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19. 14:07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

(요한일서 2:7-17)

 

1. 시월과 가을은 참 잘 어울리는 말 같다. 구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설익은 것 같고, 십일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너무 깊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시월은 가을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가을이라는 옷이 딱 맞는 몸 같다. 자본주의에 좀 덜 찌들었던 시대의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영혼을 살찌우기 위하여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책 구매량이 늘어나던 계절이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스마트 폰과 넷플릭스에게 신체를 빼앗긴 듯하다. 그래서 요즘 인류를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부른다.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2. 스마트 폰은 우리를 붙들어 두기는 하지만 머물게 하지는 못한다. 스마트 폰을 붙들고 살지만, 우리는 한 가지 깊은 이야기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인내심을 잃어가고 공감능력을 잃어간다. 머물러 앉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을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요즘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매우 겉돌기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게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시(詩)를 읽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으면 머물 수밖에 없고, 머물다 보면 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인내심과 이해력, 그리고 공감능력이 자연스럽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페이스북에 ‘詩사랑’이라는 개인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시를 읽으며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사람들과 시 읽는 모임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다.)

 

3. 이 가을, 나의 영혼을 위로하며 살찌게 하는 시는 단연코 천양희 시인의 시이다. 천양희 시인은 당연히 본인 고유의 사유와 언어를 통하여 시를 쓰지만, 그의 시는 전혀 개인적이지 않고 매우 보편적 진리와 감성을 펼쳐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위로하는 힘, 즉 내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와 빛을 비춰주는 능력이 있다. 그녀의 시에 이러한 힘이 있는 이유는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라는 덫’이라는 시의 한 구절만 봐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지금 네 가망(可望)은 /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 그 한마디를 듣는 것.” 50년 넘게 그녀는 시라는 세상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시라는 언어를 길어 올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고독을 위로하는 힘을 지녔다.

 

4. 천양희 시인의 시를 한 편만 보자. ‘무너진 사람탑’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잠언은

망언이 된 지 오래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다르고 변화와

변질이 다르다는 말

믿지 않은 지 오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도전보다는

도약을 꿈꾼 지 오래다

허명도 명성이라 생각하고

치욕도 욕이라 생각 않은 지 오래다

젊은이는 열정이 없고

늙은이는 변화가 없는 지 오래다

예술과 상술을 혼돈하고

시업과 사업을 구별 못 한 지 오래다

고난이 기회를 주지 않고 위기가

기회가 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러니 꿈도 꾸지 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틸 생각

죄 안 짓고 살 생각

 

그러니 너는 조금씩 잎을 오므리듯 입을 다물라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에 수록)

 

5. 이 시에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제목처럼 우리는 사람탑이 무너진 시대, 즉 인간성이 무너진 시대, 인간 냄새를 맡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자존심과 존엄성을 다 버리고, 마음껏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죄를 크게 지을수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오므리고 어금니 꽉 깨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아주 잔인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선풍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그러한 세상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로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6. 이렇게 잔인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 요한일서의 말씀이 들어올까? 어떤 할아버지(요한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까? 더군다나 이 편지는 대략 2천 년 전에 씌어진 것인데, 우리의 마음에는 이 오래된 편지를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안 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 편지는 매우 도전적으로 보인다.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망하는 이 시대에 죄를 짓지 않고 살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기획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7. 게다가 편지를 읽다 보면 할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매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사랑과 미움으로 나누는 것 같다. 중간이 없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빛이면서 어둠이고, 사랑이면서 미움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주 극단적이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할아버지의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정말 고리타분해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아니 분간하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을 분간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할 뿐이다.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8. 그러면서 편지를 보면 할아버지는 매우 ‘가족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12절에서 14절에 그러한 언어 구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할아버지는 마치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하듯 언어를 구사한다. 자녀들아(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이것은 분명 할아버지가 속해 있는 공동체, 즉 요한공동체의 자기 이해이다. 요한공동체, 즉 교회는 가족(family)이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 사도 바울의 이해처럼 매우 특별한 이해이다. 생물학적, 또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현대인들의 가족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는 매우 특별한 가족 이해다. 교회는 가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9. 이 가족 안에는 자녀들(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죄 사함을 받은 이들’이다. 이것은 이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라는 뜻이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은 기쁜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송아지’라는 시가 있다.

 

내가 미친놈처럼 헤매는

원성 들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밖에 안된!

송아지

 

너 때문에

이 세상도

생긴 지 한 달 밖에 안된다!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 수록)

 

10.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태어나면, 세상은 막 태어난 그 사람만큼 젊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노쇠해지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줄어들거나 없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들이 노쇠해진 이유, 정현종 시인의 시 ‘송아지’에서처럼 생동감이 넘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부흥을 해도 교회에서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이지,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세례가 얼마나 뜸해졌는가. 우리는 날마다 새생명을 갈망한다. 그 새생명을 보면서 먼저 태어난 이들도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가장 기쁠 때는 새생명이 탄생하는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새로 태어난 이를 믿음으로 받아낼 때이다.

 

11. 이 가족 안에는 아비들(부모들/엄마와 아빠)이 있다. 이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것에 knowledgeable(경험적 지식이 많다) 하다. 그래서 이들은 방금 막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 교회는 갓 태어난 아이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영적인 부모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키워지는 아이들, 이제 막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태어난 영적인 자식들을 능수능란하게 키울 수 있다.

 

13. 또한, 이 가족 안에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그래서 악한 자, 흉악한 자를 이긴다. 청년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네아니스코스’는 단순히 젊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싸움터에 나갈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아비들에게는 지혜(wisdom)가 있지만, 청년들에게는 힘(strength)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 이렇게 강한 청년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안에는 강한 청년들이 있어야 한다.

 

14. 우리가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가족을 구성하는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육신의 나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은 연차적 나이로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인간의 육신의 나이와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의 구분이 잘 겹치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젊은 사람이 영적으로 젊을 때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신체 나이가 늙으면 아무리 영적인 나이가 젊어도 행동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회는 젊은 이들을 하나님 가족의 청년들로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구한말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15. 가장 이상적인 것은 육신의 나이도 젊고, 영적인 나이도 젊은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주의 일은 육신의 나이와는 크게 상관없이 영적인 젊음으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갈렙(Caleb)이 있다.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 제 1세대 중 유일하게 가나안 땅을 두 발로 밟은 갈렙은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육신의 나이가 8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아낙 자손이 차지하고 있던 헤브론을 가리키며 ‘이 산지를 나에게 주소서’라고 여호수아에게 간청한다. 자신이 가장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0-12).

 

16. 우리는 세상을 행해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젊음을 자랑하고 유지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는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의 젊음은 지난 것처럼, 또는 없는 것처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가족은 육신의 나이로 구성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믿음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져 새벽 이슬 같은 청년으로 머물기를 간구해야 한다. 나이 젊은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게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신비로운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 하나님의 가족, 교회이다.

 

17. 요즘 사람들을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불리면 안된다. 우리는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라고 불려야 한다. ‘포노 사피엔스’가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듯,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즉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내가 주조한 개념이다). 우리는 요즘,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에 따라 우리는 바로 그 마음 둔 것에 의해 살아갈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혹시 나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있다면 마음을 돌이켜,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자.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보자.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부질없이 지나가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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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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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11. 11:08

죄를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

(요한일서 1:1-10)

 

1. “눈 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이 노래의 제목은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우리는 이 노래의 제목을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노래의 가사에는 엄청난 인간애와 역사적 아픔이 담겨 있다. 이 노래의 화자는 사랑하는 금순이, 그러나 전쟁통에 헤어진 금순이를 애타게 찾고 있고, 본인은 흥남부두 철수 작전 때 미군 함선을 타고 탈출을 했고, 그리고 지금은 ‘국제시장 장사치’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금순이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남북통일의 소망으로 이어지고,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매우 역사/정치적인 용어까지 등장한다. 촌스러워 보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노래다.

 

2. ‘그 날의 일’을 직접 경험한 이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내가 우리교회에 부임하여 받은 축복 중 하나는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에 등장하는 흥남 철수 작전을 직접 경험하신 故 박영희 권사님으로부터 그 날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또는 영화를 통해서 접하던 흥남 철수 작전(Hungnam Evacuation)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밀려오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떠한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 그 사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가리키는 모든 후대의 작품이나 이야기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나는 그 날 이후, <굳세어라 금순아>를 들을 때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볼 때도 마음 가짐을 다르게 하게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것이 故 박영희 권사님이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이다.

 

3. 요한일서는 한 마디로 얘기해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박영희 권사님이 흥남 철수 작전을 직접 경험했듯이, 요한일서의 화자, 어떤 장로(할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절). 사실 이게 굉장히 전율이 흐르는 진술이다. 이 진술을 들으면서 우리의 반응은 “와~~~”이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 손으로 만져 봤다고!

 

4. 살면서 만나본 유명인들이 기억난다. 탤런트 심은하. 우리 동네 살았다. 어떤 예쁜 사람이 그랜저 몰고 지나가길래 누군가 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심은하였다. 탤런트 음정희. 도시인이라는 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그 남동생이 나의 고등학교 후배였는데, 내가 그 친구 영어/수학 과외선생을 했다. 그 집에 가서 괴외를 했는데, 그때 음정희를 보곤 했다. 가수 강타. 우리 동네 잠깐 살았다. 이 친구가 우리 동네 사는 동안 동네가 난리도 아니었다. 강타 오빠 보러 몰려드는 열성 팬들 때문에 동네가 맨날 시끄러웠다. 놀이터 앞집에서 잠시 살았는데, 강타를 보러 온 소녀 팬들이 날마다 놀이터를 가득 채웠다. 일반 주택만 있는 동네다 보니 공중 화장실이 없어서, 그때 아이들이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느라 우리교회에 몰려들곤 했다.

 

5. 이런 유명인들을 직접 본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눈이 반짝거린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유명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눈이 정말 반짝거려야 한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과 같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증언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잘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한 인간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라는 뜻이다. 우리는 생명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 현상을 경험할 뿐이다. 그런데, 요한일서의 한 어르신(어르신 그룹 / 요한 공동체)이 증언하는 것은 정말 ‘와~~’가 저절로 나오는 것인데, 그는 생명 그 자체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6.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멋진 일은 무엇일까? 요한 공동체가 증언하듯이, 그것은 ‘생명’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은 무엇일까? 내가 경험한 생명을 나누는 일이다. 지금 요한 공동체는 그것을 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3-4절). 생명 자체를 직접 경험한 요한 공동체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일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7.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도’라는 게 다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전도’라고 하면, 어던 비즈니스가 고객을 유치하듯이 ‘교회 나오세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전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행위’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 즉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은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우물가의 여인처럼 생명에 목말라 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도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했는가? 너무 기뻐서, 주체를 못하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서, 그 기쁨을 동네 사람들과 나누었다. 전도는 이렇게 기쁨을 나누는 일이다.

 

8. 생명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가 아주 멋진 이야기를 하신다. 생명 자체를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는 이런 표현을 하신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5절). ‘빛’은 은유이다. 빛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보는 그런 빛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빛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인양 그 빛에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빛을 발산하는 태양이 마치 하나님인듯 태양신을 섬기게 될 것이다. 빛은 은유이지,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빛과 대조되는 은유는 어둠이다. 어둠은 뭔가 음산하고 베일에 싸여 있고 분명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와 반대로 빛은 활기차고 열려 있고 확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둠은 거짓 같은 것이지만, 빛은 진리 같은 것이다.

 

9. 할아버지는 우리를 빛과의 사귐으로 초대한다. 그 사귐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사귐이다. 즉, 우리 안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사귐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8-9절). 여기에는 빛, 진리, 사귐, 죄 사함이라는 말과 더불어 어둠, 거짓, 죄라는 말이 나온다.

 

10. 우리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죄의 개념을 실정법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법에 접촉이 되는 것, 법을 어기는 것, 우리는 그것을 범죄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매우 신학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의 죄이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가리킨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어둠을 만나게 된다. 사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둠을 직면하길 싫어한다. 마치 어두운 밤길을 걷기 싫어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바깥에서 활동하는 어떤 것들인가? 우리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있는 어둠이다.

 

11. 김형영 시인은 시 <화실시편 18>에서 이런 고백의 기도를 드린다.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

내 잘못 내가 모르오니 / 한 번만 더 /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

주님, /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오니 / 내 대신 못 박히소서

못 박히소서 / 못 박히소서 / 아멘,

 

12. 그의 <화실시편 18>은 ‘아멘’으로 끝나지만, 아멘 뒤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고, 쉼표가 찍혀 있다. 우리는 아멘 뒤에 마침표를 찍음으로 기도를 마칠 수 없다. 우리는 아멘 뒤에 쉼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조금 쉬었다, 우리는 다시 기도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어둠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

 

1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에서 “자백하면”은 계속적 죄의 고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자백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호몰로게오’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동일한 것을 말하다’, ‘함께 말하다’이다. 자백, 즉 고백(confession)이라는 행위는 “하나님과 죄인이 한 가지 동일한 것에 대해 함께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죄의 고백, 또는 회개를 매우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취조실에서 수사관들에게 취조 당하면서 실토하듯이, 그렇게 죄의 고백, 회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고백(confession)’의 전통을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고백은 취조실에서 실토하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니다. 고백은 하나님과 함께 앉아서 두런두런 내 안의 어둠에 대해서 대화 나누는 것이다.

