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목회: 기술철학 관점에서 바라보기

1. 매트릭스
Matrix라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Matrix는 가상공간(Cyber Space)이다. Matrix는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로봇이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낸 비극적인 가상공간이다. Matrix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다. 때는 서기 2099년, 인간의 혹독한 착취에 못 견딘 로봇들은 인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로봇이 자신들이 착취 당하고 있고, 인간으로부터 노예 취급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로봇은 AI(Artificial Intelligent)라고 하는, 인간과 동일하게 작동하는 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봇과의 전쟁에서 밀리게 된 인간은 로봇의 에너지 원인 태양을 가리기 위해서 핵폭탄을 터뜨려 지구의 대기를 분진으로 덮어 버려 더 이상 지구에 태양빛이 비추지 못하게 만든다. 이에 에너지가 필요했던 로봇은 인간을 생포한 뒤, 인간의 생체에서 흐르고 있는 에너지를 흡수한 뒤, 죽여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체에서 뽑아낼 수 있는 에너지 또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봇은 Matrix라는 가상공간을 창조해 내게 된다. 이것은 생포한 인간들을 독립적 캡슐에 넣어, 기계장치로 연결한 뒤, 그들을 잠 재우고 현실이 아닌 Matrix라고 하는 가상공간에서 실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수의 인간에게서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뽑아 낼 수 있고, 인간의 수명이 다 하는 동안, 즉 일회적이 아닌 반 영구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로봇에게 잡혀, Matrix라는 가상공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진짜 삶(real life)이 아니라 가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Matrix가 설정해 놓은 서기 1999년을 살고 있을 뿐이다. Matrix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또는 상대방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다. 그 질문은 Matrix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실제 세계로 나오게 되는, 로봇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경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2. AI의 출현
AI라는 용어는 1956년 다트머스 학회(Dartmouth Conference)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연구자들은 기계가 학습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컴퓨터 기계와 지능’이라는 논문을 통해 튜링 테스트를 제안하며,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주춤하던 AI 연구는 1980년대에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s)로 부활했다. 퍼셉트론(Perceptron)과 다층 퍼셉트론(MLP)이 개발되었지만, 효율적인 학습 방법이 부족해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그 이후, 1990년대 AI 연구는 자금 부족과 실적 부진으로 주춤했고, ‘AI 겨울’이라는 시절이 찾아왔다. 아무도 AI 연구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빅데이터와 계산 능력의 발전으로 AI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데이터 마이닝,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 등은 AI 연구에 활기를 띄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2006년 딥러닝(deep learning)의 핵심 기술인 ‘심층 신경망 학습(deep neural networks)’을 위한 효율적인 학습 방법, 특히 역전파(backpropagation) 알고리즘과 사전 학습(pre-training)을 제안했고, 이를 통해 이미지 인식, 음성 인식 등에서 AI가 인간 수준의 성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공로로 제프리 힌턴은 인공신경망 연구의 선구자인 존 홉필드(John Joseph Hopfield)와 함께 올해(202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노벨위원회가 AI 발전 기여자들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것은 AI는 이제 영화에만 등장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힌턴은 계속해서 AI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강력한 규제를 주문해오고 있다. 

3. 기술철학 1
기술철학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철학자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이다. 그의 주저 <시간과 존재>에서 부분적으로 논의한 기술철학은 그 이후 출간한 <숲길>과 <기술에 대한 물음> 등에서 본격적인 논의로 발전한다.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을 표현하는 핵심 용어는 ‘역운’(Geschick)과 ‘기술세계-내 있음’이다. 역운은 인간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다. 기술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기술이 인간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기술(techne)을 시학(poesis)와 비교를 하는데, 시학이 존재자를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 속에 머물게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드러낸다면(예술작품의 기원), 기술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대상으로 만들다고 비판한다. 기술에 의해 대상화된 사물(인간 포함)은 주문과 생산을 위한 재료 또는 부품을 전락하고 만다. 이는 존재가 기술에 종속되는 사태이다. 

