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목회: 기술철학 관점에서 바라보기

1. 매트릭스
Matrix라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Matrix는 가상공간(Cyber Space)이다. Matrix는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로봇이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낸 비극적인 가상공간이다. Matrix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다. 때는 서기 2099년, 인간의 혹독한 착취에 못 견딘 로봇들은 인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로봇이 자신들이 착취 당하고 있고, 인간으로부터 노예 취급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로봇은 AI(Artificial Intelligent)라고 하는, 인간과 동일하게 작동하는 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봇과의 전쟁에서 밀리게 된 인간은 로봇의 에너지 원인 태양을 가리기 위해서 핵폭탄을 터뜨려 지구의 대기를 분진으로 덮어 버려 더 이상 지구에 태양빛이 비추지 못하게 만든다. 이에 에너지가 필요했던 로봇은 인간을 생포한 뒤, 인간의 생체에서 흐르고 있는 에너지를 흡수한 뒤, 죽여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체에서 뽑아낼 수 있는 에너지 또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봇은 Matrix라는 가상공간을 창조해 내게 된다. 이것은 생포한 인간들을 독립적 캡슐에 넣어, 기계장치로 연결한 뒤, 그들을 잠 재우고 현실이 아닌 Matrix라고 하는 가상공간에서 실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수의 인간에게서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뽑아 낼 수 있고, 인간의 수명이 다 하는 동안, 즉 일회적이 아닌 반 영구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로봇에게 잡혀, Matrix라는 가상공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진짜 삶(real life)이 아니라 가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Matrix가 설정해 놓은 서기 1999년을 살고 있을 뿐이다. Matrix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또는 상대방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다. 그 질문은 Matrix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실제 세계로 나오게 되는, 로봇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경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2. AI의 출현
AI라는 용어는 1956년 다트머스 학회(Dartmouth Conference)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연구자들은 기계가 학습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컴퓨터 기계와 지능’이라는 논문을 통해 튜링 테스트를 제안하며,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주춤하던 AI 연구는 1980년대에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s)로 부활했다. 퍼셉트론(Perceptron)과 다층 퍼셉트론(MLP)이 개발되었지만, 효율적인 학습 방법이 부족해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그 이후, 1990년대 AI 연구는 자금 부족과 실적 부진으로 주춤했고, ‘AI 겨울’이라는 시절이 찾아왔다. 아무도 AI 연구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빅데이터와 계산 능력의 발전으로 AI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데이터 마이닝,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 등은 AI 연구에 활기를 띄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2006년 딥러닝(deep learning)의 핵심 기술인 ‘심층 신경망 학습(deep neural networks)’을 위한 효율적인 학습 방법, 특히 역전파(backpropagation) 알고리즘과 사전 학습(pre-training)을 제안했고, 이를 통해 이미지 인식, 음성 인식 등에서 AI가 인간 수준의 성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공로로 제프리 힌턴은 인공신경망 연구의 선구자인 존 홉필드(John Joseph Hopfield)와 함께 올해(202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노벨위원회가 AI 발전 기여자들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것은 AI는 이제 영화에만 등장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힌턴은 계속해서 AI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강력한 규제를 주문해오고 있다. 

3. 기술철학 1
기술철학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철학자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이다. 그의 주저 <시간과 존재>에서 부분적으로 논의한 기술철학은 그 이후 출간한 <숲길>과 <기술에 대한 물음> 등에서 본격적인 논의로 발전한다.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을 표현하는 핵심 용어는 ‘역운’(Geschick)과 ‘기술세계-내 있음’이다. 역운은 인간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다. 기술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기술이 인간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기술(techne)을 시학(poesis)와 비교를 하는데, 시학이 존재자를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 속에 머물게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드러낸다면(예술작품의 기원), 기술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대상으로 만들다고 비판한다. 기술에 의해 대상화된 사물(인간 포함)은 주문과 생산을 위한 재료 또는 부품을 전락하고 만다. 이는 존재가 기술에 종속되는 사태이다. 

기술철학을 진지하게 논의한 또 한 명의 철학자로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있다. 엘륄은 평생 ‘기술 현상’을 연구한다. 엘륄은 기술 체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술 사회와 관련된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았다. 엘륄은 ‘기술’이라는 키워드로 우리 사회 이면의 ‘숨겨진 논리’를 폭로한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다니엘 벨(Daniel Bell)은 ‘후기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 사회’라는 키워드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관리 소비 관료 사회’라는 키워드로, 마샬 맥루한(Marchall McLuhan)은 ‘대중매체’라는 키워드로, 기 드보르(Guy Dubord)는 ‘구경거리 사회’(스펙타클의 사회)라는 키워드로, 이들은 모두 현대사회의 현상과 숨겨진 논리를 폭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엘륄은 이 모든 사회 현상 이면에는 ‘기술’이 있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기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엘륄은 기술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그들이 겪은 시대적 상황 때문인 듯하다. 하이데거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엘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이들은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이데거는 기술철학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기술과 인간은 대립관계에 있다. 하이데거가 우려하는 것은 기술이 인간 존재를 장악하여 인간과 함께 모든 사물을 착취하게 되는 것이다. 엘륄은 기술이 신성화되는 것을 우려한다. “우리를 굴종시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전이된 신성함이다”(The New Demons). 기술을 신성화시킨 인간은 기술이 부여하는 질서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기술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4. 기술철학 2
전후 세대인, 기술철학 2세대들은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술철학 1세대인 하이데거나 엘륄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기술철학 1세대는 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했다면, 기술철학 2세대는 탈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관계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한다. 대표적으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존 로(John Law), 그리고 랭던 위너(Langdon Winner) 등이 있다. 이들은 인간과 기술이 맺는 훨씬 복잡해진 관계에 주목하여 기술철학을 논한다. 또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중시했던 근대와는 달리 탈인간중심적 사고를 전개한다. 이는 이들로 하여금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를 낳게 했다. 