 

14. 고백은 인격적인 행위이지 비인격의 기계적 행위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신교가 ‘고해성사’의 전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 이런 고백을 한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고(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고(단순히 친교 나누는 게 아니라 우리는 친교를 믿는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 사함은 같은 호흡 속에 있다. 즉, 죄 사함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게 아니라, 사귐 안에서 죄 사함을 받는다.

 

15.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그리고 교회 지체들과의 사귐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고백은 우리가 할까 말까 내 마음대로,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고백은 우리의 믿음, 신앙이다. 왜냐하면, 고백은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해성사의 전통을 잃어버린 개신교인들은 고백할 줄 모른다. 마음에 어둠이 가득한 데도, 그것을 어떻게 어디에다가 털어놓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상담가를 찾아가거나 정신과의사를 찾아가거나, 처방을 받아서 약을 먹는다. 이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16. 죄를 고백한다는 것, 그것은 전혀 개인적이고 기계적인 일이 아니다. 종교적 행위나 관습도 아니다. 죄(우리의 어둠)를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고, 교회의 지체들과의 깊은 사귐으로 들어가서, 그 사귐 속에서 내 안의 어둠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다. 이것은 최고의 치유행위이며, 구원의 은총이 발생하게 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두런두런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빛으로 나아온 지체들과 함께 두런두런 대화하는 가운데, 빛이 스며들어 어둠이 어느새 물러간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17. 생명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의 이야기, 빛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의 나눔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우리에게 어둠만을 전달해 주는 이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어둠의 희생자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빛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나와야 한다. 그 길이 여기에 있다. 고백. 죄를 고백한다는 것. 우리의 어둠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 우리는 단순히 고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백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 개신교에는 ‘고해성사’라는 전통이 형식적으로는 살아 있지 않지만, 반드시 내용적으로는 살려 내야 한다. 기도할 때 고백하든, 목회자에게 고백하든(목사님, 고백(confession)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사귐인가), 교회의 지체를 만나 고백하든, 우리의 고백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에 대하여 말하는 것, 그것을 꺼내 놓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그리고 교회의 지체와의 사귐 가운데서 하는 고백은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 나아오는 신앙의 행위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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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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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재미나고 쉽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

    2021.10.13 01:01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3. 19:56

약한 그리스도인 (Weak Christians)

(고린도후서 12:9-10)

 

1. 고린도후서 10장부터 마지막 13장까지는 한 호흡으로 가려고 한다. 마지막 네 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용어는 ‘약함(weakness)’이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과 10절은 그 약함에 대해서 가장 극명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운율을 붙여서 찬양으로 부르기도 한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복음의 맥락에서 ‘약하다는 것’, ‘약함(weakness)’이란 무엇일까? 살아남기 위해서 강한 자가 되라고 주문하는 우리 시대에 ‘약함’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을 받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특별히, 2세대 종교개혁자인 칼뱅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어야 한다’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고 싶다. 조명이란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다. 어두우면 잘 안 보인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는 빛을 비추어야 그곳을 잘 볼 수 있다. 언어는 때로 굉장히 어둡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인간은 언어에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문자는 매우 건조하다. 나는 그 건조한 문자에 성령의 조명을 비춘다는 것을 그 문자/언어에 담긴 ‘감정선(emotion line)’을 밝히 보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감정선(지금 어떤 감정(emotion)이 여기에 흐르고 있는지)을 복원해야 한다.

 

3. 고린도후서 10장 이후의 말씀에는 바울의 아주 세밀한 감정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곳에 흐르고 있는 바울의 세밀한 감정을 복원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바울의 감정선에 감정이입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부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흐르는 바울의 감정선은 ‘약함(weakness)’라는 용어에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4.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떨 때 약해지며, 약해졌을 때 어떤 감정이 드는가? 병 들었을 때도 약해지고, 속상한 일을 겪을 때도 약해지고, 무엇인가 간절히 바랄 때도 약해지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도 약해진다. 또한 누군가에게 부당한 공격을 받았을 때도 약해진다. 우리는 약해져 있을 때, 서러운 마음도 들고, 서글픈 마음도 들고, 억울한 마음도 들고,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이런 감정들은 모두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약해져 있을 때, 우리는 감정노동을 아주 심하게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주 지치게 된다.

 

5. 그런데, 본문을 보면, 바울의 약함은 이러한 약함과 조금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약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따라가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느 순간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아주 괴상한 말을 만들어 내어 바울을 공격했다. 10장 이후에는 그 공격이 무엇이었는지, 세 가지가 명시적으로 나온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글은 잘 쓰는데, 말하는 것은 시원치 않다. (10:10)

2) 다른 명성 있는 사도들에 비해 사도적 자질이 부족하다. (11:5)

3) 다른 교회들에게서 ‘탈취’하여 고린도 교회를 섬겼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사역한 일에 대한 비난) (11:8-9)

 

6. 바울은 이런 이유를 들어 자신을 깎아내리는 자들을 일컬어 ‘거짓 사도, 속이는 일꾼, 사탄의 일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비난에 맞서, 부득불 자기를 변호한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프고 속상하고 서운했을까, 그의 감정선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역하느라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피곤하고 힘들었을 텐데, 바울은 지금 자기를 그릇된 이유로 비난하는 자들의 비난을 듣고,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에 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서 ‘쓰담쓰담’ 해드리고 싶다. 힘 내시라고.

 

7. 바울은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난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과 고린도 교회가 그러한 터무니없는 비난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꾸짖는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10:7). 광명한 천사(외모만 뻔지르르 한 사람/말만 잘하고 실제 영성은 없는 사람/왜곡된 복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사람)로 가장하여 나타나 사역하는 척하지만, 결국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만 탐하는 자들의 비난을 듣고 그들의 말에 동조하여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고린도 교회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왜 바울을 비난하겠는가? 바울을 비난해서 그를 깎아내림으로 자기들이 높아지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건 정말 파렴치한 행위일 뿐이다.

 

8.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꾸짖으면서 아주 재미난 말을 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재밌게 다가왔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중매를 섰다고 한다. 고린도 교회는 신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인데, 신부에게 최고의 신랑감을 소개시켜 줬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참 난감한 일이다. 고린도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신랑감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신붓감이었을까?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아주 점잖게, 복음적으로 어퍼컷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신랑감에는 최고의 신붓감이 어울리는 법인데, 지금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신랑감에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9. 그렇다면, 바울의 목표는 여기서 더 분명해진다. 그의 목표는 최고의 신랑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바울은 본인이 약해졌는데, 본인이 약해진 이유는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면서 보통 약해질 때와는 다른 바울의 약함이다.

 

10.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에서 ‘너희’는 ‘고린도 교회’이다. 그냥 교회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울에게 교회는 그냥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작은 우주다. ‘덕을 세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οἰκοδομέω (오이코도메오)’이다. 이는 1차적으로 건물이나 집을 세운다(build)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upbuilding’이라는 단어를 쓴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몸 또는 건물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몸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또는 건물이 튼튼하게 세워지기 위해서 여러가지 요소들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덕을 세운다’는 말의 뜻은 성장과 성숙을 말하는 것이다. 몸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생명이 되어 행복을 누리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덕을 세운다’는 것은 최고의 신랑감인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인 교회로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11. 바울은 최고의 신랑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려다 보니 약해졌고, 최고의 신붓감인 교회를 사랑해서 덕을 세우려다 보니 약해진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연약한 교회의 덕을 세우려고, 교회를 너무 사랑해서 교회를 염려하고 교회를 향한 애타는 마음 때문에 약해졌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고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옥살이도 많이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 나는 수차례에 걸친 여행에서 강의 위험도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나는 또 수고와 곤고와 종종 자지 못함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때로 굶주림과 추위와 헐벗음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로도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3-28/우리말성경).

 

12.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구절은 마지막 절의 “이와는 별도로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이다.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이 바울의 마음을 염려하게 하고 애타게 했다. 여기서 ‘애타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퓌푸마이’인데, 이는 ‘내가 불탄다’의 뜻이다. 바울은 실족하는 형제/자매가 생겨날 때마다 마음이 불타듯이 아파했다. 바울은 바로 이때 자신이 약해졌다. 교회를 사랑해서 염려하고 애타는 마음 때문에 약해졌다.

 

13.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종류의 약함이 대개 목회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을 왜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는가? 그냥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목회지침이라고 하면 될 것을. 성경이, 바울의 이러한 약함을 담고 있는 성경이 교회 공동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이유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약함(weakness)’에 대하여 묵상하라고 주신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약해져야 한다. 아니, 그리스도를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다 보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14. 개인주의를 태동시킨 모더니티를 받아들여 형성된 미국의 복음주의(20세기 중반미국에서 생겨난 미국 백인 중산층 중심의 보수적인 기독교)는 교회론을 형편없이 축소시켰다. 그래서 미국의 복음주의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제 그 수명이 다 했다고 비판 받는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교회를 개인들의 집합소 정도로 전락시켰다. 교회를 종교적 욕망이 있는 개인들에게 그 욕망을 해소시켜 주는 종교적 서비스 업 정도로 생각하게 끔 한 것이 미국의 복음주의이다. 개인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마치 쇼핑하듯이. 그러다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를 만나면 거기에 등록하고 다닌다. 그러다 그곳이 식상해지면 새로운 교회를 찾아 나선다. (이게 모더니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새로운 것(modern/신상품)을 찾아 떠나는 현상.) 한국교회가 미국의 복음주의를 받아들여 기독교 생태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한 신앙의 생태계에서는 자아가 강한 그리스도인, 종교적 소비 욕망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질 뿐이지, 오늘 우리가 바울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를 높이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해서 ‘약해지는 그리스도인’이 세워지는 것은 힘들다.

 

15. 우리가 정말로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린도후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울의 약함, 바로 그 약함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세워져 나가면 좋겠다. 교회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이건 매우 기독교 교회론을 세속적으로, 모더니티의 영향 아래서 왜곡시킨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주님께 부름을 받아 교회의 몸이 되어 ‘함께’ 지어져 간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쁜데 시간을 내야 하는 것, 육체 노동, 감정 노동,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한 몸의 다른 지체를 섬겨줘야 하는 것, 다른 지체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하는 것, 때로는 다른 지체들의 불만과 불의, 불합리를 받아줘야 하는 것, 내가 가진 것을 관대한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 등등,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은 오히려 내가 약해지는 일이다. 주님만을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은 약함(weakness)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16.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반전이 있다. 우리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난다.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주 신비로운 고백을 하는데, 자신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 자신은 계속하여 약함 속에 자기는 내어주겠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는 통로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절). 그래서 우리는 ‘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쓰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읽는다. 이러한 존재의 신비가 우리의 삶을 휘감아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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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26. 21:12

신앙의 역설

(고린도후서 8:1-5, 16-19, 9:7, 11)

 

1. 고린도후서 9장에는 ‘연보(捐補)’라는 말이 나온다. 한자어이다 보니 마음에 착 와 닿지 않는다. ‘연’은 ‘버릴 연’이고, ‘보’는 ‘도울 보’이다. ‘연보’의 뜻은 “자기 것을 버려서 해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헌금(Offering/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다르다. 그래서 영어로 ‘연보’를 옮길 때 ‘offering’이라 하지 않고, ‘liberality/generosity’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연보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고린도후서의 컨텍스트 안에서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관대한 마음으로 내는 물질(재산)을 말한다.

 

2. 바울이 ‘연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고린도 교회와 바울 일행 간에 오해가 생겨서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은 ‘눈물의 편지(frank speech)’를 써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돌려 놓았다. ‘솔까말 편지’를 보내 놓고 마음 조렸던 바울은 디도 편에 온 고린도 교회의 회개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기뻐했다. 바울은 뜬금없이 ‘연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9장 5절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노니.”

 

3.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미루어 보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 일행에게 ‘연보’를 약속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 일행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오해(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뭔가 잘못한 일 / 복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안에서 벗어난 일)가 발생하여 둘 사이가 별로 좋지 않게 되었다. 화평(peace)이 없으면 무슨 일이든 진행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고, 주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공동체(부부 간/친구 간/동료 간)에 화평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서로 간에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다.

 

4. 고린도 교회와 다시 화평을 이룬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고 있다. “예전에 약속했던 연보를 관대한 마음으로 실행하라!”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는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렇게 마음 먹었다가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일을 다시 실행하는 일은 처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들게 마련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연보를 독려하면서 다시 한 번 ‘칼 와호메르 논리(하물려 논리)’를 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이야기를 꺼낸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연보를 했습니다”(우리말 성경).

 

5. 마게도냐 지역은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는 곳이다.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고린도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핍박도 많았고, 극한 가난 속에서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아주 관대한 마음으로 연보를 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도 자발적 관대함을 보여주었는데, 하물며(칼 와호메르 논리), 풍성함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더 큰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6.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교회/데살로니가 교회)은 어려운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관대한 연보’를 할 수 있었을까?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면, 마음이 좁아지는 법이다. 자기가 힘들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십상이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 교회의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게도냐가 교회들이 관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족하기 自足, self-sufficiency’를 배웠기 때문이다. 자족이란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 뭔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한 기독교 영성이다.

