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시대의 교회론: 공동생존의 교회
우리는 어느새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사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도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기업도 조직도 개인에게 위험을 떠넘긴다. 직장을 잃어도, 아파도, 노후가 불안해도 결국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세계의 질서마저 흔들리면서 국가 간 연대보다는 자국의 생존을 우선하는 모습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사회에서 개인까지, 거대한 국제질서에서 작은 가정까지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시대의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교회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교인 수는 줄고 재정은 어려워진다. 작은 교회들은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고, 교단 역시 예전처럼 개교회들을 충분히 지원하기 어렵다. 목회자와 교인 모두 지쳐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세상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때로는 사치처럼 들릴 수 있다. 남을 돕기 전에 우리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여기에서 교회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교회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회가 살아남아야 하는 까닭은 누군가를 혼자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교회의 사명은 각자도생을 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사명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공동생존의 교회’라고 부르고 싶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애초부터 ‘홀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 몸은 독립된 기관들의 집합이 아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다른 지체도 함께 아프고, 한 지체가 기뻐하면 다른 지체도 함께 기뻐한다. 바울의 몸의 신학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협동정신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 없이 온전한 내가 될 수 없다는 관계적 존재론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참여’(participation)의 중요한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의 삶에 참여한다. 인간은 고립된 원자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 참여를 통해 다시 이웃의 삶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인생만 책임지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논리는 기독교적 인간 이해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성찬은 이 진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성찬상 앞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이 같은 빵을 먹고 같은 잔을 나눈다. 누구도 자기 몫의 빵만 들고 따로 먹지 않는다. 하나의 떡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성찬은 개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종교 의식만이 아니다. ‘너는 혼자 먹고 혼자 살 수 없다’는 복음의 사회적 선언이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 역시 마찬가지다. 초대교회가 강했던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건물도 제도도 권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고, 자신의 것을 나누었다. 필요가 있는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홀로 버려지지 않도록 했다. 코이노니아는 친교 이상의 말이다. 그것은 서로의 삶을 나누어 짊어지는 공동체적 참여였다.
웨슬리의 속회(class meeting)도 같은 전통에 기반한다. 초기 감리교 운동의 힘은 대형 집회만이 아니었다. 몇 사람이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삶을 묻고, 신앙을 점검하고, 아픈 이를 돌보고, 가난한 이를 돕고, 서로 책임지는 작은 공동체가 있었다. 신앙은 주일 한 시간의 예배로 끝나지 않았다. 삶을 서로 돌보는 구조가 있었다. 어쩌면 오늘의 교회가 다시 발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공동생존의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교회가 모든 병원비를 대신 내줄 수도 없고, 모든 실직자를 고용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보다 사람을 혼자 두지 않는 능력이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조금 나눌 수 있다.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내 줄 수 있다. 자신이 잘하는 일로 재능기부를 통해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다. 누군가는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는 아이를 돌볼 수 있다. 교회에 큰돈이 없어도 가능하다. 앞으로 좋은 교회는 자원을 많이 가진 교회라기보다 서로가 가진 것을 잘 연결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모든 개교회가 교육, 선교, 복지, 자녀세대 사역을 혼자 감당하려는 시대는 지속되기 어렵다. 작은 교회들이 서로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공간과 사람과 경험을 나누어야 한다. 경쟁하는 교회에서 연결되는 교회로, 자족하는 교회에서 상호의존하는 교회로 전환해야 한다.
물론 교회의 지속 가능성도 중요하다. 재정도 정비해야 하고, 불필요한 프로그램도 줄여야 하며, 목회자의 번아웃도 막아야 한다. 희생을 낭만화해서 교회 자체가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우리 교회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라고 물은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그 답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곁의 누군가가 혼자 살아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세상은 말한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라.” 교회는 다른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의 인생을 우리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혼자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앞으로 교회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복음의 모습일 것이다. 큰 교회가 아니라 연결된 교회, 강한 교회가 아니라 서로 의존할 줄 아는 교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가 아니라 아무도 홀로 버려두지 않는 교회. 각자도생을 넘어 공동생존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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