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5. 06:40

화해 사역

 

요즘 TV 뉴스에서 대학생들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 대한 반전시위를 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시위 현장이 궁금하여 며칠 전 스탠포드 대학교 캠퍼스에 다녀왔어요. 스탠포드 캠퍼스 중앙에 가면 학용품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자리한 건물 앞 공터가 있는데, 그곳이 시위 현장이었습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반전시위 하는 학생들이 쳐 놓은 천막이었습니다. 그것은 Pro-Palestine 진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를 향해 전쟁과 학살을 당장 멈출 것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현수막 중에 이런 문구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Silence is violence”(침묵은 폭력이다). “No tech for genocide!”(학살을 위한 테크놀로지 반대!). “Jews say ceasefire now”(유대인들이여, 당장 휴전하라고 말하세요!). “Hands off Rafah”(라파에서 물러나라!).

 

이러한 시위 현장 바로 앞에는 수많은 이스라엘 국기와 미국의 성조기가 함께 꽂혀 있고 그 가운데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 납치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과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의자들이 놓여 있는 시위 현장이 보였습니다. 앞에는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행한 테러들을 보여주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같은 구역 안에 이렇게 상반된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여기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축소판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은 극단적인 양극화의 현장이었습니다.

 

현재 지구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양극화(polarization)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정치적 갈등이 폭등하고 있고, 경제권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갈려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볼썽사나운 풍경이 자주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이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단순히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표하고, 고넬료는 이방인을 대표합니다. 고넬료의 청함을 받은 베드로가 고넬료 일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 10:8) 매우 유대인 중심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고 유대인이 아닌 나머지 민족은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향해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유대인)와 고넬료(이방인)의 만남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4-19)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이었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둘이 하나 되게 하신 화평과 화목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을 일컬어 화해 사역이라고 칭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은 화해 사건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바로 이 화해 사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동일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을 통해 고넬료의 청함을 거절하지 말고 그에게 가서 그와 ‘교제’할 것을 지시받습니다. 고넬료는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을 통해 자신이 지내고 있던 가이사랴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도시 욥바에 유숙하고 있던 베드로를 집으로 청하여 ‘복음’을 들을 것을 지시받습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의 경건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큰 일(복음)을 들을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한 베드로에게 성령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베드로는 말씀에 힘입어 고넬료의 청함에 거리낌 없이 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만납니다. 가이사랴는 그당시 로마군대가 주둔하던 곳입니다. 거기에는 로마 총독 관사도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점령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은혜로운 만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매우 영적인 사건입니다. 정말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막힌 담이 허물어진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그의 집에 가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가 드디어 십자가 사건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왜 하나님은 그 죽은 예수를 사흘만에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는지, 이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화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구원을 단순히 죽음 이후에 천국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매우 축소시킨 생각이고 여러가지 인간의 욕망을 투영시킨 모자란 생각입니다. 구원은 이보다 훨씬 깊고 넓고, 무엇보다 현실적입니다. 구원은 다른 말로 화해(reconciliation)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의 능력은 화해입니다. 위에서 사용한 용어를 써서 다시 표현하면, 복음의 능력은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막혀 있어서 탈이 납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몸의 어느 부분이 막히면 병에 걸리거나 죽습니다. 마음이 막히면 인간관계에 탈이 납니다. 관계에 탈이 나면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발생하여 인간이 서로를 헤치고 죽이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우리의 영은 죽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인생이 아주 허무해집니다.

 

복음은 구원인데, 그 구원은 전인적입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모두 치유합니다. 막힌 담을 허물어줍니다. 몸이 화해하면 건강해지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마음이 화해하면 화평해지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영이 화해하면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우리의 삶 모든 것에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죽은 다음에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그 구원은 화해입니다.

 

우리가 요즘 경험하는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높이높이 쌓이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아픈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도 자명합니다. 복음은 화해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양극화 현상을 허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 사역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화해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우리 함께, 복음을 가지고 나가서 막힌 담을 허뭅시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4. 10. 02:36

[사마리아 성에 기쁨이 넘친 이유]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 발생한 대(大)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그리스도인들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선교는 전도자 빌립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같이 일곱 집사로 선택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빌립이 박해를 피해 처음 도착한 도시는 사마리아 성입니다. 그곳에서 빌립은 복음을 전했고, 빌립의 복음 전파 때문에 사마리아 성에는 기쁨이 가득 찼다고 성경은 전합니다.(행 8:8)

 

사마리아 성은 왜 기뻤을까요? 물론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기뻤겠지만, 그들에게 전달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던 사람들입니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뒤,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의 혼합주의 정책에 의해 이스라엘(유대인)의 순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사마리아 지역은 다른 민족과 섞여 다문화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유대인의 순수 혈통과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배척과 소외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성의 수가라는 동네에 살던 여인 이야기는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큰 기쁨을 얻게 되죠. 그와 동일한 역사가 빌립을 통해서 발생합니다. 배척당하고 소외당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처럼, 빌립의 복음을 통해 유대인들에 의해여 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역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복음이었습닌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되었다고 무시당하던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빌립의 사역을 통해 귀신이 물러가고, 병자가 낫고, 장애인이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역사들은 표적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이 받아들여졌다는 표적입니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이제 자신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던 것이고, 그러한 상태가 사마리아인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생명)의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발견합니다. 사마리아 성에 임한 기쁨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기뻐한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히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장애인이 치료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뻐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정말 핵심적인 복음입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 때문에 배척 받고, 병 들었다는 것 때문에 소외당하고, 장애가 있다는 것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사마리아인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당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러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복음이 이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차별하고 배척하면서 삽니다. 온갖 기준을 정해서 저 사람과 내가 같지 아니한 것을 증명하면서 삽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을 보십시오. 인종차별, 성차별, 경제적 차별, 노동자 차별, 장애인 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 차별 아닌 게 없습니다. 우리가 채택하여 경제의 기본구조로 사용하는 자본주의는 온갖 차별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자본주의 기본 정신은 ‘차별화’입니다. 더 뛰어난 것을 입증해야만 선택을 받고 성공합니다. 이것을 ‘경쟁’이라는 좋은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 사회는 우울증이 난무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차별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철폐하신 ‘차별’(막힌 담)을 허물고, 실제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누구든지 환대하는 것입니다.(엡 2:14)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만큼 큰 기쁨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귀신 들린 자가, 병든 자가, 장애 있는 자가 기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귀신 들렸기 때문에, 그들이 병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렸어도, 병들었어도, 장애가 있어도, 그들이 사람들에게 사회에서 따뜻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래서 그들이 일반사람들처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이 그토록 슬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만큼 큰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복음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삶에서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 나의 삶에, 그리고 너의 삶에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복된 삶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삶을 받아들여주는 복된 삶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넘치면 좋겠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기쁨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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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3. 24. 01:50

