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믿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고백으로 여긴다. 입술로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하고, 교리를 받아들이고,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그런 믿음의 정의에 뼈아픈 이의를 제기한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믿음은 ‘저항’이다. 단순한 동의나 고백이 아니라, 어떤 체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반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한계시록의 믿음은 로마 제국의 질서에 대한 비폭력적이고 예언자적인 저항이다.

그 시대 로마 제국은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를 숭배하게 했다. 그 황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처럼 등장하며, 화려한 권력과 위용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는 입으로는 ‘평화’를 말했지만, 그 평화는 검과 피로 유지되었다. 그가 세운 질서는 무고한 생명의 희생 위에 세워졌고, 약한 자의 고통 위에 번영을 노래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짐승, 곧 황제와 제국에 저항하라고 명한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는 찬양은 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한 자들의 탄식이며, “누가 능히 이와 싸우리요?”라는 말은 믿음 없는 자의 절망이다. 그러나 요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짐승의 정체를 폭로하며, 싸우라고 말한다. 아니, 저항하라고 말한다.

그 저항이 바로 ‘믿음’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믿음이란, 황제의 권력에 무릎 꿇지 않는 것이다. 황제의 거짓 평화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짐승의 권세를 찬양하지 않는 것이다. 비폭력적인 인내로, 체제의 폭력을 견디며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믿음’과 얼마나 다른가. 통상적인 믿음은 내세의 평안과 구원을 보장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믿음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믿음은 현재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이고 영적인 대항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와 공동체의 정의를 갈망하는 신앙이다. 그렇기에 믿음은 고백이 아니라 ‘길’이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길. 그 길은 때로 외롭고, 고통스럽고, 때론 죽음의 위협 앞에 선다.

그러나 요한은 말한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그 인내는 결코 침묵이나 체념이 아니다. 비폭력의 힘을 지닌 고요한 저항이고, 사랑의 방식으로 체제를 바꾸려는 성령의 전략이다. 믿음이란,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의를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그 어떤 이유로든 생명을 경시하거나, 그 권리를 짓밟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 싸움은 손에 무기를 쥐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 복음을 품는 일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보여주듯, 가장 깊은 저항은 사랑이며, 가장 강한 믿음은 자기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앞에는 짐승이 있다.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는 미디어, 약자를 착취하는 자본의 논리, 혐오를 조장하며 질서를 세우는 이념들. 그 앞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믿음은 여전히 고백이 아니라, 저항의 선택지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 안에 살아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되, 짐승에게 무릎 꿇지 않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신앙 회복은 ‘믿음의 정의’를 다시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요한계시록이 새겨준 그 믿음, 곧 저항하는 믿음을 다시 품고 살아야 한다. 그 믿음이 우리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세울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전쟁과 예배]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많은 경우, 예배는 마음의 위로를 얻고 현실의 고단함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쉼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예배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뜨거운 실재다. 예배는 낭만이 아니라 전쟁이다.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저항의 자리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여자’로 비유된 교회가 ‘용’으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과 맞서고 있다. 이 여자는 하늘의 별과 해와 달을 몸에 두른 영광스러운 존재지만, 동시에 산고에 시달리는 해산하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고통 중에 진통하고, 박해 속에 울부짖는 교회의 모습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궁극의 악한 세력을 상징하며, 하늘에서 쫓겨난 뒤 여자를 끝까지 괴롭힌다.

이 장면은 환상이 아니다. 소아시아의 초대교회들처럼 오늘의 교회도 여전히 악의 세력과 대면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삶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족과의 갈등, 교회 안의 분열, 사회의 부정의, 내면의 상처와 유혹들… 이 모든 것들이 용의 발톱이며 숨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답은 예배다.


요한계시록은 전쟁과 예배를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하늘에서는 미가엘이 용과 전쟁을 벌이고, 그 직후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를 찬양하는 예배가 울려 퍼진다. 이 예배는 단순한 찬양이 아니다. 이 예배는 제국의 언어를 뒤집는 저항의 노래다. '구원, 능력, 나라, 권세'—이 네 단어는 본래 로마 제국의 언어였다. 황제의 선전 문구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하나님과 어린양께 돌리며 제국을 무너뜨리는 반전의 노래로 바꾼다.

예배는 이렇게 불의한 세상, 억압적 질서에 맞서는 교회의 무기다. 단지 아름다운 음악과 위로의 메시지로 끝나는 감성적 시간이 아니라, 현실의 한복판에서 드려지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교회당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울려 퍼지는 종교 행사가 아니다. 예배는 매주 반복되는 리추얼이 아니라, 삶의 전장에 나가기 위한 하늘의 군수 지원소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전쟁의 현실을 자각하고, 진리를 분별하며, 용기와 위로와 공동체의 힘을 얻는다.

그래서 예배는 '시간 떼우기'가 아니다. 예배는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생존의 길이며, 해방의 길이며, 승리의 길이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예배의 깊이를 기억하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더 뜨겁고, 더 진실하고, 더 하늘을 닮아가도록 노력하자.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되며, 기도가 우리의 저항이 될 때,
우리는 이 전쟁 같은 삶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다.

