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존한 인물이다. 레비는 수용소에 끌려가 낯선 경험을 한다. 수용소에 입소했을 때 그에게 폭행을 가한 사람은 나치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이었다.
탈식민주의 학자 프란츠 파농의 구분에 의하면, 레비가 당한 폭력은 수평적 폭력이다. 수직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수평적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속담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파농은 수직적 폭력의 악마성을 폭로한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알제리는 수평적 폭력이 난무했다. 파농은 왜 그럴까 연구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 담겨 있다. 알제리 사람들이 서로에게 수평적 폭력을 저지르는 이유는 알제리 사람들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수평적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직적 폭력을 막아내야만 수평적 폭력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근 30년간 자본의 수직적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 자본의 폭력은 소리 없이 사람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한국 사회가 극단적 분열 사회로 치달은 이유는 수직적 폭력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수평적 폭력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던져 졌기 때문이다.
계엄 사태 이후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수평적 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뜩이나 수직적 폭력에 시달려 힘든 대한 국민들에게 국가의 직접적 수직 폭력을 가하여 사회를 더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국가의 수직적 폭력은 반드시 수평적 폭력으로 번지게 되어 있다.
지난 4개월 동안 한국 사회는 Psychosomatic 현상이 더 짙어졌다. Psychomatic은 psycological(정신)과 somatic(신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치심리학 용어이다. 한 인간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질병은 사회가 가하는 시스템적인 폭력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프란츠 파농의 주장이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동안 대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이 아팠다. 수직적 폭력을 당해야 했고, 그로 인한 수평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사회가 얼마나 분열되었는지, 어제 같이 밥 먹던 친구들이 이제는 원수가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가족들 간의 분열, 동료들 간의 분열이 너무 심해서, 이제는 결혼 정보 회사에서 배우자의 정치 성향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을 대통령 직에서 파면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전혀 아니다. 한국은 윤석열에게 집단 소송을 제기해야 할 판이다. 수직적 폭력에 의한 수평적 폭력의 창궐의 죄를 물어 형사소송, 민사소송 등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소송을 제기해야 할 판이다.
1871년, 파리코뮌은 프랑스 정부군에게 패한다. 코뮌에 참여했던 유진 에딘느 포티에(Eugène Edine Pottier)는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를 지었다.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서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죄수들이여, 일어서라. 이성은 이제 활화산의 분화구에서 터져 나오리니, 그것 마지막 파열이다. 지나간 낡은 세계를 깨끗이 쓸어버리자. 노예가 된 대중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온 세계가 밑바닥부터 변화하리니, 우리는 지금 아무 것도 아닌 존재처럼 되어 있으나, 모두 온전해지자.”
2025년 4월 4일. 대한 국민은 정부의 수직적 폭력을 이겼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받았던 저주, '미련한 자를 지도자로 두었던 저주'를 이제 떨쳐내야 한다. 우리가 새로 받아들여야 할 지도자의 사명은 너무도 명백하다. 수직적 폭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 수평적 폭력을 멈추게 할 자.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자.
예수의 십자가는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추어 세운 사건이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박힌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출 지도자를 선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추어 세우는 일에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야 할 것이다. 무너진 교회가 부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서라. 이제 모두 온전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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