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루터의 농민혁명에 대한 대응에 대하여 질문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을 조금 보충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의 페이퍼를 쓰면 좋은 주제인 듯해요. 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나 해방신학자들 중에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은 루터를 두고 "민중의 배신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의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 루터의 입장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의 농민들은 혁명을 일으키면서 12개의 성명서(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을 내겁니다.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 당시 농민들의 울분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두 집단으로부터 억압을 당하는데, 하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입니다. 이중고를 겪은 것이죠. 요즘엔 교회가 억압하는 단체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정부에 대응하는 수퍼 파워 단체(중세 때는 교회)가 없어서, 현대 사회는 국가(정부)가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르는 형국이죠.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국가(정부)의 대응체로 반드시 자리매기매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정치신학적 주장이기도 합니다.

12개의 성명서를 보면, 재미난 것이 있습니다. 첫째 성명서가 목회자에 대한 것입니다. 영어 번역문을 옮겨보겠습니다. "We humbly ask and request-in accordance with our unanimous will and desire-that in the future, the entire community have the power and authority to choose and appoint a pastor. We also want the power to depose him, if he acts improperly." 

요지는 교인들이 목사를 선택하는 권리를 가지고, 파면시키는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민주적이죠. "윤석열을 파면한다."처럼, "전광훈을 파면한다." "손현보를 파면한다." 이런 것을 요구한 것이죠. 이런 것을 보면, 국가가 교회보다 더 민주적인 공동체가 된 듯합니다. 교회가 정말 분발해야 합니다. 

농민들의 성명서를 보면, 이렇게 교회 권력의 부당함에 대한 이야기부터, 정부 권력의 부당함에 이르기까지, 이 두 집단이 농민을 어떻게 착취하고 억압하는지를 간략히 보여주면서, 이 부당한 법들을 고쳐줄 것을, 그래서 농민의 삶을 해방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진술합니다.

농민혁명 성명서가 성서를 근거 삼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교회와 정부의 비난의 화살이 루터로 향했던 모양입니다. "농민들이 이렇게 성서를 근거로 깝치는 것은 너(루터) 때문이야!" 그래서 루터는 농민혁명에 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죠. 그래서 루터는 "Admonition to Peace: A Reply to 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라는 글을 씁니다. 

루터는 이 글을 통해서, 농민도 달래고, 교회와 정부도 달래서 두 세력 간에 평화 협정을 맺기 원했습니다. 

루터가 농민혁명을 반대했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 정도의 루터 입장 때문입니다.
1) 질서와 권위에 대한 루터의 신학적 입장
ㅡ 루터는 세속 권위(정부/지배자들Lords)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폭력적 저항은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2) 농민들의 요구가 '복음'을 이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
ㅡ 위에서 보았듯이, 농민들의 12개 성명서는 성경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특별히, 루터가 가라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루터가 보기에 농민들의 요구는 복음을 빙자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루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보면, 농민들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3) 루터의 점진적 개혁 사상
ㅡ 루터는 급진적 개혁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대개 이러한 경향을 지닙니다.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혁, 그리고 사회의 개혁보다는 인간 내면의 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ㅡ 스펙타클의 사회를 공부할 때, 마르크스와 바쿠닌, 프루동의 비교를 떠올려 보시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마르크스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습니다.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요. 그러나, 바쿠닌은 국가 폐지를 요구하고 즉각적, 급진적 개혁을 원했습니다. 루터는 마르크스와 결을 같이 하고, 토마스 뮌처는 바쿠닌과 결을 같이 합니다. 
4) 귀족의 비호
ㅡ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종교 권력의 횡포를 피하기 위하여 세속 권력(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비호를 받습니다. 
ㅡ 그리고, 루터는 농민 출신이 아니라 사제 출신입니다. 
ㅡ 루터는 기본적으로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에 friendly 할 수밖에 없는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루터의 뿌리이죠.

