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6. 13. 19:04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인의 삶을 살기 간구하는 기도

(엡 1:1-14)

 

주님, 우리는 공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선 존재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화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능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사로운 개인의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공인으로서의 삶으로 부름 받았으니,

주여, 우리를 거룩한 무리, 신실한 자들로서

찬양하는 언어, 감사하는 언어, 세워주는 언어를 쓰며

생명이 형편없이 망가져가고 있는 이 세상을 치유하는

공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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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13. 19:03

누가 공인(公人/public figure)인가?

(에베소서 1:1-14)

 

나는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얼굴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얼굴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인기인’이지 ‘공인’이 아니다. 공인이란 공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널리 인기가 있을 뿐이지 그들이 하는 일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사적인 일이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이지, 대중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면 누가 공인인가? 연예인이 공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공무원을 공인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공무원을 공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무원은 국가라는 제한된 차원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뿐이지, 존재의 보편적 차원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공인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공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말씀은 왜 그리스도인이 공인인지, 그리고 공인이란 무엇인지, 공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公人)’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자기 인식이 꼭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이 되는 것이라는 자기 인식이 흐려지면,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익집단(이익집단/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집단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으로 추락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있는 바울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것은 바울의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우리는 바울의 이름 논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은 바울의 이야기를 은혜롭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을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바울은 히브리 사람이다. 히브리 사람으로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인으로서 바울은 로마식 이름(Roman surname)인 ‘바울(파울로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고정해서 사용한 이유는 그가 예수의 부르심으로 인해 ‘작은 자’가 되어서 겸손의 표현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사명 때문인데, 본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이름인 ‘바울’을 사용한 것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삶을 공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그가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선포였던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지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동안에 그와 함께 있었고, 또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가리킨다(행 1:21-22; 고전 15:4-5).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다른 열 두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동행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바울의 등장은 성령강림절 후, 예수님의 승천 후,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해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 칭한 것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때문에 그렇고, 무엇보다도, 그 체험으로 인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즉, 자신의 삶이 사사로운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공적인 삶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사도’로 부른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공인’이다. 그는 더 이상 개인의 사사로운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의 인생, 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행동이나, 그가 하는 말은 사사로운 개인의 말, 행동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적인 말, 공적인 행동이 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안에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공적으로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라는 특수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삶이 공적인 삶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바울의 이야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편지의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을 표현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바울이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부르는지 보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헬라어 원문에는 ‘편지하노니’라는 말이 없다. 이것이 그냥 편지이기 때문에, ‘편지하노니’라는 말을 덧붙인 것 뿐이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성도’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하기오이/saints)’라는 뜻이다. ‘거룩한’이라는 뜻은 도덕적으로 성결하다는 뜻이 아니다. ‘거룩한’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거룩한 무리’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무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가 거룩한 무리라고 불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때문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과 관련된 용어이고,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인간인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사사로운 개인의 삶을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생득적으로 ‘공인’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에 ‘관계(relationship)’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적 용어, 관계적 삶, 공적인 삶을 낯설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인의 삶, 사사로운 삶’을 강조하고, 그것이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어 놓고 고립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공공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 알고 그것을 강화시키지, 자기의 삶을 공적인 삶으로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삶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다니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발생하고 있는 슬픈 현상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을 ‘성도’라고 부르는 동시에,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신실한 자들’이라고 번역된 ‘피스토이’라는 헬라어는 수동적 개념으로 ‘신뢰할 만한’이라는 뜻도 있고, 능동적 개념으로 ‘신뢰하는’이라는 뜻도 있다. 수동적인 개념을 생각해 보면, 성도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거룩한 무리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서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교회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러한 신뢰 없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겠는가. “나는 여러분을 신뢰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우리는 서로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지난 달에 한국갤럽에서 한국종교에 대하여 여론 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17%, 불교 인구는 16%, 가톨릭 인구는 6%로 집계됐다. 무종교인은 60%로, 한국갤럽이 조사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무종교인 중 82%가 말하기를 ‘종교는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호감가는 종교는 불교가 20%, 가톨릭이 16%, 그리고 개신교가 6%였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이 ‘공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스스로를 ‘공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자들(피스토이)의 능동적 의미는 ‘신뢰하는’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냥 신실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믿음은 관계적 용어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삶을 사사롭게 개인적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관계적 삶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계적인 삶, 공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은혜와 평강(grace and peace)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 ‘은혜(카리스)’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혜가 주어지면, 우리에게 평화가 임한다.

