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12. 1. 09:51

유대인 천동설

사도행전 22장부터 25장까지 바울은 6번의 아폴로기아(변증/변명)을 한다. 변증이란 법정에서 제기된 고소에 대해 잘못이나 오류를 방어하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의 변증은 유대인 회당이나 이방인 위정자(정치인)나 권세자(권력자)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바울은 왜 무엇을 잘못했기에 유대인들/로마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그들 앞에서 아폴로기아(변증/변병) 할 수밖에 없는가? 여섯 번째 변증에서 로마의 고위 관료 베스도는 바울에게 비쳤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변증을 통해 바울에 대한 고소는 무죄로 밝혀진다. 바울과 복음은 무죄다.

그렇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기소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표면적인 이유는 율법과 성전에 대한 모독죄이다. 이것은 복음서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기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바울도 모두 유대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율법과 성전의 완성이다. 여기에서 충돌이 생긴다. 

바울의 아폴로기아 내용을 보면, 자기 소개를 한다. 바울은 다소 출신이고,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교육 받은 바리새인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유대 전통에 열심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삶의 반전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계시 사건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나사렛 예수를 만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은 자기의 삶에 대하여 묻는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동안의 나의 삶이 뭔가 잘못되었고, 이제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인식한 것이다.  

예수를 만난 이후로, 바울이 해야 하는 일은 ‘증언’이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예수는 죄 없이 죽으셨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게 아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삶을 열어주는) 칭의(은혜)이다. 

처음에는 히브리말(아람어)로 아폴로기아(변증)를 하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유대인들은 갑자기 폭동을 일으킨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행 22장 22절). 누가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에게 동일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메시지를 말하자,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뜨리고자 했다. 이게 정말 이상한 거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바울도 이렇게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예수님과 바울에게 잘못이 있다면, 유대인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 아닐까? 이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려 들었을까?

성경에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은 ‘유대인 천동설’이다. 유대인은 세상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고, 그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율법주의는 민족적 종교 성격을 띄었고,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율법주의적 종교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유대인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 이것이 유대인 천동설이다. 무엇이든지 천동설은 문제이다. 우리는 자주 각종 천동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인간 천동설(인간중심주의), 백인 천동설(백인중심주의), 남성 천동설(가부장제), 기독교 천동설(배타적 복음주의). 천동설이 왜 문제인가? 중심에 있는 존재는 편하고 좋지만, 바깥에 있는 자들을 억압 받아 괴롭다. 천동설은 반드시 고통 받는 자를 생산해 낸다. 이것은 죄악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천동설을 깨는 작업이다. 복음이란 제국주의, 인간중심주의, 유대인 중심주의, 율법주의, 성전중심주의를 깨는 작업이다. 복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 사람과 사물(자연)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인간의 원죄는 자기중심주의, 자기집중을 일컫는 말이다. 중심과 주변을 만들어 지배와 착취가 일어나게 하는 거,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복음은 그러한 것을 인식하게 도와주고, 자기중심주의, 자기집중에서 벗어나 경계를 허물고 서로 평화롭게, 사랑하며 사는 삶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나의 존재 때문에, 주변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자기 중심성’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가. 우리는 천동설 때문에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고 산다. 나를 날마다 돌아보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날마다 죽는 훈련을 안 하면, 복음에서 멀어져 자기 중심적인 삶을 통해 주변을 어렵고 힘들게 하는 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복음은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기쁜 소식이다. 내가 ‘자기 중심성’, 천동설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가. 

복음은 자기 중심주의(천동설)를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자기 중심성에서 오는 죄의 사슬을 끊은 것이다. 복음은 중심주의(자기집중)에서 벗어나, 더불어 평화롭게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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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12. 1. 09:50

오해와 진실

바울 일행의 예루살렘 도착
바울 일행은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일과 같았다. 예언까지 있었던(행 21:10-11), 유대인들과의 필연적인 충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울의 일행은 이방인 교회의 대표들(우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방문은 예루살렘 유대인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만남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만남! 기독교의 역사적인 사건이다. 두 개의 주체가 만나는 사건이다. 기독교는 한 부류의 전유물이 아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주체적으로 키우는 것이다.

바울의 사역 보고
바울과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수장은 야고보)을 만난 이방 사역을 보고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다’ (19절) ‘낱낱이’는 ‘일일이, 하나하나’ 말했다는 뜻이고, ‘말하다’(엑세게이토)는 ‘해설’(exegesis)을 했다는 뜻이다. 행한 일에 대해서 그냥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신학적으로 해석해서 말했다는 뜻이다. 예를들어,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이는 마치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친 일과 같았다. 어느 교단도 하지 않는 일, 어느 유명 목사도 하지 않는 일은 요나와 같이 비둘기 같은 나, 힘없고 무명한 자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았다. 그래서 복되고 의미 있었고, 나 자신도 많이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바울이 행한 해설도 이런 것이었다. 특별히 그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 지역에서 행한 일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해설(신학적 진술)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함께 기뻐했다. 동일한 성령이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위로해 주시고 보듬어 주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게 모두에게 기쁨이 된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와 제안
이방 지역에서 들려온 바울에 대한 오해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배도하라고 가르치고, 할례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즉,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는 오해가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바울에게 율법에 따른 정결례를 행할 것을 제안한다. 바울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결례를 행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신학적 문제들이 있다. 아래와 같이 일목요연하게 표현해 보면, 
1)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이방인들은 모든 율법의 조항을 지키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는다.
2)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버리지 않고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해 구원 받는다. 
3) 이것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4) 그러므로,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것은 율법과 관련되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은 율법이 개입되지 않는,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의 길이다. 
5) 구원은 인간의 관습이나 법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6)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관습과 법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7) 믿음은 참으로 전복적인 개념이다. 

고소 당한 바울과 초대 교회의 과제
율법을 지키는 것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통해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했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바울 일행의 기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디아스포라)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고소하고 잡아들인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예루살렘 성에 있는 것을 우연히 본 그들은,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혔을 거라고 추측했다.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힌, 즉 신성모독죄를 범한 죄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복음을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교회의 과제는 바울과 복음, 그리고 유대인과 율법 사이의 깊은 오해를 푸는 것이었다. 

21세기 교회의 과제
아직까지 율법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사유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본다. 안타깝다. 대형교회 중심의 보수교회에서 내세우는 이슈들은 대부분 율법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교회의 과제는 복음과 과학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이다. 이미 18세기 과학혁명 이래 치열하게 해오는 일이다. 물론 이 작업이 그렇게 썩 잘 되고 있지는 않다. 대표적인 논쟁인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이게 과학 시대에서는 작동을 잘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자꾸 ‘cultural stagnation’(문화 지체 현상/기독교의 생각이 세상의 생각과 괴리를 보이는 현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에서 벗어나, 현대성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현대성은 심층심리학과 현대 정치철학(인문과학), 그리고 뇌과학과 양자물리학(자연과학)이다. 현대 신학은 이런 것을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 신앙이 요즘 시대에 합리적일 수 있다. 

