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18. 00:46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아모스 8:11-13, 골로새서 1:24-29, 누가복음 10:38-42)

 

1. 하인츠 폰 푀르스터 일리노이 공대 교수가 20여년 전에 수학 공식을 사용하여 지구 종말에 대하여 쓴 논문이 다시 회자된 기사를 보았다. 그는 인류의 인구 증가율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지구 종말의 날을 계산했는데, 그가 지목한 종말의 시간은 2026년 11월 13일 금요일이다. 4년 남았다. 하인츠 교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종말론적 예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구의 무한대 팽창이 인류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일인가를 경고한 학문적 분석이었다. 하인츠 교수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양심 있는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멸망을 계속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기후변화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다른 말로, 종말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무의식적 집단 자살 상태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2.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 중인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우디 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와의 회담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요즘 물가폭등에 대한 원인에 대한 분석인데, 서방 국가에서 물가폭등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에너지 공급의 차질이지만, 빈 살만 왕세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했다.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비현실적 에너지 정책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즉, 빈 살만 왕세자는 물가폭등의 원인을 서방 국가들의 친환경 정책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석유 안 쓰려는 정책들이 물가폭등을 불러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3.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인츠 교수가 예견한 지구 종말의 날이 그대로 실현될 것 같은 분위기다. 게다가 종교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도 만만치 않다. 요즘 한국에서 신천지 활동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동안 음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신천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만방에 알려지게 되자 전략을 바꿔서 이제는 아예 대놓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방문 중 양재역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큰 싸움이 벌어져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장로교인 아줌마와 신천지 포교활동 중이던 신도들 간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장로교인 아줌마가 허망한 듯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장로교인인데 나를 이단이라고 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4. 요즘 신천지에서는 신천지-보혈 서사가 유행이라고 한다. 코로나는 주님이 주신 시련이고, 그 시련을 신천지는 주님의 은혜로 잘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천지 신도들이 제공한 혈장(피) 덕분에 코로나 치료제(백신)이 개발됐고, 그것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렸다는 서사이다. 신천지 신도들의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보혈이다. 생명을 살리는 보혈. 그래서 신천지는 요즘 이러한 신천지-보혈 서사를 통해서 내부결속을 다지고, 이 서사로 결속된 신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힘을 내어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5. 일본의 아베 전 총리 총격 사망 사건을 통해서 아베 집안과 통일교의 관계, 일본에서의 통일교 활동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아베 전 총리에게 총격을 가한 사람은 통일교, 즉 종교적인 이유로 그러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노컷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에는 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연합회가 존재하고, 그 조직을 통해서 통일교가 일본 사회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밝혀지고 있다. 통일교에는 영감상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영감상법이란 ‘영계의 지옥에 있는 조상들의 고통을 없애고 후손들이 안전하려면 영적능력이 있는 물건을 구매하고 헌금을 해야한다'는 교리다. 중세의 면벌부를 흉내 낸 교리 같다.

 

6. 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협의회에서 아베 총리 피살 사건에 대하여 이러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야마가미 어머니가 통일교에 빠지고 그로 인해서 가정의 모든 경제적인 것이 파탄이 나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헌금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내몰았다는 분노심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통일교에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가진 모든 재산을 바치라고 하는 교육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통일교 신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자녀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낮구요. 그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야마가미씨도 마찬가지지만 심지어는 여러 가지 형편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교육,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도 낮고 그로 인해서 가정의 파탄을 일으키는 수많은 통일교 가정이 있습니다."

 

7. 정치, 경제, 종교, 어디를 둘러봐도, 혀를 쯧쯧 찰 수밖에 없는 종말의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만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말의 소식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옛날부터 종말을 목전에 두었다. 대략 2천 7백년 전에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메시지도 종말론적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8. 곤고한 날, 애통한 날, 죽음 같은 날이 닥친다. 특별히 기근이 닥치면 그렇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는 것만큼 종말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그러한 상황이 닥친 것에 대한 아모스의 해석은 매우 독특하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에 의하면, 종말이 닥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종말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 때문에 온다. 종말은 먼 훗날 오지 않는다. 당장 온다.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을 때 우리는 종말이 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종말은 당장 온다. 종말은 이미 와 있다.

 

9. 기후위기가 왜 닥쳤는가? 우리 인간들의 탐욕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탐욕을 그치는 일이 종말을 맞이하는 일보다 어렵다. 인간은 끝끝내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이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육신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탐욕에 대한 경고를 끊이지 않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인류는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10. 신천지나 통일교도 마찬가지다. 신천지-보혈 서사나 통일교의 영감상법 같은 교리가 왜 생겨나고 사람들은 왜 그러한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는가.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마음이 곤고한 사람(건강하고 건전한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신천지가 만들어내는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뿐 아니라, 통일교에서처럼 허탄한 일에 열심을 내게 된다.

 

11. 이러한 일은 신천지나 통일교 같은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말씀의 기갈 현상은 이런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정통 기독교에서도 발생한다. 이단이 별거인가. 말씀의 기갈 현상을 겪어 배고프고 목마르니까 허탄한 것으로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 말씀이 골로새서의 말씀이다. 골로새교회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골 2:4). 골로새교회에는 ‘교묘한 말로 교인들을 속이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가 허탄한 것에 자기의 인생을 소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믿음 위에 굳게 선 신실한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12.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을 준다. 마르다는 봉사(일함)의 대명사이고, 마리아는 침묵(멈춤)의 대명사이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멈추어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게(봉사) 된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는 일과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 중에서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는 일을 우선 순위에 놓는 듯하다. 주님은 마르다보다도 마리아를 칭찬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13.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이렇게 우선순위의 관점에서 놓고 읽으면 우리는 아주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도덕적으로 더 옳은 일이고 봉사하는 일은 열등한 일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옳지 못하다. 멈춤과 봉사는 동일하게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잠시 멈추는 일도 중요하고, 주님을 위하여 몸바쳐 봉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14.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멈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십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제4계명, 즉 안식일법이다. (출애굽기 중, <우리들의 십계명>을 참고하라.) 애써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멈추는 것을 불안해 한다. 멈추면 마치 죽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쉼 없이 돌아간다. 말씀의 기갈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후위기나 또는 종교적 왜곡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씀의 기갈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다의 영성(봉사의 영성)은 상대적으로 쉽게 도달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영성(멈춤의 영성)에 도달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5. 우리는 쉽게 활동을 멈추지 못한다. 활동이라는 것은 관성을 가지고 있다. 관성은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하던 것을 멈추어야 한다. 관성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잘 하지 못한다. 힘들어 하고 어려워 하고 불편해 한다. 일례로, 팬데믹이 처음 닥쳤을 때 우리는 하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팬데믹이 관성을 멈추어 세웠다. 그래서 우리는 관성대로 나오던 교회를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을 힘들어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이 관성이 바뀌어 버렸다. 재택 근무하는 게 이제 관성이 되다보니, 재택 근무를 그만 두고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힘들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원을 뽑을 때 ‘remote work available’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으면 직원 채용이 힘들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교회에 나와서 대면예배 드리는 일이 힘들어졌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일이 관성화되어 이것을 멈추고, 교회 다시 나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6. 마르다와 마르아의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더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봉사의 일이 하찮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하는 일을 우리가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멈추지 못하면 사건이 발생한다. 기후위기가 왜 발생하는가. 탐욕을 멈추지 못해서 그렇다. 하인츠 교수가 예견한 것처럼, 2000년 동안 멈추지 않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지구에 대한 착취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신천지에서 말하는 신천지-보혈 서사 같은 황당하고 허탄한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 통일교에서 말하는 영감상법 같은 허탄한 요구에 자신의 재산을 바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 그래서 아베 총기 총격 사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멈추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17.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이 무엇을까?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바쳐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뜻일까? 물론 이러한 뜻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면,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이전에 살던 대로 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울 수 없다. 멈추어 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겨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멸망하고 말 것이다.

 

18. 우리가 허탄한 것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빼앗겨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고 잊지 않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허탄한 것에 마음을 몸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 없는 사람은 존재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기 때문에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허탄한 것에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착취당한다. 재산을 잃고 생명을 잃는다.

 

19.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생명을 그분께 맡긴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팬데믹이라는 것 때문에 주저 않아 있을 수 없다. 힘써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사랑의 역사를 일구어 나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잠시 멈추어서, 우리가 멈추어서 바꾸어야 할 관성,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을 방해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자각하고 확신하는 은혜를 간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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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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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12. 06:18

선한 이웃

(누가복음 10:25-37)

 

1. 이러한 콤플렉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 – 자기가 착하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예쁜 여자 콤플렉스 –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예뻐야 한다는 강박관념)

믿음 좋은 콤플렉스 – 자기가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믿음이 좋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2.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한 이웃 콤플렉스가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선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린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처럼 선한 이웃이 됩시다’이다.

 

3. 성경에서 이러한 정도의 교훈만 얻어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한 이웃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요즘 기독교가 개독교니 뭐니 사회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실제적인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만큼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단체도 없다. 이는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덕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싫으나 좋으나 선한 이웃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4. 그래도 우리가 좀 더 밀고 나가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지는 의미를 좀 더 알아보는 게 좋겠다. 그리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본문이 처한 정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이방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누가는 복음이 유대 땅에만 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덩어리로서 ‘누가-행전’의 정체성은 다음 구절이 담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니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5. 누가복음은 이방인에 대하여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복음이 전달되는 것의 최종 목적이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방 지역의 대표격인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드시면서 이야기의 주인공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한 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청중이었던 유대인들, 특별히 율법교사에게는 매우 전복적으로 들렸다. 율법교사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내 가족, 내 친구, 내 민족, 내 나라 등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이웃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6.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전복성’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어느새 새로운 유대인, 새로운 바리새인이 되어 예수님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생각의 틀을 수용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차별하고 이웃의 범주와 기준을 ‘나 자신’으로 축소시켜 그 안에 갇혀 버리는, 매우 어리석고 안타까운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떤 율법교사(아주 보수적인 유대인)의 질문이었다. 누가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시험’이었다고 평가한다. 율법교사의 질문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

 

8. 율법교사의 질문에 맞서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 답을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랬더니, 율법교사는 율법교사 답게 정답을 줄줄 이야기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모세오경의 말씀 중 두 군데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 말씀이고,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이다.

 

9.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100점짜리 대답이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누가는 그 정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절). 율법교사는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교사는 한 가지 더 질문을 한다. 다시 말해, 율법교사는 자신이 얼마나 이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지, 그래서 자신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쭐한 마음으로 물은 것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10.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신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교사의 자기 의가 얼마나 교만한 것이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읽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만든 이웃의 범주에서만 말씀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이웃이란 그저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자를 향한 자기애에 불과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11.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 속에서는 여러 명이 등장한다. 강도들(몇 명인지 알 수 없다),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자,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그리고 주막 주인이다. 이 비유를 연극 무대에 올리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고 싶어할까? 아마도 사마리아인을 맡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강도들처럼 나쁜 사람이거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몰인정한 사람이거나, 주막 주인처럼 주변인물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자는 절대로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에 투영하고 싶어한다.

 

12.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전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던 독립투사들, 성경에 등장하는 열심당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단순히 민족적 투쟁이 아니라 신앙적 투쟁이었다. 지금도 이런 투쟁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성시화 운동’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지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자금이 필요했고,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들은 강도 짓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적 열정이 그 방향을 잘못 잡으면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드러나고 있다.

 

13. 강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열정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못 본 채 하고 피하여 지나간 것은 그들에게 인정머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불가피 하게 피 흘리고 있는 사람을 지나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사마리아인처럼 거반 죽게 된 자를 만졌다면, 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며칠 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고, 자신들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14. 그러나 이것 또한 종교적 열정이 불러온 폭력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세세한 항목(피 흘린 자를 만지면 부정해진다)에는 충실했지만, 율법(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정신(스피릿)을 읽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종교적 열정만 있고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하면, 이렇게 폭력이 발생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강도들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에게 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이렇게 폭력은 무엇인가를 해도 발생하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발생한다. 하지만, 강도들이나 제사장과 레인인이 지닌 종교적 열정이 폭력을 불러왔다는 것은 동일하다.

 

15. 우리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화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강도들이나 제사장과 레위인, 또는 주막 주인에 가깝다. 더군다나 신앙인으로서 더 그렇다. 우리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존경 받은 신앙인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많으나, 실제로 어떠한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싫어한다. 또한, 주막 주인처럼, 연루되더라도 최대한 주변부에서 수동적으로 연루되고 만다. 사마리아인처럼 실제로 어떤 사건의 중심에 서는 것은 극도로 꺼려한다.

 

16. 그러나,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동일화를 생각해 봐야 하는 등장인물은 오히려 강도 만난 자이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가. 이국 땅에서 이민자로 20년 간 살면서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화 하는 데서 벗어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 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이겠구나.

 

17. 우리는 나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사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 당시에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동일화 하고 싶어하는 강자처럼 그 위치가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어려운 일을 당한 이에게 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베푸는 자가 베풂을 받는 자보다 강자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내 가족, 내 친구, 내 민족, 내 나라를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을 때 그를 도와주면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율법교사도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고 “네 생각에는 누가 장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사마리아인이요!”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마지 못해 돌려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여전히 그는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받아들 수 없었던 것이다.