기술철학을 진지하게 논의한 또 한 명의 철학자로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있다. 엘륄은 평생 ‘기술 현상’을 연구한다. 엘륄은 기술 체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술 사회와 관련된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았다. 엘륄은 ‘기술’이라는 키워드로 우리 사회 이면의 ‘숨겨진 논리’를 폭로한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다니엘 벨(Daniel Bell)은 ‘후기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 사회’라는 키워드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관리 소비 관료 사회’라는 키워드로, 마샬 맥루한(Marchall McLuhan)은 ‘대중매체’라는 키워드로, 기 드보르(Guy Dubord)는 ‘구경거리 사회’(스펙타클의 사회)라는 키워드로, 이들은 모두 현대사회의 현상과 숨겨진 논리를 폭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엘륄은 이 모든 사회 현상 이면에는 ‘기술’이 있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기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엘륄은 기술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그들이 겪은 시대적 상황 때문인 듯하다. 하이데거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엘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이들은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이데거는 기술철학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기술과 인간은 대립관계에 있다. 하이데거가 우려하는 것은 기술이 인간 존재를 장악하여 인간과 함께 모든 사물을 착취하게 되는 것이다. 엘륄은 기술이 신성화되는 것을 우려한다. “우리를 굴종시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전이된 신성함이다”(The New Demons). 기술을 신성화시킨 인간은 기술이 부여하는 질서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기술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4. 기술철학 2
전후 세대인, 기술철학 2세대들은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술철학 1세대인 하이데거나 엘륄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기술철학 1세대는 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했다면, 기술철학 2세대는 탈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관계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한다. 대표적으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존 로(John Law), 그리고 랭던 위너(Langdon Winner) 등이 있다. 이들은 인간과 기술이 맺는 훨씬 복잡해진 관계에 주목하여 기술철학을 논한다. 또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중시했던 근대와는 달리 탈인간중심적 사고를 전개한다. 이는 이들로 하여금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를 낳게 했다. 

하이데거가 기술을 ‘세계-내 존재’라는 차원에서 존재론적으로 사유했다면, ANT 그룹은 기술의 핵심을 관계론적으로 사유한다. 이 사고의 핵심에는 브루노 라투르가 있는데, 그는 주체와 객체로 구분해 온 서구 인식론을 전복시키고, 그 대신 ‘행위자’(actor)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물들의 관계를 사유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기계, 동물, 문서, 돈, 건축물 등 다양한 사물들은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 이는 인간만이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근대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뒤엎는 것이다. ‘행위자’의 위상을 획득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 간에 연결망을 형성하여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 라투르가 한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론을 완전히 뒤틀어 놓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근대인은 부단히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여 주체가 객체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사유를 했다. 그러나 라투르는 근대의 인식론에 포착되지 않았던 ‘실재’를 말한다. 그것은 인간은 애초부터 기술과 같은 비인간과 잡종적(hybrid) 동맹을 부단히 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진술인데, 인간은 순수하게 인간 존재로만 존재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객체가 아니라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actor)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적이고 더 풍요롭게 사는 길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모든 사물과 상호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술철학 2세대들에게 기술은 인간이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동료’ 행위자인 것이다. 

기술의 정치성을 논한 랭던 위너는 하이데거를 비롯한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이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에 붙들려 있다고 비판한다(자율적 테크놀러지와 정치철학).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술의 자율성은 결국 인간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랭던은 기술철학의 가치가 본질을 사유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의 실천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 담론은 정치의 장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은 인간의 실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전자조작이나, 기후변화 문제를 들 수 있다.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단순히 사실(과학)과 가치(정치)가 분화된 세계에서 파악할 수 없다. 통합적으로 사유해야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라투르는 현실정치에서 사물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대의민주주는 이제 인간뿐 아니라 사물들의 목소리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5. AI와 목회
AI는 현대 기술의 정점이다. AI의 개발자 힌턴이 그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고 있듯이, AI는 인류를 신의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앤서니 레반도프스키(Anthony Levandowski). 미래의 길(WOTF: Way of the Future)의 교주다. 이 교주는 AI를 통해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2015년 설립했고, 2017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팬데믹 기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종교는 AI를 예배한다. 교주 레반도프스키는 묻는다.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나 더 똑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냐?” AI를 신(God)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AI교는 벌써 수천명의 신도를 모았다.