오해에서 진실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오해를 받았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괴로웠다. 지금도 기독교 신앙은 매우 큰 오해를 받고 있다. 그런데, 좀 양상이 다르다. 기독교 외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다. 즉, 내부적 오해가 심하다. 그렇다 보니,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자꾸 산으로 간다. 기독교 신앙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려면, (성경과 기독교 신학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 진실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날마다 새로우신 주님을 붙들고, 신학을 계속 갱신할 때만 가능하다. 옛 것에 머물러 있으며 시대 정신의 발목을 잡는 우매한 신앙인이 되는 일은 안타까운 것이다. 새 것 안에서 시대 정신에 발맞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멋진 기독교 신학/신앙인이 되면 좋겠다. 우리 교회가 이런 작업들을 해 나가는 멋진 교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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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9. 15. 08:47

[바울과 아볼로: 사역의 상호보완적 역할]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의 사역을 통해 신약 교회 성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역은 각각 개척과 양육의 역할을 맡으며 고린도 교회의 기초를 세우고 그 기초 위에서 교회를 강화시켰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과 배경을 가진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초대 교회에 있어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는 교회의 발전에 있어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함을 잘 보여줍니다.

 

1. 선교 여행의 교차점: 바울의 고린도 사역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그의 제2차 전도여행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아가야 지방 수도로, 다양한 문화와 철학이 융합된 대도시였으며, 상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사역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10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구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바울이 직면한 상황을 반영합니다. 사도행전은 이 장면을 통해 바울이 심리적 압박과 신체적 위험을 동시에 겪었음을 암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사역을 완수하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통해 단순한 전도뿐 아니라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은 행위(행 18:18)는 그가 나실인의 서원을 완수했음을 상징합니다. 민수기 6장에 따르면, 나실인의 서원은 일정 기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이며, 서원이 끝난 후 머리를 깎는 것은 서원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 사역에 대한 특별한 서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서원을 신실하게 지키며 그곳에서의 사명을 완수했음을 시사합니다.

 

2. 서원의 의미와 성경적 배경

바울의 서원은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여러 인물들의 서원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벧엘에서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며 하나님께 서원을 드리고(창 28:20-22),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통해 사무엘을 낳았습니다(삼상 1:11). 이러한 서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거나 중요한 사역을 수행할 때 드리는 헌신의 상징으로 작용했습니다.

 

서원이 단순한 약속을 넘어서는 깊은 신앙적 헌신의 표현임을 고려할 때, 바울의 서원 역시 고린도 사역에서 그가 느꼈던 깊은 책임감과 사명 의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서원의 신중함을 강조하는 다른 예로, 입다의 서원이 있습니다(삿 11:30-31).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달라는 서원을 드렸으나, 그 결과 딸을 제물로 바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서원이 얼마나 진지한 약속인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러한 서원의 전통을 신실하게 따르며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감당했고,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그의 헌신과 사역의 열매로 세워졌습니다.

 

3. 아볼로의 등장: 학자이자 겸손한 사역자

아볼로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끝난 직후 에베소에서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은 아볼로를 “말에 능하고 성경에 능통한 자”로 묘사하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헬레니즘 문화와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철학과 유대 신앙이 결합된 도시로, 아볼로는 그곳에서 학문적 깊이를 쌓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설교자이자 교사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세계에서 학문과 철학의 중심지로, 헬레니즘과 유대교가 융합된 독특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역 성경’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합니다. 아볼로는 이러한 배경을 통해 헬라 문화와 유대 신앙을 모두 깊이 이해한 학자였고,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처음에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지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되었습니다(행 18:26). 아볼로가 학문적으로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르던 것을 겸손히 배우고 받아들인 점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아볼로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고린도 교회로 파송되어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고, 고린도 교회에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4. 아볼로의 고린도 사역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을 감당했으며, 그가 그곳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나중에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파'가 생긴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교회 내 분파 문제를 다루며 자신과 아볼로 사이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자신을 ‘심는 자’로, 아볼로를 ‘물 주는 자’로 묘사하며, 이 둘의 역할이 상호보완적임을 설명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잘하게 하셨나니.”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 비유를 통해, 초기 교회의 사역이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협력과 헌신으로 가능하다는 중요한 교훈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씨를 뿌렸다면, 아볼로는 그 씨가 자라도록 물을 준 것입니다. 이러한 협력은 교회의 성장이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모든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5. 바울과 아볼로의 상호보완적 사역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고린도 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명을 감당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협력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불같은 열정과 결단력을 가지고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개척자였고, 아볼로는 따뜻한 인내심으로 그 교회를 돌보고 양육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통해, 교회의 성장에는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하며, 그 모든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고 강조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의 헌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상호보완적 역할은 오늘날 교회에서 여러 교우들이 각기 다른 은사와 사명을 가지고 협력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모델을 제공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잘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

 

이 말씀은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그들의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호보완적 협력의 상징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명을 감당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들의 사역은 오늘날 교회에 있어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며,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각각의 은사가 연합할 때 교회가 온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들의 각기 다른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다양한 사람들의 헌신과 협력을 통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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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9. 3. 06:17

고린도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8장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복음이 전해지는 데 중요한 거점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예루살렘, 안디옥, 고린도, 에베소, 로마와 같은 도시들은 초대 교회가 복음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들로, 각 지역의 선교와 교회 설립에 중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도 이들처럼 복음의 거점 도시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유대인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원래 로마에 살고 있었으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해 고린도로 쫓겨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린도는 여행자들과 군인들이 많아 천막 수요가 높은 곳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천막 기술자였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는 동종 업자이자 동족을 만나 반가웠을 것입니다. 이 만남은 단순한 사업적 연결을 넘어서, 신앙적 교제를 나누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 교회의 일원이었기에, 바울은 이들을 통해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에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핵심 메시지를 전하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극심하게 대적하며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역 패턴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거부당한 후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말씀에 사로잡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복음은 마치 수돗물이 터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복음에 불타오르는 마음을 가지길 소망합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름으로 보아 그는 로마 시민으로 추정되며, 회당 옆에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바울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며 복음 전파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회당장 그리스보도 온 집안 사람과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지역의 리더십이 힘을 합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8장 8절은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기록하며, 고린도 교회의 설립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주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사도행전 18:9-10)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얼마나 강력한 사역을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지지하시고 보호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탄생 이야기는 그 교회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의 만남, 고린도 지역의 리더십들과의 만남, 무엇보다 말씀에 불들린 바울의 마음,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고린도 교회를 바울에게 가장 애정이 가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언급된 중요한 교회입니다. 특히 고린도 전서와 고린도 후서에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논의하며, 그들의 신앙과 생활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발생한 분열과 혼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바울이 강하게 권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 전서 1장 10절에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며, 교회의 일치를 촉구합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떠난 후에도 다양한 도전에 직면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성도들이 성결하게 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애정과 그들에 대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그는 고린도 후서 11장 2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하며,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께 드리는 순결한 신부로 비유합니다. 또한, 고린도 후서 12장 9절에서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전하며, 그가 겪은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혜가 충분했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는 단순한 사역의 장소가 아니라, 그가 깊은 사랑과 애정을 가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는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돌보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르게 서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열정과 사랑으로 세워지고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소망하며, 우리 또한 주님의 일에 쓰임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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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29. 12:34

아덴에서의 사역

 

데살로니가에서 아덴으로 가는 여정은 바울에게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아덴으로 떠나야 했고,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기를 기다리며 아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고대 도시에서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광경을 목격하고, 마음 속에서 깊은 격분을 느꼈다. 성경 사도행전 17장 16절에서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다"라는 구절은 바울의 내적 갈등을 잘 보여준다.

