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0. 24. 13:11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

(민수기 1:1-19)

 

1.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BC 587년 유다가 망하고, 헬라화가 되었을 때, BC 300년경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됐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던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은 ‘70인역(셉튜아진트)’로 불린다. 신약 성경 시대는 여전히 헬라 시대였으므로, 신약 성경도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AD 382경부터 성경은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히에로니무스(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을 불가타라 부른다.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성경이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 때, 마르틴 루터에 의해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 영향으로 각자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길을 열었다. 아무튼, 성경은 크게,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의 영향 아래서 번역되고 발전되었다

 

2. 성경 중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셉튜아진트)가 특별히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 신약 시대 때 성경은 ‘70인역’이었다. 사도 바울은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의 편지들을 썼다. 70인역(헬라어 성경)에서 민수기를 ‘숫자들(아리테모이)’라고 번역했다. 70인역의 영향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어 성경도 ‘민수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래 히브리어에서 민수기는 ‘베미드마’, 즉 ‘광야에서’이다.

 

3. 민수기를 헬라어로 ‘숫자들’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민수기에 두 번에 걸친 인구 조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민수기는 36장까지 있는데, 1장과 26장에 인구 조사 이야기나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 조사(Census)를 하는 이유는 병역과 조세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서서히 국가의 요소를 갖추어 갔다는 뜻이다. 인구 조사했더니, 장정(20세 이상/싸움에 나가서 싸울만한 남자)만 60만명 정도 되었다. 정확하게는 1차 조사 때 603,550명, 대략 40년 후에 시행된 2차 조사 때 601,730명이 계수되었다.

 

4. 민수기는 대략 40년 정도의 시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1차 조사는 출애굽 후 13개월 후에, 2차 조사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시행된다 민수기를 이해하려면, 인수 조사를 기준으로 보는 것보다, 지명을 중심으로 보는 게 좋다. 민수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다. ‘가데스 바네아’를 꼭 기억해야 한다. 민수기는 크게 세 지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내산 – 가데스 바네아 – 모압 평지.

 

5. 시내산에서 발생한 일은 성막(어디에서 제사를 드리나), 제사법(제사법(어떻게 제사를 드리나), 제사장(누가 중재하나), 정결법(누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나), 절기법(언제 제사를 드리나), 인구조사, 진영 갖춤 드이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발생한 일은 정탐꾼 사건과 이스라엘의 반역이다. 이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보내게 되고, 출애굽 1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놓고 모두 광야에서 죽는다.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서 죽는다. 모압 평지에서 제2차 인구조사(출애굽 2세대)가 시행되고,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 설교의 구체적인 기록이 민수기 다음에 나오는 신명기이다.

 

6. 민수기는 ‘숫자들’이라는 관점보다, ‘광야에서’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 대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성사적 존재/sacramental being라고 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세속적 존재/non-God being/secular이다. 세속 사회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종교)와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회다. 세속화는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현대)의 특징은 신을 사회 활동에 신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사적 존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사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광야란 하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필수적인 곳이다.

 

7. 광야는 온갖 소리(소음)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하나님의 음성,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데 있어 특징/속성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세미하게 들려온다. 광야 같은 고요와 침묵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엘리야 선지자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왁자지껄한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광야로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 힘을 얻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역을 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며 사역을 준비하셨다. 광야는 궁극적 소통의 자리이다.  

 

8. 현대인들이 가장 애 먹는 일은 소통이다. 현대인들은 ‘말이 안 통한다’고 호소한다.
소통에는 상업적 판매 기술로서의 소통과 관계의 깊이를 위한 소통이 있는데, 특별히 관계의 깊이를 위한 소통의 부재는 심각하다. 현대인들은 주로 도시에서 생활을 한다. 도시는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곳이다. 각종 기계음, 각종 언론 보도, 엔터테인먼트, 일자리 등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것들만 있다. 무엇보다 도시의 삶은 내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먹히게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언어 표현이 유혹적이거나 폭력적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사는 현대인은 주체적이기 힘들고, 늘 누군가/무언가의 지배 아래 있다.

