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홍해 #예배하는인간 #자유'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2.03.13 자유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13. 00:39

자유

(출애굽기 14:15-31)

 

1. 출애굽기에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모세가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가는 장면,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 열 가지의 아주 스펙터클한 재앙,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 모세가 부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장면 등 출애굽기에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즐비하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홍해를 건너는 장면일 것이다.

 

2.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십계>는 1956년 작품이다. 아주 어릴 때,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엄마, 아버지와 함께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으로 <십계>를 보러 갔던 적이 있다.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였을 것이다. 그때 어린이의 눈에 들어온 두 개의 장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은 홍해를 가르는 장면과 십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의 장면이다. 홍해가 갈라질 때, ‘와~’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다시 보면, 촬영기법이 변변치 않았던 때의 영화라 허술하기 짝이 없다. (찰턴 헤스턴은 또다른 대작 <벤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벤허>는 지금 봐도 재밌는 영화다. 얼마 전 <벤허>를 리메이크 했는데, 원작만 못해서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3. 우리는 이성과 과학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홍해가 갈리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보면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인지를 먼저 따지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논쟁만 발생하고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해석해 왔지만, 현재 성경을 읽은 보편적인 방식은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이다. 문학은 이야기를 만들어 진실을 전하는 예술 양식이다. 이야기에는 체험과 허구가 공존한다. 핵심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고,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진실(진리)이 무엇이냐이다.

 

4. 출애굽기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실(진리)은 무엇일까? 특별히 그 중에서도 홍해가 갈리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실은 무엇일까? 이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출애굽기 전체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부르셨고, 왜 모세를 애굽으로 들여보내셨는가?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서 애굽의 바로(이집트 왕)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출애굽기 3장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3:18).

 

5.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우리는 대개 출애굽의 목적을 고통받는 히브리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구원해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목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목적이고 출애굽의 일차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리고 홍해가 갈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한 일은 ‘그들이 나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게 하는 것’이었다.

 

6. 인간은 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성경은 매순간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출애굽기도 다르지 않다. 출애굽기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이것이다.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다!” 예배의 다른 말은 사랑이다. 이것은 이렇게 바꾸어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 ‘예전적 동물’이라 부른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며 궁극적인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습관이 영성이다> 33쪽).

 

7. 인간에게 사랑은 중력과도 같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그 사랑하는 것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이라는 것이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실천과 연습이 필요하다. 올바른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실천과 연습이 필요하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에게 부족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실천과 연습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실천과 연습을 행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통제 받고 있었다.

 

8. 홍해가 왜 갈라져야 했을까? 하나님께서 애굽 왕에게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허락하라’였다. 그런데, 애굽 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못하도록 막아 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막아 설 수 없다. 홍해의 갈라짐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9.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다. 노예란 무엇인가? 남이 시키는 걸 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걸 하다 보면 인간은 그것이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처럼 자신이 사랑해서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병리현상이 있다. 인질(피해자)이 납치범(가해자)에게 동조하고 감화되어 납치범(가해자)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납치범(가해자)을 변호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는 기획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남이 원하고 시키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도록 속이는 것이다.

 

10. 자유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다. 자유인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유인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내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하고,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자유하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불쌍하고 애처롭다.

 

11. 홍해의 갈라짐은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안겨주었다. 그 자유는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억압된 삶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실천하고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12. 이스라엘에게 출애굽기의 여정,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의 삶은 예배하는 인간으로서의 삶,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사랑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예배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예배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평소에 안 하던 부부는 어느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서로 해보세요’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없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끔 잘 인도해야 하는 이유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 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3. 인간에게 자유의 바로미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홍해가 수만 가지 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작게는 피곤해서부터 크게는 미움 때문에 못 나온다. 반대로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은 크게 기뻐해야 한다. 내가 참 자유를 누리고 있구나! 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한 사람이구나!

 

14. 인간이란 예배하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사랑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가.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기록하며 맨 처음 하나님을 찬양한 뒤, 곧바로 이런 고백을 한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15.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자유한 게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자유한 게 아니다. 좋은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어서 자유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살 때 돈도 없었고, 맛있는 음식도 못 먹었고, 좋은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천막에서 잤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끼니를 때웠고, 물이 없어 고생했고, 가진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만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16.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 이것 하나만은 꼭 알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자유를 얻은 자이다. 자유만큼 좋은 게 어디 있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헛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품에 안겨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그 자유를 나만 누리지 말고, 내 사랑하는 가족들, 형제자매, 친구들, 그리고 자유가 없어 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힘껏 나누어 주자.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두 손을 높이 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막고 있는 홍해를 갈라 주실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평 이야기 (Murmuring Narrative)  (0) 2022.03.29
누군가의 노래  (0) 2022.03.16
리추얼의 탄생  (0) 2022.03.02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다  (0) 2022.02.24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야다와 로야다)  (0) 2022.02.15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