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고민하는 신앙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뜨거운가’, ‘얼마나 열정적인가’로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책망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신앙의 본질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쓸모 있는가’에 대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계 3:16)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신앙의 열정과 무관심의 문제로 해석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 표현의 의미는 ‘유용성’과 관련이 있다. 라오디게아 도시를 흐르는 물은 골로새의 차가운 물도,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도 아니었다. 그들의 물은 미지근하고 쓴맛이 강해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단순히 열정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역할과 쓰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있었다. 그들은 도시가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재건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유함이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자만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그들의 문제는 편안함과 자기만족이 영적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돈이 있고,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하나님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신앙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고민을 멈추었다. 그래서 책망받았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으면 신앙이 해이해지고, 가난하면 신앙이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잠언 30:7-9에서 아굴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이유는 너무 부유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너무 가난하면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핵심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신앙은 미지근해지고, 가난해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신앙이 식어버릴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 받은 이유는 그들이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함 속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힘이 적었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들었다.
예수님은 "나는 네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흰 옷을 사서 입어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계 3:18)라고 말씀하신다. 불로 연단한 금은 ‘세상의 부요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영적 부요함을 구하라’는 뜻이다. 흰 옷은 ‘하나님의 의로 입혀진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안약은 ‘영적인 눈을 떠서 진리를 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쓸모를 간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와 함께 먹겠다”(계 3:20)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했겠지만, 실제 삶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법을 잊어버린 교회였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문을 열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의 쓸모를 간구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미지근한 신앙’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역할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너희를 토해낼 것이다"라는 무서운 경고를 받았다. "나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있으니까 충분해." "교회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으니까 됐어."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하나님께 더 집중하면 되겠지." 이러한 태도가 쌓이면, 신앙은 점점 미지근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쓸모를 고민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가 곤고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신앙은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 신앙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간절히 겸손하게 기도하며 ‘쓸모를 고민하는 신앙’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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