AI와 목회는 단순히 목회에 AI를 어떻게 활용하여서 목회를 수월하게 하고, 교회를 부흥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의 목회는 더욱더 치열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AI 시대의 목회는 기술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 아니면, 관계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에 대한 현실에 직면했다. 기술철학 2세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면, 즉 인간은 언제나 사물과 함께 하이브리드로 존재해 왔다면, AI 시대의 목회는 인간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AI 시대의 목회가 기술에 끌려가는 목회가 아니라 기술을 사유하고 기술과 관계론적으로 인간 존재를 새롭게 세워 나가려면 치열한 공부가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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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34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을 위한 기도: 기억 기도
(마태복음 2:13-18)

주님,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으십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일로 그 일에 동참합니다.
무고하게 희생되는 자들이 없어야 할 텐데,
세상은 여전히 슬프고 아픕니다.
주님,
우리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주님께 올려드리오니,
주여,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고,
아픔이 변하여 복이 되게 하옵소서.
그 어떤 어둠도 물리쳐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31

작은 자에게 소금을 주게 되길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9:33-50)

주님,
모두 첫째가 되려고 
작은 자를 희생시키고 밝고 올라서기 바쁜 세상에서
이렇게 따뜻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큰 자인 것 같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작은 자입니다.
큰 자가 되려는 중독에 빠져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합니다.
정말로 큰 자가 되려거든
작은 자에게 소금을 주라고,
작은 자를 영접하고 잘 섬기라는 이 전복적인 말씀에
고개를 숙입니다.
내가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철부지, 
작은 자라는 깨달음을 얻게 하셨사오니
주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중독된 것을 끊어내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작은 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사오니,
주님,
우리의 보살핌을 약간만 받아도
삶이 회복되고 평안을 되찾을 작은 자를 영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소금을 두게 하시고,
그 소금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의 삶이 평화롭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소금을 주셔서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9

사랑 받는 자로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9:2~13)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라고 불러주시는 주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사랑에서 나오며
그 사랑은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줄 믿습니다.
주님,
고통이 우리의 삶을 짓누를 때마다,
주저 앉고 싶을 때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에게 사랑을 속삭여 주소서.
사랑 받는 존귀한 자 답게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뒤따르게 하소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6

존귀한 자로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9:2~13)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라고 불러주시는 주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사랑에서 나오며
그 사랑은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줄 믿습니다.
주님,
고통이 우리의 삶을 짓누를 때마다,
주저 앉고 싶을 때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에게 사랑을 속삭여 주소서.
사랑 받는 존귀한 자 답게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뒤따르게 하소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5

제자도의 핵심을 대면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8:27-38)

주님,
제자도의 핵심을 다시 한 번 마주칩니다.
우리는 이제껏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지만,
제자도의 핵심을 용기 있게 대면한 적이 없는 듯합니다.
대면한 적이 있더라도
어느덧 세상 풍파에 휩쓸려
제자도가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그냥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담긴 제자도의 핵심을 보여주셨사오니,
우리가 다시 한 번 용기 있게
제자도의 핵심을 직면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결단이 있게 하옵소서.
그럴 때 우리는 참 생명을 얻을 것이요
교회의 회복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따르다 우리가 죽더라도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고
신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4

언더스탠딩을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8:14-21)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소서.
무딘 마음, 보이지 않는 눈, 듣지 못하는 귀 때문에
나 자신,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특별히 사랑하라고 곁에 주신 존재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깊은 이해, 언더스탠딩이 되지 않아
예수님을 오해하고 대적하고 결국 배반한 제자들처럼
우리의 삶이 위태롭습니다.
주님, 우리를 고쳐 주소서.
예수님께서 눈 먼 자를 고쳐 주시고
그가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눈과 귀를 고쳐 주사
언더스탠딩에 이르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이 우리를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곁에 주신 존재들을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주님,
언더스탠딩을 통해 우리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도록
구원하소서.
우리를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2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21:7-14)

평화의 주님,
또다시, 평화가 묘연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멈출 기미가 없고
혐오는 더 깊어지고 있으며
기후변화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앞날이 참으로 풍전등화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세상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고 싶습니다.
우리라도, 정신 줄 놓치지 않고 
예배하며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 
예루살렘으로 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신 바울 사도를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려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막힌 담을 허무신 예수님처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해 연보를 전해준 바울 사도처럼,
우리도 평화를 위해 뭔가라도 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행할 일을 가르쳐 주소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핏값으로 주신
사랑과 은혜를 잃지 말게 하옵소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됨을 잃지 말라고
십자가 위해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4. 12. 31. 10:14