 

7.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음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왜 가진 게 이렇게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예쁘지 않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하지 않지? 나는 왜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지? 나는 왜 친구가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외롭지?’ 등등, 전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군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이런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라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립보서 4:11-14).

 

8. 너무도 아름다운 말씀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칭찬하는 장면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처럼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천했다는 뜻이다. ‘나 왜 이렇게 힘들지’, 하면서 신세 한탄하고 외로워 하고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천한 빌립보 교회는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를 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9.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이 관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착한 일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미 나는 주 안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풍성하기 때문에 그 풍성함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의 공급자이시고 우리들은 그 은혜를 받는 수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은혜를 공급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가난한 자/육신이 가난한 자 또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공급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신앙의 역설이다. 한 마디로 이거 아니겠는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렇게 외치는 것!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

 

10. 성경에는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를 외치며, 신앙의 역설을 보여준 신앙의 선조들이 즐비하다. 사무엘하 15, 16장에 보면, 다윗이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예루살렘 궁을 빠져나와 피난 길에 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가. 식솔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바후림이라는 곳을 지날 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나타나서 피난 길에 오른 다윗을 저주한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 16:7-8).

 

11. 그때 시므이의 저주를 들은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다윗 왕에게 “시므이의 목을 칠까요?”라고 물어본다. 다윗 왕은 화난 장수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0-12).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람의 관대함은 이렇게 어려울 때 드러나는 법이다.

 

12.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를 외치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관대한 마음을 보이는 이야기를 우리는 열왕기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이다. 그때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도 그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극심한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께서는 많고도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사는 한 과부의 집으로 보내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곳에 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이렇게 청한다. “물 한 모금 주시오. 그리고 떡 한 조각 좀 주시오.” 극심한 가뭄에 물과 떡이 어디 있겠는가.

 

13. 엘리야의 청을 들은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이 보다 비참하고 슬픈 장면이 어디 있는가. 극심한 가뭄 때문에 먹을 게 없어서, 이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자식과 함께 죽으려고 작정한 엄마의 최후.

 

14. 신앙의 역설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게 최후의 죽음을 작정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4). 극심한 배고픔, 극심한 비참함 가운데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그 순간 신앙을 택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르밧 과부의 관대함이 엘리야 선지자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본인과 자식도 살렸다. 육신의 선택이 아닌 신앙의 선택은 늘 이렇게 우리가 예상치 못한 구원을 가져오는 법이다. 할렐루야!

 

15.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는 부요한 교회였다.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들도 자족하기를 배우고 자발적 관대함을 보여주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듯이, 하물며, 풍성함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더 큰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풍요로운 고린도 교회도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자족하기를 배워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16. 바울은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에 다시 한 번 디도를 보낸다. 바울에게 있어 디도는 어렵고 힘들 때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었다.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들고 가서 오해와 음해 가운데 빠져서 삐딱하게 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잘못을 돌이킨 장본인이었다. 이제 바울은 디도에게 극심한 어려운 가운데 빠져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연보를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아서 오는 중요한 일을 맡긴다. 이렇게 신실한 주의 일꾼이 있다는 것은 교회의 희망이다. 우리 모두 디도처럼 신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면 좋겠다.

 

17. 어려울 때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요,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상황이 더 좋은 사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은혜요 믿음이다. 신앙/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신실함은 어려울 때 움츠러들지 않고 역설적인 관대함을 나타낸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우리 모두,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관대한 마음으로 선한 일 하기를 멈추지 말자. 마게도냐의 교회들처럼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더욱더 관대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역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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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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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20. 13:17

위로와 기쁨

(고린도후서 7:2-16)

 

1.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다섯 번 반복되는 시가 있다. 정지용의 시 ‘향수’이다. 1989년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듀엣으로 불러 유명해진 노래 ‘향수’의 원작이다. 한국 근대시인들(일제시대 때 활동했던 시인들) 중에는 윤동주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 한국 문학계에서 정지용은 아이돌이었다. 윤동주는 정지용을 너무 좋아해서 정지용의 첫 시집(1935년)을 구입하여(1936년) 필사하며 시작 연습을 했다. 정지용은 일본 유학파인데,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도시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하여 정지용은 모교인 휘문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았고,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쳤다.

 

2. 연희전문을 다닐 당시 윤동주는 정지용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그리고 윤동주도 일본 유학의 꿈을 꾸고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입교대학에 입학했다가 정지용이 다닌 동지사대학으로 옮겨서 거기에서 정지용처럼 영문학을 공부한다. 이처럼 윤동주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 중 하나는 정지용이다. 윤동주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의 시는 그 당시 매우 모던했다(새로웠다). 그의 시 ‘향수’가 발표된 시기는 1927년 3월이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정지용의 시는 그야말로 한국 근대문학의 기적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3. 인간에게 경험이란 존재를 꽃피우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인간은 그 인격을 형성한다. 정지용에게 ‘고향’에 대한 경험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된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같은 고향이지만 누군가에겐 ‘꿈에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곳’일 수 있다. 고향에 대하여 무슨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에 따라서 그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좋은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이 곧 생각의 틀과 그 사람의 인격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4.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위로의 하나님’이다. 1장에서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장 3-4절). 그 이후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기억하고 찬양하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삶(부요케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5. 수련회를 연다면 공동체 활동 시간에 가장 묻고 싶은 질문 중 하나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한 단어로 표현해 보시고 왜 그런지, 무슨 경험 때문에 그런지 나누어 주세요.” 대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며 찬송하는 이유는 그가 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으면 바울도 그 사역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찬송이 그 당시에 있었다면, 바울이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6. 고린도후서에는 정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며 그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는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다. 그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배어 있다. 그 긴장감을 찾아내야만 성경을 읽을 때 재미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그 영화의 스토리가 지닌 긴장감을 찾아내고 유지해야만 그 영화가 재밌는 것과 마찬가지다.

 

7. 바울은 어느 순간 오해와 음해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고린도후서에 흐르는 긴장감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의 소원해진 관계 때문은 아니다. 그 관계가 긴장감을 촉발시키기는 했지만, 그들의 긴장감은 그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써서 보낸 바울의 ‘눈물의 편지’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뭔가 오해하고 복음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하여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다. 지금처럼 운송체계가 활발하지 못했던 그 당시 편지를 보내 놓으면 그에 대한 답장을 받는 것은 꽤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일었다. 편지를 보내 놓고 사도 바울은 마음을 조린다.

 

8.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렇게 정다운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은 그 편지를 ‘담대하게’ 썼다고 했는데, 여기서 담대하게 썼다는 것은 ‘frank speech’라는 말로, 아주 솔직하게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솔까말 편지 / 솔직히 까놓고 말한 편지).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조목조목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편지를 써서 보낸 측에서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감없이 다 써서 속이 시원할지는 몰라도, 그 편지를 받는 측에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9. 바울은 ‘따끔하게 한 마디 한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내 놓고 후회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8절).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편지 한 통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는 바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종종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는가? 어떠한 일을 해놓고 그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서 밤잠을 설치며 전전긍긍하는 것 말이다.

 

10. 바울은 자신이 써서 디도 편에 고린도교회로 보낸 편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아마도 바울은 그 편지로 인하여 자신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릴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보내 놓고 “괜히 보낸 것 같다.”라며, 근심 속에서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수일 내에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바울은 그 편지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마음 졸였을까. 생각만 해도 애처롭다. 바울은 당연히 고린도교회에 보내 편지를 놓아두고 하나님께 매일같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11.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은 ‘디도(Titus)’였다.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전했고, 디도는 그 편지를 받아 든 고린도교회의 반응을 바울에게 전해주었다. 고린도후서는 마치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인 바울과 고린도교회 간에 알콩달콩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 드로아의 사역을 포기하고 마케도냐로 건너가서 빌립보에 이르러 디도를 만나게 되는데, 디도가 가져온 소식은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2. 바울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바울이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은 말한다. 사역을 하면서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있어서 바깥으로는 사람들과 여러 다툼이 있었고, 심정적으로는 마음이 많이 두려웠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바울은 ‘낙심(downhearted)’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6절). 바울이 자신의 ‘낙심’을 표현하기 위해 쓴 헬라어는 ‘타페이노스’이다. 이는 낮은, 가난한, 겸손한’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역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의 질병과 디도에 대한 염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보내 놓은 편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인하여 한없이 ‘낮은 자리’에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상황을 ‘낙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3. 낮은 자리에 처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위로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병에 걸렸을 때, 가족 중 누가 아플 때(특별히 자식이 아프면),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가족의 불화를 경험할 때, 직장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하고자 하는 일이 제대로 잘 안 될 때, 등등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낮은 자리’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낙심(낮은 자리에 처하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 정말 애처로운 모습이다.

 

14. 그런데, 본문에 흐르는 기류는 단순히 ‘낙심’이 아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낙심’이 아니라, 위로와 기쁨이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6-7절). ‘낮은 자리에 처해 있던’ 바울의 상황에 반전을 일으킨 사건은 ‘디도의 옴’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낮은 자리에 처해 있던’ 바울을 위로하셨는데, 그 방법은 ‘디오의 옴(by coming of Titus)였다. 바울에게 ‘디오의 옴’은 그냥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의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15. 디도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들고 왔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바울에게 디도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서, (그 편지는 결코 friendly한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켰다는 소식이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써서 보낸 편지를 받아들고 근심했을(마음 찔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칭찬하며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절).

 

15. 이것은 참으로 따스한 고백이다.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내 놓고,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마음을 쓸어내리고 숱한 날을 가슴 조리며 기도했을 바울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지금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지에 함께 하시고, 그 편지를 읽은 고린도교회 성들과도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한 근심이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한 근심은 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하나님 안에서 한 근심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좋은 결과,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할렐루야!)

 

16. 지금, 우리를 낙심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를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낮은 자리에 처하는 일은 참 어렵다.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내 자신이 한없이 무력해지고, 내 자신이 한없이 슬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눈물 흘리는 것 외에는 마땅히 할 게 없다. 그러한 감정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니까, 조금 힘을 냈으면 좋겠다. 나를 한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일’을 주님께 내어드리면 좋겠다. 그러면, 낮은 자의 하나님, 스스로가 낮은 자리에 처하신(케노시스)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에게도 ‘디오의 옴’과 같은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실 것이라 믿는다.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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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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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16. 19:46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후서 6:1-1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1. 어떤 물건을 매뉴얼 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 보니, 그 물건이 가진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거나, 사용하다 잘못해서 고장나게 하고, 또는 매뉴얼대로 사용하지 않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음식도 적당히 먹어야지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원장님한테 배운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아이오다인(요오드)를 먹으면 갑상선 저하증을 치료할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먹을 때도 용량에 맞게, 의사의 지시를 따라서 먹는 게 중요하다. 안 그러면 병을 고치려다 더 큰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2. 디모데후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성경은 신앙의 매뉴얼이다. 신앙도 매뉴얼을 따라 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물건의 매뉴얼을 대충 보거나 아예 보지 않고 물건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듯,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매뉴얼에는 별로 관심 없고 그냥 자신의 감정을 기준 삼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앙이 주는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참 안타까운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절).

 

3. 신앙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 자체를 가져다 준다. 이 진리를 모르는 것도 결국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순간 ‘구원’을 원한다. ‘힘들다. 어렵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낙심된다. 고통스럽다.’ 등등, 우리는 부정적인 환경과 기운 속에서 살아내려고 애쓰고 또 애쓰며 산다. 우리의 삶은 온통 구원의 갈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누가 나 좀 구원해 줬으면 좋겠다!”

 

4.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신앙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구원을 지금 당장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다. 우리가 마음이 답답한 이유, 우리가 사는 게 힘든 이유, 우리가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 우리가 마음을 나쁜 기운에 내어주는 이유는 지금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서 자꾸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물건만 잃어버리고, 정신만 깜빡깜빡 한 게 아니라, 신앙에도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5. 오늘 본문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앙의 매뉴얼에서 벗어나, 아주 한참 벗어나 변변치 못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거울로 보듯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 일행 간의 감정선(tension)을 볼 수 있다. (바울 서신은 뭔가 일이 happen했고 그에 대하여 address 하는 내용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낳는다.) 그 둘 사이(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일단,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을 보는 눈이 조금 삐딱하다. 다른 말로 해서,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다.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니까, 바울이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말이 귀청만을 울릴 뿐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그러한 고린도교회의 강퍅한 마음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6.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대적하게 만드는 바울의 대적자들과는 달리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수고했는지, 그들과는 달리 얼마나 순수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자기 자랑(self-commendation/자기 자신을 뽐 내는 게 아니라, 수사법(레토릭)이다.)을 하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들로 추천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많은 인내와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감옥에 갇히는 것과 난동과 수고와 자지 못함과 배고픔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들로 지냅니다. 또한 우리는 순결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과 모욕,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겪으며 일합니다”(4-8절/우리말 성경).

 

7.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이 신앙생활의 매뉴얼이라면, 이 매뉴얼에 비친 우리의 신앙은 말도 못하게 부족하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굉장히 독특하고 특별하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기복’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잘 따라서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을 ‘기복’의 수준으로 하락시킬 수 있다. (기복: 복만 받기 원하고 십자가가 없는 신앙)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정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선물로 주시는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을 받는다.

