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28. 05:20

이야기 상실의 시대

(출애굽기 12:21-28)

 

1. 전세계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후변화는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엮여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상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진행되고 있다. 이야기에는 흐름이 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또는 어떤 논문이든, 이야기에는 흐름이 있다. 이야기의 진행 방향에 맞지 않는 생뚱맞은 이야기가 등장하면 그것은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흐름을 타고 흐른다.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어떠한 현실, 또는 어떠한 현상을 맞닥뜨리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2. 하루 이틀 듣는 뉴스 거리는 아니지만, 지난 주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큰 뉴스 중 하나는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하나는 교사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 구타를 당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가 학교에서 자살한 이야기이다. 모두 학교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전국의 교사들은 학교의 현실을 알아달라며 들고 일어섰고, 정치권에서는 서로 상대 진영 탓만 하는 공방이 일고 있다. 교사들 입장에서 이 문제를 묘사하면, 그야말로 ‘선생님들 수난시대’다. 이는 군사부일체의 이념 아래서 살던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이 심하게 충돌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3. 정치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있는 것처럼, 교원단체도 크게 두 곳으로 양분되어 있다. 하나는 진보를 대표하는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 1989년 설립 / 77,000명 가입 / 31%)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를 대표하는 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1947년 설립 / 120,000명 가입 / 64%)이다. 전교조에서 이룬/이루고 있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은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것이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학생인권조례와 교권(교사의 권한/권리)가 충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참 안타까운 게, 이는 마치 학생과 교사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가 맞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을 했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서 살펴보는 것이다.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학생과 교사가 대립하는 것 같은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교사들의 수난시대를 경험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아이들은 선생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막돼먹은 것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학교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학교만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겪고 있는, 우울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모든 질문/의문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지금 이야기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산다. 이야기 상실의 시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 인가?

 

5. 우리 외할아버지, 오지섭 목사님이 지으신 책이 여러 권 있는데, 어릴 때 그 책을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로 한시를 지으셨는데, 시 중에 한글시로 지으신, 아주 위트 있고 아름다운 시가 있다. 그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감람산 기슭에 웃는 백합되었다가

우리 주 근심할 때 내보일까 하노라

 

6. 나는 이 시를 흉내 내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적이 있다. 이것은 10대 후반에 지은 시이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우리님 마음속에 웃는 추억 되었다가

우리님 그릴때만 내보일까 하노라

 

그리고, 다음 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지은 시이다. 제목은 ‘추모’이다. 내 나이 스무살에 지은 시이다.

 

달빛도 외로이 한숨만 내쉬는 이 밤

한세상 모든 시름 이곳에 모아 두고

먼저 가신 님 다시 만나 適人從父 하소서 (삼종지도: 재가종부, 적인종부, 부사종자)

 

7. 이야기란 내가 나보다 커지고 성장하는 사건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책을 통해서 할아버지를 경험하게 되고 거기에 연결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또한 그 정체성을 점점 키워 나가며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내가 지은 시들은 ‘나’를 키워나가면서 만들어낸 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란 나의 바깥으로 나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이야기란 나보다 큰 존재에 나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혼자서, 독립적으로, 고립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보다 훨씬 더 큰 세상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과 사랑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이야기 상실의 시대’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8.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이야기’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창세기는 수많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족장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족장들이 각자의 아버지 이야기로부터 출발해 자기의 정체성을 키워 나가며 또다른 이야기를 창조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고,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하고, 야곱이 죽으면서 자녀들을 축복하는 이야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야곱의 축복에 따라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얼마나 축복 가운데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족보로 시작한다.

 

9. 그런데, 오랜 세월(430년) 애굽에 살면서, 점점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뒤안길로 밀려났다. 급기야 그들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고된 노동만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이야기 상실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하니까, 삶 속에 탄식만 흘러나왔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10. 출애굽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야기를 되찾아 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4-25). 이야기를 상실하면, 죽음이 난무한다. 우리도 21세기 우리의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하면 자기 자신 밖에 남지 않는다. 인간은 극도로 개인화되고, 고립된다. 이야기를 상실하면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나를 잇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비대해진다. 이런 존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폭력이다. 자기 자신이 가장 크고 유일한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바깥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기 발 밑에 두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는 폭력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폭력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친구에게. 우리가 목격하는 현상들이다.