 

아덴, 즉 아테네는 고대의 지식 중심지로서, 알렉산드리아와 다소와 더불어 세 개의 주요 대학 도시 중 하나였다. 바울 자신도 학문의 도시인 다소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시각이 변해 있었다. 그가 아덴을 보며 느낀 격분은 단순한 학문적 경멸이 아닌, 영적인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전에는 같은 학문적 기반을 공유했던 그가 이제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고, 아덴의 지성적 자랑이 우상 숭배로 변질된 모습에 실망했던 것이다. 이렇게 신앙은 뒤틀린 것을 보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그곳에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도 현대 사회에서 아덴과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다. 실리콘밸리처럼 지성의 중심에 있는 도시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높은 기술력과 지식이 넘쳐나는 도시일수록, 그 속에 숨겨진 위험성도 함께 존재한다. 바울처럼 지식의 겉모습 뒤에 있는 영적 문제를 간파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도 각종 사회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는 문제들을 간파하여 거기에 도전하는 신앙의 안목이 필요하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사역은 그가 다양한 장소에서 토론을 통해 복음을 전했던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마디로, 바울의 아덴 사역은 ‘토론 사역’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유대 회당에서, 그 후에는 아덴의 시장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공식 토론장인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했다. 아덴은 지성인들로 가득 찬 도시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같은 철학자들이 그의 논의 상대가 되었다. 이 철학자들에게 바울의 복음은 매우 새로운 가르침이었으며, 그들은 예수와 부활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신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31절까지 기록된 아레오바고에서의 연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섬기던 다신교적 신 개념을 넘어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로서의 인간(우리는 그의 소생이라),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을 전했다. 이 연설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지만, 기록상 집약되어 있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바울은 아마도 더 길고 자세한 토론을 통해 이 개념들을 설명했을 것다. 핵심은 아덴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새로운 신 개념을 제시하고, 그들의 신앙을 재고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아덴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조롱했다. 그들에게 예수와 부활의 개념은 너무나도 생소했고, 그들의 철학적 사고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회심했다. 그 중에서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니시오스, 다마리라 하는 여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바울과 깊은 영적 교제, 즉 코이노니아를 나누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인간적 친밀함을 넘어서는 영적인 교제를 의미한다. 이 교제는 하나님 안에서의 예배, 그리스도의 성찬을 나누는 공동체적 연대, 물질적 나눔과 상호 섬김, 그리고 정서적 지지를 포함하는 관계이다. 바울의 아덴 사역을 통해 이러한 교제가 발생했으며, 이를 통해 아덴에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한 것은 피난처럼 급하게 이루어진 여정이었으나, 그가 경험한 이 도시는 그의 사역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적인 도시였지만, 그곳에서 바울은 철저하게 영적인 갈등을 느꼈고, 복음을 통해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철학자들과 토론하며 복음을 전했으며, 그 결과 몇몇이 회심하여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아마도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니시오스와 다마리라는 여자가 아덴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아덴에서 시작된 작은 코이노니아는 복음을 중심으로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바울의 끊임없는 전도와 사역이 결국 영적인 결실을 맺었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오늘날 우리도 바울이 아덴에서 한 것처럼, 우리의 지역에서 코이노니아의 깊이로 들어가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실리콘밸리라는 첨단 기술의 중심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영적인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아덴에서 했던 것처럼, 복음을 중심으로 한 깊은 영적 교제와 사랑을 통해, 이곳에서도 강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바울이 아덴에서 겪었던 경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우리 주변의 문화와 세속적 가치들을 꿰뚫어보며, 하나님의 진리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코이노니아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공동체를 세워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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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21. 10:08

고귀한 자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 바울 일행은 적어도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와 누가이다. 사도행전 17장은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지고, 그곳에 교회가 탄생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복음이 전해지면 교회가 탄생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위대한 일이 복음이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대략 3주 동안 머물렀다. 3주 밖에 머물지 못했는데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기적이다. 이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사역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한 지역에 가면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먼저 전하고,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면 그 지역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갈등 상황 또한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과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기 질투하여 바울 일행을 죽이려 드는 유대인들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은 왜 시기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또는 구원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생각했다. 그런데 복음은 자신들의 전유물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상황에 적용해 보면, 열심히 일해서 모은 전재산을 빼앗기는 정도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겨우 3주만 머물렀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탄생에는 야손(Jason)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빌립보 교회’ 하면 루디아(Lydia)가 떠올라야 하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하면 야손(Jason)이 떠올라야 한다. 야손은 바울 일행을 환대(hospitality)했다. 야손은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놓았다. 이 때문에 야손은 곤란을 겪는다. 바울을 끌어내 관리들에게 데리고 가려했던 그 지역의 유대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들은 바울 대신 야손을 끌고 관리들에게 가서 그를 고발한다. 그 일 때문에 야손은 보석금을 물어야 했고, 다시는 바울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강압적인 약속을 해야했다. 이런 어려움 당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야손은 바울 일행을 환대했다. 환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 실천이다. 환대를 하면 그 환대를 통해 성령이 역사하신다. 창세기의 아브라함도 환대를 실천했을 때 이삭을 얻는 역사를 경험한다. 환대는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통로이다.

 

데살로니가 지역을 급히 떠나 바울이 당도한 곳은 베뢰아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 일행은 매우 특별한 용어를 사용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 한국어로 ‘더 너그러워서’라고 옮긴 말은 헬라어 ‘유게네스테로스’이다. 이는 ‘유게네스’에 비교급 ‘테로스’를 붙여 만든 용어이다. ‘유게네스’는 고귀한 자, 귀족, 고상한 출신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Eugene’이 여기에서 왔다. 한국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 ‘Eugene Choi’(최유진)였다. 선교사가 붙여준 이름이다. ‘위대하고 고귀한 자여!’ 드라마에서 ‘유진’(Eugene)은 이름대로 참으로 고귀한 삶을 산다.

 

바울 일행은 복음을 받아들인 베뢰아 지역의 사람들을 ‘유게네스테로스’라고 불렀다. ‘더 고귀한 사람들.’ 이 말은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비교한 것이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우들은 ‘고귀한 사람들’이고, 베뢰아 교회의 교우들은 ‘더 고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참 따뜻한 말이다. 고귀한 자. 귀족 같은 사람. 고상한 출신. 이것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차별적인 용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그 근방에 있던 베뢰아 교회의 교우들을 ‘고귀한 자’라고 불렀다.

 

이 호칭은 굉장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찬사를 받는 것일까? 약간의 실마리를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복음이 정말로 그런가를 탐구하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했다. 한 마디로, 이들은 복음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이런 진지함을 갖는 일은 쉽지 않다. 특별히 모든 것이 가벼워진 시대에, 복음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을 쉽지 않다. 우리 시대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베뢰아 교회의 교우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귀한 시대이다.

 

이들의 고귀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면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살펴보면 된다. 특별히,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 중 다음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Be joyful always, pray continually,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이것이 고귀한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기쁨이 있는 자.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만큼 고귀한 인생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쁨, 기도, 감사의 삶을 사자 고귀한 자이다. 고귀한 자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고귀한 자.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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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15. 06:03

빌립보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6장은 빌립보 교회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 데는 세 가지의 사건이 연관되어 있다. 루디아와의 만남, 귀신 들린 여종을 해방시키는 사건, 그리고 감옥 사건이다. 교회가 탄생하는데 있어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통해 교회는 탄생한다.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데 있어 처음으로 눈 여겨보아야 할 사건은 루디아(Lydia/리디아)와의 만남이다. 회당이 없던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기도 처소를 찾으러 강가에 갔다가 루디아를 만난다. 루디아의 만남 사건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문구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행 16:14)이다.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루디아의 집에 구원이 임하게 하신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서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 교회를 나오기도 하는 것이고,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서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마음이 열린 루디아를 통해 빌립보 교회는 시작된다.

