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루터의 농민혁명에 대한 대응에 대하여 질문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을 조금 보충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의 페이퍼를 쓰면 좋은 주제인 듯해요. 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나 해방신학자들 중에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은 루터를 두고 "민중의 배신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의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 루터의 입장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의 농민들은 혁명을 일으키면서 12개의 성명서(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을 내겁니다.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 당시 농민들의 울분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두 집단으로부터 억압을 당하는데, 하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입니다. 이중고를 겪은 것이죠. 요즘엔 교회가 억압하는 단체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정부에 대응하는 수퍼 파워 단체(중세 때는 교회)가 없어서, 현대 사회는 국가(정부)가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르는 형국이죠.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국가(정부)의 대응체로 반드시 자리매기매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정치신학적 주장이기도 합니다.

12개의 성명서를 보면, 재미난 것이 있습니다. 첫째 성명서가 목회자에 대한 것입니다. 영어 번역문을 옮겨보겠습니다. "We humbly ask and request-in accordance with our unanimous will and desire-that in the future, the entire community have the power and authority to choose and appoint a pastor. We also want the power to depose him, if he acts improperly." 

요지는 교인들이 목사를 선택하는 권리를 가지고, 파면시키는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민주적이죠. "윤석열을 파면한다."처럼, "전광훈을 파면한다." "손현보를 파면한다." 이런 것을 요구한 것이죠. 이런 것을 보면, 국가가 교회보다 더 민주적인 공동체가 된 듯합니다. 교회가 정말 분발해야 합니다. 

농민들의 성명서를 보면, 이렇게 교회 권력의 부당함에 대한 이야기부터, 정부 권력의 부당함에 이르기까지, 이 두 집단이 농민을 어떻게 착취하고 억압하는지를 간략히 보여주면서, 이 부당한 법들을 고쳐줄 것을, 그래서 농민의 삶을 해방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진술합니다.

농민혁명 성명서가 성서를 근거 삼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교회와 정부의 비난의 화살이 루터로 향했던 모양입니다. "농민들이 이렇게 성서를 근거로 깝치는 것은 너(루터) 때문이야!" 그래서 루터는 농민혁명에 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죠. 그래서 루터는 "Admonition to Peace: A Reply to 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라는 글을 씁니다. 

루터는 이 글을 통해서, 농민도 달래고, 교회와 정부도 달래서 두 세력 간에 평화 협정을 맺기 원했습니다. 

루터가 농민혁명을 반대했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 정도의 루터 입장 때문입니다.
1) 질서와 권위에 대한 루터의 신학적 입장
ㅡ 루터는 세속 권위(정부/지배자들Lords)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폭력적 저항은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2) 농민들의 요구가 '복음'을 이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
ㅡ 위에서 보았듯이, 농민들의 12개 성명서는 성경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특별히, 루터가 가라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루터가 보기에 농민들의 요구는 복음을 빙자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루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보면, 농민들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3) 루터의 점진적 개혁 사상
ㅡ 루터는 급진적 개혁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대개 이러한 경향을 지닙니다.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혁, 그리고 사회의 개혁보다는 인간 내면의 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ㅡ 스펙타클의 사회를 공부할 때, 마르크스와 바쿠닌, 프루동의 비교를 떠올려 보시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마르크스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습니다.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요. 그러나, 바쿠닌은 국가 폐지를 요구하고 즉각적, 급진적 개혁을 원했습니다. 루터는 마르크스와 결을 같이 하고, 토마스 뮌처는 바쿠닌과 결을 같이 합니다. 
4) 귀족의 비호
ㅡ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종교 권력의 횡포를 피하기 위하여 세속 권력(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비호를 받습니다. 
ㅡ 그리고, 루터는 농민 출신이 아니라 사제 출신입니다. 
ㅡ 루터는 기본적으로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에 friendly 할 수밖에 없는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루터의 뿌리이죠.

루터가 무작정 농민혁명을 비판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만 나무란 것도 아닙니다. Admonition to Peace에 보면, "To the Princes and Lords"를 꾸짖는 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To the Peasants"의 성명서에 응답합니다. 

루터는 16세기 인물입니다.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 농민혁명이 발생한 것에 루터는 매우 당황한듯합니다. 자신의 성서해석,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이 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진 것에 대하여 루터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분노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Admonition to Peace라는 글을 통해 권자들과 농민들과의 화해를 이끌려 했던 것이죠. 

500년이 지난 현대 민주주의 관점에서 루터를 보면 루터가 매우 보수적일 수 있지만, 16세기 독일 사회의 정황을 생각해 보면, 루터는 매우 급진적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농민들이 내건 12개의 짧은 성명서를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독일의 이러한 전통에서 마르크스 같은 인물이 나오고,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가 나온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역사의 발전 같습니다. 

역사가 퇴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의 공부가 귀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존한 인물이다. 레비는 수용소에 끌려가 낯선 경험을 한다. 수용소에 입소했을 때 그에게 폭행을 가한 사람은 나치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이었다. 

탈식민주의 학자 프란츠 파농의 구분에 의하면, 레비가 당한 폭력은 수평적 폭력이다. 수직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수평적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속담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파농은 수직적 폭력의 악마성을 폭로한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알제리는 수평적 폭력이 난무했다. 파농은 왜 그럴까 연구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 담겨 있다. 알제리 사람들이 서로에게 수평적 폭력을 저지르는 이유는 알제리 사람들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수평적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직적 폭력을 막아내야만 수평적 폭력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근 30년간 자본의 수직적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 자본의 폭력은 소리 없이 사람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한국 사회가 극단적 분열 사회로 치달은 이유는 수직적 폭력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수평적 폭력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던져 졌기 때문이다.
계엄 사태 이후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수평적 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뜩이나 수직적 폭력에 시달려 힘든 대한 국민들에게 국가의 직접적 수직 폭력을 가하여 사회를 더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국가의 수직적 폭력은 반드시 수평적 폭력으로 번지게 되어 있다. 