예배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주님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Posted by 장준식

[한국 경제와 교회가 막장으로 가는 이유]

김수행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책을 번역해야지 하면서도 선뜻 착수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악법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번역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중 1988년 9월 이론과실천사의 대표가 [자본론]의 일부를 번역해 출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또한 나의 작업을 지연시키기도 했다."(1989년 초판 번역자의 말)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1989년 초판 번역자의 말)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필두로 발전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은 한 마디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이다. 문제는 고전파 경제학이 자본주의 이면에 흐르는 노동 착취는 보지 못하고, 그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상품생산과 교환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자연적인 것'으로 미화했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이기심마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킬 거라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다. 

마르크스의 예언자적 시선(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교묘히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능력)은 자본주의 체제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착취'에 머문다.  노동이 상품처럼 사고 팔리는 현실이, 사실은 노동자의 삶 자체를 소모하고 착취하는 구조임을 고발한다. 마르크스의 눈에 자본주의는 '자연적이고 자유로운 체제'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폭력적인 체제였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유 거래'는 사실 비대칭적 권력 관계(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를 은폐한다고 비판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말하고 싶은 것의 요지는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착취의 체계이고, 고전파 경제학은 그 착취를 자연스럽고 포장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계시적이고 구원적인 체제가 아니고 기득권자들(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착취와 억압의 체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 또는 '자율'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마치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속인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막장으로 간 이유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받아들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김수행이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 이론은 '빨갱이' 딱지가 붙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통되지 못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던진 화두를 붙들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 감추어진 면,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들을 충분히 살펴보지 못한 채, 그것이 경제 체제의 전부인 것처럼 신봉했다는 데 있다. 한국 교회는 이와 발맞추어 나가며, 자본주의 체제에 축성을 더하고, 자본주의가 마치 하나님이 뜻하신 경제 체제인 것처럼 신학적 지원을 했다. 

교회가 역사적 폭력 체제인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현재로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마땅히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르크스가 예언자적 시선으로 자본주의 체제 이면에 있는 착취와 폭력의 어둠은 감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될 것이고, 야수 같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인간은 생명을 계속 잃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을 계속 파헤치고, 그것에 희생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면을 밝음으로 채우도록 체제를 계속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일에 교회가 앞장서지 않는다면, 누가 앞장서겠는가? 생명을 사랑하는 주님께서 생명을 헤치는 야수 자본주의를 그냥 놓아둘 리 없다.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비판한 이유는 그 당시 서구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에 축성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수 자본주의에 물려서 거반 죽게 된 이들에게 그저 '아편'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폭력 체제에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한 축이 된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 김수행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던 것을 다시 여기에 적는다.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아직도 '빨갱이' 프레임에 갇혀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에 자신이 착취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더러,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부를 증진시키고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의 목을 은근슬쩍 조르며 협박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협박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쾌락'으로 느끼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병리적 마조히스트들(피학적 인간들/폭력을 당하고 있는 건데 이건 '쾌락'이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 가득하다.  

우리를 구원하는 손은 오직 주님만이 내밀어 주신다.

Posted by 장준식

조희대 대법원장의 판결에 부쳐
― 나쁘거나, 공부를 안 하거나

오늘날 한국 정부에는 나쁘거나, 공부를 하지 않는 보수 세력만 득실대는 듯하다. 어제 있었던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재판은 명백한 정치 개입이며,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한국 사회를 후퇴시키는 몰염치한 행위였다.

윤석열 일당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특히 이들의 정치 행위를 보면,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결정주의(decisionism)'에 깊이 갇혀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별'로 보고, 위기 상황에서는 국가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은 전체주의와 나치즘을 낳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윤석열 정권은 마치 이 과거의 사고방식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듯하다.

현대 정치철학은 칼 슈미트의 통찰, 즉 정치는 갈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계승했지만, 그가 제안한 '결정주의'를 넘어섰다. 현대 정치철학자들, 특히 샹탈 무페(Chantal Mouffe)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갈등을 죽음과 생존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대신,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샹탈 무페는 '경합주의(agonism)'를 주장한다. 무페 역시 전통적 자유주의가 꿈꾸던 합리적 합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녀는 갈등을 폭력이나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제도화된 규칙 안에서 정당한 경쟁(adversary)을 통해 표출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갈등은 억압하거나 소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관리되고 제도화되어야 할 현실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다중(multitude)'을 강조한다. 그는 국가 권력에 주권이 집중되는 것을 비판하며, 제국적 자본에 맞서 다양한 주체성의 집합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은 탈취하거나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의 통찰처럼 정치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다. 이를 부정하는 정치철학자는 없다. 그러나 이 적대를 다루는 방식이 문제다. 슈미트는 강력한 주권이 갈등을 통제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축소와 자유·인권의 심각한 제한을 초래한다.

