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21. 01:14

골로새서

5.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라 (1:21-23)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있은 뒤, 골로새 교회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말씀이다. 위에서 설명한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골로새 교회에 이루졌다는 선포인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이 내 삶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본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내 삶에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관건이다. 이게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화해의 사역을 믿고 안 믿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믿는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난 일이 되는 것이 아니요,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안 일어난 일이 되지 않는다. 나의 믿음과 상관 없이 그리스도의 사역은 진리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그 진리가 내 삶에 효력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나의 응답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일컬어 존 웨슬리는 응답하는 은총(Responsible Grace)’라고 말한다. 이는 잘못 생각하면 구원의 완성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응답하는 은총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응답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하나님께부터 오는 것이다. 은총에는 응답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은총이란 책임 있는 것이고 무게가 있는 것이다.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가벼운 사항이 아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 만물은 그 은총에 필히 응답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사람마다 그 응답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그런데 그것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응답의 속도에 차이가 날 뿐,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응답의 속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에 더디게 응답한다고 한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정죄하거나 안절부절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나의 응답이 다른 사람보다 빨랐다면 그것에 합당한 감사와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 그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나의 응답이 빨랐다고 해서 내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잘 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는 것도 아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을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모두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중요하지 내가 보고 판단하는 나의 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남보다 먼저 은총에 응답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특권인 양 은총에 아직도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얼마나 손가락질을 해대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 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먼저 된 자나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 위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는일뿐이다. 여기서 거한다는 것은 일회적인 삶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을 의미한다. 복음을 들었으니, 그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창조의 사역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복음을 붙들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루는 복음 안에서 살고 하루는 복음 밖에서 살고 그러면 안 된다. 늘 항상 끝까지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 ‘굳게 선다는 말은 어떤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우리는 외부의 유혹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복음 안에서 잘 살아가다가도 주변 환경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흔들린다. 그러나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선 믿음의 사람은 주변의 어떠한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좌절하거나 절망하면 그건 이미 죽음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이 절망의 반대가 소망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절망하면 믿음에 머무를 수 없다. 절망하면 흔들린다. 흔들리면 흔들림을 따라 인생이 표류하게 되어 있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 우주의 중심이요, 우주의 창조자시요, 우주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화해했는데 무엇이 두려우리요? 죽음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다. 마지막 원수인 죽음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멸망시키셨기 때문이다. 죽음을 죽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붙잡고 살면 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5. 00:30

골로새서

4. ‘
이제의 시대에 속한 성도들 (1:21-23)

          
21
절은 짧은 구절이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과거가 다 들어 있다. 하지만 이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새사람이 된 현재 상태에서 바라본 과거의 모습이다. 이게 아니고서는 우리의 과거에서 감사를 건져낼 수 없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존재였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와 같은 상황이다.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난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의 행실도 바르지 못했다. 악한 행실로 인해 멀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악한 행실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나의 존재를 표현한다. 우리의 존재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존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고 이 원수된 마음 속에서는 악한 행실이 표출된다
. 인류의 역사를 보라. 얼마나 비열하고 처참한 일들이 많이 자행되었는가를! 지난 2차 세계 대전 중에 자행되었던 유태인 대학살 사건을 보더라도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아우슈비츠사건 이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은 멀리 있는, 우리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존재로까지 여겨졌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우리 인간의 마음은 악한 행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성도들의 이전 모습, 과거이다.

          
그러나 22절에서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시대를 일컫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다 준 사건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천동설을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코페르니쿠스가 천명한 지동설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혁명 정도가 아니다. 혁명은 원래 존재하고 있었던 진리를 새롭게 발견한 것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진리, 즉 새로운 창조이다. 패러다임은 또 다른 패러다임에 의해 파기될 수 있고 혁명은 다른 혁명에 의해 뒤집어 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리, 절대적인 진리, 새로운 창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룬 하나님과의 화해는 은혜의 사건이다
. 우리 인간의 어떠한 전제나 조건과는 상관 없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건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건이라고 해서 이 은혜를 받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 은혜는 은혜 받는 사람을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주체로 만든다. 은혜 받은 사람이 책임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은 거룩함, ‘흠 없음’, 그리고 책망할 것이 없는삶으로 나타난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물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인데, 하나님과 화해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시대인 이제에 속한 성도들은 은혜 받고 뒤돌아 입씻는 파렴치한이 아니라, 은혜에 책임적으로 행동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0. 02:23

