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의 존재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라는 책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지를 간결한 필치와 깊은 사유를 통해 펼쳐 보여줍니다. 우리는 피곤합니다. 사람들은 ‘피곤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피곤할까요? 한병철은 우리가 경험하는 피곤의 뒷면에는 ‘긍정의 과잉’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긍정의 과잉.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던져봅니다. 정말 모두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긍정 과잉의 사회, 즉 피로사회에서는 ‘할 수 없다’는 부정어가 금기시됩니다. 긍정성 이면에는 성과주의(meritocracy)가 존재합니다. 성과를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보상을 해주고, 성과를 못 내는 사람에게는 ‘루저’(실패자)라는 낙인을 찍습니다. 사람들은 루저의 낙인을 받지 않기 위해 긍정의 힘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 영혼까지 갈아 넣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피곤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아주 교묘한 통치술입니다. 군부독재, 또는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는 ‘규율사회’로서 ‘해서는 안된다’는 부정의 방식으로 국민을 통제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해 보면, 하면 안 되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두발도 규정이 있었고, 귀가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통금시간), 해외 여행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체제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유롭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성과사회’로 ‘할 수 있다’는 자기 착취를 유발합니다. 외부의 세력이 성과를 내도록 착취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착취합니다. 성과를 못 내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그 결과 요즘 사람들은 피로가 극에 달하고, 우울증 등 신경성 질환 환자가 많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묘합니다.

 

이런 21세기의 비극적 풍경 속에서 사실상 신앙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습니다. 신앙은 성과를 내느라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고,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착취하는 ‘체제’를 간파할 수 있게 해주며, 더 이상 피곤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주고, 실제로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다른 비극을 경험합니다.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 신앙이 가장 배척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성과를 내기 위한 조건은 오직 몸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Fitness)에는 열심히 가도, 영혼을 위한 신앙은 등한시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몸을 위한 스프는 먹어도, 영혼을 위한 스프는 잘 먹지 않는 시대에 삽니다.

 

피로사회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과를 내느라 몸과 영혼을 모두 망가뜨리는 자기 착취를 멈추고 평안에 이를 수 있을까요? 한병철은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깊은 심심함’이나 장자의 ‘무용지용’의 철학을 제시합니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하지 않을 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쓸모없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교묘한 자기 착취의 메커니즘에 저항할 것을 주문합니다. 즉, 한병철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갈망합니다. 무위의 존재. 없이 존재하는 존재. 나의 바깥 것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바깥 것을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존재. 이런 존재를 갈망합니다. 한병철은 철학자라 철학적으로 새로운 주체를 제시했지만,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무위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착취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는, 그러면서 서로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는 존재. 신앙만이 이런 존재를 빚어내리라, 저는 믿습니다. 신앙을, 지키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