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17. 18:16

잘생긴 모세

(출애굽기 2:1-10)

 

1.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각각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장에서는 7일간에 걸친 창조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데,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고 나서 인간은 제6일에 창조된다. 제 6일에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그리고 2장에서는 인간 창조에 대한 사뭇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1장과는 달리 남자가 독처(혼자 지내는 것) 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시고, 남자에게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어서 주시는 것을 본다.

 

2. 창세기 2장의 이야기를 보면,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이후에 여자가 창조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든 것으로 나온다. 하나님은 아담(남자/이쉬)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든 여자(하와/이샤)를 이끌어 아담에게 주신다.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여자(이샤)를 보고 아담(이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4-25).

 

3. 인간 창조에 대한 이 두 이야기는 분명 인간의 본성, 특별히 사회적 본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본성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일,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본성(fundamental nature) 이라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본성(nature)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면, 그렇지 않고서 출애굽기 2장의 시작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4. 요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는 출산율의 저조이다. 출산율 저조로 인하여 한국은 지금 ‘인구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별로 안 할 뿐 더러, 결혼을 해도 아기를 갖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낳지 않으니, 인구절벽을 경험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사회가 고령사회로 변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미래이다. 그런데,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보면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결혼을 하거나 아기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너무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인간의 번영은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도 가장 마지막 날인 제 6일에 이뤄진 것 아니겠나.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5. 출애굽기 2장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고된 노동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왕의 명령으로 인하여 사회적 집단 살해(genocide)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으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것일까. 너무 무모해 보인다. 1장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끔찍한 말로 끝나지 않는가.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무슨 병아리를 낳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낳는 것인데,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꼼짝없이 죽여야 할 상황인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일은 매우 무모한 일이고 비상식적인 일처럼 보인다.

 

6. 분명 수많은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던져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 더 윤리적인 행동 아닌가. 아기를 낳으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낳는 것 자체가 살인 아닌가.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본성만 생각하고 태어날 아기에 대해서는 너무도 배려를 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들인가. 출애굽기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기는 출산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7. 모세의 출생 이야기가 담긴 출애굽기 2장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2절이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레위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았으니 마땅히 나일강에 던져 죽여야 한다. 그런데 죽이려 보니까 그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살려 두었다. 그러면 그동안 못생긴 남자 아이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일까. 못생기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 현빈이나 송중기, 정우성 같은 남자만 살아남고 나머지 남자들은 다 죽어야 하는가. 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이 보면서 딱 걸려 넘어지기 쉬운 구절이다.

 

8. 모세에게 붙은 수식어, “잘생긴”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외모가 수려했다’는 뜻일까. 잘생긴’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레위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잘생긴 아이(fine boy. Fine child, beautiful child)’였다. ‘토브’가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 1장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면서 ‘좋다(토브)’라고 하시며 흐뭇해 하셨다. 출애굽기가 창세기와 분리된 성경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성경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는 아기 모세를 보고 ‘잘생긴(토브)’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모세의 탄생, 또는 모세는 새로운 창조이고 창조의 활동이다. 아기 모세에게 ‘토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그를 통해 무엇인가 예상할 수 없는 ‘창조의 일’이 발생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9. 창세기 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다. 세상은 죄로 가득했고,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한탄하시며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는 계획을 당대의 의인 노아에게 알려주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토브)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의 일을 시작한다. 바로, 방주(ark)를 만드는 일이었다. 노아는 방주를 창조해 피조물들을 구원한다. 이처럼 창조에는 구원의 목적이 담겨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창조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구원의 개념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곧 구원 행위이다.

 

10. 모세의 탄생이 창조와 구원의 드라마라는 것은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토브’한 아이는 점점 성장했고, 3개월이 지나자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서 ‘갈대 상자’를 만든다. 상자(테바)는 노아가 만든 방주와 같은 단어이다. 노아는 사람들(피조물들)을 홍수(물)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테바(방주)’를 창조했고, 모세의 가족들은 모세를 나일강(물)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테바(상자)’를 창조했다. 모세의 갈대 상자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의미이다. 물에 의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11.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모세의 가족들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낸다. 모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단 나일강에 바로 던진 것이 아니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풀어놓아 죽음을 지연시키긴 했어도 결국 죽게 될지, 아니면 구원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토브(선함/아름다움)’가 등장한다. 이집트 왕(바로)의 딸의 마음이다. 나일강에서 목욕하던 바로의 딸은 갈대 상자 안에 놓인 ‘히브리 사람의 아기’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

 

12. ‘히브리 사람’은 ‘노예 계급’이라는 뜻이다. 왕족이 노예 계급을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왕의 명령까지 있던 상황에서 왕의 딸이 노예 계급의 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를 죽이지 않고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아들로 삼는 것은 단순히 훌륭한 일이 아니라 ‘새창조의 역사’이다. 창조의 일은 이렇게 ‘토브’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어떠한 선한 일, 아름다운 일, 그래서 생명이 살아나고 풍성해지는 것을 보면 단순히 좋은 일,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토브(선하고 아름다운 것)’는 하나님의 창조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만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토브(선하고 아름다운 것)’를 경험했거든, 주님을 찬양하라.

 

13. 잘생긴 모세. 이것은 모세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잘생긴 모세. 이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신학적 진술이다. 고된 노동과 살해의 위협 속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토브’가 임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14.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신다. 잘생긴 모세의 탄생, 그것이 그 증거이다. ‘토브’가 탄생했다는 것,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생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죽이지 않고,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 갈대 상자를 창조했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의 갈대 상자는 이집트 왕의 딸을 통해 ‘구원’을 성취했다. 모세의 이름은 뜻은 ‘물에서 건져냄’이다. 이 이름은 앞으로 발생할 또다른 창조와 구원에 대한 예언이고 기대이다.

 

15. 지켜야할 소중한 것이 있는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인생/삶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자기 몸을 쓰다듬으며, ‘사랑해’라고 말해보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나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 친구들, 일터, 나라, 지구. 그리고 우리 신앙의 공동체 교회. 죽음의 위기에 처해져 있었지만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가족들의 사랑 덕분에 모세는 살았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구원의 은총이 임했다. 그래서 모세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양이 되는 인생이 된 것 아닌가.

 

16. 우리도 모세처럼 잘생긴 사람이 되면 좋겠다. 사실 우리는 이미 잘생긴 사람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품에 안긴 우리들을 보고 하나님은 이미 ‘토브’라고 말씀해 주셨다.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 잘생긴 사람.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창조의 일을 하고, 구원의 일을 하는 사람.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는 사람. 그리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고 보았을 때,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 그렇게 우리 모두 잘생긴 사람이 되면 좋겠다. “당신 참 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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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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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10. 17:37

십브라(Shiphrah)와 부아(Puah)

(출애굽기 1:15-22)

 

1. 21세기는 가히 동영상의 시대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여 자기 자신을 뽐낸다. 다른 말로 하자면, 21세기는 가히 ‘드라마’의 시대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갈망하는 시대, 동영상 드라마가 쏟아지는 시대, 드라마 시청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다. 책을 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동영상을 보는 사람은 넘쳐나고 있다. 옛날에는 “읽은 책 중에 무슨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가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시청한 드라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슨 드라마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2.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이 꽃피는 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4년 여에 걸쳐 방영된 이 드라마는 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청소년기와 함께 했던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스타덤에 오른 패표적인 연예인은 최수종과 이미연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수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다. 최재성과 최수지도 그들 중에 포함된다. 지금 시대 사람들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꾸는 이유는 아마도 드라마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를 하도 많이 보다 보니,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꾸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3. 성경이 문자로만 전달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만약 성경을 다시 써야 한다면, 문자보다는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배포하면 지금 시대에 더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될 거라 생각한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성서 보급을 위해서 이런 거 기획하면 좋겠다.) 최고의 작가들, 배우들, 감독들, 그리고 최신의 촬영기법을 동원하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드라마 형태로 동영상을 제작하여 성경을 다시 재구성한다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어떤 드라마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드라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책 자체를 읽기 꺼려하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성경 좀 읽으라’고 권면 또는 강요한다고 성경을 진지하게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하기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최고의 출연진과 제작진을 투입해 성경을 드라마로 제작해서 시청하도록 권면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성경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4. 이러한 생각이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 모든 성경이 라틴어로 보급되고, 모든 예전이 라틴어로 진행되던 때, 그러나 라틴어를 읽을 줄 알고 알아들을 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던 때, 성직자들이 성경과 예전을 독점하고 있었을 때, 일반 대중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복음)을 알린 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그림(성화)는 ‘가난한 자들의 성경’이라 불렸다. 성경이 비싸서 가난한 자들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림은 직관적으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그것에 대하여 상상하고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에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갔다. 이처럼, 라틴어를 모르는 중세인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성경의 이야기(복음)를 전달했듯이,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세대에게 드라마(동영상)를 통해서 성경을 전달하는 것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아닐까, 화두를 던져 본다.

 

5. 내가 만약 출애굽기를 드라마로 제작하는 감독이라면, 본문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 역에 김태희와 손예진을 캐스팅 하겠다. 그만큼 비중 있게 다루겠다는 뜻이다. 십브라와 부아,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반드시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라, 성경 저자(작가)의 의도이다(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한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15절). 애굽 왕은 보통 ‘바로’라고 표현되거나, 아니면 그 왕의 이름을 거론하여 표기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혀 그러한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출애굽기의 저자(작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애굽 왕’이라고 적음으로써 왕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6. 그러나, 이름 없는 왕과 매우 대조적으로 히브리 산파들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십브라와 부아.” ‘히브리(Hebrews)’라는 용어는 ‘하피루(hapiru)’에서 온 말로 그 당시 이집트 사회에서 ‘하층 계급의 사람들(low-class folks)’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후대에 기억되어야 할 사람은 애굽의 왕이고 전혀 기억될 수 없는 사람은 하층 계급 취급받았던 ‘십브라와 부아’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복적으로 기록한다. 애굽 왕의 이름은 전혀 기억하지 않고, 하층민이었던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게 성경이 가진 멋진 전복성이다. 하나님의 신비.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되는. 놀라운 신비.

 

7.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마주하는 세상은 ‘살고 싶은’ 드라마틱한 세상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드라마틱한 세상이다. 위협적인 왕,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반항하는 산파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게다가 우리는 점점 심해지는 핍박을 본다. 요셉을 모르는 애굽의 새로운 왕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된 노동을 부과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생명 자체를 해하려 한다. 그래서 애굽 왕은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 여인들이 아기를 출산할 때 돕다 그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후, 산파들이 본인의 명령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자, 생명을 해하려는 계획은 국가적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실행된다.

 

8. 쥐는 삶의 질에 대한 바로미터다. 쥐가 시도때도 없이 출몰하는 지역에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한 지역의 삶의 질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다. 쥐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는 도둑 대신 쥐가 드나드는 법이다. 못사는 나라일수록 위생의 문제 때문에 쥐가 들끓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한국이 지금처럼 부유하지 못할 때, 매일 아침 일과 중 하나는 집안에 설치해 놓은 쥐덫에 잡힌 쥐를 집 앞 개울물에 가서 죽이는 것이었다. 매달아 놓은 고구마를 먹으려고 쥐덫에 들어왔다 잡힌 쥐는 개우물에서 어린 아이의 불타는 사명감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지금 본문에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동일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22절).

 

9. 쥐와 같이 하찮은 미물 취급을 당하는 히브리 사람들, 더 정확하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존했을까? 국가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저질러지는 인간말살(genocide) 정책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하층 계급(low-class)’이었던 이스라엘이 생명을 잃지 않은 데에는 ‘보이는 거대한 힘’을 압도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꽃피는 이야기다. 생명이 꽃피는 나무.

 

10.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꽃피는 이야기는 두 가지의 큰 줄기를 통해서 전개된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내재된 생명력, 즉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이고, 다른 하나는 십브라와 부아의 용감하고 지혜로운 행동이다. 우리는 십브라와 부아가 꽃피는 생명에 대해 집중해 보려고 한다.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는 유명한 현대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것은 나치에 의해서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도 대학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다만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일어난 아우슈비츠 대학살이 우리에게 시간적으로 가까운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떠올리게 될 뿐이다.

 

11. 한나 아렌트뿐 아니라 2차대전 때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아우슈비츠 대학살(홀로코스트: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제물을 불러 태워서 드린 번제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대한 반성은 그 사건을 경험했던 20세기의 모든 서구 철학자들에 중요한 과제였다. “왜,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을 깊게 파고 들어갔던 두 명의 철학자가 있는데, 하나는 아도르노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 아렌트이다. 아도르노는 근대성이 만들어낸 이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고, 아렌트는 그 원인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12.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해하는데 있어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만큼 좋은 것도 없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면서 그가 어떤 악마가 아니라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그처럼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 있게 되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언어습관과 그의 ‘생각없음’에 주목을 한다. 그의 언어습관은 매우 관료적(별 생각없이 시키는 일만 하고 상투적인 용어만 사용하는 것)이고, 그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행하는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고, 아주 성실하게 상부의 지시를 따라 행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이런 것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그 사람이 아무런 사유(생각) 없이 행동을 하면 거대한 악을 불러오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속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

 

13. 본문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는 아이히만과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들은 생각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만약 산파가 아이히만 같이 아무런 생각없는 사람이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왕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진행된 학살정책을 통해 자취를 감추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파들은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극악무도한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다.