골로새서

3.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권자이시다 (1:15-20)

           15절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우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기서 로고스 기독론이 나온다. 필로에 의하면 로고스를 처음 태어난 자로 불렀고, 이 로고스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세상은 로고스의 형상이다. 유대교의 지혜 문헌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플라톤적 사고와 구약성서적 사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와 지혜로 불려질 수 있게 되었다. , 그리스도가 로고스요, 지혜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재역할을 했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가 장자권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장자권을 갖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강조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장자권, 즉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도 피조물이라는 의미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교회 사에서 그 유명한 아리우스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약간 못한 존재로 표현한다. 이 논쟁으로 인해 탄생한 그리스도에 관한 단어가 호모 우시우스(동일본질론)’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고, 그리스도의 장자권은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이해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문제가 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처음부터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에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고백이 탄생할 수 있었던 절대적인 이유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체험한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부활의 체험에서부터 거슬러 예수가 누구인지를 인식했다는 말이다. 부활체험이 없었다면, 예수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기독교의 존재 근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거나 그의 삶 속에서 체험되어지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의 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다. 부활이란 종말의 사건을 이야기 하는 건데, 종말의 시간이 현재로 들어온 혁명적인 사건, 새창조의 사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종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1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피조물의 관계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다. 왜 그리스도는 창조 세계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여기서 안에서라는 말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 장소적인 의미, 둘째 도구적인 의미, 셋째, 관계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문맥상 가장 어울리는 의미는 세 번째,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교제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근거가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적으로 이러한 교제를 이루시고, 그러한 교제가 일구어낸 것이 바로 창조이다. 이 창조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구절에서 창조되었다단어는 두 번 등장하는데, 각각 단순과거형과 완료형으로 쓰였다. 여기서 좀 더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이 완료형으로 쓰인 창조되었다라는 단어이다. 언어에서 완료형이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창조의 사역이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의 완료형이 여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는 태초에 창조된 만물이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으로도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17절에서 이것에 대한 내용이 반복되고 요약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창조 세계는 질서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모든 만물이, 이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골로새 교회가 이단 사상에 공격 당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러한 것이었다. 창조 세계의 질서와 생명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영적인 존재들에 의해서도 유지된다는 이단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퀴리오스(주님)이시라는 고백을 무색케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이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영적존재들은 모두 피조물에 불과하다. 이는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숭배의 대상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숭배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인 세력을 무서워해야 할, 그리고 경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세상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 같은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나를 숭배하지 않으면 멸망 당할 거라고! 그 중 대표적인 존재가 맘몬, 돈이다. 돈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신자유주의 사상이 주님 노릇을 하고 있다. 사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 힘에 질식하고 그 힘에 무서워하며 그가 만들어 내는 질서와 생명 안으로 들어가려고 안달들이다. 그 질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낙오자여, 인생의 패배자요,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는 바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맘몬이 요구하는 풍요로움에 도취되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쯤은 파리 목숨처럼 여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분명하게 외쳐야 한다. 이 세상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맘몬이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러한 확신 속에 거하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충만해야 할 것이다. 어렴풋한 지식, 확신 없는 믿음 가운데 휘몰아치는 세상 세력과 어떻게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왜 오직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이해,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세상에 파묻혀 세상과 함께 멸망 당하고 말 것이다.

           18절 말씀에 의하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원래부터 진리는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머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주는 몸이고, 그리스도는 머리다. 몸은 머리의 통제를 받는다. 우주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땅에서 체험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또는 다른 존재에 기대어 존재를 꾸려 나가려 한다. 이 상태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이다. 죄란 근본적으로 어떠한 못된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향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으니, 그런 존재가 하는 모든 일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추악한 일들 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바로 교회이다. 교회에서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체험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겠다고 고백한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래서 이리 떼 속으로 보내진 양들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주권을 외쳐야 할 사명을 가진 선교 공동체이다.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 앞에서 머리를 들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과연 어떠한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깊은 묵상과 충실한 신앙고백만 있어도 교회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주권이 살아 쉼 쉬는데, 그 숨결로 행해지는 모든 일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모든 충만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옳은 해석일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요, 구원의 능력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이 모든 충만이다. 그러한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요, 새창조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 예수의 인성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역사에서 살다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의 제약과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신성에 맞닿아 있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역사의 이단 논쟁은 모두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고백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이 긴장관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엉뚱한 데로 흘러가지 않을 수 없다.

