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이야기2020. 1. 17. 12:16

바다낚시 멀미 경험

 

지난 연말, 교회 집사님들과 바다낚시를 갔다. 처음 가는 바다낚시라 긴장도 되었고, 주변에서 바다낚시 가서 겪을 수 있는 '멀미'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름 잘 대비한다고 했는데, 그만 출항 후 1시간 30분 되는 시간부터 멀미가 시작되었다.

 

금문교 밑을 지나 들어간 태평양의 파도는 거칠었다. 처음에는 파도에 몸을 실어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출렁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멀미가 왔다. 마인드 콘트롤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건 놀이기구야. 그냥 즐기면 돼.'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마인드 컨트롤의 임계점을 넘어선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냥 바닥에 눕고만 싶었다.

 

선실 안 의자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이미 잡고 있어 자리 양보 부탁을 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들도 아니었고, 대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지만, 러시아 사람들과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나는 선실 안에 눕는 것을 포기하고, 그나마 한적한 선수에 누웠다. 그런데, 파도가 거칠어지며 배 안으로 들이친 바닷물이 누운 나를 덮쳐 왔다. 손 하나만 까딱여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덮쳐 오는 파도를 온 몸으로 받으며 견뎠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더 갔다.

 

세 시간 항해 후, 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전 9.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배가 서니 파도에 배는 더 출렁이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았다. 때마침 목적지에 도착하여 사람들이 바다낚시를 시작한 덕에, 선실 안의 의자가 비었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선실 안 의자에 몸을 눕혔다. 차가운 뱃바닥에 눕는 것보다 나았다. 그런데 문제는 추위였다. 이미 바닷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쓴 뒤라 바닷바람이 솔솔 불면서 몸을 춥게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핸드폰 차저(charger)겸 손난로(hand warmer)를 부여 잡고 추위를 참았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그 작은 물건이 나의 유일한 생명 보존 장치였다. 나는 그 자그마한 물건이 뿜어내주는 온기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잠이 들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그 손난로가 마중물이 되어 잠이 들 수 있었다.

 

얼마를 잔 것일까. 잠에서 깨어 보니 아직도 사람들은 고기를 낚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몸은 따뜻해져 있었다. 몸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했다. 몸은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게 위해서 잠이 들었을 때 저절로 몸의 체온을 높였다. 깨어 있을 때 몸의 체온을 높이려고 노력해도 아무 소용 없더니, 잠이 들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 몸은 스스로를 보호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려 들기 보다, 자기 자신을 그냥 놓아버릴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삶의 체온을 선물로 주는 것 같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배멀미를 하며 꼬박 8시간을 배 안에 누워 있었다. 8시간 동안 배멀미 하며 신음 가운데 있었던 나를 돌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춥다고, 혹시 난로 있냐고 선장에게 물었을 때, 그런 거 없다고, 그냥 투박한 우비 하나 건네 받은 게 전부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낚시를 하는 동안, 그리고 뭍으로 돌아오는 동안, 8시간 동안 아무 움직임 없이 누워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나를 돌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사실 배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돌봐준 것이었다. 배멀미에 고통 당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들은 아무 것도 해 줄 게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같다. 차라리 아무런 시선을 주지 않는 것, 아무 말을 붙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입을 열 힘조차 없었던 나에게 시선을 주고 말을 붙였다면, 나는 정말로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선실 안의 한 의자(4, 5명이 앉을만한)를 차지하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지만, 그 누구도 누워 있는 나한테 일어나라고, 조금 비켜달라고 말을 하거나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무언으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고, 돌봐준 적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돌봐주었던 것이다.