 

14.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을 꽃피우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진다”(페터 슬로터다이크,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다. 실제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을 때 ‘아니오’를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 오스카르 쉰들러(Oskar Schindler). 그의 일대기는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5. 나는 이 영화를 군대 있을 때 봤다. 하루는 내가 모시던 장군이 밤 늦게까지 안 주무시고 영화를 보시더니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나에게 물었다. “쉰들러 리스트 봤나?” 안 봤다고 대답하니, “꼭 봐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봤다. 그 이후 여러 번 봤다.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쉰들러가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자책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다. 그때 유대인 랍비는 쉰들러에게 감사의 뜻으로 반지를 주며 이런 말을 한다.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그래서 우리 주님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겠죠.)

16.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에 해를 가하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아니오(No)”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반대로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예(Yes)”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예”를 말하는 것에 더 길들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생명을 풍성케 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에 해를 가하고 있는 일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아니오”를 하면 불이익을 보게 되는 경우를 이 세상에서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장대한 출애굽 이야기의 첫 장면에 나오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을 마주하며, 생명에 해를 가하려는 일에 맞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아니오’를 말할 줄 알았던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이 성경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는 것의 뜻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도 그들처럼 혹시 살면서 생명에 해를 가하려는 일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을 향하여 ‘아니오’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17. 일부 사람들에게만 기억되었을지 모르는 쉰들러의 이름이 헐리우드 최고 감독의 손을 거쳐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로 거듭나 수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듯이, 그리고 그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듯이, 언젠가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도 좋은 드라마 또는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드라마 또는 영화를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그들처럼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하여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얻게 되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우리들부터 우리의 삶 속에서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을 기억하며,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말하며 생명을 보듬어가는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한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 이 세상이 좀 더 생명력 넘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꿈꾸고 소망하며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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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6. 16:08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출애굽기 1:1-14)

 

1. 2020년도도 다 못 산 것 같은데, 벌써 2022년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 중 가장 미스터리 한 것은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은데, 그 시간의 양과 질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시간의 본질은 같은 것일 텐데, 그 시간을 받아는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복된 시간을 살고 있기를 소망한다.

 

2.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출애굽기는 ‘베엘레’로 시작하는데, ‘베’는 접속사이다. 즉, 출애굽기는 창세기와 동떨어진 기록이 아니라 이어지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창세기 마지막에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축복이 출애굽기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접속사이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야곱을 통해 아들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어떻게 실현되고 보전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7절).

 

3. 여기까지만 보면, 야곱의 축복은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분위기가 드라마틱하게 전환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8절). 지금은 완전 사막으로 변하여 고대 문명의 문화재를 바탕으로 관광산업을 통해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고대 이집트(애굽)는 매우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는 거대한 강대국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피라미드만 보더라도 고대 이집트 문명이 얼마나 강성하고 풍성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4. 고대 이집트는 한 왕조가 연속적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지금은 정권교체를 할 때 같은 민족, 같은 나라의 어떠한 당이 집권하지만, 고대 이집트 당시에의 정권교체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 나라의 주인으로 등극하곤 했다. 그 정황이 8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이집트에도 극적인 변화가 생겼는데, 완전히 다른 민족이 이집트의 정권을 차지했고, 정권을 차지한 민족과 왕은 ‘요셉’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해서, ‘요셉의 신화’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 민족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5. 자료를 찾아보니까, 2016년도 5월쯤에 발생한 일인데, 그 당시 잘 나가던 어떤 걸그룹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퀴즈를 푸는 중 안중근을 알아맞히지 못해 대중들로부터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젊은 세대가 안중근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에 대한 퀴즈를 맞히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안중근의 신화’라고 하는 집단적 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뭇매를 맞은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국민적 영웅으로 ‘윤리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모르거나, 그에 대하여 합의되지 않은, 즉 비윤리적인 해석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면(가령,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으로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의 신화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풍요롭게 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을 하나로 모아주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한 나라의 윤리적 공공재인 것이다.

 

6. 이처럼, 요셉도 이집트에서 이러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이다. 창세기 41장 이후에 펼쳐지는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활약은 가히 민족적 영웅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요셉의 지혜를 통해 이집트는 가뭄 때문에 망하지 않고 존속했으며, 이집트의 주민들 뿐만 아니라 그 주변 나라들의 주민들까지도 기근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요셉의 신화는 가히 오래오래 사람들의 마음에 머물며 큰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7. 그런데, 그 신화가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안중근을 전혀 모르는 민족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해 보라. 안중근을 전혀 존경하지 않으며 안중근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여도 전혀 감흥이 없거나 영감을 얻지 못하는 민족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라. 안중근의 신화 아래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내 절망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요셉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애굽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요셉의 신화 아래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 어떨지, 눈에 보듯 훤하다.

 

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복을 받았는데, 바로 그 복 때문에 고난 당하게 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게 된다. 7절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인정하다시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복이다. 이스라엘은 비로소 약속의 성취를 맛본 듯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아주 이질적인 왕이 등장했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데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9-10절).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노동의 짐을 지워 괴롭게 하고 고통을 준다.

 

9.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 갑자기 저주로 바뀌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복 주셔서 번성하고 강해졌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고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요셉을 모르니,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이 내리신 복이 그들의 눈에 ‘귀하게’ 다가올 리가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복은 ‘찬양과 영광과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해야 할 두려움과 위협으로 다가온다.

 

10.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신앙은 그 어떤 것보다도 여정이다.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차츰차츰 알아가게 되고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 즉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깊어지고 있는가.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있는가.

 

11. 요셉과 그의 형제들 간에 발생한 일을 보면, 신앙이 무엇인지 좀 더 알게 된다. 요셉은 ‘꿈 꾸는 자’였다. 그 꿈은 요셉 자신의 헛된 꿈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 즉 비전이자 사명이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꿈을 무시하고 비난했다. 급기야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 질투하여 그를 애굽으로 향하던 노예상에게 팔아 넘기기까지 했다. 무슨 뜻인가? 그 당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신앙이 별로 깊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그들은 요셉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지 못했다.

 

12. 결국, 신앙이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는 것이다. 요셉을 노예상에 팔아먹을 때만 해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던 요셉의 형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갔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덕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았던 야곱은 부지런히 자식들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이끌었다. 즉 그들에게 신앙을 주었다(부모의 역할/사랑을 많이 주라. 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려주라.). 세월이 흘러, 요셉과 형제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복을 언급하며 울었을 때,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내리신 복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창세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13. 출애굽기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또는 하나님을 모르는 열방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출애굽’이 무엇인지를 여기에서 배우게 된다. 출애굽이란 어떤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 즉 신앙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상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출애굽이다.

 

14.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지 못해 하나님의 복을 두려워하고 그 복을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해 대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 서지 못한다. 출애굽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또다른 구약성경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불러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보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 설 수 없었다. 발락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가던 발람은 결국 하나님께 이런 음성을 듣는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

 

15.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자는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말에 익숙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더 익숙하고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말은 ‘원복(original blessing)’이다. 신학적으로 말해,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원죄를 넘어서 원복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최초의 축복은 무엇인가? 번성하고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삶을 가로막고 있어 여러분을 두렵게 하거나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거든, 오히려 하나님을 더 힘써 알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신앙이 더 깊어지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더욱더 풍성해지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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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29. 14:37

사랑 받은 사람이 십자가도 진다

(누가복음 2:41-52)

 

1.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선호하는 인물은 ‘솔로몬’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솔로몬’같은 지혜를 얻어 공부를 잘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사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구한 지혜는 공부 잘 하게 해달라는 지혜가 아니라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있는 지혜였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혜’를 얻어 공부를 잘 하게 되고, 그리고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앞가림 잘 하며 살아가기를 간구한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은 이렇게 늘 애잔하다.

 

2.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두 번째로 선호하는 인물은 ‘다니엘’이 아닌가 싶다. 다니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재상에 올랐기 때문에 그처럼 아이들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래서 아이들이 다니엘처럼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이 선호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친구들 때문일 것이다. 다니엘에게는 세 명의 신실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다니엘을 떠올리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다니엘처럼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3. 그렇다. 아이들에게 ‘지혜’와 ‘좋은 친구들’이 있다면, 부모의 입장에서 흐뭇할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얻게 되고, 다니엘과 같이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듯싶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솔로몬의 이야기도 좋고, 다니엘의 이야기도 손색이 없지만,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정말로 많은 영감을 준다. 솔로몬의 지혜와 다니엘의 친구들을 간구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 일은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4. 예수님이 탄생할 때의 이야기 빼놓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누가복음 2장 외에는 없다. 열 두 절로 되어 있는 이 짧은 이야기는 아주 깊은 신학적, 인문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예수의 역할은 매우 수동적이다. 그러나 이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예수의 역할을 매우 능동적이다.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예수이다. 그는 부모님을 따라 순례의 행위로서, 그리고 신앙의 행위로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지만, 그곳에서 행한 일은 매우 독특하다.

 

5.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율법을 진지하게 지켰던 요셉과 마리아는 마을 사람들과 무리를 이루어 4, 5일 걸렸을 순례의 여정을 떠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잘 도착했고, 예배도 잘 드렸고, 무리들과 함께 집으로 귀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리 속에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찾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전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예수를 발견한다.

 

6. 그런데,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 간의 대화가 참 흥미롭다. ‘선생들(the teachers)’ 사이에 있던 예수를 발견한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모른다”(48절). 당연한 어머니의 반응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49절). 열 두 살 먹은 아이가 어머니에게 하는 대답 치고는 매우 당돌하다. 예수는 부모님이 자신을 찾아 다녔다는 것 자체를 의아해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평소 행동을 생각해 보았을 때, 부모님은 자신을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7. 예수는 나사렛에 있을 때도 언제나 회당에 가서 ‘선생들’과 시간을 보낸 듯싶다. 그래서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제가 어디를 가나 회당에서 선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뭣 하러 저를 찾아 다니셨어요. 그냥 여기로 오셨으면 바로 저를 찾으실 수 있었을 텐데요.” 그렇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부모들은 괜한 걱정을 한 것이고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맨 것이다. 예수의 평소 습관을 생각했더라면,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데 갈 필요 없이, 걱정할 필요 없이, 선생들이 있는 곳에 갔으면 될 일이었다.

 

8. 우리는 수많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말씀이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영어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Why were you search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NRSV)”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이미 열 두 살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self-consciousness)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았고, 또한 자기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줄 알았다.

 

9. 열 두 살 밖에 안 된 어린 예수가 보여주는 이러한 자의식과 신앙은 솔로몬에게 있었던 지혜, 그리고 다니엘에게 있었던 친구들과 더불어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간구해야 하는 삶의 자세이다. 지혜를 간구하고, 좋은 친구들을 간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자의식을 갖는 것과 신앙의 간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삶의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부모들이 아이를 신앙인으로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가 있기를, 그리고 다니엘이 받은 축복처럼 좋은 친구들이 있기를 간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자의식(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이 생기고, 그 자의식(self-consciousness)을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God’s purpose for one’s life)과 연결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10. 지혜를 얻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 두 살 먹는 어린 예수에게서 보듯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즉 순종을 배우는 것은 신앙인의 최고 경지이고 삶의 꽃이다. 우리의 인생이, 또한 우리 자녀들의 인생이 지혜를 얻어서 공부를 잘 하게 되고 그래서 유능한 인재가 되고, 또한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화려한 인맥을 쌓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서만 멈추고 만다면,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의 목적이라면, 이 얼마나 사사롭고 기복적인 신앙이고 인생인가. 믿는 사람의 인생과 안 믿는 사람의 인생이 무엇이 다른 게 있겠는가.

 

11.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우리의 인생을 사사롭고 기복적인 인생에 머무는데 그치게 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공적인 영역으로, 무엇보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구원 사역에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순종은 운명이나 정치적 강압처럼 우리의 인생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평안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영원한 생명)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순종은 곧 믿음인 것이다.

 

12.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Did you not know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 이 말은 한 어린 예수는 그냥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를 예루살렘에 머무르게 하고 아이의 명민함을 알아본 선생들에게 맡겨 유학 시켰을 텐데, 어린 예수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 시골로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부모님과 함께 머물며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낸다. 순종은 일차적으로 선생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13. 마지막 구절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점점 더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52절).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성장하면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는 이것을 ‘in favor with God and men’이라고 표현한다. ‘favor’는 영어의 다른 단어로 ‘grace’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은혜 또는 은총’을 입는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호의(favor)’를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따스한 마음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14.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들로부터만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간구할 때, 우리는 지혜와 좋은 친구들에 대한 간구에 더해서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받기를 반드시 함께 간구해야 한다.

 

15. 예수님의 삶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십자가 위에서 기꺼이 자기의 생명을 바쳐 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단순히 메시아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는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서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태어났고, 그는 어린 시절을 겪었으며, 그는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오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기꺼이 달릴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가 살면서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이다.