 

두 번째 사건은 귀신 들린 여종의 해방 사건이다. 루디아를 만난 것도 기도 처소를 찾으러 가다가 인 것처럼, 귀신 들린 여종 해방 사건도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발생한 일이다. 무슨 일이든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는 것은 뭔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통로가 된다. 기도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낸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라고 한국어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를 그대로 표현하면, ‘퓌톤의 영을 가진 어떤 여자 노예’라는 뜻이다. 퓌톤은 오비디우스 신화에서 대홍수 후 대지가 만들어낸 괴물(뱀)으로 묘사된다. 그가 거주하던 산의 이름이 퓌토인데, 그 이름을 따 퓌톤이라고 불린다. 퓌토는 델피의 옛지명이다.

 

델피는 아폴로 신전이 있던 곳이다. 퓌톤의 영을 가진 여자는 아폴로 신전의 여사제로서 미래를 예언하는 일을 했다. 자신의 운명이 궁금했던 사람들은 델피 신전에 가서 퓌톤의 영을 가진 여사제를 통해 미래를 예언 받았다. 그런데, 델피까지 가지 않아도, 그 일을 하는 여자 사제가 빌립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자 노예는 매우 유용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이 여자 노예를 통해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 사제가 바울 일행을 가리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외쳤다. 이 외침은 바울 일행을 곤경에 빠뜨렸고, 참다 못해 바울은 그 여자 사제 안에 있던 퓌톤의 영을 쫓아낸다. 이 일로 여자 사제(여자 노예)는 억압과 학대와 착취로부터 해방되지만, ‘주인들’은 그 여자 노예를 통해서 얻던 이익을 박탈 당하게 된다. 좋은 수입원을 잃은 ‘주인들’은 화가 나서 바울 일행을 그 도시의 고위관리들에게 고발한다.

 

여자 사제 해방 사건 때문에 바울 일행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죄목은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하다.”(행 16:20-21)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이 이곳 빌립보 도시에서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꼼짝없이 감옥에 갇힌다. 그런데, 매를 받고 갇힌 그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와 찬송을 한다. 같은 감옥에 있던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의 행동에 감동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그들의 기도는 또 한번 신비한 사건이 발생하는 통로가 된다. 지진이 발생하여 감옥 구조물이 파괴되고 죄수들이 탈옥하기 용이한 상황이 발생한다. 감옥의 간수는 그 상황을 보고, 상부로부터 문책을 당해 처벌 받을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져 자결하려 든다. 그때, 바울은 크게 소리 질러, “우리 모두 여기 있으니 죽지 마시오!”하면서 간수를 위급한 상황에서 진정시킨다. 간수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간청한다. “선생님들이여(퀴리오이/주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간수의 간청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 가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신앙으로서의 구원에 대한 영적인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아주 실제적인 의미이다.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하였을 때 어떻게 법적인 처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바울과 실라에게 쏟아 놓는다. 그리고 법적인 처벌을 면하려면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텐데, 그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에는 이런 실제적인 요청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간구의 간절한 요청에 응답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간구의 요청에 적절한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예수를 믿는 영적인 구원과 더불어 아주 실제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를 듣고 감동한 죄수들을 다독인다. 도망 가면 간수가 처벌 받을 것이라고.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죄수들은 탈옥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 간수의 생명을 보존해 주었다.

 

이날, 간수가 받은 구원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예수를 믿어 영적인 구원을 받았어도, 죄수들이 탈옥했다면 간수는 상부로부터의 처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수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 구원은 이렇게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간수는 자칫 엄한 처벌을 받아 큰 화를 당할 뻔한 상황에서 구원 받았다. 그래서 간구의 기쁨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다.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나면서 아주 성숙하게 대처한다. 빌립보의 고위관리들이 직접 와서 바울 일행에게 사과하고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만약, 바울이 이렇게 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감옥을 나왔다면, 빌립보에서의 전도는 그냥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불법적인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빌립보의 고위관리들이 직접 와서 사과하고 바울 일행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바울 일행의 행보가 불법적인 일이 아니며, 바울 일행의 활동을 생겨난 빌립보 교회는 불법적인 단체가 아니라 합법적인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영적인 기쁨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실질적인 기쁨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평생 선교 사역의 가장 든든한 후원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기도는 배신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기도를 통해서 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가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다. 반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기도가 있다.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 기도가 일구어 낼 역사와 뜻밖의 사건을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또한 서로의 삶을 세워주고 풍요케 하는 것도 중요하다. 구원은 단순히 정신 승리나 영적인 기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주 실제적인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관념적인 기쁨이 아니다. 아주 구체적이다.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주님이 주시는 실제적인 기쁨을 경험하는 것, 이러한 삶 자체가 바로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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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8. 4. 11:53

성령이 하시는 일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증언이다. 복음서의 특징은 예수가 누구인지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예수(삼위일체의 성자 위격)를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후대의 신학자들이다. 성경은 예수를 개념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개념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철학의 용어를 써서 언어로 존재를 규정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예수의 영)에 대한 증언이다. 사도행전의 특징은 예수의 승천 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성령이 누구인지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이나 모두 똑같이 예수와 성령을 개념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줄 뿐이다. 사실, 예수와 성령은 개념을 통해서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존재가 그렇다. 인간 존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어떻게 한 인간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규정할 수 있는가. 어떤 존재는 사건을 통해서 경험될 뿐이다. 그 경험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존재를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나 성령이나, 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존재들에 대하여 성경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어떠한 공동체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교회는 이야기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야기 공동체이어야 한다. 교회는 성경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재료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공동체이다. 이야기가 많아야 좋은 교회이다. 이야기가 많아야 교회는 성장한다.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즐겁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 이야기를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성장하는 교회이다.

 

사도행전 16장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야기로 들려준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제1차 전도 여행지를 다시 방문하여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자 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들의 뜻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지역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워 나간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보면, 무엇보다, 성령은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사람에게 사람을 만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성령은 그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루신다. 바울 일행은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난다. 디모데는 제1차 전도여행 때 전도했던 인물인 듯하다. 사도행전은 디모데가 어떻게 전도되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디모데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몇 년 사이에 제자가 될만큼 신앙이 성장해 있었다. 그런 디모데를 바울은 데리고 전도여행을 하고 싶어한다.

