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9. 5. 02:58

브살렐과 오홀리압

(출애굽기 35:30-36:7)

 

1. 미국에 유학 와서 수업을 듣는데, 첫 수업에는 언제나 서로 이름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냥 한국 이름 Junsik Chang을 말했는데, 교수를 포함해 거의 모든 학우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편했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그냥 속 편했다. 그런데 나는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마음을 바꿨다. 영어 이름을 하나 지어 교수와 학우들이 내 이름을 잘 기억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Jeremy이다(2004년).

 

2. Jeremy는 성경의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Jeremiah는 Jeremy 또는Jerry로 줄여 부른다. 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좋아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도 마음에 들었고, 망해가는 조국 이스라엘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동분서주하며 마음 아파하고, 핍박 받고, 결국 슬픈 마음을 안고 죽어간 모습도, 모두 마음에 남았다. 이것은 내가 한국인으로서 겪은 역사의식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국문과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했는데, 한국의 현대문학은 일제시대 때 꽃피웠다. 한국의 문학 속에는, 그리고 한국의 문인들 마음에는 예레미야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레미야의 이름의 뜻이 참 좋았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세우신 자!

 

3. 성경을 읽으면서 참 좋은 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대할 때이다. 성경의 이름은 대개 신앙고백이다. 한국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지만, 성경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최근 들어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또는 예수님과 연관된 이름 짓는 것이 유행이지만, 그 뜻이 광범위하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의 이름은 하나님 경험이 담긴 것이 대부분이다. 다른 말로,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이라는 뜻이다.

 

3. 브살렐은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을 지어준 부모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는 뜻이겠고, 또는 자녀가 그렇게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겠다. 브살렐은 아주 유명한 가문 출신이다. 그에게 붙은 수식어를 보면, 브살렐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이다. 훌이 누군가? 시내산 도착 전 르비딤에 머물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시에 쳐들어온 아말렉 족속과 전투를 벌일 때 모세와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 아론과 더불어 모세의 피곤한 팔을 붙들어 올린 인물이다. 모세와 아주 가까이서 동행했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했던 인물이다. 브살렐은 바로 그 유명한 ‘아론과 훌의,’ 그 훌의 손자이다.

 

4. 오홀리압은 ‘아버지는 나의 장막이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이름을 지어준 부모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는 뜻이겠고, 또는 자녀가 그렇게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겠다. 오홀리압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오홀리압의 부모님들도 하나님 경험이 특별했던 것 같다. 장막은 보호해주고 안식을 주는 곳인데, 오홀리압의 부모님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 그러니, 오홀리압이 성막(하나님의 장막)을 만드는 일에 부름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5.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름을 대할 때, 그 이름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은 그들만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과 신앙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야곱의 이름을 보면, 야곱의 뜻은 ‘발 뒤꿈치를 붙잡은 자’이다.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는데, 얼마나 장자가 되고 싶었으면 형의 발 뒤꿈치를 붙들고 태어났겠는가.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그 인생의 애환이 그대로 들어가 있고, 펼쳐질 삶의 파노라마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중에 얍복강에서 천사와 겨루어 이긴 뒤, 야곱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으로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불린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뜻이다. 결국, 야곱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장자의 축복을 받는다.

 

5.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의 뜻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고, 내가 얼마나 인생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인생의 일기예보와 같다. 이름은 그냥 그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름은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고, 무엇보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폭풍우를 만났을 때 나를 붙들어 주는 닻과 같다.

 

6. 요나를 보라. 요나의 뜻은 ‘비둘기’이다. 비둘기는 예전에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로 쓰였다. 요나는 가드헤멜 아밋대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열왕기하 14장에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등장한다. 예후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왕으로서 여로보암 2세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쳐서 나라의 부흥을 이룬 인물이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전령사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다. 그런데 어떤가? 요나는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전령사의 역할을 한다. 요나의 삶이 흔들릴 때 요나를 붙들어 준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의 이름이다. 자신은 ‘비둘기’로 부름을 받았다.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다. 신앙고백의 이름을 가진 자는 그 이름이 붙들어 준다.

 

7.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보면 두 가지 가슴 벅찬 단어가 등장한다. 하나는 ‘감동’(나탄)이고, 다른 하나는 ‘자원하는 마음’(나사)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름이 처음 거론되는 곳은 출애굽기 31장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성막을 만들 것을 명령하시며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세우라고 하신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명하여 부르신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영’을 그들에게 충만이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부어주셨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성령’이라고 말지만, 좀 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용어를 쓰자면, ‘감동’이다.

 

8. 감동은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면서 가까이 다가서는,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같은 것을 경험해도 누구는 감동이 있고 누구는 감동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아주 신비한 것이다. 감동은 그 대상을 한없이 가까운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한없이 가까이 다가서신 것이고, 브살렐과 오홀리압도 하나님을 한없이 가깝게 느낀 것이다. 이런 것이 쉐키나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하는 것. 성막을 실제로 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단순히 성막을 제작하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성막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성막 그 자체였다.

 

9. 또 한 가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보면 가슴 벅찬 용어가 등장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원하는 마음’(나사)이다.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풍경을 직접 보면 이렇다.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지고 왔다”(출 36:3b). 성소의 일을 맡은 자들이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아침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는 예물을 너무나 많이 가져왔다. 그래서 모세가 이런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출 36:6). 그만 가져오라!

 

10.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새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런데,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며 하나님을 다시 찾던 이스라엘 벡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비로소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율법과 성막은 쉐키나이다.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를 눈으로 보여주는 것(세크라멘트)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가까워지셨다. 그런데, 정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가까이 계신 것을 경험했다. 그 경험은 성막을 지을 때 쓸 재료들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칠 정도로 가지고 온 것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1. 우리의 신앙이 성장했다는 것이 무엇일까? 부흥이란 무엇일까?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가 보여주는 이 장면 아니겠는가! 나탄과 나사.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 하나님과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 성막은 이미 브살렐과 오홀리압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지어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막은 이미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지어진 성막을 꺼내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성막이 없는데, 즉,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하나님이 없는데, 바깥으로, 눈으로 보이는 성막을 억지로,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만든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12.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으시다. 너의 이름을 무엇이냐? 너는 나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느냐? 나에 대한 너의 신앙고백은 무엇이냐? 너에게는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이 있느냐? 네 가운데, 네 안에 성막이 지어져 있느냐? 그런 것 없이, 그냥 바깥으로 보이는 성막에 나와 앉아 있는 것 아니냐? 나는 너와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너에게 나의 은총과 복을 충만이 부어주고 싶다. 그러니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네 가운데, 네 안에 성막을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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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