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나는 흡혈귀
당신은 목
끌리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참새
당신은 방앗간
그냥 지나칠 수 없네
나는 벌
당신은 꽃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소년
당신은 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목동
당신은 소녀
지켜주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바람
당신은 나무
그 품에 안기지 않을 수 없네
나는 강
당신은 바다
흘러가지 않을 수 없네
나는 구름
당신은 하늘
떠다니지 않을 수 없네
나는 시냇물
당신은 조약돌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노을
당신은 서쪽
물들지 않을 수 없네
[믿음]
누구를 믿는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일이야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큰 상처를 남기지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믿을 인간이 없다는 것이야
인간인 내가 인간을 못 믿는다는 사실만큼
슬픈 일이 세상엔 없지
인간들은 말이야
스스로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신이라는 것을 믿어
아주 기괴한 일이지
인간들이 신 앞에서 하는 일은
슬픈 심장을 꺼내 닦는 일이야
그게 얼마나 장엄한지
인간은 자기 눈물로 그 심장을 닦지
나는 말야 이런 꿈을 꾸곤 해
태어나지 않는 꿈
하늘을 날다 추락하는 꿈
이 꿈들은 말 못하는 간절한 소망 같지
내 눈 앞에 있는 너
인간의 형상을 입은 너
너에게 묻고 싶어
너를 정말 믿어도 될까
믿지 마, 믿어도 돼
믿지 마, 믿어도 돼
마치 파도처럼 출렁이는 너,
그리고 나
[소판 세상]
실리콘밸리의 상징
미션픽 정상에 오르는 길
협곡을 따라 오르다
굽이치는 바람을 만난다
고개를 숙이고 바람을 거슬러
오르다 오르다 보면
소 한 마리
또 소 한 마리
소 서너 마리
그리고 소
소
또 소
내 평생 개판인 세상을 보아왔어도
소판인 세상은 처음 본다
풀 뜯으며
지나가는 행인을 무심히 바라보는 소
평화로운 소판 세상을 밟다
슬픔
눈이 멀었으니까 제 정신일리가 없지
눈이 멀었으니까 본 대로 말하지 못하고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말하는 거야
눈 먼 자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언제나 오지에서 먹는 음식물 같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맛보아야 하는
미각의 슬픔을 너는 상상이나 해봤니
눈 먼 아비의 손을 잡고
사막을 떠돌아야 했던 꽃다운 안티고네는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어
“눈 먼 아버지는 눈이 먼 채로 혼자 걸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너는 누구니
* 박연준 시 ‘안티고네의 잠’에서
[괴물]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죽어야 하는 괴물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자라야 하는 괴물*
괴물이 괴물을 모은다
사람이 되려면 서로 안부조차 묻지 않아야 하는데
괴물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괴물이 모여 하늘로 승천하려고 한다
하늘로 승천하는 괴물을
하느님은 보우하실까
하늘이 높고 눈부셔서
만세를 부른다
승천하는 괴물들이
서로 흘려대는 침과 피를 먹는다
이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괴물들의 똥뿐이다
* 이 문장들은 이영주 시, '숙련공'에서 가져옴
가지나무
가지나무 삶은 물에 발 담그고 있으면
발에 든 겨울 동상 낫는다 하여
텃밭에서 가지나무 꺾어다가
냄비에 물 가득 붓고 삶는다
아들이 겨울마다 동상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운 엄마는
가스 불 아끼지 않고
사골 우려내듯 가지나무를 삶는다
얼굴 비치는 스덴 대야에
한 가득 가지나무 삶은 물을 쏟아 붓고
엄마는 입술에 힘을 주며
무거운 대야를 들어 아들 발 밑에 내려놓는다
가지나무 또 삶고 있으니
걱정 말고 발 푹 담고 있으라고
한 삼십 분은 담그고 있어야 한다며
엄마는 아들을 의자에서 꼼짝 못하게 한다
가지나무 우려낸 물이 무슨 효험이 있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겨울마다 손발이 차가운 것은 엄마를 닮아서 그런 것
왜 하필 자기를 닮아 손발이 차가워 고생하냐며
뜨거운 물을 몇 번이나 대야에 실어 나르던 엄마
뜨거운 물이 우려낸 것은 가지나무가 아니라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
그 사랑 때문에 나는 손발이 차가워도
겨울을 따스하게 보냈다
손발이 차가워도
마음이 따스하면 겨울이 꼼짝 못하는 법
겨울 바람이 차가워 동상 들면
가지나무를 삶지 않아도
엄마를 떠올리면 손발이 저절로 따스해진다
