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8. 8. 08:24

주일과 자유

(출애굽기 6:9, 16:23-30)

 

1.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최근 기사를 보면, 미국인의 기대 수명이 최근 2년 사이에 2.7세나 감소했다. (Horrifying numbers of Americans will not make it to old age/7.31.2023) 현재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76.1세다. 세계 최고의 암 치료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암 때문이다. 굉장히 아니러니컬한 현상인데, 암 때문에 죽는 이유는 의료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성 때문이다. 암에 걸려도 돈이 없는 사람은 최고 수준의 암 치료 기술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2. 그리고,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총기사고와 교통사고가 있다. 미국인은 2022년도에만 교통사고로 43,000명 정도가 죽었다. 총기사고로 죽은 사람은 2023년도 현재까지 25,000명 정도 된다. 그리고,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이 또 있다. 약물중독이다. CDC의 발표에 따르면, 2021년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107,000명이나 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 중의 하나로 젊은 층의 죽음이 지목됐다는 것이다. 2021년도에만 15세에서 24세의 젊은이 38,307명이 죽었다.

 

3. 이렇게 충격적인 사망이 발생하는 원인과 기대수명 감소에 대해서 이코노미스트가 제시하고 있는 분석이 흥미롭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국인들이 중시하는 자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유를 중시하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데, 더불어, 정부의 개입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 4월, 미국 청년 보수단체 ‘터닝포인트 USA’ 설립자 겸 회장 찰리 커크는 “수정헌법 2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년 총기 사망의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말할 정도다. 한마디로, 총기 소유에 대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한 해에 몇 만 명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은 감수해야 할 사항이지, 수정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4. 미국에서는 ‘자유’가 이념으로 작동하여 정치 싸움에 이용된다. 그래서 미국식으로 이해하는 ‘자유’의 개념은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비판적으로 미국식 자유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자유는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명을 지켜내려는 의지인데, 그 자유가 오히려 생명을 헤치고 죽인다면,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런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자유 말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생각해 보려 한다. 하나님의 자유를 통해서 이 땅에서 왜곡되어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자유를 바로잡는, 좋은 일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5. 출애굽기는 우리들에게 ‘해방’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주었다. 남미신학자들을 통해서 발전된 해방신학은 성경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발전된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출애굽기는 해방과 자유의 이야기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다. 해방을 갈망하는 이유는 지금 삶이 어딘가에 억압되어 있다는 뜻이다. 억압되어 있어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다보니, 삶이 괴롭다는 뜻이다. 행복하고 편안해야 하는데, 무엇인가에 억눌린 사람은 자유가 없어 삶이 괴롭다.

 

6. 400여년 동안 애굽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갔는데,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조가 들어서는 바람에) 노예로 전락하여 괴로운 삶을 살았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우리의 삶이 이런 것 같다.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 같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어 지옥을 사는 것처럼 괴롭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7. 이스라엘은 애굽의 학대에 너무 괴로워 날마다 울부짖었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학대를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학대’는 히브리어 ‘라하츠’에 해당된다. 성경에서 ‘라하츠’라는 말이 나오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 라하츠는 ‘괴롭힘’, ‘학대’, ‘압박’이라는 우리말로 옮길 수 있고, 영어로는 ‘oppression’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학대받는 자들의 하나님(God of the oppressed)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학대를 싫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에 학대 받는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된다. 반대로, 절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학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면 인생에 이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8. 학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행동하는 학대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 안 하는 학대이다. 행동하는 학대는 ‘괴롭힘’이다. 누군가를 어려움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주 나쁜 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 학대’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학대에는 다른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행동 안 하는 학대’이다. 다른 말로 방치라고 한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는 학대’를 안 하고 산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면, 우리는 ‘행동 안 하는 학대’를 자행하고 살 때가 많다. 내가 직접 도와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학대 당하고 있는 존재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라도 해야 한다. 그러면, 그 기도 안에서 그 학대 당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반드시 입을 것이다.

 

9. 학대 당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학대를 보시고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그의 종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다. 그런데 출애굽기 6장을 보면 아주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학대 당하여 괴로운 마음을 표출하던 이스라엘이 정작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에서 꺼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했을 때,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discouragement)과 가혹한 노역(cruel bondage)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출 6:9).

