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4. 4. 10. 02:38

복음 전도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8:26-40)

 

주님,

우리도 빌립처럼 복음 전도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줄 믿사오니,

주여,

빌립에게 주셨던 성령의 은총을 우리에게도 내려주사,

우리도 빌립처럼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에 큰 기쁨이 임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사마리아 성에 기쁨이 넘친 이유]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 발생한 대(大)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그리스도인들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선교는 전도자 빌립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같이 일곱 집사로 선택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빌립이 박해를 피해 처음 도착한 도시는 사마리아 성입니다. 그곳에서 빌립은 복음을 전했고, 빌립의 복음 전파 때문에 사마리아 성에는 기쁨이 가득 찼다고 성경은 전합니다.(행 8:8)

 

사마리아 성은 왜 기뻤을까요? 물론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기뻤겠지만, 그들에게 전달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던 사람들입니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뒤,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의 혼합주의 정책에 의해 이스라엘(유대인)의 순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사마리아 지역은 다른 민족과 섞여 다문화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유대인의 순수 혈통과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배척과 소외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성의 수가라는 동네에 살던 여인 이야기는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큰 기쁨을 얻게 되죠. 그와 동일한 역사가 빌립을 통해서 발생합니다. 배척당하고 소외당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처럼, 빌립의 복음을 통해 유대인들에 의해여 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역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복음이었습닌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되었다고 무시당하던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빌립의 사역을 통해 귀신이 물러가고, 병자가 낫고, 장애인이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역사들은 표적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이 받아들여졌다는 표적입니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이제 자신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던 것이고, 그러한 상태가 사마리아인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생명)의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발견합니다. 사마리아 성에 임한 기쁨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기뻐한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히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장애인이 치료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뻐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정말 핵심적인 복음입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 때문에 배척 받고, 병 들었다는 것 때문에 소외당하고, 장애가 있다는 것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사마리아인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당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러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복음이 이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차별하고 배척하면서 삽니다. 온갖 기준을 정해서 저 사람과 내가 같지 아니한 것을 증명하면서 삽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을 보십시오. 인종차별, 성차별, 경제적 차별, 노동자 차별, 장애인 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 차별 아닌 게 없습니다. 우리가 채택하여 경제의 기본구조로 사용하는 자본주의는 온갖 차별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자본주의 기본 정신은 ‘차별화’입니다. 더 뛰어난 것을 입증해야만 선택을 받고 성공합니다. 이것을 ‘경쟁’이라는 좋은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 사회는 우울증이 난무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차별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철폐하신 ‘차별’(막힌 담)을 허물고, 실제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누구든지 환대하는 것입니다.(엡 2:14)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만큼 큰 기쁨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귀신 들린 자가, 병든 자가, 장애 있는 자가 기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귀신 들렸기 때문에, 그들이 병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렸어도, 병들었어도, 장애가 있어도, 그들이 사람들에게 사회에서 따뜻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래서 그들이 일반사람들처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이 그토록 슬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만큼 큰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복음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삶에서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 나의 삶에, 그리고 너의 삶에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복된 삶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삶을 받아들여주는 복된 삶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넘치면 좋겠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기쁨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아우구스티누스와 40 여년 동역자로 사목에 힘쓴 포시디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뒤 그에 대한 전기를 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통해 어린 시절과 회심하여 사제의 길을 걷게 된 때까지의 기록을 하고 있는 터라, 포시디우스는 그 이후의 삶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쓴 <고백록>과 포시디우스가 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를 함께 보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대한 포시디우스의 기록은 '찬미'로 가득 차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훌륭한 주교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에 대한 찬미와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된 이 주교에 대한 찬미로 가득하다. 그래서 문체가 매우 겸손하고 간결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 자기 시대의 문제들과 씨름했다. 특별히 이단과 열교,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했다. 그 결과를 포시디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니교도와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와 이교도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교회로 돌아와 일치하는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지켜보셨던 것이다."(87쪽).