하이데거가 기술을 ‘세계-내 존재’라는 차원에서 존재론적으로 사유했다면, ANT 그룹은 기술의 핵심을 관계론적으로 사유한다. 이 사고의 핵심에는 브루노 라투르가 있는데, 그는 주체와 객체로 구분해 온 서구 인식론을 전복시키고, 그 대신 ‘행위자’(actor)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물들의 관계를 사유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기계, 동물, 문서, 돈, 건축물 등 다양한 사물들은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 이는 인간만이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근대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뒤엎는 것이다. ‘행위자’의 위상을 획득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 간에 연결망을 형성하여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 라투르가 한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론을 완전히 뒤틀어 놓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근대인은 부단히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여 주체가 객체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사유를 했다. 그러나 라투르는 근대의 인식론에 포착되지 않았던 ‘실재’를 말한다. 그것은 인간은 애초부터 기술과 같은 비인간과 잡종적(hybrid) 동맹을 부단히 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진술인데, 인간은 순수하게 인간 존재로만 존재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객체가 아니라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actor)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적이고 더 풍요롭게 사는 길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모든 사물과 상호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술철학 2세대들에게 기술은 인간이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동료’ 행위자인 것이다. 

기술의 정치성을 논한 랭던 위너는 하이데거를 비롯한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이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에 붙들려 있다고 비판한다(자율적 테크놀러지와 정치철학).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술의 자율성은 결국 인간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랭던은 기술철학의 가치가 본질을 사유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의 실천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 담론은 정치의 장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은 인간의 실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전자조작이나, 기후변화 문제를 들 수 있다.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단순히 사실(과학)과 가치(정치)가 분화된 세계에서 파악할 수 없다. 통합적으로 사유해야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라투르는 현실정치에서 사물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대의민주주는 이제 인간뿐 아니라 사물들의 목소리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5. AI와 목회
AI는 현대 기술의 정점이다. AI의 개발자 힌턴이 그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고 있듯이, AI는 인류를 신의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앤서니 레반도프스키(Anthony Levandowski). 미래의 길(WOTF: Way of the Future)의 교주다. 이 교주는 AI를 통해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2015년 설립했고, 2017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팬데믹 기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종교는 AI를 예배한다. 교주 레반도프스키는 묻는다.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나 더 똑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냐?” AI를 신(God)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AI교는 벌써 수천명의 신도를 모았다.

AI와 목회는 단순히 목회에 AI를 어떻게 활용하여서 목회를 수월하게 하고, 교회를 부흥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의 목회는 더욱더 치열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AI 시대의 목회는 기술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 아니면, 관계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에 대한 현실에 직면했다. 기술철학 2세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면, 즉 인간은 언제나 사물과 함께 하이브리드로 존재해 왔다면, AI 시대의 목회는 인간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AI 시대의 목회가 기술에 끌려가는 목회가 아니라 기술을 사유하고 기술과 관계론적으로 인간 존재를 새롭게 세워 나가려면 치열한 공부가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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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구약의 예언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언서를 몇 군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엘 2:1-2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라. 온 땅의 주민들이 떨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라. 이제 가까웠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구름과 짙은 흑암의 날이라...”

아모스 5:18-20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뜻이냐?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요 어둠이니...”

스바냐 1:14-15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까우며 심히 빠르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폐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날’을 언급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언급된 곳에는 언제나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판단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환란’을 당할 거라는 말,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성경은 줄기차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만 말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언론/전문가 그룹에서 들려오는 2025년도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한국은 ’12.3 내란사태’ 때문에 환율이 오르고, 증시가 급락하는 등 경제사정이 가뜩이나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질 거라는 전망입니다. 미국도 그리 장밋빛 전망만은 아닙니다. 트럼프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정책이 바뀌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 커진 상태입니다. 각국에서는 트럼프 집권 2기에 맞서 대응 전략을 준비하기 한창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미국 이외의 모든 나라에게는 어려움을 안겨다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도 과연 좋을지,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해를 코 앞에 두고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시절이 될 거라는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런 전망 앞에서 ‘여호와의 날’을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의 날이 무엇일까. 왜 고대의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그날이 오면 힘들 거라고, 외쳤을까.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닥친 환란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거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일종의 ‘퍼펙트 스톰’이 사회를 휩쓸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적 시스템도 미비하고, 과학기술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 인재와 자연재해가 겹치면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그 환란을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끔찍한 환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러한 환란을 ‘여호와의 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환란에 정의(justice)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합한 상황을 못 견딥니다. 그러나, 정당성이 부여되면, 즉 왜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면,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도 감당합니다. 

아무래도 2025년는 여러가지 정황 상,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임할 듯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상황이 좀 더 나을지 모르겠으나, 고국의 앞날이 정말 걱정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닥치면 겉으로 보면 환란이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의 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환란이 닥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것 있습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죄악’, 바로 그것이 보입니다. 그 죄악을 해결/해소하지 못하면, 환란은 그치지 않고 반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는 반드시 죄악의 해결/해소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항상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고, 분단국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일’이라는 용어와 ‘빨갱이’라는 용어가 한국말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은 계속해서, 언제든지, 분위기가 조성되면 내란 상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보수 세력은 대개 친일 세력이고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하여 분단국가 현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웁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구조적 모순이고 아픔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은 깨끗케 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지 괴롭혀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날이 임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더 신뢰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서로에게 좀 더 따뜻한 존재가 되어 준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춥고 어두운 날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미소를 더 자주 띄워 주어요. 우리 서로의 손을 더 자주 따스하게 잡아 보아요. 우리 서로의 어깨를 더 자주 두드리며 격려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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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낙심마오]

우리 인간이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처럼,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를 대면하면서 동시에 국가라는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국가라는 제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지구상에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라는 존재, 또는 국가라는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국가란 무엇인가’를 공부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국가는 ‘필요악’이다. 국가가 왜 악이냐면, 국가가 나 개인에게 폭력을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에 강제로 세금을 낸다. 우리는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무엇인가 잘못하면, 우리는 국가에 의해서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국가는 인간에게 악이다. 하지만, 국가는 필요하다. 국가 없이 인간은 삶을 평화롭게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국가와 애증의 관계에 있다. 