 

19. 우리는 나 자신을 강자가 아닌 약자의 위치에 놓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실제로 누가복음이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더러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이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줄 참된 선한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다. 우리는 거반 죽게 된 자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어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20.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팬데믹을 지나면서, 강도 만난 자, 그래서 거반 죽게 된 자는 교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팬데믹 동안 교회 상황을 조사한 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에 비해 대면예배 회복율은 70% 정도이고, 목회자의 절반은 번아웃 상태이고, 인력이 없어 큰 교회에 비해 여러가지 활동을 못한 작은 교회들은 대부분 문을 아예 닫거나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팬데믹을 구실삼아 교회를 떠난 사람도 많고, 교회를 옮긴 사람도 많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방문한 모든 교회들이 팬데믹 동안 ‘거반 죽게 된’ 경험을 했고, 아직도 회복이 안 돼서 모든 목회자들이 힘들어 했다. 우리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21. 우리가 좀 더 주님께 은혜를 간구해야 할 때이고, 우리가 좀 더 힘을 내야 할 때이다. 참된 선한 이웃이신,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주님께서 강도 만난 자 같은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그래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선한 이웃이 되어, 우리도 주님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좀 더 힘을 내서 교회를 살려야 할 때이다.

 

22. 선한 이웃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 없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우리 더러 선한 이웃이 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도덕적 부담을 지우시는 말씀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우리에게 직접 선한 이웃이 되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선한 이웃인 주님의 돌봄을 받아 기력을 회복해서 남은 힘이 있거든, 그 힘 가지고 우리도 주님처럼 조금이나마 어려운 이들에게 다가가서 선한 이웃이 되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선한 이웃 콤플렉스로 선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선한 이웃이신 주님께 받은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는 자가 되면 좋겠다.

 

23. 그리고 우리, 꼭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상황에 처해진 교회를 좀 더 진지하고 진실하게 돌봤으면 좋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주님의 몸이 강도를 만난 것처럼 어렵다면, 열일 제쳐 놓고 돌보는 것이 선한 그리스도인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기력을 회복하여 선한 이웃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내자. 선한 이웃인 주님처럼 우리도 선한 이웃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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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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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6. 03:58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다

(열왕기하 5:1-14)

 

 

1.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은 참 중요한 것 같다. 구약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재현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재현되고 있다. 열왕기상에서는 엘리야가 활약하고, 열왕기하에서는 엘리사가 활약한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사역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사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흥미로운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2. 나아만 장군 이야기 전에 아주 짧게 나오는 보리떡 이십 개 이야기를 보면 이렇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2-44).

 

3. 이것은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엘리사의 이 이야기는 가뭄이 들었을 때 발생한 일이다. 가뭄 가운데 수확한 곡물을 바알에게 바치거나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기적과도 같은 곡식이 된다. 우리가 나눔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해서 그렇지, 나눔은 이런 큰 기적을 일구어 낸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나눔의 가치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 자신만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자기 집중성을 내려놓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에 자기를 헌신하는 것 자체가 신앙이다.

 

4. 위기의 때에,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팬데믹이 처음 닥쳤을 때 그로서리의 식료품이나 공산품이 남아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쉽게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중국에서도 봉쇄령이 내려지면 식료품 가게는 금방 동이 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신앙인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위기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5. 평소에 위기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인간은 상황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도 가뭄의 때에 상황에 휩쓸릴 법했으나 그가 자신의 수확물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먼저 가져온 것은 그가 평소에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이다. 위기의 때에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위기의 때에 자신 만의 안위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돌아보면, 위기의 때에 힘이 되어준 사람이 기억에 남는 법이고, 힘이 되어준 사람들을 위해서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법이다. 위기의 때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6. 열왕기하 5장 전체에 걸쳐 나아만 장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면, 나아만 장군의 위상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아만 장군에 대한 수식어는 화려하다. “크고 존귀한 자”, “아람을 구원한 자”, “큰 용사” 등의 수식어가 그에게 붙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한 용어가 등장한다. “나병환자더라.” 그렇다. 나아만 장군은 화려한 명성을 지녔으나 나병환자였다.

 

7. 열왕기하 5장 전체는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막상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성경은 나아만 장군보다 이름 없는 한 아이에게 주목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 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2절). 나아만 장군의 병 치유와 그의 구원은 바로 이 이름 없는 한 아이에게서 시작된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3절).

 

8. 나아만 장군이 평소 같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노예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어둠이 짙으면 작은 빛도 환하게 보이는 법이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이렇게 우리가 절박할 때, 그리고 한없이 겸손해져 있을 때 들린다. 우리는 평소에 겸손을 연습해야 한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높아진다. 교만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9.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라는 이어령 선생의 시집에 보면, 이런 시가 있다.

 

피었다

시드는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누군가 울면

나도 따라 운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흐린 날 안개 속에 산이 없어지고

답답한 유리창에 빗방울이 흐르면

나의 눈에 눈물방울이 구른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신문을 읽다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너와 비슷한

이름을 발견하면

어느새 차가운 눈물이 흐른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거울 속의 나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면

거기 남의 얼굴처럼 주름진 모습

눈물이 흐른 자욱이 보인다

정말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10. 딸을 잃고 한없이 겸손해진 시인은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눈과 귀가 열리고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마음도 이랬다. 승승장구할 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법한 노예 소녀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11. 눈이 가려 있고, 귀가 닫혀 있고, 감각이 무디어져 있다면, 그것은 내가 교만해져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못 느끼던 것을 느끼면, 비로소 내가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지만, 그의 교만은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의 홀대에 기분 상해한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극진하게 자신을 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아만의 예상은 빗나갔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10절).

 

12. 나아만 장군은 자신을 향한 엘리사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아만 장군을 치료와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이름 없는 ‘종들’이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위대한 나아만 장군이지만,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나아만 장군이 아니라 권력과 재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이 주목하는 대로, 권력과 재력을 지닌 나아만 장군에게 집중하기 보다 권력과 재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에게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3. 나아만이 궁극적으로 나병에서 치유를 받고 구원받게 된 것은 이름 없는 자들의 활약 덕분이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에게서 예상치 못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종들 덕분에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치유와 구원의 길로 다가설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성이고 구원의 성격이다. 구원은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온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발생한 어려운 일 때문에 숨 막혀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 그런 존재를 무시하지 말고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14.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는다. 그리고 그는 병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새로운 생명)을 받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너무도 명백히 복음서의 ‘세례’에서 재현되고 있다. 세례는 무엇보다 겸손의 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리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죽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겸손한 자리에서 치유와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15.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만나 치유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겸손의 자리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병은 그의 위대함을 무색케 하는 병이 아니라 그를 겸손으로 이끈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병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는 엘리사에게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가 엘리사에게 나아가지 못했다면 그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지 못했을 것이다.

 

16. 그러나, 그는 결국 요단강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몸을 씻고, 나병에서 놓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던 자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겸손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 일들 때문에 힘들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에게 치유와 구원이 임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들어주시길! 우리를 겸손하게 하실 때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길! 우리에게 치유와 구원이 임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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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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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30. 08:08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출 40:1-38)

 

1. 인간은 죄인이고, 세상은 죄로 물들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보존하고 싶지만, 때로,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 또는 우리가 저지르는 일들을 보면, ‘죄’라고 하는 용어는 인간에게, 또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 고개를 들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이 죄 많은 세상을 견딜 수 없기에, 이 죄 많은 세상을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간절함이 베어 있는 것이다.

 

2. 영국의 작가 존 번연이 1687년에 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라는 소설이 있다. 존 번연이 활동하던 시대는 가톨릭에 의한 개신교 박해가 난무하던 때이다. 존 번연 자신은 종교가 없었으나 청교도였던 여인(Mary)과 결혼하여 개신교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역경의 삶을 살았다. 박해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에, 그 당시 종교전쟁은 무서웠다.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 신앙을 갖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와 같았다. 요즘 우리가 헌법에 의해서 보장받고 있는 ‘신앙의 자유’는 오랜 세월 전쟁을 통해 일군 피의 열매이다.

 

3. 번연이 살던 시대의 국왕인 찰스 2세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제외한 기독교 교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침례교도였던 존 번연은 비밀집회(허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집회)를 연 혐의로 12년 동안 투옥되었다. <천로역정>은 감옥에서 탄생한 불후의 명작이다. 존 번연의 인생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17세기(1600년대) 영국의 종교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고, 어떠한 분위기(또는 어떠한 심정)에서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으로 이주해 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4. 그런데, 그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참 재밌는 사실이 있다. 종교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들은 미국 땅에서 또다른 박해를 저지르게 된다. 미국의 작가 나다나엘 호손이 쓴 <주홍글씨>라는 소설에 그 이야기가 잘 담겨 있다. 청교도들(Puritians)은 서방 기독교가 너무 제도화되고, 영국 국교회가 너무 국가중심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제도중심과 국가중심의 신앙을 거부하며 성경중심(복음중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겠다고 가톨릭, 또는 영국 국교회와 한 판 대결을 벌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미국 땅에서 자신들을 박해하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이들을 처참하게 박해 한 일들을 보면, ‘이건 뭐지’라는 어리둥절한 마음을 갖게 된다.

 

5. 신영복 선생이 <담론>이라는 책에서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미를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잉카와 아즈텍에는 전설이 있었는데, 수염이 하얗고 피부가 하얀 백인이 언젠가 자기들을 도와주러 나타나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미를 침략하러 갔던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그 전설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 전설 속의 인물인 양 행세한다. 남미는 콜럼버스가 상륙한 이래도 약 1,600만명이 살해당한다. 그래서 남미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점령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코르테스와 피사로를 원망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참으로 절묘했다.

 

6. 남미의 침략자들은 당연히 남미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부렸다. 침략자들과 함께 한 가톨릭 신부들은 전형적인 부패세력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남미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을 했고, 또한 남미인들과 혼혈을 이루어 살았다. 그러는 와중에 1,600만명의 남미인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북미를 점령한 청교도인들은 남미의 부패한 가톨릭 신부들에 비해서 엄청 청렴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 청교도인들이 북미를 점령하면서 죽인 인디언의 숫자는 4천에서 6천만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신영복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부패와 청렴의 의미가 역전되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334쪽).

 

7. 부패세력은 그래도 자신들의 점령지 시민들을 개종하려고 노력하고, 그들과 혼혈을 이루어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 청렴세력은 개종이나 혼혈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패한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보면 청렴한 사람들이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부패란 무엇이고, 청렴이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이렇게 알쏭달쏭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고, 이 세상은 죄에 물들어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8.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구약에서 출애굽기만큼 역동적인 복음을 증거하는 곳은 없다. 그래서 나는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라 부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출애굽기는 우리 삶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광야’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애굽을 죄인의 삶이라고 칭하고, 가나안을 의인의 삶이라고 칭한다면, 우리의 삶은 죄인의 삶과 의인의 삶 어디쯤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9.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부드러운 말로 고쳐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형편없는 삶이 되기도 하고 좋은 삶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세 오경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우리 앞에는 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다. 신명기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10.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하듯이,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절대적인 것이다. 시내산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광야’라고 하는 척박함과 무미건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애굽으로 되돌아 갔을 것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출애굽기의 또다른 버전일 뿐이다. 이 책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장망성/장차 망하게 될 도시/애굽)’을 떠나 천국(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또는 역경들을 담고 있다.

 

11. 출애굽기에서도 그렇고 천로역정에서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또는 크리스천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산에서 내려와 성막(성소)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일상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그저 척박한 광야 밖에 없었다.

 

12. 40장으로 되어 있는 출애굽기에서 장장 15장이 성막에 대한 이야기다. 열 다섯 장에 걸쳐 성막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누가 성막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일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아주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너무 꼼꼼해서 지루하고 재미없다. 게다가 우리는 성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성막이 가진 의미를 함께 상실하고 만다.

 

13. 하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출애굽기 25장에서부터 시작하여 40장에서 끝나는 성막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삶을 꼼꼼하게 돌아보는 것이다. 나의 일상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나의 일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 하나님 경험의 일상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내 삶 속에는 성막이 세워져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14.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꼼꼼하게 지어서 비로소 봉헌한 날, 즉,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친” 후, 시내산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진중, 즉 이스라엘의 일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넘쳤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4-38 부분). 이스라엘은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한걸음한걸음 옮기는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은혜를 두 눈으로 보았다.

 

15. 이스라엘은 성막을 만들어 광야에서 그것을 메고 다녔다. 성막은 단순히 ‘물건이나 물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성막은 ‘하나님’이었다. 그들이 메고 다닌 것은 단순히 성막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메고 다녔다. 하나님을 메고 다니니 그들이 아무리 광야 길을 걸었지만 광야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길은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광야 길을 인도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을 잃지 않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16. 너무 멋지고 장엄하지 않은가! 길을 잃어버리기 딱 쉬운 이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광야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길을 잃어 멸망의 도시로 되돌아 가거나, 길 가는 중에 죽어버리거나, 길 가는 중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휘말리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출애굽기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것’ 밖에는 없다. 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광야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주의 길로 들어서 멸망하지 않고 복의 길로 들어서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방법, 복음을 알고 있다.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17.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하나님을 메고 다니면,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여주실 것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우리로 하여금 마시게 하실 것이다. 가야 할 방향으로 온전히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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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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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23. 15:01

가능주의자

(출애굽기 36:1-7)

 

1. 1999년도에 개봉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강렬하게 시작한다.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은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가 20년 전 첫사랑 순임이랑 소풍 갔던 곳의 철로 길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철규로 시작한다. 우리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에겐 팬데믹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는 모두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신앙생활의 풍경이 너무도 바뀌어 버려서 우리는 아직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2. 사실, 풍경이 바뀐 것은 팬데믹의 영향도 있지만, 과학기술 발달의 영향이 더 크다. (물론 이외에도 정치, 경제적, 문화적 요인도 있지만) 만약 온라인 플랫폼이 발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과 사뭇 다른 신앙생활의 풍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신앙생활(교회의)의 옛 풍경을 되찾자고 온라인 플랫폼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안에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한결같이 스마트 폰(동네 사람 스티브 잡스, 공공의 적)을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스마트폰을 없앴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변화(비가역적 변화/irreversible change)이다. 적응하면서 건전한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밖에 없다.)