내가 윤석열 정권을 비판하는 핵심도 바로 여기 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나 조희대 대법원장의 판결은, 갈등을 제도적 경합이나 시민 다중의 자율적 해결에 맡기지 않고, 국가 권력이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정리하려는 결정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는 현대 정치철학이 비판하고 넘어선 정치모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정치적 갈등은 무페가 말한 것처럼 경합의 방식으로, 그리고 네그리가 강조한 것처럼 다중의 자발적 창조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국가 권력은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겨야 한다. 그래야 현대 민주주의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어제 조희대 대법원장이 내린 판결은 경합도 다중도 무시한 채, 국가 권력이 모든 것을 교통정리하겠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는 민주주의의 쇠퇴이자, 명백한 정치적 폭력이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도, 정치적 판결을 내린 조희대도 현대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면, 애초부터 나쁜 의도를 품고 정치에 뛰어든 자들이거나.

이 시점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주권자 개개인의 정치적 행동이다. 제도적 경합을 방해하고 다중의 자율성을 억압하려는 세력에 대해 시민은 저항해야 한다. 주권자 개개인이 힘을 모아 다중을 형성하고, 새로운 주권을 창조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많은 발전을 이루어왔다. 시민들의 정치 의식 또한 깊어지고 진보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려는 수구세력의 정치 공작에 더 이상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시민이 들고 일어설 것이다. 국민이 이길 것이다. 내란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고 민주 정권이 회복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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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  

성경 서사(Narrative)의 토대: 출애굽
성경 서사(Narrative)의 토대는 출애굽이다. 성경에서 출애굽기는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반복/변주라고 보면 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정치적/윤리적 비전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정치적 비전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Freedom from oppression.) 하나님의 윤리적 비전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자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핵심: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이러한 정치적/윤리적 비전의 완성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와 사랑의 화신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와 사랑으로 점철된다. 우리는 자유와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의 현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자유와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삶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애굽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랑은커녕 미움과 다툼의 삶을 살고 있다. 나 자신의 내면을 봐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국가, 세계 전부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고(반복해서 보여주고/모든 성경은 출애굽기의 재현), 우리를 격려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받은 최고의 복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유와 사랑의 나라를 갈망하고, 그 나라를 이루어 가라고 권면하고 독려하고 힘을 준다.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자유와 사랑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의 궁극적인 비전이다. 이 비전을 위해서 인류가 하나될 때, 이 땅에 평화가 임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이야기
요한계시록 11장 15-19절은 일곱째 나팔을 불었을 때 발생한 일에 대한 기록이다. 여섯 번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침내 마지막 나팔인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진다. 그때 요한이 본 환상은 하늘 예배이다. 그 예배에서 울려 퍼진 선포는 다음과 같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5절) ‘세상 나라’는 로마 제국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세상 나라는 애굽과 같다. 자유와 사랑을 묵살하고 빼앗아 가는 나라. 모든 사람들은 노예 만드는 억압과 폭력의 나라/체제이다. 이 나라가 이제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로 바뀐다는 선포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이다. 이 정치적 비전은 교회의 비전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비전이기도 한다. 우리는 교회로 한 몸을 이루어 이 비전을 마음에 품고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두 증인의 사역 결과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 이것이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라. 이 구절은 이후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유럽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유럽 사회의 주류 사상이 된 이후 유럽의 나라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언제나 세상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와 충돌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비전은 종말론적 비전인 것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종말론적 비전이란 인간이 이루는 비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끝내시고(end) 이루시는 비전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하나님의 때에. 그래서 우리는 일곱째 나팔 이야기에 나오는 하늘의 예배를 지금 여기에서 매주일(주님의 날에)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세상 나라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바꾸려고 과욕을 부리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폭력만 난무하게 된다. 그것이 유럽 기독교의 역사이다. 세상 나라를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하나님 나라로 바꾸려 하다가 오히려 폭력만 난무하게 된 역사 말이다. (지금도 ‘성시화 운동’이라는 레토릭으로 그 종교적 폭력의 역사가 반성 없이 반복되고 있다.)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졌을 때 드러난 정치적 비전은 여섯 번째 나팔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한 두 증인 이야기와 한 쌍을 이룬다. 일곱째 나팔 이야기의 정치적 비전은 두 증인이 행한 사역의 결과이다. 두 증인은 억압 체제를 전복시키고, 우상숭배자들(억압과 폭력의 체제를 만드는 인간들(짐승들)의 회개를 이끌어 내고, 그들이 이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끔 했다. 두 증인의 사역은 폭력의 역사를 끝내고 새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두 증인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가 임하는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 두 증인은 교회/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론의 정치적 차원을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비전을 본다. 교회/그리스도인은 자유와 사랑을 갈망한다. 폭력의 역사를 끝내고 자유와 사랑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두 증인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두루마리 책을 먹었기 때문이다. 먹어서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사역을 이어서 감당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두루마리 책을 먹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비전
두루마리 책(성경)을 먹으면, 정치적 비전이 생긴다. 정치를 현실 정치에 참여해서 정당에 가입하고 국회에 입성하고, 대통령이 되고,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안된다. 성경(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정치적 비전은 삶의 자리에서 발현되어야 한다. 정치는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내 마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나를 수양하고, 가정을 잘 건사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면, 비로소 온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다. 나 자신에게서,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에서, 국가에서, 세계에서 발현되어야 한다. 자유와 사랑을 빼앗기지 말고, 빼앗지 말라. 혹시, 누군가가, 또는 어떤 단체가, 국가가 인간과 피조물의 자유와 사랑을 빼앗고 짓밟는 일이 있다면, 비판하고 저항하라. 핍박당하는 자들과 연대하라. 자유와 사랑. 나는 성경(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을 사랑한다.