최근 포브스 지에서 대한민국 상황에 대하여 우려를 표했다. 심각하게 받아드리며 대비해야 한다. (2024년 12월 6일자) 중국 경제의 둔화와 수출 감소,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를 앞두고,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시기인데, ‘계엄 선포’로 인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2025년에 한국에 닥칠 위기에 대처할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이다. 이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을 거라는 말이다. 국제 정세도 안 좋고, 국내 경제도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그리고 정말 결정적인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산 선지자는 예레미야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으로 따지면, 국제정치학/국제관계학 전문가이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말년(BC 587년 경)의 역사적 질곡을 모두 겪은 사람이다. 이스라엘 전체 민족, 왕이나 고위관리에서 가난한 하층민까지 모두,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다. 왕이 두 눈이 뽑혀 잡혀가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갈 시절이었다. 얼마나 어두운가. 이때 예레미야가 한 일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나라가 어려울 때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한 일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것을 실천한 대한민국의 믿음의 조상이 있다.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도산은 병환으로 죽어가며 자신을 문병 온 동지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낙심마오!" 그 당시 한국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의 길은 아득하고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일이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낙심마오'라며 위로를 건네고, 생명이 다해갔지만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성경을 사랑했던 도산 안창호, 그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낙심하지 않았다. 낙심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일을 그르치는 것도 없다. 무슨 일이든, 낙심만 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윤석열을 탄핵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1. 역사의 숭고함을 망가뜨림
2. 나쁜 선례를 만들면 안 됨

역사는 숭고하다. 역사가 숭고한 이유는 '비극' 때문이다. 비극은 정의를 이루어가다 발생한 슬픔이 역사에 박힌 상흔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일제시대의 저항, 독재에 대한 저항, 민주화 운동 등, 새시대를 열어가려는 정의의 행진 안에서 슬픈 일이 많이 발생했다. 그 슬픔이 한국 근대사를 비극으로 물들였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숭고하다. 숭고함은 비극의 아름다움이다. 그 숭고함 때문에 우리는 비극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가려고 발걸음을 뗀다. 

윤석열이 행한 '계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숭고함에 아주 큰 흠집을 낸 것이다. 비극적인 숭고한 역사를 희극적인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역사의 선배들이 쌓아놓은 숭고함을 무너뜨리고, 역사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국민들이 모아준 권력을 사사롭게 씀으로 인해 정의를 무너뜨렸다. 이것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될 죄악이다. 

윤석열을 반드시 탄핵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만약 이번에 탄핵을 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아주 나쁜, 최악의 선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임기 말년에 행한 아들 헌터 바이든을 사면한 일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당에서도 말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이것이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가진 사면권을 통해 자기의 측근을 사면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퇴임하는 것은 후임 대통령들에게 아주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아를 할 때 부모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부모는 반드시 훈육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는 자기가 방금 행한 일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아이는 ‘이렇게 해도 되는 구나’하면서 또다시 그 나쁜 일을 반복하게 된다. 좋게 넘어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은 나중에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한국교회가 망가진 이유는 한 가지로 규명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큰 이유 중 하는 ‘세습’이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가 지탄을 받는 이유는 그가 ‘나쁜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훌륭한 일을 많이 했어도, 결국 퇴임 때 ‘나쁜 선례’, 즉 ‘세습’을 했기 때문에 지탄을 받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하나인 광림교회에서 ‘세습’이라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 때문에 그 이후 감리회를 비롯한 타교단의 대형교회들은 그 ‘나쁜 선례’를 따라 세습을 자행했다. 그 나쁜 선례를 막아내지 못한 감리회는 그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보수화, 그리고 사사화가 너무 심해 감리회의 웨슬리 정신을 잃어버렸다. 

지금 국민의힘에서는 윤석열 탄핵을 반대한다는 당론을 정했고, 기껏해야 임기를 탄축하는 헌법개정을 통해 윤석열의 조기 퇴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는듯하다. 그렇게 되면, 윤석열은 말되 안되는 엄청난 범죄를 국가와 국민들 앞에서 저질러 놓고, 퇴임 후에 대통령이 받게 되는 모든 혜택과 의전을 손해 없이 받게 된다. 이것은 정말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이다. 이후에 정치적 궁지에 몰린 대통령이 있다면, 그는 분명 윤석열을 참고 삼아 ‘계엄령’을 남발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자기 밥그릇에 아무런 손해가 없을 거라는 ‘나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반드시 탄핵되어야 한다. 역사의 숭고함에 큰 흠집을 낸 죄를 묻고, 그리고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땀과 피로 세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손쉽게 훼손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가장 장엄한 교훈이다. 후대에게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장엄한 교훈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숭고한 역사를 훼손하는 자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쁜 선례’는 나쁜 통치자를 또 만들어내는 법이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이 역사적 사건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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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묵시]

묵시는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은밀히 해석하는 장치이다.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대놓고' 해석하면 권력자들에게 핍박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묵시라는 장치를 통해 불필요한 핍박을 피해 '은밀하게' 정치적 사건을 해석한다.

묵시는 역사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도와준다. 역사는 인간의 관점에서 서술되지만, 묵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묵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두 개의 눈이 필요하다. 역사를 보는 눈, 그리고 묵시를 보는 눈. 즉 이 땅에서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을 보는 눈과 그 이면에 흐르는 진리/진실의 상황을 보는 눈이 그것이다.

성경은 묵시 장치를 아주 잘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다니엘서가 있고, 마가복음이 있고, 또한 요한계시록이 있다. 다니엘서의 묵시는 다른 두 성경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니엘서는 안티오쿠스 치하 그리스 법정에서 피고가 되어 핍박 받는 유대인들에 대한 묵시이다. 다니엘의 묵시 환상은 유대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정의로운 더 높은 법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의 불의한 법정에 의해서 유죄로 선고 받았어도 유대인들은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묵시가 필요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싶다. 역사는 늘 권력자들의 횡포 때문에 정의가 왜곡되고 의인이 핍박을 받으며, 법정은 늘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예로부터, 역사는 묵시를 필요로 했다. 묵시 없이 역사는 바르게 해석될 수 없었고, 묵시 없이 역사에 저항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묵시 없이 요즘 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어떻게 직면할 수 있는가. 

한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권세자들 앞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은, 인자의 법정에서는 창피당할 일이다." 물론 반대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권세자들 앞에서 유죄를 받으면, 인자의 법정에서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권세자들의 법정에서 유죄를 받았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권세자들의 법정과 비교될 수 없는 진정으로 정의로운 더 높은 법정이 있다. 이런 묵시적 안목을 가진 자는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갈 것이다.

그대여, 힘을 내시라.

Posted by 장준식

[성장하고 돌아왔습니다]

호머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이우스가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겪은 일을 기록하고 있죠. 긴 여행을 마친 오디세우스는 여행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오디세이우스는 여행을 통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영웅이 갖춰야 할 덕들을 모두 갖춘 인물로 거듭납니다. 여행은 오디세이우스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별히 바다에서 만난 사이렌과의 대결은 오디세이우스에게 절제와 인내의 덕을 안겨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이렌은 커피 업체 스타벅스의 상징이기도 하죠. 사이렌은 뱃사람들에게 큰 시련입니다. 그것을 물리친 뱃사람만이 진정한 뱃사람인 것이죠. 