지난 4개월 동안 한국 사회는 Psychosomatic 현상이 더 짙어졌다. Psychomatic은 psycological(정신)과 somatic(신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치심리학 용어이다. 한 인간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질병은 사회가 가하는 시스템적인 폭력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프란츠 파농의 주장이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동안 대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이 아팠다. 수직적 폭력을 당해야 했고, 그로 인한 수평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사회가 얼마나 분열되었는지, 어제 같이 밥 먹던 친구들이 이제는 원수가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가족들 간의 분열, 동료들 간의 분열이 너무 심해서, 이제는 결혼 정보 회사에서 배우자의 정치 성향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을 대통령 직에서 파면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전혀 아니다. 한국은 윤석열에게 집단 소송을 제기해야 할 판이다. 수직적 폭력에 의한 수평적 폭력의 창궐의 죄를 물어 형사소송, 민사소송 등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소송을 제기해야 할 판이다. 

1871년, 파리코뮌은 프랑스 정부군에게 패한다. 코뮌에 참여했던 유진 에딘느 포티에(Eugène Edine Pottier)는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를 지었다.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서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죄수들이여, 일어서라. 이성은 이제 활화산의 분화구에서 터져 나오리니, 그것 마지막 파열이다. 지나간 낡은 세계를 깨끗이 쓸어버리자. 노예가 된 대중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온 세계가 밑바닥부터 변화하리니, 우리는 지금 아무 것도 아닌 존재처럼 되어 있으나, 모두 온전해지자.”

2025년 4월 4일. 대한 국민은 정부의 수직적 폭력을 이겼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받았던 저주, '미련한 자를 지도자로 두었던 저주'를 이제 떨쳐내야 한다. 우리가 새로 받아들여야 할 지도자의 사명은 너무도 명백하다. 수직적 폭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 수평적 폭력을 멈추게 할 자.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자. 

예수의 십자가는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추어 세운 사건이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박힌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출 지도자를 선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추어 세우는 일에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야 할 것이다. 무너진 교회가 부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서라. 이제 모두 온전해지자.

Posted by 장준식

막돼먹은 추노꾼들의 세상

“언년아~” 추노꾼, 대길이의 음성이 쩌렁쩌렁 들린다.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주제곡이 흐른다. 추노꾼 이야기. 조선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2025년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들’은 도망친 노예 취급 당한다. 그들은 추노꾼에게 잡혀 온갖 모욕을 당하고 송환 당해야 하는 노예일 뿐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불법 체류자들을 추방하기 위한 ‘앱’(CBP Home)까지 생겼다. 테크놀러지를 탑재한 추노꾼 같다. 이 ‘앱’은 불법 체류자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땅을 떠날 것을 압박한다. 

일론 머스크는 언론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사회복지기금을 사용해서 불법 체류자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을 유권자로 만들어 표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복지기금을 삭감하면 불법 체류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잘못된 방식으로 지지층을 끌어 모으는 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개소리(bullshit)다. 

정복, 약탈, 학살. 미국의 역사는 이 어두운 단어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형태와 방법만 바뀌었지, 미국 사회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최근 출간된 책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심장이라 불리는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정복, 약탈, 학살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지 파헤친다. 

팔로알토에는 스탠포드 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구글(마운틴 뷰), 메타(멘로 파크), 애플(쿠퍼티노) 등, 굴지의 IT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실리콘벨리 중에서도 팔로알토는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실리콘밸리가 원래 공기 좋은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팔로알토의 공기는 남다르다.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는 블링블링한 팔로알토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린다. 팔로알토에서도 미국의 ‘정복, 약탈, 학살’ 역사가 반복된다. 1850년 캘리포니아에 불어온 골드러시 당시 팔로알토에 당도한 백인들은 그곳의 원주민들(인디안)을 정복하고, 그들을 약탈하고 학살한다. 이러한 그림자는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에 깊이 배어 있다. ‘정복, 약탈, 학살’. 즉, 극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효율성의 극대화가 필요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존재는 가차 없이 퇴출시키는 것이다. 현대판 우생학이다.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실리콘밸리의 아이콘 ‘일론 머스크’는 정확하게 미국의,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정복, 약탈, 학살’의 역사적 맥락에 서 있다. 이들의 사고 방식은 철저하게 ‘제국주의’적이다. 이들은 현대판 우생학의 자식들이다. 이들에게 정의(justice)는 힘 센 자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들의 행보를 서포트 하는 세력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성경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데, 제국주의를 관철시키려는 트럼프와 머스크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아무래도 ‘다른’ 성경책을 읽는 게 분명해 보인다. 

윤oo이 구치소에서 풀려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구치소에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미국과 한국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성경(그들의 성경)도 싫어졌고, 김치찌개도 싫어졌다. 

막돼먹은 추노꾼들을 개과천선시킬, ‘언년이’가 필요한 세상이다. “언년아~~~”

Posted by 장준식

쓸모를 고민하는 신앙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뜨거운가’, ‘얼마나 열정적인가’로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책망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신앙의 본질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쓸모 있는가’에 대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계 3:16)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신앙의 열정과 무관심의 문제로 해석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 표현의 의미는 ‘유용성’과 관련이 있다. 라오디게아 도시를 흐르는 물은 골로새의 차가운 물도,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도 아니었다. 그들의 물은 미지근하고 쓴맛이 강해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단순히 열정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역할과 쓰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있었다. 그들은 도시가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재건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유함이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자만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그들의 문제는 편안함과 자기만족이 영적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돈이 있고,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하나님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신앙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고민을 멈추었다. 그래서 책망받았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으면 신앙이 해이해지고, 가난하면 신앙이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잠언 30:7-9에서 아굴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이유는 너무 부유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너무 가난하면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핵심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신앙은 미지근해지고, 가난해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신앙이 식어버릴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 받은 이유는 그들이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함 속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힘이 적었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들었다.