스데반 사건이 말해주는 복음의 핵심

 

스데반 사건의 보편성

스데반 사건은 스데반의 순교에만 너무 집중되어 그 사건이 말해주고 있는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일곱 집사의 선출을 마친 뒤, 스데반 순교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스데반의 특별한 사역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른 여섯 집사 모두 스데반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스데반 이야기가 대표격으로 소개되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극적이면서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 고난 당하는 일이 매우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스데반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보편’ 그리스도인들이 스데반처럼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현상을 계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

스데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전한 복음이 왜 헬라파 유대인 공동체와 충돌을 일으켰는가 입니다. 우리는 ‘왜’를 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 정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자,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합니다. 이 논쟁은 점점 과격해집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지만 스데반의 기세를 꺾지 못하자 불법과 폭력을 통해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아세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무엇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복음의 핵심을 만나게 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고소 이유

스데반이 야비하게 헬라파 유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막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말 그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유대당국에 고소를 하는데,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했다고 하면서 고소합니다. 스데반은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적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욕을 한 적도 없고 성전을 향하여 침을 뱉은 적도 없습니다. 스데반은 그냥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이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있다고, 헬라파 유대인들이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음이 뭐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특권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고, 자신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는 다른 처지의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민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무참히 깨뜨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통해 은혜의 보편성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은혜의 보편화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이유

복음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과 온 우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은혜의 보편성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진 특권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자 폭발합니다. 복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에 대하여 시기(jealousy)가 발생된 것입니다. 시기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시기는 반드시 폭력을 불러옵니다. 스데반이 죽게 된 이유는 복음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희생자가 된 것이죠.

 

복음과 죄악의 보편성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저 사람과 내가 같다는 평등성을 참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차별을 두어야 속시원합니다. 인간은 저 사람이 나랑 같아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내가 저사람보다 못하게 되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관계가 평등하면 불편해합니다. 오히려 차별이 발생해야 속시원해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교만, 즉 죄악에 대한 치유입니다. 복음을 삶에 받아들인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이 어떠한 특권을 불러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을 때 자신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책임을 그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이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들은 불의한 자가 되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전하고 싶었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과 죄인에게 동일하게 내린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처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복음은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기이한 현상

요즘 (기독교) 교회를 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파 유대인’이 된 것 같습니다. 마치 복음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도구인 양, 그리고 교회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는 양, 복음의 이름으로 다른 존재를 차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복음의 왜곡입니다. 성경을 신실하게 읽지 않고 자의적으로 읽고 해석하여 자기의 의(righteousness)와 기득권을 보호하고 자랑하는데 사용하는 범죄입니다. 복음은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들과 죄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녀노소, 자유인이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교회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차등 적용하여 사람들을 차별하고 정죄합니까. 우리 모두 복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감사하며, 힘껏 서로 축복해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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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3. 19. 09:41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

 

신약성경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발생한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제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제자는 헬라어의 ‘마세테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disciple’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는 ‘제자’를 ‘배우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시 소피스트들이 철학교사로서 대중적인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만들어 스승으로서 자신들이 행한 가르침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금전적인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러한 종속적인 관계가 마음에 안 들었던 소크라테스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민주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제자’를’ 함께 알아가는 동료(companion)’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세테스’와는 다른 용어, 즉 ‘헤타이로스’라는 용어를 통해 제자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 재정립을 통해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대가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제자 개념은 이보다 더 깊어집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한창 가르침을 주실 때 예수님의 가족이 방문합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온 것을 알립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런 후,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위의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의 제자 개념과는 확연히 다른 ‘제자’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란 ‘가족’입니다. 가족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제자의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6장은 이런 가족과 같은 제자들 사이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그들 가운데 헬라파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 대해 불평이 생겼습니다. 매일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헬라파 유대 사람 과부들이 빠졌기 때문입니다.”(1절b) 한 마디로, 제자 공동체에 ‘차별’(discrimination)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반 사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해도 기쁨이 없어지고 삶이 힘들어지는데, 가족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했으니 차별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 지, 그리스도교의 제자 개념에 비추어 보면, 정말 큰 일이 교회 내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지혜를 냅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구제(봉사/디아코노스)하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선발하는데,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제자들로 칭찬 받는 사람들 중에서 일곱 명을 선출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이 희미해지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지 못한 이들이 봉사의 자리에 있으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리더십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늘 충만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제자 공동체)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가족’입니다. 친밀한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제자를 생각하고, 교회를 떠올릴 때 ‘가족 메타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가족 메타포를 통해 표현됩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족만큼 친밀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족이 지닌 친밀한 사랑의 메타포를 떠올린다면,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현저히 부족한 요즘, 사회 곳곳에서 차별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취(미리 맛보기)이므로, 교회는 차별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별을 물리치고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많아지고, 세상은 더 따스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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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8. 6. 30. 09:59

 

아이 같은 지도자

(3:1-1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2:22). 이렇게 끝나는 말씀에 이어, 이사야서 3장 말씀은 이스라엘이 의지한 것들을 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가 이어진다. 무서운 말씀이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사람 높이는 것을 그만두라는 뜻이다.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사는가? 두터운 질문이다.

 

의지가 되는 것에 마음을 쏟는 게 인지상정이다. 의지가 되는 것을 우리는 소중하다고 여긴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하나님만 높다!” , 하나님만 의지할 가치가 있다는 선포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치 없는 것에 얼마나 매달리며 사는가.