여행은 참 신비롭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행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은 것이다”(The world is a book, and those who do not travel read only one page.). 사람은 여행을 통해 한 권을 책을 읽는 것만큼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일 겁니다. 여행을 하지 않으면 겉도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겠구요.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괴테는 특히 이탈리아 여행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여행>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죠. 괴테는 여행을 통해 젊음을 되찾는 기쁨과 영혼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저의 이번 한국 여행이 딱 그랬습니다. 이번 한국 여행은 이전 여행과 달랐습니다. 성장한 느낌을 받았고, 세상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좀 더 또렷하게 찾은 것 같았습니다. 한 권의 책을 썼고, 그 책으로 인해 사람들을 만났고,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을 통해 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참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차례 강연을 통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는 주제를 둘러싼 인문학/정치신학 이야기였습니다. ‘기후변화’는 화두일 뿐입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말, 제가 한 말이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달랐던 가장 중요한 이유,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제 말이 귀를 기울여 주시고 공감해 주신 이유는 제가 기후변화를 자연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론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인문학/정치신학으로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기후변화 문제는 인간을 깊이 관찰하고 돌아보고 재구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장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지만, 결국 인간의 한 존재인 저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저는 인간이고,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참 가련한 존재입니다.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존재. 그것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더 진지한, 그리고 더 애정 어린 연구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성경도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가련함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주 새로운 깨달음이기도 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이것은 곧 호모 사피엔스의 한 개체인 저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그 종에 속한 개개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우리에겐 어떤 가련함과 어떤 희망이 있는지, 깊은 사유를 통해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곧 대림절입니다. 파멸의 운명을 타고난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시간 밖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 안으로 밀고 들어오시는 메시아의 구원일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희망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성육신: 여기 함께 있음(Presence)]
 
드디어,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한강은 시인으로 먼저 데뷔하고, 다음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한강 작품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presence’(프레즌스)가 아닐까? 여기 함께 있음.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으며, 거기에 그들과 함께 있음. 이것이 한강 작품의 특징이자, 그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는 방식이고,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고, 결국 노벨상을 품에 안긴 원동력일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교회 밖 그리스도인’이라고 옮길 수 있는 용어다. 교회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특별히 문학책), 그런 경험을 종종한다. 이 작가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마치 교회를 다니는 사람보다 더 그리스도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강 작가가 딱 그렇다. 그의 작품에는 성육신의 감성이 흐른다. <채식주의자>는 고통 받는 여성과 함께 하는 작품이고, <소년이 온다>는 5.18 민주화항쟁을 겪으며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하는 작품이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에서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하는 작품이다. 즉, 역사를 초월해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안으로 들어와 역사 속에서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한 작품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우리는 어느새 이런 ‘역사’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신 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은 성육신 사건이다. 성육신 사건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성육신 사건은 ‘presence’(프레즌스), 즉 ‘여기 함께 있음’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교리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하며 안 된다. 성육신 사건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성육신 사건’(빌 2:1-11)에 대하여 진술하는 이유는 서로 평화롭게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이다. 자기 일을 잘 돌보고, 다른 이들의 일을 잘 돌보아, 나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만들어 주는 삶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의 원리이다. 다른 말로, ‘presence’(프레즌스), ‘여기 함께 있음’이다. 내가 나의 일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상태는 presence이다. 다른 말로, mindfulness라고 할 수 있다. 마음과 육신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잘 하지 못한다. 이게 잘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한다. 염려란 마음과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니까, 우리는 염려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잘 돌보는 것도 성육신의 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presence’(프레즌스)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음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인가. 나랑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 자리 함께 있어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을 두배로 만들어 주고, 슬픔을 반으로 줄여준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탄 이유는 그의 작품은 ‘여기 함께 있음’을 실천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아픔을 당한 이들과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섬기고 따르는 이유는 그가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쁨 가운데 거하는 복된 인생을 사는 길도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의 ‘여기 있음’을 생각하라. 몸과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염려하지 않고, 내 삶을 잘 꾸려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라. 다른 이의 아픔/고통과 함께 하라. 거기에 있어 주라. 아무 것도 안 해도, 그냥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서 아주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이렇게 성육신의 은혜가 우리 삶의 원리요 방편이 되어 모두가 따스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침략하거나 빼앗지 않고 이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신박한 방법]

 

포비아(phobia/혐오) 중, 이슬람 포비아가 있다. 특별히, 개신교인들,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 포비아가 심하다.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복음화시켜야 한다는 '사명' 아래 이슬람 국가로 많은 선교사들을 '비밀리'에 파송한다. 선교사의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N국 선교사'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도 이슬람 선교가 활발하다. 교단에서 이슬람 연구소 같은 선교 단체를 두는 이유는 이슬람을 연구하여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연구하여 그들에게 파고들어 개종시키기 위함이다. 이는 마치 근대 과학이 자연을 연구하여 자연이랑 잘 지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려고 한 것과 같다.

 

1996년, 저명한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1993)을 비판하며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헌팅턴을 세계를 9개의 문명권으로 나누고, 그 문명들이 충돌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는 후쿠야마가 소련 붕괴 이후 민주주의의 승리와 시장경제의 판정승을 선언하며 투쟁의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의 목소리였다.

 

특별히 헌팅턴은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 우려했다. 실제로 두 문명 간의 출동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슬람 문명이 서구 문명과 충돌을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이슬람 문명을 키운 것은 팔할이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이라는 것이다.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핵심은 '화석 연료'에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화석 연료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들은 거의 이슬람 문명권에 있는 나라들이다. 서구 자본주의 문명은 화석 연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로 인해 서구 문명의 국가들은 화석 연료를 손쉽고 값싸게 얻기 위해 중동 지역의 정치적/경제적 개입과 협력에 열을 올렸다.

 

우리는 흔히 중동의 머니를 오일 머니라 한다. 오일 머니가 가진 파워는 대단하다. 그 오일 머니가 이슬람 문명을 키웠다. 오일 머니가 손을 뻗치는 곳에는 이슬람교가 함께 들어갔다. 결국, 오일 머니를 통해 이슬람 문명을 키우고, 그로 인해 이슬람교의 확장을 도운 것은 다름 아닌 화석 연료를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를 발전시킨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이다.