예수님은 "나는 네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흰 옷을 사서 입어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계 3:18)라고 말씀하신다. 불로 연단한 금은 ‘세상의 부요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영적 부요함을 구하라’는 뜻이다. 흰 옷은 ‘하나님의 의로 입혀진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안약은 ‘영적인 눈을 떠서 진리를 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쓸모를 간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와 함께 먹겠다”(계 3:20)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했겠지만, 실제 삶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법을 잊어버린 교회였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문을 열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의 쓸모를 간구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미지근한 신앙’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역할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너희를 토해낼 것이다"라는 무서운 경고를 받았다. "나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있으니까 충분해." "교회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으니까 됐어."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하나님께 더 집중하면 되겠지." 이러한 태도가 쌓이면, 신앙은 점점 미지근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쓸모를 고민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가 곤고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신앙은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 신앙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간절히 겸손하게 기도하며 ‘쓸모를 고민하는 신앙’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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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미학

인내는 신앙의 가장 위대한 덕목 중 하나다. 신앙의 여정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시련과 도전이 닥쳐온다. 때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계 3:10).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를 결코 헛되이 두지 않으시며, 그것을 기억하시고 보상하신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크지 않았고, 사회적 영향력이 미약한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이 그들을 배척하고 박해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며 “열린 문”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역설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겉으로는 약해 보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강한 교회였다. 세상은 힘과 권력을 숭배하지만, 하나님은 겸손한 믿음과 인내를 귀하게 여기신다.

성경은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수많은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과 욥이다. 요셉은 젊은 시절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했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었다. 또한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심지어 육체적인 고통까지 당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전보다 더 큰 복을 주셨고, 그의 믿음과 신실함을 인정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스마트폰으로 몇 초 만에 정보를 얻고, 온라인 쇼핑을 하면 하루 만에 물건을 받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시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내’라는 덕목은 점점 더 잊혀지고 있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고, 고난이 닥쳤을 때 즉각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조급해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사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기회를 자주 잃곤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꾸 신비를 잃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의 미학’을 가르쳐 준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며 기다리는 태도이다. 인내는 희망이다. 우리의 신앙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품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능동적인 태도이다. 인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물을 믿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내는 믿음의 가장 깊은 속성이다.

신앙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도 있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인내할 때마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 고난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계 3:10). 우리의 신앙과 삶이 위험할 때, 이 말씀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힘들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내를 보시고, 우리의 삶을 지키실 것이다. 믿음의 경주에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자. 그분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환란 날에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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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지 못한 교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어떤 교회는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이다. 사데 교회가 그랬다. 겉으로는 번성했고, 명성이 있었으며, 평판도 좋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살아 있다 하는 평판을 가졌으나, 너는 죽은 자다”(계 3:1).

이 말은 교회(신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안에서는 메마르고 힘을 잃은 상태.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세상과도 멀어지는 삶. 그것은 곧 뒤처지는 삶이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생명이 단순한 습관이 되고, 숨은 쉬고 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이 않은 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은 점점 무력해진다.

뒤처지는 것은 무섭다. 한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기쁨이었지만, 지금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예배가 부담스럽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지며, 말씀을 들어도 마음 깊이 와닿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깨어 있지 못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방치하면, 결국 신앙은 점점 더 깊이 잠들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혹시 이런 상태에 처해져 있을 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희망을 준다. "깨어 있으라. 굳건하게 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 회개하라" (계 3:2-3).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는 길, 뒤처진 신앙을 회복하는 길, 뒤처진 인생을 끌어 올리는 힘이 여기에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뜨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두고, 관계를 회복하며,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신앙은 기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신앙이다. 신앙의 길에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라이너 쿤체의 시 <뒤처진 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그는 뒤처진 새를 바라보며 그 새에게 자신의 힘을 보낸다고 말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 우리가 뒤처졌을 때, 다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힘을 보내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뒤처진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기다려 주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 살아 있으려면, 화려한 예배당이나 큰 행사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먼저이다.

사데 교회처럼, 우리의 신앙도, 삶도 한때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식어버렸을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여전히 손을 내밀고 계신다. 일어나고 싶어도 잡아줄 손이 없을 때 우리는 절망의 늪에 빠져 죽음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은 절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손을 잡을 때까지 손을 내밀고 계신다. 그러니, 그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보내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우리 신앙이 다시 살아나는 날, 우리는 진정으로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 자들이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자. 이렇게 살아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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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신앙, 저항하는 예배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신앙의 선언이며, 동시에 세상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펼쳐지는 하늘의 예배는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이 직면한 현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적 환상이 아니라, 로마 황제 숭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켜내려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메시지였다.

1. 보좌 앞의 유리 바다: 혼돈을 넘어선 질서
고대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광활한 궁창 위의 바다에 세워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질서를 의미하는 공간이었다. 세상의 혼돈과 폭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은 바로 그 보좌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2. 네 생물과 많은 눈: 불의에 대한 증언
네 생물(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은 우주를 상징한다. 그들의 몸을 덮고 있는 수많은 눈(eyes)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난과 불의를 증언하는 상징이다.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 폭력의 희생자들, 정의가 짓밟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미한다. 예배는 이처럼 세상의 아픔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자리이다.

3. ‘거룩하다 거룩하다’의 선언: 장차 오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지배하는 분을 향한 고백이다.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고통받는 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춘향이가 변 사또의 횡포 속에서 이 도령을 기다리듯, 억압받는 성도들이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의 표현이다.

