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믿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고백으로 여긴다. 입술로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하고, 교리를 받아들이고,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그런 믿음의 정의에 뼈아픈 이의를 제기한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믿음은 ‘저항’이다. 단순한 동의나 고백이 아니라, 어떤 체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반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한계시록의 믿음은 로마 제국의 질서에 대한 비폭력적이고 예언자적인 저항이다.

그 시대 로마 제국은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를 숭배하게 했다. 그 황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처럼 등장하며, 화려한 권력과 위용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는 입으로는 ‘평화’를 말했지만, 그 평화는 검과 피로 유지되었다. 그가 세운 질서는 무고한 생명의 희생 위에 세워졌고, 약한 자의 고통 위에 번영을 노래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짐승, 곧 황제와 제국에 저항하라고 명한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는 찬양은 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한 자들의 탄식이며, “누가 능히 이와 싸우리요?”라는 말은 믿음 없는 자의 절망이다. 그러나 요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짐승의 정체를 폭로하며, 싸우라고 말한다. 아니, 저항하라고 말한다.

그 저항이 바로 ‘믿음’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믿음이란, 황제의 권력에 무릎 꿇지 않는 것이다. 황제의 거짓 평화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짐승의 권세를 찬양하지 않는 것이다. 비폭력적인 인내로, 체제의 폭력을 견디며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믿음’과 얼마나 다른가. 통상적인 믿음은 내세의 평안과 구원을 보장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믿음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믿음은 현재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이고 영적인 대항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와 공동체의 정의를 갈망하는 신앙이다. 그렇기에 믿음은 고백이 아니라 ‘길’이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길. 그 길은 때로 외롭고, 고통스럽고, 때론 죽음의 위협 앞에 선다.

그러나 요한은 말한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그 인내는 결코 침묵이나 체념이 아니다. 비폭력의 힘을 지닌 고요한 저항이고, 사랑의 방식으로 체제를 바꾸려는 성령의 전략이다. 믿음이란,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의를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그 어떤 이유로든 생명을 경시하거나, 그 권리를 짓밟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 싸움은 손에 무기를 쥐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 복음을 품는 일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보여주듯, 가장 깊은 저항은 사랑이며, 가장 강한 믿음은 자기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앞에는 짐승이 있다.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는 미디어, 약자를 착취하는 자본의 논리, 혐오를 조장하며 질서를 세우는 이념들. 그 앞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믿음은 여전히 고백이 아니라, 저항의 선택지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 안에 살아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되, 짐승에게 무릎 꿇지 않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신앙 회복은 ‘믿음의 정의’를 다시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요한계시록이 새겨준 그 믿음, 곧 저항하는 믿음을 다시 품고 살아야 한다. 그 믿음이 우리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세울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전쟁과 예배]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많은 경우, 예배는 마음의 위로를 얻고 현실의 고단함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쉼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예배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뜨거운 실재다. 예배는 낭만이 아니라 전쟁이다.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저항의 자리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여자’로 비유된 교회가 ‘용’으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과 맞서고 있다. 이 여자는 하늘의 별과 해와 달을 몸에 두른 영광스러운 존재지만, 동시에 산고에 시달리는 해산하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고통 중에 진통하고, 박해 속에 울부짖는 교회의 모습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궁극의 악한 세력을 상징하며, 하늘에서 쫓겨난 뒤 여자를 끝까지 괴롭힌다.

이 장면은 환상이 아니다. 소아시아의 초대교회들처럼 오늘의 교회도 여전히 악의 세력과 대면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삶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족과의 갈등, 교회 안의 분열, 사회의 부정의, 내면의 상처와 유혹들… 이 모든 것들이 용의 발톱이며 숨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답은 예배다.


요한계시록은 전쟁과 예배를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하늘에서는 미가엘이 용과 전쟁을 벌이고, 그 직후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를 찬양하는 예배가 울려 퍼진다. 이 예배는 단순한 찬양이 아니다. 이 예배는 제국의 언어를 뒤집는 저항의 노래다. '구원, 능력, 나라, 권세'—이 네 단어는 본래 로마 제국의 언어였다. 황제의 선전 문구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하나님과 어린양께 돌리며 제국을 무너뜨리는 반전의 노래로 바꾼다.

예배는 이렇게 불의한 세상, 억압적 질서에 맞서는 교회의 무기다. 단지 아름다운 음악과 위로의 메시지로 끝나는 감성적 시간이 아니라, 현실의 한복판에서 드려지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교회당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울려 퍼지는 종교 행사가 아니다. 예배는 매주 반복되는 리추얼이 아니라, 삶의 전장에 나가기 위한 하늘의 군수 지원소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전쟁의 현실을 자각하고, 진리를 분별하며, 용기와 위로와 공동체의 힘을 얻는다.

그래서 예배는 '시간 떼우기'가 아니다. 예배는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생존의 길이며, 해방의 길이며, 승리의 길이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예배의 깊이를 기억하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더 뜨겁고, 더 진실하고, 더 하늘을 닮아가도록 노력하자.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되며, 기도가 우리의 저항이 될 때,
우리는 이 전쟁 같은 삶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다.

예배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주님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Posted by 장준식

[한국 경제와 교회가 막장으로 가는 이유]

김수행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책을 번역해야지 하면서도 선뜻 착수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악법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번역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중 1988년 9월 이론과실천사의 대표가 [자본론]의 일부를 번역해 출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또한 나의 작업을 지연시키기도 했다."(1989년 초판 번역자의 말)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1989년 초판 번역자의 말)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필두로 발전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은 한 마디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이다. 문제는 고전파 경제학이 자본주의 이면에 흐르는 노동 착취는 보지 못하고, 그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상품생산과 교환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자연적인 것'으로 미화했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이기심마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킬 거라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다. 