 

16. 예수님이 살면서 사랑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던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수포도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 뜻을 이루었다. 바로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 받은 사람이 십자가도 진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결국 구원을 낳는다. 우리 더 사랑하고, 우리 더 십자가를 지자.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사람으로서 각자 삶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자. 각자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서로 사랑하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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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20. 15:35

마리아, 아베 마리아!

(미가 5:2-5a / 히브리서 10:5-10 / 누가복음 1:39-45 / 누가복음 1:46-55)


1. 기독교는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1054년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 논쟁’을 통해서 둘로 나뉩니다. 그러고 보면 ‘교리(doctrine)’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견해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분열을 경험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교리’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분열을 경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같은 주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서로 무슨 원수라도 된 것처럼 분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도 아프고,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2. 가톨릭과 개신교는 대표적인 서방교회의 전통을 지닌 교파입니다. 개신교인들에게 동방교회는 매우 낯설지만 가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같은 신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아주 가까운 사이죠. 그런데,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때로는 더 심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한 부모를 둔 형제자매가 남들보다 더 심하게 다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한 부모를 둔 형제자매가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같은 신학적 뿌리를 둔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도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3.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에 발생한 종교개혁을 통해서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이처럼 개신교는 동방교회로부터 분리된 게 아니라, 서방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파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분리되기 이전에는 한 식구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분리된 이후로 마치 원수처럼 싸웠습니다. 가톨릭 진영과 개신교 진영 간에 참 전쟁도 많이 했습니다. 대표적인 전쟁이 1618년에 발발하여 1648년에 끝난 30년 전쟁이죠. 이 전쟁으로 인해 자그마치 800만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두 진영 간에 좋게 지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4. 그런데, 저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400년 전에 발생한 전쟁이고, 그것도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인데, 우리 한국인들이 그 전쟁 때문에 가톨릭인과 개신교인 사이에 좋지 못하게 지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었기에,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고통 당했던 전쟁이었기에, 그 전쟁을 통해 일본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 있으나, 우리가 유럽에서 발생한 400년 전의 전쟁 때문에 서로를 미워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를 보면, 누구에게서 그 미움이 전가됐는지 모르게, 한국의 가톨릭과 개신교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특별히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참 기이한 현상이죠.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랑은 잘 전달이 안 되는데, 미움은 참 잘 전달되는구나.’

5. 개신교인으로서 가톨릭을 생각할 때 가톨릭의 어떠한 교리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 십중팔구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개신교인들은 대개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존재를 숭배하는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가톨릭은 정말로 마리아를 숭배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신교인들의 오해입니다. 가톨릭은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개신교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신학(Mariology)’입니다. 개신교인들이 마리아에 관해 오해하는 이유는 가톨릭의 ‘마리아 신학’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6. 마리아 신학은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마리아 신학은 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이에서 나온 신학입니다. 종교개혁 전까지 개신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서방교회, 즉 가톨릭 교회만 존재했는데, 그때까지 마리아 신학은 사도신경에서 지금도 우리가 고백하고 있듯이, 마리아의 동정녀 신학과 마리아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떼오토코스)’라고 부르는 신학이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부르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통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7. 이러한 신학에 근거를 제시하는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건네는 인사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 1:28). 이 구절을 라틴어의 두 자로 줄여서 표현한 것이 바로 ‘아베 마리아(Ave Maria)’입니다. 한국말로 옮기자면, “안녕하세요, 마리아님!”, 또는 “마리아님, 만세!”입니다. 영어로는 “Hail, Maria.”로 옮깁니다. 그러니까 ‘아베 마리아’는 그냥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이미 거기에는 신학적 고백이 들어간 인사인 것이죠. 위에서 말했듯이, 마리아는 그냥 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잉태한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고백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개신교인들도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고백하는 것도 개신교인들의 신앙(교리)에 포함됩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대개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은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기독론과 관련해서 마리아에 대한 신학을 전개할 뿐, 그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개신교는 마리아에 대한 예배적 쓰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마리아에 대한 찬가를 예배 시간에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차이 중 하나입니다.

9. <아베 마리아>는 굉장히 널리 알려진 음악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있고,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제목만 그렇지 실제로는 ‘마리아 찬가’가 아닙니다. 곡의 앞 뒤에 ‘아베 마리아’라는 구절만 나올 뿐 나머지 가사는 모두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서사시 <호수의 여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죠. 제목은 <아베 마리아>이지만 실제로는 마리아에 대한 찬가가 아니라 그냥 대중적인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구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에 멜로디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슈베르트의 것과는 달리 마리아 찬가입니다. 곡에 마리아 찬가 가사가 붙어 있습니다.

10. 우리는 마리아를 이렇게 교리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합니다. 가톨릭은 너무도 발달된 마리아 신학 때문에 ‘여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하고, 개신교는 마리아 신학이 너무 없고 오히려 가톨릭의 발달된 마리아 신학에 대하여 반발하느라 ‘여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죠. 그러나 우리가 교리적인 접근을 내려놓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여인 중에 마리아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여인도 없을 겁니다.

11. 우리는 마리아에게 교리를 덧 씌워, 평생 동정(The Perpetual Viginity), 하나님의 어머니(The Divine Maternity),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에 덧 붙여진 마리아에 대한 교리 무염시태(The Immaculate Conception / 마리아에게는 원죄가 없다), 그리고 성모승천(The Assumption)을 말하지만, 인간 마리아의 고뇌와 결단에 대해서 쉽게 간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무 살도 안 되었던 한 소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그녀가 감당해야만 했던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런 욕망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마리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인생 전체가 바뀌는, 새창조의 역사입니다.

12. 요즘으로 말하면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던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 즉 자기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에 동참하고 순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웠고, 불안했고, 초초했고, 근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것을 감당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이것은 그녀의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순간이고,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13.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듣고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리아가 받은 수태고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마리아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발생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대해서 털어놓았다면, 아마도 부정한 짓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 핑계 댄다며 곧바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달랐습니다. 엘리사벳 부부는 이미 앞서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을 맛보았던 이들이라 마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4.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순종의 의미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셨으면 하는 은혜는 사실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은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은혜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편견과 왜곡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창조 사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15. 물론 이러한 순종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 줄리가 없습니다. 마리아처럼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을 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듣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러한 순종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한 겁니다. 만약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끝까지 순종하지 못했을 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순종을 비하하는 말만 듣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가혹한 핍박만 받고 말았다면, 마리아는 어느 날 언덕에 올라 하나님을 저주하며 자신에게 임한 ‘수태고지’를 파기(요즘 말로 ‘낙태’)했을 지 모릅니다.

16. 그러나, 마리아는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낳았고, 그를 길렀으며, 그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녀가 그러한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곁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순종의 도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간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당신 덕분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17. 마리아, 아베 마리아! 우리는  개신교인들이라 예배 시간에 마리아 찬가를 비록 부르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고 마리아가 끝까지 순종할 수 있도록 그녀를 보듬어준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거든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새창조 사역에 동참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그러한 순종과 결단을 소중하게 여기며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신앙 공동체가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메리 크리스마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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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17. 13:35

구원은 온다

(이사야 12:2-6, 스바냐 3:14-20,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3:7-17)

 

1. 빌립보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바울은 기뻐할 것과 기도할 것에 대하여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기뻐해야 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기뻐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는 생각이기도 하고, 틀린 생각이기도 하다.

 

2. 제임스 스미스가 쓴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을 보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욕망하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 또는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욕망의 문제와 관련 있다. 본인이 욕망하던 바로 그것을 손에 넣거나 성취하면 우리는 기뻐하게 되고, 본인이 욕망하던 것에 대하여 좌절을 경험하면 우리는 기뻐하지 않는다.

 

3. 그러니까,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한 것은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욕망을 두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4.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표지(sign)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참 좋은 말씀이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3-15).

 

5. 기뻐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분명 믿음의 표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훈련이 필요하다. 기뻐하는 훈련, 그리고 기도하는 훈련. 실 없이 기뻐하는 게 아니다. 소망 없이 기도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 부른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아닌가.

 

6. 임마누엘 신앙은 어려운 현실을 맞닥뜨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현실을 뛰어넘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우리가 살펴본 이사야의 말씀과 스바냐의 말씀 안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했고, 구원을 경험했고, 구원을 증언했다. 그들에게 구원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팍팍한 현실이 아니라 그 팍팍한 현실 가운데서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7.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습 3:17, 19). 이러한 문장들은 그냥 상상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경험한 이들이 온 힘을 다해서 증언하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 그 자체다.

 

8.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기대는 모두 출애굽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 거대한 구원의 경험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작고 큰 일 가운데서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다. 여기서 그들이 구원을 ‘기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은 굉장히 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구원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임재하심 자체가 주는 결과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9. 구원이란 가량 이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나를 찾을 때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본인들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이다. 그 중에서 나를 가장 열렬히 찾는 때는 본인들이 하는 게임에서 어떤 아이템을 구매하고 싶을 때이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나를 아주 열렬히 찾는다. 아이들은 내가 자신들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본인들 앞에 나타나면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곧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나의 임재와 나의 임재를 통한 문제의 해결은 그들에게 ‘구원’이 된다.

 

10. 이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약간의 비유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 차원이 훨씬 깊다. 우리는 흔히 문제의 해결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다.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면,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는 문제의 해결을 수반한다. 수많은 무리들이 줄지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위해 따른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였다.

 

11.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구원이 임하는 경우도 있다. 바울이 대표적이다. 바울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다. 그 병을 고쳐 달라고 바울은 주님께 세 번 기도했다. 아주 간절히, 아주 깊고 높은 경지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네 은혜가 족하다”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강함은 곧 약함에서 나온다는 고백을 한다. 바울은 비록 병 고침을 받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구원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 전체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12.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리는 구원에 대한 ‘기대’는 세례 요한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예언한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6).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던 시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세례 요한에게 나아왔다. 구원을 간구하는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13.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례 받으러 나아온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군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그들은 왜 주변에 헐벗은 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나누지 않고 두 벌이나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왜 굶주리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서도 먹을 것을 나누지 않았을까? 세리들은 왜 부과된 것 외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을까? 구인들은 왜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이게 참 아이러니컬한 것이지만, 그들은 ‘구원’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옷 두 벌 가지고 있는 것, 남들보다 음식을 많이 쟁여 놓는 것이었고,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여 뒷돈을 챙기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4.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들이 행했던 일들은 ‘구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무엇이 구원인지를 올바로 가르쳐 준다. 올바른 구원을 알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거짓 구원을 행하느라 삶을 낭비하거나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15. 옷 두 벌을 가지고 있고, 먹을 것을 쟁여 놓고, 부과된 것 외에 더 거두고,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떠한 행위를 가리킨다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언어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표지판이 되어 구원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을 안다면,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우리에게는 두 벌의 옷이 필요 없고, 음식을 쟁여 놓을 필요 없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고, 부과된 것 외에 더 거둘 필요도 없고, 강탈하거나 거짓으로 고발할 필요도 없고,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어진다. 한마디로, 강퍅하게, 악하게 사는 이유는 구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6. 우리는 왜 기뻐하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도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도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구원은 온다.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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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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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6. 16:26

대림절과 메타노이아

(말라기 3:1-4 / 빌립보서 1:3-11 / 누가복음 1:68-79 / 누가복음 3:1-6)

 

1.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읽게 되어 있는 성서정과(Lectionary)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네 개의 복음서는 모두 세례 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네 개의 복음서 중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비해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은 누가복음 뿐이다. 우리는 누가복음이 전해주고 있는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2.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부부에게 ‘불임’은 예나 지금이나 큰 고통이다. 세례 요한의 부모도 불임으로 고생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들은 제사장 가문이었고,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율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이들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늙어갔다. 이들의 이러한 상황은 분명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3.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이삭이다. 또한 사사기에 등장하는 불세출의 영웅, 마노아의 아들 삼손이 떠오른다. 또 있다. 엘가나와 한나, 그리고 그들의 아들 사무엘이 떠오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분명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불임 이야기를 통해서 구약의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을 호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세례 요한은 새 이삭, 새 삼손, 새 사무엘이라는 뜻이다. 세례 요한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누가복음은 이 사람을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4. 요한은 히브리어 ‘요하난’에서 왔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이다. 그의 이름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요하난에 포함된 ‘하난’은 히브리어 ‘테힌나’와 관련이 있고, 그것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뜻한다. 경건한 사람 사가랴와 엘리사벳, 특별히 제사장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전 출입을 정기적으로 했던 사가랴는 자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자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마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엘가나와 한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아주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5. 이러한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에 우리의 마음이 찡해지는 이유는 그러한 기도를 드렸던 신앙의 선배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감동적이어서라기 보다는,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그러한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가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간절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생명력 있게 살고 싶어한다는 증거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삶이 버려지고 포기된 상황이다.

 

6. 히브리어 ‘테힌나’는 ‘간구’라는 뜻이다. 이것을 그림언어로 표현하면, ‘항복을 하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이다.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찬송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이다. 우리의 인생을 슬프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이고, 우리의 인생을 기쁘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우리를 울리기도 하고 웃게도 만든다. 그게 인생 아닌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면, 그것을 인생이라고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간절함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7.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에서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절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간절함이 그를 성실하고 신실한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간절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너무 다행이고, 너무 감사하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테힌나)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요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절함이 배어 있는 이름이고,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이름이다. 참 좋은 이름이다.