 

9. 도시인들을 보라. 주체적으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불필요한 소비와 불필요한 말을 하면서 산다. 집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보라. 소유를 보라. 우리는 정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 보다, 온갖 유혹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로 포장된 광고들에 의해서 물건을 구매하기 일쑤다. 게다가 도시인들은 바쁘게 살다 보니,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감정)에 귀기울여주거나,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의 삶의 문제를 나누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세상)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된다. 소통이 안 된다. 말이 안 통함, 감정의 나눔 부재, 무관심은 관계의 상처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관계의 붕괴까지도 가져온다.

 

10. 현대 도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은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이다. 물리적으로 광야 같은 환경 만들면 좋으나, 실제로 조용한 데를 찾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진짜 광야 같은 시골 같은 곳을 자주 찾는 것도 어렵다. 시간과 비용 문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삶 가운데서 광야처럼 사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배우고 실천하지 못하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묘연하다.

 

11. 다음은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의 방법들이다. 다음에 제시된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소통도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 눈을 감고 심호흡 자주 하기

2) 모든 기기를 멀리하기 (스마트폰/TV)

3) 책 읽기 / 시 읽기 / 성경 읽기 (침묵과 집중이 저절로 된다)

4) 기도 시간 갖기 (기도문 읽기)

5) 상대방에게 귀기울이기 (공감)

6) 교회를 광야처럼 오기 (광야 나오는 행위)

 

12. 현대 도시인들은 숨을 잘 쉬지 않고 산다. 바쁘다 보니 숨쉬는 것도 잘 못한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자주 하는 일은 가장 손쉽게 광야로 가는 방법이다. 현대인들의 정신을 가장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연결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시각적으로 습득하는 정보는 흥미를 유발시키고 뭔가 강력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못하다. 자극적인 영상으로 획득된 정보들은 오히려 우리의 뇌를 조정한다. 그것들은 반성적/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막고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이나 TV 같은 기기를 통해서 습득하는 정보보다, 책으로 습득하는 정보들이 삶을 더 깊게 만들고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13. 현대인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출판업계는 만년 불황에 시달리는 형편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하여 책을 읽을 기회는 더 줄어든 것 같다. 이것은 비판적 사고를 기르지 못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특별히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위한 방법으로 내가 가장 추천하는 독서는 ‘시 읽기’이다. 시 언어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시가 제시하는 세계에 갔다오는 것은 마치 광야에 다녀오는 것과 같다. 시 읽기는 현실에 파묻혀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14. 현대인들은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이것을 특별히 방해하는 것은 도시의 소음과 스마트폰이다.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느라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만나도 만난 게 아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오는 것을 습관처럼 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주일에 교회에 오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그러나, 교회에 오는 것을 ‘광야에 나오는 행위’로 인식하면 큰 유익이 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뭔가 특별한 것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교회를 광야로 생각할 때 그곳은 하나님의 음성이 더 명확히 들리는 자리가 되고, 하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으면 살아갈 없는 인간의 운명을 더욱더 절실히 경험하는 자리이다.

 

15. 유대교 랍비 조너선 색스는 “믿음은 소음 아래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 저명한 랍비가 정의하고 있는 믿음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 없는 삶을 사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온갖 소음에 파묻혀 소음 아래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지 못한다. 그 아름답고 즐거운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은 짜증나기만 하고, 소통의 부재 속에서 외로움과 괴로움 가운데 살아갈 뿐이다.

 

16. 시편 19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낮마다 그것들은 말씀을 쏟아내고

밤마다 그것들은 지식을 전해 준다.

이야기도 없고 말소리도 없다.

그것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것들의 음악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17. 우리는 도시의 소음 파묻혀, 온갖 만물들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다. 어떻게 해야 할까? 외로움과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시에서의 우리의 삶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발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도시에 광야처럼 사는 데 있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자주 물으라. 생각과 감정에 동감해주고, 위로해 주라.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아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킬 수 있고, 당신과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0) 2024.03.05
강하고 담대하라  (0) 2024.03.05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  (0) 2023.09.19
브살렐과 오홀리압  (0) 2023.09.05
그 중에 제일은 겸손  (0) 2023.08.24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