 

이스라엘이 의지한 것들을 끊으시겠다는 선포에 포함되는 것은 양식과 물을 포함해,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인 용사, 요술자부터 군사, 재판, 정치, 행정, 종교, 기술 등 각 분야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지도자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손쉽게 이야기 한다.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러다 보니 양식과 물을 얻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양심을 팔고 신앙을 저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을 간구하지 않고 양식과 물을 간구한다. 하나님은 양식과 물을 공급해 주시는 분에 불과하다. 양식과 물을 주신 후, 하나님은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각 분야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에게 굽신거린다. 그들이 우리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친해지려고 재물과 시간을 쓴다. 그들과의 교제를 위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시한다.

 

양식과 물이 제거되고, 각 분야의 유능한 인재들이 모두 제거된 사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선지자는 계속 선포한다. 그 빈자리를 어린아이와 같이 우매하고 무능한 자들이 대신할 것이라 한다. 그러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학대와 폭력이다. 계층 간의 갈등의 증폭이다. 5절에 나오는 교만할 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브압박하다’, 혹은 공격해 겁먹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능한 인재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매하고 무능한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게 되면, 다스림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윗사람을 겁박할 정도로 사회가 무질서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 질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도 무너진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한 구절은 웃픈 현실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기 형제 하나를 붙들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우리의 우두머리가 돼 다오. 이제 이 폐허더미가 네 손안에 있다’”(6). 경제가 무너지니, 단지 겉옷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우두머리가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궁핍이 극에 달한 것이다. 겉옷 하나 가진 사람이 폐허더미를 어떻게 일으켜 세우겠는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허망한 것을 소망하는 이 현실이 웃프다.

 

양식과 물도 제거되고, 사회의 유능한 지도자들도 제거되고, 경제도 파탄나는 일이 왜 예루살렘과 유다에 일어났을까?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이영광의 눈을 범하였도다!”(8). 여기서 범하였도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마라반역적이다’, ‘도전하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마땅히 겸손하게 엎드렸어야 하지만, 그들은 그 앞에서 반역하고 도전했던 것이다.

 

구약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율법에 드러난다. ‘영광의 눈을 범했다는 뜻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그 율법과 반대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의 뜻에 도전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개념에서 의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율법을 지키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율법주의로 잘못 해석하면 안 된다. 여기서 언약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의로운 자, 의로운 행동이란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의로운 자로서, 율법에 근거하여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율법을 벗어나 반역적이고 도전적인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 지도자들의 자질과 상태에 대하여 문학적인 조롱을 한다.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12). ‘학대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가쉬누르다’, ‘압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백성을 압박할 만큼 힘을 가진 자들이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큰 조롱이다. 지도자들의 자질과 능력이 형편없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이 없는 자들이 백성을 압박할 만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인도자(메아쉐르)’아사르에서 파생된 말로, ‘반듯하게 가다, ‘(반듯하게 가도록) 인도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미혹하다로 번역된 타아방랑하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아사르타아는 매우 상반된 뜻을 지닌다. 그런데, 인도자란 아사르’, 즉 백성이 하나님의 길로 반듯하게 가도록 인도하는 자들이어야 하는데, 선지자의 질책을 받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지도자들은 타아’, 즉 백성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여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

 

성경의 비유는 문학적인 비유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이와 여자가 어리석거나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의 어리석음과 여자의 약함이라는 특성을 빌려올 뿐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약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아이와 같은 지도자는 지혜와 힘이 모자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바르게 인도하기에 부족하다. 아이와 같은 지도자가 백성을 압박할 만큼 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한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어리석음과 약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지도자를 세우는 백성들은 아이 같은 지도자를 걸러내는 분별력이 필요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6. 5. 5. 01:18

여호와의 전쟁

(39:1-20)

 

살수록 힘이 부친다. 전쟁이 따로 없이 사는 게 전쟁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이 전쟁같은 인생에서 승리와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삶은 투쟁이다. 히틀러 같은 사람도 자서전인 <나의 투쟁>을 통해 자신의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헤겔은 인생을 인정투쟁으로 보았다. <리바이던>에서 토마스 홉스는 인생에 대하여 이런 말까지 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세상에 던져지는 순간, 투쟁은 인간의 숙명이 된다.

 

성경에는 참으로 기괴한 예언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 인자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39:17).

 

이 말씀은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중에 나오는 예언이다. 에스겔 36장과 37장 두 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시고, 회복된 이스라엘을 침략한 곡과 이방동맹군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신다. 하나님은 회복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대적하여 이스라엘을 대신해 전쟁에 나서신다. 자기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전쟁에 나서는 것을 여호와의 전쟁(Divine War)’라 부른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제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였기에 그들은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이 되었다(38:11).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침략하려는 곡과 그의 동맹국들에 맞서 이스라엘의 성벽과 문과 빗장이 되어 대신 싸워 주신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시는 전쟁에서 곡과 그의 동맹국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코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없다.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다. 이스라엘은 대적들의 침략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그들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진과 칼, 자연재해(전염병, 폭우, 큰 우박, , 유황)를 들어 곡을 물리치신다. 대적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이루어져 곡의 군대는 전멸하고, 이스라엘은 전멸한 곡의 군대를 수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곡의 군대가 전멸하며 남긴 무기를 불태우는 데 7년이 소요될 것이며(39:8-10), 죽은 시체를 처리하는 데 7개월이 걸릴 것이다(39:11-16). 7년과 7개월, 이렇게 ‘7’이라는 숫자를 동원하는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에스겔 39장에 등장하는 기괴한 이야기는 전쟁 같은 삶을 사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기괴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되는 삶의 풍성함을 전하고 있다. 패배한 곡의 군대는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서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된다. 레위기의 제사법에 보면, 화목제물은 제물을 드린 자가 제사장과 이웃들과 더불어 드린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축제를 벌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인생은 전쟁터이다. 어떻게 전쟁 같은 인생에서 승리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 곡에 대한 심판의 말씀은 그에 대한 해답을 준다.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겨,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전쟁을 대신 치르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고 승리의 비결이다. 그런 인생을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쟁의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된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리품이다. 하나님의 전리품이기에 그것은 거룩하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전리품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거룩한 일에 힘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어떠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나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치르시도록 나의 인생을 내어드려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여호와의 전쟁은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 그 잔치가 얼마나 풍성한 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용사의 살을 먹으며 세상 왕들의 피를 마시기를 바산의 살진 짐승 곧 숫양이나 어린 양이나 염소나 수송아지를 먹듯 할지라”(39:18).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싸우신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는 일은 투쟁이 숙명인 인간에게 최고의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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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5. 11. 11. 08:11