Posted by 장준식

[부활의 의미]

부활을 과학적 자연법칙에 반하는 초자연적인 일의 발생으로 말하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다. 신앙은 초자연적으로 발생한 일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을 자꾸 이런 식으로 설명하니까, 과학과 대치되는 꼴통 소리를 듣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구원인가? '예수 부활하셨다'는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과학적 선언'이 아니다. 성경은 과학과 대결하지 않는다. 2000년 전, 즉 고대 사회는 과학과 대치되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말하지 않는다. 

과학의 시대, 즉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 신앙은 자꾸 과학과 대치되는 방향으로 가려고 들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과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들고, 부활의 의미를 초자연적 관점에서 설명하려 들었다. 창조와 부활을 과학적 시각에서 설명하려 들면, 기독교 신앙은 산으로 간다. 과학 시대에 비추어 기독교 신앙은 과학에 반하는 꼴통이 될 수밖에 없다. 

부활의 의미는 전혀 과학을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의 의미는 매우 정치적이다. 기독교 신앙은 '정치'와 대결한다. 과학과 대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활의 의미는 정치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부활은 인간에게 삶의 태도를 가르쳐 준다. 아주 절절한 가르침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절대로 주저 앉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삶(현실)은 우리를 굴복시키고 주저 앉혀 삶을 후퇴시키려는 못된 유무형의 '정치적' 세력들이 득세한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자와 호랑이, 치타 같은 포식자들은 끊임없이 소나 가젤 같은 피식자들에게 달려든다. 피식자들은 포식자들에게 맞서 싸우지만 맘 먹고 달려든 포식자들에게 잡아 먹히기 일쑤다. 포식자들과 피식자들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포식자들은 피식자들을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반대로 피식자들은 안 넘어지려고, 주저 앉지 안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포식자들의 횡포를 피식자들이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 앉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부활의 의미는 세상의 악에게 지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기라는, 주저 앉지 말라는, 삶을 절대로 후퇴시키지 말라는 하나님의 위로와 이끄심이다. 주저 앉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주저 앉으면 생명은 끝장나고 만다. 

부활은 생명의 절대적 긍정이다. 생명에 손대는 자는 악하다.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다. 그러니, 포식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피식자로 전락하지도 말고, 모든 생명이 서로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는 생명 그 자체로 존재하라는 결연한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 과학에 대치되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믿으라는 넌센스적인 강요가 아니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부활을 믿는다고,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래서 나는 천국을 가게 됐다고 기뻐하면서, 삶에서 포식자가 되어 피식자를 짓밟고 살아가면서 피식자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한다면, 그런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고사하고 인간일 수 없다.

부활의 의미는 분명하다. 
생명을 해치는 것에 저항하라.
생명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부활의 의미는 정치적이다.
"저항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Posted by 장준식

[The Meaning of Resurrection]

Speaking of resurrection as a supernatural event that defies the laws of nature distorts its true meaning. 

Faith is not about believing in something that happened supernaturally. When Christianity is constantly

explained in this way, it ends up being ridiculed as anti-scientific nonsense.

Is faith—and salvationㅡ really about believing that a supernatural event happened? The declaration

that “Jesus has risen” is not a scientific claim about a paranormal phenomenon.

Scripture does not confront science. Two thousand years ago, in ancient society,

the Christian faith was not described in opposition to science.

Since the Enlightenment, the age of science, Christianity has increasingly attempted to define itself in ways 

that oppose scientific reasoning. People try to explain the creation story in Genesis through scientific frameworks 

or define the resurrection in supernatural terms. But when creation and resurrection are interpreted 

through a scientific lens, Christian faith loses its way. In the modern scientific age, 

faith is reduced to absurdity when it tries to oppose science.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does not involve science at all. On the contrary, 

it is deeply political. Christian faith is not a confrontation with science but with politics, 

so the resurrection must be understood in political terms.

Resurrection teaches us an attitude toward lifeㅡ an intensely powerful lesson.

It tells us never to give in, never to collapse. In life (reality), wicked “political” forces try to oppress, subdue,

and diminish us.

In the animal world, predators like lions, tigers, and cheetahs constantly pursue prey like cows and gazelles. 

The prey fight back but often get caught by the predators, who attack with full intent. When the battle begins, 

predators try desperately to bring down their prey, while the prey struggle not to fall, stay on their feet, or collapse. Everything ends there if the prey gives in to the predators’ tyranny and falls.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is God’s comfort and guidance to never yield to the world's evil, fight to the end, 

and never retreat in life. If you collapse, it’s over. If you give in, life is over.

Resurrection is the absolute affirmation of life. Whoever harms life is evil. Life is more precious than the whole 

world. Therefore, we are called not to become predators, nor to live as helpless prey, but to exist as life itself—life that enriches the lives of others.

