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만든 도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여러모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떠올리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두 도성을 이야기한다. 한 도성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도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만들어진다. 자기 사랑의 도시와 질서 잡힌 사랑의 도시라고 표현해도 좋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올바른 사랑을 ‘카리타스’(caritas)라고 불렀고, 사랑이 제자리를 찾은 상태를 ‘사랑의 질서’(ordo amoris)라고 생각했다. 결국 어떤 사랑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도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에서 선택한 두 도시는 런던과 파리다. 그러나 디킨스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두 도시의 지리적 차이가 아니다. 그는 산업화와 계급격차로 요동치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살아가면서, 반세기 앞서 유럽을 뒤흔들었던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만으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최고의 시대였고 최악의 시대였다. 디킨스는 처음부터 세계의 이중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도식으로 만들면 이렇다.
런던 / 파리
귀족 / 민중[
억압 / 혁명
생명 / 죽음
증오 / 사랑
복수 / 용서
시드니 카턴 / 마담 드파르주
1789년 이후 유럽은 혁명의 충격 속에서 요동쳤다. 왕정과 귀족의 특권은 거듭 도전받았고, 공화정과 왕정, 혁명과 반동이 반복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유럽의 정치적 상상력을 바꾸었다면,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은 그 혁명의 의미를 다시 묻게 했다. 디킨스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문학적으로 바라보았다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을 통해 근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분석했다.
디킨스가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견한 것은 혁명의 윤리적 비극이었다. 귀족사회의 오랜 억압과 폭력이 민중의 분노를 낳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억압받던 사람들이 권력을 손에 넣자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정의를 향한 분노는 복수의 열정으로 변해 갔다. 혁명은 낡은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바로 여기에서 디킨스의 질문이 시작된다. 무엇이 폭력의 도시를 생명의 도시로 바꿀 수 있는가.
찰스 디킨스가 자녀들에게 예수의 생애를 들려주기 위해 쓴 『예수의 생애』(The Life of Our Lord)가 보여주듯이, 그의 기독교적 상상력은 교리적 논쟁보다 예수의 사랑과 자비, 용서와 자기희생에 무게를 두었다. 디킨스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느냐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였다. 『두 도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도 바로 이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시드니 카턴이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구현된다.
카턴의 죽음은 디킨스가 제시하는 혁명의 윤리적 대안으로 읽을 수 있다. 소설 속 공포정치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복수의 논리로 치닫는다면, 카턴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내가 죽음으로 네가 산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다. 두 죽음이 있다. 죽여서 세상을 바꾸려는 죽음이 있고,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죽음이 있다. 디킨스가 믿었던 진짜 혁명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가.
AI의 출현과 함께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시를 꿈꾸고 있다. 더 편리한 도시, 더 효율적인 도시, 더 생산적인 도시, 무엇보다 더 ‘스마트한’ 도시다.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들은 사활을 걸고 AI 기술에 투자한다. 정부는 국가 경쟁력을 이유로 산업을 지원하고, 기업들은 경쟁하면서도 거대한 인프라를 함께 구축하며, 투자자들은 장밋빛 미래를 바라보며 돈을 쏟아붓는다. 서로의 목적은 다르지만 모두 거대한 AI 도시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디킨스라면 빛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도시의 찬란한 불빛 뒤에 가려진 사람들을 먼저 보았던 작가다.
AI가 작동하려면 서버가 필요하고, 서버를 돌리려면 거대한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데이터센터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고, 냉각을 위한 물과 토지, 송전망과 발전시설도 필요하다. 그래서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지역에서는 전력망의 부담과 전기요금, 물 사용, 소음과 환경문제, 토지 이용을 둘러싼 갈등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AI가 만들어내는 편리함은 전 세계로 흩어지지만, 그 편리함을 생산하기 위한 비용은 특정한 지역과 사람들의 삶 위에 집중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이 돌아온다. 이 도시는 어떤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기술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발전을 꿈꾸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사랑의 질서다. 기술을 인간보다 더 사랑하고, 효율을 공동체보다 더 사랑하고, 성장과 이윤을 누군가의 삶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사랑은 질서를 잃는다. 아무리 스마트한 도시를 건설해도 그 도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자기 사랑의 도시가 될 수 있다.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얼마나 똑똑한 기술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해 이 기술을 만드는가. 그 혜택은 누가 누리고, 그 비용은 누가 치르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희생하면서까지 이 도시를 건설하려 하는가.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를 보여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사랑이 두 도성을 만든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 앞에도 두 도시가 놓여 있다. 인간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도시와, 기술을 더 빨리 발전시키기 위해 인간을 비용으로 처리하는 도시. 우리는 어느 도시를 건설할 것인가. 도시는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 모양을 닮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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