[당신]

나는 흡혈귀
당신은 목
끌리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참새
당신은 방앗간
그냥 지나칠 수 없네

나는 벌
당신은 꽃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소년
당신은 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목동
당신은 소녀
지켜주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바람
당신은 나무
그 품에 안기지 않을 수 없네

나는 강
당신은 바다
흘러가지 않을 수 없네

나는 구름
당신은 하늘
떠다니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시냇물
당신은 조약돌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노을
당신은 서쪽
물들지 않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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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24. 12. 31. 10:13

[새날]

나에게 상처 입은 날들에게
사죄한다
하늘이 나에게 보내주신 날들,
그러나,
거룩을 입히지 못하고
불경을 입힌 날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나를 거쳐간 날들아,
하늘에게로 돌아가
새로운 날들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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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구약의 예언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언서를 몇 군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엘 2:1-2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라. 온 땅의 주민들이 떨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라. 이제 가까웠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구름과 짙은 흑암의 날이라...”

아모스 5:18-20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뜻이냐?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요 어둠이니...”

스바냐 1:14-15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까우며 심히 빠르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폐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날’을 언급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언급된 곳에는 언제나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판단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환란’을 당할 거라는 말,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성경은 줄기차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만 말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언론/전문가 그룹에서 들려오는 2025년도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한국은 ’12.3 내란사태’ 때문에 환율이 오르고, 증시가 급락하는 등 경제사정이 가뜩이나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질 거라는 전망입니다. 미국도 그리 장밋빛 전망만은 아닙니다. 트럼프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정책이 바뀌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 커진 상태입니다. 각국에서는 트럼프 집권 2기에 맞서 대응 전략을 준비하기 한창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미국 이외의 모든 나라에게는 어려움을 안겨다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도 과연 좋을지,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해를 코 앞에 두고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시절이 될 거라는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런 전망 앞에서 ‘여호와의 날’을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의 날이 무엇일까. 왜 고대의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그날이 오면 힘들 거라고, 외쳤을까.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닥친 환란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거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일종의 ‘퍼펙트 스톰’이 사회를 휩쓸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적 시스템도 미비하고, 과학기술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 인재와 자연재해가 겹치면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그 환란을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끔찍한 환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러한 환란을 ‘여호와의 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환란에 정의(justice)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합한 상황을 못 견딥니다. 그러나, 정당성이 부여되면, 즉 왜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면,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도 감당합니다. 

아무래도 2025년는 여러가지 정황 상,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임할 듯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상황이 좀 더 나을지 모르겠으나, 고국의 앞날이 정말 걱정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닥치면 겉으로 보면 환란이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의 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환란이 닥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것 있습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죄악’, 바로 그것이 보입니다. 그 죄악을 해결/해소하지 못하면, 환란은 그치지 않고 반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는 반드시 죄악의 해결/해소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항상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고, 분단국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일’이라는 용어와 ‘빨갱이’라는 용어가 한국말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은 계속해서, 언제든지, 분위기가 조성되면 내란 상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보수 세력은 대개 친일 세력이고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하여 분단국가 현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웁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구조적 모순이고 아픔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은 깨끗케 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지 괴롭혀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날이 임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더 신뢰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서로에게 좀 더 따뜻한 존재가 되어 준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춥고 어두운 날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미소를 더 자주 띄워 주어요. 우리 서로의 손을 더 자주 따스하게 잡아 보아요. 우리 서로의 어깨를 더 자주 두드리며 격려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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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낙심마오]

우리 인간이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처럼,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를 대면하면서 동시에 국가라는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국가라는 제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지구상에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라는 존재, 또는 국가라는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국가란 무엇인가’를 공부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국가는 ‘필요악’이다. 국가가 왜 악이냐면, 국가가 나 개인에게 폭력을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에 강제로 세금을 낸다. 우리는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무엇인가 잘못하면, 우리는 국가에 의해서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국가는 인간에게 악이다. 하지만, 국가는 필요하다. 국가 없이 인간은 삶을 평화롭게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국가와 애증의 관계에 있다. 