 

3. 팬데믹과 관련된 것 말고, 우리들 인생 가운데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지 않은가? 대개 우리는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재미 있는 추억이 있거나, 아니면 사랑받았던 시절 말이다. 인생이 재미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으면, 우울해지고 별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4. 나는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학창시절을 참 행복하게 보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가고 싶다. 왜 나는 학창시절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곰곰이 돌아보니까, 그 시절 나는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과 교회 학생부에서 정말 재미난 추억을 많이 만들었고, 무엇보다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 내가 요즘은 그냥 전형적인 아저씨가 되어서 사람들이 잘 믿지를 않는데, 학창시절에 나는 늘 전교적으로 유명인사였다(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모두 그랬다). 돌아보면, 내 인생 가운데 지금이 가장 유명하지 않은 시절을 보내는 것 같다.

 

5.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이 있다. 발생했던(또는 존재했던) 어떤 일/사건/경험 등을 지금 다시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현재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특정한 시기,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이유는 그 행복을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 속에 재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 이유가 뭔가? (사랑해서!) 요즘엔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도 많이 퇴색이 됐다. 최근 뉴스를 보니까, 소개팅 앱이 있는데, ‘고학력자가 아니고, 연봉 3천 이하 남성’은 가입 자체가 안 되는 앱을 어느 결혼정보회사에서 개발해서 뭇매를 맞았다. 여성 가입 제한은 없는데, 남성은 이렇게 가입 제한을 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남자들이 이래저래 참 살기 힘든 사회인 것 같다.

 

6. 결혼은 일차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게 자유연애의 정신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가장 기초적인 사랑의 자유조차도 빼앗는 사회가 된 것 같다. (마르크스가 이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자본론을 쓴 것.)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게 아니라, 삶의 안위/신분상승, 이러한 사랑 이외의 가치가 사랑의 가치를 밀어내는 것 같다. 연애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고, 결혼은 돈 많은 사람하고 하고, 뭐 이런 가치가 만연한 것 같다. 사랑의 가치를 좀 잘 보존하고 지키면 좋겠는데, 세상이 잘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가 사랑해서 결혼한다면, 결혼하는 이유는 연애할 때의 그 사랑의 상태가 너무 좋아서 그것을 영원히 재현(representation)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재현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영원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랑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위대한 것이다.

 

7.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구약성경이 중요한가, 신약성경이 중요한가? (엄마가 중요한가 아빠가 중요한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가, 아빠를 더 사랑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왠지 모르게, 신약성경을 구약성경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초대교회사 수업에서 공부했듯이, 그러한 생각은 영지주의적인 생각이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교회에 영지주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증거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그래서 기독교 성경은 신구약(구약 39권/신약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8.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다. 신약의 복음서는 출애굽기의 재현이다. 좀 더 큰 틀에서 말한다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재현이다. 구약성경을 모르면, 신약성경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산으로 간다. 가장 심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한 구약성경의 재현이다.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려면, 로마제국에 대한 이해보다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 광범위하게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공부 할 때, 구약성경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라. 그래야 신약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이 구약성경 공부 많이 한다고 절대로 유대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9. 당장,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시내산 언약에서 핵심적인 용어는 8절에 나오는 ‘언약의 피(the blood of the covenant)’라고 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마지막 만찬에서 재현된다. 마지막 만찬(성만찬)에서 핵심적인 용어가 무엇인가? 언약의 피’다. 이렇게 신약은 구약을 재현한다. 구약을 모르면 신약에 왜 그러한 용어와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10. 출애굽기는 ‘복음’, ‘십자가 사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구약성경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하면, 홍해 갈라지는 이야기가 너무 웅장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만 기억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크게 세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1)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열 가지 재앙과 홍해 이야기) 2)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이야기(십계명 이야기), 3) 성막 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기를 생각할 때, 성막 이야기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안타까운 현상이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성막 이야기가 25장부터 40장까지, 장장 15장에 걸쳐서 나온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11. 출애굽기와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출애굽기 24장 1-11절이다(언약의 피). 이곳은 시내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이 체결되는 장면과 언약 체결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연회(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이 재현되는 신약성경은 복음서의 최후의 만찬 장면이다(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도 마찬가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피의 언약을 맺고 그들과 연회(잔치)를 벌인다. 우리는 이것을 ‘성만찬’을 통해 재현한다. 성만찬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예배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12. 출애굽기에서 성막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성막 세미나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부할 필요는 없다. 출애굽기 25장 이후를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도 25장 이후에 나오는 성막에 대한 율례가 복잡하고 지루하기 때문에 읽어 내려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슨 암호 같기도 하고 방정식 같기도 하다. 그래서 골치 아프다. 그렇다 보니, 성막 이야기가 마음에 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성막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13. 성막은 무엇일까? 성막은 시내산 언약의 재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이스라엘에게 이 경험은 절대 경험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너무 절대적이어서 그것을 영원히 현재화시키고 싶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 사랑을 재현하듯이(로미오와 줄리엣 보면, 그 사랑을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재현할 수 없으니까 좌절하고 절망해서 독약 마시고 막 죽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을 영원히 현재화시키기고 싶었다. 성막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재현이다.

 

14. 출애굽기에서 가장 따뜻한 구절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다.

 

“모세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주님께서 그 마음에 지혜를 더하여 주신 기술 있는 모든 사람, 곧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의 제사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쓰라고 가져온 모든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았다. 그런 다음에도 사람들은 아침마다 계속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 왔다. 그래서 성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 있는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세에게로 와서,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진중에 명령을 내려서 '남자든 여자든, 성소에서 쓸 물품을 더는 헌납하지 말라'고 알리니, 백성들이 더 이상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물품은 그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만큼 있었다. (새번역, 출 36:2-7)

 

15. 브살렐과 오홀리압. 성경을 읽어본 사람, 성경을 좀 아는 사람, 성경공부를 좀 해본 사람과 성경을 안 읽어본 사람,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 성경공부를 안 해본 사람을 구분 짓게 해주는 이름들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아는 사람은 ‘그래도 내가 성경공부를 좀 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되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 분발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경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인격이다. 사귐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공부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사귐을 가져야 아는 것이다. 성경을 아는 만큼 신앙이 깊어진다. 이것은 불편의 진리다. 성경을 모르면서 신앙이 깊어질 수 없다. 그것은 배우 정우성을 만난 적도 없고 사귐을 가진 적도 없으면서 정우성을 잘 안다고, 친하다고, 거짓말하는 것과 같다.

 

16. 성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재현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재현되려면, 성막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율례대로 성막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재현될 수 없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성막을 만든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 제목과 연관해서 다른 말로 하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가능주의자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다. 성막을 만든 이유는 시내산 경험의 일상화를 위해서이다. 천상에서의 축제가 일상에서 울려 퍼지게 한 자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가능주의자이다.

 

17. 성막과 성전의 기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기독교의 예배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일상화이다. 2천년 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있었던 유일회적인 구원 사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복음의 선포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 예배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예배의 관점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말하면, 그들은 예배자들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많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18. 우리가 잘 모르는 예배의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배는 ‘예전(Liturgy)’라고 부른다. Liturgy는 ‘노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막을 만든 사람들은 요즘말로 하면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을 통해서 성막을 만든 것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 예배를 만든다는 것은 성막을 만드는 것처럼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다. 노동만큼 창조적인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낸다. 

 

(노동 안하고 돈 버는 것을 불로소득이라 한다. 노동 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불로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이라는 뜻은 노동(노력)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노동과 노력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보잘것없는 노동과 노력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주신다는 의미에서 은혜인 것이다.)

 

19. 세상에 그냥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무엇이든지 노동이 필요하다. 피아노 잘 치는 거, 얼마나 힘든가. 엄청난 시간과 노력, 즉 노동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서 엄청 노력을 한다. 아이들도 피아노 치느라 엄청 고생한다. 물론 이상한 현상도 있다. 피아노 배우기 싫다는 아이한테 그렇게 피아노 배우라고 푸쉬해서 아이가 피아노 배우고 난 후, 아이가 대학 들어갈 때 피아노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당장 때려 치우라고 한다. 애들이 헷갈려한다. 하기 싫은 거 배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본격적으로 배워보겠다는데 이제와서 왜 때려치우라고 하는지.)

 

20. 우리가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통해서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다. 예배는 노동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만들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가능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성막을 통해서 시내산에서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일상화 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의 일상화는 더 중요하다. 어떤 계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한 경험이 중요하지만, 그 경험이 그때뿐이면 무엇 하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언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뿐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아득하죠. 시간이 지나면 감정과 감동이 없다.) 그러나 경험의 일상화는 절대 경험에서 온 풍성한 사랑과 은혜 안에 계속해서 거하게 한다.

 

21. 예배는 신앙의 샘물이다.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환상을 본다. 예배가 무너져 있으니, 이스라엘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 모른다. (인생이 괴롭거든 자신의 예배를 돌아보라. 무너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배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결국 이겨낸다.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예배가 무너진 사람은 미래가 가장 불안한 사람인 거다.) 그래서 에스겔은 무너진 이스라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기도할 때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은 너무도 자세해서 마치 설계도면을 보는 것 같다. 에스겔의 환상은 47장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흐르는 물을 본다.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점점 많아지더니 강을 이루고 헤엄쳐서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크고 깊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지만, 에스겔의 환상, 예배가 회복되는 환상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22.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노동을 통해서 성막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세워지면 좋겠다. 예배는 신앙의 샘물이다. 생수가 예배의 자리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한다. 이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진리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내산의 경험이요, 십자가의 경험이다. 예배는 그 경험의 일상화이다. 예배를 만드는 자, 예배에 나오는 자는 모두 노동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만들고 나와야 한다. 우리의 노동이 하나님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가능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23. 팬데믹으로 인하여 신앙의 일상이 형편없이 무너진 이 때에 우리 모두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힘을 다해 예배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이 어려운 시대를 넉넉히 이겨내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당신은 가능주의자입니다!” “당신은 예배 노동자입니다.” “우리 함께 힘을 다해 예배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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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16. 16:46

언약의 피

(출 24:1-11)

 

1. 군사부일체. 군주(임금)와 스승과 아버지는 동일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 군사부일체라는 개념 때문에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한국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졌지만, 또한 왜곡되기도 했다는 생각.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다. 이런 개념은 잘 받아들여졌는데, 삼위일체의 개념이 너무 가부장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군사부일체라는 가부장적 개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성경에서 군주와 스승과 아버지의 개념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모세가 유일하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모세라는 인물과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나라의 근간이다. 모세의 신비로운 출생 이야기부터 그의 고난, 그리고 그의 능력과 활동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보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견주어서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모세와 같은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3.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모세의 위상은 넘사벽이 되어 간다.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 캠프를 치고 그곳에 머물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심에 따라 홀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만나기를 반복한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70명을” 데리고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세뿐이었다.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2절).

 

4. 24장은 시내산 언약체결식을 기록하고 있다. 20장의 십계명 이후에 24장의 언약체결식이 나오기까지 출애굽기는 각종 율례들(율법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즘 우리 시대에 직접 통용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정신은 한마디로 ‘정의(Justice)’이다. 정의의 핵심은 인권(human rights)에 있다. 인간의 권리(인간의 존엄성/dignity)를 보호하는 것.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약자에 대한 인권 보호가 정의의 핵심이다. 사회적 약자는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5.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례들(율법들)을 다 지키기로 “한목소리로 응답”하고, 언약식체결을 위한 준비를 한다. ‘정의’라는 말을 써서 다시 풀이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제단을 쌓고, 열 두 지파대로 기둥을 세우고, 소를 드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그리고 피(소의 피/제물에서 얻은 피)를 가지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대접에 담았다가 언약서를 낭독한 뒤 백성들에게 뿌렸다. 그러면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절).

 

6. 현대인들에게 낯선 장면이다. 현대인들은 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별히 한국인들에게 피에 대한 이야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피로써 의형제를 맺은 ‘도원결의’ 정도이다. (사슴 피, 돼지 피 경험) 그에 비하면, 성경에는 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제사는 온통 피 범벅이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피범벅 사건이다(Passion of Christ/ 두 눈 뜨고 보기 힘들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피의 무게’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를 흘린다는 것의 무거움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7. 본문 9절에서 11절은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신비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다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장면이 얼마나 신비한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사파이어)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9-11절).

 

8.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장엄하다. 모세의 중재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다가서고, 시내산에서 피를 통해 언약을 맺는다. 그래서 그 언약을 ‘피의 언약’이라 부른다. 언약을 체결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연회를 벌인다. 몇 마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연회를 하는 장면은 장엄하고 신비롭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라는 진술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만찬이라니!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다시 진술된다.)

 

9. 출애굽기 24장에 담긴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 데칼코마니(데칼코마니아) 같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복음서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견주어 묘사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시내산 언약체결식 사건과 연관시켜서 해석했다는 것이다.

 

10. 마태복음은 모세오경의 형식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는 모세의 그것과 흡사하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이야기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전달해 주는 것과 흡사하다.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과 떡과 포도주를 나눌 때 예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시내산 언약체결식에서 모세가 한 이야기와 똑같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11. 그렇다면, 시내산 언약체결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이 다른가?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향한 언약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언약이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열방)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보편적인 언약체결식과도 같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사람(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상관없이)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12. 출애굽기 24장의 시내산 언약체결식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뿐이었다. 숫자로 하면, 74명(일흔 네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모세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광야에서는 성막을 통해,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는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제사장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오직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만 성막이나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었다.

