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25. 21:33

신인류의 사랑 (Love of New Human Race)

(에베소서 4:1-16)

 

바울은 1장부터 3장에 걸쳐 신학적인, 이론적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십자가, 부활, 승천)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그것은 계시로 주어진 것이기에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는 것은 복음 그 자체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류 간의 교제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낳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이다.

 

한국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남자와 남자 군인과 여자 셋이 걸어가면, ‘남자 둘, 여자 한 명이 걸어간다’라고 말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와 군인’이 걸어간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군인은 남자와 여자에 끼지 못하는 제 3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에베소서의 신학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의 있다. 남자와 여자와 그리스도인. 기독교가 탄생하고 나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매우 유별난 부류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라벨이 따로 붙었다.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신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처음 기독교 신앙이 생겨난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다원주의 사회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신앙 때문에 ‘순교’ 당하는 것은 굉장히 고귀한(noble)한 일이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러한 인식이 별로 없어서 ‘순교’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에베소서 4장부터 바울의 권면이 시작되는데, 권면은 단순히 해도 되고 안 되도 되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지금은 개인의 자유가 가장 큰 미덕인 시대이고, ‘자유’라고 하는 개념이 매우 사사화되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되었지만, 신학적 설명 다음에 나오는 권면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눈에 보이지 않는 것)가 실제로 이루어지게(눈에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실천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을 허물어 그 둘이 ‘하나’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담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담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담이 허물어져서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에베소 교회를 이루어서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실제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럴 때,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진리가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권면’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옵션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필연적으로 들어서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은 그들의 노력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선포했듯이, ‘하나 됨’은 그들이 노력해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3절에서 “힘써 지키라”라는 말은 헬라어 ‘테레인’을 옮긴 말인데, 이것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또는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 됨’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하나 됨’을 지켜야 한다.

 

이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은 매우 위트 있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주 안에서 갇혀 있다”라고 말하는데,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채워진 차꼬를 3절의 “평화의 매는 줄”과 대비를 이루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쇠로 된 차꼬(매는 줄)를 발목에 차고 감옥에 매여 있지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평화로 된 차꼬(매는 줄)를 발목에 차고 ‘하나 됨’에 매여 있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덕목들 네 가지를 말한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덕목들에 대하여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이러한 덕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식상해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추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겸손(humility)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인데, 이 용어는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용어이다(NIB, 61). 우리는 보통 “I am better than you!”의 마음을 갖는다. 그리고 ‘경쟁’이라는 가치 아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일상에서 이런 가치 가운데 살아가면서 겸손의 덕목을 갖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You are better than me.” 참 어려운 과제다.

 

겸손뿐 아니라,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덕목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실제 삶에서 실행하기 쉬운 덕목들이 아니다. 그것을 바울도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매우 특별한 단어를 통해서 그러한 덕목들을 지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3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동사 “힘써 지키라(스푸타존테스)”이다. ‘스푸타존테스’는 ‘온갖 노력을 다 한다’는 뜻의 아주 절박한 표현이다. 자식이 병에 걸리면 그 병을 고쳐주려고 부모가 절박한 심정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 같은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즉,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4절에서 6절에 걸쳐 말하고 있듯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고, 주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시오’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님은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이 우주에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권세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귀신(어떤 영적 존재)도 국가도 자본(돈)도, 그 어느 것도 권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권세를 지니고 계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두려워 한다. 귀신도 국가도 자본도 그 어느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매우 전복적이다.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7절에서 10절 말씀이다. 바울은 8절에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시편 68편의 말씀을 약간 다르게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어떻게 다르게 인용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조금 복잡한 논의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그것을 자세히 알지 못해도 된다. 다만, 시편 68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어 교회에 사역자들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올라가셨다’, ‘내리셨다’, 이런 용어를 통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승천이다. 바울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에 일꾼들을 주셨음 강조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단지 교회가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주신 ‘선물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환기시켜야 하는 중요한 말씀이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 구성원들이 무슨 목표를 가지고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2절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사역자들을 교회에 선물로 주신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번째 것은 두 번째 것을 위해서 이고, 두 번째 것은 세 번째 것을 위해서이다. 사역자들을 세우진 첫 번째 이유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적절하게 구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위해 구비시키는가? 그게 두 번째 이유인데, 사역자들은 말씀 사역과 훈련을 통해서 성도들을 적절하게 구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봉사(디아코니아)는 섬기는 일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먼저 섬겨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속성(nature)이다. 섬김을 잃은 그리스도인은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왜 섬기는가? 그것이 세 번째 이유인데, 그리스도인은 말씀 사역과 훈련을 통해서 적절히 구비되어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데, 그 섬김의 일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냥,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는가? 교회의 몸집을 크게 불리는 것, 우리가 흔히 ‘부흥’이라는 것을 하는 것인가?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실마리는 13, 14절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 14절).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 받아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 이유는 어린 아이와 대조되는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울은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 받는 이유, 그래서 우리가 봉사의 일을 하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세워 주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어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성숙한/mature) 분량에 도달하는 것은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성숙이다. 어린 아이처럼 철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내적 성숙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각 시대마다 내적 성숙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가장 긴급한 문제들에 대하여 남몰라라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헌신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과 Methodist들이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1703년에 태어나서 1791년에 세상을 떠났다. 전형적인 18세기 인물이다. 18세기 영국에서 발생했던 가장 큰 문제는 도시 노동자들의 빈곤 문제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농부들이 일터를 잃고 도시로 몰려와 도시 노동자로 전락을 하게 되는데, 도시에 몰려든 농부들은 늘 빈곤에 시달렸다. 그 당시에는 사회보장 제도나 노동자 법이 발달된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은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그들을 보듬은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과 Methodist들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기후위기 또는 기후재앙이다. 이 모든 것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얼마전 가디언 신문에서 지금 가장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한 것이 지구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뜻있는 국제 변호사들이 지구를 변호하고, 지구에 가하는 범죄를 법으로 정하여 처벌 받게 하기 위해 법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있다는 기사였다. 또 AP 뉴스에서 북극곰이 기후변화 때문에 어떻게 멸종해 가는지 말하면서, 인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 것을 들었다. “We are next!” 정말 섬뜩한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이다.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새로운 인류, 신인류는 무엇을 하든지 오직 사랑 안에서 한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늘 고민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을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 것으로 축소시켜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고, 성숙한 인간, 내적 성숙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냥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고 마는, 철부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인류의 사랑은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섬김으로 나타나야 할까? 어렵지 않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었던 신앙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섬김의 일을 하는 것이다. 기후재앙을 만드는 일에 저항하며, 즉, 자본의 탐욕을 물리치며, 인간 생명의 젖줄인 지구를 지켜내는 것이 이 시대 신인류의 사랑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섬김으로 기후재앙으로부터 지구의 모든 생명을 지켜낼 것인가,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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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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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젊은 기독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입니다. 이런 글을 읽는다면 생각하고 느끼는 점이 크리라 생각합니다. 기회 될 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2021.07.27 22:03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18. 21:31

최후의 인간

(에베소서 3:14-21)

 

본문은 바울의 기도문이다. 바울 서신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기도문이 들어간다는 것과 전반부에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후반부에는 실천적인 이야기(권면)를 한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 중에 에베소서는 좀 더 특이하다. 다른 서신에서는 기도문이 앞부분에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앞 부분 외에 이렇게 중간에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기도문을 기점으로 에베소서는 전반부의 신학적인 이야기와 후반부의 실천적인 이야기(권면)로 나뉜다.

 

전반부의 신학적인 이야기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혔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문 사건이고, 그리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께 세워 나간다.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세워진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에베소 공동체를 위해 바울은 기도한다.

 

기도는 참 따스한 인간의 유산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큼 깊은 사랑의 행위가 없다.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기도 안에 ‘나의 이름(장준식)’이 불린다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다. 기도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도하는 한, 긴 기도는 필요 없다. 짧게, 그의 이름만 불러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내 기도 안에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법이다.

 

유대인의 평소 기도법은 서서 기도하는 것이다. 서서 기도하는 것은 서서 말씀을 받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기에 서서 말씀을 받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에 서서 기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무릎 꿇고” 기도한다. 서서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간절함이 배어 있는 기도가 바로 무릎 꿇고 하는 기도이다. 무릎 꿇음은 경외심, 복종, 겸손의 의미가 강력하게 들어 있다. 성경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표적인 장면은 세 군데 등장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둘째는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셋째는 바울이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에베소 교회 교인들과 작별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 어떤 자세로도 기도할 수 있다. 누워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고, 앉아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의 기본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앉아서 기도를 제일 많이 한다. 기도를 좀 더 오래하기 위한 편의이다. 서서 하는 것이 기도의 기본 자세인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시 앉아서 기도하더라도,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반드시 들어가도록, 서서 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누워서도 기도하고 앉아서도 기도하지만, 기도의 기본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또한 기도의 자세 중 무릎 꿇고 하는 기도가 가장 간절한 기도의 자세라는 것도 알아 두면 좋겠다.

 

바울의 기도를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굉장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는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 등의 가치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바울의 기도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현재 추구하는 가치관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바울의 기도는 세 개의 간구와 한 개의 영광송으로 이뤄져 있다. 우선 세 개의 간구를 먼저 보면, 첫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속사람(the Inner Man)은 바울 서신에만 나오는 독특한 용어이다. 로마서(7:22/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와 고린도후서(4:16/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에도 나오는 용어이다.

 

속사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다. 우리말 ‘마음(속사람)’이라는 말도 참 예쁜 말이지만 헬라어도 참 예쁘다. 속사람(마음)을 ‘카르디아’라고 한다. 히브리어도 예쁘다. “레브.” 영어로는 ‘heart’, 또는 ‘mind’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심장, 또는 마음. 아무튼, 속사람이란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인데, 사람됨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기에 ‘속사람(the inner ma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곳도 바로 ‘속사람’이다. 그러니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속사람이 강건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현대인들의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대개 육신의 건강, 몸이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병든 육신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데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누군가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낯설어 할 뿐만 아니라, 매우 이상한 감정이 들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속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겉사람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두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한계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은 “지식을 초월하는,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아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수준에만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헤아리고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가 잴 수 있는 만큼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서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만다. 그렇다 보니, 우리 삶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억압이 일어날 뿐이다.

 

세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대담한 기도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수준까지 이르기를 구하는 것인데,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구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개념과 유사(엡 4:13)하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와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개념과 유사(마 5:48)하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경지까지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보다 더 대담한 기도는 없다. 이것은 기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기도의 마무리를 영광송으로 하고 있는데,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경험 때문이다.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20절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영광송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제가 구한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영원무궁토록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모든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기도는 ‘속사람’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에 대한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그리고, 기도의 마무리는 영광송이다.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루어 주신 분이라는 고백을 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바울의 기도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치관과 매우 이질적이다. 우리 시대는 겉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둔다.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고, 물질 세계에 대한 깊이를 알려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 세계에 대하여 알게 된 지식으로 물질적 풍요, 즉 겉사람에 대한 풍요를 누리려 할 뿐이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쉽게 말해, 물질적 부자되는 것에만 관심 있다. 우리 시대는 영광송이 사라졌다. 풍성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족함과 모자람의 감정을 주입시키기 시대에 살고 있기 대문이다.

 

요즘 지구가 아주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바이러스 팬데믹에 더해, 유럽에서는 대홍수사태를 겪고 있고, 미국에서는 유례없는 더위와 가뭄 사태를 겪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이런 헤드라인이 떴다. ‘No One Is Safe’: “Deadly flooding in Europe, vicious heat in America: Wealthy nations are waking up to the idea that climate disasters can reach them too.” 이 기사는 정말 씁쓸한 기사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뉴욕 타임즈에서 말하고 있는 ‘wealthy nations’는 모두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지고 성장한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들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 기후위기의 주범들 아닌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도에서 간구하는 것, 속사람의 강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들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속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마치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시는 탕자의 이야기의 현실판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인간의 최후 말이다.

 

최후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파멸당하는 인간일까, 아니면 구원받는 인간일까? 우리는 구원을 너무 비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지구를 이렇게 망쳐 놓고 이렇게 환란이 가득한 지구에서 휴거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 신앙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지구에 사는 한, 우리는 지구의 흥망성쇠와 함께 할 것이다. 지구가 고통 당하면 우리 인간도 함께 고통 당할 것이다. 지구가 번성하면 우리 인간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즉, 우리는 지구의 멸망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지구의 번영과 함께 구원받게(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인가?

 

위의 기사에서 Wealthy nations(부유한 국가들/선진국)는 모두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국가들이다. 그들이 기후변화의 주범 아닌가? 그만큼,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사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쓰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대로 썼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닌 인간 자신이다. 근대의 사고방식: 하나님을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종교의 영역에 가두고, 이성이 신앙 안에서 작동하도록 하지 않고,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여 이성의 고유 영역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조차 개입하지 못하는 이성의 고유 영역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근대의 사고방식),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성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싶은가? 파멸인가? 구원인가? 죽음인가 생명인가? 우리는 마치 파멸을 경험해 보고 싶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겉사람에게만 관심 있을 뿐 속사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겉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와 수치는 매우 발달되어 있는 반면, 속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와 수치는 전혀 없다. (혈압이 높으시네요? 당뇨가 있으시네요? 짠 거 덜 드시고, 음식 조심해서 드세요. 이런 말은 해도, 속사람의 건강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기도를 하루에 세 번 하시고, 예배에 빠지지 마세요. 그리고 성경읽기를 하루에 한 장씩 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질세계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려고 할 뿐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원소 주기율표는 있어도, 그리스도 사랑 주기율표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질적 충만만 바랄 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파멸만 남은 것 같고, 그것을 지금 우리는 현실판으로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시작은 우리의 기도부터 바꾸는 데 있다. 기도할 때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에 관한 기도는 좀 내려놓고, 속사람의 건강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원하는 것에 대한 기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갈망에 대한 기도로 우리의 기도를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우리의 속사람이 얼마나 건강하지 못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게 될 것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충만이 아니라 엉뚱한 것이 충만하게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알아야,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성경공부의 자리, 교제의 자리, 선교와 봉사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한 것들이 영적인 치유의 자리라는 것이 보이게 된다. 

 

이러한 기도와 깨달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어둠이 깊을수록 아주 작은 불빛도 소중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다.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이 피어날 때(또는 겉사람과 동등하게 속사람의 건강도 신경 쓸 때), 물질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알기를 소망할 때(물질 세계에 대한 관심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에도 관심을 둘 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려고 갈망할 때, 그러한 가치관으로 새롭게 삶을 규정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날 때 최후의 인간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인간이다. 파멸이 아닌 구원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를 자꾸 파멸로 몰고 가는 가치관을 내려놓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치관(속사람/그리스도의 사랑/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다시 옷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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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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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11. 21:43

이 교회를 보라!

(에베소서 3:1-13)

 

(에베소서를 보면, 교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주 필연적이다.)