 

성서학자들은 개정개역에서 ‘평강’이라고 번역된 우리말을 평화(에이레네)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강’은 개인적이며 내적인 평안을 말하는 것인데, 히브리어의 ‘샬롬’을 표현하고 있는 헬라어의 ‘에이레네’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평안을 넘어 관계적 의미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적 평안을 나타내는 우리말은 ‘평화’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는 관계적 평화를 이룬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너와 나 사이의 관계적 평안’이 임한다. 그렇지 않은가? 값없이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값없이 베풀지 않겠는가? 그렇게 서로 값없이 베푸는 관계에는 텐션(tension/긴장감)이 흐르지 않고, 평안이 흐르는 법이다.

 

그러나, 이 은혜와 평화의 가치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형편없이 무너져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의 열매로 생각하려 한다. 열심히 일해서 내가 모은 재산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간 것이고,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것이고 등…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자기의 성취에 근거한 것이고, 그래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야 사랑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그렇다. 자녀가 부모의 자랑이 되어야 자녀는 사랑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성장하면서 상처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차별비교경쟁 속에서 서로 간의 관계적 평화를 잃어간다.

 

이와 달리, 거룩한 삶, 신실한 삶, 공인으로서의 삶(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한 삶일까? 그것은 3절 이하에 등장하고 있는 ‘영광송’이 가르쳐 주고 있다. 바울은 편지의 시작을 ‘영광송’으로 하고 있다. 공인으로서의 삶은 영광송(doxology)을 드리는 것이다. 영광송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3-6절은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 선택과 예정(계획하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고, 7-12절은 성자 하나님이 하신 일, 구속(redemption)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고, 13-14절은 성령 하나님이 하신 일, 인치심과 보증(성령 하나님이 성도들 안에 내주하신다: 구원의 완성과 풍성한 삶에 대한 보증)에 대하여 영광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이제 공인으로서의 삶이 된 것은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에 관계적으로 엮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이제 개인적인 사사로운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간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제 더 이상 사사로운 개인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영광송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일상의 언어가 모두 기능어로 전락하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을 지적하는 학자가 있다(<After Writing>, 캐서린 픽스톡). 우리 일상언어를 보면 서로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언어만을 쓸 뿐이다. 작업지시언어. 마치, 컴퓨터의 자판처럼 무엇인가를 기입하고 나서 엔터를 치면, 그것대로 실행하는, 기능어 말이다. “빨리와. 밥먹어. 공부해. 피아노쳐. 밥차려. 설거지해. 씻어. 문닫어. 불꺼. 컴퓨터 그만해. 운전해. 전화해. 예약해. 빨리자. 일어나. 등등등” 이런 기능어 외에 우리는 어떤 언어를 쓰고 사는가?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언어인가? 서로를 찬양하는 언어인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언어인가? 서로를 세워주는 언어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서로에게 쓰는 언어는 너무너무 기능적인 언어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제 ‘공인’으로서 기능어를 쓰지 않고 영광송(doxology)의 언어를 써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속에 은혜와 평화가 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그리스도인의 공적 삶이 너무도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 기능어만 사용하다 보니, 관계가 메말라 있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끼리 너무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사람은 자연을 착취하고, 자연은 사람에게 반격하여 해를 입힌다. 평화가 없고, 근심과 걱정과 절망과 한숨만 늘어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을 치유하라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누가 공인인가? 연예인이? 공무원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공인이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성취하신 구원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되고, 그 구원이 종말까지 보증되는 우리의 삶은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능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상처주고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워주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해를 입히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공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찬양하는 언어, 감사하는 언어, 세워주는 언어를 쓰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들로 인하여 생명이 더 풍성한 세상이 될 거라 믿는다. 공인으로서의 그 거룩한 삶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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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6. 6. 19:02

자기로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삼상 8:1-19)

 

주님,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남처럼 살면 안 됩니다.