 

8시간의 멀미는 배가 다시 금문교 밑을 지나 항구로 들어 왔을 때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두 다리가 뭍을 밟자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멀쩡해졌다. 형편 없이 젖었던 옷은 모두 말라 있었고,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몸은 오히려 상쾌했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도 참 신비스러운 것이다. 아무도 나를 돌봐준 이 없으나, 모든 이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삶의 무한한 신비에 휩싸였다. 그리고, 문득, 먼 바다를 아득히 쳐다보며 삶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깊은 묵상에 잠기게 되었다. 삶은, 사람은 참 신비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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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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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0. 1. 16. 10:44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간구하는 기도

(골로새서 1:1-14)

 

주님,

골로새 교회를 향해 드린 기도가

우리 교회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우리도 그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서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는 믿음으로

신실한 일꾼이 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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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16. 10:36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

(골로새서 1:1-14)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에바브라(Epaphras)가 세운 교회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사역할 때 문하생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참 대단한 거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조지아에서 교회를 개척한 경험이 있다. 교회를 개척한 뒤, 우리 교회에서 사역한 수련목들도 대개 다 개척을 했다. 한 수련목이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마치고 교회를 개척할 당시, 여러 교회에 후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써준 추천서에 나는 개척의 필요성을 절절히 서술한 일이 있다. 개척하는 일은 연못에 계속하여 맑은 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는 논지였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교회 개척은 교회라는 물이 썩지 않도록 계속하여 맑은 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난 연말에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며, 우리 교회의 창립일을 2017 430일로 정한 것도 사실 그런 원리다.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연못에 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새로운 교회는 늘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나와 함께 사역을 한 후배 목회자들이나, 주변의 후배 목회자들에게 늘 개척을 권면한다. 개척하여 연못과 같은 교회의 맑은 물이 되라고 말한다. 물론, 대개 맑은 물 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개척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후배들을 내가 나무랄 자격은 없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든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성장하면 나는 교회 개척하는 것을 돕고 싶다. (물론 내가 또 개척을 나가게 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원래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까.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나도 때론 힘들다.)


복음을 듣고, 에바브라와 같은 열정이 생겨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바울이 에바브라에 대하여 칭찬하면서 말한 것처럼, 성령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 되어 전도하고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일인가. 우리 모두 그러한 믿음이 더욱 성장하도록 간구하고 기도하면 좋겠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다. 복음주의적인 주석서들은 대개 이렇게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러면서 골로새서는 잘못된 가르침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잘못된 가르침은 이성주의, 율법주의, 금욕주의이다. 이게 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다. 잘못 이해하면, 우리에게 이성, 율법, 금욕은 다 필요 없고, 그리스도의 우월성만 중요하다고 하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치 기독교는 반이성주의, 반율법주의, 반금욕주의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를 불러온다. 예수 그리스도만 중요하고, 다른 것을 다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 것 같지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는 세상을 등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에 사로 잡히면, 세상과의 소통이 멀어지고, 세상의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며, 자기 신앙 안에 갇혀 고립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정말 답 없는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성의 완성이시고, 율법의 완성이시고, 금욕의 완성이시다. , 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고, 율법도 마찬가지고, 금욕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성과 율법과 금욕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있고,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고 근본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아주 중요한 기도를 담고 있다. 9절부터 12절이 기도이다.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 교회의 지체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한다. 9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서 아는 것에피그노신이라는 헬라어를 쓴다. 이것은 의도적인 표현이다. 골로새 교회가 맞닥뜨린 도전은 영지주의(그노시스즘)’에 대한 것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들이 주창하는 지식(그노시스)’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말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쭐해진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은 그 누구도 우쭐해질 수 없다. 모든 지식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고 있고, 누구든지 어떤 지식에라도 접속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어떠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듯 말하는 집단은사이비. 대개 이단이나 저급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푸는 성경의 내용이 대단히 비밀스러운 것인데 그 비밀을 특별히 노출하고 있는 양 말한다. 지식의 독점을 주장하는 사람은 건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다만 진리는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자신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고 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진리는 자신을 숨긴다. 그러나, 진리를 어린 아이와 같이 사모하고 누구와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진리를 모습을 드러낸다.