 

포시디우스의 필치에 그려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애로운 사목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러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을 만나게 되는데, 다름 아닌 발달족의 침입이다. 포시디우스는 반달족의 만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약탈, 학살, 갖은 고문, 방화, 헤아릴 수 없이 극악한 만행과 같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저지르며 약탈했다. 그들은 남녀논소 가라지 않았고, 하느님의 주교들이나 성직자들뿐 아니라, 교회의 장식물이나 제구, 교회 건물마저도 모조리 휩쓸어 버렸다."(119쪽)

 

반달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엉망이된 히포시(를 포함한 로마제국의 도시들)의 모습을 진술하고 있는 챕터는 두 눈을 뜨고 보기 차마 힘들 정도다. 포시디우스는 그리스도인과 주교의 시각으로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다음 기록은 잠시 책을 내려놓고 먼 산을 바라보게 했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고문을 이겨 내지 못했고, 더러는 칼에 맞아 죽었으며, 더러는 노예로 전락하여, 영혼과 육신의 온전함과 신앙을 잃어버린 채 악랄하고 가혹한 대우를 받으면서 원수들을 섬기고 있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는 교회에서 사라졌고, 수많은 지역의 교회 건물은 불타버렸으며, 합당한 장소에서 하느님께 드려야 할 장엄한 희생제는 그쳤고, 더 이상 거룩한 성사를 청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설령 청한다 할지라도 성사를 청한다 할지라도 성사를 집전할 사람을 쉽게 구할 수도 없었다. 야산이나 암벽굴이나 동굴 또는 다른 요새에 피신한 사람들은 가운데 더러는 잡혀 죽었고, 더러는 헐벗고 생활 필수품이 부족해서 굶어 죽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적들에게 붙잡히지 않았거나 붙잡혔다가 탈출한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마저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채 아주 비참하게 알몸으로 구걸해야 했으며, 궁핍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조금도 채워줄 수 없었다."(121쪽)

 

우리는 글로 표현된 환란을 읽으면서 마음 불편해 하지만, 이 글에 표현된 당자사들의 삶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가슴이 저민다.

 

성금요일.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한다. 반달족의 침입에 맞선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비록 몸은 찢기고 망가졌지만 마음만은 신앙을 지키려 노력했다. 정말 처절한 싸움이다.

 

21세기. 특별히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눈으로 보이는 수난이 적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식과 아우성이 넘쳐난다. 못살겠다고, 사는 게 x같다고 욕이 난무한다. 이는 분명 보이지 않는 '반달족'이 우리의 삶에 쳐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 보이지 않는 반달족은 우리의 삶에 쳐들어와 위에서 포시디우스가 묘사한 것처럼 우리의 삶을 마구 망가뜨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성금요일. 거룩한 성사를 청하는 사람이 없다. Good Friday와 Easter 시즌을 맞아 Vacation을 떠나는 사람만 많다. 물리적으로 반달족의 침입을 받은 것도 아닌데, 우리는 마치 반달족의 침입을 받아 무너진 성에 사는 것처럼 성금요일을 맞아 거룩한 성사를 처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물다. 반달족이 침입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는 교회에서 사라져 가고, 수많은 지역의 교회 건물들이 팔려 상업용도나 주거용도로 변경되고 있고, 그렇다 보니, 예배를 드릴 합당한 장소를 구하기 힘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시대에 마니교도와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와 이교도와 싸웠다. 그리고 인생의 말년에는 반달족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했고, 반달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고난 당하는 동료 시민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서 온 힘을 쏟았다.

