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진실
바울 일행의 예루살렘 도착
바울 일행은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일과 같았다. 예언까지 있었던(행 21:10-11), 유대인들과의 필연적인 충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울의 일행은 이방인 교회의 대표들(우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방문은 예루살렘 유대인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만남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만남! 기독교의 역사적인 사건이다. 두 개의 주체가 만나는 사건이다. 기독교는 한 부류의 전유물이 아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주체적으로 키우는 것이다.
바울의 사역 보고
바울과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수장은 야고보)을 만난 이방 사역을 보고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다’ (19절) ‘낱낱이’는 ‘일일이, 하나하나’ 말했다는 뜻이고, ‘말하다’(엑세게이토)는 ‘해설’(exegesis)을 했다는 뜻이다. 행한 일에 대해서 그냥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신학적으로 해석해서 말했다는 뜻이다. 예를들어,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이는 마치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친 일과 같았다. 어느 교단도 하지 않는 일, 어느 유명 목사도 하지 않는 일은 요나와 같이 비둘기 같은 나, 힘없고 무명한 자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았다. 그래서 복되고 의미 있었고, 나 자신도 많이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바울이 행한 해설도 이런 것이었다. 특별히 그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 지역에서 행한 일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해설(신학적 진술)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함께 기뻐했다. 동일한 성령이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위로해 주시고 보듬어 주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게 모두에게 기쁨이 된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와 제안
이방 지역에서 들려온 바울에 대한 오해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배도하라고 가르치고, 할례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즉,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는 오해가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바울에게 율법에 따른 정결례를 행할 것을 제안한다. 바울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결례를 행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신학적 문제들이 있다. 아래와 같이 일목요연하게 표현해 보면,
1)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이방인들은 모든 율법의 조항을 지키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는다.
2)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버리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해 구원 받는다.
3) 이것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4) 그러므로,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것은 율법과 관련되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은 율법이 개입되지 않는,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의 길이다.
5) 구원은 인간의 관습이나 법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6)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관습과 법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7) 믿음은 참으로 전복적인 개념이다.
고소 당한 바울과 초대 교회의 과제
율법을 지키는 것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통해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했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바울 일행의 기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디아스포라)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고소하고 잡아들인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예루살렘 성에 있는 것을 우연히 본 그들은,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혔을 거라고 추측했다.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힌, 즉 신성모독죄를 범한 죄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복음을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교회의 과제는 바울과 복음, 그리고 유대인과 율법 사이의 깊은 오해를 푸는 것이었다.
21세기 교회의 과제
아직까지 율법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사유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본다. 안타깝다. 대형교회 중심의 보수교회에서 내세우는 이슈들은 대부분 율법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교회의 과제는 복음과 과학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이다. 이미 18세기 과학혁명 이래 치열하게 해오는 일이다. 물론 이 작업이 그렇게 썩 잘 되고 있지는 않다. 대표적인 논쟁인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이게 과학 시대에서는 작동을 잘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자꾸 ‘cultural stagnation’(문화 지체 현상/기독교의 생각이 세상의 생각과 괴리를 보이는 현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에서 벗어나, 현대성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현대성은 심층심리학과 현대 정치철학(인문과학), 그리고 뇌과학과 양자물리학(자연과학)이다. 현대 신학은 이런 것을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 신앙이 요즘 시대에 합리적일 수 있다.
오해에서 진실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오해를 받았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괴로웠다. 지금도 기독교 신앙은 매우 큰 오해를 받고 있다. 그런데, 좀 양상이 다르다. 기독교 외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다. 즉, 내부적 오해가 심하다. 그렇다 보니,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자꾸 산으로 간다. 기독교 신앙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려면, (성경과 기독교 신학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 진실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날마다 새로우신 주님을 붙들고, 신학을 계속 갱신할 때만 가능하다. 옛 것에 머물러 있으며 시대 정신의 발목을 잡는 우매한 신앙인이 되는 일은 안타까운 것이다. 새 것 안에서 시대 정신에 발맞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멋진 기독교 신학/신앙인이 되면 좋겠다. 우리 교회가 이런 작업들을 해 나가는 멋진 교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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