 

바울은 기도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며!”(9, 10). “아는 지식”, (knowledge)”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에서 시작된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말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참된 이치를 깨달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이렇게 들리다.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뜻 알게 된바울의 동역자들 중에, 위에서 이야기 한 에바브라 이외, 에바브로디도와 디도가 있다. 에바브라, 에바브로디도, 디도는 한결같이 바울처럼 순교하기를 결심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옥에 갇힌 바울을 돌보며 빌립보 교회와 가교 역할을 했다. 그가 왜 그런 수고로운 일을 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디도는 그당시 목회하기 가장 힘들다는 크레타 섬에 가서 목회를 했다. 크레타 섬 사람들은 디도서에 나오듯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고, 마음이 사악했고, 행동이 게을렀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1:12-13). 그런데, 디도는 왜 그런 곳에 가서 기꺼이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바브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듣고, 고향인 골로새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교회를 개척한 이유가 무엇인가? 누구는 교회 하나를 세우기도 힘든데, 세 군데나 교회를 개척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면,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게으른 종으로 사는가?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우리 교회를 향해 드리는 기도로 들리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서,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들이 모인,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면 좋겠다. 우리 얼른 부흥해서, 교회 개척 많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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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0. 1. 13. 15:29

예언과 환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

(잠언 1:20-33)

 

주님,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예언)과 환상을 주셨는데

우리는 지혜롭지 못하여 그 지혜의 말씀과 환상을

놓쳐 버리곤 합니다.

예언과 환상을 가벼이 여기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예언과 환상을 소중하게 여길 때

우리의 인생과 공동체는 주변여건환경에 의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예언과 환상 안에서 평안을 얻게 될 줄 믿나이다.

주여,

예언과 환상을 가벼이 어리석은 자 되지 말게 하시고

그것들을 단단히 마음에 품는 지혜로운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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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13. 15:15

You’re in good hands

(잠언 1:20-33)

 

세상에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 많은 일들에 우리가 다 적절하게 대처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것들 때문이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 보다 큰 존재인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겨, 우리의 삶을 평안케 하고자 함이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이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긴 하지만, 모든 종교에는 기복(복을 간구함)’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이 문제지, 만약 우리의 신앙에 기복의 요소가 없으면, 누가 종교에 매력을 느끼겠는가.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은 유한하지만,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존재,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야말로 지혜롭게대처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그러한 지혜를 얻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육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특별히 잠언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깊이 가르쳐 준다. 나는 잠언서 읽는 것을 참 좋아한다. 마침 잠언서는 31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한 달에 한 번씩 통독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성문서/지혜서’(시편, 잠언, 전도서)는 삶의 방향을 잃은 것 같았을 때,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묵상하면 신비스럽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말씀이다.

 

본문을 보라. 우리를 부르는 것이 있다. 우리가 평소 그것을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시집 가야하고 장가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이 많아서’, 그냥 지나쳐서 그렇지 우리를 매일 부르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지혜이다. 지혜는 우리를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20).

 

이렇게 불러 대는 데도, 우리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산다. 지혜는 우리를 불러서,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어떻게 다른 지를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를 멸시한다. 귀를 닫고 듣지 않는다. 그러다, 재앙을 만나면 울고, 슬퍼한다. 그러나,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환란의 때에 구원을 받는다.

 

이게, 당연한 이야기 같고, 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자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지혜로운 줄 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심리학적 용어로 메타인지가 부족하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저 너희가(어리석은 사람)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30).

 

내가 이런 말을 강조해서 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예언과 환상을 주셨고,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두려움 없이교회를 세워 나가게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예언과 환상을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이다.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과 환상의 말씀은 어디에서 왔는가?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기억하고 계신가?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이다.

 

에스겔서 16장은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피투성이 같은 연약한 이스라엘을 씻기시고 입히셔서, 왕후의 지위에 올리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에스겔서 47장은 성전에서 물이 나와 강을 이루고 그 강 좌우편에 심긴 나무들이 다음 말씀처럼 되는 환상이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47:12).