 

디모데를 만난 덕에 바울 일행은 사역의 역량이 늘었다. 역량을 늘리는 것은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역의 역량이 늘어난 바울 일행은 성령이 이끄신 새로운 선교지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갔다(5절). 사명을 수행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바울 일행은 회당을 찾아 기도하기를 원했으나, 그곳에는 회당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강가로 갔고, 거기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난다. 루디아를 만난 덕분에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고, 평생 사역을 하면서 빌립보 교회로부터 큰 도움과 위로를 받았다. 우리에게는 ‘도반’(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또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보면, 성령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신다. 인간은 구체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존재이다. 성령은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공간에서 활동을 해야 하는지 제시해 주신다. 바울 일행은 제1차 여행 때 갔던 곳을 다니며 교회들을 보살피려고 했다. 그들의 움직이고자 했던 방향은 시계방향이었다. 그런데, 성령(예수의 영)이 그들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는데,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더러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이었다. (행 16:9) 성령은 우리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손과 발로 봉사해야 할지 알려주신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머무는 공간과 시간, 우리가 구체적으로 봉사하는 공간과 시간을 거룩하게 하신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보면, 성령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신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성령이 바울에게 알려주신 일이다. 성령이 알려 주시는 해야 할 일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일이다. 우리가 영어로 ‘ministry’라고 하는 용어를 한국어로는 사역, 목회, 사목 등으로 번역하여 부른다. 사역은 ‘구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교회에서 하는 일, 또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모두 ‘사역’이라고 부른다. 사역은 헌신이다. 사역은 나를 내어주는 일이다. 사역은 마음, 시간, 물질, 노동력 등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거기에서 해방 사건(구원 사건)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자리에서 우리를 내어주어 구원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한 일을 그대로 따라하는 ‘따라쟁이’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명문대에서 학생을 뽑는 기준은 ‘기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 기여할 줄 아는 사람이란 쓸모 있는 사람, 그리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뜻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관계 조율이 가능하고 동료와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부정의 분위기를 긍정의 분위기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앙인으로 세워지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과 잘 지내고, 동료 그리스도인과 잘 지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에 있든지, 부정의 분위기를 긍정의 분위기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사역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우리 모두 기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우리의 삶의 자리를,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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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27. 06:09

예루살렘 공의회: 환대를 열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제1차 전도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귀환한 바울과 바나나 일행은 전도여행에서 이룬 성과를 교회 공동체와 나누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몸을 추스르며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어떤 무리들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한바탕 소동을 겪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어떤 무리들은 안디옥 교회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 이방인들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 교우들은 이들의 한 수 ‘가르침’에 적잖은 반감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행 15:2).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진술이 그 당시 어느 정도의 충격적인 상황인지를 피부로 느끼려면, 우리 시대에 발생하고 있는 동성애 문제를 떠올리면 된다. 이게 보통 논란과 분쟁을 가져온 게 아니다.

 

율법의 문제는 바울 서신 곳곳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로마서에서도 할례와 절기, 그리고 음식 문제가 로마교회를 괴롭혔다. 로마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례, 절기, 음식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식별 장치처럼 작동했다. 이것은 구별인가, 차별인가. 구별과 차별은 맞물려 있다. 구별은 평등에 기반하지만, 차별은 차등에 기반한다. 구별은 ‘우리는 다르지만 나는 너랑 잘 지내고 싶어!’이지만, 차별은 ‘나는 너랑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너랑 밥을 같이 먹을 수 없어!’이다. 차별의 근본에는 구원의 문제가 깔려 있다. ‘나는 구원 받지만, 너는 구원 받을 수 없어.’

 

‘구원 받고 싶으면, 너는 나랑 똑같아져야 해!’ 배제와 차별, 그리고 폭력은 이렇게 발생한다. 우월감은 ‘나는 구원 받은 존재이고, 너는 구원 받지 못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병리적 생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 욕을 먹고 저항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구원을 둘러싼 우월감.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선교(전도)나 봉사는 시혜적(우월한 위치에서 베푸는 선행)이고, 폭력적(나랑 똑 같은 존재를 만들려고 하는 폭력과 억압)이다. 구원은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전혀 아닌데, 구원이 차별의 조건으로 작동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폭력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율법의 문제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 큰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진영 간에는 의견 충돌(dissension)과 공적인 논쟁(debate)가 있었다. 의견의 충돌이 있을 때 공적인 논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어떤 것을 결정하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 초대교회의 양대 산맥,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이 논쟁적인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연다. 예루살렘 공의회. 이것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공의회이다. 공의회는 보편적인 신앙을 도출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공의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편 신앙을 위해서 열심히 모였고, 치열하게 논쟁했고, 권위를 확보하여 선포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발생하는 문제들도 이런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유대 그리스도 진영은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적용해야 할 법이다. 할례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전력이다. 만약 유대 그리스도인 진영이 보편적인 지지를 받았다면,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대략적으로, 돼지고기를 못 먹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이방 그리스도인 진영은 베드로의 증언과 바울과 바나나의 증언,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의 설득을 통해 의견을 표출했다. 이 중 베드로의 증언이 인상적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제자들의 목에 멍에를 메어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구원 받는다고 믿는다”(행 1:10-11). (We believe that we are saved through the grace of the Lord Jesus, in the same way as they also are.) 베드로는 구원을 말할 때 유대인을 중심에 놓고 말하지 않고 이방인을 중심에 놓고 말한다. 이게 정말 인상적인 증언이다. 그들(이방인들)이 우리(유대인들)처럼 구원 받는 게 아니라, 우리(유대인들)가 그들(이방인들)처럼 구원 받는다. 비교 대상을 자기들(유대인들)로 삼지 않고 그들(이방인들)로 삼았다. 기준이 ‘내’가 아니라 ‘너이다. 놀라운 고백이다. 그렇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는다. 구원은 선물이다. 선물이기 때문에 구원은 결코 차별의 준거가 될 수 없다.

 

격렬한 논쟁이 있은 후,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 사항을 공포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행 15:28-29). 이것은 모두 그 당시 성행하던 그리스-로마 종교행위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렇게 결정한 것의 속뜻은 ‘누가 주님인가’를 분명히 하는 신학적 조치였다. 로마제국과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이끄는 신앙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 결정은 즉시 안디옥 교회(이방인들의 교회)에 알려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환대가 열린 것이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추가적으로 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 구원은 환대이다. 주님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이다. 환대는 이런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 시대는 환대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자기랑 똑같지 않으면(신분, 외모, 배움, 소유 등)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랑 똑같아지라는 요구와 저 사람이랑 똑같아지려는 욕구만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주님의 환대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이 시대의 불의한 풍파에 휩쓸려 요구와 욕구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볼 일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차별 가득한 세상에 균열을 내야 한다. 요구와 욕구를 환대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요구와 욕구가 아니라 상대방(타자/이웃)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구원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환대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와 생명이 달려 있다. 우리는 잘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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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25. 08:56

계시 없는 종교성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은 열매가 많았지만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 이들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루스드라에 도착했다. 루스드라는 제1차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만난다. 바울은 그를 고쳐준다. 그쳐 준 이유는 이렇다.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행 14:9).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태도(attitude)였을 것이다. 물론 그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겠지만, 그 모든 것이 태도였을 것이다. 태도는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태도는 배신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교육의 궁극은 좋은 태도를 갖는 것이다. 태도는 마음의 상태이다. 좋은 마음의 상태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도 결국 마음 상태이다.

 

참 좋은 일이 발생했는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무리들이 바울이 한 일, 즉 보행 장애자를 일으켜 세운 기적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의 현현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예배하려 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14:11). 무리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했다. 무리들 눈에도 바나바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였나보다. 바울은 앞에 나서 말씀을 전했으므로, 무리들은 그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령사 헤르메스로 인식했다.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숭배는 진지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

 

제1차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일을 이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장애인을 일으킨 기적이 발생했고, 다음으로, 그 일을 통해 바나바와 바울을 향한 무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은 반대자들에게 돌을 맞아 거반 죽을 뻔한다.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일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클라이맥스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내가 루스드라 사역을 제1차 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들을 예배하려는 무리들에 대한 바나바와 바울의 반응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을 신의 현현으로 생각하여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무리들을 보고 곧바로 옷을 찢는다. 유대인 전통에서 옷을 찢는 경우는 불경을 경험했을 때와 회개를 할 때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었다. 그들의 제사 행위는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에게 제사드리려고 한 무리들의 행위에 불쾌감을 느꼈다.