           20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화평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곧 화평과 화목의 피라는 말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법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서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온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 것인데, 존재의 근거인 그리스도를 떠나 어떻게 존재를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신앙의 편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칠 때 거기에는 폭력성이 담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갑자기 심판의 망치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폭력을, 이러한 정죄를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지, 배타적이고 특수한 개념이 아니다. 신앙에 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주 만물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이지, 개인의 믿음이 아니다. 내가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지고,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양빛이 싫다고 한들 태양빛이 가려지는가? 내가 숨쉬기 싫다고 한들 공기가 사라지는가? 이렇듯 하나님의 은총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내가 거부할 수도 없고, 내가 폐기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상태를 기뻐하시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우주 만물과 이루신 화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화평을 기뻐하시는 거다. 우리 안에 화해가 있는가? 우리 안에 화평이 있는가? 그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다. 그러니 그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선물을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화평 가운데 살아갈 것이요, 그 선물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안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명확해지지 않는가? 화평 가운데 거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화해의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4. 06:01

골로새서


2.
하나님의 용서는 선행은총이다 (1:9-14)


골로새서는
머리()를 희게 만드는(노새) 서신같다. 웃기는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야 이해되기 때문이다.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 그냥 지나치면서 읽을 수 없고, 묵상에 묵상을 거듭해야 이 말씀이 비로소 깨우쳐질 것이다(6).


이 단락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감사 기도가 담겨 있다
. 골로새 교회가 성령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바울과 디모데는 이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행위는 서로가 서로에게 중보기도 해주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행위이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기도할 수 있으랴!


골로새 교회를 향한 이들의 기도는 매우 근본적인 기도이다
. 잘 성장하고 있는 골로새 교회가 소망 안에서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돕는 기도이다. 이들은 기도하다구하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집중적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이다
. 하나는 하나님을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행일치
(
知行一致)라는 한자어가 이 두 기도 제목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 사건을 알아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폭력적으로 쓰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만물과의 화해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구원의 폭력적인 강요이다. 대중교통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외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폭력적인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는 것이다. 강요한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깨달아지는 신비에 속한 문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윤리적 행동에로 이끌린다
. 왜냐하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리적 행동이란 세상이 말하는 윤리적인 사람, 세상살이를 잘 하기 위한 윤리적 행동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새사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가 행하는 선한 행위, 윤리적 행동의 시금석은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말 그대로, 예수님처럼 살기가 새사람의 가치관인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건져내다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것은 구원사건을 의미한다. 이는 세례와 관련된 단어이다. 세례는 건져냄의 행위이다. 세례는 구원 사건에 대한 성례전이다. 보이지 않는 구원 사건에 대한 보이는 표시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구원의 영역인 빛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빛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성도라고 불리는 것이다.


흑암의 권세는 인간 현실에 처해져 있는 죄와 죽음의 세력이다. 인간 현실은 죄와 죽음으로 물들게 되어 있다. 인간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죄와 죽음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게 되어 있고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실행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악()을 생산해 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경험하는 바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하고 누군가를 사심 없이 도와주려고 해도 거기에서 선한 열매, 의의 열매, 행복의 열매를 맺기 힘들다. 그래서 그럴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죽게 되어 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 아들의 나라에서 살게 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한 일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선한 일을 행할 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죄악의 냄새가 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을 성령에 맡길 때 결국 최후 승리를 맛보게 될 거라는 희망 속에서 선한 일 하기를 그치지 않게 된다.


그 아들 안에서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궁극적인 사건은 속량이다(14). 속량은 노예나 포로를 무력이나 혹은 금전적인 대가를 치르고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채택된 단어이지,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항간에는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속전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마귀도 하나님 손 안에 있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손 안에 있는 존재에게 속전을 치르신다는 말인가! 이것은 이 단어에 대한 명백한 오해이다.) 속전을 치르고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 중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한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먼저 은혜로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관계 회복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회개하면 용서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다.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를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용서의 은혜를 보여 주는 사건이다. 십자가의 용서가 먼저라는 말이다. 십자가의 용서가 있었기에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용서)을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선행은총이다. 이에 대한 반응이 회개이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 우리는 회개할 수 없다.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된다. 회개에 대한 보상으로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 02:08

골로새서

 