 

지난 2019128일을 일컬어 코스피 굴욕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날 애플(사과주식회사/우리동네기업)의 주식 시가총액은 1,402조가 되었고, 그 총액은 코스피 전체의 주가 시가총액 1,384조를 넘어섰다. 애플이 주식의 시가총액이 높은 이유가 뭔가? 미래에 대한 성장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식 투자를 할 때, 이렇게 미래에 대한 성장 기대치를 말해주는 시가총액을 보고 투자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무엇을 보고 미래 대한 성장 기대치를 가질 수 있을까? BTS의 팬덤 Army1억명이 넘는다. 여기 1억명은 BTS를 위해서 뭔가 하나라도 구매를 통해서 기여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이 BTS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치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보고 교회를 정해서 다니며 그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투자하는가? 규모나 시설 등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시가 총액이 아니라, 그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비전)’의 말씀이다.

 

여러분은 내가 바보 같은가? 어떤 바보가 망해가는 교회에 오는가? 여러분은 바보인가? 어떤 바보가 망해가는 교회를 지키는가? 내가 우리교회에 오게 된 것, ‘아 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나의 인생을 헌신해야겠구나!’라고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외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 때문이다.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치가 없는 곳에 자신의 돈도 아니고, 인생을 투자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내가 바보처럼 보이는가?

 

3대째 목회자로서, 그리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일에 인생을 건 목회자로서 내가 평소에, 그리고 평생 연마하는 기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술이다. 나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신비를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본문에서 지혜가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시끄러운 길목에서, 성문 어귀에서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훈련 받아야 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이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두 교황>이라는 영화가 최근 Netflix에서 상영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꼭 보시라! 정말 좋은 영화다!) 이 영화는 가톨릭의 전현직 교황 두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핵심은 고해성사이다. 두 교황이 서로 고해성사 하는 가운데,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전직 교황(베네딕투스 16/조세프 라칭거/265)은 교황직을 내려 놓는 자리로, 사직하고 싶었던 추기경(프란치스코/호르헤 베르고글리오/266)은 교황직에 오르는 자리로, 서로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 과정은 서로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다. 전직 교황 베네딕투스 16세는 자신이 교황직을 내려 놓으려는 가장 큰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요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았다. 아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며 살았다. 요세프 라칭거는 원래 엄청 유명한 신학자이다. 여성신학자로 유명한 하버드대학의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라는 분이 있다. 사실 이분 보다 더 유명한 분이 그의 남편 프란시스 피오렌자이다. 프란시스 피오렌자가 하버드 대학의 부름을 받았을 때, 본인의 부인을 함께 임용하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했다. 물론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도 엄청 뛰어난 학자였기에 하버드에서 프란시스 피오렌자의 요구를 승락했지만, 프란시스 피오렌자는 그만큼 뛰어난 학자다. 프란시스 피오렌자의 스승이 누구냐면, 철학자 하버마스와 요세프 라칭거이다교황 베네딕투스 16세는 결국 베르고글리오 추기경과 대화하며 고해성사하는 가운데,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려온다.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비전)의 말씀이 없는 곳에 인생을 투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다. 정말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주변여건사정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을 고려한다. 그게 없으면 발을 들여 놓지 않고, 그게 있으면 지옥이라도 간다! 루터도 이런 말을 했다. “지옥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나는 지옥에 가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라. 진지하게, 그리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시라. 마리아가 어린 예수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둔것처럼, 그렇게 내가 간곡하게 드리는 말씀을 마음에 두시라.

 

요즘에 부모들은 스마트폰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다. 아이들하고 매일 같이 스마트폰 때문에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그 문제를 진지하게 풀고 있는 책 <포노 사피엔스 Phono Sapiens>의 저자 최재붕 교수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스마트폰이 자신의 장기organ’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무작정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부모들은 아이들이 스마트폰 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할까? 최재붕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들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연 경험이 없고, 그저 스마트폰을 통해서 게임이나 하고 유튜브나 보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들 자신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그런 비효율적 경험 밖에 못하니, 아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목회자로서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부모 세대는 아이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본을 보이지 못할까? 교회에서 싸움 박질하고, 교회가 갈라지고 깨지고, 시대에 뒤처진 복음 이야기만 듣고, 뭔가 혁신적이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경험을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신비로운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다. 그러한 경험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이 주어진 우리 교회에 그냥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면 된다. 그것을 교회 용어로 교제(fellowship)’라고 한다. 아주 쉽게 말해,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처럼, 생수가 강단으로부터 흘러 나가고 있다. 이것은 내가 우리 교회 와서 드린 첫 새벽기도회 때 본 것이다. 나는 그런 환상 보는 것을 추구하거나 갈망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어떻게 하는가. 본 것을 봤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증언할 뿐이다. 그것이 강을 이루고 있다. 그 강가에 심기운 나무가 되는 것이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잎사귀가 풍성하고 열매가 끊이지 않으며 그 잎사귀가 약재로 쓰임을 받는 놀라운 축복의 삶을 사는 길이다.