 

본문을 보면,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은혜의 경륜, 계시, 그리스도의 비밀, 비밀의 경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하나님의 각종 지혜, 예정 등이 그것이다. 비밀, 계시, 경륜’ 이런 단어들은 본문의 분위기를 왠지 신비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에 걸려 넘어지면 안 된다. 단어 자체가 그러한 신비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렇지,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 수 있도록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워서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경륜’과 ‘비밀’이다. 헬라어로 각각 ‘오이코노미아’ 그리고 ‘뮈스테리온’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오이코노미아, 경륜은 직무, 사명, 살림살이 등으로 번역된다. 한자어 ‘경륜’으로 번역하다 보니, 한자어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진다. 오히려 영어가 쉽다. 오이코노미아는 영어로 economy이다. 오이코노미아는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와 다스림을 의미하는 ‘노미아’가 합쳐져 생긴 말이다. 오이코노미아를 풀어서 말하면, 집을 다스리는 것이다. 집안 살림을 잘 매니지먼트(관리하는 것)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2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라고 말할 때 이것을 풀어보면, ‘하나님이 나한테 너희를 위하여 맡겨 주신 일(직무/사명)을 잘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맡겨 주신 일을 잘 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 즉 경륜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맡겨 주신 일 자체를 비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밀은 ‘뮈스테리온’을 번역한 말인데, 일정기간 숨겨져 있다가 계시에 의해서 드러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정기간 숨겨져 있다가 계시에 의해 드러난 바로 그 일을 잘 감당하다가 지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게 참 재미 있는 건데, 그가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가 그가 얼마나 그 일을 잘 감당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계시로 인하여 드러난 비밀(뮈스테리온)이 무엇인가?’이다. 이것은 이미 바울이 2장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것을 3장 6절에 요약해서 적어 놓았다. 공동번역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그 심오한 계획(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공동 상속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정말 좋은 소식(복음)이다. 공동 상속자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헬라어로 ‘함께’를 뜻하는 ‘쉰’과 몸을 뜻하는 ‘쏘마’가 결합된 말인데, 이것은 ‘같은 몸에 속한, 같은 몸에 속한 지체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같은 몸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그 둘을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서로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가 된다. 바울 당시에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혁명적인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계시였다. 바울에게 이러한 계시가 알려지기 전까지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이 계시가 알려지고 난 뒤에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러한 비밀을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계시로 알려지는 하나님의 비밀(뮈스테리온)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받은 사람은 그것을 불가항력적으로 ‘믿음으로’ 밖에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무엇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오해한다. 믿음이 인간의 의지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인간의 의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것,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전달되면 인간의 의지는 온데 간데없어지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것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로 받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순종과 감사와 찬양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마리아(the Virgin Mary)이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전한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28-31).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뮈스테리온(비밀)을 계시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뮈스테리온이 계시로 임하면,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뿐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그리고 이어지는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와 더불어 나오는 것이 마리아 찬가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이렇게 순종과 감사와 찬양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믿음의 가치를 잘 모를 뿐더러 굉장히 낯설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을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것이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든지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좋다. 그 누구도 나의 의지와 반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롭다. 우리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 너무 젖어 있다 보니, 자유와 은혜를 구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 마저도 자신의 자유로, 자신의 의지로 받을지 안 받을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이만한 믿음’을 보기 힘든 것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의지(믿음)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음을 개인의 의지와 연결시키는 매우 근대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라고 할 때, 우리는 여기서도 믿음을 그 사람의 의지라고 잘못 해석한다. 우리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네가 그렇게 인정하니, 너의 그 의지 덕분에 구원받는 거야’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우리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에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와의 만남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고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믿음(신앙)으로 밖에 그 사건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반응하는 믿음인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결국, 은혜와 믿음은 한 켤레의 구두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인간의 믿음을 이끌어 낸다. 다른 말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밖에는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로 또는 다른 것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하자면, 믿음은 굉장히 수동적인 개념이다. 그냥 수동이 아니라, 신적 수동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은혜가 initiative(우선적으로 촉발)해서 생겨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은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난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마태복음은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가만히 끊고자’했다. 즉, 파혼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의 사자가 꿈 속에 나타나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0-21).

 

이때 요셉이 취한 것은 믿음이다. 그냥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주의 사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 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온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고 아들을 낳자 그 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처럼 믿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임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마치 이런 것이다. 바닷가에 있다가 거대한 쓰나미를 맞닥뜨리면, 거기서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쓰나미에 불가항력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란 그런 것이다.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믿음 외에 없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사랑은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다. 쓰나미처럼 임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은혜(하나님의 사랑)는 믿음(인간의 사랑)으로만 받을 수 있다.

 

에베소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났을 때 (“그 심오한 계획(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공동 상속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가 생겨났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한 몸에 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몸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렇게 교회는 인간의 의지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불가항력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에베소교회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서로의 적대감(이질감)을 내려놓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한 몸, 즉 교회가 되었다. 이제 에베소교회는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을 동일하게 전하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바울은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10절).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고 나니까, 거기에 교회가 생겨났다. 그리고 복음으로 구원받고 서로 화해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전달할 사명을 가진다.

 

이 교회를 보라! 이것은 내가 니체의 책 <이 사람을 보라!>를 따라서 정해 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원어의 제목은 ‘ecce homo 에케 호모’인데, 이것은 니체가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가져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쓴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어렵기로 유명한데, 그렇다 보니 지금도 니체의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 읽고나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니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니체는 수많은 책을 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에 별로 큰 수익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이 그동안 쓴 책에 대한 해설책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을 보라!>이다. 그의 마지막 책이지만, 니체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보시오 이 사람이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이 책은 크게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마다 붙은 제목이 매우 독특하다. 첫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현명한지”이고, 두 번째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영리한지”이다. 세 번째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좋은 책들을 쓰는지”이고, 마지막 챕터는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이다. 앞의 세 챕터의 제목 자체도 특이하지만, 네 번째 챕터도 특이한데, 거기에 속한 두 개의 장은 각각 ‘전쟁 선언’, 그리고 ‘망치가 말하다’다. 그런데 제목만 있을 뿐 내용이 없다.

 

<이 사람을 보라!>의 각 챕터에 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랬다. 현명하고 영리한 자가 쓴 좋은 책이니, 사람들이 많이 보고 뭔가 깨달음을 얻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책을 <이 사람을 보라!>로 정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교회를 보라!>로 외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담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지혜를 세상에 알려야 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로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히 성경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다른 집단도 성경을 교회처럼 전투적으로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전투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거기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 우리들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으로 그 은혜를 불가항력적으로 받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사명을 가지게 된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사도 바울처럼 사명을 감당하다 감옥에 갇혀도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그렇게 감옥에 갇힌 것을 자신이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증거로 삼는다.

 

성경인 에베소서를 연구하고 묵상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이 교회를 보라!>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여기서 ‘이 교회’는 지역교회라기 보다 보편적인 교회를 말한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좀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왜 요즘 우리 교회들은 세상을 향하여 <이 교회를 보라!>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에서 길게 설명한 것처럼, 믿음을 ‘자유로, 자신의 의지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믿음을 자유의지와 혼동을 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계시로 드러났을 때 우리가 그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꾸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걸러내려고 하고, 그렇다보니, 결국 우리의 삶 속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감사와 찬양이 없기 때문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말로 해서, 요즘 우리는 현저하게 하나님의 지혜의 ‘보물창고’인, 하나님의 비밀의 ‘보물창고’인,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창고’인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데 엄청 게을러졌을 뿐만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맞닥뜨리는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불가항력적인 믿음의 고백을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믿음의 신앙생활, 즉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이기적이고 미약한 자유와 의지에 근거한, 매우 세속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간절히 바라기는,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입한 자유와 의지를 겸손히 내려놓고, 진정 믿음으로 밖에는 반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될 때, 교회는 다시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이 교회를 보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같다. 우리, 그러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 위하여, 함께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임하기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믿음으로 응답하자.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찰 뿐 아니라, 삶의 의미가 넘쳐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 이러한 교회 공동체, 얼마나 행복한가. <이 교회를 보라!>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그날까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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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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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6. 18:30

십자가와 화해와 평화

(에베소서 2:11-22)

 

 

이방인

 

나는 누군가에게 이방인이다

아니 나는 모두에게 이방인이다

저녁거리,

그 쓸쓸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노을로

고개를 돌리는 건

여기에서는 불경한 짓이다

그 너머 있는

무지개 마을을 상상하는 건

여기에서는 교수형감이다

이들에게 어제는 먼 미래와 같고

먼 미래는 태초와 같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마음조차

괴로운 상상인 것은

이들에게 내일은

아직 경험되지 못한

감각의 바깥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석양에 기울어지는 그림자만

나를 바싹 뒤쫓았을 뿐,

내가 거리를 돌며 본 건

옛날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오싹한 느낌,

그들은 모두 예전에

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이방인이다

 

(장준식 作)

 

위의 시에서 나는 이방인이다. 내가 이방인인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죽은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본 일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곳에서 나는 얼마나 이방인인가. 죽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의 존재는 낯선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본문은 우리의 존재를 굉장히 낯설게 만든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 무할례자들. 여기서 무할례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깊은 차원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라는 뜻은 구원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라는 뜻이다. 마치 위의 시에서 ‘나(시적 자아)’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본문에서 우리는 구원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이방인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채 이 세상에서 희망도, 하나님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12/공동번역개정판)

 

내가 언젠가 한 번 밝힌 적이 있는데, 미국 와서 가장 힘든 상황 중 하나는 내가 여기에서 ‘people of color(유색인종)’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유색인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한국인이고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나는 유색인종이라고 불린다. 이는 철저하게 백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이다. 이처럼, 본문에서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접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에베소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때만 해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한국인들은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중화민국/세상의 중심인 나라)과 부자(父子)의 나라, 또는 형제의 나라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방인은 아니었다. 우리 한국인들처럼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예로부터 우리는 중국 이외의 나라들은 모두 ‘오랑캐’로 불렀다. 일본은 왜놈이라고 불렀다. 중국과 한국 이외의 나라들에게 ‘놈’자를 붙였다. 그러다 최근에는 중국조차도 ‘놈’자를 붙여서 부른다. ‘중국놈’.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는 갑자기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밀려난 정도가 아니라,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무할례자, 즉 ‘이방인’으로 불린다.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에베소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굉장히 안심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즉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엡 2:13). 이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는 분에게 관심을 돌리기에 충분하다. 만약 우리가 신약성경, 그 중에 에베소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복음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서를 열심히 읽어볼 것이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그가 흘린 피는 도대체 무슨 효력이 있길래 구원에서 멀리 있던 이방인인 우리들을 이제 하나님과 가까운 존재로, 즉 구원받은 존재로 만드는가? 그의 피흘림, 즉 그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죽음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죽음은 왜 여느 사람들의 죽음과 다른 것일까? 그냥 일반 사람들의 죽음은 그냥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것일 뿐인데,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죽음인 것인가?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신약학자 중 한명으로 불리는 루크 티모시 존슨(Luke Timothy Johnson)은 그의 책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The Real Jesus)>에서 이런 말을 했다. “복음서의 근본적인 초점은 예수의 이적이나 그분의 지혜로운 말씀이 아니다. 복음서의 공통된 초점은 그분의 삶과 죽음의 성격에 맞춰져 있다. 모든 복음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동일한 본보기를 보여준다. 또한 네 복음서 모두는 제자도란 곧 그런 메시아적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서는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특정한 교리를 배우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신 바로 그 본보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Johnson 1996).

 

여기서 그분의 삶과 죽음의 성격이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내어줌”을 의미한다.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자기를 내어주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엡 2:14-15a).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화해사건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화해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친구랑 싸운 뒤 화해하는 것, 또는 부부싸움 뒤에 화해하는 것 등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싸움을 많이 하고 산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싸움은 부부싸움이다. 싸움 뒤에는 평화가 없다. 부부사이에 담이 생긴다. 그런데 그 담이라는 게 아주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담이 쌓여 있었는지 모르게 무너지고, 그리고 아주 간단한 사과 한마디로 그 담은 쉽게 무너진다. 이처럼 화해는 좋은 것이다.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적 싸움을 경험한다. 국가 간의 싸움이 발생하면 평화가 없다. 그래서 실제로 국경에 담을 쌓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담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거나, 그저 관광지로 바뀌고 만다. 국가 간의 싸움도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쌓인 담은 부부싸움에서 새긴 담이나 국가적 싸움에서 생긴 담과는 질적으로 다른 담이다. 그것이 왜 질적으로 다른 담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성경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계시는 한 특별한 사람, 즉 선택된 사람에게 드러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그 계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전해져서, 한 민족, 한 나라에게 계시된 것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그 한 민족, 그 한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알고 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만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고, 그를 축복의 통로하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서부터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으로 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닌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 나셨는지 궁금해한다. 하나님이라면 굳이 유대인이 아니라 한국인을 사용하셔서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도 있을 텐데, 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셔야 했는가? 바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인류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이 하나님 계시의 보편성으로 전환되는 국면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계시가 이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비하신 분이지만, 즉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지만, 그리고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시는 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이 눈에 보이도록,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셨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의 몸(자기의 전체)을 내어놓으셨기 대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유대인(할례 받은 자 / 하나님의 계시를 담지하고 있던 자)과 이방인(할례 받지 않은 자 /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던 자) 사이에 쌓여 있던 담은 부부싸움으로 생긴 담이나 국가간 싸움으로 생긴 담처럼,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담이 아니라, 저 하늘에 속한 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담은 오직 하나님만 허무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담을 허무셨다.

 

이것(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담이 허물어졌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을 가져다 준다. 자칫 잘못하다간, 유대인들이 갑자기, 오히려 이방인이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을 가진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주 보편적인 이름으로 전환을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라고 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갖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은 나라와 민족을 초월한 매우 보편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클레시아/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본문에서 처음에는 ‘이방인’으로 불린 것을 억울해할 필요 없는 상황을 가져오는 ‘복음’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이제 이 세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이 이룬 화해 덕분이다. 이제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인류를 이룬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습니다”(엡 2:15-16).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할례자, 이방인, 구원에서 멀리 있던 자에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엡 2:19).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나는 더 이상 소외된 이방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즉 구원받는 자가 되었다는 선포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이방인이라 부르랴. 아무도 이제 그런 권리를 가진 사람/나라는 없다.

 

이것은 요즘 교회를, 요즘 그리스도인을 부끄럽게 만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요즘 교회에서는 이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것 같고,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을 보편적 복음으로 전환시키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온데 간데없고, 요즘 교회는,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본인들이 이방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화해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독점하고 있는 양 새로운 유대인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일이다.