 

반달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온 도시가 불타고 온 시민이 겁탈 당할 때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피신한 주교나 사제들이 있었던 것 같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남아 있는데도 성직자들이 피신하여 (교회) 직무가 없어져 버린다면, 그것은 양 떼들을 돌보지 않는 삯꾼들의 단죄받을 도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137쪽)

 

환란 가운데서도 한 두 명이라도 공동체가 남아 있는 곳에서 성직자들은 자리를 지키며, 거룩한 성사를 요청하는 이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필요한 것이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도록 노력하기 위하여 자리를 지키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성직자들의 직무라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엮어 만들어 주신 우리 직무의 사슬을 끊어 버려서도 안 되며, 우리가 섬겨야 하는 교회를 져버려서도 안 됩니다."(129쪽)

 

나는 '우리 직무의 사슬'이라는 말에서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슬은 쇠사슬을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쇠사슬로 우리의 직무에 묶여 있다. 교회로 불러 사목의 직무를 맡기신 주님은 우리를 쇠사슬로 그 직무에 묶어 주셨다. 그러니 그 결박을 풀어주실 분은 주님 밖에 없고, 주님이 풀어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그 결박을 우리 힘으로 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직무에 사슬로 묶여 있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반달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극심한 부침을 겪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들과 사목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마니교와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와 이교도의 세력과 한 바탕 전쟁을 벌여야 한다. 차라리 보이는 적이 물리치기 더 쉬운 지 모르겠다. 요즘엔 적들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엇과 싸워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요즘엔 더 치열한 공부가 필요하고, 더 슬기로운 지혜가 필요하며, 더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묘비에 다음 글귀를 새겨넣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오 나그네여, 시인은 죽은 다음에도 산다는 것을 알고 싶은가?

그대가 읽는 그것을 내가 말하나니,

그대의 목소리는 바로 나의 목소리라네."

Vivere post obitum vatem vis nosse, viator?

Quod legis, ecce loquor: vox tua nempe mea est.

 

포시디우스는 후대의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겨놓은 거룩한 작품들을 읽으면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포시디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통해서 그를 만나는 것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시대를 살며 그의 훌륭한 인품과 사목을 통해 직접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훨씬 더 복되다고 말한다.

 

작품을 남기는 일에 열심을 다해야겠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내가 동시대의 동료들에게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일 것이다.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산 것이 영광이었다고 말하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의 인생은 진주보다 값진 인생이고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그리스도처럼,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섬기는 자에게 이런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소망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네스 팰트로(Gwyneth Paltrow)의 소신발언과 교회]

 

기네스 팰트로가 마블 히어로물에서 떠난 뒤, 미국의 토크쇼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소신 발언을 했다.

 

"요즘 영화계는 질보다는 양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독창적으로 느껴지는 좋은 영화들도 많다. 슈퍼히어로 영화 전반적으로 본다면 큰 압박이 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때때로 영화의 작품성이나 독창성 등 진짜 관점이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더 커진다.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표현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영화들이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상품'을 만들어 팔아 매출을 올려야 살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모든 생태계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인식을 잘 하지 못해서 그렇지, 교회도 복음도 '상품'이 된 지 오래됐다. 교회도 복음도 하나의 '상품'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지 않으면 '구매'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돌아보면, 기네스 팰트로가 영화계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교회도 질보다 양에 더 중점을 둔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더 좋은 교회이고 더 부흥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서려 하다보니 교회는 '작품성이나 독창성'을 잃어버린다. 일부러 작품성과 독창성을 포기한다.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을 받고 '부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복음의 진짜 관점이 방해를 받는다.

 

기네스 팰트로의 다음 발언은 이 시대에 교회가 사는 길에 대한 제언과 일치한다.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더 커진다."

 

블록버스터 대작은 요즘 우리가 '대형교회'라 부르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우리는 아주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데, 대형교회를 기준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형교회를 기준으로, 사이즈가 작으면, '작은 교회'라고 부른다. 어떤 교회는 자신들은 형편없는 대형교회와 같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건강한 작은 교회'.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작은 교회라니. 작다는 것은 '크다'라는 다른 기준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인데, 교회의 기준이 '대형교회'이다보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작은 교회'라는 용어가 남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긴 것이다. '교회는 두 종류의 교회만 존재한다.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목사는 두 종류의 목사만 존재한다.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 모두, 교회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는 뜻이다. 