 

11. 출애굽은 ‘자기’를 더 큰 존재에 잇대는 작업이다. 노동에 파묻혀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 보니, 자기 자신의 생존만 생각하며 살게 된 이스라엘은 어느새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신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자손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조상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도하도록 이끈다. 그 이야기는 모세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오랜 세월 동안 사라졌던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다시 꽃을 피운다. 모세가 등장한 이후, 이스라엘은 이야기로 다시 가득 찬다.

 

12. 이야기가 사라져 고통 받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야기를 회복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 모세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출애굽기 12장은 이야기가 어떻게 회복되고,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세는 애굽에서 어느 순간부터 노예로 전락하여 고통스럽게 살면서 이야기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야기를 다시 회복해 준다.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아들딸이 여러분에게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하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이것은 야훼께 드리는 과월절(유월절) 제사라고 일러주십시오. 이집트인을 치실 때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그냥 지나가시어 우리의 집을 건져주신 야훼께 드리는 것이라고 일러주십시오”(26-27).

 

13. 모세가 행하는 일은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먼 훗날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부모와 자녀 간에 이렇게 이야기가 매개가 된다면, 부모와 자녀 세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서로의 공통된 정체성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은 그 정체성을 발판 삼아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야기 안으로 자기를 위치시키면 자기도 더 명확히 보이고, 다른 이들도 보이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큰 존재가 보인다. 인생은 나 혼자 써 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란 존재하는 것 모두가 함께 이야기를 써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써 나갈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있다.

 

14. 학교에서 발생하고 있는 교사와 학생 간의 대립,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과 비인간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보겠다고, 학생인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또는 교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을 마련하고 정쟁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에서는 학생과 교사의 이야기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정책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자신을 연결시켜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시대이다. 즉,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이다. 자아가 고립된 시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주 두꺼운 벽이 세워져 있다. 함께 즐겨야 할 볼링을 혼자서 즐기고 있는 시대이다. (로버트 퍼트넘 / <나 홀로 볼링 Bowling Alone>)

 

15. 우리는 정말로 유례없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쟁의 시대에는 적군과 아군이 서로를 죽이지만, 요즘 우리는 스스로 죽는 시대(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그 외로움과 분노를 어쩌지 못해, 상대가 누구인지를 막론하고(부모든, 선생이든, 친구든) 화를 분출하여 상대방에게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행하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이야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나를 더 큰 존재, 나의 바깥의 존재에 연결시키는 일을 잘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을 먼 데서 찾을 필요도 없다. 나 자신에게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경험하며, 또는 실행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우리 사회도, 심지어 지구도,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16.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지구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 안으로 자기를 위치시키면 자기도 더 명확히 보이고, 다른 이들도 보이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큰 존재가 보인다. 인생은 더 큰 이야기로 확장해 가는 여정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부모의 이야기를 입고, 친구, 사회, 우주, 하나님의 이야기에 편입되면서 성장해 간다. 근데 요즘은 반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 우주, 사회, 친구, 가족의 이야기로부터 탈퇴하여, 나 자신으로만 고립되어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야말로, 이야기 상실의 시대다.

 

17. 가정이 평안 하려면 가정에 이야기가 풍성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사건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가정의 풍경은 어떤가? 각자 방에 들어가서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 밥도 각자 따로 먹는다. 가장 가까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멀다. 인터넷을 통해서 멀리 있는 사람과 연결된다. 그런데, 그 연결은 허구일 뿐이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이야기가 풍성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사건(친교/fellowship)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의 풍경은 어떤가? 흩어져 살다, 주일에 정해진 시간에 모여 예배만 드리고, 또다시 흩어진다. 서로의 생사, 서로의 삶이 궁금하지 않다. 예배도 같이 드리고, 밥도 같이 먹고, 사역도 같이 하고,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눈물로 흘리고 기도도 함께 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서 함께 동고동락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 연결되는 것을 귀찮아 하고 싫어한다. 귀찮아 하고 싫어한다기 보다,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 상실은 우리 안에 이미 깊이 와 있다.

 

18. 이렇게 이야기가 상실된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이 그래도 희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아주 강력한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 그 중에서도 예수의 이야기.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주일에라도 다른 데 가지 않고 모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의 이야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아닌가. 이야기를 상실하여 모두가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이야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더 긴밀히 연결되어, 이야기를 만들자. 이야기가 우리의 삶,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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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