에스겔서의 하나님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본 환상은 매우 기괴하다. 그는 그가 본 것을 그의 인식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 표현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수행하는 네 생물의 형상이며, 그 옆에서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바퀴는 의 활동에 발맞춰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과 성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시다. 만약 하나님이 그곳에 갇혀 계신 분이었다면,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말았을 것이다. 제사장이었던 에스겔도 처음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성전에만 머무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졌을 때, 그 누구보다도 에스겔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절망이 깊을수록, 질문이 강렬해지고 응답이 간절해지는 법이다.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절망의 나날을 보내며 하루에도 수천 번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보며 에스겔은 질문하고 또 질문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절망은 죽음의 자리이기 보다, 오히려 희망의 자리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삶의 판도를 바꾸어 놓는 기적 그 자체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에스겔도 예외가 아니었다.

 

에스겔은 사방으로 자유롭게 방향을 전환하며 날쌔고 힘차게 움직이는 바퀴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유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어디 한 곳에 머무시며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상을 가져 공간에 갇히는 물체성이 아니시다. 요한복음의 예수께서 증거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영은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시다.

 

에스겔서 1장에 등장하는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루아흐로서, ‘바람, 정신, 의 의미를 갖고 있다. ‘루아흐는 창세기 2장의 창조설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렇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루아흐)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은 인간의 외형(appearance)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루아흐가 인간 안에 임했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제한하거나 손댈 수 없는 하나님의 영(루아흐)을 품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어디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성을 그 육체적 삶 안에서 마음껏 누릴 때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이 가장 불행할 때는 형상을 가져 공간에 갇히는 물체성에 그 육체와 영을 내어줄 때이다.

 

인간의 죄성이란 이것을 뒤바꾸어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현실에서 보는 인간은 행복을 찾는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끊임 없이 형상을 가져 공간에 갇히는 물체성에 내어준다. , 외모, 학벌, 사회적 지위, 명예, 권력, 차별성 등등등. 인간은 끊임 없이 이러한 형상에 갇히려고 안달한다. 그러한 것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 두지 않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이러한 것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 달라고 끊임 없이 하나님께 매달린다(기도한다). 이러한 것에 자기를 가두어 주지 못하는 신은 하나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영(루아흐)를 몸 속 깊은 곳에 간직한 인간인가, 아니면 영혼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죄의 노예인가?

 

하나님의 자유성을 체험한 에스겔은 비록 포로 신세가 되어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이방인의 땅에서 죽어갔지만, 그는 그곳에서 그 어느 것에도 자기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성을 누리다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갔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인간이었기에 절망의 상황에서도 무지개와 같은 희망 찬란한 삶을 살았다. 이 얼마나 아프지만 희망적인 인생의 드라마인가.

 

나도 인간이고 싶다. ‘형상을 가져 공간에 갇히는 물체성에 내 자신을 내어주는 일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자유성을 향유하는 바람 같은인간이고 싶다. 희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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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3. 1. 19. 01:49

1. 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 (욥기 1:1-12)

 

고난에 대한 명언들이 많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명언은 세 가지 정도다: 1) 고난은 가면을 쓴 커다란 행운이다 영국속담, 2) 고난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소포클레스, 3)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이 중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난에 대한 명언을 좋아한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고난을 좋아할 이유도 없다. 고난에 대한 명언들은 모두 고난을 미화(美化)’시키고 있지만, 명언들에서 미화되고 있는 고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대개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고난에 걸려 넘어지거나, 고난을 외면하거나. 고난이 아무리 주는 유익이 크다고 미화되고 있어도, 고난을 겪고 나면 인생에는 고난의 얼룩이 남게 마련이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게 되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인간은 되도록이면 고난을 피하는 것이 좋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고난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대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자꾸 묻곤 한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신앙이 위축된다. ‘내가 뭐 잘못했나?’ 영락없이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모든 고난을 죄의 문제로 치부하며, 결론을 회개로 이끌어 간다.

 

사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것만큼 고난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고난이 닥쳤을 때 무조건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이 고난을 거두어 주시며, 제게 다시 당신의 은총을 허락하옵소서하면 오히려 겸손해 보이고 신앙심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을 정당하게 이겨내는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내는 신앙적인방법 같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고난의 문제를 살짝 비켜가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한 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린 고난 중,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만난 적이 있는지를. 위의 회개의 기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부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얄팍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욥기에서 배운다. 욥기는 우리를 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고난을 당했을 때 가볍게 회개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온 존재를 다해 직면해서 그 고난에 임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을 가르쳐 준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고난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욥기에 나타나고 있는 고난의 영성은 대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난을 직면한다는 것은 현재 나에게 일어난 고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대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하면서 고난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마음만 상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을 겪으며 마음만 상한 상태로 그 고난을 시간 속에 묻어 둔 채 사는 것을 산전수전다 겪은 양 생각한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 유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고난의 기억은 나의 인생의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그림자만 될 뿐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온 몸을 다해서 그 고난을 우리 인생에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고난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게도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에너지가 바로 분노의 에너지다.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필경 범죄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은 인생의 고난에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잘못 다스려서 생긴 것들이다.

 

그렇다면 고난으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건전하게 풀 수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고난의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해야 한다. 신앙인은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노를 엉뚱한 데가 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자가 된다.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푼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탄원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대한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용서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좌절감의 표현을 방향 없이 허공에 또는 애꿎은 이웃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향하여 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고난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풀었다면, 이제 그 고난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차례다. 왜냐하면,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욥의 고백은 옳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기 2: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고난을 통해 겪는 고통이 가라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분노와 좌절이 절정에 다른 자리이다. 분노와 좌절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정적인 에너지의 끝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부활이 일어났다. 부활은 부정의 에너지를 긍정의 에너지로 바꾼 새창조의 사역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의식하기 시작할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 고난은 그냥 형벌로 남겨질 것이고, 그림자 같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는 고난을 통해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바로 이것을 봐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11. 17. 07:06

울게 하소서

- 눅 22:54-62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는 아주 유명한 아리아가 있다. 리날도의 연인 알마레나 공주가 적군에 포로가 되었을 때 부르는 아리아로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그것이다. 그가 부르는 울게 하소서아리아의 가사는 이러하다. “나를 울게 내버려 두소서 / 비참한 나의 운명이여 / 나의 (잃어버린) 자유에 난 한탄하네 난 한탄하네 / 이 비애가 내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해 주소서 / 그저 자비로서 / 나의 고통의… / 그저 자비로서 / 나를 울게 내버려 두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이여 / 나의 (잃어버린) 자유에 난 한탄하네 난 한탄하네

 

본문에서도 이렇게 비통하게 우는 자가 나온다. 바로 베드로다. 일찍이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러주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22:34). 이미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 한 때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종교지도자 무리들에게 잡혀 가실 때 무턱대고 그 뒤를 따라 대제사장 관저 뜰까지 따라 들어갔다.