 

8. 대림절은 이렇게 ‘간절함(테힌나)’의 절기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이 절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기쁨을 증진시키는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대개 그 간절함은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감춰져 있는 그 간절함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친구인 것이다. (이런 친구가 있기를!)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멈추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으라. 대림절기에 ‘요한’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이것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9. 요한의 출생 소식과 함께 요한에게 쏠렸던 기대감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요한은 그야말로 기대주였다.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 되려나,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요한의 삶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진행된다. 제사장의 아들이니, 사람들은 그가 커서 대제사장이 되어 큰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히려 요한은 그 기대와는 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광야로 나가 기존 종교와 정치 체제에 비판을 가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10. 요한이 성전 밖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기존의 종교 체제에서 죄사함은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요단강으로 불러 모았고, 그곳에서 동물의 피를 쏟고 삶을 태우는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요단강의 깨끗한 물로 그들을 씻는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없애 주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 대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위해서 였다.

 

11. 우리는 요한의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나 자신이 또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례 요한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빛나기 좋아하고, 주목 받기 좋아하고,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시대에 세례 요한처럼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을 가리키는 사람으로, 명소가 아니라 명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의 이름이 담고 있는 ‘간절함’, ‘테힌나’의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면서도, 우리의 기도 자체가 요한처럼 되게 해달라는 기도 드리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2.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줄 알면서, 또는 ‘작은 예수’라는 용어를 좋아하면서도, ‘작은 세례 요한’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는 드릴 줄 모를 뿐더러, ‘작은 세례 요한’이라는 용어 자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가 되고 싶은 메시아 병에 걸려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처럼 작은 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작은 메시아의 역할이라도 감당하며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름을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지워버린다. 우리는 ‘작은 예수’는 될 수는 있어도 ‘작은 세례 요한’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대림절기는 오히려 우리를 ‘세례 요한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 다른 말로 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것을 권장하는 세상에서,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서 ‘메타노이아’ 해서 그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드리는 삶으로 돌아서게 한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이 ‘작은 메시아’라는 의식 자체가 없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내 뒤에 오시는 이”, 즉 메시아를 가리키는 사람이다. 성경을 통틀어 온 인생을 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가리킨 사람이 요한보다 더 했던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눅 7:28).

 

14. 대림절기는 무엇보다 요한의 ‘메타노이아’를 묵상하는 절기이다. 우리말로 ‘회개’로 불리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히브리어의 ‘니함’ 또는 ‘슈브’를 옮긴 말인데, 그 뜻은 “반대방향으로 돌아선다”는 뜻이다(헬라의 군대가 행진하다 ‘메타노이아!’하면 ‘뒤로 돌아가!’가 된다.). ‘회개’가 ‘죄를 뉘우침’이라는 좁은 의미로 쓰이는 것과는 달리, 메타노이아의 뜻은 방향전환이다. 오시는 주님(메시아)을 만나려면 방향의 재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되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림절은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서 메타노이아(돌아서서)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본다.

 

15. 우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테힌나’의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테힌나’의 뜻이 ‘항복하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인 것처럼,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길,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라면서 주님께 항복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 것 자체가 ‘메타노이아’이다. 항복하기 위해 손을 드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방향을 향해 손을 들었냐이다. 항복해야 할 대상이 내 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 두 손을 들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6. 이 대림절기 동안, 오시는 주님을 오롯이 가리켰던 세례 요한을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되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고, 사람들이 실로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렸던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아주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최고의 명예롭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17. 방향을 돌이켜(메타노이아), ‘작은 예수’가 되려 하기 보다, ‘작은 세례 요한’이 되는 삶을 한 번 묵상해 보면 좋겠다. 겸손(케노시스)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진실로 겸손했던 사람과 마주하면 좋겠다. 우리의 삶이 세례 요한처럼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 되면 좋겠다. 세례 요한과 가까운 삶을 살면 살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도 그가 들었던 명예로운 축복의 말씀을 동일하게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었다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우리보다 큰 자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은 아무개를 위해 잠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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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8. 21:45

하나님의 구원은 멈추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 3:9-13)

 

1. 한국 기독교를 보면 용어 문제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이 참 어렵다. 하나님과 하느님, 교회와 성당, 세례와 침례, 바울과 바울로 등,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는데도 용어가 다르다 보니 마치 존재가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영어의 Advent, 즉 대림절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대림절과 대강절 그리고 강림절, 이렇게 세 가지 용어로 불리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도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가 충분히 녹아 들어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더 발전하고 성숙해지고 영향력을 가지려면, 용어의 일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해 본다.

 

2. 나는 Advent를 ‘대림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오심을 기다림’이라는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시는 것은 그리스도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들이다. ‘오심을 기다림’이란 그리스도와 우리들이 하나가 될 때 의미 있는 것이다. 오신다고 해도 기다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기다린다 해도 오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은 하나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다림 자체가 믿음인 것이다.

 

3.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은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신앙 중 가장 핵심적인 신앙이다. 신약성경 중 가장 먼저 쓰였다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는 온통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처음 성경인 데살로니가전서가 그렇다는 뜻은 초대교회 사람들, 특별히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 아직 살아 있던 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은 ‘종말신앙’이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세상의 파괴(파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4.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에서 종말신앙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자취를 감추었다기보다 덜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오심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른 말로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면서 종말이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되었다는 데 있다. (폴라 구더, <기다림의 의미>, 41-42쪽) 마치 넷플릭스의 최신 드라마 <지옥(Hellbound)>에서처럼 말이다.

 

5. 그리고 요즘 대림절은 기다리는 거를 싫어하는, 아니 견디지 못하는 시대에서 거부당하고 있고, 기독교 내에서는 대림절이 성탄절에 잡아 먹힌 듯하다. 적어도 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기다리는 일은 그 자체가 낭만이었는데, 요즘은 기다리는 것 자체가 짜증인 시대가 된 듯하다. 습작할 때 쓴 조잡한 시이지만, 옛날 친구들과 약속 장소를 잡고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며 쓴 시도 있다. “말죽거리 국민은행 앞에서 만나”, 이런 문장이 들어가는 시다. 그때는 약속 시간 정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 친구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기다림’이 생활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기다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시대다. 그렇지 않은가. 약속 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짜증내는 시대. 인터넷이 조금만 느려도 짜증내는 시대.

 

6. 기록시기가 복음서보다 빠른 바울서신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안 나오고 온통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정하여 지키고 있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즉 세상의 종말이 있을 때, 예수님처럼 본인들도 부활하게 될 것을 믿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7. 부활이 무엇인가? 부활이 곧 구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이다. 생명의 완성(Fullness of Life). 우리는 이것을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완성을 갈망한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반쯤 만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죄’를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정죄하여 죄책감이 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생명을 해치고 생명의 완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소극적 구원)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적극적 구원)이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신앙이 곧 죄책감을 갖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거기엔 기쁨이 없고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나쁜 사람들은 그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처럼 말이다. (2019년 7월 13일, <두 편의 영화와 한 번의 강의>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죄론의 이해’라는 특강을 하면서 말했던, 죄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라마다.)

 

8. 생명의 완성. 너무 가슴 떨리고, 벅차고,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살면서 늘 뭔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느낀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지(생명이 풍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의 생명이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고, 그 절대생명(완성된 생명)이 지금 오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9. 바울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0절). 이것은 2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정말 믿음이 부족하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강조했지만) 믿음의 실종은 사랑의 실종을 반드시 불러온다. 대림절 신앙은 종말신앙인데, 기독교의 종말신앙은 사람들에게 많이 오해되고 있듯이 피비린내 나는 파멸과 파괴, 죽음이 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룬 것이다. 생명의 완성을 이룬 자는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랑의 일을 한다.

 

10.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보라.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12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과 그의 일행은 자신들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것을 ‘자족’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과 그 일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이루었기에 생명의 풍성함을 느꼈고, 그 풍성함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했다.

 

11.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먼저가 아니다. 믿음이 먼저다. 그들의 부족한 믿음이 먼저 보충되기를 원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이 굳건하게 갖게 되기를 바라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믿음이었다.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하나 둘씩 그리스도의 오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 중 어떤 이들은 믿음을 잃어갔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랬는데,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심하겠는가.

 

12. 믿음을 잃어가는 일은 사랑을 잃어가는 일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의 심장을 딱딱하게 만들 뿐이다.

 

13. 어떤 분이 이러한 농담을 하는 것을 봤다.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개와 사는 것이다.” 이게 왜 더 큰 문제일까? 개와 사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개와 살아야 할 만큼 외롭다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오강남 교수의 페북에서). ‘외롭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을 보면, 인간들의 상실감,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우울함, 그것을 좀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처절한 노력들이 잘 그려져 있다) 이렇게 사랑이 없어 외로운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이 회복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이 좀 더 굳건해져야 한다. 믿음의 상실은 사랑의 상실을 불어오니 때문이다. 거꾸로, 믿음의 굳건함은 사랑의 풍성함을 불러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14. 하나님은 구원을 멈추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생명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증거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대림절을 지킨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시작된 생명의 완성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삶,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랑이 없어 외로움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이길 힘은 믿음 밖에 없다. 구원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일(대림절기를 지키는 일)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을 주는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이다. 구원하기를, 생명의 완성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우리네의 이 메마른 삶에 활기를 주는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 하나님을 구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좀 더 힘을 내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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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1. 20:59

믿음과 미래

(요한일서 5:1-12)

 

1. <레 미제라블>을 좋아하세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장 발장(Jean Valjean)’은 정말 유명인사죠. 아마 ‘레 미제라블’보다 ‘장 발장’이 더 유명하지 않나 싶네요. 이 소설은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성경의 ‘요한’을 매우 좋아했나봐요. 프랑스어로 ‘Jean(장)’은 영어의 ‘John(존)’이고, 한국어의 ‘요한’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 외에도, 프랑스에는 ‘장(Jean/John/요한)’이라는 이름(first name)을 가진, 유명인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 이름들을 굳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2. 작품은 어느 한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레 미제라블>이 1862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서양의 역사 중,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하냐면, 역사에서 비로소 시민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에요. 그 이전까지 만해도 인류의 역사는 권력을 모두 소유한 한 인간, 즉 왕이 나머지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들이 거기에 반기를 들면서 한 인간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시민 각자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듭니다. 몇 년 후, 1793년에 루이 16세는 시민들에 의하여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이건 굉장히 혁명적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왕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일반 시민은 넘쳐 났어도, 시민에 의해 왕이 단두대에서 죽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3.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두 차례 더 일어났었는데, 짐작하다시피, 그 싸움은 권력을 지키려는 왕과 귀족들, 그들에게 다시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싸움이었죠. 누가 이겼을까요? 시민들이 이겼습니다. 그 덕분에 역사는 ‘민주주의’ 시대를 엽니다. 왕, 한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인 시대가 열린 것이죠. 그런 점에서 1848년 2월 혁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1848년 이후, 세상은 왕정체체/또는 귀족체제를 벗어버리고, 민주주의 체제로 들어섭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현재 우리의 지도자(대통령)를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뽑아준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것이고요.

 

4.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레 미제라블>은 그 제목이 보여주듯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주목합니다. 왕정체제/귀족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체제가 왔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롭고 정의롭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인간의 온갖 욕망이 함께 튀어나왔기 때문에, 사회는 엄청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죠.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주조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에서 자유(Liberty)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소유물을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자유를 말한다. 즉, 사유재산의 개념이 이때 생겨난 것이죠. ‘평등(Egality)’도 ‘너랑 나랑 똑 같은 인간이야’라는 뜻이 아니라 ‘법 앞에서의 평등’을 말합니다.

 

5. 19세기 혁명들 이후 발전된 민주주의는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자유를 강조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진영과 다른 하나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진영이죠. 두 진영 모두 인간의 번영을 도모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사회주의 진영(공산주의)은 획일적인 평등을 강조하다가 인간성을 훼손시키며 몰락했고,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은 사적인 소유를 강조하다가 인간성을 훼손시키며, 더 나아가 자연 자체를 훼손시키며 몰락해 가고 있죠. 우리는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자유가 사적 소유의 자유,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에만 머물고 말면, 결국 그 자유가 칼이 되어 인간을 겨누어 인간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터전인 자연까지도 해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8.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을 부여잡고 시작한 민주주의가 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더 불행하게 만들었을까요? 요즘 우리 시대에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보세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일 하는 게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로워하고, 무엇보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움에 떨고 있죠. 뭔가 잘못되고, 뭔가 잃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9. 우리가 위에서 자유와 평등 중 어느 것 하나를 강조하며 발전한 진영을 살펴보았는데,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프랑스 혁명의 가치 중 ‘박애’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이나 평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 그 어느 곳에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박애(fraternity)’는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박애라는 사랑은 공동체성을 말하죠. 자유주의, 사적 소유에 젖어 있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매우 사적인 차원에서만 말해지고 있어요. 사랑은 마치 사적인 일로,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죠. 이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자유가 박애를 잡아먹는 꼴이에요. 박애는 사적인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공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10.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바로 이 박애의 정신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하고 되살려 줍니다. 혁명을 통해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사회, 민주주의(공화주의)체제로 이양되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었던 것이죠. 그게 바로 박애라고 하는 공적 사랑입니다. 장 발장은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를 위해서 빵을 훔쳤는데, 그 죄로 인하여, 법에 의해서(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니까), 19년간 옥살이를 합니다. 장 발장이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사회에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출소 후 냉랭한 마음을 가진 장 발장은 자신에게 하루 숙소를 제공한 미리엘 신부에게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은식기를 훔쳐서 나옵니다. 그런데, ‘비참한 자’가 은식기를 들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장 발장을 데리고 미리엘 신부에게 가 대질 심문을 합니다. 그때, 미리엘 신부는 경찰에게 그 은식기는 자신이 선물로 준 거라고, 왜 은촛대는 그냥 놓고 갔냐고 오히려 은촛대까지 챙겨주죠.