루터가 무작정 농민혁명을 비판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만 나무란 것도 아닙니다. Admonition to Peace에 보면, "To the Princes and Lords"를 꾸짖는 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To the Peasants"의 성명서에 응답합니다. 

루터는 16세기 인물입니다.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 농민혁명이 발생한 것에 루터는 매우 당황한듯합니다. 자신의 성서해석,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이 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진 것에 대하여 루터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분노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Admonition to Peace라는 글을 통해 권자들과 농민들과의 화해를 이끌려 했던 것이죠. 

500년이 지난 현대 민주주의 관점에서 루터를 보면 루터가 매우 보수적일 수 있지만, 16세기 독일 사회의 정황을 생각해 보면, 루터는 매우 급진적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농민들이 내건 12개의 짧은 성명서를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독일의 이러한 전통에서 마르크스 같은 인물이 나오고,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가 나온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역사의 발전 같습니다. 

역사가 퇴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의 공부가 귀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5. 4. 8. 10:24

[요한계시록 휘날리며]
(계 9:13-21)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는 대표적인 묵시 문학 장르의 성경책이다. 성경의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은 상징적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하여 현실을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실을 비유와 상징, 그리고 은유적 표현을 통해서 묘사한다. 감추어진 현실의 진실을 직접 묘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은유적인 언어는 감추어진 현실을 드러낸다. 또한 문시문학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서술된다. 역사의 최종적 결말과 하나님의 최후 심판 및 구원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 보이지 않는 역사를 보게 해 준다. 보이지 않던 역사가 보이면 인간은 희망을 품게 된다. 묵시문학의 또다른 특징은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둠, 하나님과 사탄 등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매우 모호하다. 선과 악(빛과 어둠, 하나님과 사탄)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묵시문학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하고 모호한 현실에서 선과 악의 구분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묵시문학의 특징은 천상적 계시의 메시지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형식을 취한다. 천사 또는 신적 존재를 통해 하늘의 신비가 인간에게 계시된다. 이것은 고난과 박해 속에 있는 현실 존재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묵시문학의 주된 목적은 위로와 희망이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고통이 반드시 끝나는 날이 오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을 준다. 

요한계시록이 (고대) 묵시 문학의 형태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읽으면, 해석이 산으로 간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해석은 철저한 공부가 필요하다. 해석을 위해 기도, 계시가 필요한 게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을 철저한 역사적·문학적 연구 대신 오직 ‘기도’나 ‘계시’로만 주장하는 이들은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종종 사이비적 성향을 드러낸다. 요한계시록은 비밀(secret)이 아니라 비유(metaphor)다. 요한계시록을 ‘비밀’로 상정하고 푸는 사람은 모두 사이비다. 묵시 문학은 현실 세계를 직시한다. 묵시 문학은 역사 인식의 바탕 위에 쓰인 것이다. 묵시 문학은 현실의 고통에 집중한다. 그 고통의 원인과 근원이 무엇인지를 고발한다. 보통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과 근원을 잘 알지 못한다. 안다 할지라도 그 원인과 근원을 제거할 힘과 지혜가 부족하다. 묵시 문학은 현실의 고통에 감추어진 폭력을 상징 언어로 폭로한다. 폭력이 상징처럼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역으로 상징을 통해서 감추어진 폭력을 폭로하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즉, 진공 상태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기록되었다. 성경은 땅의 기록이다. 인간의 기록이다. 역사의 기록이다. 성경은 역사의 어떠한 사건에 대한 대응의 산물이다. 쓰여진 배경과 이유와 목적이 있다. 성경공부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나’(QT)를 살피기 전, 역사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가는 이 역사(시간) 속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어떠한 일(사역)을 해야 하는지 인식하여 역사 공동체로서의 온전한 일원이 될 수 있다. 역사적 맥락을 모른 채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과, 그 맥락을 알고 읽는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다음은 로마 군인들이 AD 70년경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자행한 대량학살의 희생자들에 대해서 묘사한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유대전쟁사)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참살을 당했고 이리저리 도망쳤다. 그들 대부분은 무기가 전혀 없었고, 적들에게 즉석에서 학살당했다. 죽은 자들은 번제단 주위에 아주 많이 쌓여 있었고, 성전의 계단으로부터 피가 엄청나게 많이 흘러내렸으며, 죽임을 당한 자들의 위쪽 시체들로부터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유대전쟁사. 6.420) 요한계시록은 이 역사의 반영이고 대응이다. 