Believing in the resurrection is not believing in a supernatural event or nonsense that opposes science. Instead, 

it is to respond to God’s calling to cherish and protect life.

Suppose someone claims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and calls themselves a Christian, rejoicing in their supposed 

ticket to heaven, but lives as a predator trampling the weak, causing tears of blood in the eyes of the vulnerable. 

In that case, such a person can never be considered a faithful Christian. Such a person is not only no Christian—they have forfeited what it means to be truly human.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is clear: Resist all that harms life. Love life as your own body. 

The resurrection is political.
“Resist. And love.”

Posted by 장준식

[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루터의 농민혁명에 대한 대응에 대하여 질문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을 조금 보충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의 페이퍼를 쓰면 좋은 주제인 듯해요. 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나 해방신학자들 중에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은 루터를 두고 "민중의 배신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의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 루터의 입장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의 농민들은 혁명을 일으키면서 12개의 성명서(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을 내겁니다.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 당시 농민들의 울분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두 집단으로부터 억압을 당하는데, 하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입니다. 이중고를 겪은 것이죠. 요즘엔 교회가 억압하는 단체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정부에 대응하는 수퍼 파워 단체(중세 때는 교회)가 없어서, 현대 사회는 국가(정부)가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르는 형국이죠.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국가(정부)의 대응체로 반드시 자리매기매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정치신학적 주장이기도 합니다.

12개의 성명서를 보면, 재미난 것이 있습니다. 첫째 성명서가 목회자에 대한 것입니다. 영어 번역문을 옮겨보겠습니다. "We humbly ask and request-in accordance with our unanimous will and desire-that in the future, the entire community have the power and authority to choose and appoint a pastor. We also want the power to depose him, if he acts improperly." 

요지는 교인들이 목사를 선택하는 권리를 가지고, 파면시키는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민주적이죠. "윤석열을 파면한다."처럼, "전광훈을 파면한다." "손현보를 파면한다." 이런 것을 요구한 것이죠. 이런 것을 보면, 국가가 교회보다 더 민주적인 공동체가 된 듯합니다. 교회가 정말 분발해야 합니다. 

농민들의 성명서를 보면, 이렇게 교회 권력의 부당함에 대한 이야기부터, 정부 권력의 부당함에 이르기까지, 이 두 집단이 농민을 어떻게 착취하고 억압하는지를 간략히 보여주면서, 이 부당한 법들을 고쳐줄 것을, 그래서 농민의 삶을 해방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진술합니다.

농민혁명 성명서가 성서를 근거 삼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교회와 정부의 비난의 화살이 루터로 향했던 모양입니다. "농민들이 이렇게 성서를 근거로 깝치는 것은 너(루터) 때문이야!" 그래서 루터는 농민혁명에 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죠. 그래서 루터는 "Admonition to Peace: A Reply to 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라는 글을 씁니다. 

루터는 이 글을 통해서, 농민도 달래고, 교회와 정부도 달래서 두 세력 간에 평화 협정을 맺기 원했습니다. 

루터가 농민혁명을 반대했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 정도의 루터 입장 때문입니다.
1) 질서와 권위에 대한 루터의 신학적 입장
ㅡ 루터는 세속 권위(정부/지배자들Lords)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폭력적 저항은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2) 농민들의 요구가 '복음'을 이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
ㅡ 위에서 보았듯이, 농민들의 12개 성명서는 성경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특별히, 루터가 가르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루터가 보기에 농민들의 요구는 복음을 빙자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루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보면, 농민들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3) 루터의 점진적 개혁 사상
ㅡ 루터는 급진적 개혁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대개 이러한 경향을 지닙니다.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혁, 그리고 사회의 개혁보다는 인간 내면의 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ㅡ 스펙타클의 사회를 공부할 때, 마르크스와 바쿠닌, 프루동의 비교를 떠올려 보시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마르크스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습니다.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요. 그러나, 바쿠닌은 국가 폐지를 요구하고 즉각적, 급진적 개혁을 원했습니다. 루터는 마르크스와 결을 같이 하고, 토마스 뮌처는 바쿠닌과 결을 같이 합니다. 
4) 귀족의 비호
ㅡ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종교 권력의 횡포를 피하기 위하여 세속 권력(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비호를 받습니다. 
ㅡ 그리고, 루터는 농민 출신이 아니라 사제 출신입니다. 
ㅡ 루터는 기본적으로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에 friendly 할 수밖에 없는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루터의 뿌리이죠.

루터가 무작정 농민혁명을 비판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만 나무란 것도 아닙니다. Admonition to Peace에 보면, "To the Princes and Lords"를 꾸짖는 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To the Peasants"의 성명서에 응답합니다. 

루터는 16세기 인물입니다.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 농민혁명이 발생한 것에 루터는 매우 당황한듯합니다. 자신의 성서해석,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이 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진 것에 대하여 루터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분노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Admonition to Peace라는 글을 통해 권자들과 농민들과의 화해를 이끌려 했던 것이죠. 