 

11. 박애란 바로 이런 사랑을 가리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 사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랑, 더 나아가서 미리엘 신부가 장 발장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악을 오히려 선으로 갚는 사랑, 이러한 사랑이 박애인 것이죠. 박애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기독교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박애의 정신이 자유의 정신과 동일하게 강조되었다면,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과도한 사적 소유의 욕망은 컨트롤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박애의 정신이 평등의 정신과 동일하게 강조되었다면, 평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과도한 획일화가 컨트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그리고 평등주의 진영에서도 박애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욕망과 인간성의 훼손만 난무할 뿐입니다.

 

12.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유럽은 유서 깊은 기독교 국가들이죠. 기독교의 흥망성쇠와 그 역사를 함께 한 나라들입니다. 19세기는 유럽의 기독교에도 정말 중요한 시기였는데, 왕정체제/귀족체제가 무너지면서 기독교도 함께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속화’, 즉 하나님 없는 세상이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왕/귀족에 대한 거부는 곧 기독교 신에 대한 거부와 그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되고, 믿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들의 힘(이성)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죠. 19세기에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현재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세상은 이제 ‘믿음’ 없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의 잘못도 굉장히 크죠. 예수의 정신은 온데 간데없고, 왕과 귀족들처럼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했으니까요.

 

13. 저는 이 ‘믿음 없는 세상이 되었다’에 집중해 보고 싶습니다. 자유를 사적 소유로 생각하는 것이 깊어진 우리 시대에 ‘믿음’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 자신의 신념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맙니다. 즉, 믿음도 사적 소유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이죠. 자유의 개념을 자기 중심성(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의 개념으로 파악하다보니, 믿음도 그렇게 생각할 뿐이죠.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을 엄청나게 오해하고 훼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죠. 믿음은 개인의 신념, 즉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 안에 오신 성령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14. 본문은 ‘믿음’에 대해서 엄청난 진리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기독교의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 안에 성령이 있는 것이고, 그 성령으로 인하여 그 진리를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존재를 바꿉니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인 복음입니다. 창세기만 보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make)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애제자 요한은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피조물에 머물게 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자(begotten)로 존재를 바꾸어 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하게 나오는 복음이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믿음이 단순히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죠.

 

16. 믿음이 우리의 존재를 단순한 일 개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같은 속성(본질)을 지닌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속성(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도 잘 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 바로 사랑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죠.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 계명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쉽고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이 바로 사랑인데, 사랑의 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에게 그 사랑을 행하는 것은 돌고래가 물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너무 쉬운 것이기 때문이죠.

 

17. 우리는 왜 사적 소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자유’를 외치며 살면서, 그리고 법 앞에서는 평등한 거라고 외치면서 법적 평등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며 살면서, 왜, 이렇게 못살겠다고 아우성 칠까요? 가진 게 많은데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고 싶다고 아우성대고, 가진 게 없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 저 사람과 내가 평등하지 못한 것 같다고 아우성대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악한 세상을 만들고 만 있을까요? 제 짧은 생각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선가 말씀하셨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18. 믿음의 실종은 사랑의 실종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성이 사라진 것, 박애가 사라진 것은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유, 즉 개인의 소유도 중요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자유와 평등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못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성을 파괴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도서의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웃는 것은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장 발장처럼 냉소적인 사람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냉소적이었던 장 발장을 따스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 것은 바로 미리엘 신부의 ‘박애(사랑)’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걱정, 가족에 대한 걱정, 사업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에게서 뭔가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우리는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아주 잘못된 선택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도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해하며, 머물지 못하고 떠납니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한없이 약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도 안 들릴 것이고, 자기의 선택이 진리라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릴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악에 잡아 먹힐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더욱더 악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20.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열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사랑의 존재로 바뀐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기 위하여, 사랑의 존재인 우리를 그냥 연약한 한 개의 피조물로 바꾸어 버리기 위하여,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미래를 닫아버리고, 현재의 삶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 두려움이 지금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살겠다고 아우성 칩니다.

 

21. 누가복음 8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딸을 살려보고자 야이로는 염치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 엎드려 간구합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 사이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고쳐주시죠. 그리고 길 가던 중,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딸이 죽을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야이로는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심장이 내려앉았겠죠.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

 

22. 믿음을 개인의 신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능력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줍니다. 우리의 존재를 일 개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 자체를 바꾸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의 일을 하게 합니다. 이 믿음의 역사 없이,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녀의 일로, 가정의 일로, 직장의 일로,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십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그 믿음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 개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믿음이 불안한 미래를 열어줄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멋진 인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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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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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15. 09:02

사도적 복음

(요한일서 4:1-6, 7-8 11-12)

  

1. 본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잘 이해가 안 가거나, 아니면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는 말씀을 보면서, 무슨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진리의 영은 뭐고, 미혹의 영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7절 이하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요한의 이야기가 너무 뻔한 이야기라, 왜 이렇게 ‘사랑하라’고 계속 반복해서, 잔소리하듯이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2.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가장 위협이 되는 사회적 요소는 무엇인가? 아마도, 자본주의(신자유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기후위기 등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신앙에 위협이 되는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할 뿐 아니라, 인간의 삶(또는 인간성)을 형편없이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지금 ‘살기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게 하는 원인들이다. 현재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손쉽게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문에서도 ‘분별’이라는 말을 통해 ‘영들을 분별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신앙을 교묘하게 위협하는 것들을 분별해야 한다.

 

3. 초대교회, 특별히 본문과 관련하여 요한일서의 회중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문제는 ‘영지주의’였다. 기독교 신앙이 생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3세기까지 200여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이 영지주의였다.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적그리스도’는 영지주의에 현혹되어 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도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 사도의 가르침이란 성육신 하신 하나님(말씀/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을 말한다. 2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고백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사도의 가르침이고, 사도적 복음이다. 사도들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의 육체성,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와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즉, 사도적 복음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요한 사도는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사도적 교회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다. 이것은 사도적 복음이 아니라 영지주의적 복음이었다.

 

5.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우습게, 또는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사도적 복음 대신 영지주의 복음에 미혹 당하여 사도적 교회를 떠나 영지주의 교회에 입교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 당시에 신앙생활을 했다면, 우리 중 대다수도 깜빡하는 사이에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미혹 당하여 사도적 교회 대신 영지주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되었을 지 모른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면, 성경에서 영지주의 복음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는 이토록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여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6. 성경 이외의 초대교부들의 문서, 특별히 2세기와 3세기에 활동했던 교부들의 문서는 거의 모두 영지주의와 대결하는 사도적 복음이다. 그 중 영지주의와 집요한 대결을 통해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자들(영지주의 사상을 통해서 기독교를 해석했던 사람들)을 사도적 교회에서 몰아내는 일에 헌신했던 교부로 이레나이우스와 오리게네스가 유명하다. 이러한 교부들의 노고를 통해 교회는 사도적 복음을 지켜내고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을 한다. 우리는 영지주의와 싸웠던 교부들의 저술들을 통해서 영지주의의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영지주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 그 요점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왜 영지주의와 한 판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영지주의 기독교의 문헌을 담고 있는 ‘나그함마디 문서’가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7. (영지주의를 모르면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구체성을 알지 못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지주의는 기독교보다 더 오래된 사상체계다. 영지(gnosis)’는 ‘신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체계이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므로, 영지주의와 같은 목표를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지(gnosis)는 기독교 사상과 똑같이 ‘계시(revelation/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인간이 획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지식)’에 근거를 둔 지식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은 인간의 두뇌를 쓰는 지식이 아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계시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영지는 구원하는 지식이다.

 

8. 영지주의의 사상체계의 근간은 플라톤주의,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있는데, 이들은 철저하게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육신(물질세계)은 기본적으로 악(bad/evil)하고, 영혼(비물질세계)은 기본적으로 선(good/holy)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지란 신적인 지식(신이 계시로 준 지식)을 통해서 영혼이 악한 물질 세계, 특별히 몸(물질)을 벗어나서 본래의 선한 세계인 비물질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지는 곧 구원인 것이다.

 

9. 이러한 영지주의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기독교 신앙과 같이 공유하는 것 같으나,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왜곡하기도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나님(말씀/성자)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은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한 육신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성육신을 부정하는 그들의 교리를 일컬어 ‘가현설(Docetics/ ~인 듯하다, 혹은 ~인 것처럼 보이다라는 뜻의 헬라어 ‘도케스’로부터 유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10. 영지주의의 이러한 생각은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이 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구약의 창조의 하나님과 신약의 구원의 하나님, 이렇게 두 개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그래서 영지주의 교회에서는 구약의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 저급한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이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시켰다. 이들에게 성경은 오직 신약성경 외에는 없다. 신약성경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만이 선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11. 영지주의 교회의 이러한 도전은 기독교 윤리 영역에서도 도전을 불러왔다. 영지주의 교회는 두 가지 윤리 영역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는 엄격한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육신, 또는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육신의 일을 최대한 억압하거나(식욕, 성욕 등의 기본적인 인간의 육신이 가지는 욕구), 물질적인 것과 최대한 관계를 맺지 말하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을 살찌우거나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것을 먹고 살찌우는 것을 죄라고 생각을 해서 금식을 밥 먹듯이 하고 육신에 계속해서 고통을 가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집착은 죄악이라 생각하여 가난한 삶을 추구했다. 어떻게 보면 매우 경건한 것 같으나, 그들의 근본적인 생각, 육신(물질)은 부정한 것, 악한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발생한 윤리이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는 이들의 이러한 극단적인, 엄격한 금욕주의를 인정할 수 없었다.

 

12. 영지주의 교회가 빠지게 되는 다른 하나의 윤리 영역은 반율법주의였다. 이것은 엄격한 금욕주의와 반대되는 생각인데, 물질은 영혼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영지를 통하여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물질(육체, 몸)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구원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윤리적 방종을 낳기 쉬웠고, 다른 사람의 육신(육체, 몸)을 무책임하게 취급하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사람의 신체적 아픔에 무관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육신(몸)에 폭력을 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이미 영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3. 사도적 교회(요한 공동체/요한일서 교회)는 이러한 영지주의 교회의 가르침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육체로 오신)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2-3절). 즉,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영들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지의 영과 사도적 복음이 말하고 있는 진리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영은 미혹의 영이고,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14. 그렇다면, 우리는 비로소 왜 사도 요한이 사도적 복음에 근거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철저한 육체성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육체성에 대한 긍정이 없으면(육체/육신/물질을 선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에 머물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과 혀로, 가현적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실제로 육체가 달리고 죽은, 육체성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육체성의 사랑이어야 한다.

 

15. 그러나 생각해 보라. 육체성을 부인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반율법주의에 빠지면,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 다른 형제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에게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육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그들에게 밥을 주기는커녕 굶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게 사랑인가? 어떤 이가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데, 그렇게 육신이 추위에 벌벌 떠는 것은 너의 영혼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악한 육체에 벌 주고 있는 좋은 일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따스한 옷을 제공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6. 또한 어떠한 형제가 자신은 영지에 의해서 이미 구원받아서, 자신의 육신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자살을 하거나 자해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육신으로 방종한 삶을 산다면, 또한 다른 이들의 육신에 해를 가하고 있다면, 그를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사랑인가? 부모를 돌보지 않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고, 그냥 남몰라라 사는 것(육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영지의 의해서 구원받은 증거라고 자부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고, 가정 내팽개치고, 사회적 관계 다 끊고, 주님만을 위해 산다고 교회가 좋사오니 교회에 초막을 짓고 살아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7. 요한일서에서 요한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 영지주의 교회에서 마치 그것이 복음인양 전한 것에 대한 철저한 반대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으니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할 때 이 마땅한 사랑은 육체성의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은 가짜로, 마치 죽은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게 아니라, 하나님은 실제로 육체성을 가지고 육체의 고통을 오롯이 겪으면서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바로 그 육체성의 사랑으로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적 복음이다.