 

13.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큼 민주화 사건이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특권계층만 누렸던 특권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은 그러한 특권을 없애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권리를 민주화시킨 것이다. 즉, 누구든지, 신분에 관계없이, 심지어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권리를 모두에게 안겨주셨다는 것이다. (혁명적이다. 뉴크리에이션!)

 

14. 시내산 언약체결식 때 모세는 제물의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부르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아주 특별한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마중물 삼아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언약의 피’이다.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피를 뿌리는 행위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아무때든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15.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특권을 포기하고 산다. 또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특권이 주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사람들은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종 행동들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와서 그 어려움들을 토로하고 문제 해결을 받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요즘엔 그것을 아는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가 지닌 무거움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

 

16.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91장)에 이런 것이 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거룩하신 주의 이름 너의 방패 삼으라 환난시험 당할 때에 주께 기도 드려라

존귀하신 주의 이름 우리 기쁨되도다 주의 품에 안길 때에 기뻐 찬송 부르리

우리 갈길 다간 후에 보좌 앞에 나아가 왕의 왕께 경배하며 면류관을 드리리

 

17. 언약의 피. 이것이 지니고 있는 무게감을 신중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생각하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언약의 피에 힘입어 모든 것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다가서고,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다가서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키리에 엘레이손/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언약의 피가 우리를 살릴 것이다. 언약의 피가 우리를 새롭게 할 것이다. 언약의 피,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징표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언약의 피를 기억하고 그 피에 기대어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아오는 자에게 늘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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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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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10. 19:44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출애굽기 20:12)

 

1. 아전인수라는 말이 있다. 자기 논에만 물을 댄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이 자기한테이롭게 행동하거나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여서 요즘엔 성경 원어와 외국어 그리고 모국어(한국어)를 비교해 가면서 성경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해 가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이다. 우리는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읽다보니, 아무래도 한국적인 사고가 가미된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다. 히브리어의 ‘카베드’를 번역한 ‘공경’이라는 말은 유교적인 사고가 잔뜩 베어 있는 번역이다. 한자어 공경이라는 단어는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형상을 가진 단어이다. 공경이라는 말에는 유교의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막상 공경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베드’는 그러한 유교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2. 제5계명에 해당하는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유일하게 동기가 부여된 계명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부분은 명령이지만,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내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부분은 동기부여 구절(motivational clause)이다. 다른 계명들은 명령으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제5계명은 명령과 동기부여 구절이 함께 들어가 있다. 그런데, 동기부여 구절에서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제5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부른다.

 

3. 한국어/또는 한국 사람의 특성상 동기부여 구절에서 눈에 들어오는 말은 ‘네 생명이 길리라’일 것이다. ‘네 생명이 길리라’, 다른 말로 장수다. 예로부터 장수는 ‘복’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제5계명을 말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의 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4. 동기부여 구절에서 핵심 단어는 ‘땅(land)’이다. 제5계명에서 약속된 것은 ‘장수’가 아니라 ‘땅’이다. 그리고 이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이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할 때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장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해서 그 땅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요즘처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부동산이 아니다. 그들에게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징표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땅 매매를 할 수 없었다.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법도 그것을 반영한다. 살면서 어려움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다고 할지라도, 희년이 되면 원래 주인에게로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 땅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에서 그들이 오래오래 살게 된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에게 땅은 기억이다. 그 기억은 무엇에 대한 기억인지, 이미 제4계명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를 말하며 서술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에게는 유일회적으로 발생한 출애굽 사건이 중요했다. 이것은 절대적인 구원 경험 사건이었다. 출애굽 하여 그들이 다다른 곳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렇기에 땅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성례전이 되는 것이다. 그 땅에서 사는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시내산 언약)을 기억해야 한 한다. 이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야만 하는 가장 중차대한 기억인 것이다.

 

6. 그러므로 십계명에서 “부모 공경”은 효의 문제라든지 또는 휴머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부모 세대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 시내산 언약(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은 자녀 세대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그 기억은 유전자 같은 것이다. 이 유전자를 전달해 주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는가?

 

7. ‘공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베드’이다. 카베드가 가진 뜻은 ‘무겁다’이다. 이를 적용해서 “부모를 공경하라”를 풀어서 설명하면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뜻이 된다.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말과 행동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자녀 세대를 치리하는 법이 나온다. 얼마나 엄격한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 부분을 직접 인용해 본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 21:18-23).

 

8. 무시무시하다.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것을 ‘완악, 패역’이라 말하고, 그러한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 세대는 징계를 해야 하고, 징계를 했는데도 여전히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 세대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 그렇게 해도 그것을 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죄악을 제거한 선한 일이 된다. 요즘 시대의 사회적, 또는 법적 잣대로 재어보면 이것은 무지막지한 일이고, 자녀 세대가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녀 세대에게 해를 가한 부모 세대가 처벌을 받게 될 뿐이다.

 

9.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자녀 세대를 왜 이렇게까지 무시무시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물려주는 기억(언약/구원사건에 대한 기억)을 절대적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땅은 그 언약의 징표이다. 움직이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징표이다. 그 땅에서 길이 산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잘 살고 있다는 뜻이고, 그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10. 그러므로,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해야 한다. 가볍게 대하면, 부모 세대가 전해주는 언약이 매우 가벼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언약은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 1세대는 이미 다 죽었다. 출애굽 경험, 시내산 경험, 그리고 광야를 경험한 세대는 이제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아 든 것은 그 언약 이야기를 전수해 주는 부모 세대의 ‘말’ 뿐이다.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는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말(언약)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여(마치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인 것처럼) 소중하게 대하고 간직하고 또한 자기의 자녀 세대에게 동일하게 전달해 주겠지만, 부모 세대의 말을 귓등으로 알아들고 무시하고 경홀히 여기는 자녀 세대는 ‘그까짓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 언약을 하찮게 여기고 그것을 자신의 자녀 세대에게 전달하지 않을 것이다.

 

11. 지금까지 성경의 맥락에서 살펴본 제5계명은 매우 비장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 이 계명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고, 그래서 부모 공경을 잘 하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결국 사람들의 욕심을 자극하고 충족시키는 데 제5계명을 이용하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냥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굳이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를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

 

12.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아니다. 가정 중심 사회가 아니다. 탈가부장적 사회이고, 개인 중심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 공경의 의미를 가부장적으로, 가정 중심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부모 공경의 제5계명을 유교의 가부장적 사상인 군사부일체, 삼종지도, 이런 가르침을 서포트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꼴이 되고 만다. 아마도,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은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성경에 대한 배경 지식이 일천할 때가, 제5계명을 완전히 유교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13. 그러면, 부모 공경에 대한 현대적 의미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어차피 더 이상 가부장적인 사회도 아니고, 유교사회도 아니고, 개인 중심 사회인데,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부모 공경이라는 제5계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왜 그런가?

 

14. 우리가 사는 시대를 무슨 시대라고 명명하면 좋을까? 17,8세기 유럽사회는 극장사회라고 불렀다. 그들의 옷차림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 그들의 일상복은 무대복처럼 화려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관계성도 그랬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인정받는 시대였다. 지금 북한 사회는 17,8세기 유럽의 극장 사회와 비슷한 사회이다. 사회 전체가 마치 연극 무대 같다. TV에서 간혹 공개되는 그들의 열병식이나 사회적 행사를 보면,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고,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래야 연극이 성공적으로 상연되기 때문이다.

 

15. 그러면, 우리 사회, 특별히, 한국사회는 무슨 사회라고 불러야 할까? 얼마 전까지 군사독재가 벌어지고 있었을 때 한국 사회는 군영 사회였다. 사회 전체가 마치 군대 같았다. 남북이 갈라져 있고, 군사적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안보가 가장 중요했기에(지금도 그렇다) 군인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군인이 정권을 잡은 사회이다 보니, 사회 자체가 군영 사회였다. 군대 문화가 모든 일상을 지배했다. 직장도 학교도, 가정도. 그러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가 민주화되고, 이제는 자본주의가 깊이 있게 사회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면서, 한국 사회는 ‘예능 사회’가 되어버렸다.

 

16. 다른 말로, 예능 사회는 모든 것이 예능화된 사회, 모든 것이 가벼워진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존재의 무거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존재가 가벼워야 한다. 이것을 경제적인 용어로는 ‘노동의 유연성’이라고 하는데, 노동의 유연성이란 인간이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어떠한 노동을 위해서라도 갈아 끼기 쉬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는 노동자를 마음껏 해고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도 회사를 마음대로 이직할 수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 사회에 없던 풍경이다. 최고의 이윤을 내기 위해서 회사는 노동자를 부리기 쉬운 상태(유연한 상태)로 만들려고 한다. 최고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최상의 가벼운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자본이 나를 선택하기 쉽게 존재를 만들어 놓는 것 / 돈 많이 주고 나를 데려다 쓰세요. )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모두 돈을 위해서 가벼운 존재가 된다.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나는 이것을 예능 사회라 명명한다.

 

17. 이렇게 존재가 가벼운 사회, 예능 사회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말할 수 없이 가벼워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적 문제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를 무겁게 대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 대해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부모를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패륜이 발생하고, 이웃을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사람을 해치고 악을 저지른다. 자식을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윤리를 가르치지 않고 남을 이기는 법만 가르치고 자식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하여 인간관계는 깨질듯이 깨지고, 두터운 인생, 두터운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은 늘 외롭다. 관계가 깨지는 것만큼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형벌이 있을까? 현대인은 그래서 두 가지의 병, 편집증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다. 편집증은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해서 발생하는 병이고, 우울증은 다른 이들과 유의미한, 두터운 관계를 맺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18. 우리가 사는 시대는 존재의 가벼움, 관계의 가벼움을 벗어나 존재의 무거움, 관계의 두터움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조금 무겁게 세워나갈 필요가 있다. 자기를 쉽게 팔아버리는 유연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 나가는 존재, 인간관계에서 이익만 취하는 가벼운 관계 아니라 인관관계에서 유의미한 의미를 창조해내는 관계, 즉 두터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모두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인하여 집단 자살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충분히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 (미국 정보국에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푸틴은 극심한 편집증과 우울증에 오랫동안 시달려 았다고 한다. 편집증과 우울증이 한계를 넘으면 푸틴이 무슨 짓을 할 것 같은가. 핵 버튼을 누를 것이다. 이것은 집단 자살 행위다.)

 

19. 나의 존재와 상대방의 존재를 무겁게 여기고, 인간관계를 두텁게 만드는 일은 부모의 존재를 무겁게(카베드)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연습 상대가 필요하고, 연습을 할 때, 진지한 상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부모님만큼 관계를 두텁게 만드는데 있어 좋은 연습상대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조금 실패하더라도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주고 용서해 주실 것이고, 우리가 관계를 두텁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 부모님은 정말로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기쁘고 행복하신 것만큼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게 어디에 있겠는가.

 

20. 더군다나, 신앙과 복음의 측면에서도 존재의 무거움, 관계의 두터움은 너무도 중요하다. 요즘 시대는 복음이 잘 전달되지 못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요즘 누가 복음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가. 복음도 유일회적인 구원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말씀’으로 전하는 것인데, 두터운 신뢰, 두터운 관계, 무거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즉,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서 무겁게 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복음은 잘 전해질 수 없다. 예전에는 부모님 따라서, 부모님 말씀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나오는 자녀 세대들이 많았으나, 요즘 자녀 세대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21.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는 연습을 시작하면 좋겠다. 또한 부모 세대도 자녀 세대에게 좋은 것(가치, 복음 등)을 물려주기 위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모 세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실천하며, 자녀 세대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words)’을 통해서 말씀하신다(saying).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두터운 관계의 시작은 부모님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나가는 데서 온다. 주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두터운 관계를 잘 형성해야 편집증과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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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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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5. 16:11

우리들의 십계명

(출애굽기 20:1-17)

 

1. ‘말씀’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인간이 인간인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word)’ 때문이다. 다른 말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말씀, 언어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을 한다. 그런데 이 소통이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아주 깊은 차원의 소통이다. 일상적 소통뿐 아니라 도덕적 소통도 한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다. 그들도 소통을 하긴 하지만, 언어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런 도덕적 관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말씀, 언어를 통해서 그런 도덕적 관념을 갖는다.

 

2. 말씀이라는 것, 언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정체성 그 자체이다. 존재 그 자체이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언어가 인간의 존재 근거라고 한다면,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이 존재 근거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 근거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고백한다. 이것은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보편적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의 근거로 알고 이해하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3.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소통을 하신 거다. 그런데, 말씀으로 말씀하셨다는 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해 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문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입혀진, 하나의 인격이다.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인격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4.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을 담고 있는 곳이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 십계명은 너무도 익숙하다. 그런데, 십계명에 대한 친밀도와 관심도는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떨어진다. 왜 그럴까? 십계명을 그저 고리타분한 율법으로, 잔소리로, 그냥 문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십계명을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십계명이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십계명을 그냥 남몰라라 무시할 수 없다. 존재를 무시하는 행위가 가장 나쁜 행위이다. 존재에게는 무시가 아니라 환대가 필요한 법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5. 말씀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격이 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사귐을 가지신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인격이다. 그 인격적인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대할 때, 우리 안에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기 마련이다. 어마어마한 일 앞에서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6.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으로 다가오는 이 어마어마한 일이 환대가 되려면, 우리는 그 말씀을 향해 온 마음을 다해 우리의 존재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마음 상할 때가 언제인가. 환대 받지 못할 때이다. 환대 받지 못하는 곳에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나를 환대 하지 않는 사람과 사귐을 갖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불쾌한 경험이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험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만 환대의 마음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언뜻 보기에 하나님의 말씀(인격)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환대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십계명을 환대하지 않은 이유도, 십계명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7. 십계명, 여기에서 인격을 다 제거해 버리고 나면, 고리타분한 꼰대가 하는 잔소리 같다. 사실 우리는 십계명과 반대로 살아간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살며, 온갖 우상에 둘러싸여 그 우상을 좇으며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들며, 안식일을 하찮게 여긴다. 부모님의 인생에 관심이 없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는 우리 안에 만연해 있고, 우리는 온갖 탐욕 가운데 살아간다. 십계명이 인격이라면, 우리는 그 인격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 뭔가, 정말 미워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게 우리 삶의 형편이다.