 

이삭이 브엘세바에 살며 우물을 팠는데, 팔 때마다 물이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막에서 우물을 판다고 물이 나오나? 그런데, 이삭은 우물을 팔 때마다 하나님이 물을 주셨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한다. 이삭은 그렇게 하나님께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다. 우리교회도 하나님께서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을 통해서 복을 내리셨다. 강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보여야 한다. 지금 여러분의 눈으로 그게 안 보일지라도, 말씀을 믿는 자는 그것을 보는 자와 같다.

 

교회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라. 여러분을 심으라. 여러분을 귀찮게 만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복을 주고 싶어서 그렇다. 이 절절한 심정을 보여줄 수 있다며 좋겠다. 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이야기했는데도 안 들리는 것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러분들의 삶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를 깨달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다. You’re in good hands! You’re in God’s hands and his servant’s hands.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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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김근주 교수가 쓴 책이다.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성경읽기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지를 서술한다.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적 영역에서의 변화'가 일어나야, 마음과 태도와 사고방식이 변하게 되어, 결국 삶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주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이 있다. "If you want to change y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삶의 방식을 바꾸려면 의지력을 기르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마음과 태도와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 ''이 마음에 들어와야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읽기는 자기계발이 아니다. 저자는 이것을 계속하여 주장한다. 성경을 자기계발 하듯 읽으면, 분주한 세상에 발맞춘 성경읽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기계발 하듯 성경을 읽으면 말씀의 행간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니, 그분과 교제 나눌 수도 없다. 발견하지도 못했고, 교제 나누지도 못했는데, 성경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현대인의 최대 적은 '분주함'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의 최고 수단은 쉬지 않고 분주하게 만들기라 할 수 있다"(25). 분주함 가운데 짬을 내서 성경을 읽으며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잠시나마 '영적인, '은혜로운' 분위를 맛보고 만다면, 그것은 성경을 격언집이나 좋은 말 모임집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주 통렬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읽기를 수행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정신 없이 달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노력해야 지 겨우 버텨낼 수 있는 세상에서, 온몸과 마음을 다해 어떻게든 멈추어 서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고민하고 궁리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날 사탄을 대적하는 방법이다"(26).

 

'멈추어 서다'는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시편에 보면 '셀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충분히 멈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그 말씀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교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분주함'은 이 시대에 사탄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기 위해 쓰는 가장 강력한 전략 무기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멈추어야 하건만, 우리는 반대로 최선을 다해 '분주함' 가운데 머물려 한다. 분주함 가운데 자기를 밀어 넣어 놓고, 거기서 자신을 꺼내면 가만히 안 둘 태세로, 그 분주함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분주함 가운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위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분주함에서 벗어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한다고 도전한다. "이 분주한 시대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싸움이다"(26).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분주한가? 우리는 무슨 싸움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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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5. 09:13

기억하고 기대하라

(이사야 46:8-13)

 

2020년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주일 첫 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신과 문화에 압도당해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바벨론의 신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신이 자신들의 여호와 하나님보다 강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패역한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패역한 자들(포쉬임)이라는 뜻은여호와께 돌이키지 않으면 최종적 심판을 맞게 될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 그들에게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과 회개였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옛적 일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라!” 여기서 옛적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 천지창조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출애굽을 통해 구원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그들은 바벨론 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옛적 일을 기억하는 것(remember the former things long past)’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구원 사건을 기억합니다.