 

성경은 보편적 복음을 통해 탄생한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키는 다음과 같이 은유적 표현을 쓴다. 1) 그리스도의 몸(자기를 내어주는 존재 / 구원이 발생하도록 하는 존재), 2) 하나님의 성전(구별된 존재 / 존귀한 존재), 3) 그리스도의 신부(사랑 받는 존재), 4) 새로운 인류(다르게 사는 존재 / 모험적 존재 / 세상의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존재). 자기를 내어주어야 할 존재가 다른 이들의 몸(삶)을 착취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존귀한 존재가 비천한 존재로 전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르게, 모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존재가 이 세상의 일에 몰두하느라 삶을 낭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화해사역을 통해 평화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 그러니, 어디에서든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되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눈으로 본 자 답게,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모든 이들이 눈으로 우리들처럼 구원을 보도록, 자기를 내어주고, 존귀한 자로, 사랑하며, 무엇보다 모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자가 되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복된 삶인가. 이런 삶을 얼마나 흥미진진한 삶인가.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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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28. 11:41

죄와 은혜와 구원

(에베소서 2:1-10)

 

(요즘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 기독교 신앙(우리의 신앙)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데, 첫번째 시간에는 ‘공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두번째 시간에는 ‘성령을 통하여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의 말씀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되살려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성경과 우리 시대는 2천년이라는 간격이 있는데, 그 간격을 메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발견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쉬운 작업은 아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제목’을 정하는 일은 늘 어려운 과제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 ‘죄와 은혜와 구원’은 정말 무거운 제목이다. 이는 단순히 ‘죄와 은혜와 구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죄와 은혜와 구원’이 오늘 우리가 사는 21세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인간론(인간이란 무엇인가)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구원론(구원이란 무엇인가)기독교 윤리(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종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과히, 기독교 신앙의 종합선물세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인문학 공부 열풍이 불었는데, 사실 인문학이란 단순한 ‘교양쌓기’가 아니라 ‘인간공부’이다. 인문학은 그 끝에서 ‘종교’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종교의 가르침을 제외시키면서 인간이해를 깊이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인간론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준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인다. 본문에서도 보면, 인간이 처한 상태는 매우 비참해 보인다. 다음 한 마디가 인간이 처한 상태를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본질상’이라는 말은 헬라어 ‘휘시스’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태생으로 결정된 조건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을 해석하면, 마치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원죄(original sin)’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매우 큰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진노를 받게 되는 존재는 마치 아무렇게나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처럼, 그 사람의 인격이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허가증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네 죄를 고백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어!” 이는 마치 구원이란 스스로 인간성을 짓밟는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신의 은총인 것처럼, 구원을 호도한다. 성경의 언어가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못 알아차리고, 그냥 문자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실수에 얼마나 많이 희생당했는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진노의 자녀’로’, 마치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그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진다. “내 인생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해. 나는 진노의 자녀이니까.” 그러면서 내가 당하는 고통에 한 마디 저항도 못하고, 그 고통을 순응적으로 감내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과연, 성경의 언어는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기력하게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말면, 우리는 우리에게 임하는 고통의 이유를 모두 우리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고 만다. 이런 시가 있다.

 

다리 위의 아가씨

 

우리 아버지는 왜 부자가 아니고

우리 엄마는 왜 미녀가 아니었을까?

 

저녁 강물이 어룽어룽

밀물져 돌아온다.

 

(황인숙의 시집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에 수록)

 

현대사회에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는 시이다. 어떤 차별을 당하는 아가씨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차별의 이유를 부모님에게서 찾는다. 참 슬픈 장면이다. 부자 아빠를 두지 못한, 예쁘지 못한 엄마를 둔 이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라, 이 아가씨를 차별하는 사회(사람들)의 잘못인데, 아가씨는 그 고통의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의사들이, 또는 과학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가? “unknow(이유를 알 수 없다)”이다. 우리는 이유 없이 병에 걸리고, 이유 없이 사고를 당하고, 이유 없이 죽는다. 우리는 살면서 이유 없이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겪는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람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내 죄 때문에’이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내 삶이 이리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어떠한 고통이 발생하면, 그 고통이 주는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깊은 죄책감 때문에 더 힘들어 한다.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을 고르라고 하면, 단연 <욥기>가 뽑힐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장 심오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인간 실존과 관련해서,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가장 고민하는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심오한 이야기는 욥기가 풀어내고 있다. 욥은 남부러울 것없이 부자로 살았다. 부자는 단순히 물질이 많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풍요롭고 건강했다는 뜻이다. 왜 욥은 그렇게 부자로 살았을까? 그가 의인이어서? 의인이어서 보상으로 부자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욥이 부자로 산 것은 그저 ‘은혜’이다. 까닭이 없다.

 

부자로 살던 욥은 하루 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된다.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지 못한, 비참한 상태에 처해졌다는 뜻이다. 욥은 왜 고통 당하고 있는가?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통해서 전개되는, 욥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통의 이유를 죄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친구들의 논리를 거부한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욥은 왜 고통을 받는가? 답은 “까닭 없이”이다. 그래서 욥기는 고통 또한 “까닭 없이” 주어진 “은혜”라고 말한다. 우리는 은혜를 대개 좋은 일이 발생했을 때만 쓴다. 까닭 없이 좋은 일을 겪었을 때 우리는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기는 좋은 일만 ‘은혜’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일도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가 가진 기본적인 뜻은 ‘까닭 없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욥은 말한다. 자신에게 까닭 없이 고통이 왔고, 나중에 욥기서 42장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또한, ‘까닭 없이’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 그는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다(은혜를 입는다).

 

원인 모르게 우리의 삶은 아프다. 까닭 없이 아프다. 지난 목요일(6월 24일 새벽 1시 30분쯤)에 플로리다에 있는 한 콘도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됐다. 샌드위치처럼 건물이 내려앉아 구조작업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다치거나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까닭 없이 고통을 겪는다. 원인 모르게 우리의 삶이 아프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인 모를 구원 아니겠는가. 까닭 없는 구원 아니겠는가.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고통도 은혜고, 구원도 은혜다. 이것은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심오한 진리이다.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바로, 보이지 않는(영이신)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성육신 하신) 은혜’의 징표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구원을 눈으로 본다. 누가복음은 노인 시므온의 입술을 통해서 그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구원론. 기독교의 구원론은 아주 신비한데, 구원이 눈에 보인다(구원을 우리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눈으로 보게끔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한다. 이게 참 이상한 거다. 돈이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은 있어도 예수가 곧 구원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보면서도! 기독교의 구원론은 한 가지 단어로 설명된다. 은혜(카리스)”. 은혜’는 ‘감동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까닭 없는”이라는 뜻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은 까닭이 없다. 즉, 은혜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해서 우리가 고통에 처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까닭 없이, 이유 없이, 은혜로 우리의 삶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슨 착한 일을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좋은 일을 해서 구원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이유 없이 은혜로 우리의 삶에 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정리): 기독교의 인간론. 우리는 까닭 없이 고통 당한다. 우리는 은혜로 고통 당한다. 기독교의 기독론. 구원이 눈에 보이게 임했다(우리의 감각이 알아볼 수 있게 임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게 임한 구원을 못 알아본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눈에 보이게 임한 구원을 눈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론. 우리는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믿는 자들을 어떠한 특별한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 그것을 기독교 윤리라고 부른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삶이 바로 ‘포이에마의 삶’, 즉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삶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절).

 

기독교 윤리. ‘포이에마’의 삶. 그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모호한 것은 ‘무엇이 선한 일(선한 삶)인가’이다.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 <Dogville>을 예로 들어보려 한다. 니콜 키드먼 주연인 이 영화는 매우 독특한 배경과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일단 영화의 배경은 로키산맥의 어느 시골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실제로 로키산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트장처럼 꾸며져 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그레이스Grace/니콜 키드먼)’가 마피아에게 쫓기다 도착한다. 그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복장과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피아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라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그녀를 처음 발견한 톰(폴 베타니)은 그녀를 마을로 데리고 와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주자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외부인이었던 그레이스에게 적대감을 갖고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마을 공동체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레이스와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그레이스를 찾는 현상금 수배 전단이 붙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전복된다. 그녀가 현상금이 붙은 ‘죄인’으로 인식되자,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녀를 부당하게 착취하기 시작한다. 일감을 몰아주어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평소에 상냥하게 굴던 마을 남자들은 그녀를 겁탈하기 시작했고, 탈출을 도와줄 거라 믿었던 사람은 배신하고 그녀를 겁탈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누명을 씌워 그녀의 목에 쇠사슬을 감게 만든다.

 

그런데 사실, 그레이스는 어떤 죄를 지어서 현상금 수배가 붙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현상금 수배 전단을 붙인 마피아 집단의 두목의 딸이었다. 아빠와 딸 사이에 있었던 갈등 때문에 마피아 두목인 아빠로부터 도망친 딸을 적극적으로 찾기 위해 아빠는 현상금 수배 전단을 배포한 것이었다. 마피아 아빠는 부하들과 함께 딸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레이스에게 저지른 만행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그레이스에게 못된 만행을 저지른 마을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놓아두고 마피아 두목 아빠와 그의 딸이자 주인공 그레이스 간의 대화와 해결 방식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는 지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라.)

 

까닭 없이,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눈에 보이는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포이에마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Dogville>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선한 일’이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복장과 외모를 하고 있던 그레이스에게 처음에 ‘선’을 베풀었다. 그들은 그레이스를 인격적으로 대했으며, 선하게 대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레이스에 대한 현상금 수배 전단이 붙은 후에 발생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레이스를 ‘죄인’으로 인식한 순간, 그녀를 더 이상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선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레이스에게 각종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다고 하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묻는다.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너는 사람들에게 까닭 없이, 은혜를 베풀 수 있는가?” 죄는 상태방의 부패함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부패함을 드러낸다. 상대방이 죄인(약자)이라고 생각되고 인식되면, 바로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죄인 취급하며,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 우리는 갑자기 그 사람보다 의로운 사람이 된다. 우월한 인간이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유린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갑질을 마구 해댄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은 그것과 사실 정반대의 이야기다. 우리는 죄인을 함부로 정죄할 수 없다. 약자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한다. 견디지 못한다. 죄인을 정죄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그의 생명을 좌지우지해야만 속이 시원하다. 약자에게 갑질을 해야 시원해 한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정말로 부패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는 죄인을 견딜 수 있는가? 우리는 약자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즉, 그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심지어 그를 나보다 귀한 존재로 섬길 수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사실 의로워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 부패한 사람,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상태인데 하나님의 은혜(까닭 없이)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죄인을 보면, 약자를 보면(죄인이라는 말보다, 약자라는 말이 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내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처럼 돌변한다. 내가 마치 그보다 우월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정죄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그를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 약자에게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까닭 없이)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바로 그때 증명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약자를 우리와 동등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섬겨 주셨듯이 그들을 오히려 섬겨야 할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포이에마(하나님의 작품)’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 아니겠는가.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운동’을 보면서, 사회적 약자와 배려는 없고 그들에 대한 정죄만 있는 그들의 기독교는 어떤 기독교인가, 좀 답답하고 궁금하다.)

 

우리는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죄와 은혜와 구원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무엇보다 “까닭 없음(은혜)”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에 까닭 없이 닥치는 고통(까닭 없이 처해지는 삶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까닭 없이 임하는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살면서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까닭 없이 구원받았으니,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이 죄인이라 할지라도, 더군다나 그 사람이 사회적 약자라면 우리는 온마음을 다해 ‘까닭 없이’ 그들을 섬겨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까닭 없이 받은 구원을 값지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갑자기 의로운 자로 돌변하여 사회적 약자를 정죄하고 착취하는 악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세심하고 깊은 묵상이 수행되지 않으면,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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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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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21. 17:01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에베소서 1:15-23)

 

바울에게 에베소교회는 마음이 많이 가는 교회였을 것이다. 그곳에 두란노 서원을 세워 두 해 동안 머물며 많은 이들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가르쳤던 곳이기 때문이다. 정성을 많이 쏟은 만큼 애정이 많이 가는 법이다. 에베소교회를 떠나온 바울은 에베소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곳에 머물며 함께 나누었던 복음에 대해서 다시 상기시키며 그들을 축복하고 있다. 특별히,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행하고 있는 것을 기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참 흐뭇한 장면이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15-16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예수를 주님(퀴리오스/로마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주님이다는 고백)으로 믿는 믿음과,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 믿음은 언제나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주 예수가 믿음의 근거다. 주 예수 안에 근거를 둔 믿음은 사랑을 불러 일으킨다. 믿음은 수직적이고, 사랑은 수평적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감격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함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한다. 이웃을 향하여 선하고 좋은 마음을 갖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그것은 믿음 있는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는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 머물며 그들에게 전했던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헬라어 원문에서 15절에서부터 23절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기도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셔서

그들의 마음의 눈들이 밝아지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길성남, 117쪽)

 

이 기도문에서 우리는 매우 낯선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는 이야기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을 받아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길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마음의 눈’이라는 말은 참 생소한 말이다. 우리는 그저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뿐이기 때문이다. 시력이 흐려지면 우리는 더 잘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거나, 또는 라식/라섹 수술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는 생각을 한다. 그 이상, 아니면 이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익숙해 있다.

 

헬라어에서 ‘마음(누스)’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본문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간의 마음은 굉장히 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 인간 존재의 어느 부위보다 ‘마음’이라는 곳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인간 존재 안에 있는 굉장히 신비스러운 공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그리고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세 가지 영적인 진리를 알게 된다. 그것이 바울의 기도가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이다.

 

기도를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알게 되는 세 가지 영적 진리는 다음과 같다.

 

1)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는 것

2) 성도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아는 것

3)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 것

 

2세대 종교개혁자 칼뱅은 에베소서를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스승인 성령이 우리를 가르쳐 주기 전에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무지와 어리석은 것뿐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밀의 계시로 알려 주실 때 비로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다.”(칼뱅) 그러면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세 가지 진리, 즉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씩 풀어가보자.

 

첫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 부르심의 소망은 다음 세 가지를 포함한다.

ㅡ 나는 하늘 나라에 기업이 있어. 거기에 상속재산이 있어. (나 실은 부자야.)

ㅡ 나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신부야. (신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태에 대한 비유다: 나는 주님께 사랑 무지하게 받는 존재야)

ㅡ 완전한 평화와 아름다움은 회복될 거야. (지금 세상이 이렇게 망가지고 볼품없지만,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산다.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소망 가운데 산다. 얼마나 멋진 소망인가!

 

둘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도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된다. 여기서 기업(클레로노미아)는 상속 재산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하늘 나라에 재산을 많이 쌓아두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를 넘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이었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 즉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의 존재가 그냥 볼품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인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되면 발생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것의 소유로 있는 것은 시시한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외적인 것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나는 구글 다녀. 나는 구글의 소유야. 나는 스탠퍼드 나왔어. 나는 스탠퍼드 소유야.’ 내가 속한 어느 것을 통해 나의 존재를 뽐낸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땅의 그런 것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처럼 여겨진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 3:7-9a)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기업이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영광스러운 존재야.” 이미 하나님의 기억이 되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 사람은 주님 나라를 위해 자기 삶을 누추한 곳에 놓아도 개의치 않는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고백하듯이,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알게 된다. 그 말은 겉 형편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자신의 겉 형편으로 인하여 일희일비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기업이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영광스러운 존재야”라는 신앙고백 속에서 존재를 확인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형편을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진리이다.

