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4.11.17 묵시
  2. 2024.11.13 성장하고 돌아왔습니다
  3. 2024.11.10 성육신: 여기 함께 있음(Presence)

[묵시]

묵시는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은밀히 해석하는 장치이다.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대놓고' 해석하면 권력자들에게 핍박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묵시라는 장치를 통해 불필요한 핍박을 피해 '은밀하게' 정치적 사건을 해석한다.

묵시는 역사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도와준다. 역사는 인간의 관점에서 서술되지만, 묵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묵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두 개의 눈이 필요하다. 역사를 보는 눈, 그리고 묵시를 보는 눈. 즉 이 땅에서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을 보는 눈과 그 이면에 흐르는 진리/진실의 상황을 보는 눈이 그것이다.

성경은 묵시 장치를 아주 잘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다니엘서가 있고, 마가복음이 있고, 또한 요한계시록이 있다. 다니엘서의 묵시는 다른 두 성경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니엘서는 안티오쿠스 치하 그리스 법정에서 피고가 되어 핍박 받는 유대인들에 대한 묵시이다. 다니엘의 묵시 환상은 유대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정의로운 더 높은 법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의 불의한 법정에 의해서 유죄로 선고 받았어도 유대인들은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묵시가 필요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싶다. 역사는 늘 권력자들의 횡포 때문에 정의가 왜곡되고 의인이 핍박을 받으며, 법정은 늘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예로부터, 역사는 묵시를 필요로 했다. 묵시 없이 역사는 바르게 해석될 수 없었고, 묵시 없이 역사에 저항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묵시 없이 요즘 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어떻게 직면할 수 있는가. 

한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권세자들 앞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은, 인자의 법정에서는 창피당할 일이다." 물론 반대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권세자들 앞에서 유죄를 받으면, 인자의 법정에서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권세자들의 법정에서 유죄를 받았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권세자들의 법정과 비교될 수 없는 진정으로 정의로운 더 높은 법정이 있다. 이런 묵시적 안목을 가진 자는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갈 것이다.

그대여, 힘을 내시라.

Posted by 장준식

[성장하고 돌아왔습니다]

호머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이우스가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겪은 일을 기록하고 있죠. 긴 여행을 마친 오디세우스는 여행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오디세이우스는 여행을 통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영웅이 갖춰야 할 덕들을 모두 갖춘 인물로 거듭납니다. 여행은 오디세이우스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별히 바다에서 만난 사이렌과의 대결은 오디세이우스에게 절제와 인내의 덕을 안겨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이렌은 커피 업체 스타벅스의 상징이기도 하죠. 사이렌은 뱃사람들에게 큰 시련입니다. 그것을 물리친 뱃사람만이 진정한 뱃사람인 것이죠. 

여행은 참 신비롭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행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은 것이다”(The world is a book, and those who do not travel read only one page.). 사람은 여행을 통해 한 권을 책을 읽는 것만큼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일 겁니다. 여행을 하지 않으면 겉도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겠구요.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괴테는 특히 이탈리아 여행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여행>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죠. 괴테는 여행을 통해 젊음을 되찾는 기쁨과 영혼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저의 이번 한국 여행이 딱 그랬습니다. 이번 한국 여행은 이전 여행과 달랐습니다. 성장한 느낌을 받았고, 세상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좀 더 또렷하게 찾은 것 같았습니다. 한 권의 책을 썼고, 그 책으로 인해 사람들을 만났고,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을 통해 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참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차례 강연을 통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는 주제를 둘러싼 인문학/정치신학 이야기였습니다. ‘기후변화’는 화두일 뿐입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말, 제가 한 말이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달랐던 가장 중요한 이유,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제 말이 귀를 기울여 주시고 공감해 주신 이유는 제가 기후변화를 자연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론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인문학/정치신학으로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기후변화 문제는 인간을 깊이 관찰하고 돌아보고 재구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장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지만, 결국 인간의 한 존재인 저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저는 인간이고,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참 가련한 존재입니다.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존재. 그것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더 진지한, 그리고 더 애정 어린 연구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성경도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가련함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주 새로운 깨달음이기도 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이것은 곧 호모 사피엔스의 한 개체인 저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그 종에 속한 개개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우리에겐 어떤 가련함과 어떤 희망이 있는지, 깊은 사유를 통해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곧 대림절입니다. 파멸의 운명을 타고난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시간 밖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 안으로 밀고 들어오시는 메시아의 구원일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희망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성육신: 여기 함께 있음(Presence)]
 
드디어,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한강은 시인으로 먼저 데뷔하고, 다음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한강 작품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presence’(프레즌스)가 아닐까? 여기 함께 있음.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으며, 거기에 그들과 함께 있음. 이것이 한강 작품의 특징이자, 그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는 방식이고,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고, 결국 노벨상을 품에 안긴 원동력일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교회 밖 그리스도인’이라고 옮길 수 있는 용어다. 교회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특별히 문학책), 그런 경험을 종종한다. 이 작가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마치 교회를 다니는 사람보다 더 그리스도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강 작가가 딱 그렇다. 그의 작품에는 성육신의 감성이 흐른다. <채식주의자>는 고통 받는 여성과 함께 하는 작품이고, <소년이 온다>는 5.18 민주화항쟁을 겪으며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하는 작품이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에서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하는 작품이다. 즉, 역사를 초월해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안으로 들어와 역사 속에서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한 작품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우리는 어느새 이런 ‘역사’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신 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은 성육신 사건이다. 성육신 사건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성육신 사건은 ‘presence’(프레즌스), 즉 ‘여기 함께 있음’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교리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하며 안 된다. 성육신 사건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성육신 사건’(빌 2:1-11)에 대하여 진술하는 이유는 서로 평화롭게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이다. 자기 일을 잘 돌보고, 다른 이들의 일을 잘 돌보아, 나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만들어 주는 삶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의 원리이다. 다른 말로, ‘presence’(프레즌스), ‘여기 함께 있음’이다. 내가 나의 일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상태는 presence이다. 다른 말로, mindfulness라고 할 수 있다. 마음과 육신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잘 하지 못한다. 이게 잘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한다. 염려란 마음과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니까, 우리는 염려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잘 돌보는 것도 성육신의 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presence’(프레즌스)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음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인가. 나랑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 자리 함께 있어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을 두배로 만들어 주고, 슬픔을 반으로 줄여준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탄 이유는 그의 작품은 ‘여기 함께 있음’을 실천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아픔을 당한 이들과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섬기고 따르는 이유는 그가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쁨 가운데 거하는 복된 인생을 사는 길도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의 ‘여기 있음’을 생각하라. 몸과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염려하지 않고, 내 삶을 잘 꾸려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라. 다른 이의 아픔/고통과 함께 하라. 거기에 있어 주라. 아무 것도 안 해도, 그냥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서 아주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이렇게 성육신의 은혜가 우리 삶의 원리요 방편이 되어 모두가 따스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