여섯 번째 나팔 이야기는 제국들에 의해 짓밟힌 유대인들(약자들/약소국들)의 비극이 서려 있다. 여섯 번째 나팔을 부니, 금 제단 네 뿔에서 음성이 나온다. 제단은 성도들의 기도가 바쳐진 곳이다. 거기서 음성이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뜻이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14절): 유대 묵시 문학에서 천사는 왕과 동일시 된다. 여러 제국이 유브라데 강을 넘어서 이스라엘 땅을 침략했다. 여기에서 네 천사는 이스라엘 땅을 차례로 지배했던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의 왕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풀려나 활동하도록 허락받는다(신적 수동태). 풀려난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로마 제국이 요한의 시대에 유대인들과 약소국들에게 행했던 잔혹한 폭력을 반영한다. 이는 문자 그대로의 묘사라기보다는, 로마 제국의 무자비하고 압도적인 폭력성을 표현한 상징적 이미지다.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19절): 이들의 살상력(죽이는 능력)은 꼬리에서도 나올 정도로, 완벽한 폭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이슈라는 노래처럼, 로마 제국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폭력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폭로한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상숭배 했다”(20-21). 로마의 부역자들은 살아남았다. 이들은 자신들(자신의 가족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았다고 좋아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자들을 ‘짐승의 숭배자들’이라고 요한은 일컫는다. 여섯 번째 나팔 이야기는 네 제국이 자행한 폭력적인 학살의 희생자들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고 재현하는 동시에 현재화한다. 이렇게 함으로, 로마 제국의 절대적 권력과 폭력에 대하여 항의한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을 밀정으로 오해했다가 독립군인걸 알게 된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은 "한 두 명 쏴 죽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며 암살 작전이 부질없음을 말한다. “솔직히, 조선총독부 사령관하고 강인국이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라고 안옥윤에게 묻는다. 이에 대한 안옥윤(전지현 분)의 대답은 특별히 기억될 만하다. “우리 만주에선 지붕에서 물이 새거나 벽이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어. 곧 독립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텐데 뭐하러 고치겠어.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일제 시대에 독립군들은 태극기 휘날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서 싸웠다.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다. 요한계시록 메시지의 핵심은 안옥윤의 대답과 다르지 않다.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 — “계속 싸우고 있다”는 존재의 증거 — 와 깊이 맞닿아 있다. 묵시문학은 ‘결과’보다 ‘저항의 지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요한계시록은 그 당시 로마 제국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묵시 문학 기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성경)의 일부분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로마 제국은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폭력을 가하고 무시했던 역사의 기록(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살아서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역사의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고 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요한계시록이 조선인의 독립 의식을 자극한다고 판단해 일부 교회에서 이 성경의 강해를 금지한 바 있다. 어디든지, 제국의 폭력, 국가의 폭력, 역사의 폭력이 있는 곳에서는 요한계시록 읽기가 금지된다. 왜 그럴까? 저항 세력을 키워내기 때문이다. 저항 세력에게 희망을 주고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힘이다. 