 

그곳의 분위기는 그렇게 험악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서 몸을 녹이고 있었고 잡혀 온 예수님의 뒤를 따라온 베드로도 은근슬쩍 모닥불 주위의 사람들 틈에 끼어 들었다. 만약 대제사장 관저 뜰의 분위기가 험악했다면 그렇게 한가롭게 모닥불 가에 모여 몸을 녹일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닥불 주위에 이렇게 모여 있었다는 것은 그곳의 분위기가 그렇게 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위기가 험하지 않은데 베드로는 거기서 오버하고 만다. 어떤 여종이 베드로를 지목하며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펄쩍 뛰며 부인한다.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에게처럼 위협을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참 미스터리다.

 

마지막 세 번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본문은 이렇게 전한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이 진술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이지만, 매우 미묘한 상황을 전달해 주는 중요한 진술이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관저를 뛰쳐나가 심히 통곡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자기를 쳐다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고 베드로는 마음 속에서 뭔가 울컥했다. 만감이 교차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신앙인 가운데 주께서 돌이켜 보실 때예수님의 그 눈빛을 보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요즘 시대는 통곡의 눈물이 메마른 시대다. 악만 살아 있고, 눈물이 마른 시대다. 요즘에 사람들은 눈물도 소비적으로 흘리고 만다. 돈 몇 푼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억울한 심정을 소비적으로 표출하고 만다. 그 뿐이다. 눈물을 흘리고 나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쇼핑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듯이, 바로 그렇게 소비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나면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눈물을 흘리는 시대다.

 

그러나 베드로의 통곡의 눈물과 같은 눈물은 그 차원이 다르다. 통곡의 눈물은 우리의 죄악을 씻어주고, 우리의 교만을 씻어준다. 통곡의 눈물은 회개하게 하고, 용서하게 하고, 화해하게 한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회개하고 용서하고 화해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들은 회개, 용서, 화해의 눈물 흘리기를 꺼려한다. 아예 그러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를 멸시치 않으신다”( 51:17). 왜 우리의 영혼과 삶을 새롭게 하는 통곡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통곡의 눈물을 흘리면 회개가 일어나고, 용서가 일어나고, 화해가 일어난다. 회개, 용서, 화해가 일어난 삶의 자리만큼 새롭고 화평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통곡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 입에서 리날도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 통곡의 눈물을 흘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울게 하소서! 통곡의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에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복 있을지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5. 7. 02:16

아들에게 들려주는 히브리서 이야기 1

 

아들아, 이제부터 아버지가 네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눈과 귀를 아버지가 하는 말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너의 온 존재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10:17)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시면 우리는 들을 수 없고, 결국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이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께 온 존재를 다하여 반응하는 것이란다. 아들아, 이제부터 아버지가 네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온 존재를 걸어 들어야 하는 믿음의 행위란다.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을 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란다. 왜냐하면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서신을 누가 쓴 것인지 밝히지 않고 있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말씀이 단순히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은연중 보여주고 있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온 존재를 걸어 들어라!’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란다.

 

이 히브리서의 수신자를 보통 히브리서 공동체라고 부른단다. 히브리서에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단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지. 이 서신을 받아본 히브리서 공동체는 로마에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몇 가지의 상황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첫째로,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이들은 당황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 문제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단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 중에 얼마나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으로 얘기하신 것도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16:28). 이 말씀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둘씩 죽어가는 상황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이러한 심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초대교회 지도자들, 특별히 사도들은 무단히 애를 썼단다. 이런 말씀으로 위로한 구절도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사실 이 상황, 즉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은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있은 후 2000년이 훨씬 지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0년이란 세월 동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은 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아예 재림 불감증이 걸린 상태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지. 예수님께서는 안 오시는 것도 아니고 더디 오시는 것도 아니고, 지금 오고 계신단다. 예수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란다. 엘리야 선지자가 손바닥 만한 구름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비구름이 몰려 오는 것을 알아채서 준비 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란다.

둘째로, 히브리서 공동체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이유는 박해와 핍박이었다. 박해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학대 받는 것을 가리키는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 공동체에 학대 받는 상황이 그것이었단다. 이를 잘못 오해하면, ‘유대교가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단순 논리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되면 히틀러가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는 것이지. 이 상황은 절대 그런 상황이 아니란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핍박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교의 핵심 원리가 기독교의 핵심 원리를 잠식해 들어갔다는 뜻이다. 유대교의 핵심 원리는 율법이다. 기독교의 핵심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율법은 자기 의이고, 십자가는 은혜인데, 이 둘이 서로 충돌했다는 뜻이다.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를 집요하게 분석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란다. 그의 서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이 두 원리(율법과 십자가(복음))를 파헤친 깊은 신학적 논증이라고 할 수 있지. 율법과 십자가의 충돌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란다. 이것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와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문제야. 아마도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끝나지 않을 논쟁이 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서 이미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이 둘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가려내기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란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끝난 문제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아직 헷갈리는 문제라는 뜻이다. 아직까지도 기독교인들 중에는 십자가의 은혜로 살지 못하고, 율법의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기 의’,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의로운 존재가 되려는 마음이 바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기 때문이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늘 조심해야 한다. ‘날마다 죽지않으면 은혜가 아닌 자기 의로 살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쨌든 히브리서 공동체는 지금 십자가의 은혜로 살기를 포기하고 율법의 자기 의로 살아가던 때로 되돌아 가려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처음 믿은 바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서신이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다시 집중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정신이 흐트러지면 혼란을 겪게 마련이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듭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깨어라는 말은 정신 차리라는 뜻이란다. 한문으로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을 할 때의 상태이고, 속담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란 말에서 느껴지는 정신 차림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정신을 엉뚱한 데 팔게 한다. 초점을 흐트러뜨리고 목표를 교란시킨다. 결국 중간에서 포기하게 만든다. 그게 이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 히브리서 공동체에게 이런 세상에서 정신 차리고 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차려서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아들아, 히브리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도 이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정신 못 차리면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있음’( 3:3)을 유념하거라. 이것은 곧 재앙이요, 죽음이다. 이 사망의 위협에서 우리를 건져주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말씀이란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5. 2. 23:28