마르크스의 예언자적 시선(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교묘히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능력)은 자본주의 체제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착취'에 머문다.  노동이 상품처럼 사고 팔리는 현실이, 사실은 노동자의 삶 자체를 소모하고 착취하는 구조임을 고발한다. 마르크스의 눈에 자본주의는 '자연적이고 자유로운 체제'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폭력적인 체제였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유 거래'는 사실 비대칭적 권력 관계(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를 은폐한다고 비판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말하고 싶은 것의 요지는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착취의 체계이고, 고전파 경제학은 그 착취를 자연스럽고 포장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계시적이고 구원적인 체제가 아니고 기득권자들(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착취와 억압의 체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 또는 '자율'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마치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속인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막장으로 간 이유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받아들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김수행이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 이론은 '빨갱이' 딱지가 붙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통되지 못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던진 화두를 붙들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 감추어진 면,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들을 충분히 살펴보지 못한 채, 그것이 경제 체제의 전부인 것처럼 신봉했다는 데 있다. 한국 교회는 이와 발맞추어 나가며, 자본주의 체제에 축성을 더하고, 자본주의가 마치 하나님이 뜻하신 경제 체제인 것처럼 신학적 지원을 했다. 

교회가 역사적 폭력 체제인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현재로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마땅히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르크스가 예언자적 시선으로 자본주의 체제 이면에 있는 착취와 폭력의 어둠은 감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될 것이고, 야수 같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인간은 생명을 계속 잃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을 계속 파헤치고, 그것에 희생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면을 밝음으로 채우도록 체제를 계속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일에 교회가 앞장서지 않는다면, 누가 앞장서겠는가? 생명을 사랑하는 주님께서 생명을 헤치는 야수 자본주의를 그냥 놓아둘 리 없다.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비판한 이유는 그 당시 서구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에 축성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수 자본주의에 물려서 거반 죽게 된 이들에게 그저 '아편'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폭력 체제에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한 축이 된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 김수행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던 것을 다시 여기에 적는다.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아직도 '빨갱이' 프레임에 갇혀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에 자신이 착취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더러,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부를 증진시키고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의 목을 은근슬쩍 조르며 협박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협박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쾌락'으로 느끼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병리적 마조히스트들(피학적 인간들/폭력을 당하고 있는 건데 이건 '쾌락'이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 가득하다.  

우리를 구원하는 손은 오직 주님만이 내밀어 주신다.

Posted by 장준식

조희대 대법원장의 판결에 부쳐
― 나쁘거나, 공부를 안 하거나

오늘날 한국 정부에는 나쁘거나, 공부를 하지 않는 보수 세력만 득실대는 듯하다. 어제 있었던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재판은 명백한 정치 개입이며,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한국 사회를 후퇴시키는 몰염치한 행위였다.

윤석열 일당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특히 이들의 정치 행위를 보면,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결정주의(decisionism)'에 깊이 갇혀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별'로 보고, 위기 상황에서는 국가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은 전체주의와 나치즘을 낳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윤석열 정권은 마치 이 과거의 사고방식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듯하다.

현대 정치철학은 칼 슈미트의 통찰, 즉 정치는 갈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계승했지만, 그가 제안한 '결정주의'를 넘어섰다. 현대 정치철학자들, 특히 샹탈 무페(Chantal Mouffe)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갈등을 죽음과 생존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대신,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샹탈 무페는 '경합주의(agonism)'를 주장한다. 무페 역시 전통적 자유주의가 꿈꾸던 합리적 합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녀는 갈등을 폭력이나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제도화된 규칙 안에서 정당한 경쟁(adversary)을 통해 표출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갈등은 억압하거나 소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관리되고 제도화되어야 할 현실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다중(multitude)'을 강조한다. 그는 국가 권력에 주권이 집중되는 것을 비판하며, 제국적 자본에 맞서 다양한 주체성의 집합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은 탈취하거나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의 통찰처럼 정치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다. 이를 부정하는 정치철학자는 없다. 그러나 이 적대를 다루는 방식이 문제다. 슈미트는 강력한 주권이 갈등을 통제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축소와 자유·인권의 심각한 제한을 초래한다.

내가 윤석열 정권을 비판하는 핵심도 바로 여기 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나 조희대 대법원장의 판결은, 갈등을 제도적 경합이나 시민 다중의 자율적 해결에 맡기지 않고, 국가 권력이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정리하려는 결정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는 현대 정치철학이 비판하고 넘어선 정치모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정치적 갈등은 무페가 말한 것처럼 경합의 방식으로, 그리고 네그리가 강조한 것처럼 다중의 자발적 창조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국가 권력은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겨야 한다. 그래야 현대 민주주의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어제 조희대 대법원장이 내린 판결은 경합도 다중도 무시한 채, 국가 권력이 모든 것을 교통정리하겠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는 민주주의의 쇠퇴이자, 명백한 정치적 폭력이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도, 정치적 판결을 내린 조희대도 현대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면, 애초부터 나쁜 의도를 품고 정치에 뛰어든 자들이거나.

이 시점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주권자 개개인의 정치적 행동이다. 제도적 경합을 방해하고 다중의 자율성을 억압하려는 세력에 대해 시민은 저항해야 한다. 주권자 개개인이 힘을 모아 다중을 형성하고, 새로운 주권을 창조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많은 발전을 이루어왔다. 시민들의 정치 의식 또한 깊어지고 진보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려는 수구세력의 정치 공작에 더 이상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시민이 들고 일어설 것이다. 국민이 이길 것이다. 내란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고 민주 정권이 회복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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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