500년이 지난 현대 민주주의 관점에서 루터를 보면 루터가 매우 보수적일 수 있지만, 16세기 독일 사회의 정황을 생각해 보면, 루터는 매우 급진적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농민들이 내건 12개의 짧은 성명서를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독일의 이러한 전통에서 마르크스 같은 인물이 나오고,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가 나온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역사의 발전 같습니다. 

역사가 퇴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의 공부가 귀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존한 인물이다. 레비는 수용소에 끌려가 낯선 경험을 한다. 수용소에 입소했을 때 그에게 폭행을 가한 사람은 나치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이었다. 

탈식민주의 학자 프란츠 파농의 구분에 의하면, 레비가 당한 폭력은 수평적 폭력이다. 수직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수평적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속담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파농은 수직적 폭력의 악마성을 폭로한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알제리는 수평적 폭력이 난무했다. 파농은 왜 그럴까 연구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 담겨 있다. 알제리 사람들이 서로에게 수평적 폭력을 저지르는 이유는 알제리 사람들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수평적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직적 폭력을 막아내야만 수평적 폭력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근 30년간 자본의 수직적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 자본의 폭력은 소리 없이 사람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한국 사회가 극단적 분열 사회로 치달은 이유는 수직적 폭력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수평적 폭력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던져 졌기 때문이다.
계엄 사태 이후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수평적 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뜩이나 수직적 폭력에 시달려 힘든 대한 국민들에게 국가의 직접적 수직 폭력을 가하여 사회를 더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국가의 수직적 폭력은 반드시 수평적 폭력으로 번지게 되어 있다. 

지난 4개월 동안 한국 사회는 Psychosomatic 현상이 더 짙어졌다. Psychomatic은 psycological(정신)과 somatic(신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치심리학 용어이다. 한 인간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질병은 사회가 가하는 시스템적인 폭력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프란츠 파농의 주장이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동안 대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이 아팠다. 수직적 폭력을 당해야 했고, 그로 인한 수평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사회가 얼마나 분열되었는지, 어제 같이 밥 먹던 친구들이 이제는 원수가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가족들 간의 분열, 동료들 간의 분열이 너무 심해서, 이제는 결혼 정보 회사에서 배우자의 정치 성향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을 대통령 직에서 파면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전혀 아니다. 한국은 윤석열에게 집단 소송을 제기해야 할 판이다. 수직적 폭력에 의한 수평적 폭력의 창궐의 죄를 물어 형사소송, 민사소송 등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소송을 제기해야 할 판이다. 

1871년, 파리코뮌은 프랑스 정부군에게 패한다. 코뮌에 참여했던 유진 에딘느 포티에(Eugène Edine Pottier)는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를 지었다.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서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죄수들이여, 일어서라. 이성은 이제 활화산의 분화구에서 터져 나오리니, 그것 마지막 파열이다. 지나간 낡은 세계를 깨끗이 쓸어버리자. 노예가 된 대중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온 세계가 밑바닥부터 변화하리니, 우리는 지금 아무 것도 아닌 존재처럼 되어 있으나, 모두 온전해지자.”

2025년 4월 4일. 대한 국민은 정부의 수직적 폭력을 이겼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받았던 저주, '미련한 자를 지도자로 두었던 저주'를 이제 떨쳐내야 한다. 우리가 새로 받아들여야 할 지도자의 사명은 너무도 명백하다. 수직적 폭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 수평적 폭력을 멈추게 할 자.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자. 

예수의 십자가는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추어 세운 사건이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박힌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출 지도자를 선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추어 세우는 일에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야 할 것이다. 무너진 교회가 부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서라. 이제 모두 온전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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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돼먹은 추노꾼들의 세상

“언년아~” 추노꾼, 대길이의 음성이 쩌렁쩌렁 들린다.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주제곡이 흐른다. 추노꾼 이야기. 조선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2025년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들’은 도망친 노예 취급 당한다. 그들은 추노꾼에게 잡혀 온갖 모욕을 당하고 송환 당해야 하는 노예일 뿐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불법 체류자들을 추방하기 위한 ‘앱’(CBP Home)까지 생겼다. 테크놀러지를 탑재한 추노꾼 같다. 이 ‘앱’은 불법 체류자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땅을 떠날 것을 압박한다. 

일론 머스크는 언론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사회복지기금을 사용해서 불법 체류자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을 유권자로 만들어 표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복지기금을 삭감하면 불법 체류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잘못된 방식으로 지지층을 끌어 모으는 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개소리(bullshit)다. 

정복, 약탈, 학살. 미국의 역사는 이 어두운 단어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형태와 방법만 바뀌었지, 미국 사회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최근 출간된 책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심장이라 불리는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정복, 약탈, 학살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지 파헤친다. 