 

10. 학대가 나쁜 이유, 그리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학대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보이는 반응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학대는 몸과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다. 그래서 생명의 존엄성을 형편없이 훼손시킨다.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다른 생명과 소통이 안 된다. 특별히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소통이 안 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시고 말씀하시는데, 학대 당하여 존엄성을 훼손 당한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11.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과정은 널리 알려져 있기에 다시 반복하여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출애굽 사건을 가장 발목 잡았던 것은 ‘걍퍅한 마음(discouraged /stubborn/hardened/heart)’이었다. 두 강퍅한 마음이 출애굽을 가로막았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강퍅한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애굽의 바로 왕이 가졌던 강퍅한 마음이었다. 우리가 강퍅한 마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내 앞에 이미 와 있다. 다만, 내가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임하느냐 구원이 임하지 않느냐의 차이를 낳는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라. 마음을 풀라.

 

12.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걍퍅한 마음을 넘어서는)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 아래 마침내 홍해를 건너 출애굽 한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 들어서면서 그 광야에서 받은 첫 번째 훈련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은 우리가 잘 아는 만나 사건과 엮여 있다. 만나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안식일 훈련을 위함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다. 쉼이다. 쉰다는 것은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쉰다는 것은 곧 자유를 뜻한다.

 

13. 오랜 세월 동안 애굽에서 학대당하며 마음이 상하고 고된 노역으로 고통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못하는 것, 그들에게 없는 개념은 ‘쉼’(sabbat)이었다. 그들에게 쉼이라는 것이 없었다. 즉,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일으키신다. 만나 사건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단순한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 사건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쉼’, 즉 ‘자유’를 가르쳐 주신다.

 

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학대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들은 더 이상 학대를 받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평일에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됐다. 거기에는 무슨 학대가 있지 않았다. 거두어들이는 노동만 존재할 뿐이었다. 거두어들일 때 그냥 하루치 먹을 양식만 거두어들이면 됐다. 더 많이 거두어들이느라 불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6일에는 두 배를 거두어들이는 노동만 조금 더 하면 됐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제 일곱 번째 날은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일조차 하지 않고, 그냥 쉬면 되었다.

 

15.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 사건을 통해 안식일을 지키면서 비로소 ‘자유’를 알게 되었다. 안식일을 통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절대로 애굽에서와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그 이후에 그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삶을 살기 원했다. 자유의 삶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인간의 삶에서 자유를 빼앗아가는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나쁜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불경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라, 참 자유를 주지 않고 가짜 자유는 주는 악한 것에 몸과 마음이 빼앗겼다는 뜻이다.

 

16.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에게 ‘주일’(The Lord’s Day)로 계승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주일을 지킨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고백은 한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켰더니,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보다 안식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주었습니다.’ 유대인의 이러한 고백은 그리스도인 경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주일을 지켰더니, 우리가 주일을 지킨 것보다 주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주었습니다.’

 

17. 표면상으로는 다종교의 국가이지만, 심층상으로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성행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데, 결국 그 노예 제도를 뒤집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독교 정신 때문이다. 노예 제도가 존재할 때 미국인들의 종교성은 유난했다. 그들은 노예 제도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아직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노예 제도를 운영했던 미국인들조차도 ‘주일을 지켰다.’ 그들은 주일을 지키면서 아주 종교적인 마음으로 주일에는 노예를 쉬게 했다. 그들이 무슨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노예에 대한 사랑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 하게도 노예들은 주일에 쉬는 것을 통해서, 그 옛날, 출애굽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자유’를 배웠던 것처럼, 그들은 ‘자유’를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노예들이 갈망하는 자유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노예 제도를 포기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했던 역사인식 방법)

 

18.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킨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의 자유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주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준다. 절대, 절대, 주일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주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는 내 영혼의 건강에 대한 바로미터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딘가에 속박당하여 있다는 뜻이다. 하루 빨리 그 결박에서 풀려나도록 주님께 구원을 간구하라. 참된 자유를 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주님 외에, 그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말라.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다. 주일을 지키라. 그러면 주일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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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