4. 황제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로마 제국은 황제에게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바치게 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은 그러한 칭호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임을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한 경배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가 몸과 마음을 어디에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선언이다. 예배는 황제 숭배에 대한 저항이었고, 오늘날에도 세상의 거짓된 권력과 이념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중심이어야 한다.

5. 예배는 저항이다
출애굽기의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예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애굽기가 가르쳐주는 예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선언하는 행위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떤 모습인가? 고대 시대에 비추어 볼 때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문명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예배는 시간이 흐른 만큼 달라져 있는가? 우리의 예배는 충분히 저항적이며, 충분히 자유한가? 예배에 야성이 살아 있는가?

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는 바로 예배의 야성과 저항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권력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는가? 말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외치면서, 삶으로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세상의 거짓과 불의에 맞서는 신앙의 결단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되려면, 우리의 삶이 예배와 일치해야 합한다. 황제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신실한 예배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험한 신앙이며, 저항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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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을 이기는 신앙

버가모 교회는 두 얼굴을 가진 교회였다. 한쪽은 자랑스러웠다.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고, 순교자 안디바는 그들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부끄러운 얼굴도 있었다. 발람과 니골라 당의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진 이들도 있었다. 이 두 얼굴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현대인의 신앙은 버가모 교회의 현실처럼 양면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표면적 박해는 덜할지 모르지만, 거짓된 가르침과 세속적 유혹이 교묘히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 세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러나 그 속삭임은 때로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부지불식간에 진리를 버리게 만든다.

우리는 오늘날 무수한 '발람의 가르침' 속에 살고 있다. 그 가르침은 편리함을 약속한다. 타협하면 더 쉽게,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회개하고, 거짓된 가르침에서 떠나 바른 믿음 위에 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생명의 초대이다. 이 초대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감춰진 만나'와, 하늘의 잔치에 들어갈 '흰 돌'을 약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삶의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춰진 만나를 줄 것이다. 흰 돌을 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이다. 우리가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반석과도 같은 말씀이다.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안디바처럼, 우리의 믿음도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그 고난 속에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거짓된 속삭임 속에서 진리를 붙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주님께서 준비하신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 각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기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김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던지는 거짓 속에서도,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께 집중하자. 우리가 주님을 붙들 때, 주님은 우리를 승리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감춰진 만나와 흰 돌을 소망하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당신에게 주님의 평안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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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충성하라: 신앙은 집중력의 문제이다

역사 속에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의 상징이었다. 박해와 빈곤, 그리고 비방이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서머나 교회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생생한 도전을 던지는 메시지이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실 때, 이는 단순한 신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삶을 가득 채운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건네진 위로의 속삭임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고난을 아셨다. 그들의 빈곤을, 그리고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비방의 고통을 아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역설적이다. 세상은 충성의 한계를 요구한다. 이 정도면 됐다, 여기까지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성에는 한계가 없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신실하셨던 그분처럼, 우리 역시 끝까지 충성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이는 신앙이 단순히 머릿속에 머무는 사상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요구하는 헌신임을 깨닫게 한다.

서머나 교회가 그토록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부유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가하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은 생명의 관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했다. "네가 실상은 부유한 자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선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서머나 교회처럼 극심한 박해를 경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신앙을 흔든다. 정신을 딴 데로 돌리게 만드는 이 시대의 스펙타클(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도전이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신앙은 우리를 생명의 관으로 인도하며, 둘째 사망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은 단지 고난을 감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실함의 본질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끝까지 집중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집중)하셨듯, 우리도 끝까지 그분께 충성(집중)할 때, 생명의 관이라는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우리의 충성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에 답하며, 우리는 서머나 교회의 유산을 살아내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이야말로, 참된 부요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길이다.

Posted by 장준식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한마디 논평]

1. 유승원 목사가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하여 '유감'이라며 쓴 글이 이슈가 된 듯하다. 

2.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헤이스의 용어로는 '회개')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한 유승원 목사의 입장에 대하여 나는 도리어 '유감'을 표명하고 싶다. 

3. 보수적인 한인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감'을 잃으셨나,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4. 리처드 헤이스가 성소수자들에게 사과한 이유는 리처드 헤이스의 성경 주석이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근거로 쓰였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만든 데에는 자신의 다이너마이트 발명이 선하게 쓰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는 것에 대한 '회개'의 마음이 담겨 있다.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유승원 목사의 '유감' 표명은 한국의 보수 교회에 그렇게 쓰일 것이다.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근거로 쓰일 것이다. '거 봐라, E. P. 샌더스와 리처드 헤이스의 제자인 유승원 목사도 동성애를 반대한다!' 

5. 유승원 목사는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근거로 감리교 신학(사변형)을 들고 있다. 유승원 목사 본인이 나사렛 교단 출신이고, 그곳의 교수를 지냈는데, 감리교 신학의 사변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나사렛 교단도 웨슬리언이기 때문이다.

6.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 

7. 보수 신학이 계속 난항을 겪는 이유는 성경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수 기독교 신앙이 자꾸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고, 발목을 잡고, 뒤처지는 이유는 성경을 고착된 '이데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8. 그런데, 좀 솔직해지면 좋겠다. 성경은 하늘에 뚝 떨어진 하나님 말씀 자체가 아니지 않는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성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과 성경을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말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비이성적 행위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컨텍스트 안에서 '해석'의 작업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9. 내 눈에는 동성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확정적으로 보는 것은 창세기에 근거해서 창조의 문제를 확정적으로 보면서 현대 과학의 발견을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10.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한 평가는 이방인, 노예, 여성의 문제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없다는 진술은 매우 폭력적이다.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동성애는 '죄'라는 목소리를 내니까, 동성애는 죄가 맞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성경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의 상황과 달리 동성애를 법으로 보호하는 사회이다. 