팔로알토에는 스탠포드 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구글(마운틴 뷰), 메타(멘로 파크), 애플(쿠퍼티노) 등, 굴지의 IT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실리콘벨리 중에서도 팔로알토는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실리콘밸리가 원래 공기 좋은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팔로알토의 공기는 남다르다.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는 블링블링한 팔로알토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린다. 팔로알토에서도 미국의 ‘정복, 약탈, 학살’ 역사가 반복된다. 1850년 캘리포니아에 불어온 골드러시 당시 팔로알토에 당도한 백인들은 그곳의 원주민들(인디안)을 정복하고, 그들을 약탈하고 학살한다. 이러한 그림자는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에 깊이 배어 있다. ‘정복, 약탈, 학살’. 즉, 극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효율성의 극대화가 필요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존재는 가차 없이 퇴출시키는 것이다. 현대판 우생학이다.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실리콘밸리의 아이콘 ‘일론 머스크’는 정확하게 미국의,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정복, 약탈, 학살’의 역사적 맥락에 서 있다. 이들의 사고 방식은 철저하게 ‘제국주의’적이다. 이들은 현대판 우생학의 자식들이다. 이들에게 정의(justice)는 힘 센 자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들의 행보를 서포트 하는 세력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성경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데, 제국주의를 관철시키려는 트럼프와 머스크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아무래도 ‘다른’ 성경책을 읽는 게 분명해 보인다. 

윤oo이 구치소에서 풀려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구치소에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미국과 한국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성경(그들의 성경)도 싫어졌고, 김치찌개도 싫어졌다. 

막돼먹은 추노꾼들을 개과천선시킬, ‘언년이’가 필요한 세상이다. “언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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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를 고민하는 신앙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뜨거운가’, ‘얼마나 열정적인가’로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책망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신앙의 본질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쓸모 있는가’에 대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계 3:16)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신앙의 열정과 무관심의 문제로 해석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 표현의 의미는 ‘유용성’과 관련이 있다. 라오디게아 도시를 흐르는 물은 골로새의 차가운 물도,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도 아니었다. 그들의 물은 미지근하고 쓴맛이 강해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단순히 열정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역할과 쓰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있었다. 그들은 도시가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재건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유함이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자만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그들의 문제는 편안함과 자기만족이 영적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돈이 있고,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하나님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신앙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고민을 멈추었다. 그래서 책망받았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으면 신앙이 해이해지고, 가난하면 신앙이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잠언 30:7-9에서 아굴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이유는 너무 부유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너무 가난하면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핵심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신앙은 미지근해지고, 가난해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신앙이 식어버릴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 받은 이유는 그들이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함 속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힘이 적었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들었다.

예수님은 "나는 네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흰 옷을 사서 입어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계 3:18)라고 말씀하신다. 불로 연단한 금은 ‘세상의 부요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영적 부요함을 구하라’는 뜻이다. 흰 옷은 ‘하나님의 의로 입혀진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안약은 ‘영적인 눈을 떠서 진리를 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쓸모를 간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와 함께 먹겠다”(계 3:20)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했겠지만, 실제 삶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법을 잊어버린 교회였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문을 열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의 쓸모를 간구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미지근한 신앙’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역할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너희를 토해낼 것이다"라는 무서운 경고를 받았다. "나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있으니까 충분해." "교회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으니까 됐어."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하나님께 더 집중하면 되겠지." 이러한 태도가 쌓이면, 신앙은 점점 미지근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쓸모를 고민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가 곤고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신앙은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 신앙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간절히 겸손하게 기도하며 ‘쓸모를 고민하는 신앙’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인내의 미학

인내는 신앙의 가장 위대한 덕목 중 하나다. 신앙의 여정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시련과 도전이 닥쳐온다. 때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계 3:10).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를 결코 헛되이 두지 않으시며, 그것을 기억하시고 보상하신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크지 않았고, 사회적 영향력이 미약한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이 그들을 배척하고 박해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며 “열린 문”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역설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겉으로는 약해 보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강한 교회였다. 세상은 힘과 권력을 숭배하지만, 하나님은 겸손한 믿음과 인내를 귀하게 여기신다.

성경은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수많은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과 욥이다. 요셉은 젊은 시절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했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었다. 또한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심지어 육체적인 고통까지 당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전보다 더 큰 복을 주셨고, 그의 믿음과 신실함을 인정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스마트폰으로 몇 초 만에 정보를 얻고, 온라인 쇼핑을 하면 하루 만에 물건을 받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시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내’라는 덕목은 점점 더 잊혀지고 있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고, 고난이 닥쳤을 때 즉각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조급해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사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기회를 자주 잃곤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꾸 신비를 잃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의 미학’을 가르쳐 준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며 기다리는 태도이다. 인내는 희망이다. 우리의 신앙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품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능동적인 태도이다. 인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물을 믿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내는 믿음의 가장 깊은 속성이다.

신앙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도 있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인내할 때마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 고난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계 3:10). 우리의 신앙과 삶이 위험할 때, 이 말씀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힘들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내를 보시고, 우리의 삶을 지키실 것이다. 믿음의 경주에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자. 그분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환란 날에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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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지 못한 교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어떤 교회는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이다. 사데 교회가 그랬다. 겉으로는 번성했고, 명성이 있었으며, 평판도 좋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살아 있다 하는 평판을 가졌으나, 너는 죽은 자다”(계 3:1).

