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충성하라: 신앙은 집중력의 문제이다
역사 속에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의 상징이었다. 박해와 빈곤, 그리고 비방이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서머나 교회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생생한 도전을 던지는 메시지이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실 때, 이는 단순한 신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삶을 가득 채운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건네진 위로의 속삭임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고난을 아셨다. 그들의 빈곤을, 그리고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비방의 고통을 아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역설적이다. 세상은 충성의 한계를 요구한다. 이 정도면 됐다, 여기까지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성에는 한계가 없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신실하셨던 그분처럼, 우리 역시 끝까지 충성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이는 신앙이 단순히 머릿속에 머무는 사상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요구하는 헌신임을 깨닫게 한다.
서머나 교회가 그토록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부유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가하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은 생명의 관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했다. "네가 실상은 부유한 자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선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서머나 교회처럼 극심한 박해를 경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신앙을 흔든다. 정신을 딴 데로 돌리게 만드는 이 시대의 스펙타클(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도전이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신앙은 우리를 생명의 관으로 인도하며, 둘째 사망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은 단지 고난을 감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실함의 본질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끝까지 집중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집중)하셨듯, 우리도 끝까지 그분께 충성(집중)할 때, 생명의 관이라는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우리의 충성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에 답하며, 우리는 서머나 교회의 유산을 살아내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이야말로, 참된 부요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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