1. 복음은 살아 있다 (1:1-8)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다. 이 교회는 에베소에서 만난 에바브라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이다.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기에 권위가 그만큼 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염려해서인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에 두고 있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을 보면 수신자 그룹이 자신에게 얼마나 신뢰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는 수준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여주었던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는 간단하게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만 소개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기까지 이른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의 사도됨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황상 골로새서에서 보이는 사도 바울의 자기 소개는 자신의 권위를 좀 더 설명해야 할 상황에 처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여지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사도라 불렀지만 자신과 동역하고 있던 디모데나 에바브라에게는 사도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사도는 통상 예수님께 직접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붙여지는 칭호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붙이는 일은 늘 문젯거리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바울이 자기 자신에게 사도의 호칭을 붙인 이유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사도는 없다. 사도들의 증언만이 있을 뿐이다. 사도들의 증언은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들의 증언에 따라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씌어진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의 증언이 진리인지 아닌지 가려내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된 계기는 이단사상 때문이다. 바울 서신의 대부분이 모두 비슷한 계기로 씌어졌다.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별히 유대교의 율법에 바탕을 둔 이단사상이 골로새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교회에 들어온 이단사상의 특징은 할례를 강조하고, 율법에 규정된 음식과 절기 및 안식일 준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왜 이단사상인가를 알려면 유대교 율법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하여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을 통해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둔다는 말은 부활의 초점에서 예수라는 실존 인물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은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승격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단사상을 물리치려면 올바른 그리스도론(기독론)을 정립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정체성이 흐려져 교회가 세상에서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 받는 경우를 살펴보면
, 기독론이 흐려졌을 경우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을 습관처럼 입에서 내뱉고, 예수의 사역의 트레이드 마크인 십자가를 부적처럼 여기 저기 달아 놓아도,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피상적인 수준에만 머물면 교회는 흔들린다.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골로새 교회가 이단사상에 흔들리고 있다는 말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부족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부족하면 이렇게 흔들리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신앙이 흔들릴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어두운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을 책망하지 않는다
. 오히려 그는 그들을 성도라고 부름으로써 격려하고 있다. ‘성도는 인격적인 탁월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역과 예배를 위해 구별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인격이 탁월하다고 해서 그를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인격이 탁월한 사람은 성인은 될 수 있어도 성도는 될 수 없다. 성도가 될 수 있는 길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과 당신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 따로 불러 세운 사람에게 성도라는 칭호가 붙여지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사귐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골로새 교인들을 일컬어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한다. 신실함은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 사람의 신실함이 드러나게 된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지금 신실함을 보여야 할 때인 것이다. 실신함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지만, 이단사상에 의해 고난에 처해진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있어 이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골로새 교회는 기도 제목이었다
. 문제가 있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잘 지어져 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믿음과 사랑이 충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의 인격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복음의 속성 때문에 그렇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다. 하늘의 기쁜 소식이 복음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복음도 살아 있다. 히브리서 4 2절도 그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사용한 언어를 풀이해 보면 그것이 더 분명해 진다. 바울은 복음이 열매를 맺어 자란다”(6)고 표현했다. ‘열매를 맺어라는 말은 복음의 내적 에너지를 암시한다. 즉 복음이 씨를 갖고 있는 식물처럼 본질적으로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유기체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확장을 의미한다. 복음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간다는 뜻이다. 누룩으로 인해 빵이 부풀려지듯이,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듯이, 그렇게 복음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유기체이고 생명체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복음이 뿌리 내린 곳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약속에 대한 소망이 자라난다. 바울은 에바브라에게서 골로새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들었던 것이다.

          
복음의 유기체적인 속성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 신앙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경험된다. 복음은 부활을 보여주지만, 현실은 죽음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씨앗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씨앗은 그저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복음의 속성을 깨달은 사람에게 씨앗은 더 이상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하지 않다. 그는 씨앗에서 커다란 나무를 보고, 새소리를 듣는다. 복음을 받아 든 성도는 현실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살아낸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1. 17. 02:15

신명기 22 1-4–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야만 하나? - 경제활동은 보장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먹고 사는 문제다
. 즉 경제활동이 가장 근본이다. 경제활동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강요되는 헌신은 모두 폭력이다. 경제활동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 간에 서로의 경제활동에 대해 보장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사명이 있는 곳에 경제적인 보상이 있기도 하지만
, 경제적인 보상이 있는 곳이 사명지(
使命地)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찬송가 중 가장 은혜로운 찬송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을 가장 왜곡시키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찬송이다. 부름 받았다고 해서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서 경제적인 활동이 보장되어야 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곳에 가지 않는다고 그 사람의 믿음이 형편 없는 것처럼 매도되는 것은 신앙의 폭력이다. 한국 교회에 이러한 폭력이 얼마나 많이 가해지고 있는가?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폭력은 어디다가 하소연 할 데도 없다. 모든 것을 믿음의 부족 탓, 기도의 부족 탓으로 돌리는 신앙의 형태는 분명 지양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지 생명을 빼앗거나 하찮게 하거나 부끄럽게 하러 오지 않으셨다.