이 말은 교회(신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안에서는 메마르고 힘을 잃은 상태.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세상과도 멀어지는 삶. 그것은 곧 뒤처지는 삶이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생명이 단순한 습관이 되고, 숨은 쉬고 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이 않은 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은 점점 무력해진다.

뒤처지는 것은 무섭다. 한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기쁨이었지만, 지금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예배가 부담스럽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지며, 말씀을 들어도 마음 깊이 와닿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깨어 있지 못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방치하면, 결국 신앙은 점점 더 깊이 잠들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혹시 이런 상태에 처해져 있을 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희망을 준다. "깨어 있으라. 굳건하게 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 회개하라" (계 3:2-3).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는 길, 뒤처진 신앙을 회복하는 길, 뒤처진 인생을 끌어 올리는 힘이 여기에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뜨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두고, 관계를 회복하며,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신앙은 기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신앙이다. 신앙의 길에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라이너 쿤체의 시 <뒤처진 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그는 뒤처진 새를 바라보며 그 새에게 자신의 힘을 보낸다고 말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 우리가 뒤처졌을 때, 다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힘을 보내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뒤처진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기다려 주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 살아 있으려면, 화려한 예배당이나 큰 행사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먼저이다.

사데 교회처럼, 우리의 신앙도, 삶도 한때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식어버렸을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여전히 손을 내밀고 계신다. 일어나고 싶어도 잡아줄 손이 없을 때 우리는 절망의 늪에 빠져 죽음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은 절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손을 잡을 때까지 손을 내밀고 계신다. 그러니, 그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보내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우리 신앙이 다시 살아나는 날, 우리는 진정으로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 자들이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자. 이렇게 살아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다. 

Posted by 장준식

위험한 신앙, 저항하는 예배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신앙의 선언이며, 동시에 세상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펼쳐지는 하늘의 예배는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이 직면한 현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적 환상이 아니라, 로마 황제 숭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켜내려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메시지였다.

1. 보좌 앞의 유리 바다: 혼돈을 넘어선 질서
고대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광활한 궁창 위의 바다에 세워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질서를 의미하는 공간이었다. 세상의 혼돈과 폭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은 바로 그 보좌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2. 네 생물과 많은 눈: 불의에 대한 증언
네 생물(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은 우주를 상징한다. 그들의 몸을 덮고 있는 수많은 눈(eyes)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난과 불의를 증언하는 상징이다.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 폭력의 희생자들, 정의가 짓밟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미한다. 예배는 이처럼 세상의 아픔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자리이다.

3. ‘거룩하다 거룩하다’의 선언: 장차 오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지배하는 분을 향한 고백이다.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고통받는 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춘향이가 변 사또의 횡포 속에서 이 도령을 기다리듯, 억압받는 성도들이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의 표현이다.

4. 황제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로마 제국은 황제에게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바치게 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은 그러한 칭호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임을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한 경배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가 몸과 마음을 어디에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선언이다. 예배는 황제 숭배에 대한 저항이었고, 오늘날에도 세상의 거짓된 권력과 이념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중심이어야 한다.

5. 예배는 저항이다
출애굽기의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예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애굽기가 가르쳐주는 예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선언하는 행위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떤 모습인가? 고대 시대에 비추어 볼 때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문명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예배는 시간이 흐른 만큼 달라져 있는가? 우리의 예배는 충분히 저항적이며, 충분히 자유한가? 예배에 야성이 살아 있는가?

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는 바로 예배의 야성과 저항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권력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는가? 말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외치면서, 삶으로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세상의 거짓과 불의에 맞서는 신앙의 결단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되려면, 우리의 삶이 예배와 일치해야 합한다. 황제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신실한 예배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험한 신앙이며, 저항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Posted by 장준식

도전을 이기는 신앙

버가모 교회는 두 얼굴을 가진 교회였다. 한쪽은 자랑스러웠다.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고, 순교자 안디바는 그들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부끄러운 얼굴도 있었다. 발람과 니골라 당의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진 이들도 있었다. 이 두 얼굴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현대인의 신앙은 버가모 교회의 현실처럼 양면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표면적 박해는 덜할지 모르지만, 거짓된 가르침과 세속적 유혹이 교묘히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 세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러나 그 속삭임은 때로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부지불식간에 진리를 버리게 만든다.

우리는 오늘날 무수한 '발람의 가르침' 속에 살고 있다. 그 가르침은 편리함을 약속한다. 타협하면 더 쉽게,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회개하고, 거짓된 가르침에서 떠나 바른 믿음 위에 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생명의 초대이다. 이 초대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감춰진 만나'와, 하늘의 잔치에 들어갈 '흰 돌'을 약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삶의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춰진 만나를 줄 것이다. 흰 돌을 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이다. 우리가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반석과도 같은 말씀이다.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안디바처럼, 우리의 믿음도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그 고난 속에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거짓된 속삭임 속에서 진리를 붙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주님께서 준비하신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 각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기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김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던지는 거짓 속에서도,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께 집중하자. 우리가 주님을 붙들 때, 주님은 우리를 승리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감춰진 만나와 흰 돌을 소망하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당신에게 주님의 평안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