 

독립영화가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커진다는 기네스 팰트로의 말은 영화계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현실에도 절실하게 필요한 말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다양성을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일례로 유행은 개성의 표현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여 매출을 극대화시키는 상술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콜린 건턴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인 <하나 셋 여럿>에서 밝힌 바 있다.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이유는 다양성이 형편없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모두 자본주의의 기획에 당한 것이다. 모든 교회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어처구니없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보니, 복음은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양념이 버무려지고 팔린다. 그래야 상품화된 교회와 복음이 일반 대중들의 구매력을 자극하여 선택 받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위기에서 탈출하여 교회도 살리고 세상도 살리는 방법은 자본주의의 기획에 저항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획은 다양성의 말살이다. 교회가 블록버스터 대작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작품성과 독창성이 살아있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생태계에 다양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해관계를 최소화하여 다양성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작은 교회'라는 용어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그 앞에 자신들의 고유한 성격/성품을 드러내는 이름만 있으면 된다. 교회 앞에 '작은'이라는 것이 붙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의 기준이 '대형교회'라는 뜻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어떻게 교회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너무 천박한 생각이다.

 

작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지 말라. 건강으로 따지면 대형교회를 따라갈 수 있나? 가난한 자가 부자들의 건강을 따라갈 수 있나? 작품성과 독창성이 있는 교회를 세우라. 이해관계가 적은 교회를 세우라. 그래야 복음이 '상품'으로 팔리지 않고,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스데반 사건이 말해주는 복음의 핵심

 

스데반 사건의 보편성

스데반 사건은 스데반의 순교에만 너무 집중되어 그 사건이 말해주고 있는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일곱 집사의 선출을 마친 뒤, 스데반 순교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스데반의 특별한 사역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른 여섯 집사 모두 스데반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스데반 이야기가 대표격으로 소개되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극적이면서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 고난 당하는 일이 매우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스데반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보편’ 그리스도인들이 스데반처럼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현상을 계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

스데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전한 복음이 왜 헬라파 유대인 공동체와 충돌을 일으켰는가 입니다. 우리는 ‘왜’를 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 정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자,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합니다. 이 논쟁은 점점 과격해집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지만 스데반의 기세를 꺾지 못하자 불법과 폭력을 통해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아세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무엇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복음의 핵심을 만나게 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고소 이유

스데반이 야비하게 헬라파 유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막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말 그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유대당국에 고소를 하는데,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했다고 하면서 고소합니다. 스데반은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적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욕을 한 적도 없고 성전을 향하여 침을 뱉은 적도 없습니다. 스데반은 그냥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이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있다고, 헬라파 유대인들이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음이 뭐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특권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고, 자신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는 다른 처지의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민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무참히 깨뜨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통해 은혜의 보편성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은혜의 보편화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이유

복음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과 온 우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은혜의 보편성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진 특권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자 폭발합니다. 복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에 대하여 시기(jealousy)가 발생된 것입니다. 시기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시기는 반드시 폭력을 불러옵니다. 스데반이 죽게 된 이유는 복음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희생자가 된 것이죠.

 

복음과 죄악의 보편성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저 사람과 내가 같다는 평등성을 참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차별을 두어야 속시원합니다. 인간은 저 사람이 나랑 같아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내가 저사람보다 못하게 되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관계가 평등하면 불편해합니다. 오히려 차별이 발생해야 속시원해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교만, 즉 죄악에 대한 치유입니다. 복음을 삶에 받아들인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이 어떠한 특권을 불러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을 때 자신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책임을 그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이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들은 불의한 자가 되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전하고 싶었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과 죄인에게 동일하게 내린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처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복음은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기이한 현상