 

옛적 일을 기억하고 마음에 둔다는 뜻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하신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예언과 성취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알면, 우리는 모든 우상을 다 버리고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뜻이 설 것이며 내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10).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11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반드시라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하나님의 택한 종고레스를 통하여 이루실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고레스에 대한 예언이 있고, 고레스를 통한 성취가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사나운 날짐승나의 뜻을 이룰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하여내가 말하였을즉 반드시 이를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11)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마음에 두면서,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기대하는가?” 세화교회 공동체는 아무렇게나 시작된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을 통해서 시작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비전)이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우리 교회 공동체에 말씀과 환상(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주식투자도 전망이 있는 회사에 하게 됩니다. 교회에 전망이 없다면 누가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하여 헌신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예언과 성취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 말씀과 환상(비전)은 에스겔서에서 왔습니다.

 

우선, 에스겔서 16 6~14절의 예언이 우리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6).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개인이든 (가정, 교회) 공동체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부임하며 이 말씀이 우리 교회 공동체에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투성이였고, 알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서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칭송하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시켜 주실 거라는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에스겔서 16장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해 보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예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서 47 1~12절의 예언이 우리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 온 땅에 흐르는 환상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과 연관됩니다.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은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와 그 물을 통하여 강이 형성되고, 그 강 가에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그 물로 인하여 바다의 물이 되살아 나고, 나무에서 열리는 과실은 끊이지 않으며 맛있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로 쓰이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에 부임하여 처음 새벽기도회를 드릴 때, 저는 이 환상이 우리 교회에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앉아서 기도하는 강대상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 회중으로 흘러 들어가,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처럼 교회 바깥으로 그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한 환상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볼 수 있는 환상입니다.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저는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 부르시고 보내셨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교회를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섬기기로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향해예언하셨습니다. 에스겔서 16장의 말씀처럼 우리 교회를 영화롭게 하시고, 47장의 말씀처럼 생명력 넘치고 치유가 일어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힘입어, 우리는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시대를 이끄는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하여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열심을 낼 이유가 없고, 수고할 필요가 없고, 기도하며 기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기억(말씀과 환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화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의 관전포인트는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words)과 환상(vision)을 잊지 말고 기억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환상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인간의 교제 가운데 세워가는 인간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언(말씀과 환상)을 주셔서 세워 가시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영광을 누리는 세화 공동체의 아름다운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문

 

주님,

주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과 환상(비전)을 기억합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진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모였으며

그 예언이 성취될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예언을 성취하도록 부르신 고레스가 되게 하소서.

우리 모두가 믿음과 상상력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과 환상(비전)을 공유하게 하시고,

우리 교회를 영화롭게 하시고 생명력이 넘치고 치유가 일어나는

교회 공동체로 세워 가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하며

열심을 내고 수고하며 기도하고 기대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주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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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0. 1. 3. 08:54

믿음의 성장을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14:22-36)

 

주님, 사역하면서 고난을 많이 당한,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는 예수를 따라 출애굽한 주님의 백성이요

사역을 위해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갈릴리는 건너고 있는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사역이 리얼이고, 사역이 리얼이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리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입에서는 때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흘러나오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면 흔들릴지언정

뒤돌아서거나 넘어지지 않는 것은

주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이고

우리 곁에 좋은 동역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들의 작은 믿음을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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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3. 08:52

흔들리며 성장하는 믿음

(마태복음 14:22-36)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2019년 한 해, 흔들리면서 잘 살아왔다. 찬양이 저절로 나온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시간을 돌아보면 그렇지만, 어려운 순간 순간에서는 이러한 찬양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먼저 나오기 마련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큰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긴 세월동안 자기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기 위하여 모세라는 지도자를 준비하신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가까스로 출애굽에 성공한다.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날 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했던 말씀은 유명하다.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4:13).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자마자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 높이 찬양한다. 그런데, 그들은 수르 광야로 들어서 사흘길을 걸었는데, 물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발견한 물이 있었는데, 먹으려고 보니, 써서 못 먹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마라(쓰다)’이다. (먹지 마라,의 마라가 아니라, ‘쓰다의 마라이다.)

