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14. 13:38

2011 2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전 3:1-9

제목: 하나님의 동역자, ,

 

1장과 2장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강조해서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 앞에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끊임 없이 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나는 발견했는가!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뭐 그까짓 것 하기 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십자가의 도는 멸망 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한 것 같으나, 실상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발견하고 싶다고 해서 발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영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바울 사도가 가리키는 신령한 자들이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영적인 삶을 사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이 손에 잘 안 잡힙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영적인 삶이란 교회 열심히 잘 다니는 것을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리는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말도 아닙니다. 교회를 잘 다녀도 전혀 영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바울 사도는 그것을 지적합니다.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 입장에서 보면 좀 창피한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눈에 고린도 교회는 전혀 영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착각은 자유, 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각하는 것까지 어떻게 말리겠습니까마는 그 착각이 신앙의 성숙을 가로 막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보고 아직도 너희들은 멀었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 증거를 댑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가 아직도 영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증거가 바로 그들 가운데 있는 시기와 분쟁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 중에서 가장 사고뭉치였습니다. 요즘도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교회의 분쟁들, 다툼들, 싸움들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교회가 생겨난 지 2천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교회에 그러한 문제들이 있는 것을 보면 좀 신기합니다. 그만큼 사람이 변하는 것은 힘든 것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면서 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비로서 끝나는 문제들을 우리는 안고 삽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한 쪽은 교회의 창립자인 바울을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했고, 다른 한 쪽은 바울에 이어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했던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했습니다. 그렇게 고린도 교회는 갈라져서 싸웠습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할 교회가 선을 이루어 볼 겨를도 없이, 서로 싸우느라 바빴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가 단호하게 복음의 원리로 훈계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고린도 교회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리다, 미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복음을 받아 들였기는 했지만, 그래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긴 했지만, 아직도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성령이 아니라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바울 사도가 쓰고 있는 단어가 사르크스라는 말인데, 이것의 뜻은 육신또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이렇게 분쟁 가운데 있는 이유는 성령의 뜻 안에 있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죄 된 본성 가운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자꾸 보고, 병 고치는 등의 큰 능력을 행하고, 속세를 떠나는 수도자처럼 사는 삶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런 삶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무당들인데, 그들은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보고, 병도 고치고, 속세를 떠나서 삽니다. 그런 삶을 보고 영적인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주술적인 삶입니다.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환상을 보고, 병을 고치고, 금욕적인 삶이 기독교에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토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적인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그 능력에 우리의 삶을 맡기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있기 때문에, 즉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그리스도인은 점점 성숙해져 갑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성령의 능력에 사로 잡히지 않고 육신에 여전히 속한 사람, 즉 자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신앙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리켜, 젖먹이 또는 어린아이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젖먹이
, 어린아이의 특징은 본능적인 욕구를 따르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양보라든지 희생이라든지 헌신을 모릅니다. 인내하지도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투정부리고 소리지르고 울어버립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딱 이 수준이라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매우 큰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가 무슨 일을 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구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농부의 이미지를 들어서 사용합니다.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서 할 일은 먼저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물을 잘 주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만해도 농사가 나라의 기본 산업이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농사 짓는 것을 볼 수 있었죠. 농번기에 농부는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리느라 바쁩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서 먼저 논이나 밭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소에 쟁기를 매달아 땅을 갈았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되고 난 뒤에는 경운기(일명 딸딸이)가 그 일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논이 밭에 물을 대는 일입니다. 비가 오면 논이나 밭에 물을 잘 대기 위해서 수로를 잘 파놓아야 합니다. 가뭄을 대비해서 저수지 등을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한 여름, 비가 잘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풍성한 결실을 맺으면 처음 열매를 가지고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추석입니다.