 

그렇게 살았던 훌륭한 신앙의 선배가 있다. 최근 이준익 감독이 영화 <자산어보>를 통해서 새롭게 조명된 인물, 바로 정약전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더 반가운 이유는 내가 <자산어보>에 대한 글을 쓴 뒤 나온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나의 글과 영화 <자산어보>가 겹치게 되었는데,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본 영화 <자산어보>는 참 따스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삼형제도 신유박해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이 박해로 인하여 정약종은 순교를 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어쩔 수 없는 ‘배교’로 인하여 목숨을 건지지만,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이준익 감독이 훌륭한 것은 순교자 정약종이나, 실학자 정약용에 비해 덜 유명한 정약전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눈과 마음을 이끈다는 것이다. (영화 <동주>에서도 송몽규 조명 / 윤동주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인 인물). 정약용은 체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지배계급이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들을 돌보도록 “목민심서”를 통해 지배계급을 다독이는 방법을 택하지만, 정약전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그는 아예 민중들이 스스로 깨어나 빈곤에서 탈피해 자립하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실용 서적 <자산어보>를 집필한다. 정약전(설경구 분)은 그의 제자이자 <자산어보>의 공동저자 격인 창대(변요한 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않는 자산(흑산도를 일컫는 말)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즉, 정약전 자신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양반이라는 신분으로 인하여 존재감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존재의식을 통하여 존재감을 찾았기에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멋진 인생 아닌가!

 

셋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하여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여 잃게 말한다. “그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절). 여기에 쓰이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는 네 개이다. 1) 힘(이스퀴스): 힘을 행사하는 것, 2) 위력(크라토스): 가는 길 앞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하는 힘, 3) 역사하심(에네르게이아): 내재된 힘, 4) 능력(뒤나미스):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는 능력.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힘이 무한히 크다는 것 강조하는 말이다.

 

에베소서를 주석한 성서학자 부르스(Frederick Fyvie Bruce)는 이런 말을 했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다.” 하나님의 능력은 새생명을 주는 능력이며 새 창조의 능력이다. 우리가 지금 팬데믹 때문에 여러 가지 멈추어 섰다. 불안이 늘어서 정신과 치료 약 소비가 폭등했다. 많은 이들이 소멸할까봐 망할까봐 전전긍긍하는 하며 산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사실, 교회가 타격이 가장 큰 집단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힘이 무한히 크다는 것,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 것, 믿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2020년 정말 멋지게 출발했다. (기억이 희미하겠지만) 교회가 아주 새롭게 출발했다. 역사 청산(아픔을 덜어내고) / 빚 청산(재정적 부담을 덜어내고), 그리고, 세화비전 2020을 향해서 출발했다. 그런데, 그게 딱 멈춰 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불멸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교회는 더욱더 그러하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장엄한 언어로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는 부활과 승귀(승천)을 통해 하나님께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은 주님이시다. 그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인 교회는 그 생명력이 무한하고 충만하다. 그 어느 것도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기운을 회복해 나간다면, 교회는 다시 활력을 찾아 주님의 몸으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세 가지의 진리! 요한복음이 선포하고 있듯이,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우리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사는 이유는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그렇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여 안목의 정욕을 채우도록 혈안이지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눈이 밝아져 진리 안에 거한다.

 

1)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는 것

ㅡ 나는 하늘 나라에 기업이 있어. 거기에 상속재산이 있어. (나 실은 부자야.)

ㅡ 나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신부야. (나는 주님께 사랑 무지하게 받는 존재야)

ㅡ 완전한 평화와 아름다움은 회복될 거야. (지금 세상이 이렇게 망가지고 볼품없지만,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산다.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므로!)

 

2) 성도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아는 것
ㅡ “나는 하나님의 기업이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영광스러운 존재야.” 겉 형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할 줄 아는 사람!

 

3)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 것

ㅡ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능력, 새생명을 주시고, 새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삶.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을 거라는 믿음. 모든 것이 주 안에서 회복되고 형통할 거라는 희망.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이 진리들 안에서 멋진 인생 사는 하나님 나라의 소유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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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13. 19:03

누가 공인(公人/public figure)인가?

(에베소서 1:1-14)

 

나는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얼굴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얼굴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인기인’이지 ‘공인’이 아니다. 공인이란 공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널리 인기가 있을 뿐이지 그들이 하는 일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사적인 일이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이지, 대중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면 누가 공인인가? 연예인이 공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공무원을 공인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공무원을 공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무원은 국가라는 제한된 차원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뿐이지, 존재의 보편적 차원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공인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공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말씀은 왜 그리스도인이 공인인지, 그리고 공인이란 무엇인지, 공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公人)’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자기 인식이 꼭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이 되는 것이라는 자기 인식이 흐려지면,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익집단(이익집단/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집단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으로 추락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있는 바울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것은 바울의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우리는 바울의 이름 논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은 바울의 이야기를 은혜롭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을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바울은 히브리 사람이다. 히브리 사람으로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인으로서 바울은 로마식 이름(Roman surname)인 ‘바울(파울로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고정해서 사용한 이유는 그가 예수의 부르심으로 인해 ‘작은 자’가 되어서 겸손의 표현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사명 때문인데, 본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이름인 ‘바울’을 사용한 것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삶을 공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그가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선포였던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지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동안에 그와 함께 있었고, 또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가리킨다(행 1:21-22; 고전 15:4-5).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다른 열 두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동행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바울의 등장은 성령강림절 후, 예수님의 승천 후,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해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 칭한 것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때문에 그렇고, 무엇보다도, 그 체험으로 인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즉, 자신의 삶이 사사로운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공적인 삶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사도’로 부른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공인’이다. 그는 더 이상 개인의 사사로운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의 인생, 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행동이나, 그가 하는 말은 사사로운 개인의 말, 행동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적인 말, 공적인 행동이 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안에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공적으로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라는 특수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삶이 공적인 삶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바울의 이야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편지의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을 표현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바울이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부르는지 보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헬라어 원문에는 ‘편지하노니’라는 말이 없다. 이것이 그냥 편지이기 때문에, ‘편지하노니’라는 말을 덧붙인 것 뿐이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성도’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하기오이/saints)’라는 뜻이다. ‘거룩한’이라는 뜻은 도덕적으로 성결하다는 뜻이 아니다. ‘거룩한’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거룩한 무리’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무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가 거룩한 무리라고 불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때문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과 관련된 용어이고,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인간인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사사로운 개인의 삶을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생득적으로 ‘공인’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에 ‘관계(relationship)’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적 용어, 관계적 삶, 공적인 삶을 낯설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인의 삶, 사사로운 삶’을 강조하고, 그것이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어 놓고 고립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공공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 알고 그것을 강화시키지, 자기의 삶을 공적인 삶으로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삶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다니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발생하고 있는 슬픈 현상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을 ‘성도’라고 부르는 동시에,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신실한 자들’이라고 번역된 ‘피스토이’라는 헬라어는 수동적 개념으로 ‘신뢰할 만한’이라는 뜻도 있고, 능동적 개념으로 ‘신뢰하는’이라는 뜻도 있다. 수동적인 개념을 생각해 보면, 성도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거룩한 무리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서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교회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러한 신뢰 없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겠는가. “나는 여러분을 신뢰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우리는 서로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지난 달에 한국갤럽에서 한국종교에 대하여 여론 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17%, 불교 인구는 16%, 가톨릭 인구는 6%로 집계됐다. 무종교인은 60%로, 한국갤럽이 조사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무종교인 중 82%가 말하기를 ‘종교는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호감가는 종교는 불교가 20%, 가톨릭이 16%, 그리고 개신교가 6%였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이 ‘공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스스로를 ‘공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자들(피스토이)의 능동적 의미는 ‘신뢰하는’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냥 신실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믿음은 관계적 용어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삶을 사사롭게 개인적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관계적 삶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계적인 삶, 공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은혜와 평강(grace and peace)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 ‘은혜(카리스)’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혜가 주어지면, 우리에게 평화가 임한다.

 

성서학자들은 개정개역에서 ‘평강’이라고 번역된 우리말을 평화(에이레네)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강’은 개인적이며 내적인 평안을 말하는 것인데, 히브리어의 ‘샬롬’을 표현하고 있는 헬라어의 ‘에이레네’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평안을 넘어 관계적 의미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적 평안을 나타내는 우리말은 ‘평화’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는 관계적 평화를 이룬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너와 나 사이의 관계적 평안’이 임한다. 그렇지 않은가? 값없이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값없이 베풀지 않겠는가? 그렇게 서로 값없이 베푸는 관계에는 텐션(tension/긴장감)이 흐르지 않고, 평안이 흐르는 법이다.

 

그러나, 이 은혜와 평화의 가치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형편없이 무너져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의 열매로 생각하려 한다. 열심히 일해서 내가 모은 재산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간 것이고,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것이고 등…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자기의 성취에 근거한 것이고, 그래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야 사랑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그렇다. 자녀가 부모의 자랑이 되어야 자녀는 사랑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성장하면서 상처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차별비교경쟁 속에서 서로 간의 관계적 평화를 잃어간다.

 

이와 달리, 거룩한 삶, 신실한 삶, 공인으로서의 삶(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한 삶일까? 그것은 3절 이하에 등장하고 있는 ‘영광송’이 가르쳐 주고 있다. 바울은 편지의 시작을 ‘영광송’으로 하고 있다. 공인으로서의 삶은 영광송(doxology)을 드리는 것이다. 영광송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3-6절은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 선택과 예정(계획하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고, 7-12절은 성자 하나님이 하신 일, 구속(redemption)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고, 13-14절은 성령 하나님이 하신 일, 인치심과 보증(성령 하나님이 성도들 안에 내주하신다: 구원의 완성과 풍성한 삶에 대한 보증)에 대하여 영광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이제 공인으로서의 삶이 된 것은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에 관계적으로 엮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이제 개인적인 사사로운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간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제 더 이상 사사로운 개인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영광송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일상의 언어가 모두 기능어로 전락하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을 지적하는 학자가 있다(<After Writing>, 캐서린 픽스톡). 우리 일상언어를 보면 서로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언어만을 쓸 뿐이다. 작업지시언어. 마치, 컴퓨터의 자판처럼 무엇인가를 기입하고 나서 엔터를 치면, 그것대로 실행하는, 기능어 말이다. “빨리와. 밥먹어. 공부해. 피아노쳐. 밥차려. 설거지해. 씻어. 문닫어. 불꺼. 컴퓨터 그만해. 운전해. 전화해. 예약해. 빨리자. 일어나. 등등등” 이런 기능어 외에 우리는 어떤 언어를 쓰고 사는가?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언어인가? 서로를 찬양하는 언어인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언어인가? 서로를 세워주는 언어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서로에게 쓰는 언어는 너무너무 기능적인 언어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제 ‘공인’으로서 기능어를 쓰지 않고 영광송(doxology)의 언어를 써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속에 은혜와 평화가 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그리스도인의 공적 삶이 너무도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 기능어만 사용하다 보니, 관계가 메말라 있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끼리 너무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사람은 자연을 착취하고, 자연은 사람에게 반격하여 해를 입힌다. 평화가 없고, 근심과 걱정과 절망과 한숨만 늘어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을 치유하라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누가 공인인가? 연예인이? 공무원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공인이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성취하신 구원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되고, 그 구원이 종말까지 보증되는 우리의 삶은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능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상처주고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워주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해를 입히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공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찬양하는 언어, 감사하는 언어, 세워주는 언어를 쓰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들로 인하여 생명이 더 풍성한 세상이 될 거라 믿는다. 공인으로서의 그 거룩한 삶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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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6. 19:01

자기로 살기

(사무엘상 8:1-9)
 

오늘 본문은 위로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다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1-3절).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가? 위로가 된다. 사무엘이 어떤 사람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이면서 사사이다.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다. 굉장한 영성과 굉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지도자 중의 지도자였다. 게다가, 그의 엄마는 어떠한가? 그렇게 유명한 엄마를 두는 게 쉽지 않다. ‘한나(Hannah 해나)’. 얼마나 유명한지, 그녀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여성의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사무엘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유명한지, 그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남성의 이름도 너무 많다. 너무 유명해서, 그의 이름은 ‘개’에게도 잘 붙여진다. 내가 기억하는 나 어릴 적 우리집 개의 이름도 사무엘이었다. ‘Sam/쌤.’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 한나의 손자와 사무엘의 아들답게 이름도 멋지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고, ‘아비야’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개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서 짓는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한나와 사무엘의 자손답게, 요엘과 아비야는 ‘요와 야’, 즉 여호와의 약자, 여호와의 이름을 담아낸 이름이다.

 

이런 면에서 요즘 우리가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아서 지었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서 이름을 짓는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곧 찬양이고 영광이었는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곧 꿈이고 욕망이다. 이름에 꿈과 욕망을 담기보다 신앙고백이 담기면 좋겠다.

 

위대한 할머니와 위대한 아버지를 둔 요엘과 아비야, 그리고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을 가진 요엘과 아비야, 그런데 이들은 아버지처럼 훌륭한 제사장과 사사가 되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버지에 한참 미치지 못한 아들들로 역사에 기록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아무리 위대한 할머니라도, 아무리 위대한 아버지라도 그 자식들은 마음대로 못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자식 낳아서 기르는 것을 ‘자식 농사’라고 표현한 것 같다. 농사는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하늘이 제때 비와 햇볕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풍년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원래 농부들의 신앙이 깊은 것이다.

 

사무엘이 여러가지 면에서 스승 엘리 제사장보다 뛰어난 지도자였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함께 지냈다. 사무엘은 스승 엘리 제사장의 두 자녀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은 스승님보다 자식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나중에 자신의 자식들이 스승님의 자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 그때 비로소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위대한 사무엘이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도 자식 문제만은 어떻게 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몰라도 자식 문제만은 더욱더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패러디해서 자식에게 적용하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무릇 맡길 만한 것보다 더욱 자식을 주님께 맡기라.”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자식한테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모두, 맡길 만한 것보다 더욱 자식을 주님께 맡기라. 주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다.

 

사무엘의 두 아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이어서 장면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라마에 살고 있는 사무엘에게 찾아가 엄청난 요구를 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요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댄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5절). 이러한 요구를 하는 이유를 두 가지 대는데, 하나는,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는 달리 듬직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이유이다.