주님,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산다는 것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오니,

주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나에게 주신

주님의 생명을 온전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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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6. 19:01

자기로 살기

(사무엘상 8:1-9)
 

오늘 본문은 위로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다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1-3절).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가? 위로가 된다. 사무엘이 어떤 사람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이면서 사사이다.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다. 굉장한 영성과 굉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지도자 중의 지도자였다. 게다가, 그의 엄마는 어떠한가? 그렇게 유명한 엄마를 두는 게 쉽지 않다. ‘한나(Hannah 해나)’. 얼마나 유명한지, 그녀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여성의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사무엘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유명한지, 그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남성의 이름도 너무 많다. 너무 유명해서, 그의 이름은 ‘개’에게도 잘 붙여진다. 내가 기억하는 나 어릴 적 우리집 개의 이름도 사무엘이었다. ‘Sam/쌤.’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 한나의 손자와 사무엘의 아들답게 이름도 멋지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고, ‘아비야’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개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서 짓는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한나와 사무엘의 자손답게, 요엘과 아비야는 ‘요와 야’, 즉 여호와의 약자, 여호와의 이름을 담아낸 이름이다.

 

이런 면에서 요즘 우리가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아서 지었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서 이름을 짓는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곧 찬양이고 영광이었는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곧 꿈이고 욕망이다. 이름에 꿈과 욕망을 담기보다 신앙고백이 담기면 좋겠다.

 

위대한 할머니와 위대한 아버지를 둔 요엘과 아비야, 그리고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을 가진 요엘과 아비야, 그런데 이들은 아버지처럼 훌륭한 제사장과 사사가 되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버지에 한참 미치지 못한 아들들로 역사에 기록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아무리 위대한 할머니라도, 아무리 위대한 아버지라도 그 자식들은 마음대로 못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자식 낳아서 기르는 것을 ‘자식 농사’라고 표현한 것 같다. 농사는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하늘이 제때 비와 햇볕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풍년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원래 농부들의 신앙이 깊은 것이다.

 

사무엘이 여러가지 면에서 스승 엘리 제사장보다 뛰어난 지도자였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함께 지냈다. 사무엘은 스승 엘리 제사장의 두 자녀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은 스승님보다 자식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나중에 자신의 자식들이 스승님의 자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 그때 비로소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위대한 사무엘이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도 자식 문제만은 어떻게 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몰라도 자식 문제만은 더욱더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패러디해서 자식에게 적용하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무릇 맡길 만한 것보다 더욱 자식을 주님께 맡기라.”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자식한테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모두, 맡길 만한 것보다 더욱 자식을 주님께 맡기라. 주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다.

 

사무엘의 두 아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이어서 장면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라마에 살고 있는 사무엘에게 찾아가 엄청난 요구를 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요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댄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5절). 이러한 요구를 하는 이유를 두 가지 대는데, 하나는,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는 달리 듬직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이유이다.

 

이들의 요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즉, 왕을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떼를 쓰며 표면적으로 댄 이유는 사무엘과 사무엘의 자식들 때문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겉으로는 사무엘의 연로함과 그의 두 아들의 부족한 지도력 때문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말에 들어 있었다. 즉, 그들은 나른 나라에 있는 ‘왕 제도’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무엘은 마음이 불편했다. 첫째,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말해서 빈정이 상했고, 둘째, ‘왕을 세워 달라는 것’ 자체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빈정상하고 속상할 때, 사무엘이 보인 반응이 참 은혜롭다. 그들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른 누구의 위로보다 하나님에게 위로 받을 때, 진정 마음에 평안이 오는 법이다. 빈정상하고 속상했던 사무엘도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위로를 받았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내를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절). 사무엘은 자신의 연로함과 자신의 자식들을 탓하며 왕을 세워 달라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으며 ‘이제 사람들이 나를 내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서운했을 그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들의 속내를 알게 되면서 위로 받는다.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사무엘을 내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사무엘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며 ‘모든 나라와 같이’라고 할 때 ‘모든 나라’는 주변국들이었다. 특별히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다섯개의 도시들(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이 연합해서 만든 블레셋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주변국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렸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원수처럼 굴었는데,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어놓으면 어김없이 와서 약탈해 갔다. 정말 못살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좀 더 자신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강력한 왕정 체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요구가 정당해 보인다. 누구든지, 안전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무엘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욕구, 즉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했다”는 문자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그것은 사무엘의 눈에 악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무엇이 악한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그 소임과 특권을 버리고, ‘다른 나라들처럼’ 되려고 한 것이 악한 것이다.