 

8.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은 완전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하는데, 바울은 그 다른 차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10절/우리말 성경).

 

9. 기독교 신앙, 그리스도인의 삶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절대자/신)으로부터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공받는 사람이 아니라(기복),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누기 때문이다(십자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친구란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르다. 세상에서는 반대의 일이 발생한다. 진실한 것 같으나 알고 보면 속이는 사람이었고, 유명한 사람 같았는데 보면 별 존재 아니고,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사람이고, 기뻐하는 것 같으나 실은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고, 부유한 사람 같았으나 알고 보니 속이 텅 빈 사람이었고,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으나 빈털터리인 사람.

 

10. 바울은 자신의 겉모습과 실제 모습이 어떻게 다른 지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부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요즘 시대에 바울의 모습은 여러 모로 생각할 것이 많다. 특별히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진정한 부자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정말 부자다. 그의 겉모습을 보면 매우 불쌍한 사람 같지만, 실제로 바울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을 축척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긴 유.무형의 자산을 내어 놓은 삶 말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가 진짜 부자라는 뜻이다.

 

11.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밝히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 사람들이여, 우리의 입이 여러분을 향해 열려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넓게 열려 있습니다”(11절/우리말 성경).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게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개 사랑하지 않으면 입을 닫는 법이다. 상대방하고 말을 섞기 싫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마음이 닫힌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따끔한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러분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스스로 좁아진 것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이 말합니다. 여러분도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십시오”(12-13/우리말 성경).

 

12.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좁아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남 탓 하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여기서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할 때, 마음은 영어로 ‘affections’라고 번역한다. 이건 굉장히 감정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대개 ‘애정, 속이 좁다 깊다’라는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말은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그 좁은 마음을, 그 좁은 이해력을 넓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13. 이런 속담이 있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아무리 잘 생겼어도,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몸/몸매가 좋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마음 좁은 사람 하고는 못사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하면, 그냥 일반 심리학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복음은 심리학 이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왜 그렇게 마음이 좁아졌을까? 바울은 5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체를 따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고후 5:16/우리말 성경).

 

14.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마음이 좁아진 이유는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사람을 육체에 따라 판단했고, 그리스도도 육체에 따라 믿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할 때 아주 쉽게 육체에 따라, 겉모습에 따라, 세상적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 그러나 바울은 더 이상 그렇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그는 사람을 판단할 때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따라 판단한다. 그의 판단 기준이 되는 복음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Christ has died for all)”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몇몇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판단할 때 그들의 외적인 모습(flesh)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15. 우리가 이 복음을 잊어버리면, 우리도 얼마든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마음이 좁아질 수 있다. 그리고 본인들의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좁아진 것이면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 탓을 하기 쉬워진다. 그렇게 좁은 마음으로는, 자기 스스로의 삶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도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하는 바울의 질책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16.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좁은 마음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남 탓 하기 십상이고, 상대방의 진실한 마음과 수고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복음을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넓은 마음’ 안에서 용납하고 용서하고 화합을 이루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도 부요케 하고, 무엇보다 주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워 나갈 것이다. 모든 것은 복음과 그 복음을 붙드는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을 좁게 가지지 말고, 마음을 넓히라. 너무도 따스하고 멋진 메시지다. “복음으로 마음을 넓히라”, 이것이 복음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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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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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재미있는 전개입니다. 마치 제가 글을 써내려간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추석입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만나면 송편이나 떡을 나눠 먹고 싶네요.

    2021.09.20 07:15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7. 09:27

그리스도인의 갈망

(고린도후서 5:1-21)

 

시편 37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참 따스한 말씀이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산다. 마음의 소원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힘든 삶이지만, 우리가 그래도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대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쟁 또는 공정이라고 부른다. 우리 시대에 차별과 인간에 대한 무시(갑질)가 난무하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된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반대로, 실의와 절망이 가득한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 자신이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자책감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는 상식과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나,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결정적 요인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 명령문을 앞에 놓아두고 잠시 묵상해 본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에서 이런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풀어간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선한용 역, 45쪽) 시편 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당신을 향하여”와 같은 말이다. 기뻐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한 ‘방향성’과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올바른 것을 욕망하고 있는가?”

 

바울은 2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간절히 사모하다’를 두 자로 줄이면 ‘갈망’이다. 바울의 갈망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바울이 아주 멋진 말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란 ‘부활’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부활’이라는 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즉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은 종말의 때이다. 기독교인의 믿음과 소망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온전히 드러나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종말은 파국이 아니라 안식이다.

 

바울은 육신의 생명을 벗어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8절). 이것을 ‘죽고 싶다’라는 말로 잘못 오해하면 안 된다. 육신 안에 있는 인간 생명은 ‘탄식(신음하고 애통하는 것) 뿐이다. 그러한 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식’에 이르는 길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죽음 같은 일이 주변에 널려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그 죽음을 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례자(길 떠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가 그 갈망을 잃지 않도록 보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히 하고,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례의 길을 걸으며 고난과 고통에 노출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능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여기서 ‘강권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쉬네코’인데, 이는 ‘통제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쉬네코’를 ‘control’로 번역한다.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대개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돈’이나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더 이상 돈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의 삶을 내어드린다.

 

우리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자유로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찮아도, 하고싶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헌신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니스트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생명(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린도후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17절에 나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체계를 따라 산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 새로운 피조물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성령으로 산다.

 

물을 길어 나르는 항아리가 있었다. 주인은 언제나 두 개의 물항아리를 물지게 양쪽에 걸어 먼 길을 오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항아리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허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더니 왼쪽에 금이 가고 말았다. 주인이 열심히 물을 길어 항아리에 넘치게 담아도 집에 돌아와 보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항아리를 계속 사용했다. 어느 늦은 봄 주인과 함께 물을 길으려고 가는 길에 그 깨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부탁했다.

“주인님, 이제 저를 버리세요. 전 깨진 항아리라서 물이 다 새어 나가 버리니,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그때 주인은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켰다.

“이 꽃들이 보이니? 이 꽃길이 너의 작품이란다.”

“저의 작품이라뇨? 무슨 뜻인가요?”
“너의 깨진 허리춤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새어 나간 것이 아니라, 꽃길에 물을 준 거란다. 너의 몸에 상처가 나던 그날 내가 길에 꽃씨를 심어 두었단다. 돌아오는 길에 네가 날마다 물을 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꽃길을 걷지 못했을 거야.”

(최병락, <부족함>에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사람’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함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것에 욕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리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향한 평안을 잃어버린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괴로운가. 나와 ‘저사람’에게서 부족함을 느끼거든, 기도하라.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인생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다른 이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서 ‘꽃길’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갈망.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중세의 아가씨는 ‘면벌부’를 욕망했고, 현대의 아가씨는 ‘명품백’을 욕망한다. 하나는 과도한 종교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과도한 세속적 욕망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 배운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부활,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한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망이 바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한 주님의 약속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 두기 바란다.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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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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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아멘

    2021.09.13 08:34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31. 12:10

낙심하지 않으려면

(고린도후서 4:1-18)

 

1. 요즘엔 개인주의적 문화가 하도 강해서, ‘보냄을 받았다’라든지,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말이 굉장히 구시대적인 말로 들린다.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사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보냄을 받거나, 부름을 받는 것에 대해서 요즘 사람들은 굉장한 거부감을 가진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들은 ‘낙심’하는 일도 많다.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이내 풀이 죽고 낙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못난 존재라는 자책감에 빠져 우울해 한다.

 

2. 요즘 한국 군대 문화를 보면 비인간적이었던 문화가 많이 바뀌고 군인들의 인권이 매우 존중 받는 군대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것 같다. 참 좋은 일이다. 요즘 군인들에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입대 했다’는 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도 미국처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 개인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심화되다 보니, 이제 한국도 전통적인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

 

3. “우리 시대의 소명은 자유주의를 증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자유는 모든 인류에게 권리와 능력이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은 2003년 9월 6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의 연설이다. 미국의 정치이념은 이른바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의 추구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가 표적으로 삼은 나라들의 민족주의, 종교를 이길 수 있다”는 이상에 근거한다. 자유주의는 민족주의나 종교를 넘어서 그러한 것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4. 우리가 사는 시대는 두 개의 ‘주의/ism’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와 자본주의(capitalism). 삶의 선택(조건)이 모두 자유와 자본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선택하되, 자본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미국은 군대를 가는 것도 모병제로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이고, 군대를 가면 물질적 보상이 크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도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 한국은 징병제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선택해서 군대를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 보니, 군인들의 정신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의 선택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서 군인이 된 것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군대를 강제로 간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된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결혼하고 싶지 않은 배우자와 강제 결혼해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든 삶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보냄을 받은 삶’, ‘부르심을 받은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이는 기독교가 점점 우리 사회에서 매력을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와 별로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기독교는 개인의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가, 자본(돈)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유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부대낌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6.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내가 선택해서, 내 마음대로,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는, 그런 모임이 아니다. 교회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자유주의적인 생각인 것이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다. 부르신 이가 있고, 부름에 응답한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이들 간의 교제(fellowship)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를 보면서 이렇게 인사해야 한다. “당신도 부름을 받았습니까? 저도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우리 부름을 받고 여기에 왔으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끼리 잘 해봅시다!”

 

7. 교회는 기본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보냄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다. 부르신 이께서는 동시에 우리를 보내신다. 부르심은 소명(calling)이라고 하고, 보내심은 사명(sending out/mission)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역동성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교회에 모인 이들이 소명 받은 이들과 사명 받은 이들로 가득 찬다면 교회의 역동성은 아무도 못 말린다. 마치, 나라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굳게 믿는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와 마지 못해 군대에 끌려온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의 사기가 다른 것과 같다.

 

8.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속적인 ‘자유주의’ 이념과 다르다. 자유주의 이념을 따라사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유’에 예속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목격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경험한다. 그 누구도 ‘나’를 건들 수 없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최고의 이념이고, 이것을 벗어나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시대의 자유는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 천명할 뿐이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9. 우리가 사는 시대에 사람들은 아주 쉽게 ‘낙심’할 수밖에 없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한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짊어지게 되는 것은 ‘낙심’ 뿐이다. 또한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사나워진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죽이는 일은 너무 쉽게 발생한다. 삶이 전쟁터 그 자체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보고 싶은 ‘섬’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경쟁’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 사회는 우울한 사회다.

 

10. 고린도후서 4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이다. 우리는 수도 없이 낙심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바울은 어떻게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바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고린도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를 낙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고린도교회는 복음을 위한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았다. 얼마나 낙심되었겠나.

 

11.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엥카케오’라고 하고, 영어로는 ‘lose heart’라고 한다. ‘엥카케오’는 ‘엔(~안에)’이라는 전치사와 ‘카코스(나쁜)’라는 낱말이 합해진 말인데, 이는,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만큼 살면서 두렵고 힘든 것도 없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마음만 늘 좋은 상태를 유지해도 어떠한 상황이 오든지 모든 것을 잘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잠언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런데,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면,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우리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12. AP News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이들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기사였다.

 

UNICEF says aid concerns are growing in Afghanistan.

UN agency for children expects the humanitarian situation in the country to worsen due to a severe drought, the onset of winter, and the Coronavirus pandemic.

The agency says 10 million children in Afghanistan already survive off humanitarian assistance and around a million are expected to suffer from life-threatening malnutrition this year.

It says some 4.2 million children, including 2.2 million girls, are out of school.

 

정치적 소용돌이 외에, 극심한 가뭄과 겨울철 진입,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등의 삼중고로 인하여 1000만명의 아이들이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해 연명하고 있고, 약 100만명의 아이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영양실조로 고통받을 것이고, 약 440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13. 풍요로운 미국의 주민들과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민들 중 누가 더 낙심할까? 우리도 낙심하고 그들도 낙심하겠지만, 낙심의 이유가 정말 다를 것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고 살다가(자유주의) 삶에 제약이 오니 그렇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그들은 생명 자체가 너무 위협을 받아서 낙심할 것이다. 낙심의 차원이 좀 다르다. 아마도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우리들이 낙심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들으면 기가 막힐지 모르겠다. 낙심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약물(drug) 소비만 늘어가고,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그러한 것조차 없어 그냥 굳건하게 맨정신으로 참고 있을 것이다.

 

14. 우리가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낙심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선포는 단순히 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복음’ 때문이다. 우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15. 문맥에 따르면,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바울은 그 보배가 질그릇 같은 자신들의 마음에 있다고 고백한다. 사실 여기에는 우리 시대가 최고의 가치로 삶고 있는 ‘개인(자유)’과 ‘자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우리 마음에 ‘나’나 ‘자본’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빛’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을 품고 있는 자들이 행하게 되는 것은 다음처럼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11절).