 

이들의 요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즉, 왕을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떼를 쓰며 표면적으로 댄 이유는 사무엘과 사무엘의 자식들 때문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겉으로는 사무엘의 연로함과 그의 두 아들의 부족한 지도력 때문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말에 들어 있었다. 즉, 그들은 나른 나라에 있는 ‘왕 제도’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무엘은 마음이 불편했다. 첫째,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말해서 빈정이 상했고, 둘째, ‘왕을 세워 달라는 것’ 자체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빈정상하고 속상할 때, 사무엘이 보인 반응이 참 은혜롭다. 그들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른 누구의 위로보다 하나님에게 위로 받을 때, 진정 마음에 평안이 오는 법이다. 빈정상하고 속상했던 사무엘도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위로를 받았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내를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절). 사무엘은 자신의 연로함과 자신의 자식들을 탓하며 왕을 세워 달라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으며 ‘이제 사람들이 나를 내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서운했을 그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들의 속내를 알게 되면서 위로 받는다.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사무엘을 내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사무엘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며 ‘모든 나라와 같이’라고 할 때 ‘모든 나라’는 주변국들이었다. 특별히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다섯개의 도시들(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이 연합해서 만든 블레셋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주변국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렸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원수처럼 굴었는데,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어놓으면 어김없이 와서 약탈해 갔다. 정말 못살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좀 더 자신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강력한 왕정 체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요구가 정당해 보인다. 누구든지, 안전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무엘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욕구, 즉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했다”는 문자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그것은 사무엘의 눈에 악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무엇이 악한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그 소임과 특권을 버리고, ‘다른 나라들처럼’ 되려고 한 것이 악한 것이다.

 

뉴스에서 중국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중국의 인구가 13억 정도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구가 너무나 많다 보니까, 1980년도부터 중국은 산아제한 정책(birth limits policy)를 강제해왔다. 그런데, 요즘 중국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많아 짐에 따라서 경제활동이 가능한 연령대의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하기에, 인구가 13억 정도되니까,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가 엄청 많을 거라고 짐작하는데, 13억 인구가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폐지하고, 노동 가능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은퇴 나이를 올리기로 했다는 기사였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가 씁쓸했다. 중국이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는 중국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중국이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는 중국 정부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굴기 정책’ 때문이다. 중국은 나라를 ‘성공적인/번영하는 소비 사회’와 ‘세계적인 기술 선두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입장에서 인구의 고령화나 노동인구의 감소는 그러한 정부의 정책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구가 망가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비사회’와 ‘무분별한 기술개발’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이 바로 그 지구를 멸망하게 하는 대열에 합류해서, ‘다른 나라들’처럼 되겠다고, 그래서 이 세상의 최고 강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아쉽다. 중국이 중국답지 못하고, 그저 다른 나라들, 그것도 지구를 망치는 나라들을 따라하겠다는 것 자체가 실망인 것이다. 만약 중국이 중국의 유서 깊은 유가나 도가, 또는 묵가의 사상에 따라, ‘소비사회’나 ‘기술사회’가 아닌 ‘덕의 사회’를 세워 나가겠다고 자신들의 길을 걸었다면, 이 세상의 판도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미 멸망해가는 다른 나라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을 추월하겠다고 하니, 지구가 망가지는 속도는 더 가팔라 질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필요한 나라가 아니다. 왕정 제도가 있더라도 ‘나른 나라들’처럼 왕정 제도를 두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선택받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세우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왕이신 하나님이 ‘이미’ 계시기에, 다른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두지 않아도 된다. 만약 이스라엘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자기들의 소임과 책임을 다했다면, 오히려 주변 나라들이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기어코 왕정 제도를 갖추었고, 왕이 있으면 그 왕을 통해서 더 안전한 나라, 더 번영하는 나라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열왕기상하의 말씀이 전해주고 있듯이, 바로 그 왕정 제도 때문에 망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자기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살려고 했다가,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도 ‘자기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살려고 하면, 나를 지키지 못하고 만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조에/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내어놓으시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생명)’를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이들처럼’ 살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우리에게 무슨 왕이 필요한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살면 된다. 자기로 살기,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이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사무엘이 다른 것은 다 주님께 맡겼는데, 자식 문제만큼은 주님께 맡기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있는가? 지금 내가 힘쓰고 애쓰는 바로 그것,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을 위해 걱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간구는 했지만, 그것 자체를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나라도, 민족도, 개인도 모두 자기로 못살고 누군가를 따라가려 한다. 부탄 같은 나라, 얼마나 멋진가? 그 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 왜? 다른 나라를 따라가려 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보라, 얼마나 힘든가? 다른 나라, 특히 미국을 따라가느라 모든 게 종속되어, 거기가 한국인지, 아니면 미국의 51번째 주인지 모를 정도로 나라 자체의 정체성이 위기를 겪고 있다. 요즘 개인들의 삶을 보라. 얼마나 다른 이들을 따라 사는가? 다른 이들과 동일한 의식주를 누리지 못하면 수치스러워 한다. 남을 따라 사느라, 남 신경 쓰느라, 자기로 살지 못해, 행복하지 못하다.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모든 면에서 자기로 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나라를 따라서’, ‘다른 사람을 따라서’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냥 ‘자기로 살면’ 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사는’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는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지금 내가 힘쓰고 애쓰는 바로 그것,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을 위해 걱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힘들고 어려웠더라도 그들의 삶의 문제를 더욱더 주님께 맡겼다면, 사무엘이 늙었어도, 사무엘의 두 아들이 사무엘처럼 듬직하지 못했더라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를 저들에게 보내주실 것을 믿고, 그 문제를 주님께 맡겼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 열방들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그 실패의 역사가 구약성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담은 것이 성경이다. 우리는 주님께 맡기는 것을 실패하고 있는가, 성공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산다는 것은 곧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자기도 지키고, 주변의 사람들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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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30. 20:48

조에를 찾아서 (Finding ZOE/ζω)

(로마서 8:1-11)

 

‘조에를 찾아서’는 ‘니모를 찾아서’의 패러디다. 아빠 물고기 말린(Marlin)은 낛시꾼에게 잡혀간 아들 물고기 니모(Nemo)를 찾아서 멀고도 험난한 여행을 떠난다.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는 비극적인 장면에서 시작된다. 말린과 코랄은 보금자리 해초 더미 안에 알 400개를 낳는다. 알이 부화되기 직전, 꼬치고기가 알들을 잡아먹기 위해 공격해 왔고, 알들을 지키려던 엄마 물고기 코랄과 400마리의 알은 모두 꼬치고기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그 중에 한 알만 살아남는데, 꼬치고기의 습격 때문에 상처를 입어 그 알에서 태어난 아기 물고기는 한쪽 지느러미에 장애를 입는다. 아빠 물고기는 엄마의 소원대로 살아남은 아들 물고기에게 ‘니모’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니모(nemo)는 라틴어로 ‘nobody’라는 뜻이다.

 

400개의 물고기 자식들에게 ‘니모’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자식들이 너무 많아 니모의 의미처럼 ‘nobody’였을 텐데, 이제 단 하나 살아남은 자식 물고기에게 ‘니모’라는 이름은 더 이상 ‘nobody’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빠 물고기 말린은 니모를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어느 날 불행하게도 니모가 어느 스쿠버다이버에게 포획되었을 때, 아빠 말린은 아들 니모를 찾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더 이상 ‘노바디(아무도 아닌 존재’)가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생명과도 같은 아들 물고기 찾아 떠나는 모험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바로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이다.

 

우리는 방금 ‘니모를 찾아서’에 대한 줄거리를 전개하면서, 아빠 물고기가 ‘생명’과도 같은 아들 물고기를 찾아 떠났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명’이란 무엇일까? 로마서 본문에서도 보면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본문에 나오는 생명이라는 단어는 함께 등장하는 ‘죄와 사망’과는 이질적인 것,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오늘, 이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언어는 그 지역 문화의 총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에 번역하는 것 자체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배이지역(San Francisco Bay Area)에서만 살던 아이에게 ‘산(mountain)’이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당연히, 배이지역에서만 살던 아이에게 산은 민둥산일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에서 살던 아이에게 산은 어떤 의미일까? 당연히 숲이 우거진 산일 것이다. 같은 ‘산(mountain)’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배이지역의 아이와 강원도의 아이에게 ‘산’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산의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

 

성경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불행이기도 하다. 축복인 이유는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 언어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이지만, 불행인 이유는 성경의 원래 언어인 헬라어가 담고 있는 깊은 뜻을 한국어가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 많은 오해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죄’라는 용어가 그렇다. 한국어로 번역한 성경의 ‘죄’는 헬라어로 ‘하르마티아’이다. 한국어의 ‘죄’는 불교용어이다. 불교용어로서 죄는 ‘도덕성’과 연관된 단어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를 나타내는 ‘하르마티아’는 도덕성과 연관된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단어이다. ‘하르마티아’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죄’를 도덕성과 연관시키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죄’라고 부르지만, 성경에서 ‘죄/하르마티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서의 ‘죄’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죄’를 도덕성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당장 감옥에 가야할 인물이다. 어떻게 아들을 잡아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그를 ‘의인’이라 부른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 불린다. 왜 그럴까? 그가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한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발생한 ‘신앙사건’이지, 아들을 죽이려 한 파렴치한 아버지의 부도덕한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죄(하르마티아)’는 문제적 용어이다. 우리는 함부로 누군가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서, 즉 도덕성 문제를 가지고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의인이 아니고,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죄인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매우 비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구원받은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매우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에는 우리의 상식과 다른 전복적인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증진시키는 일이지, 그것과 상관없이 도덕성을 키우는 일은 ‘위선’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은 도덕성을 키우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도덕성을 키우기 어렵다. 그러나 누가 더 하나님 나라를 더 간절히 원하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까?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이다. (부도덕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 삶이 요구된다.)

 

신약성경에는 우리말로 ‘생명’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셋이나 있다. 프쉬케(ψυχ), 비오스(βος), 조에(ζω)가 그것이다. 이 각 단어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가 마땅치 않다. 그래서 이 각 단어를 풀어서 설명하면, 우선, 프쉬케는 ‘생물학적 목숨’을 말한다. 이 단어가 쓰인 구절은 마태복음 6장 25절의 말씀이다. 프쉬케의 구체적인 뜻을 적용하여 그 구절을 풀이하면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생물학적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또한 요한복음의 말씀 중 프쉬케가 쓰이는 구절은 이런 것들이 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물학적 목숨’을 버린다”(요 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생물학적 목숨’을 버린다”(요 10:15).

 

다음, ‘비오스’는 우리말로 ‘살림, 또는 생활’에 가까운 말이다. 비오스는 살림살이, 생활수준의 뜻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쉽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나오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이생’이라고 번역된 것이 ‘비오스’다. 우리가 보통 성경을 읽을 때 사용하는 개역개정판보다 새번역 또는 공동번역에서 이것을 좀 더 헬라어의 뜻에 가깝게 번역했다. 새번역은 ‘이생의 자랑’을 ‘세상 살림’, 즉 ‘살림살이, 생활수준’으로 번역을 했고, 공동번역에서는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탕자)이 아버지에게서 ‘분깃’을 받아 나간 것, 그 분깃이 바로 ‘비오스’다. 즉,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살림살이/재산’을 분배 받아 나간 것이다. 아들은 그 살림살이/재산을 탕진했다. 요한일서의 언어로 옮기면, 탕자는 자신의 재산/살림살이를 세상에서 자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용어는 ‘조에’이다. 조에는 위의 푸쉬케와 비오스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이다. 푸쉬케와 비오스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물론 푸쉬케(생물학적 목숨)와 비오스(살림살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생물학적 목숨이나 살림살이(생활수준)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에 넣어주신 생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아주 원초적인 생명이다. 생명을 생명 답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숨결(루아흐)이다. ‘조에’라는 용어가 쓰인 신약의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양들이 생명(조에)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 “내가 바로 생명(조에)의 빵이다”(요 6:35). (푸쉬케, 비오스, 조에에 대한 주석은 우진성 박사의 '일점일획 참조)

 

위에서 제시한 생명을 가리키는 신약성경의 세 용어, 푸쉬케, 비오스, 조에는 요즘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로 바꾸면, 푸쉬케(생물학적 목숨)는 ‘건강(외모)’으로, 비오스(살림살이)는 ‘경제적 풍요’로, 그리고 조에는 ‘영성(하나님의 생명과의 일치)’으로 옮길 수 있다. 건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우리에게 건강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건강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경제적 풍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경제적 풍요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하고, 바라는 것, 즉,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하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를 건강하게 하시고,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도록, 또는 지금 누리고 있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한다는 것이다. 아주 간절히.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복음과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증거하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푸쉬케(건강)와 비오스(경제적 풍요)’를 찾아나서는 사람들은 즐비한데, 막상 가장 중요한 ‘조에(하나님의 생명)’을 찾아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데 있다. 왜 그럴까? 무엇이 진짜 생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머물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건강보다 경제적 풍요보다 더 중요한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조에)’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니모의 아빠 말린이 니모를 찾아 그 험난한 여정을 떠난 것은 니모가 생명처럼 소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가장 중요한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푸쉬케와 비오스를 찾아나서는 것을 멈추고, ‘조에’를 찾아나설 것이다. 아니, 푸쉬케와 비오스를 찾는 것만을 강요하는 이 세상의 논리에 저항하며, 그러한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생명, 조에를 찾아나설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고후 4:7a).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담긴 ‘보화’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조에’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프쉬케(생물학적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바로 그것, ‘조에’이다. 우리는 바로 그 조에를 우리 몸에 지니고 있다. 그렇게 ‘조에’를 지니고 있는 사람의 삶이 어떤가,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조에를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조에)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후 4:7b-10).

 

예수님은 퓌쉬케(생물학적 목숨)와 비오스(재산/살림살이)를 바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가져다주셨다. 즉, 건강과 경제적 풍요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찾아나서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하며 산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조에)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것을 팔아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사려고 한다. 우리의 목적은 어느새 ‘조에’가 아니라, ‘푸쉬케’와 ‘비오스’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의 비극이고 신앙의 소외다. 사실 이 비극과 소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푸쉬케의 정욕, 비오스의 자랑을 부추기는 세상을 따라갔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조에)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자유인, 의인이 된 이유는 우리의 도덕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과 살림살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조에(하나님의 생명)’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건강(푸쉬케)과 비오스(경제적 풍요)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의 풍요로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조에가 그 풍요로움을 말해준다.

 

조에를 찾아서! ‘푸쉬케와 비오스만을 찾아나서!’라고 부추기는 이 시대에, 어느새 실종되고 만 ‘조에’를 찾아 나서는 일은 더욱더 긴급히 요청된다. 건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경제적 풍요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조에’이다.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취급 받지 못하고, 경제적 풍요가 없으면 무시당하는 이 세상, 그러나, 조에가 없는 것은 괜찮다고 말하는 이 세상!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 하고,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할 줄 알면서, 조에가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 세상!  바로 우리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애통해 하며 사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조에(하나님의 영원한 생명)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물로 받은 조에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 세상에 저항하며, 우리가 가진 건강, 우리가 가진 경제적 풍요를 수단 삼아 ‘조에’를 찾아 나서야 한다. 조에를 잃어버린 이 세대를 놓아두고 애통해야 한다. 그리고 조에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힘껏 전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조에를 찾아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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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25. 13:43

그리스도인의 성례전적 삶 (Christian life as a sacrament)

(열왕기하 5:1-14)

 

지구상에서 가장 문제적인 도시는 예루살렘이다. 종교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는 세 개의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수많은 분쟁을 겪었다. 그리고 그 분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다행히도 국제사회의 압박 때문에 최근 일어났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에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두 진영 사이에 있었던 분쟁 때문에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시민들 수백명이 목숨을 잃고, 가자 지구 도시 자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지인이 나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고. 이번 분쟁으로 인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피해 규모를 보면, 이스라엘이 거의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학살한 것처럼 보인다. 질문은 그랬지만, 그 질문에 담긴 더 깊은 의미는 예루살렘의 평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물론, 지인이 나에게 걸어온 질문은 무슨 깊은 학문적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답답해서 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굉장히 난감한 문제이다. 문제가 난감한 이유는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대표하고,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이슬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두 거대 종교가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의 문제는 굉장히 난감하면서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 문제만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도 개입되어 있어, 그 문제를 푸는 해법은 굉장히 복잡하다.