 

홍해가 갈라지는 큰 역사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물이 없자, 금방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우리 인간의 연약한 모습이다. 이것은 나쁜 게 아니라, 우리의 본연적인 모습이다. 그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마시게 만들어 주신다.

 

본문은 이러한 정황을 담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교회를 시작했으나, 마태공동체(교회)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마치 그것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갈릴리는 원래 호수이다. 그런데 너무 커서 호수라고 안 부르고 바다라고 부른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상상태가 변해 고요하다가도 풍랑을 만나기 일쑤다. 갈릴리 호수는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마태공동체(초대교회)를 표현하기에 딱 좋은 메타포이다.

 

마태공동체가 겪는 고난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4). 배는 마태공동체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가 시작된 지 시간이 지났다. 이제 다시 배를 육지로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것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24). 예수에 대한 신앙은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앙공동체는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토요일(1228) 어른 넷, 청년 셋, 이렇게 7명이 에머리빌항구에서 고기잡이 배를 타고 출항했다. 날씨는 좋았으나, 파도가 좀 높게 출렁였다. 나름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옷도 스키복으로 따스하게 입고, 멀미약도 먹고 붙였다. 따스한 물도 준비했고, 먹어도 크게 부담이 없는 간식들도 준비했다. 바람은 부드러웠고, 공기는 청아했다. 지나치면서 본 샌프란시스코와 알카트레즈, 그리고 금문교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금문교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니 태평양이 펼쳐졌다. 등대가 깜빡였다. 파도가 절벽을 쳤다. 등대의 깜빡임과 절벽을 끊임없이 때리는 파도소리는 감성을 자극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뱃머리에 앉아, 파도의 출렁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 30분쯤 지났다. 이제는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와서’ 돌이킬 수 없는 거리에 당도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했다. 반복해서 출렁이는 파도를 몸이 견디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워 왔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손과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을 눕히고 싶었다. 그런데, 배 안에 몸을 눕힐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이미 좋은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자비를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뱃머리에 몸을 눕혔다.

 

육지를 떠나 바다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파도는 거세 졌다. 파도가 배를 덮쳤다. 바닷물이 뱃머리에 누워 있는 나를 덮쳤다. 그래서 나는 바닷물에 젖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내 몸을 적시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움직일 수 없었고, 피할 방법이 없었다. 머리는 계속 어지러웠고, 팔 다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존재가 이렇게 나약할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더 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배가 섰다. 배가 서니 출렁임이 더 심해졌다. 더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고기를 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이들이 자연스럽게 푹신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는 의자가 공석이 되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곳으로 가서 몸을 눕혔다. 찬 바닥에서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을 눕혀서 고통은 약간 덜했지만, 이제 바람이 불면서 젖은 몸이 추워졌다. 몸을 떨었다.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엄마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순간 마침 챙겨온 손난로가 생각났다. 손에 쥐는 아주 작은 난로였다. 나는 그것을 부여잡고 추위를 견뎠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는 동안 몸은 체온유지를 하기 위해서 저절로 뜨거워져 있었다. 그래서 추위가 사라졌다. 잠에서 깨니 뜨거워져 있던 몸이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또 추웠다. 나는 잠 들려고 노력했다. 잠을 자면 몸이 저절로 뜨거워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통 가운데, 8시간 동안 배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고기잡이 배가 다시 금문교를 통과해서 항구로 입항할 때쯤 몸을 다시 가눌 수 있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물결로 말미암아 당한 고난은 멀미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다. 그것은 리얼이다. 가상의 고난이 아니다. ‘리얼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고통이 극심해졌을 순간, 밤 사경(새벽 3-6시경), 밤이 가장 깊은 시간, 즉 고통이 가장 극심한 순간에,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한다. 제자들은 처음에 그것이 유령인 줄 알았다. 죽음의 고통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는데,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결정적 한방이 온 줄 알고, 그들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런데, 다행히 그것은 유령이 아니고, 예수님이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 예수님인 것을 확인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이것은 고통 가운데서 외치는 간곡한 기도이다. “주님, 지금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물 위를 너도 걸어보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능히 이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힘을 내서 바다 위를 걸어본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예수님만 보고 물 위를 걸어갔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베드로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 보이고 이상한 걱정이 들었다. 바람이 부니, 파도가 쳐서 자기를 덮칠 거라 생각했다. 그러는 순간 베드로는 바다에 빠져갔다. 베드로는 소리쳤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30). 예수님은 바다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 그리고, 베드로를 건져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른다. 그랬더니, 바람이 그쳤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함께 사역을 하며 하나님께, 또는 내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동역자는 참 귀하다!” 생각해 보라. 출애굽 해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다고 모세에게,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출애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출애굽하지 않고, 그냥 애굽에 남아 있었다면, 그러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원망과 불평이 얼마나 귀한가! 원망 없이, 불평 없이, 어떻게 출애굽을 하며, 그 험한 광야를 어떻게 건너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는예수님의 제자들이 참 귀하다. 그들이 배를 타지 않았다면, 그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면, 그러한 고난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를 탔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를 건넜다. 그러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니, 고난 당하고 있는 그들 입에서 나오는 원망과 불평, 그리고 탄식이 얼마나 귀한가.