 

이렇듯, 바울 사도는 농부의 이미지를 들어서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건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동역자, , 그리고 집입니다.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과 아볼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한 사역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농사 짓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인 농사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밭이 필요합니다. 그 밭이 바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었다는 것이죠. 그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대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씨를 뿌리고 물을 댄다고 해도 씨앗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씨를 뿌리고 물을 줘도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씨앗을 뿌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물을 준 아볼로도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것을 알아야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고 선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큰 일을 했고, 누가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누가 더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인물이고, 이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한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교회가 자라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헌금 많이 해서 교회가 이렇게 자라난 거야, 내가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한 덕분에 교회가 이렇게 자라난 거야, 내가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 덕분에 이렇게 교회가 자라난 거야, 등등 자신이 교회에 기여한 그것 때문에 교회가 자라났다고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더 큰 일을 했는지 겨루고 싸웁니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사역자, 즉 일꾼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8절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한 일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서 한 일은 굉장히 값진 일이고 하나님께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만족해야지 더 나가서 자신이 하나님이 된 양, 자기의 일이 교회를 자라게 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 곤란해 진다는 겁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나, 저 사람이 하는 일이나, 내 눈에 보기에는 달라 보이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열심히 하는 것 같고, 나는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빈둥빈둥 노는 것 같아 보여도 부르심에 따라, 그리고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일을 맡기시고 그것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워 나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인 삶,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고린도 교회 못지 않게, 바로 이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우리 교회에 고린도 교회 같은 분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눈에 보이는 분쟁이 없다고, 우리가 영적인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격려입니다. 그리고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합니다.

 

특별히 교회 성전 봉헌을 앞두고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이때, 절대로 영적인 긴장감을 늦추지 마십시오. 사탄이는 우는 사자처럼 어슬렁거리며 호시탐탐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게 만들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성전 봉헌이 되면 교회가 더 강해지고 더 열심을 내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영역이 줄어들 텐데 사탄이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무한히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과 은총을 무한히 내려주고 계는 것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씨를 뿌리고, 열심히 물 주면 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느라 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해서 이게 무슨 말인지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에 속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면 됩니다. 이것을 알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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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8. 07:24

2011 2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58:1-9

제목: 금식기도

 

제목만 보면, 금식해라, 금식기도 합시다, 무슨 이런 말씀 드릴 것 같아 겁나십니까? 바쁘고 힘들게 사시는데, 금식하자고 하면 신경질 나시죠? 걱정 마십시오. 그런 거 아닙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금식기도이지만, 말씀의 초점은 금식기도 하자에 있는 것이 아니니, 마음 편하게 말씀에 경청해 주십시오. (그런데 설교문 작성을 마치고 드는 생각인데, 오히려 금식기도 하자라는 말이 더 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긴 세월에 걸친 말씀입니다.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제 3 이사야라고 불리는 56장에서 66장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포로로 잡혀 가기 전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의 이스라엘의 삶까지 기록해 놓고 있는 방대한 책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의 삶이 쉽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성전도 지어야 했고, 살아갈 집도 지어야 했고, 삶의 터전을 가꾸어야 했고, 무엇보다 무너진 신앙의 틀을 다시 잡아야 했습니다. 신앙의 틀을 다시 잡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이란, 그 동안 무너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시키는 것이었으니까요.

 

집도 짓고, 성전도 짓고, 무너진 성벽도 재건축하고, 삶의 여러 가지를 다시 복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그들이 집도 잃었고 성전도 잃었고, 예루살렘 성에서 쫓겨나 포로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극적으로 돌아오게 되었냐, 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줄기차게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되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번 다시 그러한 오류를 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모든 것이 다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큰 일을 겪고 나면 무슨 일에든지 조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금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통해 종교적인 경건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오늘 말씀 5절에 나오듯이, 그들은 금식한답시고, 종교적인 경건을 회복한답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한답시고,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취함으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경건해지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굉장히 충격적인 대답을 듣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상급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도리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 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을 요즘 말로 바꾸면, 예배도 안 빠지고 나오고, 헌금도 잘 하고, 교회 봉사도 잘 하는데, 왜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요즘 우리들이나 경건한 삶에 대해서 매우 오해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경건의 삶을 따로 뚝 떼어서 생각한다는 것이죠. 큰 틀에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연관된 삶 따로 있고, 하나님께서 신경 안 쓰시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경건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지를 일깨워 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 경건은 살면서 어느 일정 기간 동안 뚝 떼서 경건을 강조하는 식의 경건이 아니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 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말합니다. 한 순간 만이 아니라 한 부분 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용어로 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한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왜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오늘 주제어와 관련해서 다시 질문 드리면, 금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입니다.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입니다. 이게 틀린 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완전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문제가 바로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웃과의 관계, 서로 간의 관계를 올바르지 못하게 하면서 온전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2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이들이 했던 행위들,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들을 통해서 이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위에 말씀 드렸듯이,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잘 하고, 교회 봉사도 잘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했던 이들에게 심각한 문제 있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엉망이었다는 겁니다. 6절과 7절 말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모두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웃과 관련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그들이 이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들은 금식한다고 하면서 오락을 구하고 온갖 일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논쟁하고 다투고 악한 주먹으로 이웃을 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금식하면서도 이웃 사람들에게는 상처 주는 일만 했습니다. 배고픈 자, 집 없는 자, 헐벗은 자, 즉 가난한 자를 나 몰라라 했고, 자신들의 핏줄, 형제 골육들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바꾸어서 이야기 하면, 자신의 문제에만 빠져서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변을 좀 돌아보십시오. 자꾸 자신의 문제에만 갇혀 있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에게, 이웃들에게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불편한 마음, 불편한 관계를 다 푸시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당장은 안 되더라도, 이미 마음 속에는 그러한 용서와 용납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마음이 열려야 한다는 겁니다.