 

기후변화의 직접 원인은 대기 중에 과도하게 축적된 탄소 때문이다. 탄소는 주로 화석 연료에서 배출된다. 그래서 기후변화를 멈추고, 지속적인 인류의 생존을 이끌려면, 탄소 배출을 멈추어야 한다. 이 말은, 더 이상 화석 연료에 기반한 경제가 아닌, 재생가능한 에너지 기반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전환을 가장 두려워 하는 집단은 두 개다. 하나는 화석 연료 기반의 자본주의 체제를 이끌어온 서구의 기업들과 화석 연료를 공급한 당사자인 중동의 나라들이다.

 

기후학자 마이클 만(Michael Mann)은 <신 기후대전>(The New Climate War)에서 기후변화를 맞은 우리들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적시한다. 그들은 바로 전쟁경제체제와 화석 연료 기반의 시장자본주의 체제를 이끄는 기업들과 나라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웬만해선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상 가장 큰 권력과 자본을 가졌기 때문이다. 만수르가 얼마나 부자인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기 위해 전담 회계사를 둘 정도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세기의 부자 존 록펠러도 화석 연료 사업을 통해 돈을 번 인물이다. 그의 별명은 '석유왕'이었다.

 

이슬람 포비아가 심한 복음주의자들이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신박한 방법이 있다. 바로, 기후변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화석 연료 퇴출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경제가 화석 연료 기반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일 머니가 더이상 축적되지 않을 것이고, 머니 없는 이슬람 세력은 자연스럽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괜히 몸숨 걸고 이스람 국가에 들어가 선교를 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고, 이것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슬람을 붕괴시킬 수 있는 아주 신박하고 평화로운 전략이다.

 

그러니 복음주의자들이여. 괜히 이슬람 포비아에 휩싸이지 말고, 괜히 이슬람을 연구한다고 힘들이지 말고, 괜히 연구해서 그들의 세상에 침투하여 그들을 복음화시켜 보겠다고 소란을 피우지 말고,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화석 연료 퇴출 운동을 벌여 보시라. 그러면, 아주 평화롭게, 그리고 아주 효과적으로 당신들이 원하는 바, 이슬람 세력은 약화될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신박한 아이디어가 부디, 그대들의 마음에 가 닿기를!

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띄워야 하는 승부수: 시대정신]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

 

예수와 바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저항과 해체의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와 바울의 저항은 아주 물리적인 저항이었다. 특별히, 제국과 제국신학이라는 물리적 현상이 저항의 대상이었다. 예수와 바울은 제국과 제국신학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나라(하나님 나라)와 신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제국과 제국신학은 중심부 사상이다.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생산한다. 예수와 바울이 주목한 것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주변부의 주체-되기였다. 어떻게 하면,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삶을 다시 회복시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였다.

 

역사는 제국과 제국신학의 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아주 교묘하게 중심부를 강화시켰고,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들을 아주 교묘하게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착취하는 기만술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체제'이다. 신자유주의는 마치 아무도 통치하지 않고, 아무도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자기 착취'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평할 외부상대가 없어 자책만 하다 결국 저항하지도 해체하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살아간다.

 

역사는 제국과 제국신학의 발전만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저항과 해체의 발전도 함께 있었다. 예수의 정신은 죽지 않는다. 예수와 바울의 저항과 해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순히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시대 정신이다. 왜냐하면, 제국과 제국신학은 이전보다 거대하고 교묘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이다.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통제 불가능한 과학기술 시대,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라는 종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범주에 들어서고 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점점 '주체'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의 주체를 빼앗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이것을 인격 자살이라 부르고 싶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제국주의가 있다. 우리 시대의 메타내러티브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모든 공간과 시간을 시장화시켜, 모든 존재를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과 같다. 인류 역사에서 요즘 시대만큼 '자유'가 넘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류 역사에서 요즘 시대만큼 '착취'가 넘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자유로운 노예가 득실대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자유'에 취해 있지만, 실상은 그들이 모두 '노예'라는 사실이다. 자유에 취해 있다보니, 자신이 노예인줄 모르고 산다. 이것은 절묘한 제국신학이다.

 

이러한 제국신학에 저항한 선지자들이 있다. 마르크스가 있고, 벤야민이 있고, 푸코가 있고, 바디우가 있고, 아감벤이 있고, 지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제국신학에 저항한 선지자들이다. 이들 외에, 제국신학에 극렬하게 저항한 선지자로 기 드보르가 있다. 나는 기 드보르가 쓴 <스펙타클의 사회>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선지자들이 더 있다.

 

이들은 모두 주체를 교묘하게 무너뜨리는 제국과 제국신학에 저항한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제국신학을 해체하여 빼앗기고 무너진 주체를 다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신학을 제시한 이들이다. 교회는 때로 이들이 교회 안에 있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고 이방인 취급하거나 이교도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얼마나 제국과 제국신학에 물들었고, 그들과 한 편인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식 복음주의를 싫어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대중화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자본주의에 축성식을 벌인 형국과 같다. 그래서 미국식 복음주의는 중심부, 큰 것, 힘 센 것에만 관심을 둘 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체-되기 또는 자신들의 주체를 강화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아무 것도 아닌 것들, 주변주로 밀려난 것들의 주체-되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주체-되기를 막는다. 그들을 악마화시켜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다.

 

기후변화의 시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변화를 인간이 맞닥뜨리게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변화(change)라는 말보다 전환(transition)이라는 말을 쓴다.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변화가 발생하면 단순히 변화에 적응하는 정도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체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으면 전환을 감당할 수 없다. 즉, 전환이 발생하면, 주체의 전환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현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주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인류세(Anthropocene)는 자본세(Capitalocene)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들,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통제할 수 없는 과학기술 시대, 기후변화, 난민 문제, 홈리스 문제, 총기 문제, 약물 중독 문제, 국제 분쟁 문제 등은 모두 인류가 자본주의-주체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주체가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다.