엄마의 사랑은 마법이다
세상의 모든 나무
아무것도 아닌 새가 된다는 것은
결국 더 이상 허공을 날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
허공에 서 있는 전봇대에 부딪히는 게 무서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일
허공 자체가 공허하므로
공허를 뒤집어쓰는 것이
번개에 맞아 기절하는 것보다
아프다는 일
아프면 어때
허공에는 어둠이 없다
햇살이 없는 것보다 어둠이 없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든 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게
뉴스를 보지 않고 사는 것보다
지루한 일
허공을 가르는 바람만이
나무의 손끝을 건들 수 있다는 일
나에게 손짓하는 것은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뿐
밤의 비
밤의 비,
신의 축복인가
밤의 눈물인가
어둠을 틈탄다는 것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와 호흡을 맞춘다는 것
밤에 눈 뜨고 있는 것들의 심장을 때린다는 것
빗소리,
땅의 신음인가
공기의 울림인가
적막을 부순다는 것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와 춤춘다는 것
밤에 눈 뜨고 있는 것들의 영혼을 깨운다는 것
비와 밤과 소리
엉겨붙은
그러나 결코 섞이지 않는
너와 나와 신처럼
아주 고집 센
짙은 상처
틱틱틱
무언가를 중얼거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한 사내
틱틱틱
이해할 수 없어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혐오와 공포의 눈빛을 그의 등 뒤에 쏟아 놓는다
틱틱틱
휴머니즘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우주에서 가장 마음 아픈 속삭임
엄마 뱃속에서 처음 나왔을 때
이 세상 무엇보다 해맑았을 그의 표정을
무엇이 이토록 망가뜨렸을까
틱틱틱
아무리 중얼거려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그의 간절한 호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듣고 계실까
틱틱틱
무수히 쏟아지는 공허한 중얼거림에
사람들은 애써 귀를 닫고
애써 눈을 피하며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듯 길을 열어주지만
틱틱틱
하나님 보시기에
누가 어여쁜 자인지,
알 길이 없다
안녕. 안녕. 안녕.
우리는 만나고 있지만
실은 만나지 못하고 있어.
차가운 암흑이 짙게 깔려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찬란한 햇살에 눈이 부셔서야.
불태워보려고 아무리 애써 보지만
장작에 불이 붙지 않는 이유는
너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성냥이
발화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눈을 뜬 채로 꿈을 꿔.
지붕을 뜯어내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
거기엔 적막과 고립이 존재하는데
은하수랑 가까워서 그런지
오히려 푸르고 애잔하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엇일까.
태초부터 불가능한 일은
뼈 안 속으로 꽁꽁 숨어버린 것일까.
뼈가 아프다.
긁어보지만 살갗만 붓는다.
아무리 주물러보아도
시원해지지 않는 내 뼈들은
가능성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말라가고 있어.
우리에게 구원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불가능 그 자체 일거야.
일곱개의 색깔로 구원을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무지개라는 이름을 차마 붙일 수 없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가능한 색깔일 테니까.
오늘부터 나는 너를 만나지 않으려고 해.
그게 내가 너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
우리 안녕은 세 번만 외치자.
그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주문이라고 믿자.
안녕. 안녕. 안녕.
들꽃
삼신 할매가 점지해 준 씨를 타고
예언의 계곡 넘어
바람보다 먼저 도착한 너는
푸르고 검은 하늘의 눈동자에
고양이의 그것보다 빛나는 열정을
아지랭이처럼 나른하게 박아 놓는다
무엇인가 너는
나무의 손끝을 떨게 만드는
오후의 무심한 시간보다
아득한 곳을 상상하게 만드는
무너져가는 담장 옆에 둥지를 틀고
이제 막 솟구치려하는 푸른 잎사귀보다
간절하게 생명을 갈구하는 너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물었지
여기를 지나가고 싶냐고
그러면 수수께끼를 맞혀야 한다고
그렇게 너는 묻는다
나는 답을 모른다
답을 모르기에 꺾여야 하는 것은
너의 목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