 

금식과 연관 지어서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보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금식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최고의 경건한 방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금식에 초점을 두지 않으시고, 이웃과의 관계 맺음에 초점을 두고 참된 금식,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당신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면 된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엉망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이 말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영역 따로, 이웃 영역 따로,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 생활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생활도, 직장 생활도, 내가 관계되어져 있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는 하나님께 금식기도 하는 그러한 경건한 삶이 형성되어 있는지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맺어졌을 때 주어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급할 때 하나님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빛처럼 빛나며, 우리의 삶의 어려움과 고통이 급속하게 치유되는 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들어설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문제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만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려야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이건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금식기도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다라고 응답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삶의 지극히 작은 한 영역만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삶은 없습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고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따릅니다.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네가 부르짖을 때에 내가 여기 있다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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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 31. 23:44

2011 1 3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1:18-31

제목: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

 

우리의 삶은 온통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구원을 갈망합니다. 의학이 발달한 이유는 건강의 구원을 위해서고, 경제가 발전하는 이유는 궁핍함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서이고, 기술이 발전한 이유는 생활에서의 구원 때문입니다. 종교의 발전은 삶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소소한 것에서부터 거창한 것까지 우리가 겪는 삶의 문제는 모두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도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활 속에서 바라는 구원과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삶의 소소한 구원의 차원으로 성경의 구원을 이끌어 내립니다. 우리는 그저 구원을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 먹고 살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한참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의 삶 속에 실증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뉴스를 보니까, 한국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 간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경찰 간부의 이력이 대단합니다. 경찰대학 출신의 엘리트고, 그 중에서도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선배들까지 제치고 초고속 승진을 했습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경정의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런 그가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어머니가 죽는 바람에 정확한 살해 원인은 미궁에 있지만, 지금까지 자백한 내용을 토대로 살해 원인을 분석한 결과, 어머니가 떠 안고 있는 사채를 해결하고자 어머니와 짜고 상해보험금을 타려고 그러한 일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이 잘못된 것이죠. 몸에 상해를 입히기 위해 아들은 강도로 변장하고 밤에 어머니 집에 들어가 자고 있는 어머니 가슴에 볼링공을 수차례 떨어뜨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머니는 갈비뼈가 6대 부러졌는데, 그것 때문에 몸 속에서 출혈이 너무 많아 그날 밤 갑자기 죽었습니다.

 