 

8. 그러나, 우리가 십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면, 십계명의 부드러운 손길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십계명은 10가지의 계명으로 되어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계명을 고르라면, 제4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십계명은 성경에 두 군데 나온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이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은 똑같다. 그런데, 다른 부분이 딱 한 군데 있다. 그게 바로 제4계명이다.

 

9. 출애굽기 20장에서 제4계명을 말할 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그 이유가 다르다.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는 출애굽 사건, 즉 구원 사건 때문이다. 출애굽기의 십계명은 창조를 강조하고, 신명기의 십계명은 구원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 두 개가 다른 것으로 인식하지만, 실은 창조와 구원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곧 구원 사건이고, 구원 사건은 곧 창조 사건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놀라운 일(창조)인 동시에 선한 일(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돌보아 주신다.

 

10. 십계명은 대개 두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향해 있다. 그런데, 이 둘이 모두 제4계명으로 수렴된다. 안식일. 안식일은 쉬는 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쉬는 날은 일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한 준비의 날 정도로 이해된다. 회사가 왜 우리를 쉬게 하는가? 일 할 때 더 열심히 일하라고 그러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 당하기 위해서 쉼을 강요당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렇다. 그러나 십계명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그런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위에서 말했듯이, 십계명이 인격인데, 그것도 하나님의 인격인데, 하나님이 아무렴 우리를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 쉬도록 하실까.

 

11. 안식일에 대한 인격적 해석 중 가장 최고의 해석은 우리 시대 최고의 구약학자 중 한 명인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안식일은 저항이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인격이라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도우실까? 우리가 엉뚱한 것에 우리의 생명이 빼앗기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다. 우리의 귀한 생명이 엉뚱한 것에 의해 소모되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우리의 생명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모든 시도로부터의 저항으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2. 우리가 왜,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가? 우리가 왜, 이웃의 것(무형이든, 유형이든)을 빼앗으려 하는가? 탐욕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계속해서 탐욕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 끝없는 탐욕을 채우려다 보니,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자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니까, 우상을 만들어서 도움을 청하고,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훔쳐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쉴 틈이 없다. 탐욕은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13. 나를 가만히 안 놓아두고 못 쉬게 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토브) 창조하시고,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구원)하셨는데, 우리는 탐욕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선한 길에서 벗어나 악한 길로 간다.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dignity)을 짓밟아 버린다. 어떻게 할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킬 수 있을까. 그 길이, 안식일에 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14.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안식일 정신은 정치적으로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일례를 들어,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을 끝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시민 불복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도 기독교 국가고, 러시아도 기독교 국가다. 푸틴은 수세주일에 얼음을 깨고 강물에 들어갔다 오는 수세의식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 국가 간에 서로를 죽이는 살육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그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서지 않아서 그렇다. 말씀을 인격으로 생각하는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감히, 전쟁을 벌일 수 없다.

 

15. 민수기 22장에 보면,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한걸음씩 나아갈 때,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의 진군 소식을 듣고 심란해 한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불러 진군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사주한다. 두둑한 복채를 받은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발람은 나귀 한 마리를 대동하고 갔다. 조금 가다가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발람을 태우고 가던 나귀가 가다가 멈추고,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발람은 나귀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나귀에게 채찍질을 해댔다. 그래도 나귀는 꿈쩍하지 않았다. 열 받은 발람은 나귀를 막대기로 패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귀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 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16. 나는 이것이 놀라운 시민 불복종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나귀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귀는 그 자리에서 주인에게 불복종했다. 앞으로 나가면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발람의 나귀만큼 안식일 정신을 철저하게 지킨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나귀는 발람의 불의한 일에 저항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를 통해서. 즉, 시민 불복종을 통해서. 다시 말해, 안식일을 지킴으로 인해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선한 일을 위해서, 동물도 이렇게 시민 불복종을 할 수 있는데, 동물도 이렇게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인간이 못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이 이것을 못한다면, 동물보다 못한 존재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17. 십계명은 하나님의 잔소리가 아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십계명은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고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이다. 탐욕을 부추겨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켜 나가는 일,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켜 나가는 일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인격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안으시는 주님의 말씀을 환대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쉼을 통하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를 한 순간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 탐욕을 물리치고, 그 탐욕을 부추기는 사악한 세력들에게 저항하여,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켜 나가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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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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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25. 20:20

시내산에 오르라

(출애굽기 19:1-6)

 

1.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를 ‘시내산 문단(Sinai Pericope)’라고 부른다. 출애굽기 자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단이지만,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통틀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단이다. 시내산 문단의 이야기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언약(covenant)’이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2. 애굽을 떠난 지 3개월이 지나, 이스라엘은 드디어 시내산에 도착한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일차 목표는 시내산에 가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가야하는 목표를 설정한 것은 그들의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5:1).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3. 이것은 우리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시간(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와도 상관 있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요소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성 어거스틴이 아주 큰 공헌을 했는데,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매우 인격적이다. 이것을 시간의 인격성이라고 한다.

 

4. 함석헌은 이러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글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13쪽).

 

5. 좀 어려운 말 같지만, 성경을 매일 읽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지난 3개월의 여정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지난 3개월의 여정은 시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흘러간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자체였다. 그들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인격이 베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는 우리의 시간, 우리의 삶의 역사 가운데 현존하셔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신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감사한다는 뜻이다.

 

6.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극명하게 갈리는 법이다. 비신앙인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갈 목표를 세우지만,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갈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갈 목표를 세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목표를 자의적으로 세우고 그 일을 감행했다면 그들은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애굽에서 어떻게 가까스로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지난 행보를 보면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비굴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7.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나의 개인적인 바람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의 성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삶인가?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라. 시간(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뜻이고, 그것을 우리는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 언약은 성취된다. 언약의 성취를 향해서 나아가는 삶만큼 의미 있는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지난 3개월의 여정은 때론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지만(물이 없다고 먹을 게 없다고 모세와 하나님께 퍼 부은 그들의 분노를 보라), 그들의 여정은 결국 의미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시내산에 도착한 것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이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도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이나 자녀들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시간(삶/계획)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간구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앞날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할 때, 어떤 학교를 선택하고 어떤 직업을 선택할 때도, 우리가 계속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 이민자들은 이것을 더 치열하게 물을 수밖에 없다. 삶이 더 불안전하고 고달프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앞날을 물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민자들은 대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을 세울 때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먼저 간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바탕으로 세워 나가는 것이 좋다. 그래야 우리의 남은 삶의 여정도 복되고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바탕이 된 삶은 단순히 내가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9.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신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이 3-6절의 말씀이다.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들의 시간 속에, 여정 속에 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났다는 뜻)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10. 여기서 중요한 구절은 1)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구절과 2)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라는 구절과 3)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이다. 언약 체결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듣고 지키는 것’이다. ‘듣고 지킨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실행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의 문제이다. 태도의 문제라는 뜻은 마음의 문제라는 뜻이다. 기계적으로 무엇인가를 실행하는 것은 본인이나 상대방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 즉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기계적으로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떠한 태도로, 어떠한 관계 속에서 주일에 교회에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11. 결국 ‘듣고 지킨다’는 것은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율법의 가지 수는 613개로 알려져 있지만, 613개의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기계적으로 다 지킬 수도 없다. 다만, 그것을 ‘듣고 지키려는 태도’, 즉 그것을 말씀하신, 그것을 주시는 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 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율법 613개를 아무리 잘 지켜도 그것이 그 사람의 의가 되어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 율법 613개를 지키지 못했어도, 그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것을 어여삐 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이 선포되고 있는 사람들은 613가지의 율법을 칼 같이 지킨 사람들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해 정죄 받고 손가락질 당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했던 소위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듣고 지키는 것’, 다른 말로, 사랑, 사랑, 사랑이다.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하십시오!”

 

12. 우리가 듣고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게 굉장히 특별한 용어이고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는 ‘거래를 통해 가지게 되는 무엇’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나 저거 내 소유로 만들고 싶어’라는 말처럼 개인 프라퍼티(private property),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유는 이러한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13. 본문에 나오는 ‘소유’는 히브리어 ‘쎄굴라’를 번역한 용어이다. 쎄굴라는 ‘왕국의 제2인자, 총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유(쎄굴라)에 대한 부연설명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다. 소유가 된다는 것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쎄굴라, ‘왕국의 제2인자, 총리’라는 말을 들으니까, 떠오르는 어떤 인물이 있지 않은가?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이 떠오르고,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다니엘이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소유(쎄굴라)가 된다는 뜻은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14.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오해하면 안 된다. 요즘처럼 출세지향에 대한 욕구가 충만한 시대에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성공’이라는 말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국의 총리로서의 요셉과 다니엘의 성공적인 삶만 볼 뿐, 그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소유(쎄굴라),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말은 요셉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실행하는 주님의 동역자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뜻은 군림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력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섬기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15. 요즘,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려고 시내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샌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복을 받았기에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거룩함에 닿아 있는 사람, 인간다움의 최고 형태를 맛본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16. 우리는 성경을 보편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믿는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부르셨듯이, 우리도 시내산으로 부르신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은 늘 시내산으로 이끌림을 받는 삶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내산, 그곳은 성소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 경계를 넘으면 죽는 곳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배타적인 게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다. 그곳에 이르면, ‘그것화’되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곳에 이르면, 거룩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경계를 넘으면 죽는다’는 것은 경계를 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 시내산에 이르고 그곳에 오른다는 것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17. 그 경계를 넘으면 죽는 곳, 그 경계를 넘으면 이전의 삶은 죽는 곳, 시내산, 성소,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 이스라엘은 그곳에 도착하여 그 경계를 넘어서 그곳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찌질한 백성이 아니다. 그들의 어제는 경계를 넘으므로 죽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유로,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새로 태어났다. 시내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시내산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시내산에 오르라. 우리의 삶은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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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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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21. 16:59

평강이 필요해

(학개 2:1-9) 

 

1. 질문: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인가 다른 하나님인가? 구약은 기독교의 성경인가, 아니면 신약만 기독교의 성경인가?

기독교 역사에서 마르키온이라는 괴짜 신학자가 출현한 적이 있다. 아직 기독교 신학이 정교하게 다듬어지기 전이라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시작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주장을 했던 사람 중 하나이다.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폭력과 보복의 신이지만, 신양의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약에 등장하는 구약적 요소도 다 빼 버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마르키온 성경을 만들었다.

 

2. 또한 마르키온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은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집중했다. 마르키온의 이러한 생각은 가현설(도케티즘/docetism)으로 발전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신적 존재는 절대로 죽음을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마르키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영지주의 기독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3. 정통 기독교는 마르키온의 이러한 사상을 물리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뿐 아니라 인성을 동등하게 고백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기독교인의 성경이다. 우리는 신약의 복음서와 바울 서신만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구약성경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지만, 이 땅의 일들을 남몰라라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날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날아가는 존재이다.

 

4. 목회를 하면서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매우 편식한다는 것이다. 거의 20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마르키온 사상에 물든 것 같이, 기독교인들이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반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복음서와 바울 서신 설교는 많이 하지만, 구약 설교, 구약에서도 특히 예언서 설교는 잘 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매우 기이한 일이다.

 

5. 그래서 나는 언제나 구약과 신약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목회했다. 신약을 통해서만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구약을 통해서도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예언서 공부뿐만 아니라 예언서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편식하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게 어려운 것처럼 성경 말씀을 편식하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난 사순절 동안 12소예언서를 묵상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떤 분은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예언서를 이렇게 자세하게 본 적이 처음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소예언서를 가까이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소예언서를 가까이하는 시간을 가져서 매우 신선했고, 좋았습니다.)

 

6. 소예언서는 호세아로 시작해서 말라기로 끝난다. 호세아 때만 해도 아직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았을 때라,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호소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역사가 변해,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생활을 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질곡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성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7. 우리가 함께 읽은 학개서의 말씀은 명백하게 ‘성전 건축’을 촉구하고 있다.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든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8. 학개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의 말씀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에스라서를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던 일이다. 그런데, 에스라서에 보면 그 일을 진행하다가 성건 건축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막혀 주춧돌만 놓고 건축을 중단했다. 그리고 20년 정도 지난 후에,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건축을 마무리 지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9. 주춧돌을 놓고 20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다’라고 성전 건축하는 일을 손 놓고 있었다. 학개 선지자는 그것을 나무라면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든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괜히 찔리는 말씀이다. 판벽한 집이란, 잘 지어진 집을 말한다. 학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렇게 잘 지어진 집에서 두 다리 뻗고 잘 살고 있으면서, 폐허가 된 성전은 언제 건축할 것이냐?’

 

10. 왜 이렇게 학개 선지자는 강력하게 성전 건축을 촉구하는 것일까?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든 때가 언제인가? 누군가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 더 정확히 말해서는 사랑하고 신뢰하던 사람으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아이들은 평생 큰 트라우마 가운데 산다. 또 버림받을까봐 누군가를 선뜻 사랑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 또는 확신이 들도록 서로 보살펴 주는 것이다.