 

혹자는 이것을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굉장히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인류가 맞닥뜨리는 문제를 자꾸 관념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 또한 그동안 교회가 얼마나 제국과 제국신학에 물들었고, 그들과 한 패가 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기독교는 유물론을 자꾸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물질/현실을 악한 것으로 보고, 영/이데아를 이상으로 보는 플라톤 철학에 오랫동안 기대어 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니체가 이런 말을 했겠는가. "기독교는 플라톤 철학의 대중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론 신학이 아니라, 유물론 신학이다.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에서 간파했듯이, 아렌트가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을 천명했듯이, 위에서 언급한 우리 시대의 선지자들이 유물론자들이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 천국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의 신학이다. 물질인 몸과 물질인 지구가, 즉 인간의 조건인 물질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그 존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1세기, 각 종 위기 앞에서, 무엇보다 기후위기 앞에서 교회가 띄워야 할 승부수, 시대정신은, 예수와 바울이 이미 그랬듯이, 저항과 해체의 정신이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체-되기 프로젝트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교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범주에 들어섰다. 주체-되기 프로젝트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이야기이다.

 

그동안 교회가 제국과 제국신학에 봉사하는 동안, 교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는 주변부로 밀려나버렸다. 자본이 황제가 되고, 자본주의가 제국이 되고, 자본이 메시아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교회의 시대정신은 분명 자본주의와의 생사를 건 한 판을 벌여야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영국 틴데일 기후변화센터의 케빈 앤더슨의 보고에 따르면, 2050년에 90억 명에 이른 인류가 2100년까지 섭씨 4도 상승하면, 5억 명 정도만 살아남는다. 이는 지금보다 훨씬 악화된 대기오염뿐 아니라, 살인적인 폭염, 가뭄, 태풍, 홍수, 식량난, 식수난, 기후 전쟁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경고, 11쪽)

 

상황이 이런데, 교회가 '죽어서 천국 가는' 지구 탈출법을 가르치는 데만 그친다면, 어느 시점에서 교회는 인류와 함께 소멸되고 말 것이다. 교회의 시대정신은 이런 물리적 위협에 맞서 이 문제를 일으킨 근본원인을 파헤치고,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철저한 유물론적 사유와 신학이 필요하다. 지구의 구원 없이 인간의 구원은 없다. 자본주의-주체에 맞서,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여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급진적-주체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기후변화를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 기후변화를 통해 인간 주체가 새롭게 형성되어 더 평화로운 세상이 임하게 되길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무위(無爲)의 존재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라는 책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지를 간결한 필치와 깊은 사유를 통해 펼쳐 보여줍니다. 우리는 피곤합니다. 사람들은 ‘피곤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피곤할까요? 한병철은 우리가 경험하는 피곤의 뒷면에는 ‘긍정의 과잉’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긍정의 과잉.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던져봅니다. 정말 모두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긍정 과잉의 사회, 즉 피로사회에서는 ‘할 수 없다’는 부정어가 금기시됩니다. 긍정성 이면에는 성과주의(meritocracy)가 존재합니다. 성과를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보상을 해주고, 성과를 못 내는 사람에게는 ‘루저’(실패자)라는 낙인을 찍습니다. 사람들은 루저의 낙인을 받지 않기 위해 긍정의 힘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 영혼까지 갈아 넣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피곤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아주 교묘한 통치술입니다. 군부독재, 또는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는 ‘규율사회’로서 ‘해서는 안된다’는 부정의 방식으로 국민을 통제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해 보면, 하면 안 되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두발도 규정이 있었고, 귀가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통금시간), 해외 여행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체제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유롭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성과사회’로 ‘할 수 있다’는 자기 착취를 유발합니다. 외부의 세력이 성과를 내도록 착취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착취합니다. 성과를 못 내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그 결과 요즘 사람들은 피로가 극에 달하고, 우울증 등 신경성 질환 환자가 많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묘합니다.

 

이런 21세기의 비극적 풍경 속에서 사실상 신앙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습니다. 신앙은 성과를 내느라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고,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착취하는 ‘체제’를 간파할 수 있게 해주며, 더 이상 피곤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주고, 실제로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다른 비극을 경험합니다.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 신앙이 가장 배척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성과를 내기 위한 조건은 오직 몸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Fitness)에는 열심히 가도, 영혼을 위한 신앙은 등한시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몸을 위한 스프는 먹어도, 영혼을 위한 스프는 잘 먹지 않는 시대에 삽니다.

 

피로사회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과를 내느라 몸과 영혼을 모두 망가뜨리는 자기 착취를 멈추고 평안에 이를 수 있을까요? 한병철은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깊은 심심함’이나 장자의 ‘무용지용’의 철학을 제시합니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하지 않을 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쓸모없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교묘한 자기 착취의 메커니즘에 저항할 것을 주문합니다. 즉, 한병철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갈망합니다. 무위의 존재. 없이 존재하는 존재. 나의 바깥 것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바깥 것을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존재. 이런 존재를 갈망합니다. 한병철은 철학자라 철학적으로 새로운 주체를 제시했지만,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무위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착취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는, 그러면서 서로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는 존재. 신앙만이 이런 존재를 빚어내리라, 저는 믿습니다. 신앙을, 지키세요.

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자본주의 시대의 신앙]

 

‘개인’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생겨난 개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도요.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개인’이라든지 ‘마음’이라든지, 이런 개념이 사람들에게 별로 없었어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보다 큰 존재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자식은 부모에게 묶여 있고, 가족은 집안에 묶여 있었죠. 집안은 더 큰 공동체에 묶여 있었고, 결국 가장 높은 곳으로 가면, ‘임금’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없고, 언제나 존재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묶여 있는, 그래서 개인이라는 개념과 마음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죠.

 

개인주의 사회와 ‘내 마음’이 중요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 이야기가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겁니다. 시대가 바뀐 탓이죠. 시대가 바뀌면 그 이전 시대는 전혀 인식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시대가 전부인 것이죠. 개인과 마음이 발명되기 전, 인간은 세상이 그냥 그런 줄 알고 살았습니다. 임금님, 또는 집안의 뜻이 곧 내 뜻이었고, 임금님, 또는 집안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었죠. 다른 뜻과 마음을 품는 것 자체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그래서, ‘군사부일체’(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이 사회의 규율로 엄격하게 작동했습니다.

 

근대(modernity)에는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개벽을 한 것이죠. 무엇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마음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내’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죠. 나는 더 이상 임금님의 뜻을 따를 필요도 없고, 집안의 마음이 곧 내마음이 아니어도 된 것이에요. 나라는 존재, 나의 마음이 자율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상황을 통틀어서, 자율성(autonomy)라고 합니다. 근대에 비로소 자율적인 개인의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이후, 사회의 모든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개념이 발전되고, 자본주의라는 경제 개념이 발전되었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발전할 수 없는 개념들입니다. 민주주의는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예전에는 왕정 체제와 귀족 체제가 사회의 근간이었죠. 그때는 개인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인과 마음의 발명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됐죠. 민주주의는 개인과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정치를 거기에 맞춥니다. 그래서 한 개인이 투표권을 갖게 됩니다. 그 투표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죠. 이제 정치는 한 개개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에요.