 

18. 사도적 교회에서 쫓겨난 영지주의적 복음은 지난 2천년 동안 유령처럼 기독교 신앙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요즘, 21세기에서 보자면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소비주의와 그 때문에 발생한 기후위기(지구에 대한 파괴)를 남몰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육체성(물질성)을 거룩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도적 복음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의 과욕과 불의의 때문에 망가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창조세계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이 땅에 있는 동안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도적 복음에서 떠나 영지주의 복음에 근거하여, 또는 영지주의의 유령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른 말로, 사도적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영지주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21세기의 모든 교회들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19.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영지주의 복음에서 떠나 사도적 복음을 생각해야 하는 시절을 살고 있다. 영지주의 복음으로부터 사도적 복음을 지켜내기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가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육체성을 지니고 죽으셔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주님처럼 육체성의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체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사회와 우리의 지구를 ‘말과 혀’(영지적)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사도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 사도적 교회의 사랑이다. 우리는 사도적 복음을 붙들고 사도적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영지주의의 유령에 미혹되어 영지주의 교회에 다니는 적그리스도인가. 분별하라.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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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11. 17:21

사랑이 뭐길래

(요한일서 3:11-24)
 

1. 사랑이 뭘까? 사랑이 뭔지 묻는 일은 어찌보면 낭만적인 것 같고 한가한 사람들의 사색 같지만, 사랑에 대해서 묻는 것만큼 인생과 신앙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물으면 우선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생각부터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감정적인 차원(사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할 때, 육체의 접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말할 때 ‘에로스’에 대하여 떠올린다.

 

2. 우리가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일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8).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 더불어서 우리는 아가서를 떠올리며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을 가장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성경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 부르기도 한다.

 

3.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세우실 때, 친형제 사이였던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 3:17).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은 좀 더 쉬운 말로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르지만, 우리가 만약 대면하여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만났다면, 그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가장 친근감을 느꼈을 것이다. 둘은 성격이 화끈(시원시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화끈하게 살았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열 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은 야고보(James)였다. 화끈하게 복음을 전하다 화끈하게 죽었다.

 

4. 요한은 보통 예수님의 ‘애제자’로 불린다. 예수님이 요한을 편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야곱이 열 두 아들 중 요셉을 편애했듯이, 예수님도 요한을 편애했다. 이것을 나쁘게 볼 필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왠지 좋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요한의 평생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줄곧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the beloved disciple)’라고 칭했다. 요한복음에 이 표현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요 13:23, 19:26, 20:2, 21:7, 21:20).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면서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신다.

 

5. 사람이 죽을 때 하는 세 마디의 말이 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또한 사람은 치매가 걸리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이나 가장 좋았던 기억에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기도 한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노년의 요한은 아주 약해지고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교회 모임에 들것에 실려 왔다고 한다. 그때 모임에서 요한은 언제나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을 계속하여 속삭이곤 했다고 한다. 그의 인생 가운데 ‘사랑’이 얼마나 강력하게 그의 삶을 지배했으면 죽어가는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계속했을까.

 

6.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성격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사랑/또는 사적인 사랑’이 아닌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절).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사랑은 ‘감정/감성적 용어’라기보다 ‘신학적 용어’라는 것이다. 성경의 사랑은 그냥 인간의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랑’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것을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감정놀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복음과 관련된 것이다.

 

7.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망(죽음/악)에서 생명(선)으로 옮겨졌다는 선포이다. 이것을 골로새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예수)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우리는 흑암의 세상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갔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죽음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다는 증거, 우리가 흑암의 나라(악한 세상)에 있지 않고 아들의 나라에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처럼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8. 나는 ‘사랑’만이 모든 것의 자격(qualifications)이 되는 이 아들의 나라, 생명의 나라가 너무 좋다. 그 나라에서 살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쓴 정현종 시인처럼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아들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 가고 싶다.” 우리는 사랑 외에, 이런 저런 자격을 갖추느라 너무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자기계발하느라 사랑할 시간도 없다. 무엇을 위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생명을 낭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9.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의무라는 게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민의 4대 의무가 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가 그것이다. 이것은 헌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에서 사는 한 누구든지 지켜야 하는 의무이다. 이 의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이것이 감정의 문제였다면, 군대를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안 가도 될 것이다. 세금을 내고 싶은 사람은 내고 내기 싫은 사람은 안 내도 될 것이다.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은 받고 받기 싫은 사람은 안 받아도 될 것이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일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했다고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10. 그러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4대 의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우리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군대 가는 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세금을 내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교육도 근로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더불어 사회적 왕따를 당한다. 병역문제, 납세문제, 교육문제, 근로문제 등은,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감자다. 이 네 가지의 의무는 그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의 표지이다. 그래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의무를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그는 공동체의 정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4대 의무는 사적 영역에 있는 게 아니라 공적 영역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1. 요한 공동체(교회)의 자기 이해는 무엇일까?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로,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그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자매들을 돌봤다. 또한 처음부터 들은 소식(복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듯이, 그들도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감정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복음에 근거해서 행했다. 그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신앙생활을 사적으로 하지 않고 공적으로 했다는 뜻이다.

 

12.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 그렇게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3-24절). 아들의 나라에는 헌법이 한 가지 있는데, 그 헌법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이다. 전혀 복잡하지 않다. 많은 헌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 한 가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헌법이다.

 

13. 우리는 공부 많이 한 사람, 또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스펙이 좋은 사람이 연봉 많이 주는 직장에 들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돈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 많이 한 사람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고 돈 많이 벌고 오래 살고 가장 행복하면 그리고, 죽어서도 천국가는 게 보장되면, 아마도 서로 사랑하느라 혈안일 것이다.

 

14. 실제로 중세시대 때 이러한 비슷한 생각이 유행했었다. 중세인들은 사후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죽으면 천국 가는 것에 대한 큰 열망이 있었다. 즉, 구원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러한 중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공덕(merit)’에 대한 신학이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죽은 뒤에 천국 가는 것, 즉 구원받는 일이 넉넉히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쌓은 공덕으로 공덕을 쌓지 못하고 죽어 연옥에 있는 일가족도 대신 구원할 수 있었다. 공덕을 쌓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인의 유물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돈이 있었기에 성인의 유물을 많이 모았다. 또 한 가지, 가난한 자들(거지)에게 은혜를 베풀면 공덕을 쌓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가난한 자들(거지들)은 매우 큰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들의 가난 덕분에 사람들이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사성찬례(미사)에 참여하여 성찬례(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를 많이 받을수록 공덕이 많이 쌓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곳의 교회에서 미사가 끝난 뒤 다른 교회로 달려가 그곳에서 또 한 차례의 성찬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면벌부를 사는 것이었다. 면벌부를 사면 공덕을 쌓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연옥에 갇혀서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면벌부를 팔러 다니는 사제단(테첼)은 이런 문구를 가지고 다녔다. “금고에 넣은 동전이 짤랑거리면,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

 

15. 이 세상이 아들의 나라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기준에 의하여, 또는 나쁜 짓 많이 하는 사람이 오히려 잘 먹고 잘 살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한 악한 세상에 저항하며, 우리가 그러한 악한 나라, 어둠의 세상, 죽음의 나라를 떠나 의의 나라, 생명의 나라,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당당히 드러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 스스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부지런히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셨다”는 복음은 그래서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중요(crucial)하다.

 

16.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또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다른 말로, 기독교의 사랑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공적인 섬김이다. 마음 내키면 하고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랑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야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 사랑을 받아, 그저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 기억(아남네시스)은 바로 예배에서 일어난다. 예배는 기억의 자리이다. 우리는 들리는 말씀(설교)을 통해, 그리고 보이는 말씀(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예배에 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선물로 받아, 세상에 나가서 정신차리고 ‘사랑’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한다.

 

17. 요한공동체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는 진리를 거부하며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겼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헌법)을 지키지 않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진리가 거절당하고 신앙의 공공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진리를 거부하고 신앙의 공공성을 무너뜨린 이들을 향하여 ‘적그리스도’ 그리고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세상, 서로 사랑하지 않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헤치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볼 때, 요한 공동체(교회)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이다.

 

18.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 물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물음은 그치지 말아야할 물음이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죽음의 나라/어둠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나라/아들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신앙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공적 섬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이 헌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에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끄시는 삶의 신비이다.

 

19.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라.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들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아멘. 아멘.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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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 17:00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 난다

(요일 3:1-12)

 

1. 나는 개신교 목사이지만,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과 분리되면서 본의 아니게 잃어버린 여러 가지 좋은 전통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현재 개신교에서 행하고 있는 두 개의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이외의 다른 다섯가지 전통(견진, 고해, 성직, 혼인, 병자) 그 중에서도 고해성사를 잃어버린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성인들(Saints)을 기리는 일이다. 성례전이 축소됨으로 인하여 거룩(구별됨)의 영역이 좁아진 것 같아 아쉽고, 성인들을 추모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신앙의 유산이 부정되는 것 같고 신앙의 모범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2. 종교개혁은 달력의 시간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종교개혁은 교회의 중요한 절기 중 하나였던 만성절 전야(Halloween/할로윈)에 시작된 일이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은 교회력 안에서 발생한 일이지, 그냥 달력 안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다. 교회력으로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이다. 중세 교회는 만성절 전 날, ‘Halloween’을 지켰다. 지금 우리가 크리스마스 전 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키는 것과 같다. 크리스마스 당일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크듯이, 만성절 보다 만성절 전야(할로윈)에 기쁨과 즐거움이 더 컸다. 그 기쁨과 즐거움 안에서 종교개혁은 시작된 것이다.

 

3. 개신교 문화가 강한 미국에서 ‘할로윈’을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제 할로윈은 기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반 문화가 된 듯하다. 한국에서도 할로윈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할로윈을 그저 무시무시한(spooky) 분장(costume)을 하고, 사탕 받으러 다니는 날 정로도 알고 소비할 뿐이다. 할로윈은 어느새 대목 장사의 날이 되어, 일 년 중 사람들의 소비가 가장 많은 날 중 하나로 자리 매김했다. 할로윈은 마치 자본주의의 자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정말 안타까운 것이다. 할로윈은 무시무시한 분장을 하고 사탕 받는 날, 또는 엄청난 소비를 즐기는 날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서 성인들(Saints)을 기리는 날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성인들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4. 성경의 등장 인물들 외에 기독교 역사에는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정말 많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다 간 신앙의 선배들이 정말 많다. 그들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처럼 살과 피를 가지고 이 땅의 슬픔과 고통, 역사적 질곡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킨 생생한 신앙의 모델이다. 살면서 삶의 롤모델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의 롤모델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과 신앙의 롤모델을 만나는 일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5. 개신교인들은 신앙의 롤모델 같은 거 다 필요 없고, 예수만 닮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굉장히 은혜로운(복음적인) 말 같으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처럼 모호한 말도 없다. 과정 없이 그냥 결론만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훌륭하게 되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훌륭한 사람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모, 또는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 없이, 인간이 어떻게 혼자서 크며 인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좋은 선배들(성인들)을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보는 것, 그 선배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롤모델로 삼는 일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정말 유익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교회에서 직분(집사, 권사, 장로 등)을 받는 것도 교회의 일을 많이 하게 된다는 의미보다는 근본적으로 좋은 신앙의 모델로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가 깊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지만, 묵묵히 신앙의 자리를 지키며 후배 신앙인들에게 좋은 신앙의 롤모델로 성장해 가시라.)

 

6.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좋은 날인 ‘할로윈’을 세상에 빼앗겼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할로윈’을 할로윈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자체가 ‘만성절 전야제’라는 뜻인데, ‘할로윈’이 마치 세속화되고, 귀신에 물든 날인 것처럼 생각하여, ‘할로윈’이라 부르지 않고, ‘세인트 나잇(Saints Night)’이나 ‘할렐루야 데이’ 등으로 바꾸어서 부르며 할로윈을 개신교식으로 소비하려고 한다. 이것은 참 웃픈 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좋은 전통을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사이에 세상이 빼앗아 가서 돈 버는 일에 쓰고 있다. ‘할로윈’이라는 말이 너무 더럽혀져서 이제 그 용어를 쓰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7. 사실 그러한 기독교 용어가 또 있다. ‘신천지’. 요한계시록에는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장엄한 종말론적 비전이 선포되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을 한자어로 하면 ‘신천지’이다. 그런데, 이 좋은 용어를 이단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신천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는 마치, 새하늘과 새땅을 빼앗긴 기분이 들게 한다. 우리가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소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니, 그것을 누군가가 빼앗아가 더럽혔다. 용어를 빼앗기는 일은 땅을 빼앗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용어를 빼앗기면 우리는 그만큼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동해와 독도 표기 문제/언어를 잃으면 삶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

 

8. 할로윈에 등장하는 온갖 무시무시한(spooky) 캐릭터들은 무엇일까? 만성절에 등장하는 온갖 더러운 귀신들(evil spirit)은 성인들(Saints)과 대조되는 모습을 지닌다. 귀신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귀신은 우리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악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시무시(spooky)하고 어글리(ugly)한 외모를 가진 귀신(spirit)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 지를 눈으로 보이게 보여주는 것이다. 만성절의 무시무시하고 어글리한 외모를 가진 귀신은 일종의 시청각 교육인 것이다.

 

9. 요한일서의 할아버지는 이 세상의 존재를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사랑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서 할아버지가 사용하는 용어는 ‘죄(하마르티아)’와 불법(아노미아)’이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선교사들이 했던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전도가 아니라 성경번역이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귀가 따갑게 듣는 ‘죄’라는 용어는 기독교 용어가 아니라, 불교용어다. 선교사들이 불교 용어에 더 익숙했던 한국인(조선인)들에게 성경의 ‘하마르티아/영어의 sin’을 좀 더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서 택한 용어가 바로 ‘죄’이다.

