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구원
제1차 전도 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첫 번째 설교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회당에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다음 주에도 또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던 이유는 평소에 회당에서 듣던 랍비 전통의 말씀과 달랐기 때문이다. 랍비는 율법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사람(예수)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도덕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사랑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죄 이야기를 했지만, 바울은 은혜 이야기를 했다. 랍비는 특별한 선택에 대하여 이야기 했지만, 바울은 보편적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복음은 사람, 사랑, 은혜, 보편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되고 드러난 하나님의 호의(generosity)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아낌없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의 요청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 다음 주에 회당에 가서 더 풍성한 복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더 풍성한 복음 이야기가 전해지자 복음을 거부하고 싫어한 무리가 생겨났다. 누가는 그들이 ‘유대인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전했는데, 그들은 왜 복음을 싫어했을까? 누가는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젤로스)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시기한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렇게 적대적 그룹을 드러낸다. 복음은 감추어진 잘못된 질서를 드러낸다. 사건이 발생하면 한 사람의 성품이 드러나듯이, 복음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낸다. 유대인들이 전한 말씀은 결국 구원을 주지 못하고 죄책감을 주고 차별했다는 뜻이다.
성경에 의하면, 복음은 원래 유대인들이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요 4:22). 이것은 유대인들의 허세일까?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못말리는 부분이 있지만, 신약성경은 유대인의 특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의 담장을 넘어 보편 시민(이방인/세계인)에게도 전해졌다고 선포한다. 신약성경의 특징 중 하나는 복음을 제일 먼저 듣고 돌이켰어야 할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바울의 첫 설교 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발생한다. 유대인들의 복음 거부는 바울과 바나바의 폭탄 선언으로 이어진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니 복음이 이방인들(세계인)에게 갈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한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이방인은 헬라어로 ‘에쓰네’이다. 워드 플레이를 좀 해 보면, 이방인은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원래 복음을 들어야 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으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제부터 자신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의 사도가 되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거부가 있었기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 때문에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탄생했고, 그로 인해 이방인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참 신비로운 일이다. 악한 것, 또는 안타까운 일을 선하게 사용하시는 지혜가 드러나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주는 권면은 이렇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 13:43).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한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권면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권면이었다. 그당시 로마 제국에 의해서 사람들은 지배받고 착취당하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에 협조하는 지배 세력에 의한 착취가 만만치 않았다. 빼앗기기만 하고 뭔가 채워지는 게 없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고 구원이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의 뜻은 “주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니 힘을 내라”는 위로의 말씀이었다.
우리 시대를 생각해 보아도 이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우리는 뭔가에 우리 자신의 삶을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사람들은 살아내느라 지쳐 있는 것을 본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고, 내가 나의 것을 잘 모아두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삶에서 낙오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살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존재하지 못하고 소유하느라 존재를 잃어버리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생명을 알뜰하게 챙기지 못하고 각자도생의 삶 가운데서 가까이 있지만 결코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살려고 애쓰는 이방인(에쓰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낌없이 주는 삶을 살라는 것을 말한다. 누가는 이러한 삶이 어떠한 삶인지 사도행전 2장에서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두려움과 부족함이 없도록 삶을 이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야 하는데 도리어 두려움과 부족함만 넘친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하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다. 인류는 한 번도 하나님의 사랑이 정치 원리인 적이 없었다고. 대신에 두려움과 부족함이 늘 정치 원리였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정치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을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탓에, 우리는 정치 원리가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매우 낯설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정치 원리로 작동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 이야기다. 이 나라를 이 땅 위에 가져오기 위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의 핏값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이 복음이 귀에 들리고 마음에 가 닿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낌없이 주는 구원이다. 주님께서 아낌없이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낌없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나누며 살자. 무엇이든지, 내가 가진 유무형의 모든 것을 아까워하지 말자.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구원의 삶이 될 것이고 이 세상은 구원된 세상이 될 것이다. 구원은 상상도 아니고 저 세상 이야기도 아니다. 구원은 오늘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낌없이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사는 것,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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