 

11.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충격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하는 트라우마였다. 포로기 때를 배경으로 하는 에스겔서 같은 예언서를 보면, 이 트라우마를 조심스럽게 다르고 있다. 나라가 망하고, 무엇보다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집단으로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데, 그 트라우마의 원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현실이었다. 힘센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을 불사르고 성전을 때려부수고 주민들을 죽이고 잡아가고 그래서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

 

12.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70년 간의 포로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일군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냉소적인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도비야를 비롯한 훼방꾼들이 성전 건축하는 것을 방해하는 바람에 그나마 좀 잘해 보려는 마음에 찬 물을 끼얹었다. 거기다가 그들이 냉소적인 마음을 가진 또다른 이유는 포로에서 귀환하여 다시 세우려 했던 성전은 그 이전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아주 보잘것없이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전을 건축하려 한 일을 비아냥거리며,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삐쭉 댔다.

 

13. 이런 상황 속에서 학개 선지자가 ‘성전 건축’을 촉구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을 지으라는 뜻이 아니다. 포로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의구심을 가졌다. 자신들은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하나님도 자신들과 함께 이곳 예루살렘에 돌아오셨을까?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며 그들은 도저히 그곳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으려고 노력했던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정말 보잘것없이 초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렇게 초라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4.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큰 것을 보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서 가치를 찾기 힘든 세상이다. 백향목으로 휘황찬란하게 지은 솔로몬 성전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거주하셨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에 비해 보잘것없이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리라고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주저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렇게 보잘것없이 초라한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주하실 리가 없다 생각하며, 성전 건축하는 일을 차일 피일 미루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라면서 말이다.

 

15. 이스라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안되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무엇보다 하나님이 거주하실 성전을 봐도 너무도 초라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학개의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그러한 냉소와 불신앙이 가득하고,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냉소와 불신앙이 얼마나 잘못됐고, 그들이 겪고 있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 보이지만 성전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돌아오셨고 그들과 함께하심을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이다.

 

16. 오늘 말씀은 낙심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를 준다.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굳세게 할지어다!’라고 말하며 격려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라고 말하며 격려해 준다. 그러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또한 이전 성전에 비해 정말 보잘것없이 초라한 성전의 기초를 보면서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에게는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바로잡아 주신다.

 

17. 오늘날 우리에게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구약시대와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전은 단순히 건물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해서 지어진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해서 우리는 지금 성전(교회)를 세워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믿음! 큰 것을 보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작은 것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믿음!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평강(peace)가 없으면 한발자국도 나가기 힘들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들 마음에 평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20년째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평강이 임했을 때 그들은 20년동안 손 놓고 있었던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학개 선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이곳에 평강을 주시겠다고! 그러니 우리, 힘을 내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춧돌 삼아,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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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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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평강의 왕께서 오셨어도 아직 오시지 않은듯 사는 저를 돌아 봅니다. 교회가 세워져야하거늘 나를 세우는 우리를 돌아 봐야 겠습니다. 아멘.

    2022.04.24 08:34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12. 13:53

샬롬은 어떻게 오는가

(출애굽기 17:8-9, 18:1-4, 13-18)

 

1. 르비딤이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일들은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르비딤은 시내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지역이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게 될 ‘시내산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절체절명의 사건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covenant)’를 맺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언약을 맺으시지만, 하나님은 시내산 사건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신다. 언약의 스케일이 족장에서 민족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이 언약의 확장은 온 우주로 확대된다. 그러니까, 성경은 언약의 시각에서 보면, 언약이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만큼 온 우주로 확대되어 가는 이야기이다. (이는 마치 우주가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많은 생각 거리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우리의 존재/생각을 한 곳에만 고정시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잠정적이다.)

 

2. 일단 팩트 체크부터 하면 좋을 것 같다. 르비딤이라는 지역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과 모세가 다툰 사건도 여기에서 발생했고, 반석에서 물이 난 사건도 르비딤에서 발생했다. 모세와의 다툼이 끝나자, 이제 아말렉과의 전투가 발생한다. 아말렉과의 전투 장면에서 여호수아의 존재가 처음 등장한다. 그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단번에 모세의 후계자로 물망에 오른다. 아말렉과의 전투가 끝난 후, 오랜 시간동안 헤어져 살던 모세의 가족들이 모세를 찾아온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 그리고 배우자 십보라, 또한 그들 사이에서 난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이 온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서 체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시내산에 들어서기 전, 르비딤이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3. 우리는 살면서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이런 생각을 한다. “아 그래, 이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의 삶은 형통할 거야!” 출애굽기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그 지긋지긋한 애굽 땅에서 탈출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홍해를 건넜을 때, 그리고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가 홍해 물에 모두 수장되어 죽었을 때, 그래서 더 이상의 위협이 없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흥겨워했다. “고생 끝! 행복 시작!”

 

4. 그런데 홍해 이야기 이후에 전개되는 불평 이야기에서 보듯이, 그들의 여정은 그들의 생각처럼 형통하거나 쉽지 않았다. 막상 출애굽 하면 모든 게 형통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출애굽 하여 광야에 들어서 보니 온통 불평거리였다. 물이 없어서 불평, 먹을 게 없어서 불평,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늘어 놓았다. 르비딤에 이르러서는 불평과 원망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와 다투기까지 했다. 모세와의 다툼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2).

 

5. 다른 말로 해서, 희망차게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산 등정을 목전에 앞두고 서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고, 분열될 대로 분열하고, 평화가 사라져버렸다. 한 마디로, 르비딤의 이스라엘에게서는 ‘샬롬(문자적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샬롬,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출애굽 했는데, 샬롬은 온데간데없고 불평과 원망, 다툼과 불안만 가득했다. 상황이 이쯤되면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된 것이고, 출애굽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는 이런 탄식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What are we going to do? 어떡하지?”

 

6. 살면서 우리도 이러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런 탄식이 나올 때가 있다. “What are we going to do? What am I going to do? 우리 이제 어떡하지? 나 이제 어떡하지?” 샬롬(평화)이 깨지거나 없어지면 우리의 삶은 급격하게 불안해진다. 르비딤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샬롬이 없는 것을 드러나게 확인한 곳도 르비딤이고, 사라진 샬롬을 다시 찾게 되는 곳도 르비딤이기 때문이다. 샬롬 없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전진하기 쉽지 않다.

 

7. 르비딤에서 그들이 맞닥뜨린 위기는 물이 없어서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한데서만 온 게 아니다. 또다른 실제적인 위기가 그들에게 닥쳤는데, 느닷없이 아말렉 족속이 르비딤에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직 군대가 없었다. 출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들이었고, 또한 출애굽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야로 들어서서 살아남기 급급했던 이들에게 적과 싸울 만한 군대가 조직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아말렉이 쳐들어왔을 때 모세는 여호수아를 지명해서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 싸우라고 명령한다.

 

8. 우리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에는 깨어진 샬롬을 되찾아줄 중요한 첫번째 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산 꼭대기에 서서 아말렉과의 전투에 동참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알려진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붙들고 서서 아말렉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야기이다.

 

9. 모세가 산 꼭대기에서 손에 잡고 있던 ‘하나님의 지팡이’는 르비딤의 반석에서 물을 낸 바로 그 지팡이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 꼭대기에 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전투에 개입하실 거라는 뜻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이런 저런 전투를 치르느라 고생을 많이 한다. 전투를 치르느라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샬롬을 잃어간다. 피곤하고 힘들어서 마음을 닫고 숨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일수록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가 한 일을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하는 전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허락하고 순종해야 한다. 주님, 두 손을 높이 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두 손을 높이 듭니다. 이 전투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싸워주시옵소서.”

 

10. 이 기도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아말렉과의 전투를 보라. 여호수아가 승리한 이유는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에 힘입어 하나님의 지팡이를 계속하여 높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말렉과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전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투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싸워 이기신 전투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아말렉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나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 부른다. 사실, 우리의 예배가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주일이 되었으니까 습관에 좇아 나오는 주일예배가 아니라, 일주일 동안 삶의 전투 속에서 하나님이 싸워주신 덕분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신앙의 고백이 담긴, ‘여호와 닛시’의 예배, 그것이 우리의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11. 아말렉과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분열을 드라마틱 하게 치유해 준다. 르비딤에 도착하여 폭발한 갈등이 치유된다. 자신들이 나가서 싸운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든 덕분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싸워주시니,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삶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유효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어떠한 전투에 나가든,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나가야 한다. “주님, 이 전투를 주님께 맡깁니다.” 아말렉과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뒤, 이스라엘에게 샬롬이 찾아왔다. 이게 단순한 샬롬이 아니었다. 아말렉 전투는 전화위복이 되어 이스라엘의 내부결속을 가져왔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반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임한다.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임한다.

 

12. 아말렉과의 전투가 끝난 뒤, 한 숨 돌리고 있을 때, 모세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 시간 동안 헤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이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모세 가족의 재회 이야기를 통해서 샬롬의 두번째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에는 왕궁에서 쫓겨난 후의 모세의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첫째 아들 게르솜은 ‘이방에서 나그네 되었다’는 뜻이고, 둘째 아들 엘리에셀은 ‘나의 하나님은 도움이시라’는 뜻이다.

 

13. 사실, 우리 이민자들의 삶은 모두 이와 다르지 않다. 낯선 이방 땅에 와서 우리는 늘 나그네처럼 산다. 그런데 우리가 이민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을 부르며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한 분 믿고 살아온 인생 아닌가. 나 같은 경우도 한 명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 가서 교회를 개척했고, 또 이곳에 부르심을 받고 와서 여러분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가 전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는 이제 어떤 사람들보다도 한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이 사실 자체가 기적이다. 여러분은 기적 같은 분들이다.

 

14. 모세와 장인 이드로의 대화를 보면 마음이 짠하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모세는 예를 다해 가족을 맞이하고 장인 이드로와 담소를 나눈다. 18장 8절에 그 담소의 내용이 한 줄로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 여기에서 우리는 샬롬을 얻게 되는 두 번째 원리를 깨닫게 된다. 바로, ‘신실한 신앙의 고백’이 그것이다.

 

15. 샬롬이 없어진 사람에게는 ‘신실한 신앙의 고백’도 함께 사라진 것을 보게 된다.  누군가 오랜만에 여러분을 찾아왔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여러분은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모세는 오랜만에 찾아온 장인 이드로에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세는 이드로에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신실한 신앙의 고백’을 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신실한 신앙의 고백을 했다는 것은 이어지는 장인 이드로의 반응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이제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출 18:9-11).

 

16.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다. 다른 말로, 이방인 제사장이다. 장인 이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신실한 신앙 고백을 통해서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 알았도다!” 이제 장인 이드로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예배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전도가 된 것이다. 샬롬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실한 신앙의 고백’도 없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의 고백’은 우리에게 샬롬을 가져온다. 신실한 신앙의 고백이 있으려면 우선 위에서 살펴본 첫 번째 샬롬의 원리를 깨닫는 게 중요하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계속하여 맡겨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듬어 안으시고, 우리의 입술에 신실한 신앙의 고백을 넣어주신다. 그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샬롬을 선물로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17. 르비딤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이야기는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지혜 덕분에 이스라엘 진영을 재정비하고 부족한 법조직과 행정 체계를 새롭게 수립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세 번째 샬롬의 원리를 배우게 된다. 모세는 하루 종일 바빴다.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혼자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다.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서 할 수 없으리라”(출 18:18). 혼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을 혼자서 감당하려니 모세는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장인 이드로는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을 알려준다.

 

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일처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역경과 어려움이 닥칠 때 스스로, 혼자서 그 일을 헤쳐 나는 것은 역부족이고, 샬롬을 잃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짐을 나누어 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조언을 해준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출 18:21).

 

19. 샬롬을 얻게 되는 세 번째 중요한 원리는 ‘능력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런데 장인 이드로가 제시하고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조건은 우리가 아는 능력과 사뭇 다르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을 학력이나 연봉 같은 것으로 평가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제시하고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과 별로 상관이 없다. 샬롬은 학력이 좋고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과의 사귐에서 오는 게 아니다. 샬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all the people able men who fear God, men of truth, those who hate dishonest gain)’와의 사귐에서 온다.

 

20.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이러한 ‘능력 있는 사람들’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능력은 그 누구보다도 모세 자신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샬롬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은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함께 진실하고, 함께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로 세워져 나가는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인 줄 믿고, 그런 공동체로 더욱더 성장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좋은 사람들의 교회, 능력 있는 사람들의 교회, 세화교회.

 

21. 샬롬은 어떻게 오는가? 샬롬 없이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나가기 힘들다. 샬롬이 없으면 삶은 힘겨울 뿐이다.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도 샬롬은 반드시 필요하다. 샬롬은, 1) 우리의 삶의 전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내어드릴 때, 2) 신실한 신앙의 고백이 있을 때, 3) 능력 있는 사람(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우리에게 온다. 무엇보다 첫 원리가 가장 중요하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 이 전투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싸워주시옵소서!” 이것이 두 번째, 세 번째 샬롬의 원리를 견인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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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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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4. 17:25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출애굽기 16:1-3, 17:1-4)

 

1. 천국은 어떤 곳일까? 사람마다 다르게 묘사될 것이다. 가난하게 산 사람은 더 이상 가난이 없는 곳이 천국일 거고, 부자로 산 사람은 계속해서 부자로 살고 싶은 욕망을 담아 천국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다고 믿을 것이다. 인생을 너무 고통스럽게 산 사람에게 천국은 더 이상 눈물이 없는 곳이라 믿을 것이고, 행복하게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그 행복이 천국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가슴 사무치게 그리운 존재가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가서 그 존재를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질 것이고, 살면서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을 거라 말할 것이다.