 

뉴스에서 중국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중국의 인구가 13억 정도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구가 너무나 많다 보니까, 1980년도부터 중국은 산아제한 정책(birth limits policy)를 강제해왔다. 그런데, 요즘 중국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많아 짐에 따라서 경제활동이 가능한 연령대의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하기에, 인구가 13억 정도되니까,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가 엄청 많을 거라고 짐작하는데, 13억 인구가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폐지하고, 노동 가능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은퇴 나이를 올리기로 했다는 기사였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가 씁쓸했다. 중국이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는 중국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중국이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는 중국 정부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굴기 정책’ 때문이다. 중국은 나라를 ‘성공적인/번영하는 소비 사회’와 ‘세계적인 기술 선두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입장에서 인구의 고령화나 노동인구의 감소는 그러한 정부의 정책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구가 망가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비사회’와 ‘무분별한 기술개발’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이 바로 그 지구를 멸망하게 하는 대열에 합류해서, ‘다른 나라들’처럼 되겠다고, 그래서 이 세상의 최고 강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아쉽다. 중국이 중국답지 못하고, 그저 다른 나라들, 그것도 지구를 망치는 나라들을 따라하겠다는 것 자체가 실망인 것이다. 만약 중국이 중국의 유서 깊은 유가나 도가, 또는 묵가의 사상에 따라, ‘소비사회’나 ‘기술사회’가 아닌 ‘덕의 사회’를 세워 나가겠다고 자신들의 길을 걸었다면, 이 세상의 판도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미 멸망해가는 다른 나라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을 추월하겠다고 하니, 지구가 망가지는 속도는 더 가팔라 질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필요한 나라가 아니다. 왕정 제도가 있더라도 ‘나른 나라들’처럼 왕정 제도를 두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선택받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세우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왕이신 하나님이 ‘이미’ 계시기에, 다른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두지 않아도 된다. 만약 이스라엘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자기들의 소임과 책임을 다했다면, 오히려 주변 나라들이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기어코 왕정 제도를 갖추었고, 왕이 있으면 그 왕을 통해서 더 안전한 나라, 더 번영하는 나라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열왕기상하의 말씀이 전해주고 있듯이, 바로 그 왕정 제도 때문에 망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자기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살려고 했다가,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도 ‘자기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살려고 하면, 나를 지키지 못하고 만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조에/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내어놓으시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생명)’를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이들처럼’ 살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우리에게 무슨 왕이 필요한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살면 된다. 자기로 살기,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이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사무엘이 다른 것은 다 주님께 맡겼는데, 자식 문제만큼은 주님께 맡기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있는가? 지금 내가 힘쓰고 애쓰는 바로 그것,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을 위해 걱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간구는 했지만, 그것 자체를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나라도, 민족도, 개인도 모두 자기로 못살고 누군가를 따라가려 한다. 부탄 같은 나라, 얼마나 멋진가? 그 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 왜? 다른 나라를 따라가려 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보라, 얼마나 힘든가? 다른 나라, 특히 미국을 따라가느라 모든 게 종속되어, 거기가 한국인지, 아니면 미국의 51번째 주인지 모를 정도로 나라 자체의 정체성이 위기를 겪고 있다. 요즘 개인들의 삶을 보라. 얼마나 다른 이들을 따라 사는가? 다른 이들과 동일한 의식주를 누리지 못하면 수치스러워 한다. 남을 따라 사느라, 남 신경 쓰느라, 자기로 살지 못해, 행복하지 못하다.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모든 면에서 자기로 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나라를 따라서’, ‘다른 사람을 따라서’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냥 ‘자기로 살면’ 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사는’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는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지금 내가 힘쓰고 애쓰는 바로 그것,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을 위해 걱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힘들고 어려웠더라도 그들의 삶의 문제를 더욱더 주님께 맡겼다면, 사무엘이 늙었어도, 사무엘의 두 아들이 사무엘처럼 듬직하지 못했더라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를 저들에게 보내주실 것을 믿고, 그 문제를 주님께 맡겼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 열방들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그 실패의 역사가 구약성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담은 것이 성경이다. 우리는 주님께 맡기는 것을 실패하고 있는가, 성공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산다는 것은 곧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자기도 지키고, 주변의 사람들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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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이 토모아키의 <신학을 다시 묻다>를 다시 읽다

ㅡ 신학은 종말론적 지성이다.