요즘 (기독교) 교회를 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파 유대인’이 된 것 같습니다. 마치 복음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도구인 양, 그리고 교회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는 양, 복음의 이름으로 다른 존재를 차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복음의 왜곡입니다. 성경을 신실하게 읽지 않고 자의적으로 읽고 해석하여 자기의 의(righteousness)와 기득권을 보호하고 자랑하는데 사용하는 범죄입니다. 복음은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들과 죄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녀노소, 자유인이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교회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차등 적용하여 사람들을 차별하고 정죄합니까. 우리 모두 복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감사하며, 힘껏 서로 축복해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러시아의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 P. Mussorgsky, 1839-81).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강력한 음악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19세기는 ‘낭만주의’ 사조가 예술계를 휩쓸던 시기입니다. 이성에 경도되어 모든 것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하려고 했던 시대에 사실, 또는 현실을 초월한 공간을 창조함으로 사람의 마음과 삶에 숨쉴 공간을 제공했던 것이 낭만주의입니다. 그런 낭만주의에 가장 가까웠던 예술은 음악이었습니다. 반대로 사실주의에서 가장 먼 것도 음악이었습니다. 음표로 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림과 비교해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물론 그림도 사진이나 동영상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요.) 그러나 음악의 음표를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죠.

 

무소르그스키는 그림(회화)에 비해 음악의 표현력은 제한된다는 생각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음악을 그림처럼 눈에 보이듯이 표현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 무소르크스키의 지위는 독특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던 것,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 시도해 볼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무소르그스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절친 빅토르 하르트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작품입니다.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빅토르 하르트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무소르크스키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죽은 친구의 유작을 모아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의 작품 중 깊은 인상을 받은 10개의 작품을 골라,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의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전람회의 그림>에는 죽은 친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동시에 음악적 제약을 뛰어넘은 혁신-창조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후 수많은 음악가들이 원래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된 <전람회의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합니다. <전람회의 그림>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죠. 그 중에서 모리스 라벨(J. M. Ravel)의 관현악 편곡 연주가 가장 유명합니다.

 

<전람회의 그림> 열 개의 작품 중 여덟 번째 작품의 표제가 ‘카타콤’(Catacombae)입니다. 이 곡은 하르트만이 랜턴을 들고 파리의 카타콤을 조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은 로마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라 그리스도교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우리는 카타콤교회라 부릅니다. 카타콤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포용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드리며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주 현실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그들의 신앙을 더 깊고 단단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 이상 신앙의 핍박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고,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과 교통하면서 그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알았던 카타콤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의 신앙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세속적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00세 시대를 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영원히 살 것처럼 삶에만 집착하는 우리들의 욕망, 그리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는 영성을 잃은 시대에 살다 보니,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약자들을 향한 우리들의 무관심 등이 우리의 신앙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을 반성하며, 오늘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한 번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Posted by 장준식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

 

신약성경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발생한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제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제자는 헬라어의 ‘마세테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disciple’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는 ‘제자’를 ‘배우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시 소피스트들이 철학교사로서 대중적인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만들어 스승으로서 자신들이 행한 가르침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금전적인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러한 종속적인 관계가 마음에 안 들었던 소크라테스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민주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제자’를’ 함께 알아가는 동료(companion)’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세테스’와는 다른 용어, 즉 ‘헤타이로스’라는 용어를 통해 제자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 재정립을 통해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대가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제자 개념은 이보다 더 깊어집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한창 가르침을 주실 때 예수님의 가족이 방문합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온 것을 알립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런 후,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위의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의 제자 개념과는 확연히 다른 ‘제자’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란 ‘가족’입니다. 가족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제자의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6장은 이런 가족과 같은 제자들 사이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그들 가운데 헬라파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 대해 불평이 생겼습니다. 매일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헬라파 유대 사람 과부들이 빠졌기 때문입니다.”(1절b) 한 마디로, 제자 공동체에 ‘차별’(discrimination)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반 사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해도 기쁨이 없어지고 삶이 힘들어지는데, 가족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했으니 차별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 지, 그리스도교의 제자 개념에 비추어 보면, 정말 큰 일이 교회 내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지혜를 냅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구제(봉사/디아코노스)하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선발하는데,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제자들로 칭찬 받는 사람들 중에서 일곱 명을 선출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이 희미해지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지 못한 이들이 봉사의 자리에 있으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리더십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늘 충만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제자 공동체)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가족’입니다. 친밀한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제자를 생각하고, 교회를 떠올릴 때 ‘가족 메타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가족 메타포를 통해 표현됩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족만큼 친밀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족이 지닌 친밀한 사랑의 메타포를 떠올린다면,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현저히 부족한 요즘, 사회 곳곳에서 차별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취(미리 맛보기)이므로, 교회는 차별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별을 물리치고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많아지고, 세상은 더 따스해질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38

