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20. 03:39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창세기 50:19-21)

 

1. 요셉은 성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요셉과 더불어서 입지전적한 일물로 다니엘이 있다. 한 명 더하면, 에스더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파란만장했던 삶에 더해, 매우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의 자리에, 에스더는 바사(페르시아)의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자녀들이 이들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그리고 에스더처럼 아이들이 잘 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이들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결을 배우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볼 요셉은 ‘꿈 꾸는 자’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별명이 그렇게 좋은 뜻으로 붙여진 것은 아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비아냥거리면서 붙여준 별명이다. 그러나 그런 별명이 어떻게 붙여졌는지와는 별개로 요셉의 인생을 바꾸어 준 것은 바로 ‘꿈’이었다.

 

3.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세 개의 꿈이 등장한다. 하나는 요셉 자신의 꿈이고, 다른 하나는 보디발의 아내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거기서 만난 고위관리 두 사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바로의 꿈이다. 요셉 자신이 꾼 꿈은 형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그것 때문에(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다. 감옥에서 만난 두 사람의 꿈은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갈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바로의 꿈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로 이끌어 주었다.

 

4. 심리학(Psychology), 또는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이라는 학문이 있다. 이 분야는 ‘유대인 학문’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 학문의 창시로 널리 알려진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비롯해, 알프레드 아들러, 멜라니 클라인 등, 정신분석학의 대가들은 대부분 유대인이다. 나는 심리학이 유대인에게서 비롯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이 학문을 발전시킨 것이 요셉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심리학자들은 구약 성경을 읽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 요셉의 꿈 이야기는 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대표 저서 중 하는 <꿈의 해석>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인간의 정신(Soul/Mind)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5. 우리 시대에 정신분석학의 위용은 대단하다. 그만큼 프로이트의 영향이 크다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두 개의 정신분석학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정신분석학, 다른 하나는 개의 정신분석학. 한국 예능(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두 명의 강사가 프로그램을 주름잡고 있다. 한 명은 정신과의사인 오은영 원장이고, 다른 한 명은 개조련사 강형욱 원장이다. 오은영과 강형욱은 현재 한국 사람들의 실질적인 사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저 사람이, 왜 저 강아지가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를 못해서 갈등이 증폭하는데, 그들의 행동 뒤에는 그 행동을 이끄는 어떠한 ‘심리(정신)’이 있다는 보여줌으로써, 저 사람이나, 저 개를 이해하게 되고, 관계를 다시 회복해 나간다.

 

6. 프로이트 이후에 심리학(정신분석학)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 아주 색다른 심리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이 있다. 빅터 프랭클, 아론 벡, 마틴 셀리그만이 그들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유슈비츠 생존자로서 의미치료라는 심리학을 발전시킨다. 아론 벡은 인지 행동치료라는 심리학을, 마틴 셀리그만은 긍정 심리학을 발전시킨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다. 이들이 발전시킨 심리학의 공통적인 생각은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면 우리가 느끼는 방법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7. 이러한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심리학자는 빅터 프랭클이다. 빅터 프랭클이 쓴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굉장히 유명한 문장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지냈던 사람들은 그 막사들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마지막 빵조각을 나눠주던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그들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하나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것, 즉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박탈할 수 없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한다.

 

8.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읽어보면(한나 아렌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개돼지로 전락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다 빼앗기고, 인권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좀비처럼 살아간다. 몸을 씻을 곳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빅터 프랭클이 위에서 진술한 것 같은 위대한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고유의 자유라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 있더라도,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보여지는 현실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이다.

 

9. 유대인들이(물론 극소수이지만)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대 절망의 상황 속에서 빅터 프랭클이 진술한, 그러한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러한 상황에 닥치면 그 이야기를 삶 속에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게 신앙이다.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이유는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함인데,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야기가 내 삶 속에서 작동하도록 우리의 삶을 이야기에 내어주는 것이다.

 

10. 요셉은 충분히 복수의 칼날을 갈 수 있는 억울하고 기분 나쁜 일을 경험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애굽의 노예로 팔렸으며, 노예의 신분으로 애굽에서 개돼지나 다름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 마음 속으로, ‘내가 만약 잘 돼서 성공한다면, 나의 인생을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인간들을 절대로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거야.’라고 되새김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나의 인생은 왜 이래’, 하면서 한탄하고 한탄하면서 비뚤게 나갔을 가능성을 얼마든지 품고 살았다. 그런데, 요셉 이야기에서 가장 큰 반전,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그가 어려운 중에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요셉이 우리의 예상을 깨고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보면, 더 명확하게 우리 마음에 요셉의 고백이 들어온다.

 

두려워들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 싶습니까?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 “이렇게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11.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많은 이들이 ‘신앙 무용론’을 말한다. 신앙을 갖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신앙은 삶에 소용이 없는 듯,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신앙 무용론을 펼치며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 공동체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신앙인이 가장 열심히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성경공부 하지 말고, 성경과 연애하라!)

 

12.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작업이다. 신앙의 깊이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이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갇힌 생각을 열어 다른 세상으로 이끄신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바꾸면 된다.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요셉의 이야기를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다. 그렇게 요셉 이야기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13. 생각은 바꾼다고 바꿔지는 게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지 못해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산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지 못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며 산다. 고통을 받는 사람이나 고통을 주는 사람이나,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심리학(정신분석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생각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도 아니다. 생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신앙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신앙은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고,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구원은 이렇게 온다.

 

14.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창세기의 족장들 이야기를 보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이삭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야곱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신앙을 통해,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일을 통해, 우리의 삶이 더 좋은 삶으로 전진해 나아가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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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