 

"신학은 인간이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그때까지 인간을 잠정적인 존재로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다. 모든 학문적인 작업은 가설이며 언제나 상대화될 수밖에 없음을 신학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역사도, 현실도 끝나지 않은 이때, 죄인인, 불완전한 인간은 진리의 일부만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신학적 지성'이며 달리 말하면 '종말론적 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194쪽)

 

3년 여 전, 일본학자가 쓴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읽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의 학문도 성장한 바, 다시 읽어본 이 책은 '여전히' 참 좋은 책이었다.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를 묻는 책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 신학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근대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 기독교의 사회사를 심도 있게 보여준다.

 

실전에서 목회하는 이들에게는 제7장 '실용주의로서의 신학'이 매우 도움될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기독교 신학이 청교도 DNA에 따라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실용주의'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는지, 그리고 '쓸모'에 방점을 두는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 안에서 기독교 신학과 교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세워나가는 것이 '실제적' 도움이 될지, 상당한 통찰을 전해준다.

 

그러나 '미국적 기독교'가 가져다준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기에,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은 미국적 기독교를 마냥 환영하고 수용할 수만은 없는 입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 또한 떠맡게 된다. "즉 시장화된 신학계에서 그 신학의 좋음과 나쁨, 진리성을 결정하는 것은 교회, 교파의 지도자, 대학교의 신학자들, 국가기관이 아니라 소비자들, '대중(교인/나의 첨가)'이다."(174쪽). 이 말은, 곧 시장화된 교회에서 목회자가 '장사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될 것인가의 기로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적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의 성공은 '시장화된 교회'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다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목회의 성공 신화'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또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먹히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자본가적 스펙/교회 운영을 잘 할 것 같은 스펙)을 쌓으면 시장화된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에 청빙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 원리를 아는 목회자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을 쌓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고, 목회 성공의 기회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스펙 쌓기 때문에, 그렇게 스펙을 쌓은 목회자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는 바람에 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교회와 목회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 '신'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다. 시장의 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할 것인가. 목회란 시장의 개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하는 것인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시장이 보장해 주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삶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시장의 권력은 강력하고, 우리는 벌거벗었고.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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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

 

'주권-국민국가'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다. 주권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국민을 이루고, 그 국민이 자신들의 주권을 국가에 (계약에 의해) 위탁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개념이 바로 근대에 생겨난 '국가'의 개념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산다. 그래서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세금도 내고 징집도 되고 열심히 일한다. 현대 정치철학은 국가에 대한 그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자유주의의 출현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들의 비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주권-국민국가'의 신념을 산산이 부서뜨린다. 대신, 국가를 '주권-국민'에서 분리시킨다. 이것은 더 이상 국가 주권을 가진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국가는 시장과 대립관계에 있으며, 국가는 시장에 대하여 간섭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더이상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는 기구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는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 잔인한 경쟁 원리를 내장한 시장 질서를 국민들에게 관철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시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시장원리, 즉 무한경쟁 원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주권-국민'을 통제하며 법을 무기 삼아 시장원리에 국민들이 지배되도록 강제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주권-국민'은 국가의 변절로 인하여 당황스럽고 황당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질서에 의하여 자신이 시장의 하위 주체로 전락한 것을 숨기기 위하여 국가는 각종 복지혜택을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현대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백신 접종 문제를 통해서 이것을 좀 더 살펴보자면,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제공하고 접종을 권고하는 것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국가는 국민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나,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즉 복지혜택으로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이유는 시장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는 노동의 유연화이다. 즉 자본가가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동자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노동자가 말랑말랑하지 않으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무한경쟁을 통한 이윤추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국가의 임무는 시장의 요구에 따라 '주권-국민'을 자본이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항시 대기시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팬데믹 상황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노동력의 유연화에 불가피한 타격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은 '주권-국민'을 다시 자본이 원하는대로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백신 개발을 위한 국가의 저돌적인 투자, 그리고 개발된 백신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투여시키는 정책은 '주권-국민'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즉 시장을 위한 충성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국가의 통치술을 '벌거벗은 생명'의 통치(생명정치biopolitics)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주권-국민'을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 시장의 경쟁과 이윤 추구를 위하여 국민들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국가가 행한 백신개발과 백신공급을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그것은 가장 큰 착각일 수밖에 없다. 국가는 더이상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국민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배신에 저항하려고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이미 벌거벗겨져 있으며, 백신을 맞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자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이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구원하리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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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약함(weakness)]

 