 

나는 그 질문에 간단하게 이렇게 답했다. “종교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역사가 끝나거나. 마라나타!” 인간들 사이의 분쟁, 또는 전쟁을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예루살렘이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종교 때문이니, ‘종교가 없어지거나’라는 대답은 사실 굉장히 절박한 말이다. 평안을 위해서 종교를 가지는데, 그 종교가 오히려 분쟁과 전쟁을 불러와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니, 차라리 ‘종교’라는 것 자체가 없으면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더불어서 인간 사이에 있는 분쟁과 전쟁,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은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에, 예루살렘의 평화의 문제는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라는 절망감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끝장 내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마라나타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왜 나는 성령강림절(오순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의 분쟁을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전개되는 성령강림 사건을 본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이다. 세계 각국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그리고 오순절 축제를 ‘관광’하러 온 수많은 외국인들(이방인들)이 모여들었던 오순절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 오순절 축제에 걸맞은 매우 흥분되고 기이한, 축제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성령강림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의 요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이 방언을 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뭐가 그리 큰 일인가. 중요한 것은 방언이 아니라, ‘그 방언으로 무엇을 말했는가’이다. 그 상황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네레에서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9-11).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방언(외국어를 유창하게 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큰 일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 일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혜가 보이게 드러났다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큰 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경험했다는 뜻이다.

 

즉,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연장선 상에 있는 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은 기이한 일(우리가 흔히 방언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현상의 발생)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게 드러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즉 그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온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진 결과,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결과는 이것이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끔 하는 사건이 발생하니까,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발생한다.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요즘은 많은 이들이 종교를 떠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믿던 이들도 신앙을 버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끔 해주는 사건보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경험을 사람들이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위에서 이야기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이다.

 

유대인도 하나님을 믿고, 팔레스타인의 무슬림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두 진영 모두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인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니, 거기에 무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전혀 안 계신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가 공적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우리가 읽은 열왕기하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는 이와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례전적 삶,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끔 하는 경험을 이끌어내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배울 수 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아주 실제적인 문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을 어떻게 멈출 수 있고, 어떻게 예루살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아만 장군의 나라, 아람(지금의 시리아)과 이스라엘은 서로 적대관계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다. 두 나라는 전쟁을 했다.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가 없는 것처럼 그랬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2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비극이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보다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긍휼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인 ‘어린 소녀’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을 가까이에서 본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나아만 장군은 크고 존귀한 자였으나 치명적인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불치병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가 ‘나병’을 앓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나병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이다. 만약 그가 나병을 앓았다면 분리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리 수용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나아만 장군의 고통을 본 ‘어린 소녀’는 장군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절). 전쟁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자기에게 고통을 가한 자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법이다. 그런데, ‘어린 소녀’는 원망보다는 용서를 택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를 보면, ‘어린 소녀’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어린 소녀’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다. 왕을 만나 적국에 가는 것을 허락받고, 선지자에게 줄 선물을 가득 마련해 자기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러 간다.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람 왕의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자, 사신(메신저)을 보내 이스라엘의 왕을 안심시키는 엘리사의 말에서 발견된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절).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는 일을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언(Prophecy)을 한다. 예언이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에, 즉 우리의 삶에 어떻게 드러나실 지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끔 하는 일이다. 이처럼, 나아만 장군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였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이므로 아람 신의 존재는 알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병을 고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에 엘리사 선지자가 화려한 제의를 행하고, 자신에게 엄청난 일을 요청할 것을 예상하며 갔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병 고침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 고치는 방법이 너무 보잘것없었다.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절).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쉬운 것도 못한다. 오히려 화를 내며 돌아선다. 만약, 그에게 현명한 부하들이 없었다면, 그는 병도 고침 못 받고, 하나님을 아는 기회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다. 그랬더니, 정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일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알게 된 이야기이다. 어린 소녀의 용서의 마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6장 23절에서 끝나는데,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은 이스라엘과 섣부르게 전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람 왕은 자신의 도발 계획이 매번 수포로 돌아가자 나아만 장군을 스파이로 의심하지만(명시적으로 나아만 장군을 의심했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나, 정황상 그렇다),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의 군대는 엘리사의 존재를 아람 왕에게 알린다. 그리고, 아람 왕은 엘리사를 죽일 계략을 꾸민다.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마리아성으로 유인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몰살시키고자 한 이스라엘 왕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라고 말한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왕하 6:2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람 군대가 썼던 방법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선택한다. 아람 군대는 포로를 자신들의 노예로 데리고 갔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랬더니,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가 생겼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왕하 6:23).

 

평화는 용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일이다. 용서는 엄청난 성례전이다. 용서의 경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람의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 장군을 용서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알려 주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엘리사는 자기를 죽이러 왔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마리아성에 갇힌 아람 군사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다.

 

‘어린 소녀’의 용서와 엘리사의 용서는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가치를 놓치면 안 된다. 나의 작은 용서가, 또는 힘겨운 용서가 어떠한 위대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용서(순종)를 들어 쓰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평화는 사람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질 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진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지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다. 그러한 삶을 성례전적 삶이라고 한다. 성례전이란 바로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경험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 시대에, 또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볼 수 있는 일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을 하니, 하나님을 원래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보고 “내 생각이 맞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점점 세속화되어 간다. 세속화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는, 하나님의 존재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강요를 통해서 갖게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 시대는 더 그렇다. 어떻게 종교적 신념을 강요할 수 있나. 요즘엔 그랬다가는 잡혀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어느 시대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게 끔 해주는 믿는 이들의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 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가 용서를 통해 나아만 장군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엘리사가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용서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람 사람들이 경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성례전이 되어야 한다.

 

성령강림절(오순절). 예수의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다. 덕분에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전쟁의 소식만 늘어가고, 죽음의 소식만 들려오며,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늘어가는 이 때에,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없다고 하는 확신하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즐비한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높이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가장 깊은 질문이고 도전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 삶. 우리는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 삶을 가능케 하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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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19. 10:24

예수님과 기도

(요한복음 17:11-21)

 

복음서에 대한 상식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고 싶다. 마태, 마가, 누가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큰 아들 건유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복음서를 읽으면서 나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왜 이렇게 똑 같은 이야기가 계속 나와?” 맞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읽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요소이다. 같은 이야기가 세 복음서에 걸쳐 동일하게 나온다. 물론, 같은 이야기가 각 복음서의 맥락에 따라 좀 다르게 배치되긴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세심한 맥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선 읽어보면, 같은 이야기가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온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르지 않고, 제 4 복음서라고 부른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다. 맥락도 많이 다르다. 그래서 같은 ‘복음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이질적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르지 않고, 따로 떼어서 제 4 복음서라 부른다. 대표적으로,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은 유월전 만찬을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떼어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성만찬 이야기가 없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깊은 고뇌 속에서 기도하신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이야기를 전한다. 똑 같은 상황, 즉 체포당하기 전 상황인데,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다른 기도를 전한다.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는 죽음을 앞둔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기도인 반면에, 요한복음의 기도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염려하시는 내용의 기도이다.

 

사실, 두 기도 모두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기도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 맡겨드리는 신뢰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남겨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염려의 기도를 한다. 개인의 실존적 고뇌의 기도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기도, 그리고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의 기도는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얼마나 하셨을까? 우리는 그것을 수치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기도를 자주 하셨고,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또한, 중요한 사역을 앞두고 반드시 기도하셨다. 특히 누가복음은 그것을 매우 자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전하면서, 먼저 그 사역을 하기 전에 기도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있다.

 

중요한 일을 놓아두고 우리는 얼마큼이나 기도해야 할까? 그것이 한 때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큼 기도하셨는지, 자세히 살펴보니, 예수님은 그 때 3시간 정도 기도를 하셨다. 이것도 모든 복음서가 전하는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에 근거해서 보면 그렇다. 아무튼, 그것에 근거해서 아주 간단한 산술적인 기도 시간을 산출했다.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적어도 3시간은 기도해야 한다는 것.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고별설교와 마찬가지로, 유언기도이다. 성경의 말씀이 살아 숨쉬게 하려면,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한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감성을 살려서 읽어야 한다. (적극적 읽기 / “주여 말씀하시옵소서”의 마음과 “혹시 말씀하시면 들어볼게요”의 마음은 다른 거다.) 그것만 잘해도, 우리는 성경 읽기를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유언기도.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유언기도라는 것을 생각하며 감성을 살려 읽으면, 예수님의 기도가 남의 이야기로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가슴 절절한 사랑의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유언에는 핵심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유언에 불필요한 말을 남기는 사람은 없다. 유언에는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유언기도에 담긴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유언기도에서 가장 핵심 구절은 21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상호내주. 이것은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다. 상호내주의 개념은 우리가 ‘신God’이라는 것을 다른 종교와 다르게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상호내주의 개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핵심 개념이다. 또한, 더불어 우리가 추구하는 영성은 상호내주의 영성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객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 안에 내주한다.

 

바로 이 상호내주의 개념 때문에 기독교인의 기도는 다른 종교의 기도와는 다르게 매우 특별하고 특이한 기도가 된다. 우리가 이 상호내주의 개념을 잘 모르면, 우리는 기독교인이면서 이방인처럼 기도하게 되는 불행한 일을 겪는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떠한 신에게 멀리 떨어져서 기도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신에게 기도하게 되면, 그 신은 나의 기도대로 무엇인가를 해주는 수여자(giver)가 될 것이고, 나는 그 신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받는 수동적 수혜자(receiver)가 될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할 때가 많다. 그리고 기도를 그런 수준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바로, 예수님의 유언기도 때문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덕분에,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수여자와 수혜자 관계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분리된 기도를 드리는 게 아니라, 상호내주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상호내주의 기도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들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행위의 기도를 말한다. 상호내주의 기도,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수여자로 만들고, 기도하는 우리를 수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상호내주의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드리는 주체적인 기도이다.

 

이게 얼마나 강력하고 신비하고 놀라운 기도인지,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이 상호내주의 기도를 알지 못하고 기도를 드리면, 우리의 기도는 기복신앙의 기도에 머물고, 기도의 역동성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기에 기도가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상호내주의 기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사역이 되지 못하고, 그저 고역(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하는 기도)에 머물 뿐이다. 상호내주의 기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저 구경꾼으로 전락할 뿐이다. 그리고, 기도를 하되, 우리가 수혜자로서 무엇인가 필요할 때만 기도하는 매우 낮은 단계의 기도에만 머물고 만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기독교인의 기도가 얼마나 강력하고 신비롭고 놀라운 것인지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 말이다. (이는 마치 복권에 당첨됐는데도, 복권이 당첨됐는지 모르거나, 당첨복권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기도한다. 우리는 기도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그렇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존재로서 기도한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도가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위대한 기도가 된다.

 

이게 왜 중요한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역사의 주인이시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게 하시며, 창조의 완성을 이루시며, 모든 것을 악으로부터 지키시고,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를 구원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상호내주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그 상호내주의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리고 상호내주의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은 그냥 한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만물을 구원하는 구원사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상호내주의 기도는 바로 그러한 일을 동일하게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강력하고 신비롭고 놀라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의 의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내가 당신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당신의 삶 속에 지금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기도를 통하여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거룩한 선포인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나는 두 가지의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우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우리는 평소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산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괴로워하거나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러니, 외로워하거나 힘들어 하지 말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것을 믿고 감사하라.

 

또 하나, 나는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감사하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상호내주의 기도를 알고 기도해 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사람의 기도는 그냥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는 개인적 기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선포가 될 테니 말이다. 이것만큼 든든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한,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한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 나의 기도는 그냥 나의 가녀린, 부족한 기도가 아니다. 나의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드리는 상호내주의 기도이다. 그리고 나는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삶에 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니, 기도하는 그 시간이 가장 기쁘고 즐겁고 보람찬 것이다. 여러분 각자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사역(ministry)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그냥 기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호내주의 기도,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기도라는 것을 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 중 하나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고맙다. 그 사람의 기도를 통해 나의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거룩한 삶이라고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동일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한다. 그리고 선포한다. 여러분의 삶은 그냥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거룩한 삶이다. 그러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리고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임을 잊지 말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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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11. 20:28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에스겔 16:1-6)

 

드라마에 단골 메뉴로 나오는 설정은 ‘출생의 비밀’이다. 대단한 성공을 이룬 주인공의 출생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드라마의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본문은 딱 그런 순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사람아,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그의 혐오스러운 일을 알게 하여라!” 지금,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겠다는 뜻이다. 벌써 ‘혐오스러운’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을 보니, 예루살렘의 화려함 뒤에는 어두운 출생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 보인다. 숨죽여 보게 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에게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 네 근본과 태생은 가나안 땅에서 비롯됐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 네 출생에 대해 말하자면 네가 태어난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자르지도 않았고 물로 깨끗하게 씻기지도 않았다. 소금으로 문지르거나 포대기에 싸주지도 않았다. 이런 것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네게 해줄 정도로 네게 인정을 베풀거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너는 네가 태어나던 날 미움을 받아 들판에 버려졌다.”(3-5절/우리말성경).

 

출생을 가나안, 아모리, 헷과 연관시키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처음부터 영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아모리, 헷은 대표적인 가나안의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말로 하면, 족보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 말은, 예루살렘은 그렇게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영광이 무너진 이후, 즉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이스라엘이 무너진 예루살렘의 영광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뜻이다.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예루살렘이 그토록 영광스럽게 된 이유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교만에 빠져 영광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전의 그 비천한 모습으로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에스겔을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해,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던 존재, 예루살렘.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5절). 참 가슴 아픈 문장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모두 버려진 존재이다. 이런 문장이 있다. 엄마는 나를 자궁에서 버렸다.”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 인간은 모두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들과 같은) 세상으로 버려진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서 운다. 버려진 존재는 그 안에 깊은 불안과 쓸쓸함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 안에 깊이 배어 있는 불안과 쓸쓸함은 바로 우리가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원초적 경험에서 온 것이다.