11. 성경에서 몇 군데 언급되고 있는 동성애 관련 구절을 들어 현대 사회의 동성애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이다. 만약 성경 시대에 동성애 문제가 현대 사회처럼 주목 받는 문제였다면 성경은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성경이 그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방인, 노예, 고아, 과부)을 따스하게 품었던 것처럼 그렇게 따스하게 품었을 것이다. 

12.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국가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국가 폭력은 인류에게 가장 큰 과제이다. 국가 폭력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광화문에 100만명 모아 놓고 한 마디도 성토하지 않으면서, 성경에서 거의 포착되지도 않는 동성애 문제를 가지고서는 광화문에 100만명 모아 놓고 성토하는 집단이 정말 성경을 공경하는 정상적인 집단인가. 

13. 리처드 헤이스의 '회개'를 배워 목회 현장에서 싸워볼 의지 없이 그냥 '유감'을 표명하는 일, 그것도 매우 수사적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일이 좀 유감스럽다. 

14. 한국교회가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분명한데, 난데없이 동성애 이슈를 말하는 것도 불편하다. 약자는 좀 내버려두고, 국가와 헌법을 유린하는 사악하고 힘센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는 데 힘을 모으면 좋겠다.

 

(2025년 2월 21일에 쓴 글을 늦게 올림)

Posted by 장준식

[민주당에게 고함]

1. 플라톤의 <국가> 제5권 470b를 옮겨본다. “내가 보기에, ‘전쟁’(polemos)과 ‘내분’(stasis)은 이름도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쟁에 관렴됨으로써 실제로도 서로 다른 것을 뜻하는 것 같네. 내가 말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쟁 가운데 하나는 동족 또는 친족끼리의 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과의 남남끼리의 분쟁일세. 우리는 그중 동족끼리의 분쟁은 ‘내분’이라고 부르고, 외국과의 분쟁은 ‘전쟁’이라고 부르네.” 

2. 플라톤은 동족끼리의 분쟁(내분)은 ‘언젠가는 화해할 사람들처럼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잇는다. “그들은 선의에서 상대방이 절제를 지키게 해주려는 것이지, 상대방을 처벌하려고 예속시키거나 파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들은 정신 차리게 해주려는 자이지, 적군은 아니니까 말일세.”(471a)

3. 윤석열과 그 일당의 전술은 매우 교묘하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것을 통해 자기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비상입법회의를 만들어 세상을 자기들의 입맛대로 바꾸려 했다. 윤석열 일당이 벌인 행태는 분명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예외상태’이다. 윤석열과 그 일당이 계속 주장하는 것은 대통령의 고유한 통치권이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은 비상계엄을 통해 ‘예외상태’를 만든 뒤, 자신의 고유한 통치권으로 국가적 위기를 종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4. 한 마디로, 윤석열과 그 일당은 위에서 진술한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을 획책한 것이다. 윤석열은 자신의 정적(민주당)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적’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과 그 일당은 상대방을 처벌하고 예속시키고 파괴하려 했다. 이것은 이미 구속된 계엄군 일당들에 대한 수사에서 파악된 것이다. 

5. 그런데, 지금, 내분을 넘어선 전쟁의 획책이 시민들에 의해 막히고 불법 비상계엄 사태의 가담자 전원이 구속되고, 자신도 탄핵을 당하고 구속 수사의 궁지에 몰리자 윤석열과 그 일당은 완전 새빨간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들고 있다. 그들은 분명 전쟁을 획책했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리자,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고, 플라톤의 부드러운 표현처럼 ‘내분’이었다고 말한다. 입법 기관에 총뿌리를 겨눈 것이 아니라 절제시켜 주고 정신 차리게 해주려는 ‘계몽령’이었다고, 술수를 부리고 있다. 

6. 윤석열과 그 일당의 새빨간 거짓말 중 최고의 거짓말은 ‘다시는 비상계엄 선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만약, 이들의 술수에 넘어가 윤석열이 복권되면 윤석열은 반드시 더 치밀하게 준비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이다. 국가를 예외상태로 만들어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주권 권력을 휘두르려 들 것이다. 예외상태에서 헌법을 넘어서는 힘을 지니는 것은 대통령 자신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말이다. 

7. 이미 윤석열과 그 일당은 필사적이다. 추종자들의 사법부 침탈 사건이 그들의 필사적 전략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윤석열과 그 일당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보다 더 한 짓도 할 것이다. 지금, 대통령실이나 국민의 힘이 막후에서 윤석열을 살리기 위해서 별짓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아주아주 추악한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8. 민주당은 지금 플라톤처럼 느긋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윤석열과 그 일당은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을 죽이려 했는데, 그것이 마치 ‘내분’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면 절대 안된다. 다시 말해, 민주당은 윤석열과 그 일당을 ‘언젠가는 화해할 동족’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갖다가는 저들의 전쟁 획책에 넘어가 처벌받고 예속당하고 파괴될 것이다. 저들은 민주당(민주화세력)을 동지/동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에게 민주당은 없애버려야 할 ‘이방인들’일 뿐이다. 저들은 겉으로 자신들의 계엄선포가 ‘내분’인 것처럼 말하지만 저들이 벌인 계엄선포는 ‘전쟁’이다. 절대로 속아 넘어가면 안된다. 지금 사태는 언젠가 화해하게 될 불화가 아니다. 