탄식: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성령을 연결시키는 고리

( 8:26-28)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진술을 들으면 기분 나빠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만사형통이라고 부르는 원리가 여기에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만사형통하게 된다는데, 이 말씀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주어진 로마서의 말씀은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탄식이라는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 이전에 줄기차게 인간의 탄식과 피조물의 탄식에 대해서 설명했다. 죄와 율법의 문제를 논하면서 우리 인간의 처한 상황이나 피조물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도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 없다.

 

탄식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소망이라는 두 요소를 동시에 내포한 행위를 가리킨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죄의 법과 성령의 법 사이에 놓여져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령의 법이 우리의 삶 가운데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여전히 죄의 법 아래 놓여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긴장감 가운데 있다. 우리의 현실은 죄의 법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당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성령의 법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처지에서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탄식의 기도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도할 때는 아프지만 기도가 끝나면 기쁨이 몰려오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탄식의 기도에는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소망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아주 힘이 되는 성령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이 탄식할 때 성령께서도 탄식으로 모든 피조물과 연대(solidarity)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탄식은 피조물의 탄식과는 성격이 다르다. 성령의 탄식은 인간(그리스도인)이나 피조물의 경우와는 달리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피조물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중보기도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 피조물의 연약함은 무엇인가? 우리의 연약함은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없는 무지함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이 상황에서 성령은 말없는 탄식(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한다. ‘말없는 탄식이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신다는 뜻이다.

 

근본적으로 성령의 일을 우리가 감지할 수는 없다. 성령은 우리가 흔히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영이 아니라, 무한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중보기도는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성령의 생각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내주하시는 성령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일치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입술에, 우리의 어깨에, 우리의 머리 위에, 우리의 발등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을, 우리의 어깨를, 우리의 머리를, 우리의 발등을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입술로 또는 어깨와 머리와 몸을 흔들며 격하게 기도할 수 있다. 거기에 경건함과 간절함이 실려 있는 것처럼 꾸며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전혀 경건하지 않고 간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기도를 외식하는 기도라고 한다. 이런 기도는 성령께서 전혀 말 없는 탄식으로 도와줄 수 있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오해한다. ‘말 없는 탄식으로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대충대충 기도해도 알아서 도와주실 거라고. 당신의 뜻대로 부름 받은 사람은 대충대충해도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거라고.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다. 기도할 때, 이 마음 속에 성령의 탄식과 통하는참된 탄식이 없다면 성령께서는 말 없는 탄식으로 우리와 연대하실 수 없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을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참으로 현재 받는 고난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가! 또한 그 구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이 마음 속에 참된 탄식이 있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현재의 고난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이 고난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그 마음이 창자가 끊어질 듯 하다. 또한 고난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면서 이미 구원 받은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기뻐한다. 피조물은탄식한다. 고로, 존재한다(구원받는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2. 25. 02:33

하나님은 안식이시다 레위기 25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일컬어 절대타자라고 부른다. 이렇게 절대 타자인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레위기 25장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안식이다.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규례를 담고 있다. 그리고 희년 정신에 근거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은혜롭게 자비를 베풀 것을 명령하는 규례도 더불어 담고 있다. ‘규례이기 때문에 딱딱하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사실 이만큼 따뜻한 규례도 없다. ‘안식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이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말씀 중 하나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는 단순하다. 안식일의 규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 규모만 다를 뿐이다. 안식년은 6년 동안 일하고, 일곱 번째 되는 해에는 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초점이 인간에게 맞추어져 있지 않고, ‘에 맞추어져 있다. 6년 동안 경작하고, 일곱 번째 되는 해에는 경작하지 못하도록 한 규례가 안식년 규례이다. 그러니까 안식은 기본적으로 땅의 안식을 의미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천지창조의 이야기 이후에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 여겨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6, 그리고 6년을 주시고, 7일과 제 7년은 당신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하신다.

 

이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일곱 번째 해에 땅을 경작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식년 규례는 이것을 가르쳐 준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요즘처럼 땅이 황폐화 되고, 육체가 황폐화 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생명처럼 되새겨야 한다.

 

기본적으로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땅이 상하도록 경작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인 동시에 몸이 상하도록 일하면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땅의 경작을 쉬면서 그 땅을 경작하던 인간도 덩달아 쉬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뜻과 무관하다. 이는 베짱이처럼 빈둥빈둥 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오해와 무관하다. 이는 인간의 내면적, 그리고 외면적 삶의 태도와 관련되는 매우 심오한 규례이다.

 

우리가 왜 땅을 상하도록 경작하고, 몸이 상하도록 일하게 되는가? 기본적으로 욕심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이든지 분에 넘치도록 가지려 한다. 이 세상의 삶의 법칙이 그렇다. 소유와 소비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통하여 땅과 몸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소유와 소비의 극대화 이면에는 땅과 몸의 황폐화가 따라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땅과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게 하는 것은 검소하게 살고 욕심부리며 살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청빈의 삶이 곧 안식을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이다.

 

청빈의 삶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만이 아니다. 청빈의 삶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안식을 체험하기 위한 영성의 길이다. 땅과 몸을 안식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소유와 소비를 극소화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청빈인 것이다. 땅이 안식을 누리게 되면 땅의 생명력이 되살아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몸이 안식을 누리면 생명력이 되살아나 영안이 열린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으로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신다. 우리가 안식한다는 것, 즉 쉼을 얻는다는 것은 몸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경험하는 최고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안식일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안식년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희년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쉬는 동안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놀라운 방식으로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경험했다.