 

계시의 빛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어둠에 휩싸인다. 어둠에 휩싸이니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것을 숭배하려 든다. 어둠에 휩싸이니 숭배 받고 싶어 한다. 계시의 빛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는 일에 넘어가 쾌감을 느낀다. 다시 말해, 계시의 빛이 없으면, 엉뚱한 것을 숭배하거나, 자기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어느 쪽이든, 불경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다. 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둠에 휩싸여 엉뚱한 것에 마음이 빼앗겨 절하게 되고, 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둠에 휩싸여 자기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자기를 높이고 만다. 이것은 모두 생명의 파국을 불러올 뿐이다. 엉뚱한 것을 숭배하는 일이나 스스로 숭배 받는 일은 모두 교만이다. 교만은 심리적 용어가 아니다. 교만은 신학적 용어다. 교만은 엉뚱한 것을, 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교만이 가져오는 최고의 형벌은 자유의 박탈이다. 나의 바깥 것을 섬기는 것이나, 자기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내어놓는 것은 모두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계시)와 관련이 없는 것이 신(God)의 역할을 감당하려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불쾌감을 드러낼 줄 아는 영적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일 수 있고, 제도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어떤 제도가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어떤 국가가 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든다면, 우리는 단호히 불쾌감을 드러내야 한다.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와 관련이 없는 것이 신(구원자)의 역할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100%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 우리를 자기의 종(노예)로 삼으려는 개수작에 불과하다. 구원을 주겠다고 속삭이는 그 모든 것에 불쾌감을 쏟아 놓으라!

 

루스드라에서 큰 기적을 행하였지만, 또한 그곳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큰 박해를 받기도 했다. 바울은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들은 더베에서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며,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한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행 14:22). 믿음은 복음에 관련된 것이 아닌 것이 ‘구원자’를 자처하는 일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다. 계시가 아닌 것에 불쾌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믿음이다. 사실 우리에게 어쩌면 이런 믿음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계시가 아닌 것에 불쾌한 마음을 드러낸 믿음.

 

계시 없는 종교성은 눈에 보이는 것만 좆는다. 계시 없는 종교성은 쾌(좋은 것)만 있고 불쾌는 없다. 계시 없는 종교성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오직 좋은 것만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속임수다. 너무 형통하고, 너무 평화롭고, 너무 평안한 것만 좆지 말라. 십자가 없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쾌만 있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14. 11:27

아낌없이 주는 구원

 

제1차 전도 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첫 번째 설교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회당에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다음 주에도 또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던 이유는 평소에 회당에서 듣던 랍비 전통의 말씀과 달랐기 때문이다. 랍비는 율법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사람(예수)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도덕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사랑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죄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은혜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특별한 선택에 대하여 이야기 했지만, 바울은 보편적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복음은 사람, 사랑, 은혜, 보편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되고 드러난 하나님의 호의(generosity)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아낌없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의 요청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 다음 주에 회당에 가서 더 풍성한 복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더 풍성한 복음 이야기가 전해지자 복음을 거부하고 싫어한 무리가 생겨났다. 누가는 그들이 ‘유대인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전했는데, 그들은 왜 복음을 싫어했을까? 누가는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젤로스)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시기한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렇게 적대적 그룹을 드러낸다. 복음은 감추어진 잘못된 질서를 드러낸다. 사건이 발생하면 한 사람의 성품이 드러나듯이, 복음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낸다. 유대인들이 전한 말씀은 결국 구원을 주지 못하고 죄책감을 주고 차별했다는 뜻이다.

 

성경에 의하면, 복음은 원래 유대인들이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요 4:22). 이것은 유대인들의 허세일까?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못말리는 부분이 있지만, 신약성경은 유대인의 특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의 담장을 넘어 보편 시민(이방인/세계인)에게도 전해졌다고 선포한다. 신약성경의 특징 중 하나는 복음을 제일 먼저 듣고 돌이켰어야 할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바울의 첫 설교 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발생한다. 유대인들의 복음 거부는 바울과 바나바의 폭탄 선언으로 이어진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니 복음이 이방인들(세계인)에게 갈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한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이방인은 헬라어로 ‘에쓰네’이다. 워드 플레이를 좀 해 보면, 이방인은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원래 복음을 들어야 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으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제부터 자신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의 사도가 되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거부가 있었기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 때문에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탄생했고, 그로 인해 이방인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참 신비로운 일이다. 악한 것, 또는 안타까운 일을 선하게 사용하시는 지혜가 드러나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주는 권면은 이렇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 13:43).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한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권면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권면이었다. 그당시 로마 제국에 의해서 사람들은 지배받고 착취당하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에 협조하는 지배 세력에 의한 착취가 만만치 않았다. 빼앗기기만 하고 뭔가 채워지는 게 없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고 구원이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의 뜻은 “주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니 힘을 내라”는 위로의 말씀이었다.

 

우리 시대를 생각해 보아도 이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우리는 뭔가에 우리 자신의 삶을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사람들은 살아내느라 지쳐 있는 것을 본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고, 내가 나의 것을 잘 모아두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삶에서 낙오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살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존재하지 못하고 소유하느라 존재를 잃어버리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생명을 알뜰하게 챙기지 못하고 각자도생의 삶 가운데서 가까이 있지만 결코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살려고 애쓰는 이방인(에쓰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낌없이 주는 삶을 살라는 것을 말한다. 누가는 이러한 삶이 어떠한 삶인지 사도행전 2장에서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두려움과 부족함이 없도록 삶을 이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야 하는데 도리어 두려움과 부족함만 넘친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하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다. 인류는 한 번도 하나님의 사랑이 정치 원리인 적이 없었다고. 대신에 두려움과 부족함이 늘 정치 원리였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정치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을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탓에, 우리는 정치 원리가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매우 낯설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정치 원리로 작동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 이야기다. 이 나라를 이 땅 위에 가져오기 위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의 핏값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이 복음이 귀에 들리고 마음에 가 닿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낌없이 주는 구원이다. 주님께서 아낌없이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낌없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나누며 살자. 무엇이든지, 내가 가진 유무형의 모든 것을 아까워하지 말자.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구원의 삶이 될 것이고 이 세상은 구원된 세상이 될 것이다. 구원은 상상도 아니고 저 세상 이야기도 아니다. 구원은 오늘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낌없이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사는 것,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1. 00:53