 

10. 문제는 이 불교의 ‘죄’라는 용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을 다 담아내지 못할 뿐더러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죄’의 개념은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의 과보(인과응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매우 관계적 개념이다. 한국의 전통 종교인 불교나 유교에서는 ‘신(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개념을 상정하지 않고 죄에 대한 것을 논하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에서의 죄는 법정적 죄의 개념이 크다. 그러한 죄의 개념은 몇 해 전 한국에서 유행했던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잘잘못을 따져 물어 천국과 지옥 행이 결정된다.

 

11. 기독교의 죄, 그리고 구원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의 죄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빌려온 불교의 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무늬만 기독교인이고, 알맹이는 불교인인 것이다. 기독교의 죄 개념은 매우 관계적(relational)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자.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간다. 자식을 잡아죽이는 일을 법정적 개념으로 보면 그것은 명백한 죄이다.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가야지 천국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던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온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12. 요한일서에서 등장하는 죄와 대조되는 용어는 ‘사랑’이다. 죄는 관계가 안 좋은 상태를 말하고, 사랑은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죄는 관계 바깥에 있는 것을 말하고, 사랑은 관계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죄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의인이다. 요한일서는 두 가지 종류의 죄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마르티아’라고 불리는 죄로서 관계 안에서 짓는 잘못을 말하는데, 그것은 회개함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를 말한다. 죄를 짓더라도 관계 안에서 짓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다.

 

13. 그런데, 또 다른 죄의 표현인 ‘아노미아(불법)’는 좀 다르다. 이것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아노미아를 저지르는 이들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한다. 이런 자는 형제와의 관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즉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듯, 형제를 죽인다. 형제에게 악한 일을 행한다.

 

14. 요한일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요한 공동체를 괴롭혔던 두 가지 일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에서 떠난 이들이 생겨난 것(적그리스도)과 공동체의 일부 지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마귀의 자녀)이었다. 이것은 2천 년 전 처음 교회인 요한 공동체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의 교회에서도 발생하는 일이다. 교회를 힘들게 하는 두 가지의 일,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신앙고백 위에 서 있지 못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기독교의 사랑은 감정을 포함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종말론적 신앙의 행위이다.). 즉, 신앙과 사랑은 두 개의 다른 일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일인데, 신앙과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늘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15. 요한 할아버지는 굉장히 재밌고 명쾌한 말씀을 하신다. 한 마디로,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 난다’고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8-9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이 나는 법이다.

 

16. 요한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씨’가 거하는 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씨’는 ‘스페르마’라는 헬라어를 옮긴 것이다. 영어로는 보통 ‘seed(씨앗)’라고 번역을 하는데,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sperm(정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씨(스페르마)’이라는 표현 매우 강력하고 현실적인 표현이다. 부모의 생식기를 통해서 태어난 자녀들이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부모를 닮은 것처럼, 하나님의 씨를 통해서 태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품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랑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가 아니라, 즉 하나님의 씨를 품은 자가 아니라, 마귀의 씨를 품은 자가 되는 것이다.

 

17. 만성절에 등장하는 온갖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기 전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무시무시하고 어글리한 귀신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으로 난 자들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귀신 같은 사람들(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즉 성인(Saints/거룩한 사람)이다. 성인들이 성인인 이유는 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기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인을 본받아, 귀신 옷을 입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한 사랑의 옷을 입는다. 우리는 악을 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행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우리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씨를 품고 사랑의 삶을 사는 것보다 생명력 넘치는 삶이 어디에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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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맞습니다. 저도 성인들의 모범과 전통을 개신교가 살려나가기를 바랍니다. 고백성사의 경우는 현재 개신교가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되네요.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2021.11.08 06:40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25. 10:52

적그리스도와 기름부음 

(안티크리스토스와 크리스마)

(요한일서 2:18-29)

 

글의 전개: 적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기름부음에 대한 이해, ‘적그리스도는 왜 요한 공동체를 떠났을까’의 질문에 대한 답변, 그리고 우리의 신앙 들여다 보기

 

1. 몇 절 안 되는 짧은 구절인데, 아주 무거운 단어들이 몇 개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적그리스도(안티크리스토스/안티크리스트)’이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말이었다. 지금도 일부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적그리스도’라 칭하고 있고, 한 때는 가톨릭, 특별히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난무한 때도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공격하고 비판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비난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던 이승복 어린이의 말처럼 개신교인들의 마음에 가톨릭을 향한 적대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2. 또한 모든 서구적 가치의 전복을 꿈꿨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적그리스도>라는 책을 써서 서구 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기독교적 요소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서구 사회의 기독교적 요소를 비판했기에 기독교인으로부터 ‘악마’라는 비난을 들었고, 지금도 기독교인들은 그를 좋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니체를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독교 역사에서 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우리는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성경 곳곳에 있는 말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1서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나올 법한 곳, 요한계시록에도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서로 사랑하라’를 그토록 강조하는 요한1서에만 이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4. 요한일서의 화자, 요한 할아버지는 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누구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일서에서만 등장하지만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용어들은 성경 곳곳에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데살로니가 후서의 ‘불법의 사람’ 또는 ‘멸망의 아들’(살후 2:3-9)이 있고,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포학하여 가증한 것’(단 9:27)이 있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막 13:14) 등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표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사람 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5.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데에는 특별한 정황이 있다. 요한 공동체는 매우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이므로, 아직 분열이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 교회(the church)’라 생각할 만큼,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신앙 위에서 진리 그 자체를 품고 있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공동체에 시련이 닥친다. 함께 세례도 받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 스스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분열(schism)이 요한 공동체를 강타했다. 할아버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거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19절).

 

6. 할아버지는 아주 명시적으로, 콕 집어서, 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일컬어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를 떠난 이들에게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교회가 엄청나게 나뉜 이 때에 교회를 떠난 이에게 적그리스도라는 부르는 일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개신교가 가톨릭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은 유체이탈 화법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회로부터 나온 것은 개신교이지, 가톨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물론 프로테스탄트들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톨릭과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며 비난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분열이 있을 때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계속해서 소환되었다.

 

7. 이런 아픈 역사성을 가진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 공동체의 특별한 정황 속에서 살펴봐야 엉뚱한 상황에서 엉뚱하게 쓰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요한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요한이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서 떠나 거짓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이고, 적그리스도가 말하는 거짓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알면 거짓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법이다.

 

8.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그가 만들어낸 진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다. 그것을 사도적 전승(사도로부터 전해진 복음/그래서 교회는 사도적 교회라 불린다)이라고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경험한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전해준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진리의 표현이다. 요한 공동체를 비롯한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이 진리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고, 주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마 16:15-18).

 

9.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렇다면, 거짓은 무엇인가? 이 진리를 부인하는 자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할아버지가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자들은 요한 공동체를 떠나갔다.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진리를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들은 것에’ 더 이상 거하지 않았고,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났다는 뜻은 그들이 더 이상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일 뿐이다.

 

10. 본문에는 ‘적그리스도’처럼 문제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것과 매우 대조되는 신비한 용어가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기름부음(크리스마/anointing)’이라는 용어이다. 이 편지는 요한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에게 쓰는 편지가 아니라,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지체들에게 쓴 편지이다.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와는 달리 그들이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안에는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 할아버지가 말하고 있는 ‘기름부음’은 무엇인가?

 

11. 지금 개신교 전통에는 이러한 것이 별로 없지만, 구약성경을 보거나 기독교의 다른 전통을 보면 기름을 바르는 전통들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기름부음’의 전통은 선지자나 제사장 또는 왕을 세울 때 나타난다. 그들에게 기름(올리브 오일)을 붓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메시아라는 말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뜻이다. 아직 일곱개의 성례전(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을 모두 가지고 있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같은 곳에서는 ‘병자성사’라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바르며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전통도 있다. 이처럼 ‘기름부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보여주는 성례전적인 성격을 가진다.

 

12.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이러한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 기름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 16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6장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데, 요한 공동체가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출교 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출교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법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출교 당한 이들을 누군가 죽여도 살인자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 공동체는 출교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유대인들이 출교 당한 요한 공동체를 죽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요한 공동체를 죽이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것이다.

 

13. 이러한 무시무시한 일을 앞에 놓아두고 떨고 있는 제자들(요한 공동체)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면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불린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부르고, 그 진리의 영이 요한 공동체에 임할 것이라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의 제자들(요한 공동체)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백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제자들에게 그들의 고백이 헛된 것이 아니며 진리를 행하는 것이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거짓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옳다!’고 하나님이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이라면 박해를 받더라도, 설사 죽임을 당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언제나 ‘진리’를 구하는 법이다.

 

14.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요한일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요한일서에서 할아버지가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너희는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말할 때의 ‘기름부음’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기름부음, 즉 성령을 받은 요한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15.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에 머물지 못하고 떠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적그리스도’, 그리고 ‘기름 부음’과 함께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용어 ‘거함(abide/메노)’이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요한일서에서도 ‘거함’이 강조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거함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거함’에 대하여 강조한다.

 

16. 거한다는 것’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에 ‘mindfulness’가 있다. 나는 이 단어를 컴퓨터에 붙여 놓고 일한다. 정신이 하도 딴 데로 가서, ‘바로 지금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mindfulness’란 정신이 빈 데 없이 꽉 찰 정도로 딴 생각하지 않고 그 마음이 한 곳에 집중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지금 바로 여기에 100% 머물러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한다’라는 뜻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함(abide/메노)’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즉 한 인간이 전인적으로, 온 인격체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17. 본문을 보면, 우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것을 요한일서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고 은혜이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선포를! 부흥회 용어, 또는 범퍼 스티커 같은 용어로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약장사가 약파는 느낌으로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렇지,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한 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에게 집중하시고 우리에게 헌신하신다. 이것을 좀 더 말랑말랑한 용어로 바꾸면,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이란 머물러 있고 집중하고 헌신하는 것 아닌가.

 

18. 요한 할아버지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는 것, ‘성령이 우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 즉 복음, 다시 말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머물러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나의 육체가, 나의 마음이, 나의 영혼이, ‘예수는 그리스도다!’에 ‘충만히/fully’ 머무르고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19. ‘기름부음’은 정말 중요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우리가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우리의 전인격/인간성)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만이 진리이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 안에 있는 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떠난 ‘적그리스도’가 아닌, 진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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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제목이 자극적이어서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바로 클릭해서 읽어 봤습니다. 내용은 자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공동체에 대한 설명에서 배우고 기름부음의 중요성도 다시 상기 되었습니다. 나중에 다른데서 써먹어야겠네요. :)

    2021.11.02 09:33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19. 14:07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

(요한일서 2:7-17)

 

1. 시월과 가을은 참 잘 어울리는 말 같다. 구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설익은 것 같고, 십일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너무 깊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시월은 가을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가을이라는 옷이 딱 맞는 몸 같다. 자본주의에 좀 덜 찌들었던 시대의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영혼을 살찌우기 위하여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책 구매량이 늘어나던 계절이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스마트 폰과 넷플릭스에게 신체를 빼앗긴 듯하다. 그래서 요즘 인류를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부른다.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2. 스마트 폰은 우리를 붙들어 두기는 하지만 머물게 하지는 못한다. 스마트 폰을 붙들고 살지만, 우리는 한 가지 깊은 이야기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인내심을 잃어가고 공감능력을 잃어간다. 머물러 앉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을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요즘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매우 겉돌기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게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시(詩)를 읽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으면 머물 수밖에 없고, 머물다 보면 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인내심과 이해력, 그리고 공감능력이 자연스럽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페이스북에 ‘詩사랑’이라는 개인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시를 읽으며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사람들과 시 읽는 모임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다.)

 

3. 이 가을, 나의 영혼을 위로하며 살찌게 하는 시는 단연코 천양희 시인의 시이다. 천양희 시인은 당연히 본인 고유의 사유와 언어를 통하여 시를 쓰지만, 그의 시는 전혀 개인적이지 않고 매우 보편적 진리와 감성을 펼쳐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위로하는 힘, 즉 내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와 빛을 비춰주는 능력이 있다. 그녀의 시에 이러한 힘이 있는 이유는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라는 덫’이라는 시의 한 구절만 봐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지금 네 가망(可望)은 /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 그 한마디를 듣는 것.” 50년 넘게 그녀는 시라는 세상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시라는 언어를 길어 올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고독을 위로하는 힘을 지녔다.