리추얼을 간구하는 기도

(여호수아 5:9-15)

 

리추얼을 통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서 행한 리추얼을 통해

그들이 주님께 받았던 은총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 있는 리추얼들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겸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은총을 사모합니다.

우리를 멈춰 세우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일들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습니다.

리추얼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주님의 새롭게 하시는 구원의 은총을 입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예배의 목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4. 3. 5. 13:36

길갈에서의 리추얼

(여호수아 5:9-15)

 

1. 리추얼

리추얼(Ritual)은 한국 말로 의식(儀式) 또는 의례(儀禮)를 뜻한다. 리추얼은 두 가지 큰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기억(remember)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작(New Start)의 기능이다. 리추얼은 우리의 삶에 마디를 제공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도와준다. 그리스도교인에게 예배는 대표적인 리추얼이다. 충분한 리추얼이 없으면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하다. 리추얼을 잘 하는 사람은 인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김현관/이영주 집사님네 개 해리가 2년 전에 죽었을 때 내가 집전한 리추얼을 통해 두 분이 많은 위로를 받았고 해리를 잘 떠나 보낼 수 있었다는 간증을 들었다. 그래서 집사님네는 리추얼을 통해 형성된 정서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반려견 아리를 데려와 잘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신태숙 권사님 댁 자녀분들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리추얼(장례예배)을 통해서 엄마를 떠나 보내고 자녀들끼리 한동안 본인들만의 리추얼을 통해서 어머니를 추억하며 잘 떠나 보낼 수 있어 이제 어머니 없는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2. 여호수아서의 대표적인 리추얼: 길갈 리추얼

성경책 민수기 하면 떠올라야 하는 것이 가데스 바네아인 것처럼, 성경책 여호수아 하면 떠올라야 하는 것은 길갈이다. 길갈의 뜻는 “굴러갔다”, 또는 “떠나갔다”이다. 여호수아서의 대표적인 리추얼은 길갈의 리추얼이다.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아주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길갈의 리추얼은 지난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광야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이제 시작된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새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길갈의 리추얼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자.

 

3. 요단강 도하 후 이스라엘이 행한 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안으로 들어가자 요단강물이 흐르는 것을 멈추고 바닥을 드러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순조롭게 건널 수 있었다. 이것은 약속의 성취다. 출애굽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순간이다.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은 성스럽고 순조로웠다. 이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서서 행한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스라엘은 요단강 바닥에서 열 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강변 서쪽에 기념물로 쌓아 놓는다. 이것은 징표의 역할을 한다. 후일에 자손들이 이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해주고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이스라엘은 할례를 시행한다. 출애굽한 백성 중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지만,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태어난 백성 중 남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요단강을 건넌 후 이들은 할례를 시행한다.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할례를 시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수없이 많은 적들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전투에 임해야 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 것은 굉장히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할례를 받아 회복하는 동안 적군이 쳐들어 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과 그의 가족은 세겜 땅에 정착하는데, 그곳에서 나쁜 일이 발생한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히위 족속의 족장 하몰의 아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디나와 같은 어머니(레아) 밑에서 태어났기에 분노를 참지 못한 시므온과 레위는 복수의 계획을 세운다. 디나를 아내로 달라는 하몰의 요청에 응하는 척하면서, 그러면,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 요청에 응하겠다고 꾀를 낸다. 그 딜은 받아들여졌고,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 바로 그때, 할례를 받고 회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시므온과 레위는 히위 족속의 성읍에 기습하여 들어가 모든 남자를 죽인다. 이만큼, 할례 받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요단강 도하 후, 전열을 가다듬은 것이 아니라, 할례를 시행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가나안 땅에서 시작될 전쟁을 맡긴다는 뜻이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신앙이다. 우리가 주일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겠다는 결단 아닌가? 삶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일들 앞에서 주눅들거나 낙심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담겨야 한다.

