

대낮에 활보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햇빛은 이렇게 환한데

전깃불은 이렇게 밝은데

 

사람들은 왜

자기 길을 잃고

남의 길 앞에 서고

세상의 길마저

어둡게 만드는 것일까요

 

환한 빛 속에서도 어둡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빛은

따로 있는지도 모릅니다

 

첫날의 빛은

눈을 감고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기다릴 때

 

우리 안쪽에서

조용히 밝아지는 빛인지도 모릅니다

 

그 빛이 비추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길을 잃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태양도

전깃불도 아닌지 모릅니다

 

첫날의 빛,

아직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빛

 

창세기를 읽으며

빛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길 잃은 자에게

성경은 빛입니까

 

잘 모르는 것을 알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빛,

 

아직 보지 못한 빛,

우리에게 필요한 빛,

 

생각이 멈추면

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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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