 

2. 요한계시록은 천국을 이렇게 묘사한다. 요한계시록에는 ‘천국’이라는 말 대신에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표현한다. 새하늘과 새땅, 즉 천국(하늘나라/하나님나라)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곳,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는 곳이다. 그런 곳은 어떤 곳일까?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3. 우리는 천국이라는 것을 상상할 때, 우선 그곳에는 더 이상의 고통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고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는 게 고통이다. 삶 자체가 고통이다. 그렇다 보니, 인간은 계속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인데, 여기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고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묻고 또 묻는다. 그렇게 인간에게 천국이란 더 이상의 고통이 없는 곳을 의미한다.

 

4. 그런데 나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문제에 너무 몰입해서 사는 것은 아닐까? 고통이라는 문제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천국이라는 것도 고통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설계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아이들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아이들에게 집은 고통이 없는 곳일까? 배불리 먹을 게 있는 곳일까? 게임기가 있는 곳일까? 친구들이 있는 곳일까? 침대가 있는 곳일까? 도대체 아이들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아이들에게 집이란 사랑하는 엄마/아빠가 있는 곳이다. 엄마 아빠가 있는 바로 그곳이 집이다.

 

5.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발생한 일을 다룬다. 그들은 시내산으로 가기 위해 엘림을 떠났는데, 엘림과 시내산 중간 쯤에 있던 신 광야에 도착한다.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16:1). 우리 달력으로 1월 15일쯤 애굽에서 나와 2월 15일쯤 신 광야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신 광야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을 쏟아낸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16:3).

 

6. 목마르고 배고프다 보니 현타(현자 타임)가 온 것이다. 현타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열성적으로 무언가에 몰입하며 행동하다가 급 현실을 깨닫고 조금 전까지 계속됐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거나 수치스러워하며 힘이 쭉 빠지는 순간.”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애굽 왕과 애굽 사람들에게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같이 고통받으며 살았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다. 그런데 출애굽 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신 광야에 이르러 자신들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쏟아내고 있다. 다 좋은데,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7.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은 갑자기 출애굽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이들이 출애굽한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삶”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굿 라이프’를 살아가는 것을 위해 이들은 출애굽을 했다. 그런데, 이들은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는 인도해 내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 광야’라는 말에는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스라엘의 심리적 비아냥거림이 가득 들어 있다.

 

8. 애굽에서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지,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들의 삶이 놓여 있는 ‘광야’를 ‘이 광야’라고 지칭하며, 자신들이 맞닥뜨린 현실을 향하여 냉소와 비난을 늘어 놓고 있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충만했다면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이 광야’로 지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위해 미스바로 온 이스라엘 회중을 불러 모은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긴 뒤 돌 하나를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칭한다.

 

9. 출애굽기와 사무엘상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출애굽기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사무엘상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그 시간 간격만큼 이스라엘은 성장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사무엘상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신 광야에서 가지고 있었다면, 신 광야를 ‘이 광야’라고 부르며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신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현저하게 없는 모습이다.

 

10. 신 광야에서 발생한 이 일로 인해 전개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의 핵심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기적 같은 일을 벌이셔서 이스라엘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것이 아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의 핵심은 12절이 담고 있다.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더불어서 이 말씀이 핵심이다.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16:28). 한 마디로,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께 신뢰와 믿음을 두느냐, 두지 못하느냐를 시험한 사건이다.

 

1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하여 충분한 신뢰와 믿음을 두었다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배고픈 것을 두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고기와 빵을 먹으면서 종살이하던 때를 회상하며 그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광야에서 배고픔과 목마름 가운데 있지만, 출애굽하여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먹이고 입히실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경험하는 현실은 그들의 현실일 뿐 하나님의 현실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오히려 왜곡되어 있을 때가 많다. 진정한 현타는 내가 보는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을 보는 것이다.

 

12. 신 광야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가득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본 현실이 얼마나 협소하고 왜곡된 현실이었는지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곳은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픔이 가득한 ‘이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아침에는 만나로 배불리 먹이시는 은혜가 넘치는 곳이었다. 무엇이 진실로 현실인가에 대한 깨달음은 이어지는 므리바 이야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3. 이스라엘은 말 많고 탈 많았던 신 광야를 떠나 시내산으로 향하던 도중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실 물이 없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어서 배는 불렀지만 마실 물이 없어서 목이 말랐다. 식량과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물이 없어 목말랐던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모세와 다툰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17:3). 르비딤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마실 물이 없는 현실이었다.

 

14. 이 다툼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다.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일 강을 치고 홍해를 갈랐던 지팡이를 잡고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내리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물이 없는 현실이었지만, 하나님의 현실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현실이었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이렇게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반석으로 가려진 물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보지 못하니, 우리는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실은 다르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눈이 보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현실을 보려고 노력하는가?

 

15.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나 므리바 사건, 즉 이스라엘 자손과 모세가 다툰 사건,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한 사건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어서 발생한 사건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같이 경험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는가.

 

16.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의 내용은 믿음과 신뢰이다. 서두에서 한 천국 이야기를 다시 끌어와 오늘 말씀과 연관을 시켜 보자면, 이스라엘에게 천국은 배불리 먹을 고기와 떡, 그리고 마실 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곳이다. 이는 아이들에게 다른 그 어느 곳보다 엄마 아빠가 있는 곳이 그들의 집이라는 말과 같다. 엄마 아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는 아이들은 그곳에 고통이 있더라도 그 고통의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가 보여주는 믿음과 신뢰를 보기 때문에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굳건히 가진 신앙인은 고통의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고통의 현실 때문에 냉소와 비난을 늘어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서 임재하시고 역하사실 하나님의 현실을 기대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간다.

 

17. 시 한 편을 나누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 정희성 시인의 <봄소식>이라는 시이다.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18. 사랑을 시작한 사람은 세상이 망해가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랑을 시작한 자에게 참된 현실은 세상이 망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망해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고통이 가득한 세상, 망해가는 것 같은 세상을 향하여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배고픔과 목마름이 겉으로 드러난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현실/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19. 우리 모두가 그러한 관계를 쌓아 나가면 좋겠다. 믿음과 신뢰, 즉 사랑은 겉으로 드러난 것 만을 현실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한다면,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만을 바라보며 냉소와 비난 가운데 살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서로 좀 더 보듬어 안으며 따뜻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망해가는 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이 사순절기,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지길, 서로가 서로를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지기를! 사랑의 눈으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기를! 우리 모두 좀 더 힘을 내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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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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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28. 19:56

불평 이야기 (Murmuring Narrative)

ㅡ 불평하라 그리고 구원을 경험하라

(출애굽기 15:22-27)

 

1. 출애굽 이야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에는 황당한 장면이 여럿 나온다. 대표적으로,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꾼 12명을 보내 가나안을 살핀 후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 ‘우리는 그들(아낙자손/거인족들) 보기에 메뚜기 같다’란 말을 듣고 실망한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하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외칠 때이다. 또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산 위로 올라갔을 때 아래에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모세를 생각하며 불안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한 일도 황당한 장면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는, 홍해의 구원 경험 후 찬송과 찬양을 주님께 돌린 후에 금방 돌아서서 이렇게 불평을 늘어 놓는 상황이다.

 

2. 출애굽기는 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출애굽하는 이야기. 여기에는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둘째, 시내산 이야기. 여기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이야기와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셋째, 성막 건축 이야기. 여기에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 이후에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성막을 제작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본문의 이야기는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가지로 시험하시는 하나님과 그때마다 하나님과 모세에게 주저 없이 원망과 불평을 토해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19장에서 시내산에 도달하기까지 불평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 불평 이야기 속에 만나 이야기가 등장한다.

 

3. 수르 광야에 진입해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난 이스라엘, 이들은 사흘 길을 걸어왔는데도 마실 물을 얻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겨우 도착한 마라에서 물을 얻게 되는데 그 기쁨도 잠시,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불평하기 시작한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24절).

 

4. ‘마라’, 즉 ‘쓰다’는 룻기에서도 나온다.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 땅에 이민 갔던 나오미는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고 며느리 룻과 달랑 둘이서 고향 땅에 돌아와서 자신을 맞아주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라. 나를 마라라 불러라.”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인데, 더 이상 자신의 삶이 기쁘지 않으니,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한다. 마라, 쓰다는 뜻이다. 나의 인생이 쓰다는 뜻이다. 참 마음 아픈 이야기다.

 

5. 우리는 평소에 ‘쓰디쓴 인생’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하는 게 좋다. 거기에는 많은 가르침이 있다. 한국인 중에는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 같은 것이 있고, 외국인 중에는 홀로 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이야기 같은 것이 있고, 미국의 인디언의 슬픈 역사를 담은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같은 이야기가 있다. 강자의 역사보다는 약자의 역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성경책 자체가 ‘쓰디쓴’ 이야기이다. 구약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만큼 쓰디쓴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시대에 성경이 점점 읽히지 않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성경을 더 열심히 읽는 영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6. 열 가지 재앙을 내시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아닌가?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모세 앞에서 불평과 원망을 토해낸다. 우리 말로 ‘원망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룬’은 적대적인 감정을 품은 원망을 표현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능력으로 출애굽 했고 홍해를 건넜다는 그 어떠한 인식의 흔적도 없는 불평과 원망이다. 사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구원 이야기를 듣고 감사하고 찬양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 앞에서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인식의 흔적도 없을 정도로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게 된다. “하나님 믿어도 다 소용없네! 신앙이 무슨 소용이야.” 이런 냉소적인 원망과 불평 말이다.

 

7. 이스라엘 백성들의 냉소적인 원망과 불평(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않는) 앞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모세 자신을 향하여 원망을 쏟아 놓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면한다는 것은 모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끔찍한 일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부르짖음은 그만큼 간절함이 베어 있는 부르짖음이었다는 뜻이다. 모세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은 한 나무를 가리키시며 응급 처방을 내리신다. 그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게 되었다. 즉 먹을 수 있는 물이 된 것이다.

 

8.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다. 마라의 불평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불편하고 불행한 일이 반복될 뿐이다. 아무리 응급 처방을 내려 불평과 원망을 없애 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때 뿐이고,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맞이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살아갈 근본적인 해결법을 제시하신다. 그들을 위해 율례(호크/statute)와 법도(미쉬파트/regulation)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율례와 법도는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뜻을 알고 있는지, 그 뜻대로 잘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성장시키는 시험을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들어 순종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 중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신을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신다. 구별하고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치료하시고 다독이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0. 이러한 언약의 말씀이 전해진 후,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은 ‘엘림’이라는 곳이다. 참 예쁜 이름이다. 딸이 있으면 지어주고 싶은 이름이다. (교회 이름으로도 참 좋은 이름인데 이미 엘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너무 많다. 그리고 사실 교회 이름은 그 지역 이름을 따서 짓는 게 가장 좋다. 처음 교회들은 모두 그 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금은 한 지역에 교회가 많아서 그게 어렵다. 안타까운 일이다.) 엘림, 열두 개의 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이스라엘은 거기서 물을 얻고 쉼과 평안을 얻는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드러난 곳이다. 우리의 삶도 엘림에 다다르게 되기를! (우리 교회가 비록 엘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엘림 같은 곳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이런 문구를 쓴 것이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세화교회로 오세요!”)

 

11.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불평 이야기(Murmuring Story)’에서 우리가 꼭 배워야 할할 것 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렵고 힘들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화나고 슬픈 일을 만나거든, 불평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다만, 불평을 하되 올바른 존재에게 해야 한다. (유학 나와서 마음이 울적하고 힘들 때 나는 ‘반지의 제왕’을 보고 또 보곤 했다. 요즘 마음이 울적하고 힘들 때는 마블 영화를 돌려보곤 한다.) 어벤져스(The Averngers) 시리즈 중 Infinity War에서 모든 대사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남는 대사는 소울 스톤을 구하기 위하여 타노스(Thanos)와 그의 양딸 고모라(Gamora)가 보르미어(Vormir)라는 행성에 다다랐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는 레드 스컬이 한 말이다. “We are all wrong!”

 

12. 우리는 모두 틀렸다. 옳지 못하다. 의롭지 못하다. 옳지 못한 내가 옳지 못한 누군가에게 불평을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옳지 못한 나는 옳은 누군가에게 불평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불평을 하게 될 때,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에게 하면 안 되고, 언제나 옳으신 분, 한 분 하나님께 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삶의 지혜이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불평의 유발자/사건에 대하여 눈감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에게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때,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먼저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진솔한 기도가 없는 불평은 또 다른 죄와 폭력을 낳을 뿐이다.)

 

13. 우리는 불평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불평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하게 되어야 할 사람이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는 사람이고 죄 용서함이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어야 할 사람이다. 우리는 위로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는 생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구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다.

 

14. 반면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불평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불평을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온전하게 되는 이가 아니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죄를 짓는 분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거룩하게 되는 이가 아니시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위로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이시고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원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15. 우리는 불평을 할 때, 올바르게 해야한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그럴 때 구원이 온다. 우리는 모두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구원할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구원이 필요한 존재/사람’에게 구원을 간구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고 불경한 일이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구원을 주시는 분에게 구원을 간구한 것이 올바르고 마땅한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16. 불평하라! 그리고 구원을 경험하라! 올바르게, 하나님께 불평하는 자!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열 가지의 재앙을 통해서, 그리고 홍해를 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평을 들으시고 그들을 돌보셨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치료하시고 위로하셨다. 치료하는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신다. 불평과 원망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구원을 주시는 치료하는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으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엘림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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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15. 23:43

누군가의 노래

(출애굽기 15:19-21)

 

1. 구원은 좋은 것이다. 구원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구원의 경험을 하고 나면 저절로 찬송이 나온다. 출애굽기 15장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영광과 승리의 찬송을 드리는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모세의 노래, 다른 하나는 미리암의 노래이다. 모세의 노래는 ‘바다의 노래(the Song at the Sea)’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2. 2017년에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소설이 나왔는데, 얼마 전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된 적이 있다.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보면, 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좋다. 한 평가에서는 이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참 좋을 것 같다고, 누가 주인공을 하면 좋을지 기대된다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었다.