 

4.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 발생한 첫 번째 역사

길갈에서의 리추얼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통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 하나님은 그 할례를 통해 애굽의 수치를 그들에게서 떠나게 하셨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길갈이다.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는 뜻이다. 얼마나 위대하고 은혜로운 이름인가! 길갈! 꼭 기억하라.

 

대한민국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일제시대의 수치가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삶에서 굴러가지 못하고 떠나가지 못한 것에 있다. 아직까지도 친일논쟁을 벌이는 것은 국력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수치다. 만약, 해방 후에, 적절한 리추얼을 통해 국가의 수치를 온전히 굴려보내고 떠나보냈다면 한국이 아직까지 친일문제로 시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애굽의 수치 때문에 국론이 분열되고 싸우는 일이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 여러 다툼이 있었지만, 적어도 애굽의 수치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었다. 왜 그랬는가? 바로 길갈에서 할례의 리추얼을 통해 애굽의 수치를 굴려보내고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5.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서 발생한 두 번째 역사

길갈에 진을 치고 여리고 평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켰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통해 유월절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쳤다. 광야에서는 긴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나라는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자기의 힘으로 먹거리를 구해야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일어서도록 도우신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은 어린 아이의 신앙이었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서의 신앙은 어른의 신앙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개입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삶을 이끌어 나갈 줄 알아야 한다.

 

6.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서 발생한 세 번째 역사

애굽의 수치를 굴려보내주시고(떠나보내 주시고), 만나를 그쳐 이제 자립하게 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정복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여호수아 5장 13절 이하의 짧은 에피소드는 강력한 인상을 준다.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칼을 손에 쥔 한 사람이 여호수아의 눈에 들어왔다. 여호수아는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그 사람은 대답한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보내신 천사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명백한 징표였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곳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리고 전쟁을 시작으로 이제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만나고 얼마나 든든했겠나. 두려움이 눈 녹듯 물러가고 그의 마음에는 용기가 솟아올랐을 것이다.

 

7. 리추얼의 중요성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길갈에서 발생한 이 모든 감격스러운 일들은 리추얼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리추얼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우리가 ‘예배’라는 형태로 드리는 리추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우리가 정기적으로 행하는 리추얼에 삶의 무게를 실으라.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리추얼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 것처럼, 새롭게 시작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리추얼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삶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속상한 일들, 삶을 가로막고 있는 일들,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리추얼을 통해서 모두 굴려보내고 떠나보내라.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공적인 리추얼도 있지만, 각자 삶 속에서 나만 아는 소소한 리추얼이 필요할 때도 있다. 답답하고 어렵고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든 삶 속에서 자신만의 리추얼을 만들어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해 보라. 리추얼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통로이다. 리추얼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고, 새로운 삶을 열어가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멋지고 활기찬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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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34

연약궤를 멘 제사장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여호수아 3:7-17)

 

주님,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밝히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이 먼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요단강이 마르고 그 마른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서

가나안 땅에 입성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고

언약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주님의 백성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아

제사장으로 세움 받았으니,

주여,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우리의 봉사와 섬김을 통하여

주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교회 공동체로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제사장의 역할 잘 감당하게 하시고,

교회 내에서도 솔선수범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주의 신실한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가정에서도 주의 사랑으로 모범이 되는

제사장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소서. 우리가 따르겠나이다.

언약궤를 메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복을 내려 주소서.

언약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