요한계시록 휘날리며, 그리스도인들은 각종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형태의 국가 폭력에도 결코 동조할 수 없다. 만일 특정 종교세력이 폭력 권력에 편승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본질적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폭력에도 저항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국가의 평화를 가져오는데 가장 앞장서야 한다. 수많은 국민들이 깨어 있어 국가 폭력에 저항하여 평화를 되찾고 민주주의를 지켜줘서 고맙다. 헌재가 국민들의 염원을 이해하여 판결을 잘 내려줘서 고맙다. 다시는 이러한 황당무계한 비상계엄 같은 국가 폭력 사태가 고국 대한민국에 발생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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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존한 인물이다. 레비는 수용소에 끌려가 낯선 경험을 한다. 수용소에 입소했을 때 그에게 폭행을 가한 사람은 나치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이었다. 

탈식민주의 학자 프란츠 파농의 구분에 의하면, 레비가 당한 폭력은 수평적 폭력이다. 수직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수평적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속담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파농은 수직적 폭력의 악마성을 폭로한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알제리는 수평적 폭력이 난무했다. 파농은 왜 그럴까 연구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 담겨 있다. 알제리 사람들이 서로에게 수평적 폭력을 저지르는 이유는 알제리 사람들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수평적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직적 폭력을 막아내야만 수평적 폭력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근 30년간 자본의 수직적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 자본의 폭력은 소리 없이 사람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한국 사회가 극단적 분열 사회로 치달은 이유는 수직적 폭력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수평적 폭력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던져 졌기 때문이다.
계엄 사태 이후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수평적 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뜩이나 수직적 폭력에 시달려 힘든 대한 국민들에게 국가의 직접적 수직 폭력을 가하여 사회를 더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국가의 수직적 폭력은 반드시 수평적 폭력으로 번지게 되어 있다. 

지난 4개월 동안 한국 사회는 Psychosomatic 현상이 더 짙어졌다. Psychomatic은 psycological(정신)과 somatic(신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치심리학 용어이다. 한 인간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질병은 사회가 가하는 시스템적인 폭력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프란츠 파농의 주장이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동안 대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이 아팠다. 수직적 폭력을 당해야 했고, 그로 인한 수평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사회가 얼마나 분열되었는지, 어제 같이 밥 먹던 친구들이 이제는 원수가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가족들 간의 분열, 동료들 간의 분열이 너무 심해서, 이제는 결혼 정보 회사에서 배우자의 정치 성향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을 대통령 직에서 파면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전혀 아니다. 한국은 윤석열에게 집단 소송을 제기해야 할 판이다. 수직적 폭력에 의한 수평적 폭력의 창궐의 죄를 물어 형사소송, 민사소송 등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소송을 제기해야 할 판이다. 

1871년, 파리코뮌은 프랑스 정부군에게 패한다. 코뮌에 참여했던 유진 에딘느 포티에(Eugène Edine Pottier)는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를 지었다.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서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죄수들이여, 일어서라. 이성은 이제 활화산의 분화구에서 터져 나오리니, 그것 마지막 파열이다. 지나간 낡은 세계를 깨끗이 쓸어버리자. 노예가 된 대중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온 세계가 밑바닥부터 변화하리니, 우리는 지금 아무 것도 아닌 존재처럼 되어 있으나, 모두 온전해지자.”

2025년 4월 4일. 대한 국민은 정부의 수직적 폭력을 이겼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받았던 저주, '미련한 자를 지도자로 두었던 저주'를 이제 떨쳐내야 한다. 우리가 새로 받아들여야 할 지도자의 사명은 너무도 명백하다. 수직적 폭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 수평적 폭력을 멈추게 할 자.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자. 