 

16.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죽음’이라는 헬라어는 완전히 죽은 상태인 ‘싸나토스’가 아니라 ‘죽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네크로시스’이다. 이 표현은 굉장히 중요한 표현인데, 이 표현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게 ‘넘겨주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에 넘겨졌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의 넘겨짐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구원 사건이 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자신들도 죽음에 넘겨져 생명을 주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7. 이것은 ‘자기(개인/자유)’와 ‘자본’으로 꽉 차 있는 요즘 우리들의 삶과 너무도 다른 삶이다.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게 되는 요즘 사람들의 삶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살기에, 사실 낙심할 겨를이 없다. 우리가 낙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삶’, 즉 복음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18.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한 이분법은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헬라 철학/신앙이 말하고 있는 ‘영육 이원론’과는 다르다. 영육 이원론은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악한 육체를 벗어나 영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겉사람’과 ‘속사람’의 구분은 시간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는냐의 문제이다.

 

19. 겉사람의 관점은 현세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현세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게 끝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현세적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종말론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을 이루는 시간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모든 것이 아름다움의 끝에 도달한다. 겉으로 보면(보이는 것에 의하면) 우리가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 같지만, 속으로 보면(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면) 우리는 그와 반대로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20. 우리는 왜 낙심하는가? 우리는 왜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가? 개인과자본에 집중하게 만드는 체제는 끊임없이 낙심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래야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심하고 있으니,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의 삶이 기쁠 리 없다. 현대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을 때 기쁨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대로 소비를 못하다가 마음대로 소비하게 되는 현상을 ‘보복소비(revenge consumption)’라고 한다. 별말이 다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용어이다.

21. 낙심하기 쉽고,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기 쉬운 이 시대에 낙심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과 주님께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의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부르신 이와 보내신 이가 있기 때문에 일이 좀 우리의 마음처럼 잘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일이 잘 안 되면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속상해 하실 일이지, 우리가 속상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부르시고 보내신 이의 뜻대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성실하게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돌봐주실 것이다. 이 얼마나 진정으로 자유한 삶인가.

 

22. 또한 답답한 현실만 바라보게 하는 이 땅의 시간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즉 종말론적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중이 아니라 더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낙심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한 마디로, 낙심하지 않으려면, 부르심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 답게, 복음에 붙들려 살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낙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다시 복음을 믿음으로 굳게 붙들고, 나쁜 상태에 빠져 있는 마음을 좋은 상태로 구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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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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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2. 20:55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고린도후서 3:1-18)

 

1. 나이가 들면 생기는 현상 중 하나는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이다.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통상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 즉 나이가 먹어가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현상과는 아주 대조되는 이야기를 한다. 바울은 대표적으로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공동번역성서).”

 

2. 이뿐만 아니다. 본문의 마지막절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공동번역성서).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통념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즉 나이를 먹어가면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고,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3. 바울이 본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레토릭(수사법/화법) 지식과 두 가지의 구약 지식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레토릭 지식 중 하나는 이미 지난 시간에 배웠다. Self-commendation 레토릭(자기칭찬/자화자찬 화법). 2장 12절에서 17절 사이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문구는 전형적인 ‘self-commendation’ 수사법(화법)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를 품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이러한 진술을 할 때 사용되는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5절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4. 맞는 말이긴 하나, 이것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맥락에서 조금 떨어진 이야기다. 고린도후서 2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과 일행)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화자찬’ 수사법이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화자찬 수사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는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다짜고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전혀 경청하지 않는 태도이다.

 

5. 지금은 ‘바울(Paul)’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도 중의 사도이지만, 그 당시 바울의 사역(ministry)은 많은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특별히 유대인들(또는 그리스도 사건을 유대인의 종교 안에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고린도교회에도 여느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대적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울서신에서는 대개 그러한 사람들을 ‘거짓 교사’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잘못 해석하거나,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왜곡해서 가르치고, 신앙생활의 실천을 율법적으로 전락시키는 일들을 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견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6.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바울은 대적자들과 맞서고 있는 중이다. 어떤 거짓 가르침, 아주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뒤틀어서 그것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 같은 이들에 맞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향기’는 로마의 군사문화의 배경을 가진 용어이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정복 전쟁에서 이기고 다시 부대복귀 할 때,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정복한 나라의 향품을 피우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결기가 묻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것이다.

 

7.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두 번째 레토릭은 ‘칼 와호메르’라고 불리는 수사법이다. 영어로는 ‘from the lesser to the greater’ 용법으로 불리고, 한국어로는 ‘하물며 논리’라고 한다. 이것은 가벼운 차원의 진리(the lesser)를 무거운 차원(the greater)의 진리와 대비시키는 화법인데, 이런 것이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하물며) 주 얼굴 뵈올 때에에야 얼마나 좋을까.” (생각-좋음 -à 대면-더좋음) 이러한 레토릭은 성경 곳곳에 쓰이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 4:10-11)

 

8. 바울은 3장에서 전형적인 ‘하물며 논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다.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구약의 두 이야기를 가져오는데, 그 두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바울의 주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이야기이다. 하나는 예레미야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의 이야기이다.

 

9. 바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바울의 사역의 신빙성(Authenticity)을 공격하며 그에게 자격을 물어왔을 때, 자신은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장(recommendation)을 받을 필요없이, 고린도교회 교우들 자체가 소개장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레미야 31장의 말씀을 근거 삼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입니다.”(3절)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가져다 쓴 예레미야의 본문은 이렇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1, 33).

 

10.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변호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과 연결 짓는데,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일컬어 ‘새 언약의 사역’이라고 하고,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 칭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하면서 자신의 사역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11.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시키는 이유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아직까지도 모세의 사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모세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옛 언약의 사역이고, 바울 자신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라는 주장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12. 바울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6절). 옛 언약은 율법이다. 그것은 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성령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와 성령의 결정적인 차이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문자(율법)과 성령’의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보통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 알려진 <예수를 시험하는 유대인들> 이야기를 볼 것이다.

 

13. 예수와의 극한 대립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항을 들이대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처리를 말한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요 8:4-5). 바로 이 구절에 대한 바울의 코멘트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7절).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처리하면, 그 여인에게는 오직 죽음 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14. 율법의 기능은 매우 분명하다. 사람들을 모두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을 들이 댔을 때, 죄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세는 바로 이러한 일의 심부름 꾼이었다. 그러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들이댄 유대인들과 다른 모습을 취하신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에 있으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냐?”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요 3:10-11).

 

15.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문자)은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왜 ‘새 언약의 사역’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새 언약의 일꾼’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대적자들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 아니라 ‘옛 언약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의 사역을 따르지 말고, 새 언약의 사역을 따르라고! 옛 언약의 일꾼이 되지 말고, 새 언약의 일꾼이 되라고!

 

16. 물론, 바울은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했던 ‘옛 언약의 사역’을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터라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건을 두고,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이유는 그 영광이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문자로 된 율법을 통한 ‘옛 언약의 사역’이 가진 한계였다.

 

17. 바울은 문자로 된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율법, 돌에 새겨진 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법이 더 영광스러운 사역이라는 것을 위에서 말한 ‘칼 와호메르 수사법 / 하물려 논리’를 사용하여 주장한다. “이 문자의 심부름꾼(모세)도 그렇게 영광스러웠다면, 하물며,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문자로 된 율법의 기능/사역)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하물며,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성령의 기능/사역/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18.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사역’을 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모세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직도 모세의 사역을 강요하여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 아래에 가두어 꼼짝 달싹 못하게 하려는 바울의 대적자들,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이자 일침이다. 그렇게 문자로 된 율법에 갇혀 ‘죽음과 정죄’ 안에 가두는 행위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가증스러운 일인 것이다.

 

19.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문자(율법)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였다. 그런데, ‘옛 언약’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주님께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잘 지켜야 한다.

 

20. 바울의 편지가 기독교의 성경(경전/canon)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문자의 법(율법) 아래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또한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죄책감) 아래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성령의 법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18절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라는 것은 죽음의 일, 정죄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일, 자유케 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몸 바쳤듯이, 우리도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의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성경이 되었을 것)

 

21. 이 복음이 전해진지도 벌써 2천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성령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여전히 문자로 된 율법 아래 있는 것을 본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차별하고, 누군가를 억압하며 산다. 또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생명력 있는 삶,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그것으로 인하여 짓눌리면서 산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나이 먹어가면서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자신감을 잃어갈 뿐이다.

 

22. 그런 모습들은 바울이 그토록 경계하던 ‘옛 언약’에 붙들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옮아가지 못한 어린 아이의 믿음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성령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마음에 새긴, 성령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마음에 품고 생명력 넘치게 삶을 살고 하나님 아닌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살 뿐만 아니라(내 마음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고, 나는 지금 무엇에 매어 힘들어하는가 가만히 살펴보자),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지금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저 나 먹고 살려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인가?(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을 하면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과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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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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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다른 글보다 분량이 더 되고 형식이 다르다고 느껴지네요. 번호를 붙이셨고요. 흐름이 잘 보입니다.

    내용에서 깨닫는 바가 여러가지 있습니다. 살리고 자유롭게하는 성령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배우고 알고 느껴야겠습니다.

    2021.08.23 05:52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0. 16:46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 2:1-11)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큰 봉변을 당했던 것 같다. 편지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냈던 편지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지, 어떤 일인지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모두 그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 때 당했던 봉변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그 사건은 다른 사건을 불러오는데, 바울이 원래 고린도교회를 또다시 방문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려고 했던 약속을 어긴 바울의 행동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비난 거리를 제공한다. 바울이 방문하기로 했던 약속을 어기자 고린도교회에 있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을 ‘말 바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바울을 비난한다. 이 소식도 바울의 귀에 들어갔고, 바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고린도교회에 항변하지 않을 수 없어, 편지를 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고린도후서이다.

 

고운정도 있지만 미운정이라는 것도 있다. 고운정보다 미운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다. (지도 참조) 바울은 소아시아(Asia minor)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아가야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생겨났다. 소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에베소교회이고, 마케도니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교회이고, 아가야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고린도교회이다. 바울에게는 모두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바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교회는 고린도교회였다. 그만큼 고린도교회와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고린도교회는 고운정, 미운정 모두 깊이깊이 든 교회였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착과 사랑은 1장 14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전 1:14). 이것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너희가 우리의 자랑인 것처럼 우리가 너희의 자랑일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에게 자랑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신실하게 전했는데, 그 복음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교회는 순전한 복음에 의해서 탄생한 교회였다. 금으로 따지자면, 순도 99.99%의 순도를 자랑하는 금인 것이다. 그러니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를 방문했다가 그 교회의 어느 한 교우로 인해서 큰 상처를 받은 바울은 상심이 컸다. 그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만 상심이 컸던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 전체가 술렁였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방문하겠노라’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될지 바울은 몰랐다. 바울의 사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탄하거나 형통치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목회’가 바울에게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적대자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아킬레스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늘 시비를 걸었다.

 

바울 서신의 특징 중 하나는 그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자화자찬)’ 레토릭(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는 것이다. 대적자들에 맞서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러한 정황이 반영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 방문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대적자들을 향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 화법을 사용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고 강변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전 1:12절).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라고 자기칭찬(self-commendation)을 하고 있다. 거룩함과 진실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하플로스테’와 ‘에일리크리네이아’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하플로스테(거룩함)’은 ‘생각이나 마음을 두 번 접어 다르게 표현하지 않고 한 겹으로 진솔하고 솔직하게 드러냄’을 뜻한다. 에일리크리네이아(진실함)’은 ‘태양 빛으로 비추어 보아도 가려지거나 숨겨진 부분이 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진실함’을 뜻한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기칭찬’이다.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이것을 적용하면, 바울은 지금 자신이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방문하지 않은 것’은 변덕쟁이처럼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그의 언어로 표현하면, 한 입으로 Yes와 No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의 지혜로 그런 것이 아니라(그곳에 가면 또다른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하는 염려 같은 것),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바울의 믿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wisdom)도 소중하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지혜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인간의 지혜는 참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지혜를 먼저 내세운다면, 거기에서는 선한 열매가 맺어지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아브라함/이삭/야곱)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행동이 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롭게 무엇인가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제단을 먼저 쌓고 시작했다. 이것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신앙 행위였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은 나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지금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 앞에서 제단을 쌓는다는 것, 즉 예배 드린다는 것은 이제 내가 경험하게 될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게 될 거룩한 시간, 공간으로 내어드린다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하고, 수많은 일을 겪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들 가운데서 어떠한 열매(결과)가 맺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기면서 무엇이든지 시작한다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거룩한 시간과 공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은 주말(한 주간의 끝)이 아니라 한 주간의 시작이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반복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기억한다. 우리가 일주일 단위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바로 이렇게, 무엇을 시작하기 전, 구체적으로는 일주일의 삶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다.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 외에,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황하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삶을 보듬어 주기 위해서이다. 어려운 일, 답답한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그 문제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라.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으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3-16).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교회의 지체들을 청하여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것’은 나쁜 일 한 것을 이실직고 고하라는 뜻이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즉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고 뜻하지 않았던,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함께 기도할 줄 아는 신앙이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 모든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방문계획을 취소한 이유는 1절에 진술되어 있다. 이제 나는 또다시 근심 가운데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우리말성경). 대신 바울은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4절).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약속한 대로 방문했더라면 근심과 아픔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바울의 아픔이요, 그들의 기쁨은 곧 바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묶여 있다는 뜻이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이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했다는 뜻이다. 고운정, 미운정이 듬뿍 들어 깊이 사랑했던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 가만히 감정 이입을 해보자. 우리는 지금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중이다. 바울의 그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가. 아마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했던 문제가 우리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직접 경험했던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두 손에 받아들고 읽어내려가면서 울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문제의 발단이 된 ‘어떤 사람’을 치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사랑과 온유로, 즉 눈물로 이 문제를 다룬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에 아픔을 가져온 사람에 대한 치리를 언급하는 6절에서 8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어보자.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6-8절).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바르게 번역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더 잘 번역한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다. 뜻이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여러분은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가 더 큰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기를 권면합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마음 아프게 ‘그 사람’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은 것 같다. 그 벌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형벌 같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교회 공동체로부터 특별한 제재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가 받은 벌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용서와 위로의 단계로 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과 온유로 내리는 벌은 그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 목적이 있지 그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를 용서하는 이유,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그를 이제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이유, 모두가 다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를 읽다보면 그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던 것처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랑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이었고, 교회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이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교회에서 발생한 마음 아픈 일도 모두 사랑과 온유로 치리하려고 했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 들고 읽는 우리도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면 좋겠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사랑했던 이유는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교회를 단순히 ‘다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신앙고백에 의하면,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물론 사도신경에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를 구분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의 전치사를 쓰고(credo in Spiritum Sanctrum), 교회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이라는 전치사를 쓰지 않는다(credo ecclesiam).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185쪽). 교회 자체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한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눈물로 쓴 편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그리고 교회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신앙의 충분한 표준이 되는 가르침들을 만나게 된다. ‘이래서 고린도후서가 성경이 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우게 된다. 첫째,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있는가. 둘째,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라고 고백할 만큼 사랑하고 있는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는 우리들, 주일예배는 일주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자.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니 우리 서로 더 사랑하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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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8. 21:55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고린도후서 1:1-11)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이름이 등장하는 서신(letters)가 13개 있다. 보통 그들은 ‘바울 서신’이라 불린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중에서 일곱 서신만 실제 바울이 쓴 편지들이고, 나머지는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름을 빌어 다른 누군가가 쓴 편지들이다. 바울이 직접 쓰지 않았다고 성경으로서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후서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성경은 교회 공동체가 정경(canon)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직접 쓴 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은 매우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서신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디아 쎌리마토스 쎄우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디아’는 ‘~에 의해, ~를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쎄우’는 ‘하나님’의 속격’이고 ‘셀리마토스’는 ‘뜻(will)’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도직은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 인하여 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게 은혜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며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 선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 ‘꼰대’소리 듣는다. 꼰대 중에서도 상꼰대 소리를 듣는다. 요즘 가장 인기 없는 찬송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549장)”이다.