인간의 위약함이란 인간 이하로, 즉 존재의 무의미로 추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인간의 이러한 위약함을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규정해 주는 신학 용어가 바로 '죄(sin)'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위약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무의미로 추락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집단이나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조에ζωή'라는 신학적 개념은 인간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제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존재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은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인류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체계나 과학기술의 발전도 모두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기는 커녕, 인간에 대한 지배 통치술로 자리잡았다는 데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바로 그것에 자신의 생명을 맡겨버림으로 인하여 그것에 의해 자유를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를 '조에'라고,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그러한 지배 통치술에 대한 반기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조에'를 주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약함, 즉 존재의 무의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하나님의 영 이외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조에(하나님의 생명)'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하기 보다, 다른 것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한다. 가령, 건강, 경제적 풍요, 세련된 정치체계 등,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으며, 우리는 점점 더 '조에'에서 멀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겪는 이 끝간 데 없는 불안,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원래 유약한 것인데, 그 유약한 존재의 구원을 구원하지 못할 것들(우상)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불안은 이유모를 불안이 될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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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조에! 조예!! 심조!!!요즘 자주 희락당의 글을 자주 읽지 못하지만 글을 읽을 때 마다 절차탁마, 자강불식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예라는 말을 넘어 심히 깊은 조예에 이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최근에 쓰신 글들을 보니 희락당의 신학, 철학, 사상이 확장 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잘 통합되어 하나의 체계로 정립된다면 성도가 세상을 바라보는 큰 창의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1.06.05 05:30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도문2021. 5. 30. 20:51

조에를 찾아 나서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8:1-11)

 

주님, 우리는 무엇을 애통해 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이 부추기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에 대하여

애통해 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충분히 건강하고 충분히 풍요롭지만 우리의 욕심은 끝간 데 없어

만족을 모릅니다.

주님, 우리 안에 있던 ‘조에(하나님의 생명)’가 쪼그라든 것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었던 조에가 쪼그라든 것을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옵소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조에가 실종된 것을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옵소서.

주님, 푸쉬케(건강)과 비오스(경제적 풍요)는 목적이 아니라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위한 수단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목숨과 살림살이를 십자가 위에 바쳐

우리에게 조에(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조에를 잃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조에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을 위하여 생명을 낭비하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는 신실한 주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조에를 찾아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 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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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30. 20:48

조에를 찾아서 (Finding ZOE/ζω)

(로마서 8:1-11)

 

‘조에를 찾아서’는 ‘니모를 찾아서’의 패러디다. 아빠 물고기 말린(Marlin)은 낛시꾼에게 잡혀간 아들 물고기 니모(Nemo)를 찾아서 멀고도 험난한 여행을 떠난다.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는 비극적인 장면에서 시작된다. 말린과 코랄은 보금자리 해초 더미 안에 알 400개를 낳는다. 알이 부화되기 직전, 꼬치고기가 알들을 잡아먹기 위해 공격해 왔고, 알들을 지키려던 엄마 물고기 코랄과 400마리의 알은 모두 꼬치고기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그 중에 한 알만 살아남는데, 꼬치고기의 습격 때문에 상처를 입어 그 알에서 태어난 아기 물고기는 한쪽 지느러미에 장애를 입는다. 아빠 물고기는 엄마의 소원대로 살아남은 아들 물고기에게 ‘니모’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니모(nemo)는 라틴어로 ‘nobody’라는 뜻이다.

 

400개의 물고기 자식들에게 ‘니모’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자식들이 너무 많아 니모의 의미처럼 ‘nobody’였을 텐데, 이제 단 하나 살아남은 자식 물고기에게 ‘니모’라는 이름은 더 이상 ‘nobody’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빠 물고기 말린은 니모를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어느 날 불행하게도 니모가 어느 스쿠버다이버에게 포획되었을 때, 아빠 말린은 아들 니모를 찾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더 이상 ‘노바디(아무도 아닌 존재’)가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생명과도 같은 아들 물고기 찾아 떠나는 모험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바로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이다.