바울의 첫 설교

ㅡ 부활이란 무엇인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된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사이프러스(구브로) 섬을 거쳐 소아시아 지역의 밤빌리아 버가 지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동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갑니다. 누가는 이유를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뭔가 좋지 않을 일이 발생한 것은 확실합니다. 나중에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바나바와 다른 루트로 전도를 나서게 된 이유는 (마가) 요한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 하고, 바울은 반대합니다. 결국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다른 루트를 따라 전도 여행을 나서고, 바울은 실라(실루아노)를 데리고 다른 루트를 따라 전도 여행을 갑니다. (마가) 요한은 베드로의 제자이자 통역사로서 사역을 감당했고, 나중에 마가복음을 썼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일어난 갈등을 보면 현실에서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쉬운 일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나바와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에 도착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은 그 지역에서 발생한 사역 이야기를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드디어 바울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 동안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나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는데, 사도행전 13장부터 바울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와 비교하기 딱 좋습니다. 스데반 설교는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며 아브라함 언약에 기대어 복음을 전했다면, 바울 설교는 출애굽에서 다윗 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며 다윗 언약에 기대어 복음을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장 초청으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첫 설교는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합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예수의 대적자로 강렬하게 등장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바나바에 의해 안디옥 교회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매우 궁금했을 겁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변했고, 바울은 첫 번째 설교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매우 궁금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바울 서신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익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이 행한 첫 번째 설교를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십상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설교를 장식하고 있는 용어들은 언약,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는데 이 세 가지 용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윗의 역사를 말하며 다윗 언약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를 세우십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고,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그 위에 세워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삼하 7:12-14). 바울은 이 약속이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과 부활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예수를 가리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선포는 시편 2편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편 2편은 이스라엘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선포하면서 사용된 말씀인데, 바울에게 여기서 ‘낳게 하심’은 부활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실 때 ‘낳다’라는 것은 생물학적 출생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낳다’(begotten)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신학에서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말할 때 결정적인 용어기기도 합니다. ‘낳다’라는 말은 높아짐, 즉 영화롭게 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승귀/glorification)의 의미를 지닙니다. 부활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다윗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이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죽은 후 땅 속에서 썩었지만, 예수는 죽은 후 땅 속에서 썩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세워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죽었다 살아난 존재가 아니고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오시는 분이고 새로운 시대의 통치자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개벽(開闢)을 말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실천입니다. 부활이 가진 이러한 심오한 뜻을 알지 못한 채, 부활을 그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일로만 생각하면 그리스도 사건이 가진 충격과 전복성을 간과하는 것이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첫 설교에서 부활이 무엇인지를 밝히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죄사함이고 다른 하나는 의(righteousness)입니다. 죄사함은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한 것에 대한 해방을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여호수아에 나오는 라합 이야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현질서)에서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빚을 갚지 못해 여리고성의 질서에 따라 창녀로 전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현질서)를 함락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그곳에 세웠을 때 라합은 더 이상 창녀가 아니게 되었고 도리어 다윗의 조상으로 등극했습니다. 라합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하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주홍글씨가 가슴에 박힌 자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숨죽여 살기에만 바쁘겠지요. 그러나 그 정죄를 풀어주는 죄사함을 받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은 현질서에서 죄라고 정죄 당하는 것에 대한 해방이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현질서에서 반복적으로 죄 지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근거로 삼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죄를 짓고 죄사함 받고, 이렇게 현질서 안에서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을 죄사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사함은 현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힘입니다. 죄사함은 현실에서 죄의 부채를 쌓게 하는 값싼 은혜의 방편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현질서로부터의 해방이고 새로운 질서에로의 도약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십니다.

 

의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에서 우리는 의롭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 나라(하나님 나라)의 시민(citizen)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법적 지위를 가진 자는 당당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법적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적 통치 아래 합법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미국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시민권이 없는 자, 합법적인 체류 신분이 없는 자는 당당하지 못합니다. 뭔가 쫄립니다. 조심스럽습니다. 불의한 일을 당해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했다가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의(righteousness)란 바로 이런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의로운 자는 당당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첫 설교는 복음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언약의 중요성,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선포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줍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부활을 너무 피안적으로 생각하고 부활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온 새로운 질서와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공중권세 잡은 자)이 보기에 굉장히 위협적이고 전복적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꾸 부활을 피안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부활은 죽은 다음에 발생하는 것처럼 왜곡시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불의한 질서에 대한 저항이고 전복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질서와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참으로 지축을 흔드는 하나님의 지혜요 위로입니다. 부활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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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23. 07:33

안디옥 교회와 미니스트리

ㅡ 미니스트리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13장에는 안디옥 교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장면 전환입니다. 그동안 예루살렘 중심으로, 그리고 베드로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이제 안디옥 교회 중심으로, 그리고 바울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안디옥 교회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가 바뀌었다는 뜻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열리기 시작한 이방 선교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방 선교의 장이 열린 것이고, 바울의 전도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목해야 할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초대 교회의 양대 산맥입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탄생했지만, 교회가 유대인 지경을 넘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안디옥 교회 덕분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복음의 보편성을 확보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한국인)도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겁니다. 안디옥 교회는 모든 (이방) 교회의 어머니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소개하는 사도행전의 구절을 보면 그곳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나열됩니다.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그리고 사울(바울).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요즘 말로 리더들을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간 것은 교회를 섬기는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소개하며 등장하는 용어들도 심상치 않습니다. 성령, 금식, 기도 등의 용어가 안디옥 교회를 묘사하는데 쓰입니다. 이러한 용어들은 교회가 세워지는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금식을 할 수 있는 만큼 집중력과 헌신이 있어야 하며,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안디옥 교회는 본격적인 이방 선교를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합니다. 이는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 교회처럼 든든해졌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도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조지아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이것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모든 것이 갖추어진 교회에 다니다 보니, 교회의 조직이며 활동들이 원래 그냥 그렇게 작동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개척을 통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회 조직이나 성가대, 여선교회, 선교활동 등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도 없이는 전혀 할 수 없습니다. 이점을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간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한 마음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미니스트리’(ministry)입니다. 미니스트리는 한국말로 사역 또는 사목이라 합니다. 개신교는 사역이라는 말을 쓰고, 가톨릭이나 성공회는 사목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역이나 사목이나 같은 말입니다. 미니스트리를 한국어로 옮긴 용어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의 안디옥 교회 사역 이야기에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여기서 ‘주를 섬겨’는 영어로 ‘ministering to the Lord’입니다. 영어로 ‘ministry’라 옮긴 헬라어는 ‘레이투르게오’(λειτουργέω)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거나 사회를 위해 공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니스트리(ministry)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공적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 공적인 일입니다. 미니스트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공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긴다는 뜻입니다. 미니스트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야 미국 정부에서 봉사를 할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 시민권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미니스트리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제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 나라의 공무원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의 공직자입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정체성입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체성을 가지면 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부모가 부모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육아를 잘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부모도 불행해지고, 누구보다 자녀들이 불행해지기 마련입니다.

 

공적으로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가치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공적으로 행하는 일은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미니스트리의 성격 자체가 그렇습니다. 교회의 일, 즉 그리스도의 일은 공적인 일이기 때문에 가치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가치 있고 의미 있기 때문에 신실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하는 자들은 ‘충성’합니다. 즉, 사역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요즘 보편적으로 교회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힘들어진 이유는 많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가지 이유를 찾아본다면, 미니스트리를 하는 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 사역을 하면서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고, 사역이 공적인 일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사역을 하면서 사사롭게 생각하고 사사로운 마음으로 교회를 출석하기 때문입니다. 사역이 사사로워지다 보니 교회 세습이 편만합니다. 사역이 사사로워지다 보니 시간 나면, 마음에 내키면 사역을 합니다. 미니스트리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어느새 미니스트리가 사사로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사롭게 군복무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군대 계급을 세습하거나 군대 자산을 세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군복무를 시간 나면 하거나 마음에 내키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미니스트리가 사사로워진 이유는 미니스트리에 대한 이해와 자기 정체성이 부족해서입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미니스트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니스트리를 신실하게 수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면서 안디옥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지시를 따라 이방 선교를 위한 선교사들을 따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니스트리를 신실하게 감당한 그리스도인들 덕분에 지금 우리도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미니스트리의 가치를 알아보고 미니스트리에 자원하여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미니스트리를 기쁘고 즐겁게 수행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내리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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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사역  (0) 2024.06.0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21. 05:55