 

발명은 과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에서도 발생한다. ‘사적인 영역(privacy)’라는 말은 근대에 발명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사적 재산(property)의 개념도 동시에 불러왔는데, 사적 재산은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근대에 발명된 ‘사적(privacy)’ 개념에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신적 존재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적(privacy)’라는 말은 ‘나만의 고유 영역’이라는 뜻으로,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영역은 다른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도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은 지금도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현대인들은 그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사적 영역’을 건들면 그 존재가 누구든, 그게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국가든, 하나님이든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에서 보수정치란 바로 이 사적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 그 누구도 나의 ‘사적인 영역’ 또는 ‘사유재산’을 건들 수 없다. 이것은 ‘자유’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다. 이것은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보수정치의 근간이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이 보장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사적 영역’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바울의 사도직은 사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이런 의심을 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게 맞어? 그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야?” 바울은 이러한 의심에 대하여 단호하게,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 좋고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묻는 것이 쉽게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는 첫째, 우리가 너무 ‘사적 영역’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어 있어서 그렇고, 둘째, 자신의 사적 욕망을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 좋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사적 영역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욕망을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려는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고난과 위로를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독특한 고백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영광송을 부르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3-4절).

 

이 구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울이 의도적으로 단어를 배열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 – 아버지 – 하나님 – 우리”가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며 경험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아버지, 그리고 위로의 하나님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경험한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경험된다고 고백하는 중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5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에서 쓰인 헬라어 동사 “파쎄마(고난들)”는 복수형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한 모든 고난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한 사람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될까 싶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다. 모욕은 인격적인 모욕을 말한다. 감정이 상하는 모욕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모욕을 말한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을 때 사람은 쉽게 죽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 대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면서 밝혀낸,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누겠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채찍질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셨다. 이것은 신체에 당하는 모욕(고난)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음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마지막, 결정적인 모욕이다. 이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고난들)을 쉽게 보면 안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다. 인격적 모욕, 법적 모욕, 신체적 모욕,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 이 모든 것을 당하시고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특별한 고난의 이력을 지닌 분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은 이러한 특별한 고난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고난당하여 죽으신 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그 어떤 고난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깊은 고난과 연결되어 있다. 고난 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 고난들(인격적/법적/신체적/생명적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해 주실 수 있다.(룻기의 나오미(기쁨): 마라(쓰다) 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심: 오벳(효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으로, 위로의 하나님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고난을 당했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니, 그저 눈물만 주룩주룩 나올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즘, 현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할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만 무엇이든지 하려고 들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보니,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하면서 당하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들어설 여지가, 공간이 없어서 그런 것을 아닐까. 요즘 시대를 돌아보면, 현대인들에게 고난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경험하는 통로일 뿐,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려 하지 않고,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뜻, 자신의 의지 안에 머물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도된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불평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한 바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신 이유는 동일한 고난을 당하여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고난을 수치로 여겼던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고난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로 여기고, 자신이 고난 당한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이다.

 

바울은 8절에서 자신의 일행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은 나오지 않지만, 그 고난이 엄청난 고난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8b-9a).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래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했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 (주의: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가리킴)

 

이 부분을 놓아두고 학자들은 몇 가지 가설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이라는 구절과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에베소에서의 소요 사태를 연결한 가설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 일행에게 발생한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우상판매 업자 데메드리오와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거대한 아데미 신전이 있던 에베소에서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파는 상업행위가 성행했다. 데메드리오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 일행은 데메드리오와 그의 사람들이 은으로 만든 신상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행 19:26).

 

이게 단순히 우상숭배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계를 위협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해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19장을 자세히 보면, 적어도 그들은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9장에 소개되고 있는 일화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바울의 간헐적 질병의 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우리는 바울이 경험한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서의 환난을 경험하고 나서 바울이 하고 있는 고백이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we would not trust in ourselves, but in God who raises the dead)”(19b절).


요즘 우리가 뉴스 기사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는 ‘전례 없는(unprecedented)’이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기에 오히려 감각이 무덤덤한 듯하다. 이전에 경험해 본 것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텐데,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적 재난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기에 오히려 무감각한 것 같다.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 발생하면 인간은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법이다.

 

기후위기 같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일들 뿐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에게, 또는 공동체에게 발생한 고난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신경 써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인생이, 또는 우리의 어떠한 선택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발생하는 고난들(고통의 일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괴롭히는 고난들은 단순히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신앙의 원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도록,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 경험이 드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해 보인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 자기의 의지대로 할 뿐이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간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으니, 고난을 경험하더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손해다. 고난이 얼마나 괴로운가. 고난 속에서 괴로움만 당하고 만다면, 그것은 정말 큰 손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난이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경험은 놀라운, 아주 신비로운 경험과 마주하게 되는데, 당한 고난이 그냥 괴로움으로만 남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어준다. (성경의 스토리들은 모두 그것에 대한 증언 아닌가. 아브라함, 요셉, 모세, 나오미와 룻, 다윗 등등)

 

둘째, 우리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 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적 영역의 개념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유 재산(사적 영역)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여 그것에 의지해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개념은 근대가 만들어낸 허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적 영역, 사유 재산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러한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 하나님만이 구원하시는구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그것이 거룩하거나 죄악되거나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힘에 겹도록 심히 고난에 처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하여, 바로 그 한 순간을 위하여 수년간 피땀흘려 노력하듯이,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신앙생활에 정진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려고 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나의 사적 재산이나 또는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한 번 가만히, 오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를 짓누르는 영적 기운은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위로인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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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1. 21:21

선물이며 과제인

에베소서 4:17-32

 

이방인. 심경이 복잡해지는 단어이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의 이방인은 유대인과 대조되던 이방인(Gentile)이 아니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었다는 것을 할 때의 이방인이 이제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교회’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방인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한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지칭하는 에베소서의 용어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시대정신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유하면, 역사 속에서 경험했듯이, 우리는 차별과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무자비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outsider’ 또는 ‘stranger’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방인은 어느 시대에서나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사실, 초기 기독교 시대, 즉 로마시대에 이방인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이방인으로서 엄청난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이방인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가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딱지가 무서운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처지에 놓이지 않기 위하여, 즉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법적 지위를 부여받아 ‘시민’으로서 보호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기독교인이 로마 사회에서 이방인이 아니고 주류인이 되었을 때 오히려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면서 그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휘둘렀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에베소서에서 ‘이방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에 대하여 복잡한 심경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에 도덕적 심상(image/이미지)을 담는다. 가령 흰색은 좋은 심상(이미지)을 가지고 있고, 검정색은 나쁜 심상(이미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천사는 흰색으로 표시되고(흰옷 입은 천사), 악마는 검정색으로 표현된다. 낮(흰색)은 좋은 것으로 인식되고, 어둠(흑색)은 나쁜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심상은 우리의 실제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심상에 사로잡혀 인종차별에 가담하게 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심상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경의 용어를 정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에베소서에 등장하는 ‘이방인’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신학적으로만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방인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현실 사회에서 소비하게 되면 기독교인은 아주 쉽게 차별과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 그렇게 차별과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자가 되었노라고 말하는 무뢰한들이 되기 십상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방인은 신학적인 용어이다.

 

본문에서 이방인과 짝을 이루는 용어는 ‘옛 사람’이다. 이방인’이나 ‘옛 사람’이 가리키는 신학적 상황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이라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드라마틱 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이야기’이다. 또한 룻기서도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탕자의 이야기도 룻기서의 이야기도 아주 눈에 잘 보이게, 드라마틱하게 묘사한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테마인 ‘좀비 이야기’도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인간성의 상실)이 어떤 삶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스윗 홈(Sweat Home)’이라는 드라마는 우리 인간의 내면의 욕망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주 잘 묘사한 웰 메이드 드라마(well made drama)였다. 그 드라마에서 인간이 좀비(또는 괴물)로 변하는데, 그 설정이 매우 독특했다. 드라마 스윗 홈에서의 좀비는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내면의 욕망에 따라 그것이 극대화되는 형상을 가진 좀비로 변한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욕망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을 눈으로 보이게 형상화시킨다면 그처럼 ‘괴물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소위 이방인의 삶, 또는 ‘옛 사람’의 삶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8-19절) 이것을 정리하면, ‘영적 무지, 영적 죽음, 도덕적 타락과 방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어떠한 모습인지, 실제로 알기 쉽지 않다. 이것을 드라마도 눈에 보이게 표현하라고 하면, 작가나 PD마다 다 다를 것이다. 요즘 좀비를 표현하는 것이 드라마마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소위 이방인의 삶, 또는 ‘옛 사람’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러한 삶이 무엇인지,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에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은 무엇일까? 그것을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사람마다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다르게 말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25절 이하에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지침을 통해서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새 사람을 입은, 더 이상의 이방인이 아닌, 더 이상의 옛 사람이 아닌,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되어 새인류가 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돌아와 행해야 할 윤리적 행동들은 대략 6개 정도이다. 1)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 2) Anger 화를 내는 것의 문제 3) 자기 손으로 일하라 그리고 그것으로 남을 도우라 (도둑질 하지 말고 / 남의 것 가로채지 말고) 4) 선한 말을 통해 은혜를 끼치라 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6) 서로 용서하라

 

여기서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위의 윤리적 행동들이 새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된 이들의 필연적인 삶의 형태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말씀의 제목과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새 사람은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새 사람은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선물이며 과제’인 새 사람을 입고 이 세상에서 씨름한다.

 

정현종 시인의 <갈증이며 샘물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여기서 ‘너’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서 다시 읽어 보자.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다

 

2천년 전, 에베소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많이 물었을 것이다. 에베소라고 하는 도시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것도 지금 시대와 판이하게 다르게, 완전 마이너리티(소수자)로서 에베소 지역에 횡행하던 종교관습과 도덕적 타락에 저항하며 온갖 불이익과 핍박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물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복음을 붙들고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도 있을 것이고, 평생 고민 속에서 어정쩡하게 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처음에는 복음을 붙들고 살다가 나중에는 에베소 지역의 관습과 문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 시대, 21세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새 사람’을 이미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선물’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법이다. 선물은 감사인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다.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새 사람’을 입은 윤리적 삶에 대한 이야기로 좁혀서 이야기 해보자. 바울은 여섯 가지의 윤리적 삶을 말하고 있다. 1)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 2) Anger 화를 내는 것의 문제 3) 자기 손으로 일하라 그리고 그것으로 남을 도우라 (도둑질 하지 말고 / 남의 것 가로채지 말고) 4) 선한 말을 통해 은혜를 끼치라 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6) 서로 용서하라

 

이 목록을 현재 내 삶의 정황, 그리고 우리 시대로 가져와서 보면, 현재 내가 잘 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윤리적 지침에서만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에 주어진 윤리적 지침들은 그들 시대에 필요한 윤리적 지침들이었고, 우리 시대에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윤리적 지침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윤리적 지침들은 보편성을 갖는다. 아직도 우리의 삶에 유효한 윤리적 지침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윤리적 지침들은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다. 삶의 자리와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생명에 머무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변하지 않는 선물이다. 선물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과제가 주어진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박노해 시인이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다시

ㅡ 박노해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새 사람’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박노해의 시를 이렇게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 속에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시작된다

 

다시

그리스도인만이 희망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많은 어려운 문제들과 마주 서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위기, 너무 심각하다. 최근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앞다투어 우주여행 비즈니스를 론칭(launching)했다. 그들을 향한 미국 시민들의 여론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로 간 베이조스(아마존 창업자)를 다시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구호까지 내걸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억만장사가 된 것은 모두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는 악한 경제구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우주여행에 돈을 쓰기보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마존 노동자들에게, 또는 지구 상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에 돈을 쓰면 좋을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은 꿈도 못 꿀 값비싼 우주여행 비즈니스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그런 것이다.