 

우리는 방금 ‘니모를 찾아서’에 대한 줄거리를 전개하면서, 아빠 물고기가 ‘생명’과도 같은 아들 물고기를 찾아 떠났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명’이란 무엇일까? 로마서 본문에서도 보면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본문에 나오는 생명이라는 단어는 함께 등장하는 ‘죄와 사망’과는 이질적인 것,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오늘, 이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언어는 그 지역 문화의 총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에 번역하는 것 자체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배이지역(San Francisco Bay Area)에서만 살던 아이에게 ‘산(mountain)’이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당연히, 배이지역에서만 살던 아이에게 산은 민둥산일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에서 살던 아이에게 산은 어떤 의미일까? 당연히 숲이 우거진 산일 것이다. 같은 ‘산(mountain)’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배이지역의 아이와 강원도의 아이에게 ‘산’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산의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

 

성경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불행이기도 하다. 축복인 이유는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 언어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이지만, 불행인 이유는 성경의 원래 언어인 헬라어가 담고 있는 깊은 뜻을 한국어가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 많은 오해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죄’라는 용어가 그렇다. 한국어로 번역한 성경의 ‘죄’는 헬라어로 ‘하르마티아’이다. 한국어의 ‘죄’는 불교용어이다. 불교용어로서 죄는 ‘도덕성’과 연관된 단어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를 나타내는 ‘하르마티아’는 도덕성과 연관된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단어이다. ‘하르마티아’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죄’를 도덕성과 연관시키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죄’라고 부르지만, 성경에서 ‘죄/하르마티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서의 ‘죄’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죄’를 도덕성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당장 감옥에 가야할 인물이다. 어떻게 아들을 잡아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그를 ‘의인’이라 부른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 불린다. 왜 그럴까? 그가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한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발생한 ‘신앙사건’이지, 아들을 죽이려 한 파렴치한 아버지의 부도덕한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죄(하르마티아)’는 문제적 용어이다. 우리는 함부로 누군가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서, 즉 도덕성 문제를 가지고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의인이 아니고,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죄인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매우 비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구원받은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매우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에는 우리의 상식과 다른 전복적인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증진시키는 일이지, 그것과 상관없이 도덕성을 키우는 일은 ‘위선’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은 도덕성을 키우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도덕성을 키우기 어렵다. 그러나 누가 더 하나님 나라를 더 간절히 원하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까?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이다. (부도덕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 삶이 요구된다.)

 

신약성경에는 우리말로 ‘생명’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셋이나 있다. 프쉬케(ψυχ), 비오스(βος), 조에(ζω)가 그것이다. 이 각 단어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가 마땅치 않다. 그래서 이 각 단어를 풀어서 설명하면, 우선, 프쉬케는 ‘생물학적 목숨’을 말한다. 이 단어가 쓰인 구절은 마태복음 6장 25절의 말씀이다. 프쉬케의 구체적인 뜻을 적용하여 그 구절을 풀이하면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생물학적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또한 요한복음의 말씀 중 프쉬케가 쓰이는 구절은 이런 것들이 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물학적 목숨’을 버린다”(요 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생물학적 목숨’을 버린다”(요 10:15).

 

다음, ‘비오스’는 우리말로 ‘살림, 또는 생활’에 가까운 말이다. 비오스는 살림살이, 생활수준의 뜻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쉽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나오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이생’이라고 번역된 것이 ‘비오스’다. 우리가 보통 성경을 읽을 때 사용하는 개역개정판보다 새번역 또는 공동번역에서 이것을 좀 더 헬라어의 뜻에 가깝게 번역했다. 새번역은 ‘이생의 자랑’을 ‘세상 살림’, 즉 ‘살림살이, 생활수준’으로 번역을 했고, 공동번역에서는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탕자)이 아버지에게서 ‘분깃’을 받아 나간 것, 그 분깃이 바로 ‘비오스’다. 즉,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살림살이/재산’을 분배 받아 나간 것이다. 아들은 그 살림살이/재산을 탕진했다. 요한일서의 언어로 옮기면, 탕자는 자신의 재산/살림살이를 세상에서 자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용어는 ‘조에’이다. 조에는 위의 푸쉬케와 비오스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이다. 푸쉬케와 비오스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물론 푸쉬케(생물학적 목숨)와 비오스(살림살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생물학적 목숨이나 살림살이(생활수준)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에 넣어주신 생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아주 원초적인 생명이다. 생명을 생명 답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숨결(루아흐)이다. ‘조에’라는 용어가 쓰인 신약의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양들이 생명(조에)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 “내가 바로 생명(조에)의 빵이다”(요 6:35). (푸쉬케, 비오스, 조에에 대한 주석은 우진성 박사의 '일점일획 참조)

 

