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와 교회가 막장으로 가는 이유]
김수행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책을 번역해야지 하면서도 선뜻 착수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악법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번역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중 1988년 9월 이론과실천사의 대표가 [자본론]의 일부를 번역해 출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또한 나의 작업을 지연시키기도 했다."(1989년 초판 번역자의 말)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1989년 초판 번역자의 말)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필두로 발전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은 한 마디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이다. 문제는 고전파 경제학이 자본주의 이면에 흐르는 노동 착취는 보지 못하고, 그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상품생산과 교환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자연적인 것'으로 미화했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이기심마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킬 거라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다.
마르크스의 예언자적 시선(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교묘히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능력)은 자본주의 체제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착취'에 머문다. 노동이 상품처럼 사고 팔리는 현실이, 사실은 노동자의 삶 자체를 소모하고 착취하는 구조임을 고발한다. 마르크스의 눈에 자본주의는 '자연적이고 자유로운 체제'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폭력적인 체제였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유 거래'는 사실 비대칭적 권력 관계(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를 은폐한다고 비판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말하고 싶은 것의 요지는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착취의 체계이고, 고전파 경제학은 그 착취를 자연스럽고 포장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계시적이고 구원적인 체제가 아니고 기득권자들(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착취와 억압의 체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 또는 '자율'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마치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속인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막장으로 간 이유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받아들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김수행이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 이론은 '빨갱이' 딱지가 붙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통되지 못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던진 화두를 붙들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 감추어진 면,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들을 충분히 살펴보지 못한 채, 그것이 경제 체제의 전부인 것처럼 신봉했다는 데 있다. 한국 교회는 이와 발맞추어 나가며, 자본주의 체제에 축성을 더하고, 자본주의가 마치 하나님이 뜻하신 경제 체제인 것처럼 신학적 지원을 했다.
교회가 역사적 폭력 체제인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현재로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마땅히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르크스가 예언자적 시선으로 자본주의 체제 이면에 있는 착취와 폭력의 어둠은 감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될 것이고, 야수 같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인간은 생명을 계속 잃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을 계속 파헤치고, 그것에 희생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면을 밝음으로 채우도록 체제를 계속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일에 교회가 앞장서지 않는다면, 누가 앞장서겠는가? 생명을 사랑하는 주님께서 생명을 헤치는 야수 자본주의를 그냥 놓아둘 리 없다.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비판한 이유는 그 당시 서구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에 축성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수 자본주의에 물려서 거반 죽게 된 이들에게 그저 '아편'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폭력 체제에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한 축이 된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 김수행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던 것을 다시 여기에 적는다.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아직도 '빨갱이' 프레임에 갇혀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에 자신이 착취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더러,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부를 증진시키고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의 목을 은근슬쩍 조르며 협박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협박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쾌락'으로 느끼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병리적 마조히스트들(피학적 인간들/폭력을 당하고 있는 건데 이건 '쾌락'이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 가득하다.
우리를 구원하는 손은 오직 주님만이 내밀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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