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휘날리며]
(계 9:13-21)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는 대표적인 묵시 문학 장르의 성경책이다. 성경의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은 상징적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하여 현실을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실을 비유와 상징, 그리고 은유적 표현을 통해서 묘사한다. 감추어진 현실의 진실을 직접 묘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은유적인 언어는 감추어진 현실을 드러낸다. 또한 문시문학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서술된다. 역사의 최종적 결말과 하나님의 최후 심판 및 구원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 보이지 않는 역사를 보게 해 준다. 보이지 않던 역사가 보이면 인간은 희망을 품게 된다. 묵시문학의 또다른 특징은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둠, 하나님과 사탄 등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매우 모호하다. 선과 악(빛과 어둠, 하나님과 사탄)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묵시문학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하고 모호한 현실에서 선과 악의 구분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묵시문학의 특징은 천상적 계시의 메시지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형식을 취한다. 천사 또는 신적 존재를 통해 하늘의 신비가 인간에게 계시된다. 이것은 고난과 박해 속에 있는 현실 존재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묵시문학의 주된 목적은 위로와 희망이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고통이 반드시 끝나는 날이 오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을 준다.
요한계시록이 (고대) 묵시 문학의 형태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읽으면, 해석이 산으로 간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해석은 철저한 공부가 필요하다. 해석을 위해 기도, 계시가 필요한 게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을 철저한 역사적·문학적 연구 대신 오직 ‘기도’나 ‘계시’로만 주장하는 이들은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종종 사이비적 성향을 드러낸다. 요한계시록은 비밀(secret)이 아니라 비유(metaphor)다. 요한계시록을 ‘비밀’로 상정하고 푸는 사람은 모두 사이비다. 묵시 문학은 현실 세계를 직시한다. 묵시 문학은 역사 인식의 바탕 위에 쓰인 것이다. 묵시 문학은 현실의 고통에 집중한다. 그 고통의 원인과 근원이 무엇인지를 고발한다. 보통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과 근원을 잘 알지 못한다. 안다 할지라도 그 원인과 근원을 제거할 힘과 지혜가 부족하다. 묵시 문학은 현실의 고통에 감추어진 폭력을 상징 언어로 폭로한다. 폭력이 상징처럼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역으로 상징을 통해서 감추어진 폭력을 폭로하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즉, 진공 상태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기록되었다. 성경은 땅의 기록이다. 인간의 기록이다. 역사의 기록이다. 성경은 역사의 어떠한 사건에 대한 대응의 산물이다. 쓰여진 배경과 이유와 목적이 있다. 성경공부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나’(QT)를 살피기 전, 역사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가는 이 역사(시간) 속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어떠한 일(사역)을 해야 하는지 인식하여 역사 공동체로서의 온전한 일원이 될 수 있다. 역사적 맥락을 모른 채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과, 그 맥락을 알고 읽는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다음은 로마 군인들이 AD 70년경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자행한 대량학살의 희생자들에 대해서 묘사한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유대전쟁사)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참살을 당했고 이리저리 도망쳤다. 그들 대부분은 무기가 전혀 없었고, 적들에게 즉석에서 학살당했다. 죽은 자들은 번제단 주위에 아주 많이 쌓여 있었고, 성전의 계단으로부터 피가 엄청나게 많이 흘러내렸으며, 죽임을 당한 자들의 위쪽 시체들로부터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유대전쟁사. 6.420) 요한계시록은 이 역사의 반영이고 대응이다.
여섯 번째 나팔 이야기는 제국들에 의해 짓밟힌 유대인들(약자들/약소국들)의 비극이 서려 있다. 여섯 번째 나팔을 부니, 금 제단 네 뿔에서 음성이 나온다. 제단은 성도들의 기도가 바쳐진 곳이다. 거기서 음성이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뜻이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14절): 유대 묵시 문학에서 천사는 왕과 동일시 된다. 여러 제국이 유브라데 강을 넘어서 이스라엘 땅을 침략했다. 여기에서 네 천사는 이스라엘 땅을 차례로 지배했던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의 왕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풀려나 활동하도록 허락받는다(신적 수동태). 풀려난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로마 제국이 요한의 시대에 유대인들과 약소국들에게 행했던 잔혹한 폭력을 반영한다. 이는 문자 그대로의 묘사라기보다는, 로마 제국의 무자비하고 압도적인 폭력성을 표현한 상징적 이미지다.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19절): 이들의 살상력(죽이는 능력)은 꼬리에서도 나올 정도로, 완벽한 폭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이슈라는 노래처럼, 로마 제국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폭력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폭로한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상숭배 했다”(20-21). 로마의 부역자들은 살아남았다. 이들은 자신들(자신의 가족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았다고 좋아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자들을 ‘짐승의 숭배자들’이라고 요한은 일컫는다. 여섯 번째 나팔 이야기는 네 제국이 자행한 폭력적인 학살의 희생자들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고 재현하는 동시에 현재화한다. 이렇게 함으로, 로마 제국의 절대적 권력과 폭력에 대하여 항의한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을 밀정으로 오해했다가 독립군인걸 알게 된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은 "한 두 명 쏴 죽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며 암살 작전이 부질없음을 말한다. “솔직히, 조선총독부 사령관하고 강인국이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라고 안옥윤에게 묻는다. 이에 대한 안옥윤(전지현 분)의 대답은 특별히 기억될 만하다. “우리 만주에선 지붕에서 물이 새거나 벽이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어. 곧 독립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텐데 뭐하러 고치겠어.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일제 시대에 독립군들은 태극기 휘날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서 싸웠다.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다. 요한계시록 메시지의 핵심은 안옥윤의 대답과 다르지 않다.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 — “계속 싸우고 있다”는 존재의 증거 — 와 깊이 맞닿아 있다. 묵시문학은 ‘결과’보다 ‘저항의 지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요한계시록은 그 당시 로마 제국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묵시 문학 기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성경)의 일부분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로마 제국은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폭력을 가하고 무시했던 역사의 기록(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살아서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역사의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고 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요한계시록이 조선인의 독립 의식을 자극한다고 판단해 일부 교회에서 이 성경의 강해를 금지한 바 있다. 어디든지, 제국의 폭력, 국가의 폭력, 역사의 폭력이 있는 곳에서는 요한계시록 읽기가 금지된다. 왜 그럴까? 저항 세력을 키워내기 때문이다. 저항 세력에게 희망을 주고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힘이다.
요한계시록 휘날리며, 그리스도인들은 각종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형태의 국가 폭력에도 결코 동조할 수 없다. 만일 특정 종교세력이 폭력 권력에 편승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본질적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폭력에도 저항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국가의 평화를 가져오는데 가장 앞장서야 한다. 수많은 국민들이 깨어 있어 국가 폭력에 저항하여 평화를 되찾고 민주주의를 지켜줘서 고맙다. 헌재가 국민들의 염원을 이해하여 판결을 잘 내려줘서 고맙다. 다시는 이러한 황당무계한 비상계엄 같은 국가 폭력 사태가 고국 대한민국에 발생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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