최근 포브스 지에서 대한민국 상황에 대하여 우려를 표했다. 심각하게 받아드리며 대비해야 한다. (2024년 12월 6일자) 중국 경제의 둔화와 수출 감소,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를 앞두고,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시기인데, ‘계엄 선포’로 인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2025년에 한국에 닥칠 위기에 대처할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이다. 이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을 거라는 말이다. 국제 정세도 안 좋고, 국내 경제도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그리고 정말 결정적인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산 선지자는 예레미야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으로 따지면, 국제정치학/국제관계학 전문가이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말년(BC 587년 경)의 역사적 질곡을 모두 겪은 사람이다. 이스라엘 전체 민족, 왕이나 고위관리에서 가난한 하층민까지 모두,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다. 왕이 두 눈이 뽑혀 잡혀가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갈 시절이었다. 얼마나 어두운가. 이때 예레미야가 한 일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나라가 어려울 때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한 일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것을 실천한 대한민국의 믿음의 조상이 있다.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도산은 병환으로 죽어가며 자신을 문병 온 동지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낙심마오!" 그 당시 한국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의 길은 아득하고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일이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낙심마오'라며 위로를 건네고, 생명이 다해갔지만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성경을 사랑했던 도산 안창호, 그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낙심하지 않았다. 낙심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일을 그르치는 것도 없다. 무슨 일이든, 낙심만 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윤석열을 탄핵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1. 역사의 숭고함을 망가뜨림
2. 나쁜 선례를 만들면 안 됨

역사는 숭고하다. 역사가 숭고한 이유는 '비극' 때문이다. 비극은 정의를 이루어가다 발생한 슬픔이 역사에 박힌 상흔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일제시대의 저항, 독재에 대한 저항, 민주화 운동 등, 새시대를 열어가려는 정의의 행진 안에서 슬픈 일이 많이 발생했다. 그 슬픔이 한국 근대사를 비극으로 물들였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숭고하다. 숭고함은 비극의 아름다움이다. 그 숭고함 때문에 우리는 비극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가려고 발걸음을 뗀다. 

윤석열이 행한 '계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숭고함에 아주 큰 흠집을 낸 것이다. 비극적인 숭고한 역사를 희극적인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역사의 선배들이 쌓아놓은 숭고함을 무너뜨리고, 역사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국민들이 모아준 권력을 사사롭게 씀으로 인해 정의를 무너뜨렸다. 이것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될 죄악이다. 

윤석열을 반드시 탄핵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만약 이번에 탄핵을 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아주 나쁜, 최악의 선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임기 말년에 행한 아들 헌터 바이든을 사면한 일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당에서도 말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이것이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가진 사면권을 통해 자기의 측근을 사면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퇴임하는 것은 후임 대통령들에게 아주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아를 할 때 부모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부모는 반드시 훈육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는 자기가 방금 행한 일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아이는 ‘이렇게 해도 되는 구나’하면서 또다시 그 나쁜 일을 반복하게 된다. 좋게 넘어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은 나중에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한국교회가 망가진 이유는 한 가지로 규명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큰 이유 중 하는 ‘세습’이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가 지탄을 받는 이유는 그가 ‘나쁜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훌륭한 일을 많이 했어도, 결국 퇴임 때 ‘나쁜 선례’, 즉 ‘세습’을 했기 때문에 지탄을 받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하나인 광림교회에서 ‘세습’이라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 때문에 그 이후 감리회를 비롯한 타교단의 대형교회들은 그 ‘나쁜 선례’를 따라 세습을 자행했다. 그 나쁜 선례를 막아내지 못한 감리회는 그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보수화, 그리고 사사화가 너무 심해 감리회의 웨슬리 정신을 잃어버렸다. 