 

사역(ministry)을 진짜(real)로 하지 않으면, 고난도 없다. 파도가 일렁이는 배를 타지 않으면 멀미때문에 고난 당할 이유가 없다. 배를 탔을 때 겪는 뱃멀미가 리얼이듯이, 사역을 하면서 겪는 고난도 리얼이다. 그러니, 뱃멀미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처럼, 사역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믿음이 없어서 그러한 탄식이 나오는 게 아니라, 사역하면서 고난을 리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가!

 

사역하면서 우리교회에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은가? 바로 나다! 나는 매일 운다. 울면서 나는 매일 원망한다. 불평한다. 탄식한다. 배 타고 8시간 동안 꼼짝 없이 뱃멀미하며 신음했듯이, 어쩌지 못해, 매일 신음한다. 가장 많은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늘어놓는 나를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신다. ? 내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이고, 애굽을 따라나서 출애굽 했기 때문이고, 배에 올라타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면서 겪는 고난을 리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역은 장난이 아니다. ‘리얼이다. 배를 타고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넘는 것과 같다. 사역을 하면 고난을 당한다. 그 고난은 가상이 아니다. ‘리얼이다. 고난이 리얼이기 때문에, 입에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하는 척 하는게 아니라, 진짜로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역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쏟아 놓은 사역자를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고기 잡으러 나가서 아무런 고기도 잡지 못하고, 꼬박 8시간 동안 뱃바닥에 붙어 있다 왔지만, 나는 행복했다. 좋은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순간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우리가 두고두고 깔깔거리고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많이 당했지만, 2019년도 바로 여러분들이 곁에 있고, 여러분들과 사역하면서 행복했다. 흔들리지 않고 성장하는 믿음은 없다. 사역은 리얼이기 때문에, 리얼로 고난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사역을 하면서 겪는 고난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쏟아져 나오거든, 참지 말고 내놓으시라. 나한테도 내 놓고, 주님께도 내 놓으시라. 괜찮다. 믿음이 적어서 나오는 탄식이 아니라, 여러분이 리얼로 사역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새해에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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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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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0. 1. 3. 08:48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2:13-18)

 

주님,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예수의 탄생을 황홀했으나,

그의 탄생 뒤에 악한 영들이 벌인 일은 슬펐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황홀한 일과 슬픈 일들이 뒤섞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다가도 이내

슬픔의 눈물로 바뀌는 아픔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요.

자식을 잃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라헬은 애통하며

위로 받기를 거부했지만,

주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아들을 통하여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셨습니다.

주님, 위로 받은 자로서,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옵소서.

애통하는 세상의 모든 라헬이 위로 받는

한 해의 끝자락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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