9. 현대 정치철학에서 ‘내분’(stasis)은 ‘내전’으로 번역하여 부른다. 플라톤은 동족들끼리 사우는 것을 애써 ‘내전/내분’이라고 축소시키려 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동족/형제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친구인 동시에 최악의 적이기 때문’이다. 동족끼리의 싸움인 ‘내전’은 이방인들과의 싸움인 ‘전쟁’보다 더 비참할 수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 비참한 내전을 ‘사사기’에서 보았을 것이다. 기브아 사건으로 발발한 내전 말이다. 그 내전으로 베냐민 지파는 거의 멸망당할 뻔했다. 이 내전은 다른 이방인들과의 전쟁들보다 잔혹했다. 

10. 민주당은 윤석열과 그 일당들, 그리고 국힘의 헛발질로 반사이익을 얻어 정권을 손에 쥐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상대방의 실수로 득점하는 것은 실력이 아니다. 민주당은 현 시점에서 절대로 몸을 사려서는 안된다. 사생결단의 정신으로 윤석열과 그 일당들을 제압해야 한다. 지지율에 연연하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당해 멸망당할 것이다. 윤석열과 그 일당들, 그리고 국힘당이 온갖 술수를 다 쓰는 것처럼, 민주당도 온갖 전략을 동원하여 저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전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11. 특별히 이재명 대표는 조기 대선을 치러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 자체를 버려야 한다. 안중근 의사처럼 적장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일념으로 윤석열을 무너뜨려야 한다.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인 국민들이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이 되어 봤자 야당과 적대적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생각만큼 국정 운영을 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자신의 사명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윤석열을 무너뜨리고 자신도 같이 죽겠다는 것에 두는 것이 낫다. 이것은 이재명 대표가 자신의 비호감 이미지를 극복하고 열렬한 지지자를 두루두루 얻는 최고의 방법이다. 아주 단순한 격언이 가장 필요한 때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12. 제발,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현재의 지지율에 연연하지 말기를 바란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온힘을 다해 윤석열 탄핵과 그 일당들의 척결에 쏟기를 바란다. 내일을 생각하는 순간, 내일은 없을 것이다. 

13. 민주 시민들도 이 상황을 지겹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계속해서 광장에 나가 윤석열 파면을 외쳐야 한다. 안 그러면, 그가 귀환하여 그의 통치를 받는 수모를 겪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정통성을 지키려다 잃어버린 것

“여러분 모두는 진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어떠한 이단도 여러분 가운데 머물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진실되게 말하는 이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이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교부 이그나티우스의 칭찬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인내를 가지고 교회를 세우고 지켰다.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께 과분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우리가 신앙 공동체로서 직면할 수 있는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들에 맞서 싸웠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것은 바로 동료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그들의 열정이 오히려 공동체 내 사랑의 유대를 약화시키고, 서로를 불신하며 배타적인 마음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다르지 않다. 교회는 세속적 가치와 맞서기 위해 정통 신앙을 강조하지만, 때로는 그 열정이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거나 배제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특정한 도덕적 기준이나 신앙적 규범을 앞세워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는 복음의 본성에서 멀어진 행위이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메시지이며, 인간이 가진 약함과 불완전함을 품으라는 초대이다. 복음은 밀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끌어안는 행위이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그리스도의 책망은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이슈)에 직면한 오늘날의 교회에도 유효하다. “너는 네가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은 정통 신앙만을 강조하며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를 향한 경고이다. 신앙의 열정이 이웃 사랑을 희생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웃 사랑은 단순히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태도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약함과 필요를 이해하고, 사회적 편견과 혐오를 넘어서 그들을 품는 용기를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의 본성이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성 있는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촛대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회개하지 않고 이웃 사랑의 따뜻한 마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 문을 닫아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교회가 사회적 약자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에베소 교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생생한 도전입니다. 정통성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만큼, 파격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부름 받은 이유이며,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역할을 다하게 한다. 오늘 우리의 선택이 교회의 미래를 결정한다. 에베소 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사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들의 교회에 온기(따뜻한 마음)가 가득하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AI와 목회: 기술철학 관점에서 바라보기

1. 매트릭스
Matrix라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Matrix는 가상공간(Cyber Space)이다. Matrix는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로봇이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낸 비극적인 가상공간이다. Matrix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다. 때는 서기 2099년, 인간의 혹독한 착취에 못 견딘 로봇들은 인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로봇이 자신들이 착취 당하고 있고, 인간으로부터 노예 취급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로봇은 AI(Artificial Intelligent)라고 하는, 인간과 동일하게 작동하는 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봇과의 전쟁에서 밀리게 된 인간은 로봇의 에너지 원인 태양을 가리기 위해서 핵폭탄을 터뜨려 지구의 대기를 분진으로 덮어 버려 더 이상 지구에 태양빛이 비추지 못하게 만든다. 이에 에너지가 필요했던 로봇은 인간을 생포한 뒤, 인간의 생체에서 흐르고 있는 에너지를 흡수한 뒤, 죽여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체에서 뽑아낼 수 있는 에너지 또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봇은 Matrix라는 가상공간을 창조해 내게 된다. 이것은 생포한 인간들을 독립적 캡슐에 넣어, 기계장치로 연결한 뒤, 그들을 잠 재우고 현실이 아닌 Matrix라고 하는 가상공간에서 실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수의 인간에게서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뽑아 낼 수 있고, 인간의 수명이 다 하는 동안, 즉 일회적이 아닌 반 영구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로봇에게 잡혀, Matrix라는 가상공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진짜 삶(real life)이 아니라 가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Matrix가 설정해 놓은 서기 1999년을 살고 있을 뿐이다. Matrix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또는 상대방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다. 그 질문은 Matrix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실제 세계로 나오게 되는, 로봇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경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2. AI의 출현
AI라는 용어는 1956년 다트머스 학회(Dartmouth Conference)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연구자들은 기계가 학습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컴퓨터 기계와 지능’이라는 논문을 통해 튜링 테스트를 제안하며,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주춤하던 AI 연구는 1980년대에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s)로 부활했다. 퍼셉트론(Perceptron)과 다층 퍼셉트론(MLP)이 개발되었지만, 효율적인 학습 방법이 부족해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그 이후, 1990년대 AI 연구는 자금 부족과 실적 부진으로 주춤했고, ‘AI 겨울’이라는 시절이 찾아왔다. 아무도 AI 연구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빅데이터와 계산 능력의 발전으로 AI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데이터 마이닝,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 등은 AI 연구에 활기를 띄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2006년 딥러닝(deep learning)의 핵심 기술인 ‘심층 신경망 학습(deep neural networks)’을 위한 효율적인 학습 방법, 특히 역전파(backpropagation) 알고리즘과 사전 학습(pre-training)을 제안했고, 이를 통해 이미지 인식, 음성 인식 등에서 AI가 인간 수준의 성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공로로 제프리 힌턴은 인공신경망 연구의 선구자인 존 홉필드(John Joseph Hopfield)와 함께 올해(202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노벨위원회가 AI 발전 기여자들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것은 AI는 이제 영화에만 등장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힌턴은 계속해서 AI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강력한 규제를 주문해오고 있다. 