예수의 십자가는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추어 세운 사건이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박힌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출 지도자를 선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직적 폭력과 수평적 폭력을 멈추어 세우는 일에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야 할 것이다. 무너진 교회가 부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서라. 이제 모두 온전해지자.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4. 4. 03:43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기도
(요한복음 9장 1-12절)

사랑과 생명의 주님,
빛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눈 먼 자를 치유하시며, 
새 생명으로 이끄신 은혜를 기억합니다.
우리도 눈을 뜬 자처럼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서 
참된 믿음과 생명을 얻게 하여 주소서.
주님,
우리 안에 여전히 자리 잡은 어둠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내 안의 허튼소리와 변명,
다른 이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세상의 질서에 안주하며 살던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눈앞의 고통받는 이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아픔을 돌보며, 생명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 
때가 아직 낮이오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소서.
밤이 오기 전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정죄하지 않고,
생명과 소망을 나누는 빛의 자녀로 살게 하여 주소서.
생명을 얻은 자 답게 생명력 넘치는 하루하루를 살게 하소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어둠을 물리치시고
우리가 나와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빛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4. 4. 03:33

일곱 번째 결혼을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4장 21-30절)

사마리아 여인 같은 우리를
품어 주시는 주님,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여섯 번 결혼한 인생입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쓰면서
공허한 인생, 곤고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주님,
우리의 이 목마름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명을
우리에게도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참 생명을 만난 사람답게
더 이상 필요없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 번째 결혼을 하여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죄 많은 우리들의 신랑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4. 4. 03:27

빛으로 나아오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4:46-54)

어둠과 빛,
그 사이 어디 중간쯤
니고데모처럼 서성이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우리는 때로
뭔가를 잃을 것이 있는 사람처럼
선뜻 빛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아 주소서.
임금의 신하의 아들이 어떻게
다시 생명을 얻게 되었는지를 기억하게 하소서.
니고데모가
어둠과 빛 사이에서 서성이다
놓쳐버린 것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될 때
우리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이 빛을 발하며
우리의 생명을 부요하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데 쓰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소서.
주님, 부단히, 빛으로 나오게 하소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힘 다해
붙들게 하소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4. 4. 03:24

차원이 다른 삶을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2:1-12)

사랑과 생명의 주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드러내신 그 영광을 깊이 묵상합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그 놀라운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생명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도 예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소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듯이, 
우리 또한 그 생명의 영광을 보며 믿음을 갖게 하소서.
우리 안에 있는 실체가 예수님처럼 아름답고 생명으로 가득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모습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존재를 만난 이들이 진심으로 '만나서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차원이 다른 삶,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넘치는 
기쁨과 풍요와 축복의 삶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생애 끝자락에서 사람들이 
"당신이 내 삶에 있었다는 것이 영광입니다"라는 아름다운 고백을 듣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삶을 차원이 다른 삶으로 이끌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4. 4. 03:14

‘내 생명에 손대지 말라’ 기도
(요한복음 1:1-5)

우리의 생명의 토대이신 주님,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례전입니다.
우리 안에는 생명이 넘치며
우리를 통하여 그 생명이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귀중한 생명이
헌신짝처럼 취급 당하는 이 시대에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생명은 너무도 소중하고
위대한 것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생명을 소홀하게 취급합니다.
주님,
생명은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을
주께서 가르쳐 주셨사오니,
미소지으며, 고운 말 쓰며, 친절하게 행동하며,
끊임없이 안부를 물으며, 따뜻한 마음을 잃지 말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
우리의 생명을 귀하게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막돼먹은 추노꾼들의 세상

“언년아~” 추노꾼, 대길이의 음성이 쩌렁쩌렁 들린다.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주제곡이 흐른다. 추노꾼 이야기. 조선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2025년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들’은 도망친 노예 취급 당한다. 그들은 추노꾼에게 잡혀 온갖 모욕을 당하고 송환 당해야 하는 노예일 뿐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불법 체류자들을 추방하기 위한 ‘앱’(CBP Home)까지 생겼다. 테크놀러지를 탑재한 추노꾼 같다. 이 ‘앱’은 불법 체류자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땅을 떠날 것을 압박한다. 

일론 머스크는 언론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사회복지기금을 사용해서 불법 체류자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을 유권자로 만들어 표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복지기금을 삭감하면 불법 체류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잘못된 방식으로 지지층을 끌어 모으는 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개소리(bullshit)다. 

