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천동설
사도행전 22장부터 25장까지 바울은 6번의 아폴로기아(변증/변명)을 한다. 변증이란 법정에서 제기된 고소에 대해 잘못이나 오류를 방어하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의 변증은 유대인 회당이나 이방인 위정자(정치인)나 권세자(권력자)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바울은 왜 무엇을 잘못했기에 유대인들/로마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그들 앞에서 아폴로기아(변증/변병) 할 수밖에 없는가? 여섯 번째 변증에서 로마의 고위 관료 베스도는 바울에게 비쳤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변증을 통해 바울에 대한 고소는 무죄로 밝혀진다. 바울과 복음은 무죄다.
그렇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기소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표면적인 이유는 율법과 성전에 대한 모독죄이다. 이것은 복음서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기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바울도 모두 유대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율법과 성전의 완성이다. 여기에서 충돌이 생긴다.
바울의 아폴로기아 내용을 보면, 자기 소개를 한다. 바울은 다소 출신이고,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교육 받은 바리새인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유대 전통에 열심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삶의 반전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계시 사건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나사렛 예수를 만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은 자기의 삶에 대하여 묻는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동안의 나의 삶이 뭔가 잘못되었고, 이제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인식한 것이다.
예수를 만난 이후로, 바울이 해야 하는 일은 ‘증언’이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예수는 죄 없이 죽으셨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게 아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삶을 열어주는) 칭의(은혜)이다.
처음에는 히브리말(아람어)로 아폴로기아(변증)를 하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유대인들은 갑자기 폭동을 일으킨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행 22장 22절). 누가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에게 동일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메시지를 말하자,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뜨리고자 했다. 이게 정말 이상한 거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바울도 이렇게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예수님과 바울에게 잘못이 있다면, 유대인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 아닐까? 이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려 들었을까?
성경에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은 ‘유대인 천동설’이다. 유대인은 세상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고, 그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율법주의는 민족적 종교 성격을 띄었고,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율법주의적 종교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유대인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 이것이 유대인 천동설이다. 무엇이든지 천동설은 문제이다. 우리는 자주 각종 천동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인간 천동설(인간중심주의), 백인 천동설(백인중심주의), 남성 천동설(가부장제), 기독교 천동설(배타적 복음주의). 천동설이 왜 문제인가? 중심에 있는 존재는 편하고 좋지만, 바깥에 있는 자들을 억압 받아 괴롭다. 천동설은 반드시 고통 받는 자를 생산해 낸다. 이것은 죄악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천동설을 깨는 작업이다. 복음이란 제국주의, 인간중심주의, 유대인 중심주의, 율법주의, 성전중심주의를 깨는 작업이다. 복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 사람과 사물(자연)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인간의 원죄는 자기중심주의, 자기집중을 일컫는 말이다. 중심과 주변을 만들어 지배와 착취가 일어나게 하는 거,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복음은 그러한 것을 인식하게 도와주고, 자기중심주의, 자기집중에서 벗어나 경계를 허물고 서로 평화롭게, 사랑하며 사는 삶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나의 존재 때문에, 주변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자기 중심성’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가. 우리는 천동설 때문에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고 산다. 나를 날마다 돌아보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날마다 죽는 훈련을 안 하면, 복음에서 멀어져 자기 중심적인 삶을 통해 주변을 어렵고 힘들게 하는 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복음은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기쁜 소식이다. 내가 ‘자기 중심성’, 천동설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가.
복음은 자기 중심주의(천동설)를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자기 중심성에서 오는 죄의 사슬을 끊은 것이다. 복음은 중심주의(자기집중)에서 벗어나, 더불어 평화롭게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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