 

현대인들에게 쉬는 문제는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현대인들은 쉬는 동안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쉬면서 생명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러했듯이 또 다른 소비에 물들 뿐이다. 현대인들은 안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이 세상이 이끄는 데로, 소비의 멍에를 짊어진 황소처럼 끌려 다니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레위기서 25장은 구원의 밧줄이 되어 준다. 소비의 멍에를 끊어주는 복음이 되어 준다.

 

하나님은 안식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안식은 신앙의 문제이다. 쉬는 것도 신앙이다. 물론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무작정 쉴 수는 없다.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땅과 몸이 상하지 않도록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을 꼭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의 신앙의 분량만큼 깨달아지고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신앙의 분량만큼 안식을 삶 속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각자의 삶 가운데 안식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만큼 넘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1. 21. 00:54

The present form of this world is passing away

1 Corinthians 7:29-31

 

This (plus this week's gospel reading) could prompt one to focus on things eschatological. If one's congregation has not recently (or ever) pondered the varieties of biblical eschatology, it might be an exercise worth undertaking. One thing to keep in mind, however, is that we do not have to settle on one variety of eschatology at the exclusion of all others. Several varieties coexist in the Bible, and the creation of the canon did not require any one to prevail over all others.

 

Briefly, one's eschatology could, with sound scriptural basis, consist of any or all of the following (each item is condensed and over-simplified):

 

Imminent Eschatology: Christ is returning soon. Watch, be faithful, be ready. (This passage, this week's gospel, Mark 13 and parallels, I Thessalonians 4, 1 Corinthians 15, etc.)

 

Realized Eschatology: The kingdom of God is already present among us. May the eternal life God makes possible in Christ be visible in our lives now. (Primarily the Gospel of John, though John also has elements of proleptic eschatology.)

 

Proleptic Eschatology: The kingdom of God is already present in some ways but not yet in its fullness. May that kingdom be visible in our love for God and our neighbor as we patiently wait for its future glory. (Particularly the Gospel of Luke, but throughout the gospels and the epistles.)

 

Prophetic Eschatology: The world is under the power of evil. Let God lead you to establish justice and righteousness in the earth. (Isaiah, Jeremiah, Ezekiel, Amos, Hosea, Micah, Sermon on the Mount (Matthew), Sermon on the Plain (Luke), parables of Jesus, etc.)

 

Apocalyptic Eschatology: The world is so much under the power of evil that only God's action will establish justice and righteousness in the earth. This calls for the patience and endurance of the saints. (Primarily the book of Revelation, although Romans 8, Ephesians 6:10-24, etc., fit as well.) (The distinction between prophetic and apocalyptic eschatology finds thorough exposition in Paul Hanson's, The Dawn of Apocalyptic.)

 

Each of these views has two parts -- a description of present and/or future realities and a call for us to respond in particular ways. In each case, whether or not one agrees with the description of reality, the various responses deserve reflection and, in fact, constitute common emphases in preaching throughout the year. Many congregations experience those emphases regularly without the eschatological underpinnings that accompany them in scripture.

 

If one chooses not to explore eschatology, one could focus on the last sentence, "For the present form of this world is passing away." This idea connects with another strand of thought woven throughout scripture, the transience and non-permanence of life and this world. It finds, perhaps, its most vivid expression in Ecclesiastes, which soberly and relentlessly describes human desires, plans, and schemes as "vanity" and "chasing after wind" (Ecclesiastes 1:14, then some variation appears over 25 times). And, the idea finds brief expression here.

 

This theme is not a popular one in contemporary, dominant American culture. News, popular, and social media continually focus on what we have or want. The advertising industry daily drives home the message that our purpose in life is to want, to desire, to seek, and to have -- most succinctly summarized in the bumper sticker "Born to Shop."

 

Life, according to our dominant culture, does consist in the abundance of one's possessions. If not that, it consists in abundance of relationships (How many Facebook friends do you have?) or the quest to find that one true soul mate who will make our lives complete. If not that, it consists in the quest to be ever happier, more beautiful, more handsome, more confident, and more successful -- as measured by one's money, job, clothes, appearance, house, happiness, and so on.

 

In stark and shocking contrast, Paul advises the married to be as if they have no spouse, mourners not to mourn, rejoicers not to rejoice, buyers to act as if they had no possessions, those who deal with the world as if they had no dealings with it. In this view, our relationships, current emotional state, and status in terms of the world's standards have little or nothing to do with the essence or quality of our lives. People -- even those we most deeply love -- will die, feelings will pass, and so will this world.

 

That being said, this is not a call to depression, despair, and retreat from the world. After all, Paul says these things in the context of our life in Christ. It is, however, an ultimate gut-check, an ultimate reality check. Our world -- at every level we can think of it -- is not as substantial, dependable, and unchanging as we would like it to be. We know this in our vulnerable moments; we live along its edges when we lie awake at night. Paul hammers it home, not for the sake of despair but for the sake of focusing us on the one, true, and ultimate reality upon which we can depend.

 

This passage cannot be faithfully interpreted without its larger context in 1 Corinthians and in the whole of scripture. But we too often let a "faithful" response gloss over life's most painful realities as if they are not real or they won't happen to us. As the saying goes, we prefer resurrection to crucifixion.

 

Yet, we can't really get to the statements in today's reading from the Psalms without this understanding from Paul. Until we've found ourselves in a time with no discernable place to stand, no shelter, no harbor, no friend, nothing that will really last, we can't truly say with the psalmist, "For God alone my soul waits in silence, for my hope is from [God]. [God] alone is my rock and my salvation, my fortress; I shall not be shaken" (Psalm 62:5-6).

 

Commentary on Second Reading by Frank L. Crouch


* 너무 좋은 주석이라 실어 봤다. 교회는 어서 빨리 '종말론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1. 14. 01:03

레위기 13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레위기 13장에 나타난 레위기서 저자의 관심은 무엇일까? 이는 분명 의학지식을 전달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대 의학의 지식과 상당부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레위기는 의학 매뉴얼이 아니다. 오히려 성결(거룩) 매뉴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레위기의 관심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우리는 레위기를 읽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레위기에서 구분하고 있는 정함과 부정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구분하고 있는 정함과 부정함은 철저하게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구분이다. 영어로 “ceremonially”의 정함과 부정함의 구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의 정함과 부정함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다음의 답이 따라온다.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러한 질문이 올 수밖에 없다. “어떠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인가?” 레위기는 바로 이것에 대한 대답이다. 그래서 레위기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사람인지를 세세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상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렇게 율법으로 정해졌다.