정복, 약탈, 학살. 미국의 역사는 이 어두운 단어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형태와 방법만 바뀌었지, 미국 사회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최근 출간된 책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심장이라 불리는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정복, 약탈, 학살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지 파헤친다. 

팔로알토에는 스탠포드 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구글(마운틴 뷰), 메타(멘로 파크), 애플(쿠퍼티노) 등, 굴지의 IT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실리콘벨리 중에서도 팔로알토는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실리콘밸리가 원래 공기 좋은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팔로알토의 공기는 남다르다.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는 블링블링한 팔로알토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린다. 팔로알토에서도 미국의 ‘정복, 약탈, 학살’ 역사가 반복된다. 1850년 캘리포니아에 불어온 골드러시 당시 팔로알토에 당도한 백인들은 그곳의 원주민들(인디안)을 정복하고, 그들을 약탈하고 학살한다. 이러한 그림자는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에 깊이 배어 있다. ‘정복, 약탈, 학살’. 즉, 극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효율성의 극대화가 필요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존재는 가차 없이 퇴출시키는 것이다. 현대판 우생학이다.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실리콘밸리의 아이콘 ‘일론 머스크’는 정확하게 미국의,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정복, 약탈, 학살’의 역사적 맥락에 서 있다. 이들의 사고 방식은 철저하게 ‘제국주의’적이다. 이들은 현대판 우생학의 자식들이다. 이들에게 정의(justice)는 힘 센 자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들의 행보를 서포트 하는 세력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성경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데, 제국주의를 관철시키려는 트럼프와 머스크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아무래도 ‘다른’ 성경책을 읽는 게 분명해 보인다. 

윤oo이 구치소에서 풀려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구치소에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미국과 한국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성경(그들의 성경)도 싫어졌고, 김치찌개도 싫어졌다. 

막돼먹은 추노꾼들을 개과천선시킬, ‘언년이’가 필요한 세상이다. “언년아~~~”

Posted by 장준식

쓸모를 고민하는 신앙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뜨거운가’, ‘얼마나 열정적인가’로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책망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신앙의 본질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쓸모 있는가’에 대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계 3:16)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신앙의 열정과 무관심의 문제로 해석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 표현의 의미는 ‘유용성’과 관련이 있다. 라오디게아 도시를 흐르는 물은 골로새의 차가운 물도,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도 아니었다. 그들의 물은 미지근하고 쓴맛이 강해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단순히 열정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역할과 쓰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있었다. 그들은 도시가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재건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유함이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자만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그들의 문제는 편안함과 자기만족이 영적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돈이 있고,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하나님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신앙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고민을 멈추었다. 그래서 책망받았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으면 신앙이 해이해지고, 가난하면 신앙이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잠언 30:7-9에서 아굴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이유는 너무 부유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너무 가난하면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핵심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신앙은 미지근해지고, 가난해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신앙이 식어버릴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 받은 이유는 그들이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함 속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힘이 적었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들었다.

예수님은 "나는 네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흰 옷을 사서 입어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계 3:18)라고 말씀하신다. 불로 연단한 금은 ‘세상의 부요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영적 부요함을 구하라’는 뜻이다. 흰 옷은 ‘하나님의 의로 입혀진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안약은 ‘영적인 눈을 떠서 진리를 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쓸모를 간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와 함께 먹겠다”(계 3:20)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했겠지만, 실제 삶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법을 잊어버린 교회였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문을 열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의 쓸모를 간구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미지근한 신앙’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역할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너희를 토해낼 것이다"라는 무서운 경고를 받았다. "나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있으니까 충분해." "교회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으니까 됐어."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하나님께 더 집중하면 되겠지." 이러한 태도가 쌓이면, 신앙은 점점 미지근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쓸모를 고민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가 곤고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신앙은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 신앙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간절히 겸손하게 기도하며 ‘쓸모를 고민하는 신앙’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