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신앙, 저항하는 예배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신앙의 선언이며, 동시에 세상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펼쳐지는 하늘의 예배는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이 직면한 현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적 환상이 아니라, 로마 황제 숭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켜내려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메시지였다.

1. 보좌 앞의 유리 바다: 혼돈을 넘어선 질서
고대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광활한 궁창 위의 바다에 세워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질서를 의미하는 공간이었다. 세상의 혼돈과 폭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은 바로 그 보좌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2. 네 생물과 많은 눈: 불의에 대한 증언
네 생물(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은 우주를 상징한다. 그들의 몸을 덮고 있는 수많은 눈(eyes)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난과 불의를 증언하는 상징이다.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 폭력의 희생자들, 정의가 짓밟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미한다. 예배는 이처럼 세상의 아픔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자리이다.

3. ‘거룩하다 거룩하다’의 선언: 장차 오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지배하는 분을 향한 고백이다.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고통받는 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춘향이가 변 사또의 횡포 속에서 이 도령을 기다리듯, 억압받는 성도들이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의 표현이다.

4. 황제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로마 제국은 황제에게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바치게 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은 그러한 칭호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임을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한 경배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가 몸과 마음을 어디에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선언이다. 예배는 황제 숭배에 대한 저항이었고, 오늘날에도 세상의 거짓된 권력과 이념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중심이어야 한다.

5. 예배는 저항이다
출애굽기의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예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애굽기가 가르쳐주는 예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선언하는 행위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떤 모습인가? 고대 시대에 비추어 볼 때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문명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예배는 시간이 흐른 만큼 달라져 있는가? 우리의 예배는 충분히 저항적이며, 충분히 자유한가? 예배에 야성이 살아 있는가?

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는 바로 예배의 야성과 저항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권력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는가? 말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외치면서, 삶으로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세상의 거짓과 불의에 맞서는 신앙의 결단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되려면, 우리의 삶이 예배와 일치해야 합한다. 황제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신실한 예배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험한 신앙이며, 저항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