 

지금 시대는 ‘기후위기’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기후위기 다큐멘터리 <Breaking Boundaries>에 보면, 그 다큐의 주인공 스웨덴 과학자 Johan Rockström이 이런 말을 한다. “30년 전부터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다.” 여기서 ‘아무도’는 일반 사람들이라기 보다 정부들/관료들이다. 기후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이제 재앙을 돌이킬 수 없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지났다고 말한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예레미야가 떠올랐다. 기후과학자 Johan Rockström은 예레미야와 동일한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도 바벨론과의 국제정치적 위기 앞에서 남유다 왕국의 왕과 고관들에게 위기를 설파하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를 예언했다. 그러나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예레미야의 입을 막으려고 그들 구덩이에 던지고 협박했다. 그러나, 어떤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남유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기후위기가 무서운 것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듯이 기후변화 때문에 홍수가 발생하고, 산불이 일어나고, 가뭄이 발생하는 등 자연재해를 유발시키기 때문만이 아니다. 기후위기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급격하게 식량위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다 수온이 높아져 바다 생물이 줄어들고, 가뭄 때문에 농작물을 생산해 낼 수 없게 된다. 결국 인간이 맞닥뜨리게 될 가장 무서운 위기는 홍수, 산불,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아니라 식량의 부족사태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이렇게 저렇게 극복할 수 있지만, 식량이 부족해지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된다.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성 포위 이야기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일(오늘은 네 자식 잡아먹고, 내일은 내 자식 잡아먹고)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될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식량폭동이 발생하면, 개인의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끔찍한 총기 참사들이 걷잡을 수 없게 번질 것이다. (총 사야겠다!)

 

에베소 지역에 세워진 교회,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한 몸이 되어 세워진 에베소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 ‘새 사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들은 그 과제를 안고 열심히 살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들과 동일하게 복음을 통해 ‘새 사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과제가 주어졌다. 그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구체적으로 다르지만, 그 본질에서는 같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을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삶으로 바꿀 것인가? 이런 저런 말을 하기 보다, 마지막으로 박노해 시인의 <나 하나의 혁명>이라는 시를 보면서, 우리의 과제를 갈무리 해보려 한다.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서는 것

이 지구 위 60억 인류 모두가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내가 먼저 적게 벌고 나눠 쓰면서

덜 해치고 덜 죄짓는 맑아진 얼굴로

모두 나처럼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되고

푸른 지구 푸른 미래가 살아난다고

내가 먼저 변화된 삶을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천지간 나 하나 바로 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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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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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25. 21:33

신인류의 사랑 (Love of New Human Race)

(에베소서 4:1-16)

 

바울은 1장부터 3장에 걸쳐 신학적인, 이론적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십자가, 부활, 승천)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그것은 계시로 주어진 것이기에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는 것은 복음 그 자체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류 간의 교제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낳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이다.

 

한국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남자와 남자 군인과 여자 셋이 걸어가면, ‘남자 둘, 여자 한 명이 걸어간다’라고 말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와 군인’이 걸어간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군인은 남자와 여자에 끼지 못하는 제 3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에베소서의 신학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의 있다. 남자와 여자와 그리스도인. 기독교가 탄생하고 나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매우 유별난 부류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라벨이 따로 붙었다.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신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처음 기독교 신앙이 생겨난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다원주의 사회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신앙 때문에 ‘순교’ 당하는 것은 굉장히 고귀한(noble)한 일이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러한 인식이 별로 없어서 ‘순교’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에베소서 4장부터 바울의 권면이 시작되는데, 권면은 단순히 해도 되고 안 되도 되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지금은 개인의 자유가 가장 큰 미덕인 시대이고, ‘자유’라고 하는 개념이 매우 사사화되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되었지만, 신학적 설명 다음에 나오는 권면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눈에 보이지 않는 것)가 실제로 이루어지게(눈에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실천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을 허물어 그 둘이 ‘하나’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담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담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담이 허물어져서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에베소 교회를 이루어서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실제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럴 때,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진리가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권면’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옵션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필연적으로 들어서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은 그들의 노력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선포했듯이, ‘하나 됨’은 그들이 노력해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3절에서 “힘써 지키라”라는 말은 헬라어 ‘테레인’을 옮긴 말인데, 이것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또는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 됨’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하나 됨’을 지켜야 한다.

 

이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은 매우 위트 있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주 안에서 갇혀 있다”라고 말하는데,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채워진 차꼬를 3절의 “평화의 매는 줄”과 대비를 이루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쇠로 된 차꼬(매는 줄)를 발목에 차고 감옥에 매여 있지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평화로 된 차꼬(매는 줄)를 발목에 차고 ‘하나 됨’에 매여 있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덕목들 네 가지를 말한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덕목들에 대하여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이러한 덕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식상해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추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겸손(humility)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인데, 이 용어는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용어이다(NIB, 61). 우리는 보통 “I am better than you!”의 마음을 갖는다. 그리고 ‘경쟁’이라는 가치 아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일상에서 이런 가치 가운데 살아가면서 겸손의 덕목을 갖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You are better than me.” 참 어려운 과제다.

 

겸손뿐 아니라,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덕목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실제 삶에서 실행하기 쉬운 덕목들이 아니다. 그것을 바울도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매우 특별한 단어를 통해서 그러한 덕목들을 지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3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동사 “힘써 지키라(스푸타존테스)”이다. ‘스푸타존테스’는 ‘온갖 노력을 다 한다’는 뜻의 아주 절박한 표현이다. 자식이 병에 걸리면 그 병을 고쳐주려고 부모가 절박한 심정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 같은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즉,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4절에서 6절에 걸쳐 말하고 있듯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고, 주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시오’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님은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이 우주에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권세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귀신(어떤 영적 존재)도 국가도 자본(돈)도, 그 어느 것도 권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권세를 지니고 계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두려워 한다. 귀신도 국가도 자본도 그 어느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매우 전복적이다.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7절에서 10절 말씀이다. 바울은 8절에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시편 68편의 말씀을 약간 다르게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어떻게 다르게 인용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조금 복잡한 논의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그것을 자세히 알지 못해도 된다. 다만, 시편 68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어 교회에 사역자들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올라가셨다’, ‘내리셨다’, 이런 용어를 통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승천이다. 바울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에 일꾼들을 주셨음 강조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단지 교회가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주신 ‘선물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환기시켜야 하는 중요한 말씀이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 구성원들이 무슨 목표를 가지고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2절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사역자들을 교회에 선물로 주신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번째 것은 두 번째 것을 위해서 이고, 두 번째 것은 세 번째 것을 위해서이다. 사역자들을 세우진 첫 번째 이유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적절하게 구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위해 구비시키는가? 그게 두 번째 이유인데, 사역자들은 말씀 사역과 훈련을 통해서 성도들을 적절하게 구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봉사(디아코니아)는 섬기는 일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먼저 섬겨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속성(nature)이다. 섬김을 잃은 그리스도인은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왜 섬기는가? 그것이 세 번째 이유인데, 그리스도인은 말씀 사역과 훈련을 통해서 적절히 구비되어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데, 그 섬김의 일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냥,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는가? 교회의 몸집을 크게 불리는 것, 우리가 흔히 ‘부흥’이라는 것을 하는 것인가?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실마리는 13, 14절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 14절).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 받아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 이유는 어린 아이와 대조되는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울은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 받는 이유, 그래서 우리가 봉사의 일을 하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세워 주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어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성숙한/mature) 분량에 도달하는 것은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성숙이다. 어린 아이처럼 철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내적 성숙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각 시대마다 내적 성숙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가장 긴급한 문제들에 대하여 남몰라라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헌신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과 Methodist들이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1703년에 태어나서 1791년에 세상을 떠났다. 전형적인 18세기 인물이다. 18세기 영국에서 발생했던 가장 큰 문제는 도시 노동자들의 빈곤 문제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농부들이 일터를 잃고 도시로 몰려와 도시 노동자로 전락을 하게 되는데, 도시에 몰려든 농부들은 늘 빈곤에 시달렸다. 그 당시에는 사회보장 제도나 노동자 법이 발달된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은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그들을 보듬은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과 Methodist들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기후위기 또는 기후재앙이다. 이 모든 것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얼마전 가디언 신문에서 지금 가장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한 것이 지구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뜻있는 국제 변호사들이 지구를 변호하고, 지구에 가하는 범죄를 법으로 정하여 처벌 받게 하기 위해 법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있다는 기사였다. 또 AP 뉴스에서 북극곰이 기후변화 때문에 어떻게 멸종해 가는지 말하면서, 인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 것을 들었다. “We are next!” 정말 섬뜩한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이다.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새로운 인류, 신인류는 무엇을 하든지 오직 사랑 안에서 한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늘 고민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을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 것으로 축소시켜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고, 성숙한 인간, 내적 성숙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냥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고 마는, 철부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인류의 사랑은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섬김으로 나타나야 할까? 어렵지 않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었던 신앙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섬김의 일을 하는 것이다. 기후재앙을 만드는 일에 저항하며, 즉, 자본의 탐욕을 물리치며, 인간 생명의 젖줄인 지구를 지켜내는 것이 이 시대 신인류의 사랑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섬김으로 기후재앙으로부터 지구의 모든 생명을 지켜낼 것인가,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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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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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젊은 기독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입니다. 이런 글을 읽는다면 생각하고 느끼는 점이 크리라 생각합니다. 기회 될 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2021.07.27 22:03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18. 21:31

최후의 인간

(에베소서 3:14-21)

 

본문은 바울의 기도문이다. 바울 서신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기도문이 들어간다는 것과 전반부에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후반부에는 실천적인 이야기(권면)를 한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 중에 에베소서는 좀 더 특이하다. 다른 서신에서는 기도문이 앞부분에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앞 부분 외에 이렇게 중간에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기도문을 기점으로 에베소서는 전반부의 신학적인 이야기와 후반부의 실천적인 이야기(권면)로 나뉜다.

 

전반부의 신학적인 이야기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혔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문 사건이고, 그리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께 세워 나간다.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세워진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에베소 공동체를 위해 바울은 기도한다.

 

기도는 참 따스한 인간의 유산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큼 깊은 사랑의 행위가 없다.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기도 안에 ‘나의 이름(장준식)’이 불린다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다. 기도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도하는 한, 긴 기도는 필요 없다. 짧게, 그의 이름만 불러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내 기도 안에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법이다.

 

유대인의 평소 기도법은 서서 기도하는 것이다. 서서 기도하는 것은 서서 말씀을 받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기에 서서 말씀을 받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에 서서 기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무릎 꿇고” 기도한다. 서서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간절함이 배어 있는 기도가 바로 무릎 꿇고 하는 기도이다. 무릎 꿇음은 경외심, 복종, 겸손의 의미가 강력하게 들어 있다. 성경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표적인 장면은 세 군데 등장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둘째는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셋째는 바울이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에베소 교회 교인들과 작별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 어떤 자세로도 기도할 수 있다. 누워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고, 앉아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의 기본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앉아서 기도를 제일 많이 한다. 기도를 좀 더 오래하기 위한 편의이다. 서서 하는 것이 기도의 기본 자세인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시 앉아서 기도하더라도,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반드시 들어가도록, 서서 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누워서도 기도하고 앉아서도 기도하지만, 기도의 기본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또한 기도의 자세 중 무릎 꿇고 하는 기도가 가장 간절한 기도의 자세라는 것도 알아 두면 좋겠다.

 

바울의 기도를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굉장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는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 등의 가치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바울의 기도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현재 추구하는 가치관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바울의 기도는 세 개의 간구와 한 개의 영광송으로 이뤄져 있다. 우선 세 개의 간구를 먼저 보면, 첫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속사람(the Inner Man)은 바울 서신에만 나오는 독특한 용어이다. 로마서(7:22/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와 고린도후서(4:16/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에도 나오는 용어이다.