 

특별히 레위기 13장은 나병에 대한 구별법과 정함과 부정함을 구분하고 있지만, 이는 나병에 대한 의학상식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숙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레위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나병의 단어 차라아트는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그 나병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레위기에서 쓰이고 있는 차라아트는 전염성 피부병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일 뿐이며, 우리 성경이 그것을 나병이라고 번역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그 나병은 주후 6세기부터 나타난 병이라고 한다.

 

나병이라고 번역된 전염성 피부병이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이스라엘은 이렇게 거룩함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시니 자신들도 온전해야 한다는 신앙에서 비롯된 관심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보호했다. 전염성이 있는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진영 안에 머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전염성이 있는 병을 가진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곤란에 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변변한 의학상식과 치료기술이 없었던 고대사회에서는 공동체의 공중위생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처였다. 대단히 지혜로운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도 심심치 않게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무슨 옷을 입고 교회에 와야 하는가, 또는 머리에 물감 들인 사람이 교회에 와서 예배 드려도 되는가, 등의 문제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이 정장 바지를 입고 교회 출입을 하는 것을 나무라는 교회가 있었다. 여성은 꼭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또한 모자를 쓰거나 머리에 염색을 했거나, 행색이 불순한 사람은 교회에 드나드는 것에 눈총을 받았다. 이러한 것이 바로 레위기에서 말하는 정함과 부정함이다. 여성이 치마를 입지 않았거나, 누군가 머리에 모자를 썼거나 머리에 염색을 했을 때,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됐다. 그러고 보면 레위기의 정함과 부정함이 꽤 거창해 보이는 것 같아도, 실상은 별거 아닌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레위기의 정함과 부정함은 도덕적인 정함과 부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제의적인 것(ceremonially)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제의적으로(ceremonially)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하나님께 받게 되는 죄사함이나 축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죄사함을 받는 길, 그리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길은 성막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 드릴 때였다. 그러므로 제의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는 부정함을 지닌 사람은 매우 큰 곤란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함과 부정함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율법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 정함과 부정함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무슨 옷을 입고 와야 하느냐, 행색이 어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티격태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논쟁인지 알게 된다.

 

이것부터 확실하게 말해 두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정함과 부정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라는 질문이 필요 없어진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여기서 오해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구원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겠지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과 그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분명 다른 차원의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이것을 선행은총으로 표현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인데, 레위기의 언어를 빌려 다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정함과 부정함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교리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요즘처럼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때에는 더욱 그렇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게이나 레즈비언이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정죄하면서 그들을 막아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선행은총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무신 담을 왜 교회는 다시 쌓으려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열린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 길이 열렸다고, 그 길로 나아가라고 외치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는 충분히 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배타적인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할 입장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열린 길을 막아서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참으로 부질 없는 질문이다. 모든 이들이,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주인이나 종이나, 부자나 거지나, 피부색깔에 상관 없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상관 없이, 머리에 염색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상관 없이, 성적 소수자들일지라도,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하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29. 02:22

일곱 화의 선언
(
23:13-36)

 

마태는 숫자 7일 좋아한다. 귀신이 등장을 해도 일곱이 등장하고( 12:45), 비유을 해도 일곱 개의 비유를 들고( 13), 용서를 해도 일곱의 숫자를 들어 설명하며( 18:21-22), 형제를 등장시켜도 일곱 명을 등장시킨다( 22:25). 그러니 당연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를 선언할 때도 일곱 개를 내세운다. 일곱은 완전함을 뜻한다. 이러한 일곱의 숫자를 들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꼬집는 것은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위선과 잘못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위선과 잘못이 조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전히, 꽉 찼었다는 뜻이다. 굳이 얼마나 위선이 흘러 넘쳐났는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일곱이라는 숫자를 통해 위트 있게 표현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되는 화의 선언을 보면 이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화를 선언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이는 분명히 마태가 유대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것은 유대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가 아니라, 마태복음을 경전으로 읽고 있는 기독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처럼 보인다. 그 중 두 번째 화 선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화 선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힘써 얻은 교인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천국으로 인도하겠다고 불러놓고 결국 위선된 모습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이 형국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박하와 회향과 근초에 대한 십일조까지 드렸다. 사실 이는 율법에서 정하고 있는 십일조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까지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정확한 십일조를 드리려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그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종교적 경건 행위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그것을 토대로 유대 공동체 내에서 윗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말씀을 지키려는 그 마음이야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꼬집는 마태의 진술은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무엇이 신앙의 근본인가를 보여준다.

 

마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지적했다고 진술한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23:23). 여기에서 우리는 십일조의 정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이는 십일조는 원래 관계의 개념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다. 십일조는 관계를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어떻게 정확하게 드릴까, 즉 십일조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십일조를 통해 회복해야 할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자. 결혼할 때 반지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확인해 주는 징표에 불과하다. 관계가 핵심이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 관계가 좋으면, 그것을 확인해 주는 반지는 꽃반지가 되어도 무방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관계는 충분히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과 신부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이들 사이는 10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고 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인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데서 온 것이란 뜻이다. 올바른 관계는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표현할 수 있다. 올바른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한 거다.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는데 하나님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종교적 행위는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찰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표현해야 할 종교적 행위가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데 쓰이고 있으니 이것이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결국 율법의 요약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들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했던 것이다. ‘자기 집중’, 이것이 성경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원죄의 원형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다. 자기 집중’, ‘교만을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감추었으니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일 리 만무하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종교 행위의 탈을 쓴 그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뻔뻔하게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경전으로 읽고 설교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똑 같은 일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일이 그 위선과 잘못을 열거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알리라. 아직도 그 위선과 잘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 마태가 전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일곱 개의 화 선언을 꼼꼼히 들여다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지 보이리라.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독교인들이 또는 교회 지도자들이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저지르고 있는 위선과 잘못을 향해 이렇게 외치리라. “화 있을진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