기도는 살리고 교만은 죽인다

 

사도행전 12장은 헤롯 아그립바 1세 치하 때에 발생한 박해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가장 유명한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 때에 예수님을 죽이려던 헤롯 대왕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헤롯 가문에서 유대 땅을 계속하여 통치했기 때문에 헤롯이란 이름이 성경에는 계속 등장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통치자로서 자질이 한참 모자른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세 가지 정책을 폅니다. 바리새파 전통을 철저히 옹호하는 종교 정책과 예루살렘 북쪽에 새 성벽을 건설하는 등의 민족주의 정책, 그리고 그리스도인 박해 정책이 그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로마 정부를 등에 업고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수위를 높여 갑니다. 급기야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사도들) 중 몇 명을 처단합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처형을 당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소위 말하는 이너 서클에 있었던 제자 중의 제자입니다. 정황을 보면, 야고보는 잡혀 죽고, 베드로는 잡혀 감옥에 갇히고, 요한은 가까스로 피신한 듯합니다. 헤롯 왕은 리더십 붕괴를 시도한 것이죠.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 당했다는 뜻은 야보고가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리더십이 두드러졌다는 뜻일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잡혀 옥에 갇힙니다. 헤롯은 베드로가 탈옥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삼엄하게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그 감옥을 탈출합니다. 베드로의 탈옥 이야기는 영화 쇼생크 탈출보다 흥미진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탈옥 이야기에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출애굽 사건에 빗대어 표현한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탈옥하여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집에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탈옥을 표현할 때 ‘엑세일라토’라는 용어를 씁니다. 이것은 ‘밖으로 이끌어 내셨다’는 뜻인데, 출애굽기에서 사용된 바로 그 용어입니다. 여기서 exodus, 즉 출애굽이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출애굽 모티브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구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밖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압제로부터 베드로를 ‘밖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구원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구원은 억압에서 자유로 이동하는 운동입니다. 구원은 자유함입니다. 구원은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기본적인 개념을 아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뜬구름 잡는 용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자유를 줍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일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어떠한 것이든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세력에 저항합니다. 자유를 빼앗긴 자들과 함께 합니다. 빼앗긴 자유를 다시 찾으려는 일에 동참합니다. 구원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그곳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감옥을 탈출하여 ‘교회’(함께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갔습니다. 교회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오랜 기도였고,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을 탈출하여 도착한 곳은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베드로의 도착은 기도하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공동체를 꿈꿉니다. 우리 교회의 소그룹 모임을 재편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기도의 공동체 만들기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서로가 서로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간절히, 절박하게 기도하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곳을 마음에 품고 함께 간절히, 절박하게 기도하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기도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에게는 기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베드로를 살립니다. 기도하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살립니다.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기도하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기도의 반대는 기도하지 않음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교만은 죽입니다. 교만한 헤롯은 죽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십니다. 교만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교만은 최악의 대적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대적이고 교회의 대적입니다. 삶의 대적입니다. 교만은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장은 죽을 위기에 처한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나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동시에 승승장구하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갑작스럽게 죽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기도는 살리고 교만은 죽입니다. 교만한 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살지만, 교만한 자는 죽습니다. 기도와 교만은 대척점에 있습니다. 기도의 반대는 기도하지 않음이 아니라 교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는 살리고 교만은 죽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인생이 복됩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9. 10:06

바나바와 그리스도인

 

사도행전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각자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재와 더불어 제자들의 독립을 말하고 있고, 성령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합니다. 성령 강림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파격적인 나눔의 삶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스데반 이야기는 복음이 유대 땅을 벗어나 이방 나라로 전해지는 계시가 마련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러,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전개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표하고 고넬료는 이방인을 대표합니다. 이 둘의 만남을 통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담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죠.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고넬료와의 사이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보고합니다. 10장에서 발생한 일이 11장에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다시 진술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사도행전에 두 번 반복해서 기록됩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기록했다는 뜻은 그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별일 아닌 것 같고, 이전의 이야기들(성령 강림 사건이나 스데반 사건)에 가려져 별로 깊이 인식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꼽으라면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 자신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10장과 11장에 걸쳐 두 번 반복해서 그들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급진적/파격적(radical)인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나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주님(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고백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사건을 직접 경험했으면서도 복음을 유대인의 울타리 안에서만 전했던 것이죠. 그것은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들의 좁은 인식과 한계를 깨뜨려주십니다. 그 사건이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입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은 복음이 유대인(유대땅)의 울타리를 넘어서 보편적인 것이 되어 가는 과장 중 가장 결정적인 사건을 진술합니다.

 

현대인들은 복음이 유대인의 담장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유대인 중에는 그리스도교인이 별로 없습니다. 현재 그리스도교인의 대다수는 ‘이방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본인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본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복음이 유대인(유대땅)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이방땅)에 전해진다는 것은 개벽 같은 일이었습니다. 절대로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 ‘이것은 절대 있을 수 없어. 이러한 일은 절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실거야.’하는 그런 일이 발생한 겁니다. 복음은 진실로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입니다.

 

시대를 지나오며 복음이 우물 안에 갇혀 그 원래의 급진성과 파격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복음이 매우 보수적이고 진부한 것처럼 변해버린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안타깝고 슬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바로 복음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노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진술입니다(행 10:34-35).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지체들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을 때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행 11:3). 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은 단순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밥을 같이 먹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죠. 그런데, 요즘 (한국의) 개신교가 마치 그 ‘할례자들’이 된 듯합니다.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은 온데간데없고, 율법만 남은 듯합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무할례자들’을 향해서 무차별 공격을 하고, 비난하고 비방하고, 폭력을 가합니다. 마치 자신들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듯, 복음의 잣대로 ‘무할례자들’을 마음대로 정죄합니다. 복음을 들었으나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 반복되어 나오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 사건을 계기로 헬라인(이방인)에게도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있지 못하던 예루살렘교회(초대교회)의 제자들에게 성령은 그 의미를 좀 더 넓고 깊게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인의 담장을 허물고, 그것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가리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제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으로’ 그리고 ‘급진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해집니다.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인지한 예루살렘교회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 더 체계적인 복음 전파를 위하여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안디옥은 이방 지역입니다. 그곳에 바나바가 파송됩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첫 이방인 선교사인 셈입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착한 사람이요(he is a good man)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 초대교회에서 바나바만큼 칭송을 받은 인물이 드뭅니다. 바나바는 정말 멋지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더 멋집니다. 그는 이방인 사역을 위해서, 다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첫 파송을 받은 선교사 바나바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하여 이 일에 적합하다고 여긴 바울을 몸소 가서 데리고 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둘이 함께 안디옥 지역에 머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복음 전파 사역 덕분에 안디옥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안디옥교회를 향해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유대인들에게서 그리고 유대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서 그리고 이방땅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a follower of Christ’(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이 용어에는 이미 급진성과 파격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넘어서, 담을 허물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낭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새로움에 열려 있지 않으면,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넘어설 용기가 없으면, 누구든지 포용할 넉넉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택하겠다는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할지라도 세상에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이 급진성과 파격성이 사라지지 않고 꽃피우도록, 바나바처럼 바울처럼 주님께 쓰임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