 

속사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다. 우리말 ‘마음(속사람)’이라는 말도 참 예쁜 말이지만 헬라어도 참 예쁘다. 속사람(마음)을 ‘카르디아’라고 한다. 히브리어도 예쁘다. “레브.” 영어로는 ‘heart’, 또는 ‘mind’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심장, 또는 마음. 아무튼, 속사람이란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인데, 사람됨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기에 ‘속사람(the inner ma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곳도 바로 ‘속사람’이다. 그러니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속사람이 강건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현대인들의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대개 육신의 건강, 몸이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병든 육신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데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누군가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낯설어 할 뿐만 아니라, 매우 이상한 감정이 들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속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겉사람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두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한계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은 “지식을 초월하는,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아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수준에만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헤아리고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가 잴 수 있는 만큼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서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만다. 그렇다 보니, 우리 삶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억압이 일어날 뿐이다.

 

세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대담한 기도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수준까지 이르기를 구하는 것인데,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구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개념과 유사(엡 4:13)하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와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개념과 유사(마 5:48)하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경지까지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보다 더 대담한 기도는 없다. 이것은 기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기도의 마무리를 영광송으로 하고 있는데,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경험 때문이다.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20절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영광송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제가 구한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영원무궁토록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모든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기도는 ‘속사람’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에 대한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그리고, 기도의 마무리는 영광송이다.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루어 주신 분이라는 고백을 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바울의 기도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치관과 매우 이질적이다. 우리 시대는 겉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둔다.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고, 물질 세계에 대한 깊이를 알려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 세계에 대하여 알게 된 지식으로 물질적 풍요, 즉 겉사람에 대한 풍요를 누리려 할 뿐이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쉽게 말해, 물질적 부자되는 것에만 관심 있다. 우리 시대는 영광송이 사라졌다. 풍성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족함과 모자람의 감정을 주입시키기 시대에 살고 있기 대문이다.

 

요즘 지구가 아주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바이러스 팬데믹에 더해, 유럽에서는 대홍수사태를 겪고 있고, 미국에서는 유례없는 더위와 가뭄 사태를 겪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이런 헤드라인이 떴다. ‘No One Is Safe’: “Deadly flooding in Europe, vicious heat in America: Wealthy nations are waking up to the idea that climate disasters can reach them too.” 이 기사는 정말 씁쓸한 기사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뉴욕 타임즈에서 말하고 있는 ‘wealthy nations’는 모두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지고 성장한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들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 기후위기의 주범들 아닌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도에서 간구하는 것, 속사람의 강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들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속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마치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시는 탕자의 이야기의 현실판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인간의 최후 말이다.

 

최후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파멸당하는 인간일까, 아니면 구원받는 인간일까? 우리는 구원을 너무 비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지구를 이렇게 망쳐 놓고 이렇게 환란이 가득한 지구에서 휴거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 신앙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지구에 사는 한, 우리는 지구의 흥망성쇠와 함께 할 것이다. 지구가 고통 당하면 우리 인간도 함께 고통 당할 것이다. 지구가 번성하면 우리 인간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즉, 우리는 지구의 멸망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지구의 번영과 함께 구원받게(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인가?

 

위의 기사에서 Wealthy nations(부유한 국가들/선진국)는 모두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국가들이다. 그들이 기후변화의 주범 아닌가? 그만큼,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사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쓰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대로 썼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닌 인간 자신이다. 근대의 사고방식: 하나님을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종교의 영역에 가두고, 이성이 신앙 안에서 작동하도록 하지 않고,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여 이성의 고유 영역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조차 개입하지 못하는 이성의 고유 영역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근대의 사고방식),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성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싶은가? 파멸인가? 구원인가? 죽음인가 생명인가? 우리는 마치 파멸을 경험해 보고 싶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겉사람에게만 관심 있을 뿐 속사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겉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와 수치는 매우 발달되어 있는 반면, 속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와 수치는 전혀 없다. (혈압이 높으시네요? 당뇨가 있으시네요? 짠 거 덜 드시고, 음식 조심해서 드세요. 이런 말은 해도, 속사람의 건강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기도를 하루에 세 번 하시고, 예배에 빠지지 마세요. 그리고 성경읽기를 하루에 한 장씩 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질세계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려고 할 뿐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원소 주기율표는 있어도, 그리스도 사랑 주기율표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질적 충만만 바랄 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파멸만 남은 것 같고, 그것을 지금 우리는 현실판으로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시작은 우리의 기도부터 바꾸는 데 있다. 기도할 때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에 관한 기도는 좀 내려놓고, 속사람의 건강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원하는 것에 대한 기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갈망에 대한 기도로 우리의 기도를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우리의 속사람이 얼마나 건강하지 못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게 될 것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충만이 아니라 엉뚱한 것이 충만하게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알아야,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성경공부의 자리, 교제의 자리, 선교와 봉사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한 것들이 영적인 치유의 자리라는 것이 보이게 된다. 

 

이러한 기도와 깨달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어둠이 깊을수록 아주 작은 불빛도 소중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다.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이 피어날 때(또는 겉사람과 동등하게 속사람의 건강도 신경 쓸 때), 물질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알기를 소망할 때(물질 세계에 대한 관심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에도 관심을 둘 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려고 갈망할 때, 그러한 가치관으로 새롭게 삶을 규정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날 때 최후의 인간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인간이다. 파멸이 아닌 구원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를 자꾸 파멸로 몰고 가는 가치관을 내려놓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치관(속사람/그리스도의 사랑/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다시 옷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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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11. 21:43

이 교회를 보라!

(에베소서 3:1-13)

 

(에베소서를 보면, 교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주 필연적이다.)

 

본문을 보면,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은혜의 경륜, 계시, 그리스도의 비밀, 비밀의 경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하나님의 각종 지혜, 예정 등이 그것이다. 비밀, 계시, 경륜’ 이런 단어들은 본문의 분위기를 왠지 신비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에 걸려 넘어지면 안 된다. 단어 자체가 그러한 신비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렇지,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 수 있도록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워서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경륜’과 ‘비밀’이다. 헬라어로 각각 ‘오이코노미아’ 그리고 ‘뮈스테리온’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오이코노미아, 경륜은 직무, 사명, 살림살이 등으로 번역된다. 한자어 ‘경륜’으로 번역하다 보니, 한자어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진다. 오히려 영어가 쉽다. 오이코노미아는 영어로 economy이다. 오이코노미아는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와 다스림을 의미하는 ‘노미아’가 합쳐져 생긴 말이다. 오이코노미아를 풀어서 말하면, 집을 다스리는 것이다. 집안 살림을 잘 매니지먼트(관리하는 것)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2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라고 말할 때 이것을 풀어보면, ‘하나님이 나한테 너희를 위하여 맡겨 주신 일(직무/사명)을 잘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맡겨 주신 일을 잘 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 즉 경륜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맡겨 주신 일 자체를 비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밀은 ‘뮈스테리온’을 번역한 말인데, 일정기간 숨겨져 있다가 계시에 의해서 드러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정기간 숨겨져 있다가 계시에 의해 드러난 바로 그 일을 잘 감당하다가 지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게 참 재미 있는 건데, 그가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가 그가 얼마나 그 일을 잘 감당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계시로 인하여 드러난 비밀(뮈스테리온)이 무엇인가?’이다. 이것은 이미 바울이 2장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것을 3장 6절에 요약해서 적어 놓았다. 공동번역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그 심오한 계획(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공동 상속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정말 좋은 소식(복음)이다. 공동 상속자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헬라어로 ‘함께’를 뜻하는 ‘쉰’과 몸을 뜻하는 ‘쏘마’가 결합된 말인데, 이것은 ‘같은 몸에 속한, 같은 몸에 속한 지체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같은 몸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그 둘을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서로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가 된다. 바울 당시에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혁명적인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계시였다. 바울에게 이러한 계시가 알려지기 전까지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이 계시가 알려지고 난 뒤에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러한 비밀을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계시로 알려지는 하나님의 비밀(뮈스테리온)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받은 사람은 그것을 불가항력적으로 ‘믿음으로’ 밖에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무엇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오해한다. 믿음이 인간의 의지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인간의 의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것,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전달되면 인간의 의지는 온데 간데없어지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것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로 받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순종과 감사와 찬양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마리아(the Virgin Mary)이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전한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28-31).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뮈스테리온(비밀)을 계시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뮈스테리온이 계시로 임하면,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뿐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그리고 이어지는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와 더불어 나오는 것이 마리아 찬가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이렇게 순종과 감사와 찬양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믿음의 가치를 잘 모를 뿐더러 굉장히 낯설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을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것이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든지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좋다. 그 누구도 나의 의지와 반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롭다. 우리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 너무 젖어 있다 보니, 자유와 은혜를 구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 마저도 자신의 자유로, 자신의 의지로 받을지 안 받을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이만한 믿음’을 보기 힘든 것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의지(믿음)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음을 개인의 의지와 연결시키는 매우 근대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라고 할 때, 우리는 여기서도 믿음을 그 사람의 의지라고 잘못 해석한다. 우리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네가 그렇게 인정하니, 너의 그 의지 덕분에 구원받는 거야’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우리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에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와의 만남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고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믿음(신앙)으로 밖에 그 사건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반응하는 믿음인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결국, 은혜와 믿음은 한 켤레의 구두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인간의 믿음을 이끌어 낸다. 다른 말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밖에는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로 또는 다른 것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하자면, 믿음은 굉장히 수동적인 개념이다. 그냥 수동이 아니라, 신적 수동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은혜가 initiative(우선적으로 촉발)해서 생겨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은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난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마태복음은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가만히 끊고자’했다. 즉, 파혼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의 사자가 꿈 속에 나타나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0-21).

 

이때 요셉이 취한 것은 믿음이다. 그냥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주의 사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 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온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고 아들을 낳자 그 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처럼 믿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임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마치 이런 것이다. 바닷가에 있다가 거대한 쓰나미를 맞닥뜨리면, 거기서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쓰나미에 불가항력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란 그런 것이다.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믿음 외에 없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사랑은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다. 쓰나미처럼 임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은혜(하나님의 사랑)는 믿음(인간의 사랑)으로만 받을 수 있다.

 

에베소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났을 때 (“그 심오한 계획(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공동 상속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가 생겨났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한 몸에 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몸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렇게 교회는 인간의 의지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불가항력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에베소교회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서로의 적대감(이질감)을 내려놓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한 몸, 즉 교회가 되었다. 이제 에베소교회는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을 동일하게 전하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바울은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10절).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고 나니까, 거기에 교회가 생겨났다. 그리고 복음으로 구원받고 서로 화해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전달할 사명을 가진다.

 

이 교회를 보라! 이것은 내가 니체의 책 <이 사람을 보라!>를 따라서 정해 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원어의 제목은 ‘ecce homo 에케 호모’인데, 이것은 니체가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가져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쓴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어렵기로 유명한데, 그렇다 보니 지금도 니체의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 읽고나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니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니체는 수많은 책을 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에 별로 큰 수익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이 그동안 쓴 책에 대한 해설책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을 보라!>이다. 그의 마지막 책이지만, 니체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보시오 이 사람이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이 책은 크게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마다 붙은 제목이 매우 독특하다. 첫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현명한지”이고, 두 번째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영리한지”이다. 세 번째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좋은 책들을 쓰는지”이고, 마지막 챕터는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이다. 앞의 세 챕터의 제목 자체도 특이하지만, 네 번째 챕터도 특이한데, 거기에 속한 두 개의 장은 각각 ‘전쟁 선언’, 그리고 ‘망치가 말하다’다. 그런데 제목만 있을 뿐 내용이 없다.

 

<이 사람을 보라!>의 각 챕터에 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랬다. 현명하고 영리한 자가 쓴 좋은 책이니, 사람들이 많이 보고 뭔가 깨달음을 얻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책을 <이 사람을 보라!>로 정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교회를 보라!>로 외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담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지혜를 세상에 알려야 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로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히 성경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다른 집단도 성경을 교회처럼 전투적으로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전투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거기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 우리들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으로 그 은혜를 불가항력적으로 받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사명을 가지게 된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사도 바울처럼 사명을 감당하다 감옥에 갇혀도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그렇게 감옥에 갇힌 것을 자신이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증거로 삼는다.

 

성경인 에베소서를 연구하고 묵상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이 교회를 보라!>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여기서 ‘이 교회’는 지역교회라기 보다 보편적인 교회를 말한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좀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왜 요즘 우리 교회들은 세상을 향하여 <이 교회를 보라!>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에서 길게 설명한 것처럼, 믿음을 ‘자유로, 자신의 의지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믿음을 자유의지와 혼동을 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계시로 드러났을 때 우리가 그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꾸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걸러내려고 하고, 그렇다보니, 결국 우리의 삶 속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감사와 찬양이 없기 때문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말로 해서, 요즘 우리는 현저하게 하나님의 지혜의 ‘보물창고’인, 하나님의 비밀의 ‘보물창고’인,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창고’인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데 엄청 게을러졌을 뿐만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맞닥뜨리는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불가항력적인 믿음의 고백을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믿음의 신앙생활, 즉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이기적이고 미약한 자유와 의지에 근거한, 매우 세속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간절히 바라기는,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입한 자유와 의지를 겸손히 내려놓고, 진정 믿음으로 밖에는 반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될 때, 교회는 다시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이 교회를 보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같다. 우리, 그러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 위하여, 함께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임하기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믿음으로 응답하자.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찰 뿐 아니라, 삶의 의미가 넘쳐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 이러한 교회 공동체, 얼마나 행복한가. <이 교회를 보라!>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그날까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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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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