 

3. <옷소매 붉은 끝동>은 조선의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특별히 정조 이산과 그의 후궁 의빈 성덕임 간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역사 기록에 보면 후궁 의빈은 정조의 첫사랑인 것 같다. 정조는 첫사랑 성덕임을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싶어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덕임은 정조의 청을 거절한다. 그러다 훗날 우여곡절 끝에 성덕임은 정조의 후궁이 되어 의빈에 책봉된다.

 

4.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소설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는 현재 우리 삶의 현실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소설에서 성덕임은 왕의 청을 거절할 정도로 주체적인 여인으로 등장한다. 성덕임이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역사 기록이 별로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작품을 써내려 간 이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성덕임의 주체성을 당당하게 세워 나간다. 왜 그럴까?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여성의 주체성 문제(페미니즘)가 굉장히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술은 그 사건을 기록할 당시의 정황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5. 전도서를 읽어 나가기 전 서론에서 전도서가 기록된 시기는 헬라문명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던 기원전 2,3세기였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 전도서에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저자는 솔로몬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전도서가 기록된 시기는 800년 후 헬라문명 시대이다. 전도서는 헬라문명과의 부대낌 속에서 기록된 것이다. 솔로몬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800년이 지난 기원전 2,3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책이라는 뜻이다.

 

6. 구약성경, 특별히 모세 오경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와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족장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 기록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때이다. 성경을 읽어 나갈 때 이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장 어두운 시기는 바벨론 포로 시대이다. 이것은 한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가 일제강점기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7. 일제강점기 때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라는 역사책을 쓴다. 이때는 한국인의 민족주의와 주체성이 중요했기 때문에 신채호는 민족주의와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국(조선)의 역사를 기술한다.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이후 부흥운동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나, 민족주의와 주체성을 가지고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 신채호는 사대주의 입장에서 기록된 역사들을 거부하고 한국인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여, 신라 중심이 아닌 고구려 중심의 역사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백제의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하는데, 그 이유는 백제가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대외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고, 근구수왕과 동성왕 때 중국의 랴오시·산둥 지방과 일본 전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8. 출애굽기는 출애굽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 역사를 기록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때이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다수의 고관들과 백성들이 포로로 남의 땅에 끌려온 상황이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 사태를 통해서 보고 있지만, 전쟁이 발생하면 모든 삶과 꿈이 멈춰 버리고 일상이 지옥으로 변한다. 그러한 경험을 하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구원이다. 이 지옥 같은 삶에서의 구원.

 

9.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시인 심훈이 1930년 3월 1일에, 3.1독립만세 운동을 기리며 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보면, 정말 절절하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10. 심훈의 <그날이 오면>과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 즉 <바다의 노래>는 다르지 않다. 바벨론 포로기를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구원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게 도우신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고달픈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바다의 노래>는 내용상으로는 홍해를 건넌 뒤 하나님께 영광과 승리의 찬양을 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구원의 소망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11.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출 15:3-5). 이 구절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깊은 신앙과 바람이 간절히 담긴 곳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깊음’이라는 용어는 바벨론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 티아맛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그 ‘깊음’을 사용하셔서 애굽 왕의 병거와 그 지휘관들을 홍해의 깊은 물로 덮으셔서 그들을 돌처럼 가라앉게 하셨다는 선포는 바벨론의 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2. 일제강점기에서 숨도 못 쉬며 살던 한국인들(조선인들)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읽는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 한반도뿐 아니라 대륙 중국 땅 깊은 곳까지 호령했던 조상 고구려의 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움츠렸던 마음을 펼 것이며, 일본까지 식민지를 삼았던 백제의 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일본 까이거~’하면서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고구려와 백제의 기상을 이어 나가, 독립을 이루고 자랑스러운 조국을 세울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바벨론 포로기를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기에 기록된 <바다의 노래>를 들었다면, 비록 지금 처지는 포로 신세이지만, 곧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 바벨론의 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선민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13. 이러한 주님의 말씀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참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니, 소망을 잃지 말고, 마음을 굳건히 가지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참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만 집중을 하고, 구원받을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처럼 살기 힘든 세상, 무엇보다 경쟁이 삶의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에서는 거룩한 구원이 타락하기 십상이다.

 

14. 우리가 사는 사회, 자본주의 사회, 특별히 신자유주의 사회의 악마성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사람들끼리 무한 경쟁을 하게끔 조종하여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미워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얼마 전 전세계를 강타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그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무한 경쟁 체제 내에서의 구원은 구원 자체가 악마성을 띠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죽고, 자기 자신만 살아남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오징어 게임의 감독이 후속 편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주기를 바란다.  

 

15. 우리는 구원을 바란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구원은 경쟁 상대를 물리치는 구원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 구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그것은 우리에게 명백한 구원이다. 그러나, 대학 입시는 원천적으로 경쟁이다. 대학에 합격한 이들이 있으면, 대학에 불합격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합격한 이들은 구원받았다고 기뻐하겠지만, 불합격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해서 절망한다. 절망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늘 마음이 불편하다.

 

16. 나는 이러한 경쟁 구도가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항하는 때가 많다. 경쟁해서 이기는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게 정말 불편하다. 나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에모리에서 M.Div.(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개척을 나갔는데, 개척한 후 일 년 뒤에 Th.M.(신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아끼는 후배가 나와 같은 시기에 Th.M.과정에 입학하고 싶어했다. 그 친구는 그 과정에 입학하지 않으면 비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를 통해 비자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그 친구보다는 상황이 괜찮았다. 그런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그 과정에 후배랑 함께 지원을 하면, 왠지 후배가 그 과정에 입학하지 못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대개 미국 대학원 입학원서 내는 시기는 2월 중순이 마감이다. 그 과정에 지원했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나는 지원을 포기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후배가 그 과정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감사했다. 그 친구가 합격을 한 후, 나는 마음이 좋았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Admission Office에 5월쯤 연락을 해서, 혹시 지금 지원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내 신분이 더 이상 국제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지원해도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지원을 했고 합격을 했다. 그리고 더 좋은 소식은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해서 돈 한 푼 안들이고 공부할 수 있었다. 경쟁을 포기하고, 후배에게 양보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살게 해주셨구나, 하면서 감사드렸다.

 

17. 아마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체제 자체가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체제를 거부하는 일은 많은 희생이 따르고, 엄청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의 거룩성을 알고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구원이 소중하듯, 상대방의 구원도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해서든지 ‘너도 구원받고 나도 구원받는’, 거룩한 구원을 이루도록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 입에서만 구원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만 하면 안 되고, 누군가의 입에서도 구원의 노래가 나오도록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18. 그런 의미에서 내가 최근에 돕고 있는 ooo 어머니를 소개하고자 한다. 약 두 달 전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왔다. 모르는 번호라 안 받으려다 그냥 받았는데, 백인 미국인이었다. 본인은 선교사 출신이고, 프리몬트 거주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ooo 학교 앞 공원 주차장에 홈리스가 한 명 살고 있는데, 가서 대화를 나누어 보니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구글링해서 한국교회를 찾아 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보고 그 홈리스를 좀 돌봐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이후 나는 두 달 째 그분을 도와드리고 있다.

 

19. 여든이 넘은 노인네이시다. 여성으로서 노인이 홈리스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 당시 명문대 영문과 출신이고, 미8군에서 비서로 일하다 미국 장교와 결혼해서 미국 땅에 1960년에 왔고, 남편과 이혼한지는 오래됐고, 두 딸이 있는데, 둘째 딸은 다운증후군이라 본인이 계속 돌봐 줘야 하는데, 남편이 법적으로 딸을 빼앗아 가서 딸 주변을 배회하며 딸을 돌보고 있는 중이라 했다.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차가 완전히 망가졌고, 망가진 차를 그곳에 세워 놓고 노숙하는 이유는 다운증후군 딸을 돌보기 위함인데,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전남편과 딸이 사는 집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노숙한다는 것이었다.

 

20. 교통사고 문제를 해결해야 보상을 받아 자동차도 새로 구입하고 자신이 홈리스 신세를 면할 수 있는데, 차도 없고, 늙고, 또 자동차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예전처럼 말과 행동을 빠르게 할 수 없어, 모든 게 더디기만 하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미국에서 한국인이 한국인을 돕지 않는다면 누가 돕겠는가, 생각이 들고, 무엇보다, 그분이 빨리 홈리스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은 그분에게는 분명한 구원의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아서 우리 지역에서 노숙자로 생활하고 있는 그분을 도와 어서 빨리 정상적인 삶을 찾도록 해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구체적인 도움은 여선교회 회장을 비롯해 관계자 분들과 회의하여 공지를 하겠다.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한다.)

 

21.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삶의/생명의/인간으로서의 품위(dignity)이다. 이 잘 사는 나라에서 한 사람의 품위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게, 오히려 한 사람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런 면에서, 구원은 힘 있는 자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궁극적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구원만 갈망할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내 입에서만 노래가 나오도록 할 것이 아니라, 생명이 손상되어 품위를 잃고 아파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양심일 것이다. 내 구원의 노래와 더불어 누군가의 노래도 함께 소중하게 생각하고, 누군가의 노래에도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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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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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12. 07:39

자유

(출애굽기 14:15-31)

 

1. 출애굽기에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모세가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가는 장면,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 열 가지의 아주 스펙터클한 재앙,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 모세가 부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장면 등 출애굽기에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즐비하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홍해를 건너는 장면일 것이다.

 

2.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십계>는 1956년 작품이다. 아주 어릴 때,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엄마, 아버지와 함께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으로 <십계>를 보러 갔던 적이 있다.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였을 것이다. 그때 어린이의 눈에 들어온 두 개의 장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은 홍해를 가르는 장면과 십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의 장면이다. 홍해가 갈라질 때, ‘와~’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다시 보면, 촬영기법이 변변치 않았던 때의 영화라 허술하기 짝이 없다. (찰턴 헤스턴은 또다른 대작 <벤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벤허>는 지금 봐도 재밌는 영화다. 얼마 전 <벤허>를 리메이크 했는데, 원작만 못해서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3. 우리는 이성과 과학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홍해가 갈리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보면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인지를 먼저 따지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논쟁만 발생하고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해석해 왔지만, 현재 성경을 읽은 보편적인 방식은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이다. 문학은 이야기를 만들어 진실을 전하는 예술 양식이다. 이야기에는 체험과 허구가 공존한다. 핵심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고,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진실(진리)이 무엇이냐이다.

 

4. 출애굽기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실(진리)은 무엇일까? 특별히 그 중에서도 홍해가 갈리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실은 무엇일까? 이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출애굽기 전체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부르셨고, 왜 모세를 애굽으로 들여보내셨는가?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서 애굽의 바로(이집트 왕)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출애굽기 3장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3:18).

 

5.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우리는 대개 출애굽의 목적을 고통받는 히브리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구원해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목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목적이고 출애굽의 일차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리고 홍해가 갈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한 일은 ‘그들이 나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게 하는 것’이었다.

 

6. 인간은 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성경은 매순간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출애굽기도 다르지 않다. 출애굽기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이것이다.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다!” 예배의 다른 말은 사랑이다. 이것은 이렇게 바꾸어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 ‘예전적 동물’이라 부른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며 궁극적인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습관이 영성이다> 33쪽).

 

7. 인간에게 사랑은 중력과도 같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그 사랑하는 것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이라는 것이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실천과 연습이 필요하다. 올바른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실천과 연습이 필요하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에게 부족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실천과 연습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실천과 연습을 행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통제 받고 있었다.

 

8. 홍해가 왜 갈라져야 했을까? 하나님께서 애굽 왕에게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허락하라’였다. 그런데, 애굽 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못하도록 막아 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막아 설 수 없다. 홍해의 갈라짐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9.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다. 노예란 무엇인가? 남이 시키는 걸 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걸 하다 보면 인간은 그것이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처럼 자신이 사랑해서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병리현상이 있다. 인질(피해자)이 납치범(가해자)에게 동조하고 감화되어 납치범(가해자)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납치범(가해자)을 변호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는 기획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남이 원하고 시키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도록 속이는 것이다.

 

10. 자유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다. 자유인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유인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내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하고,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자유하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불쌍하고 애처롭다.

 

11. 홍해의 갈라짐은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안겨주었다. 그 자유는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억압된 삶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실천하고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12. 이스라엘에게 출애굽기의 여정,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의 삶은 예배하는 인간으로서의 삶,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사랑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예배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예배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평소에 안 하던 부부는 어느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서로 해보세요’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없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끔 잘 인도해야 하는 이유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 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3. 인간에게 자유의 바로미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홍해가 수만 가지 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작게는 피곤해서부터 크게는 미움 때문에 못 나온다. 반대로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은 크게 기뻐해야 한다. 내가 참 자유를 누리고 있구나! 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한 사람이구나!

 

14. 인간이란 예배하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사랑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가.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기록하며 맨 처음 하나님을 찬양한 뒤, 곧바로 이런 고백을 한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15.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자유한 게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자유한 게 아니다. 좋은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어서 자유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살 때 돈도 없었고, 맛있는 음식도 못 먹었고, 좋은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천막에서 잤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끼니를 때웠고, 물이 없어 고생했고, 가진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만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16.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 이것 하나만은 꼭 알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자유를 얻은 자이다. 자유만큼 좋은 게 어디 있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헛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품에 안겨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그 자유를 나만 누리지 말고, 내 사랑하는 가족들, 형제자매, 친구들, 그리고 자유가 없어 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힘껏 나누어 주자.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두 손을 높이 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막고 있는 홍해를 갈라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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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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