 

자본주의는 개인과 마음의 개념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경제 체제입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망(마음)에 철저하게 기댄 경제 체제에요. 자본(돈)은 개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매직이죠. 개인은 자본을 가진 만큼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욕망은 밑도 끝도 없죠. 그래서 인간은 그 밑도 끝도 없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본(돈)을 갈망합니다. 누구나 욕망의 크기는 똑같습니다. 무한대이죠. 그러나 사람마다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한계는 다릅니다. 자본이 많은 사람은 욕망을 더 많이 채울 수 있고, 자본이 없는 사람은 욕망을 조금 밖에 채우지 못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욕망의 크기가 아니라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곧 계급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자본(돈)을 욕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높은 계급이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죠. 그래야 인간다운 삶,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자본주의는 이렇게 철저한 인간학입니다.

 

인간이 자율성을 가지게 된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율성이 인간을 정말로 자유롭게 만드는데 쓰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비참한 현실로 몰아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이 부분에서 인간의 죄성(罪性)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좋은 것을 좋게 쓰지 못하고, 좋은 것을 악하게 쓰게 되는 현실 말이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인데, 개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기에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갈 위험성이 너무 크고(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자본주의는 자아실현을 위해서 귀하게 쓰일 수 있는 요소가 있는데, 결국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부추겨 인간 자신을 망칠 뿐만 아니라 결국 지구를 망쳐놓게 됐으니까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결국 인간이 문제인 것이죠. 좋은 것을 좋게 쓰지 못하는 인간의 그 말할 수 없는 부족함.

 

신앙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는 분들에게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신앙은 액셀러레이터(가속기)가 아니라 브레이크입니다. 신앙을 가속기로 사용하려는 사람, 또는 그렇게 사용하라고 부추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또한 악한 사람입니다. 특히나 근대의 개인과 마음의 개념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은 브레이크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자율성을 컨트롤 해줍니다. 신앙은 인간의 욕망을 한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게 해주고, 욕망이라는 전차를 멈추어 세우는 브레이크 역할을 해줍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앙이라는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성을 붙잡아주고, 나도 모르게 무지막지한 파괴행위에 동참하는 일을 멈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근대는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인간은 그 안에 타서 자동차를 멋지게 운전합니다. 그런데, 만약 쌩쌩 달리는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달릴 때는 기분 좋고 멋지지만, 정작 멈추어야 할 긴급 상황이 오면, 그리고 설정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브레이크가 없어 멈출 수 없다면, 자동차를 탄 인간은 비명을 지르며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절규’가 떠오르네요. 뭉크의 절규가 바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탄 우리들의 절규인 것이죠. 그 절규를 멈추어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을 잘 사용해 보세요. 개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데 사용해 보세요. 인간의 마음은 사실 그 어떤 것으로도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다. 아주 압도적인 거대한 힘이 필요하죠. 그런데, 그 거대한 힘이 강압적이거나 강제적이면 안 됩니다. 바람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옷을 벗게 할 따스함이 필요합니다. 그 거대한 힘, 그러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힘, 없는듯 있는 힘, 없이 존재하는 힘, 그래서 개인을 뭉개지 않고,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힘, 자율을 진정한 자율로 작동하게 만들어 주는 힘, 그게 바로 하나님이시겠죠. 그런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일 것입니다.

 

신앙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만큼 신앙이 중요한 시대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 신앙이 가장 무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아우성과 탄식 소리만 들립니다. 사람들이 많이 아픕니다. 자기의 마음을 허탄한 것에 맡깁니다. 악순환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신앙을 귀하게 생각하고, 신앙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전파하는 사람은 정금보다 귀합니다. 이 글을 읽고,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이 귀한 신앙을 어떻게서든 한 명에게라도 더 전달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당신은 정말 보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온라인 기도 사역을 시작하며

 

온라인 기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기도 컨텐츠를 유튜브에 올리는 사역입니다. 사역(미니스트리/ministry)은 ‘구원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은, 그래서 사역, 즉 구원하는 일이라 부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사역’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온라인은 모든 사람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온라인에 있는 컨텐츠를 소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요즘 우리들의 풍경입니다. 그런데, 온라인 컨텐츠는 대부분 자극적입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에, 온라인 컨텐츠는 썸네일부터 영상과 내용까지 모두 자극적입니다. 그런 자극에 노출되어 오랜 시간 보내다 보니 요즘 우리들은 왠만한 것에는 자극조차 되지 않습니다.

 

물론 온라인 컨텐츠 중에는 유용한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이라는 환경 자체가 워낙 자극적인 것이 많다 보니, 유용한 컨텐츠 자체도 자극성에 묻혀 그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온라인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신도 혼미해지고, 체력도 바닥나고, 무엇보다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정작 현실에서 집중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큰 부작용을 안고 살게 됩니다.

 

온라인 기도 사역을 통해 하고 이루고 싶은 것은 온라인 환경을 조금이라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자극적인 컨텐츠에 맞서, 마음에 평안을 주고 삶을 돌아보게 하며, 무엇보다 삶에 힘이 되는 컨텐츠를 올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듣는 이들, 기도를 함께 하는 이들의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고 두 손과 다리에 다시 힘을 주는 사역이 되길 바랍니다.

 

이 일에 동참해 주세요. 구독해 주시고 ‘좋아요’도 눌러 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세요. 그래야 알고리즘이 기도 유튜브를 사람들에게 많이 노출시켜줍니다. 지금은 AI 목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여러분들이 직접 기도문 낭독에 참여도 해주세요. 나중에 이 기도문을 모아 ‘우리들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책도 출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기도 사역을 통해 우리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밝고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

 

#온라인기도사역 #장준식목사의파루시아를살다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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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자유가 자유가 아닌 세상]

 

21세기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경제적 자유다. 이것을 헷갈리면 안 된다. 대통령이 말끝마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될 수 없다.

 

정치신학을 공부할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정치 사상가로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가 있다. 슈미트는 1923년 출간한 <로마 가톨릭과 정치적 형식>이라는 책에서 자유주의 정치를 비판하는데, 그가 간파한 당시의 자유주의 정치는 산업자본주의 체제의 산물로서 산업의 합리적 관리가 목표인 정치였다. 한 마디로, 자유는 정치 개념이 아니라 경제 개념이라는 뜻이다.