지금 국민의힘에서는 윤석열 탄핵을 반대한다는 당론을 정했고, 기껏해야 임기를 탄축하는 헌법개정을 통해 윤석열의 조기 퇴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는듯하다. 그렇게 되면, 윤석열은 말되 안되는 엄청난 범죄를 국가와 국민들 앞에서 저질러 놓고, 퇴임 후에 대통령이 받게 되는 모든 혜택과 의전을 손해 없이 받게 된다. 이것은 정말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이다. 이후에 정치적 궁지에 몰린 대통령이 있다면, 그는 분명 윤석열을 참고 삼아 ‘계엄령’을 남발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자기 밥그릇에 아무런 손해가 없을 거라는 ‘나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반드시 탄핵되어야 한다. 역사의 숭고함에 큰 흠집을 낸 죄를 묻고, 그리고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땀과 피로 세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손쉽게 훼손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가장 장엄한 교훈이다. 후대에게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장엄한 교훈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숭고한 역사를 훼손하는 자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쁜 선례’는 나쁜 통치자를 또 만들어내는 법이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이 역사적 사건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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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12. 1. 09:51

유대인 천동설

사도행전 22장부터 25장까지 바울은 6번의 아폴로기아(변증/변명)을 한다. 변증이란 법정에서 제기된 고소에 대해 잘못이나 오류를 방어하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의 변증은 유대인 회당이나 이방인 위정자(정치인)나 권세자(권력자)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바울은 왜 무엇을 잘못했기에 유대인들/로마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그들 앞에서 아폴로기아(변증/변병) 할 수밖에 없는가? 여섯 번째 변증에서 로마의 고위 관료 베스도는 바울에게 비쳤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변증을 통해 바울에 대한 고소는 무죄로 밝혀진다. 바울과 복음은 무죄다.

그렇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기소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표면적인 이유는 율법과 성전에 대한 모독죄이다. 이것은 복음서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기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바울도 모두 유대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율법과 성전의 완성이다. 여기에서 충돌이 생긴다. 

바울의 아폴로기아 내용을 보면, 자기 소개를 한다. 바울은 다소 출신이고,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교육 받은 바리새인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유대 전통에 열심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삶의 반전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계시 사건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나사렛 예수를 만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은 자기의 삶에 대하여 묻는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동안의 나의 삶이 뭔가 잘못되었고, 이제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인식한 것이다.  

예수를 만난 이후로, 바울이 해야 하는 일은 ‘증언’이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예수는 죄 없이 죽으셨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게 아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삶을 열어주는) 칭의(은혜)이다. 

처음에는 히브리말(아람어)로 아폴로기아(변증)를 하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유대인들은 갑자기 폭동을 일으킨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행 22장 22절). 누가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에게 동일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메시지를 말하자,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뜨리고자 했다. 이게 정말 이상한 거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바울도 이렇게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예수님과 바울에게 잘못이 있다면, 유대인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 아닐까? 이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려 들었을까?

성경에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은 ‘유대인 천동설’이다. 유대인은 세상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고, 그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율법주의는 민족적 종교 성격을 띄었고,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율법주의적 종교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유대인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 이것이 유대인 천동설이다. 무엇이든지 천동설은 문제이다. 우리는 자주 각종 천동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인간 천동설(인간중심주의), 백인 천동설(백인중심주의), 남성 천동설(가부장제), 기독교 천동설(배타적 복음주의). 천동설이 왜 문제인가? 중심에 있는 존재는 편하고 좋지만, 바깥에 있는 자들을 억압 받아 괴롭다. 천동설은 반드시 고통 받는 자를 생산해 낸다. 이것은 죄악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천동설을 깨는 작업이다. 복음이란 제국주의, 인간중심주의, 유대인 중심주의, 율법주의, 성전중심주의를 깨는 작업이다. 복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 사람과 사물(자연)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인간의 원죄는 자기중심주의, 자기집중을 일컫는 말이다. 중심과 주변을 만들어 지배와 착취가 일어나게 하는 거,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복음은 그러한 것을 인식하게 도와주고, 자기중심주의, 자기집중에서 벗어나 경계를 허물고 서로 평화롭게, 사랑하며 사는 삶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나의 존재 때문에, 주변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자기 중심성’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가. 우리는 천동설 때문에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고 산다. 나를 날마다 돌아보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날마다 죽는 훈련을 안 하면, 복음에서 멀어져 자기 중심적인 삶을 통해 주변을 어렵고 힘들게 하는 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복음은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기쁜 소식이다. 내가 ‘자기 중심성’, 천동설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가. 