 

4. 천양희 시인의 시를 한 편만 보자. ‘무너진 사람탑’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잠언은

망언이 된 지 오래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다르고 변화와

변질이 다르다는 말

믿지 않은 지 오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도전보다는

도약을 꿈꾼 지 오래다

허명도 명성이라 생각하고

치욕도 욕이라 생각 않은 지 오래다

젊은이는 열정이 없고

늙은이는 변화가 없는 지 오래다

예술과 상술을 혼돈하고

시업과 사업을 구별 못 한 지 오래다

고난이 기회를 주지 않고 위기가

기회가 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러니 꿈도 꾸지 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틸 생각

죄 안 짓고 살 생각

 

그러니 너는 조금씩 잎을 오므리듯 입을 다물라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에 수록)

 

5. 이 시에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제목처럼 우리는 사람탑이 무너진 시대, 즉 인간성이 무너진 시대, 인간 냄새를 맡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자존심과 존엄성을 다 버리고, 마음껏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죄를 크게 지을수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오므리고 어금니 꽉 깨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아주 잔인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선풍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그러한 세상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로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6. 이렇게 잔인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 요한일서의 말씀이 들어올까? 어떤 할아버지(요한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까? 더군다나 이 편지는 대략 2천 년 전에 씌어진 것인데, 우리의 마음에는 이 오래된 편지를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안 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 편지는 매우 도전적으로 보인다.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망하는 이 시대에 죄를 짓지 않고 살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기획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7. 게다가 편지를 읽다 보면 할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매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사랑과 미움으로 나누는 것 같다. 중간이 없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빛이면서 어둠이고, 사랑이면서 미움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주 극단적이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할아버지의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정말 고리타분해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아니 분간하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을 분간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할 뿐이다.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8. 그러면서 편지를 보면 할아버지는 매우 ‘가족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12절에서 14절에 그러한 언어 구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할아버지는 마치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하듯 언어를 구사한다. 자녀들아(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이것은 분명 할아버지가 속해 있는 공동체, 즉 요한공동체의 자기 이해이다. 요한공동체, 즉 교회는 가족(family)이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 사도 바울의 이해처럼 매우 특별한 이해이다. 생물학적, 또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현대인들의 가족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는 매우 특별한 가족 이해다. 교회는 가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9. 이 가족 안에는 자녀들(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죄 사함을 받은 이들’이다. 이것은 이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라는 뜻이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은 기쁜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송아지’라는 시가 있다.

 

내가 미친놈처럼 헤매는

원성 들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밖에 안된!

송아지

 

너 때문에

이 세상도

생긴 지 한 달 밖에 안된다!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 수록)

 

10.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태어나면, 세상은 막 태어난 그 사람만큼 젊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노쇠해지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줄어들거나 없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들이 노쇠해진 이유, 정현종 시인의 시 ‘송아지’에서처럼 생동감이 넘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부흥을 해도 교회에서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이지,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세례가 얼마나 뜸해졌는가. 우리는 날마다 새생명을 갈망한다. 그 새생명을 보면서 먼저 태어난 이들도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가장 기쁠 때는 새생명이 탄생하는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새로 태어난 이를 믿음으로 받아낼 때이다.

 

11. 이 가족 안에는 아비들(부모들/엄마와 아빠)이 있다. 이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것에 knowledgeable(경험적 지식이 많다) 하다. 그래서 이들은 방금 막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 교회는 갓 태어난 아이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영적인 부모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키워지는 아이들, 이제 막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태어난 영적인 자식들을 능수능란하게 키울 수 있다.

 

13. 또한, 이 가족 안에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그래서 악한 자, 흉악한 자를 이긴다. 청년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네아니스코스’는 단순히 젊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싸움터에 나갈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아비들에게는 지혜(wisdom)가 있지만, 청년들에게는 힘(strength)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 이렇게 강한 청년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안에는 강한 청년들이 있어야 한다.

 

14. 우리가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가족을 구성하는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육신의 나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은 연차적 나이로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인간의 육신의 나이와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의 구분이 잘 겹치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젊은 사람이 영적으로 젊을 때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신체 나이가 늙으면 아무리 영적인 나이가 젊어도 행동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회는 젊은 이들을 하나님 가족의 청년들로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구한말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15. 가장 이상적인 것은 육신의 나이도 젊고, 영적인 나이도 젊은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주의 일은 육신의 나이와는 크게 상관없이 영적인 젊음으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갈렙(Caleb)이 있다.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 제 1세대 중 유일하게 가나안 땅을 두 발로 밟은 갈렙은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육신의 나이가 8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아낙 자손이 차지하고 있던 헤브론을 가리키며 ‘이 산지를 나에게 주소서’라고 여호수아에게 간청한다. 자신이 가장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0-12).

 

16. 우리는 세상을 행해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젊음을 자랑하고 유지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는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의 젊음은 지난 것처럼, 또는 없는 것처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가족은 육신의 나이로 구성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믿음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져 새벽 이슬 같은 청년으로 머물기를 간구해야 한다. 나이 젊은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게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신비로운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 하나님의 가족, 교회이다.

 

17. 요즘 사람들을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불리면 안된다. 우리는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라고 불려야 한다. ‘포노 사피엔스’가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듯,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즉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내가 주조한 개념이다). 우리는 요즘,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에 따라 우리는 바로 그 마음 둔 것에 의해 살아갈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혹시 나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있다면 마음을 돌이켜,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자.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보자.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부질없이 지나가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길!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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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11. 11:08

죄를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

(요한일서 1:1-10)

 

1. “눈 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이 노래의 제목은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우리는 이 노래의 제목을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노래의 가사에는 엄청난 인간애와 역사적 아픔이 담겨 있다. 이 노래의 화자는 사랑하는 금순이, 그러나 전쟁통에 헤어진 금순이를 애타게 찾고 있고, 본인은 흥남부두 철수 작전 때 미군 함선을 타고 탈출을 했고, 그리고 지금은 ‘국제시장 장사치’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금순이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남북통일의 소망으로 이어지고,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매우 역사/정치적인 용어까지 등장한다. 촌스러워 보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노래다.

 

2. ‘그 날의 일’을 직접 경험한 이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내가 우리교회에 부임하여 받은 축복 중 하나는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에 등장하는 흥남 철수 작전을 직접 경험하신 故 박영희 권사님으로부터 그 날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또는 영화를 통해서 접하던 흥남 철수 작전(Hungnam Evacuation)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밀려오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떠한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 그 사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가리키는 모든 후대의 작품이나 이야기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나는 그 날 이후, <굳세어라 금순아>를 들을 때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볼 때도 마음 가짐을 다르게 하게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것이 故 박영희 권사님이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이다.

 

3. 요한일서는 한 마디로 얘기해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박영희 권사님이 흥남 철수 작전을 직접 경험했듯이, 요한일서의 화자, 어떤 장로(할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절). 사실 이게 굉장히 전율이 흐르는 진술이다. 이 진술을 들으면서 우리의 반응은 “와~~~”이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 손으로 만져 봤다고!

 

4. 살면서 만나본 유명인들이 기억난다. 탤런트 심은하. 우리 동네 살았다. 어떤 예쁜 사람이 그랜저 몰고 지나가길래 누군가 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심은하였다. 탤런트 음정희. 도시인이라는 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그 남동생이 나의 고등학교 후배였는데, 내가 그 친구 영어/수학 과외선생을 했다. 그 집에 가서 괴외를 했는데, 그때 음정희를 보곤 했다. 가수 강타. 우리 동네 잠깐 살았다. 이 친구가 우리 동네 사는 동안 동네가 난리도 아니었다. 강타 오빠 보러 몰려드는 열성 팬들 때문에 동네가 맨날 시끄러웠다. 놀이터 앞집에서 잠시 살았는데, 강타를 보러 온 소녀 팬들이 날마다 놀이터를 가득 채웠다. 일반 주택만 있는 동네다 보니 공중 화장실이 없어서, 그때 아이들이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느라 우리교회에 몰려들곤 했다.

 

5. 이런 유명인들을 직접 본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눈이 반짝거린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유명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눈이 정말 반짝거려야 한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과 같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증언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잘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한 인간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라는 뜻이다. 우리는 생명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 현상을 경험할 뿐이다. 그런데, 요한일서의 한 어르신(어르신 그룹 / 요한 공동체)이 증언하는 것은 정말 ‘와~~’가 저절로 나오는 것인데, 그는 생명 그 자체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6.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멋진 일은 무엇일까? 요한 공동체가 증언하듯이, 그것은 ‘생명’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은 무엇일까? 내가 경험한 생명을 나누는 일이다. 지금 요한 공동체는 그것을 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3-4절). 생명 자체를 직접 경험한 요한 공동체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일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7.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도’라는 게 다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전도’라고 하면, 어던 비즈니스가 고객을 유치하듯이 ‘교회 나오세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전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행위’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 즉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은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우물가의 여인처럼 생명에 목말라 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도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했는가? 너무 기뻐서, 주체를 못하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서, 그 기쁨을 동네 사람들과 나누었다. 전도는 이렇게 기쁨을 나누는 일이다.

 

8. 생명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가 아주 멋진 이야기를 하신다. 생명 자체를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는 이런 표현을 하신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5절). ‘빛’은 은유이다. 빛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보는 그런 빛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빛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인양 그 빛에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빛을 발산하는 태양이 마치 하나님인듯 태양신을 섬기게 될 것이다. 빛은 은유이지,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빛과 대조되는 은유는 어둠이다. 어둠은 뭔가 음산하고 베일에 싸여 있고 분명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와 반대로 빛은 활기차고 열려 있고 확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둠은 거짓 같은 것이지만, 빛은 진리 같은 것이다.

 

9. 할아버지는 우리를 빛과의 사귐으로 초대한다. 그 사귐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사귐이다. 즉, 우리 안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사귐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8-9절). 여기에는 빛, 진리, 사귐, 죄 사함이라는 말과 더불어 어둠, 거짓, 죄라는 말이 나온다.

 

10. 우리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죄의 개념을 실정법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법에 접촉이 되는 것, 법을 어기는 것, 우리는 그것을 범죄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매우 신학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의 죄이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가리킨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어둠을 만나게 된다. 사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둠을 직면하길 싫어한다. 마치 어두운 밤길을 걷기 싫어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바깥에서 활동하는 어떤 것들인가? 우리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있는 어둠이다.

 

11. 김형영 시인은 시 <화실시편 18>에서 이런 고백의 기도를 드린다.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

내 잘못 내가 모르오니 / 한 번만 더 /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

주님, /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오니 / 내 대신 못 박히소서

못 박히소서 / 못 박히소서 / 아멘,

 

12. 그의 <화실시편 18>은 ‘아멘’으로 끝나지만, 아멘 뒤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고, 쉼표가 찍혀 있다. 우리는 아멘 뒤에 마침표를 찍음으로 기도를 마칠 수 없다. 우리는 아멘 뒤에 쉼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조금 쉬었다, 우리는 다시 기도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어둠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

 

1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에서 “자백하면”은 계속적 죄의 고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자백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호몰로게오’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동일한 것을 말하다’, ‘함께 말하다’이다. 자백, 즉 고백(confession)이라는 행위는 “하나님과 죄인이 한 가지 동일한 것에 대해 함께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죄의 고백, 또는 회개를 매우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취조실에서 수사관들에게 취조 당하면서 실토하듯이, 그렇게 죄의 고백, 회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고백(confession)’의 전통을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고백은 취조실에서 실토하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니다. 고백은 하나님과 함께 앉아서 두런두런 내 안의 어둠에 대해서 대화 나누는 것이다.

 

14. 고백은 인격적인 행위이지 비인격의 기계적 행위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신교가 ‘고해성사’의 전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 이런 고백을 한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고(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고(단순히 친교 나누는 게 아니라 우리는 친교를 믿는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 사함은 같은 호흡 속에 있다. 즉, 죄 사함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게 아니라, 사귐 안에서 죄 사함을 받는다.

 

15.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그리고 교회 지체들과의 사귐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고백은 우리가 할까 말까 내 마음대로,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고백은 우리의 믿음, 신앙이다. 왜냐하면, 고백은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해성사의 전통을 잃어버린 개신교인들은 고백할 줄 모른다. 마음에 어둠이 가득한 데도, 그것을 어떻게 어디에다가 털어놓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상담가를 찾아가거나 정신과의사를 찾아가거나, 처방을 받아서 약을 먹는다. 이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16. 죄를 고백한다는 것, 그것은 전혀 개인적이고 기계적인 일이 아니다. 종교적 행위나 관습도 아니다. 죄(우리의 어둠)를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고, 교회의 지체들과의 깊은 사귐으로 들어가서, 그 사귐 속에서 내 안의 어둠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다. 이것은 최고의 치유행위이며, 구원의 은총이 발생하게 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두런두런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빛으로 나아온 지체들과 함께 두런두런 대화하는 가운데, 빛이 스며들어 어둠이 어느새 물러간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17. 생명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의 이야기, 빛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의 나눔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우리에게 어둠만을 전달해 주는 이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어둠의 희생자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빛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나와야 한다. 그 길이 여기에 있다. 고백. 죄를 고백한다는 것. 우리의 어둠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 우리는 단순히 고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백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 개신교에는 ‘고해성사’라는 전통이 형식적으로는 살아 있지 않지만, 반드시 내용적으로는 살려 내야 한다. 기도할 때 고백하든, 목회자에게 고백하든(목사님, 고백(confession)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사귐인가), 교회의 지체를 만나 고백하든, 우리의 고백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에 대하여 말하는 것, 그것을 꺼내 놓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그리고 교회의 지체와의 사귐 가운데서 하는 고백은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 나아오는 신앙의 행위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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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재미나고 쉽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

    2021.10.13 01:01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