 

산업혁명 이래 자본주의가 사회의 근본 체제로 자리잡으면서 자유의 개념은 끊임없이 정치적 자유에서 경제적 자유로 그 의미가 변해왔다. 그러다 20세기말 대두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의 개념이 확고하게 드러났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공고해진 21세기에서 자유는 결코 정치적 개념이 아니다. 경제적 개념이다. 이것을 헷갈리면 안 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경제적 사고로 귀속시킨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자유는 경제의 창출, 즉 돈의 창출(이익의 창출)을 위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하는 '자유'를 최고의 이념으로 삼는다. 이 자유를 막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돈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 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처단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정치는 경제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정치란 정치의 고유한 영역이 없고 오직 경제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경제 앞에서 정치는 쩔쩔맨다. 경제를 잘 돌보지 못한 정치는 정치도 아니게 된다.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나 그 어느때보다 자유가 없어 답답해 하고, 자유가 없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세대는 왜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운 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살다, 참다참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유'를 실행한다. 사실 그 행위는 자유가 아닌데, 신자유주의 체제의 압박에 내몰린 사회적 타살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그냥 자유로운 선택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이런 세상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자본을 독점하고 있거나, 또는 자본을 지키기 위하여 개처럼 봉사하는 부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말끝마다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자유를 지키겠다고 기득권에 부역하는 자들 또한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자유'는 감언이설로 포장된 '억압'일 뿐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하거든, 도망치라. 그 사람이 말하는 자유 뒤에는 덫이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아우성 거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지옥에 살고 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Posted by 장준식

[교회와 세속화]

 

"그람시가 말하는 세속화란 모든 사회관계를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새로이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교회가 기존의 모든 지적, 도덕적 관계, 즉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김항, <종말론 사무소> 16쪽)

 

그람시의 문제의식을 통해서 보듯, 서구사회에서 교회는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였다. 요즘 우리가 자주 하는 말로 옮기면, 서구사회에서 교회는 '적폐' 그 자체였다. 우리는 '세속화'라고 하는 말을 별로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서구사회에서 '세속화'란 적폐 청산을 위한 몸부림을 담고 있는 말이다.

 

서구의 세속화 논쟁은 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동시에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화'의 다름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문명의 총아는 뭐니뭐니 해도 종교이다.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총아다. 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서구문명을 깊숙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의 위상과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기본의 모든 지적, 도덕적 관계, 즉 지배계급이 축적/유지해온 사회관계의 총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이 된 이후, 서구사회에서 기독교는 지배계급의 위상와 위력을 누리며 발전해 왔다.

 

종교만큼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종교는 지배체제를 성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에, 지배체제를 축복하는 순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듯, 그 지배체제는 신성화된다. 이는 지배세력이 종교를 등에 업으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과 몇몇 교단의 수장들은 새로이 대통령이 당선되면 '당선 감사예배'를 드린다. 보수 기독교 세력은 언제나 정부(특별히 보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특별히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기독교의 뉴라이트 세력은 보수 정부가 들어선 요즘 대놓고 보수 정권을 지지하며 정부가 보수 정책을 펼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이는 그람시의 통찰에서 보듯, 한국 기독교가 스스로 적폐 세력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 세력들은 지금까지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외세의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392-393쪽).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보수당 국민의 힘은 노론에 잇대어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해, 한국에서 보수세력/지배세력의 역사는 500년이나 된 것이다. 이 500년 간의 지배세력 역사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한 것일까? 당선 축하 예배와 뉴라이트 세력의 득세를 통해서 한국 (보수) 기독교의 역할은 명확해진다. 한국 (보수) 기독교는 지배체제를 신성화시키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길지 않는 역사에서 서구 기독교의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 (보수)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적폐가 된 것이다.

 

이것은 복음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현상이다. 복음은 국가와 종교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국가와 종교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힘이 잘못 쓰이면 국민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힘이 올바로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필요하다. 복음은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이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고단한 길을 걷는 이들이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임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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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민족 시인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입니다. 학창시절 했던 국어 공부를 되돌아보면, 여기서 ‘님’은 ‘국가’를 의미합니다. 국가(나라)를 사랑하는 ‘님’에 비유해서 표현한 이 시 ‘님의 침묵’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정서를 깊이 반영한 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마도, 한용운의 시에서 절절하게 외치는 것처럼 ‘국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조건에서 국가만큼 중요한 것도 드뭅니다. 국적이 없으면 난민이 됩니다. 현재 유럽대륙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난민문제입니다. 얼마 전에는 유럽연합에서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다, 결국 난민법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죠. 일정 부분 난민들을 책임지는 방향으로 정책을 정했습니다. 난민 입장에서는 감사한 결정입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주권이 사라집니다. 한국은 이미 그 경험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주권 없는 ‘인간’으로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님의 침묵’처럼 애절한 노래도 부르게 된 것이죠. 그 당시 거의 모든 문인들은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외에도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소설가이자 시인 김훈의 ‘그날이 오면’, 시인 이육사의 ‘광야’, ‘절정’ 등 수많은 작품들이 빼앗긴 국가, 주권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국가는 여전히 인간의 조건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좋은 나라를 세우는 일은 여전히중요합니다. 이와 더불어, 21세기에 들어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한길사, 78쪽). 21세기에 떠오른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은 바로 ‘지구’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구는 그냥 인간이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자원’ 정도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앞두고 사람들은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을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기후변화 때문입니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인류 최초 기후변화 대책회의가 열립니다. 일명 ‘기구정상회담’(Earth Summit)입니다. 이와 발맞추어 한국에서도 1991년에 ‘녹색평론’이 창간되고, 이보다 앞서 1989년에는 ‘한살림선언’이 발표되고, 1993년에 김대중은 지속가능한 경제를 환경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할 것을 주문합니다. 환경 문제를 단순히 경제 성장의 부차적인 문제로 보지 말고, 경제 발전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생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평범하고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단순히 ‘기후가 변화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서 기후변화는 늘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21세기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는 이전 기후변화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기후변화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인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구원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문제'라는 것이죠.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변화 문제에는 인간의 온갖 죄악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인간의 ‘조건’인 지구가 고통받는 이 시대에 세상과 발맞추어 교회는 인간의 조건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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