복음은 자기 중심주의(천동설)를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자기 중심성에서 오는 죄의 사슬을 끊은 것이다. 복음은 중심주의(자기집중)에서 벗어나, 더불어 평화롭게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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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12. 1. 09:50

오해와 진실

바울 일행의 예루살렘 도착
바울 일행은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일과 같았다. 예언까지 있었던(행 21:10-11), 유대인들과의 필연적인 충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울의 일행은 이방인 교회의 대표들(우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방문은 예루살렘 유대인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만남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만남! 기독교의 역사적인 사건이다. 두 개의 주체가 만나는 사건이다. 기독교는 한 부류의 전유물이 아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주체적으로 키우는 것이다.

바울의 사역 보고
바울과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수장은 야고보)을 만난 이방 사역을 보고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다’ (19절) ‘낱낱이’는 ‘일일이, 하나하나’ 말했다는 뜻이고, ‘말하다’(엑세게이토)는 ‘해설’(exegesis)을 했다는 뜻이다. 행한 일에 대해서 그냥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신학적으로 해석해서 말했다는 뜻이다. 예를들어,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이는 마치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친 일과 같았다. 어느 교단도 하지 않는 일, 어느 유명 목사도 하지 않는 일은 요나와 같이 비둘기 같은 나, 힘없고 무명한 자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았다. 그래서 복되고 의미 있었고, 나 자신도 많이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바울이 행한 해설도 이런 것이었다. 특별히 그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 지역에서 행한 일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해설(신학적 진술)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함께 기뻐했다. 동일한 성령이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위로해 주시고 보듬어 주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게 모두에게 기쁨이 된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와 제안
이방 지역에서 들려온 바울에 대한 오해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배도하라고 가르치고, 할례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즉,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는 오해가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바울에게 율법에 따른 정결례를 행할 것을 제안한다. 바울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결례를 행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신학적 문제들이 있다. 아래와 같이 일목요연하게 표현해 보면, 
1)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이방인들은 모든 율법의 조항을 지키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는다.
2)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버리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해 구원 받는다. 
3) 이것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4) 그러므로,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것은 율법과 관련되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은 율법이 개입되지 않는,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의 길이다. 
5) 구원은 인간의 관습이나 법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6)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관습과 법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7) 믿음은 참으로 전복적인 개념이다. 

고소 당한 바울과 초대 교회의 과제
율법을 지키는 것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통해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했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바울 일행의 기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디아스포라)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고소하고 잡아들인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예루살렘 성에 있는 것을 우연히 본 그들은,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혔을 거라고 추측했다.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힌, 즉 신성모독죄를 범한 죄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복음을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교회의 과제는 바울과 복음, 그리고 유대인과 율법 사이의 깊은 오해를 푸는 것이었다. 

21세기 교회의 과제
아직까지 율법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사유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본다. 안타깝다. 대형교회 중심의 보수교회에서 내세우는 이슈들은 대부분 율법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교회의 과제는 복음과 과학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이다. 이미 18세기 과학혁명 이래 치열하게 해오는 일이다. 물론 이 작업이 그렇게 썩 잘 되고 있지는 않다. 대표적인 논쟁인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이게 과학 시대에서는 작동을 잘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자꾸 ‘cultural stagnation’(문화 지체 현상/기독교의 생각이 세상의 생각과 괴리를 보이는 현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에서 벗어나, 현대성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현대성은 심층심리학과 현대 정치철학(인문과학), 그리고 뇌과학과 양자물리학(자연과학)이다. 현대 신학은 이런 것을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 신앙이 요즘 시대에 합리적일 수 있다. 

오해에서 진실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오해를 받았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괴로웠다. 지금도 기독교 신앙은 매우 큰 오해를 받고 있다. 그런데, 좀 양상이 다르다. 기독교 외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다. 즉, 내부적 오해가 심하다. 그렇다 보니,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자꾸 산으로 간다. 기독교 신앙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려면, (성경과 기독교 신학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 진실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날마다 새로우신 주님을 붙들고, 신학을 계속 갱신할 때만 가능하다. 옛 것에 머물러 있으며 시대 정신의 발목을 잡는 우매한 신앙인이 되는 일은 안타까운 것이다. 새 것 안에서 시대 정신에 발맞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멋진 기독교 신학/신앙인이 되면 좋겠다. 우리 교회가 이런 작업들을 해 나가는 멋진 교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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