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9. 19. 10:14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

(레위기 1:1-2, 8:1-13)

 

1.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있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향 평준화한다. 성경에는 인간을 아주 존귀한 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반대도 있지만).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기독교 신앙은 ‘신화’(Theosis/하나님처럼 되는 것)의 특징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당신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이러한 특징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인간은 품위 있게,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존귀하게 여기며, 존귀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레위기 8장은 제사장의 임직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임직식 거행은 7일간 지속되었다. 왜 7일간 거행되었을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연관 속에서 제사장의 임직식을 생각해 보면, 제사장 되는 일은 창조의 역사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냥 보통의 일이 아니다.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여받고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창조의 역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에 쉰 것을 포함한 과정), 하나님은 7일 동안 제사장을 ‘창조’한다.

 

3. 창조는 만듦이 아니라 부르심이다. 우리 인간의 피조성은 내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또는 지음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서 내가 주님께 부름받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조는 내가 단순히 피조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창조는 부르심이다. 7일 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제사장 직분을 부여하시는 것은 제사장을 창조하신 일이고, 제사장을 부르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7일 간 거행되었다는 것은, 7의 숫자가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제사장의 완전함, 즉 거룩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7일 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세우신 제사장은 거룩하다.

 

4. 우리가 사는 사회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표출한다. 랍비 조너선 색스는 행복와 의미를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행복은 주로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에 반하여 의미는 삶의 목적에 대한 인식으로서 특히 다른 사람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짧게 표현하면, 행복은 소유과 관련되고, 의미는 기부하는 것(희생)과 관련된다.

 

5. 요구와 필요가 충족되면 누구든 행복하다. 개도 고양이도 사람처럼 요구와 필요가 충족되면 행복해한다. 그러나 의미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현상이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긴장하거나, 불안하거나, 염려되거나,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너선 색스는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미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한 것이다”(매주 오경읽기 영성 강론, 178쪽).

 

6. 행복만 추구하면 인간은 삶이 천박해지거나, 자기에게만 열중하다 결국 이기적인 삶이 되기 십상이다. 행복만 추구하다 보니, 요즘 우리들은 아주 쉽게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한다. ‘이거 하면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이걸 내가 왜 해야 해?’ 인생을 행복의 차원에서 더 끌어 올리면 의미의 차원으로 간다. 의미의 차원에서 인생을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더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보다 고통을 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행복의 차원에서만 인생을 생각하면 우리는 아주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의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7. 깊은 절망에서 생존한, 아우슈비츠 비극의 생존자 중 한 명인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지 말고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의미의 심리학을 발전시켰다.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가장 깊은 절망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아 그 절망을 이겨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수감자들의 모습 속에서 그는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삶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의미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8. 우리는 왜 신앙을 가지고 사는가? 신앙을 가지고 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과 신앙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여기에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종교적 인간이 분명히 비종교적 인간과 다른 것은 오직 자신의 존재를 단순히 과업이 아니라 사명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과업으로 경험하는 사람과 삶을 사명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인생의 깊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을 그냥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일을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만큼 일을 하겠지만,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일을 한다.

 

9. 신앙은 인생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여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깊은 것을 경험하게 한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구약성경의 다섯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모세오경’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만나는 모세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무엇이 모세를 이렇게 특별한 존재(사람)로 만들었는가? 그 해답은 레위기서의 이름에서 발견된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라는 뜻이다. 모세가 특별한 존재가 된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르심은 깊은 총애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특별해진다.

 

10.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위기에서 이 부르심을 보지 못하고, 그저 희생제사나 제사장에 대한 법들, 그리고 정결법 등 만을 보고 말면 손해다. 이러한 것들만 보면 레위기는 정말 재미없는 성경일 뿐이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흘러내려가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을 세워 그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사장은 희생제사를 집전하는 일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모세와 제사장을 통해 백성들에게 흘러내리고 있다.

 

1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분을 받게 된다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굉장히 중요한 성찰이다. 임직을 한다는 것, 직분이 생긴다는 것은 교회 일을 부담스럽게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는 게 아니다. (일반 회사에서 직급이 높아지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직분을 가진다는 것은 ‘부르심’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행복의 관점이 아니라 의미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 나에게는 사명이 있구나!” 이런 부르심의 경험 가운데서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12. 부르심은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타고 흐르도록 나를 내어주는 것이다. 내가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다시 말해,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1)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이고, 2)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직분을 받을 때, 이러한 신앙의 실존적 기쁨이 있어야 한다.

 

13. 세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가 하고 싶은 거 해!” 그러면 삶이 행복해질거라고 한다. 물론 이 말도 틀리지 않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 거기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거나 절망할 때도 많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다. 조금 더 인생의 깊이로 들어간다.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고 의미의 세계로 더 나아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이렇게 의미를 추구하고, 사명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14. 단순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더 존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를 것을 알고, 그것을 믿고, 그렇게 응답하며 사는 것이 신앙인이다. 이것을 더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흘려보내는 신앙인이 직분자이다. 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직분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내리도록 나를 내어주는 존귀한 자, 존귀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직분자들은 그것을 더 큰 기쁨 가운데 누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 ‘부르심’을 통해 삶이 더 깊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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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