위에서 제시한 생명을 가리키는 신약성경의 세 용어, 푸쉬케, 비오스, 조에는 요즘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로 바꾸면, 푸쉬케(생물학적 목숨)는 ‘건강(외모)’으로, 비오스(살림살이)는 ‘경제적 풍요’로, 그리고 조에는 ‘영성(하나님의 생명과의 일치)’으로 옮길 수 있다. 건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우리에게 건강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건강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경제적 풍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경제적 풍요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하고, 바라는 것, 즉,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하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를 건강하게 하시고,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도록, 또는 지금 누리고 있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한다는 것이다. 아주 간절히.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복음과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증거하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푸쉬케(건강)와 비오스(경제적 풍요)’를 찾아나서는 사람들은 즐비한데, 막상 가장 중요한 ‘조에(하나님의 생명)’을 찾아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데 있다. 왜 그럴까? 무엇이 진짜 생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머물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건강보다 경제적 풍요보다 더 중요한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조에)’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니모의 아빠 말린이 니모를 찾아 그 험난한 여정을 떠난 것은 니모가 생명처럼 소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가장 중요한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푸쉬케와 비오스를 찾아나서는 것을 멈추고, ‘조에’를 찾아나설 것이다. 아니, 푸쉬케와 비오스를 찾는 것만을 강요하는 이 세상의 논리에 저항하며, 그러한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생명, 조에를 찾아나설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고후 4:7a).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담긴 ‘보화’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조에’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프쉬케(생물학적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바로 그것, ‘조에’이다. 우리는 바로 그 조에를 우리 몸에 지니고 있다. 그렇게 ‘조에’를 지니고 있는 사람의 삶이 어떤가,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조에를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조에)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후 4:7b-10).

 

예수님은 퓌쉬케(생물학적 목숨)와 비오스(재산/살림살이)를 바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가져다주셨다. 즉, 건강과 경제적 풍요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찾아나서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하며 산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조에)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것을 팔아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사려고 한다. 우리의 목적은 어느새 ‘조에’가 아니라, ‘푸쉬케’와 ‘비오스’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의 비극이고 신앙의 소외다. 사실 이 비극과 소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푸쉬케의 정욕, 비오스의 자랑을 부추기는 세상을 따라갔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조에)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자유인, 의인이 된 이유는 우리의 도덕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과 살림살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조에(하나님의 생명)’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건강(푸쉬케)과 비오스(경제적 풍요)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의 풍요로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조에가 그 풍요로움을 말해준다.

 

조에를 찾아서! ‘푸쉬케와 비오스만을 찾아나서!’라고 부추기는 이 시대에, 어느새 실종되고 만 ‘조에’를 찾아 나서는 일은 더욱더 긴급히 요청된다. 건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경제적 풍요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조에’이다.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취급 받지 못하고, 경제적 풍요가 없으면 무시당하는 이 세상, 그러나, 조에가 없는 것은 괜찮다고 말하는 이 세상!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 하고,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할 줄 알면서, 조에가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 세상!  바로 우리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애통해 하며 사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조에(하나님의 영원한 생명)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물로 받은 조에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 세상에 저항하며, 우리가 가진 건강, 우리가 가진 경제적 풍요를 수단 삼아 ‘조에’를 찾아 나서야 한다. 조에를 잃어버린 이 세대를 놓아두고 애통해야 한다. 그리고 조에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힘껏 전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조에를 찾아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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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정치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류 역사가 모더니티(Modernity)를 거치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를 몰아낸 행위를 뒤집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힘에 밀려 공공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종교'는 더 이상 공공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의견'을 내기 힘들어졌다. 공공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더이상 종교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 더 이상 종교의 지혜를 듣지 않게 된 것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특별히 허무주의의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는 문제, 환경파괴의 문제 등)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맞닥뜨린 '파국' 앞에서 다시 생명의 가치를 되살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의 지혜를 발현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해졌다.

 

정치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전부터 '두 왕국 이론'은 이 세상에 마치 두 왕국(교회와 정부)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두 영역 간의 파워게임이 발생하는 것처럼 사유되어 왔으나, 그것은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비참한 오해이다. 이러한 조악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적대적으로 싸우고 있다.

 

정치신학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어떻게 견인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종말론적 정치 비전이다. '주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이 세상에 대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이 땅,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긍정이며, 이 땅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다.

 

정치신학은 이 죄악 많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나 저주나 멸망의 선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랑의 보듬음이다. 공공영역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복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끔 공공영역을 이끄는 것이 정치신학이다. 그러므로 요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신학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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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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