 

엄마들이 아기를 낳고 나서 겪게 되는 산후우울증은 자신의 자궁에 있던 생명을 바깥으로 버렸다는 죄책감과 이제 자유롭게 됐다는 해방감의 묘한 감정들의 섞임 속에서 오는 것이다. 그 우울증을 건강하게 잘 극복하는 엄마는 자궁에서 버려진 아이를 자궁이 품고 있던 것처럼 다시 품어 주지만, 극복하지 못하면 버려진 아이를 다시 품어주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발생하는 일들은 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아슬아슬한 일들이다. 자궁에서 버린 나를 다시 품어 키워준 엄마는 참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기적 같은 일이고 은혜이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힌 뒤, “배꼽의 탯줄도 자르지 않은 채, 물로 씻겨지지도 않은 채, 소금을 뿌리지도 않은 채, 강보로 싸지도 않은 채” 들에 버려진 아이를 ‘사랑의 마음으로’ 품에 안아준 이가 누구인지를 말해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때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네가 핏덩이인 채로 발길질하는 것을 보았다.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6절).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살던지 죽던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생명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외침이다. 애틋한 하나님의 마음.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내가 살던지, 죽던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세상에서 나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도록 나를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발가벗겨져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요즘 사람들의 고립감과 우울감과 위기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에 이렇게 집단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7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좀 더 탄탄해진 경제구조와 좀 더 민주화된 정치체제 덕분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지, 좀 더 이렇게 가다가는 모든 게 무너져 내릴 판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무너지면 다 소용없는 법이다.

 

요즘은 애틋한 하나님의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라는 이 음성이 참 절실한 때이다. 무엇인가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우리 생명들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이지만, 거기에 붙어있지 않을,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생명을 주시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버려진 것 같은 우리들을 다시 품에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다.

 

어렵고 힘들 때, 버려진 것 같이 불안하고 쓸쓸한 때에 성경처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 인생은 기쁘고 즐거울 때, 또는 아무 일 없이 평안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깊은 절망과 우울에 빠질 때가 있다. 지금처럼 불가항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사람들은 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성경은 이럴 때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드라마 보는 시간의 10분의 1만 떼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 시간을 써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어려운 시대를 잘 건널 수 있다. 이런 때는 성경을 기계적으로 필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마음이 너무 지쳐 있으면, 성경 보는 것도 다 귀찮은 법이다. 아무 것도 하기 싫어, 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이것 한 가지 만은 꼭 기억해 두면 좋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성경은 환란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큰 일을 통해서만 생명이 보존되도록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신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노년에 이삭을 주셔서 그들의 생명을 돌보셨다. 이삭이 엄마 사라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리브가를 주셔서 결혼하게 하심으로 돌봐주셨다.

 

모세가 왕궁에서 도망쳐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십보라와 장인 이드로를 만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돌봐주셨다. 나중에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어려울 때 계속해서 큰 힘이 되어준다. 가뭄 때문에 죽을 위치에 처한 롯과 나오미, 하나님께서는 롯과 보아스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하심을 통해서 그들을 돌아보셨다. 다윗이 죽음의 위협에 처해 도망 다닐 때, 하나님은 요나단의 우정을 통해서 그를 돌아보셨다.

 

엘리야 선지자가 죽음의 처지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통하여 그를 돌아보셨다. 요나가 물 속에 던져져 죽음에 처해졌을 때, 하나님은 바다의 생물(큰 물고기/고래?)을 통하여 그를 돌아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무엇이 예수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위로를 받으셨지만, 한 편으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환대를 통해서 위로를 받으셨다.

 

현재 우리의 삶 속에는 내가 생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돌보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손길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정경아 집사님) 궁금하다. 그것이 비록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다. 어떤 분이 정말 좋은 드라마라고 추천해 주어서 요즘 보게 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다. 거기를 보니까, 주인공 이지안(아이유)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것은 맥심커피 두 봉지를 끓는 물에 타서 먹는 것이다.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위로이고, 하나님의 손길이다.

 

우리가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 때,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를 품에 안아주신다. 의식을 하면, 그 사랑의 손길을 느낄 때마다 주님께 감사하고, 의식하지 못했다면, 한 번 곰곰이 현재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황인숙의 “우울”이라는 시를 나누며 마치고 싶다.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깍지 낀 두 손을 턱 밑에 괴고

 

짐짓 눈을 치켜떠보고

가늘게도 떠보고

끔벅끔벅, 골똘해보지만

도무지

부팅이 되지 않는다

 

풍경이 없다

소리도 없다

 

전혀 틈이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을

내 몸이 부풀며 채운다

 

알 수 없는 영역에

하염없이 뚱뚱한 나

덩그러니 붙박여 있다

 

시인은 ‘우울’을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 ‘알 수 없는 영역’에 들어와 있기에 더 우울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영역이지만,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는 영역은 없으시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영역에 들어온 것 같이 우울하고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곳에서 덩그러니 붙박여 있는 나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조금만 힘을 내자.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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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6. 14:35

거한다(abide/meno)는 것의 의미

(요한복음 15:1-8)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배경을 알아두는 게 좋다. 첫째, 이 설교는 고별 설교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포도농장의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라, 임종을 앞둔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비장하면서도 슬프면서도 감사한 분위기다.

 

둘째, 이 포도나무의 비유는 이사야의 말씀과 엮어서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 5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해서 다음과 같음 말씀을 선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1-2)

 

예수님이 본인을 가리켜 ‘참포도나무’라고 했을 때,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뜻한다. ‘극상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알레씨노스’는 ‘신뢰할 만한’, ‘온전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극상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붉은 종류의 포도’를 일컫는 말로, ‘매우 가치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바로 그 포도나무다. 이 두 가지, 참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의 고별 설교이고, 이사야의 말씀과 연관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사건 이후, 기독교의 복음이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은 가까운 지역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씀 자체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되는 문화적 유사성도 한 몫 했다.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도 그렇다. 포도재배가 주요 농업이 아닌 지역에 사는 자들은 포도재배의 중요성을 별로 알지 못한다. 포도재배가 정말 중요했던 지중해 지역의 나라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포도재배가 얼마나 지중해 지역 주민들의 삶에 중요하면, 포도재배를 주관하는 신이 있었겠는가. 그 신의 이름은 디오니소스 또는 바쿠스로 불린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비극은 포도주 재배를 마치고 국가적 수준에서 포도재배를 관장하는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축제에서 상연했던 연극이다. 국가 최고의 축제인 이 축제를 비극(연극)으로 빛낸 이는 그 당시 최고의 영예를 안았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은 포도 재배와 깊은 연관을 지녔다. 오죽하면,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제국이 점령한 나라는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나라’에 국한되었을까. 그 당시 땅끝은 단순히 어떤 지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포도 재배가 되지 않는 땅은 땅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가 극상품의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나무라니! 이건 아주 귀가 쫑긋한 비유다. 극상품의 포도를 맺는다는 것은 삶의 풍요와 기쁨과 연결된다. 극상품의 포도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고,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맛이 좋았다. 지금도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매우 고가에 팔린다. 이처럼, 극상품의 포도는 풍요와 기쁨을 상징한다.

 

사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하다. 풍요와 기쁨이다. 가난과 절망을 바라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풍요와 기쁨보다 가난과 절망이 많다. 훨씬 많다. 풍요와 기쁨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 말하지 않는다. 극도의 물질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생득적으로 안다. 물질적 풍요와 기쁨은 참 좋은 것이지만, 풍요와 기쁨은 그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풍요와 기쁨은 매우 총체적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미국의 어느 기관에서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연봉 7만 5천불 이상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니까, 연봉 7만 5천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20만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100만불 버는 사람이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만족도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번다고 그에 비례해서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적당히 벌면 된다. 하지만, 7만 5천불 이하를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도에서 그 이상을 버는 사람들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적 풍요가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는 세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위한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보려고 비즈니스에 뛰어는 것도 그렇고, 직장을 다니는 것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또는 독신으로 사는 것도 그렇고, 자식을 낳는 것도 그렇고, 또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도 그렇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노력도 그렇고, 또는 대학에 가지 않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도둑질도 풍요와 기쁨을 지향한다. 그런데, 삶의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가난과 절망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이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예수님이 인간 현실을 응시하면서 본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결국 가난과 절망을 경험하고 마는 인간들의 불쌍한 현실이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도 표현했다. “목자 없는 양.” 양도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양은 푸른 초장을 찾고 쉴 만한 물가를 찾는다. 그런데, 양은 눈이 어두워 푸른 초장을 찾기 힘들고, 쉴 만한 물가를 찾기 쉽지 않다. 목자가 데려다 주어야만 한다. 혹, 목자가 이끄는 양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데로 갈라치면, 이리나 늑대에게 잡아 먹히기 일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우리를 인도하겠다는 삯꾼 목자들은 우리 더러 이렇게 다그친다. 풍요와 기쁨을 꿈꾸면,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우리를 다그친다.”(교회를 찾아서, 54쪽). 우리는 이러한 유혹들에 빠져, 이것이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길인 양, 우리는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간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이미 시간을 다 쓰고, 이미 인생을 다 쓰고 나서 깨닫는다. 그 길의 끝에는 풍요와 기쁨이 없었다는 것을!

 

아무리 남의 등을 쳐먹고 살던 인간도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풍요와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러면 그들 중에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다그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여기,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이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람, 우리 인간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제 2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고 싶는가?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이는 우리가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행하는 그 많은 일들을 통해서 풍요와 기쁨을 얻지 못하고, 가난과 절망을 얻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그 헛된 일들을 전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헛된 일들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죽음을 앞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귀에 들린다면, 풍요와 기쁨을 얻고 싶거든,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안에 거하라!”는 이 말씀에 마음이 요동쳐야 한다.

 

왜 우리는 ‘그 안에’ 거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참포도나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극상품의 포도를 재배하려면 참포도나무가 필요하다. 참포도나무의 가지는 극상품을 얻을 수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하면, 가지인 우리는 극상품을 얻는다. 극상품 포도,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바로 그것! 같은 포도여도, 참포도나무인 그리스도 안에 거해서 얻는 포도와, 그냥 포도나무에서 얻는 포도는 그 질이 다르다. 같은 돈을 벌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기에 거하며 버는 돈과, 그냥 버는 돈은 그 질이 다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포도열매를 얻고 있는가? 내가 지금 삶에 얻고 있는 포도열매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거해서 얻는 포도열매인가, 아니면, 그냥 포도열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것이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참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그 안에 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야 할 것은 교회론이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 교회론이다. 교회에 대한 이해력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영향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복음이 아니라 자본(돈)에 휩쓸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근대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는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 고립된 개인이 바로 노동자가 되고 동시에 소비자가 되기 때문이다. 노동력과 소비력을 동시에 갖춘 근대인,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게 교회론의 약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노동력과 소비력을 갖춘 고립된 개인은 교회를 고립된 개인의 연합 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 고립된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교회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헤쳐 모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교회를 개인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하나의 회사 같은 조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그러한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유기체적으로 이어져 있다. 팔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장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리가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팔이 몸에 붙어 있기 싫다고 스스로 떼고 나가지 않는다. 심장도, 다리도 마찬가지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인 우리가 ‘거한다’라는 것은 반드시 교회론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한다’라는 말을 심리적인 것으로만 조그맣게 생각하고 만다. ‘거한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심리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삶 전체,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가 그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매우 육신적인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한다’는 뜻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말 것이다.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레이첼 에반스의 저서 <교회를 찾아서 Searching for Sunday>에서 도움을 얻어보고자 한다. 이 책은 교회의 성사(sacraments/성례전)에 맞춰 쓰인 책이다. 그 이유는 레이첼 에반스가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바로 성사(성례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였다. 그래서 레이첼은 성사(성례전)을 다음과 같이 아주 쉽게 풀이하고 있다.

 

교회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말한다(세례).

교회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한다(고백/고해성사).

교회는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성품/직분).

교회는 우리를 먹인다(성찬).

교회는 우리를 환대한다(견진/confirmation).

교회는 우리에게 치유의 기름을 붓는다(도유).

교회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혼인).

(교회를 찾아서, 26-27쪽)

 

특별히, 세례와 성찬 이외의 성례전은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례전’이라고 이름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곱가지의 성례전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 우리는 직분을 받는다. 우리는 성찬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정체성)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아픈 이들을 심방한다. 우리는 결혼(사랑)을 한다. 이러한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가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이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ㅡ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해야 한다. (세례).

ㅡ 우리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 받는다. (고백/고해성사).

ㅡ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직분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성품/직분).

ㅡ 우리는 먹여 주시는 주님 안에서 늘 배부르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주님께 맡겨 놓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다. (성찬).

ㅡ 우리는 환대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환대한다. 누구든. (견진/confirmation).

ㅡ 우리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픈 이들을 돌본다. (도유).

ㅡ 우리는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배려하며 아껴주고 사랑하며 산다. (혼인).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이 풍요와 기쁨을 주는지 알지 못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한다. 여기,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주는 길이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거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다. 그것은,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과의 실제적인 관계 안에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풍요와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면, 교회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교회는 우리의 풍요와 기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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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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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25. 21:34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

(사도행전 4:5-12)

 

부활의 영(성령)이 임한 제자들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사도행전에 기술되고 있는 ‘역사/work’들은 그 당시의 유일회적인 역사(work)가 아니다. 성전 미문(Beautiful)에 있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가 일으켜진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장애가 치유되는 사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구원 사건이다(죽은 자 가운데서 주님이 일으켜지신 것처럼, 이 사람도 일으켜진다). ‘일어남’을 통해서 그는 두 발로 걷고 뛰고 한 것을 넘어서, 그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생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치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애가 치유되고, 병이 낫는 등의 소위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느냐 모르게 되느냐’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시간(역사)을 뚫고 들어온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 부른다. 감동적이어서,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해서 은혜가 아니라, 우리 피조물들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에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압도적으로 임한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전 미문 사건 때문에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공의회 앞에 서 심문을 받게 된다. 사도들이 자기들(공의회)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역사(work)’를 행했기 때문이다. 공의회 앞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이 받았던 질문을 똑같이 받는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들의 권세가 지금 위협당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가 권세를 위협받으면, 거칠어지는 법이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복음의 내용 –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9-10절). 이것은 정말 대단한 대답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자기들도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까봐 도망쳤던 사도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똑 같은 사람인데, 부활의 영을 받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같은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다른 세계에 가는 것이다. 같은 세계에 살면서 달라질 수는 없다. 사도들은 이제 부활의 영 안에서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 나라(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자신들이 살던 세계에서의 말과 행동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새롭게 살게 된 하나님 나라의 말과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살면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고 행할 수는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부활의 현실, 즉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기에, 사도들은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부활의 현실을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를 고쳐준 것이고, 공의회 앞에서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였던 것이다.

 

심리학에서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이라는 게 있다. 대상은 영어로 'object'라 한다. 이것을 분석하면, '내 앞에 ob' + '던져진 ject'이다. 즉, 대상이란 ‘내 앞에 던져진 현실 또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대상관계이론'이란 내 앞에 던져진 대상적 현실(존재)과의 부단한 소통을 말한다. 이 대상관계이론은 주로 아동심리학에서 아이들과 특별히 엄마 간의 내적/심리적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사용이 되는데, 아기에게 '대상(내 앞에 던져진 존재)'은 엄마이다. 그래서 아기는 대상적 존재인 엄마와 끈임없이 소통을 하며 성장한다. 내 앞에 던져진 존재, 또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떠한 소통을 해 오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성장은 달라진다. 