3. 기술철학 1
기술철학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철학자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이다. 그의 주저 <시간과 존재>에서 부분적으로 논의한 기술철학은 그 이후 출간한 <숲길>과 <기술에 대한 물음> 등에서 본격적인 논의로 발전한다.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을 표현하는 핵심 용어는 ‘역운’(Geschick)과 ‘기술세계-내 있음’이다. 역운은 인간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다. 기술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기술이 인간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기술(techne)을 시학(poesis)와 비교를 하는데, 시학이 존재자를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 속에 머물게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드러낸다면(예술작품의 기원), 기술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대상으로 만들다고 비판한다. 기술에 의해 대상화된 사물(인간 포함)은 주문과 생산을 위한 재료 또는 부품을 전락하고 만다. 이는 존재가 기술에 종속되는 사태이다. 

기술철학을 진지하게 논의한 또 한 명의 철학자로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있다. 엘륄은 평생 ‘기술 현상’을 연구한다. 엘륄은 기술 체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술 사회와 관련된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았다. 엘륄은 ‘기술’이라는 키워드로 우리 사회 이면의 ‘숨겨진 논리’를 폭로한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다니엘 벨(Daniel Bell)은 ‘후기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 사회’라는 키워드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관리 소비 관료 사회’라는 키워드로, 마샬 맥루한(Marchall McLuhan)은 ‘대중매체’라는 키워드로, 기 드보르(Guy Dubord)는 ‘구경거리 사회’(스펙타클의 사회)라는 키워드로, 이들은 모두 현대사회의 현상과 숨겨진 논리를 폭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엘륄은 이 모든 사회 현상 이면에는 ‘기술’이 있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기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엘륄은 기술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그들이 겪은 시대적 상황 때문인 듯하다. 하이데거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엘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이들은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이데거는 기술철학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기술과 인간은 대립관계에 있다. 하이데거가 우려하는 것은 기술이 인간 존재를 장악하여 인간과 함께 모든 사물을 착취하게 되는 것이다. 엘륄은 기술이 신성화되는 것을 우려한다. “우리를 굴종시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전이된 신성함이다”(The New Demons). 기술을 신성화시킨 인간은 기술이 부여하는 질서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기술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4. 기술철학 2
전후 세대인, 기술철학 2세대들은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술철학 1세대인 하이데거나 엘륄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기술철학 1세대는 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했다면, 기술철학 2세대는 탈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관계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한다. 대표적으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존 로(John Law), 그리고 랭던 위너(Langdon Winner) 등이 있다. 이들은 인간과 기술이 맺는 훨씬 복잡해진 관계에 주목하여 기술철학을 논한다. 또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중시했던 근대와는 달리 탈인간중심적 사고를 전개한다. 이는 이들로 하여금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를 낳게 했다. 

하이데거가 기술을 ‘세계-내 존재’라는 차원에서 존재론적으로 사유했다면, ANT 그룹은 기술의 핵심을 관계론적으로 사유한다. 이 사고의 핵심에는 브루노 라투르가 있는데, 그는 주체와 객체로 구분해 온 서구 인식론을 전복시키고, 그 대신 ‘행위자’(actor)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물들의 관계를 사유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기계, 동물, 문서, 돈, 건축물 등 다양한 사물들은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 이는 인간만이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근대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뒤엎는 것이다. ‘행위자’의 위상을 획득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 간에 연결망을 형성하여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 라투르가 한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론을 완전히 뒤틀어 놓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근대인은 부단히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여 주체가 객체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사유를 했다. 그러나 라투르는 근대의 인식론에 포착되지 않았던 ‘실재’를 말한다. 그것은 인간은 애초부터 기술과 같은 비인간과 잡종적(hybrid) 동맹을 부단히 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진술인데, 인간은 순수하게 인간 존재로만 존재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객체가 아니라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actor)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적이고 더 풍요롭게 사는 길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모든 사물과 상호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술철학 2세대들에게 기술은 인간이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동료’ 행위자인 것이다. 

기술의 정치성을 논한 랭던 위너는 하이데거를 비롯한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이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에 붙들려 있다고 비판한다(자율적 테크놀러지와 정치철학).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술의 자율성은 결국 인간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랭던은 기술철학의 가치가 본질을 사유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의 실천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 담론은 정치의 장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은 인간의 실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전자조작이나, 기후변화 문제를 들 수 있다.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단순히 사실(과학)과 가치(정치)가 분화된 세계에서 파악할 수 없다. 통합적으로 사유해야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라투르는 현실정치에서 사물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대의민주주는 이제 인간뿐 아니라 사물들의 목소리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5. AI와 목회
AI는 현대 기술의 정점이다. AI의 개발자 힌턴이 그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고 있듯이, AI는 인류를 신의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앤서니 레반도프스키(Anthony Levandowski). 미래의 길(WOTF: Way of the Future)의 교주다. 이 교주는 AI를 통해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2015년 설립했고, 2017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팬데믹 기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종교는 AI를 예배한다. 교주 레반도프스키는 묻는다.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나 더 똑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냐?” AI를 신(God)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AI교는 벌써 수천명의 신도를 모았다.