본문에서는 서로 간의 경제활동을 보장해줘야 하는 의무가 명기되어 있다
. 여기서 나귀는 부유한 이웃의 소유를 말하고, 의복은 가난한 이웃의 소유를 말한다. 부유한 이웃의 소유라고 이것쯤 하나 없다고 그가 굶지는 않겠지하면서 몰래 취하면 안 되고, 가난한 이웃의 소유라고 이까짓 것하면서 하찮게 여기면 안 된다. 상대적 가치를 가지고 보면 안 되고, 절대적인 가치로 봐야 한다. 내가 임의대로 판단하면 안 되고, 원칙대로 판단해야 한다. 자신의 소유가 중요하듯이, 부유한 이웃의 소유나 가난한 이웃의 소유나 모두 소중한 것이다.


특별히 길에서 발견된 짐승이 누구의 것인지 몰라 주인을 찾을 때까지 보호해야 하는 규례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적극적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 보호 기간 동안 짐승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생명은 그 생명을 유지하는데 일정한 비용이 들어간다. 보호 기간 동안 짐승의 먹이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짐승을 보호해야 한다는 규례는 희생 없는 사랑의 실천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 따뜻한 명령이고 규례다
. 이 세상의 원리와는 다르게 공평하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규례다. 내 소유가 소중한 만큼 이웃의 소유도 소중한 것이다. 그 소유가 부유한 사람의 것이든 가난한 사람의 것이든 상관 없다. 서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보호하고 돕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 이웃 사랑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7. 23. 09:03
 신명기 21하나님 앞에서 성결하라!


신명기
21장은 5개의 규례를 담고 있다. 1) 미결 살인 사건 대속 규례, 2) 포로를 아래로 삼을 때의 규례, 3) 장자 상속권 보장 규례, 4) 패역한 아들에 대한 징벌 규례, 5) 사형수의 시체 처리에 관한 규례가 그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실정법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법을 문자적으로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의 법대로 산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때 그 시대에 적용됐던 것들을 이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결 살인 사건만 해도 그렇다. 요즘에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미결되는 살인 사건은 없다. 죽인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하여 암송아지를 잡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석해 내야 할 것인가?

 

신명기 21장에 나오는 5개의 규례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지기 위한 장치들이다. 살인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이다. 부정한 것을 성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의식을 치러야 하는데, 범인을 알 수 없으니 범인을 대신하여 성결 의식을 치러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도록 한 것이다. 성결 의식을 대신 치러야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눈 여겨 보아야 한다.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21:3a).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무책임 할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도 도의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데 필수요소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아파트다. 그러나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 중 하나가 쓰레기에 관한 것이다. 주차장이나 아파트 입구에 종종 쓰레기가 널려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쓰레기는 치워지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누군가 대신 치워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결국 쓰레기를 치우는 건 아파트 관리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쓰레기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려는 입주자들의 무책임 때문이다. 물론 아파트 관리인이 최종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가벼운 것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쓰레기는 오가는 가운데 치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삶의 모습 하나만 보아도 요즘 시대가 얼마나 무책임한 시대인가 알 수 있다.

 

이 외의 장자 상속권이나 패역한 아들의 처리 문제는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규례들이다.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에는 질서가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그 질서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하지만, ‘질서자체는 어느 관계에서든지 존재하는 법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질서는 그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가정의 질서, 교회의 질서, 사회의 질서, 자연의 질서 등 질서가 허물어지면 그 공동체는 허물어진다. 본인이 곧 법이고 질서인 존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어디 있는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산다는 것은 책임질서를 존중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책임질서가 얼마나 잘 지켜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안녕과 평화가 보장될 것이다. 나는 책임 있게 행동하는 사람인가? 나는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인가?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행복한 것이 아니라, 책임과 질서 가운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행복한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