 

2019년도에 만들어진 공상과학 영화 <I Am Mother>가 있다. 미래의 이야기이다. 미래에는 여자의 자궁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엄마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기계에서 아기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역할을 해주는 사이보그(로봇)을 만나게 되고 그것의 돌봄에 의해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세상이 정말로 오게 될지 모르겠다. 여러가지 정황상, 아마도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은 이것이 주제가 아니니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자.)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그런 세상이 도래하기 전, 어쨌든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가장 먼저 ‘대상’으로 만나게 된다. 아기는 태어나서 세상이라는 대상에 던져지게 되고, 엄마라고 하는 대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다른 말로 이것은 아기에게 ‘엄마’라고 하는 존재가 곧 아기의 온 세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성장하면서 엄마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대상을 계속하여 만나게 되고, 그래서 대상의 확장이 이루어지겠지만, 어쨌든, 아기는 태어나서 확장된 세상을 만나기 전, ‘엄마’라는 세상을 만날 수밖에 없다. (남성중심세상 X, 자본중심세상 X, 엄마중심세상 O / 엄마 같은 교회)

 

그래서 심리학의 대상관계이론은 한 사람이 아기 때에 엄마와 어떠한 내면적인/심리적인/심층적인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체성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심리치료를 위해서 아기 때의 온 세상이었던 엄마와의 대상관계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심리학에서는 아기 때의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어땠느냐가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상관계이론에서 설정한 이러한 문제의식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아기 때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아주 좋았어도 성인이 되어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고, 아기 때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아주 좋지 않았어도 성인이 되어서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대상으로 누구를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

 

우리는 대상관계이론이 주는 통찰력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은 평생에 걸쳐, ‘내 앞에 던져진 현실(또는 존재)’과의 부단한 소통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대상관계이론의 통찰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보면, 우리 앞에는 불가항력적인(은혜로) ‘내 앞에 던져진 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다. 그것과 어떠한 소통을 이어 가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들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을 부인하는 공의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미워하며 살 뿐이다. 그러나, 자신들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사도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았다. 그것은 부활의 세계, 하나님 나라, 구원의 삶이었다. (단순히 보여주는 게 아니라 초대하는 것. 너희도 이렇게 살라!)

 

우리는 부활의 현실과 어떤 대상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 성경은 우리 앞에 부활의 현실을 내 던지고 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내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과 우리는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우리는 결단에 놓여 있다. 부활의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구원의 현실과의 부단한 소통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된 사람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시는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요한 행은 ‘처럼’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이라고, 한 문장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처럼’만 따로 떼어내, 그것으로 한 행을 이룬다. ‘처럼’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김응교 교수의 시해석을 한 번 들여다보자.

 

사실 ‘처럼’만 이렇게 한 행으로써 있는 시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 시가 아니더라도 영어 시, 일어 시, 중국어 시에서 ‘처럼’만 한 행으로 된 시를 본 적이 있나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윤동주는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길이 ‘행복한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은 ‘행복한’ 하나의 주체가 됩니다. 그러나 ‘처럼’이라는 직유법처럼 그 길은 도달하기 힘든 삶이지요.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삶, 윤동주는 그 길을 선택합니다. (김응교의 저서 <처럼>에서)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종교시로 읽는 사람은 없다. 윤동주를 종교 시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윤동주의 시와 삶에서 사람들은 ‘숭고미’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에 의해서 압도당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대상으로서의 윤동주는 사람들에게 숭고함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그의 시에 특정 종교의 용어인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등의 단어가 들어갔어도 그것을 특정 용어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편 용어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윤동주의 숭고미에 압도되어, 그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부활의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미 안에서 그분 ‘처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욕망이 분출되는 것, 그래서 이제 이 세계를 떠나 부활의 세계, 하나님 나라를 살겠다는 결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믿는다. 그러한 삶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던져지는 대상으로서, 그 존재 앞에 던져지는 부활의 현실로서, 그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는,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하는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윤동주의 시에서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본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사도들에게서 동일하게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대상(object/그 존재 앞에 던져진 존재(현실))'이다. 대상으로서의 존재인 '내'가 대상으로서의 존재인 '너'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인간의 과제이다. 우리가 대상으로서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현실은 무엇이겠는가. 부활의 현실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미문에 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부활의 현실을 준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내’가 대상으로서의 ‘너’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는,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하는 삶. 그것이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고 아무리 작은 구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겨자씨와 같아서 그 구원을 받은 이가 나중에 어떠한 존재로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활의 현실을 경험한 우리가 할 일, 이제 이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는 우리들이 할 일은 사도들처럼, 윤동주처럼,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생각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고,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부활의 현실을 사는 것이다.

 

부활의 현실이 가져다주는 구원을 생각해 볼 때, 기독교 문화 위에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총기사건과 폭력사건과 혐오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이 부활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살았다면,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고,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할텐데, 오히려, 구원이 아닌 죽음이 난무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 어느때보다도 부활의 현실이 강한 바람같이, 불의 혀같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또한 지구의 날을 지키며 예배 드리는 이 날, 우리 인간은 지구 자연에게 어떠한 대상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위기와 그로인한 일련의 자연재해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부활의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자연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서든 죽음을 가져다주려 하는 나쁜 존재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를 건너는 힘은 부활의 현실을 모른척하지 않고 정직하게 맞닥뜨리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부활의 현실’이 던져져 있다. 부활의 현실을 받아들여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 생명을 어떻게서든 이웃들에게 가져다주려 하고,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 생명을 어떻게서든 자연에게 가져다주려는 “십자가와 처럼”의 신앙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니, 진실하게 부활의 현실을 살고, 부지런히 부활의 현실을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자.

 

대상인 내가, 대상인 너에게 아름답기를!

대상인 네가, 대상인 나에게 아름답기를!

그렇게 아름다운 대상들이 서로 소통하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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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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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20. 15:00

열어 주소서

(누가복음 24:44-49)

 

누가복음, 하면, 세 가지의 이야기가 떠올라야 한다. 첫째는 ‘탕자 이야기’, 둘째는 ’삭개오 이야기’ 그리고 셋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이다. ‘탕자 이야기’와 관련된 찬송은 ‘나 주를 멀리 떠났다’가 있고, ‘삭개오 이야기’와 관련된 찬송은 ‘보고싶어 보고 싶어 예수님 얼굴~’이 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찬송은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가 있다. 성경의 유명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대개 회화(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가복음 24장은 부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죽은 후,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준비한 향품을 들고 예수의 무덤을 찾는다.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이들은 그 사실을 열한 사도에게 알리고, 그 중 베드로는 여인들의 부활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가 죽은 예수를 쌌던 세마포만 남은 빈무덤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길게 이어진다.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그들에게 부활의 현실을 알려주고, 두 제자는 열한 사도에게 달려가 예수의 부활을 알린다. 그러는 중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의 현실을 알린다. 여인들의 무덤 방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로 이어지고, 열 한 사도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며 그들에게 부활의 현실을 알려주시는 예수의 선포로 끝나는 이 부활 이야기의 정점은 44절에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44절).

 

예언의 성취. 이것은 누가복음이 가진 중요한 신학이다. 모세의 율법(오경)과 선지서, 그리고 시편을 비롯한 성문서, 즉 모든 구약성경(히브리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신학,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다. 44절의 구절 중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라는 말은 ‘신적 당위성이나 필연’을 말할 때 등장하는 단어이다. 한국어 어휘에는 이것을 대치할 만한 단어가 없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우리 나라 말에, ‘용안’이라는 말이 있고, ‘수라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임금(왕)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이 말을 아무에게나 사용하면, ‘역모’로 죽는다. 이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동사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쓰는 단어이다.

 

예언의 성취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부활은 신적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어떠한 것이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부활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처음부터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의심했다. 예수를 가까이서 따라다녔던 사도들도 처음에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선포하신 뒤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을 때”였다. 다른 말로 해서, 예언의 성취,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는 일이라고 고백하며, 또한 그것을 증언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일상이 기도 안에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침에 기상하자 마자 하루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성령의 능력 안에 있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고, 출근하면서도 기도하고, 업무를 시작하면서도 기도하고,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도 기도하고, 밥 먹을 때도 기도하고, 일과를 마치면서도 기도하고, 잠 자리에 들면서도 기도하고, 잠든 중에서도 이 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도를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몰아서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몰아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그것보다 더 좋은 기도의 습관은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짧게 기도하는 것이다. 000 집사님 가게에 심방 갔을 때 생긴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옆 가게로 잔돈을 바꾸러 간 000 집사님이 돈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갔더니 얘네들 기도하는 시간이에요. 바닥에 양탄자 깔아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얘네들한테 많이 배워요.” 여기서 얘네들은 누구겠는가? 무슬림들이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양탄자를 깔고 기도한다. 기독교인이 무슬림처럼 할 필요는 없지만,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계속하여 드리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야한다.

 

4월 말에 책이 한 권 나온다. 공저한 책인데, 그동안 가스펠 투데이(Gospel Today)에 실린 글을 모은 책이다. <예술신앙의 정원>, 이 책에 내 글이 7편 실린다. 책출판이 막바지에 있어 마지막으로 교정을 부탁하는 메일과 함께 출간되는 책의 교정판이 왔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내 글을 읽었다.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내가 이런 글을 어떻게 썼을까’이다. 도저히 내가 쓴 글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감사’였다. “나, 이런 감동적인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야”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사실 그렇다. 답답한 현실을 보면, 나의 부족함을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내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다 일이 잘 되면, 우쭐대기 십상이고, 일이 안 되면 낙심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우쭐과 낙심의 널뛰기를 하는 듯하다. 여기엔 감사와 평안이 깃들기 힘들다. 감정의 소모, 체력의 소모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쳐가는 삶을 살아간다.

 

요즘은 특히나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을 갖기 쉬운 세상이다. 온통 들려오는 뉴스는 ‘죽음’에 대한 뉴스, ‘폭력’에 대한 뉴스, ‘미움’에 대한 뉴스, 등 사람의 몸과 영혼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뉴스들 뿐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는 안 되고, 이 세상은 소망이 없으니, 그냥 나나 내 가족이나 잘 챙기자 하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한다. 그러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이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범죄로 표출된다. 우리가 지금 ‘아시아 혐오 범죄’의 타겟이 되어 있어 피해자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안에도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에서 오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얼마나 깊은 혐오가 자리잡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비관과 냉소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이 열리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 기도하는가? 무슨 기도를 하는가? 신적 당위성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뜻이 하늘에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기도하면서 상상해야 한다. 부활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비관과 냉소 속에서 자기만 살 궁리를 하겠지만,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비관과 냉소를 거부하며, 비록 지금 현실에서는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지만, 죽음(가장 큰 비관과 냉소)을 이기신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정혜윤의 책 <앞으로 올 사랑> 마지막 챕터에 보면 ‘바빌로프(Nikolai Ivanovich Vavilov)’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근과 감염병은 언제나 인류에게 큰 위협이었다. 러시아도 늘 기근과 감염병에 시달리는 나라였다. 바빌로프는 어려서부터 식물 표본과 어학 공부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는 나중에 특히 종자에 매력을 느껴 종자를 모으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종자를 모은다. 그가 종자를 모으면서 한 일은 “이상 기후로부터 작물을 지켜내는 법을 아는 농부들을 찾아 인터뷰를 했고 종자 심는 법을 배워 꼼꼼히 기록”한 일이다.

 

레닌 그라드에 식물 연구소를 차려 종자를 모으고 종자를 연구하여 기근을 퇴치하려는 꿈을 가졌던 바빌로프에게 큰 시련의 시간이 찾아온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에 의해 바빌로프는 잡혀가고, 바빌로프가 없는 상황에서 곧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종자를 지켜내기 위한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동분서주한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면 2백만 점이 넘은 보물 같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을 파괴할 거라 생각하고 관련자들 수백명을 투입해 박물관의 작품들을 옮기는 작업을 했지만, 정작 히틀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아니라 스탈린의 무관심 속에 놓여 있던 바빌로프가 모은 38만개의 종자였다.

 

누가보다도 비관적이고 절망적이고 냉소적인 상황이었다. 바빌로프는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에 의해 역적이 되어 총살형 선고를 받고, 종자를 보호해야할 스탈린은 종자에 관심이 없었고, 전쟁은 발발하여 독일군은 몰려오는 상황이었고, 추웠고, 배고팠다. 그러나,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끝까지 종자를 지켰다. 그 상황을 전하고 있는 문장은 이렇다.

 

연구원들은 문을 닫아건 채 얼어붙을 것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실에서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근무하며 계속 종자를 지켰다. 바빌로프의 동료 중 가장 헌신적이던 아홉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 (276쪽).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씨앗을 먹지 않았을까?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한 작가가 바빌로프의 동료였던 바딤 레흐노비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여러 달 굶주리는 동안 어떻게 씨감자를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었냐는 질문을 받은 레흐노비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하는 게 힘들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손발을 움직이기도 몹시 힘들었답니다. 하지만 씨앗을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럴 먹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씨앗에는 나와 내 동지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들어 있으니까요. (278쪽)

 

이에 대해, 정혜윤은 이런 문장을 이어간다. “그들은 씨앗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고 무화과나무가 되고 오렌지와 올리브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밀밭이 되는 모습과, 그것들이 빚을 받아 크고 튼튼해지는 모습과 벌과 나비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270쪽). 비관과 냉소 속에서, 지키고 있던 씨앗 종자들을 다 먹어버리고 함께 공멸할 수도 있었던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비관과 냉소가 가져다주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자신들을 내몰지 않고, 씨앗이 품고 있는 그 가능성들을 상상하며 끝까지 그것들을 지켜냈다. 죽음으로!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고, 그 어두운 마음 때문에 폭력과 혐오가 판을 치고,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들 만의 안위를 챙기려는 이기심이 극도로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부활 신앙이 더 필요한 이유는 그 비관과 냉소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서 갖게 되는 비관과 냉소를 물리치고,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열어 주시면,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안 될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기 전에, 기도하고 하라. 그러면 그 일을 마친 뒤에,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냈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열어 주셔서 할 수 있는 거야!”라는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한 감사가 쌓이면, 다른 사람을 혐오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비관과 냉소 가운데 폭력과 혐오와 극심한 이기주의로 치달을 수 있지만, 부활 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께서 열어 주실 것이고, 주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감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부활의 신앙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하기 전에, 짧게 기도하는 습관을 세우라. “주여, 열어 주소서. 주여,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주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일을 행하게 하소서. 주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이 판을 치는 시대에, 부활 신앙을 통해 비관과 냉소를 물리치고, 매순간의 기도를 통해 삶을 감사와 평안으로 채우며, 냉소와 비관을 잠재우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시 세워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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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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