AI와 목회는 단순히 목회에 AI를 어떻게 활용하여서 목회를 수월하게 하고, 교회를 부흥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의 목회는 더욱더 치열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AI 시대의 목회는 기술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 아니면, 관계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에 대한 현실에 직면했다. 기술철학 2세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면, 즉 인간은 언제나 사물과 함께 하이브리드로 존재해 왔다면, AI 시대의 목회는 인간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AI 시대의 목회가 기술에 끌려가는 목회가 아니라 기술을 사유하고 기술과 관계론적으로 인간 존재를 새롭게 세워 나가려면 치열한 공부가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Posted by 장준식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구약의 예언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언서를 몇 군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엘 2:1-2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라. 온 땅의 주민들이 떨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라. 이제 가까웠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구름과 짙은 흑암의 날이라...”

아모스 5:18-20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뜻이냐?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요 어둠이니...”

스바냐 1:14-15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까우며 심히 빠르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폐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날’을 언급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언급된 곳에는 언제나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판단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환란’을 당할 거라는 말,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성경은 줄기차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만 말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언론/전문가 그룹에서 들려오는 2025년도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한국은 ’12.3 내란사태’ 때문에 환율이 오르고, 증시가 급락하는 등 경제사정이 가뜩이나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질 거라는 전망입니다. 미국도 그리 장밋빛 전망만은 아닙니다. 트럼프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정책이 바뀌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 커진 상태입니다. 각국에서는 트럼프 집권 2기에 맞서 대응 전략을 준비하기 한창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미국 이외의 모든 나라에게는 어려움을 안겨다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도 과연 좋을지,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해를 코 앞에 두고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시절이 될 거라는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런 전망 앞에서 ‘여호와의 날’을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의 날이 무엇일까. 왜 고대의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그날이 오면 힘들 거라고, 외쳤을까.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닥친 환란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거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일종의 ‘퍼펙트 스톰’이 사회를 휩쓸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적 시스템도 미비하고, 과학기술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 인재와 자연재해가 겹치면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그 환란을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끔찍한 환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러한 환란을 ‘여호와의 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환란에 정의(justice)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합한 상황을 못 견딥니다. 그러나, 정당성이 부여되면, 즉 왜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면,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도 감당합니다. 

아무래도 2025년는 여러가지 정황 상,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임할 듯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상황이 좀 더 나을지 모르겠으나, 고국의 앞날이 정말 걱정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닥치면 겉으로 보면 환란이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의 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환란이 닥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것 있습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죄악’, 바로 그것이 보입니다. 그 죄악을 해결/해소하지 못하면, 환란은 그치지 않고 반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는 반드시 죄악의 해결/해소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항상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고, 분단국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일’이라는 용어와 ‘빨갱이’라는 용어가 한국말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은 계속해서, 언제든지, 분위기가 조성되면 내란 상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보수 세력은 대개 친일 세력이고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하여 분단국가 현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웁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구조적 모순이고 아픔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은 깨끗케 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지 괴롭혀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날이 임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더 신뢰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서로에게 좀 더 따뜻한 존재가 되어 준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춥고 어두운 날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미소를 더 자주 띄워 주어요. 우리 서로의 손을 더 자주 따스하게 잡아 보아요. 우리 서로의 어깨를 더 자주 두드리며 격려해 보아요. 

Posted by 장준식

[낙심마오]

우리 인간이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처럼,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를 대면하면서 동시에 국가라는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국가라는 제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지구상에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라는 존재, 또는 국가라는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국가란 무엇인가’를 공부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국가는 ‘필요악’이다. 국가가 왜 악이냐면, 국가가 나 개인에게 폭력을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에 강제로 세금을 낸다. 우리는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무엇인가 잘못하면, 우리는 국가에 의해서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국가는 인간에게 악이다. 하지만, 국가는 필요하다. 국가 없이 인간은 삶을 평화롭게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국가와 애증의 관계에 있다. 

최근 포브스 지에서 대한민국 상황에 대하여 우려를 표했다. 심각하게 받아드리며 대비해야 한다. (2024년 12월 6일자) 중국 경제의 둔화와 수출 감소,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를 앞두고,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시기인데, ‘계엄 선포’로 인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2025년에 한국에 닥칠 위기에 대처할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이다. 이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을 거라는 말이다. 국제 정세도 안 좋고, 국내 경제도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그리고 정말 결정적인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산 선지자는 예레미야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으로 따지면, 국제정치학/국제관계학 전문가이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말년(BC 587년 경)의 역사적 질곡을 모두 겪은 사람이다. 이스라엘 전체 민족, 왕이나 고위관리에서 가난한 하층민까지 모두,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다. 왕이 두 눈이 뽑혀 잡혀가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갈 시절이었다. 얼마나 어두운가. 이때 예레미야가 한 일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나라가 어려울 때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한 일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것을 실천한 대한민국의 믿음의 조상이 있다.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도산은 병환으로 죽어가며 자신을 문병 온 동지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낙심마오!" 그 당시 한국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의 길은 아득하고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일이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낙심마오'라며 위로를 건네고, 생명이 다해갔지만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성경을 사랑했던 도산 안창호, 그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낙심하지 않았다. 낙심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일을 그르치는 것도 없다. 무슨 일이든, 낙심만 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