지금 제가 이런 패륜적인, 생각하기도 싫은 사건을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결국에는 구원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이들은 사채에서 구원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지혜가 바로 보험사기였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보험금은커녕 어머니는 죽고 경찰 간부 아들은 쇠고랑을 차게 됐습니다. 구원 받으려다가 더 나락으로 떨어진 형국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는 늘 이렇습니다. 지혜 있는 것 같으나 우리 인간의 지혜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삶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우리 인간의 지혜와는 차원이 다른 지혜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혜가 뭡니까? 영어로는 Wisdom, 히브리어로는 호크마라고 하는데, 이는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일을 더 꼬이게 만드는 것을 미련하다고 합니다. 지혜의 반대말이죠. 한 마디로, 오늘 말씀은 인간은 미련하고 하나님은 지혜롭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두고, 인간 편에서는 미련한 일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지혜로운 일이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십자가 사건은 미련한 일입니까? 지혜로운 일입니까? 별 생각 없으십니까? 아무런 느낌이 없으십니까?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저 십자가를 하나님의 참된 지혜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감탄이 깊은 사람일수록 신앙이 깊은 것이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일수록 신앙이 없는 겁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22절 말씀을 풀이하다 보면 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인 줄 알게 될 겁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렇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도 끊임 없이 표적을 구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이 무엇이요?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일반 사람이 흉내 낼 수 조차 없는 대단한 기적을 베풀기 원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은 그들이 원하던 표적과 기적을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는 듯싶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다니셨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표적과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지,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그들의 그릇된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도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호기심에서 또는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적을 베푸실 거라는 기대는 품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으로 일어날 뿐이지, 우리의 호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방식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적 같은 일이 삶 속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분은 철저하게 호기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온전히, 정말 온전히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그 분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는 신앙인은 기적 같은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바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다 보니까 기적 같은 일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등 그들이 생각하는 표적을 보이시는 것 같고,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 같으니까 떼를 지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를 못박으라고 성난 군중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구원자는 기적을 베풀었던 것처럼 엄청난 힘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원하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신 예수는 그들의 눈에 패배자, 신성모독자, 미친 사람처럼으로 밖에는 안 보였습니다. 결국, 예수는 그들에게 꺼리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헬라인을 보겠습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을 대표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두 종류의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이방인인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혜의 범주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 보기에 십자가는 전혀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그들이 섬기는 신과 같은 어떠한 능력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사람은 극악무도한 죄수뿐이었지 명망 있고 덕망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어떠한 신도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일련에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은 그들이 보기에 미련한 것이지 절대로 지혜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이 구했던 표적도 아니고, 헬라인이 찾았던 지혜도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에 동의하고 그것을 믿는 자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것을 믿으십니까?

 

위에서 제가 지혜를 뭐라고 그랬죠?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을 적용해서 다시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가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느끼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일을 풀어주는 능력이 됩니까?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을 가장 크게 발휘하는 것을 뭐라고 가르칩니까? 돈입니다. 직설적으로 질문해서, 돈이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입니까? 세상에서는 돈이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푸는 열쇠라고 세상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에 매어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는 그저 세상살이에서 진짜 능력이고 지혜인 돈을 잘 벌게 해주는 헬퍼(도와주는 사람) 역할을 해주는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게 기복신앙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생활의 깊숙한 곳에 침투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표적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주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을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헤프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큰 틀에서 보지 못하고, 내 삶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하찮은 수준으로 떨어뜨려 봅니다. 눈 앞에 것만 보고 생각하지, 그 뒤의 것을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그 사실만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그 뒤에 있는 부활을 전혀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장 눈 앞에 있는 것만 생각했지,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위의 기사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인간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라, 실존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인간의 실제 모습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서 우리 스스로를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져서 그렇지,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일을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위의 기사에서도 보았듯이,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도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지혜로 풀어가는 듯 했으나, 결국 패가망신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혜, 세상의 지혜에 의지할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지혜, 세상의 지혜는 당장은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문제를 풀어주지 않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정반대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보듯이, 인간들의 눈에는 문제가 꼬여가는 것 같으나, 결국 문제를 풀어낸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으나, 결국에는 참된 구원을 가져다 준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받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저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저 십자가는 수단이 아니고 목적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총에 푹 잠겨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가 풀어져나가는 기적과도 같은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은총을 날마다 체험하시는, 날마다 구원 가운데 거하시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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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 26. 01:20

2011 1 2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4:12-25

제목: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오늘 말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사역 시작, 2. 제자들을 부르심, 3. 예수님의 사역(Teaching, Preaching, Healing)

 

우선 예수님의 사역은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이 고향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런데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호수가에 있던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이사를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에 의하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 15, 16절은 이사야 9 1-2절 말씀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하신 갈릴리 지역이 어떤 지역이었는지를 알아야 이 말씀이 이해 됩니다.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33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33:51b-53a).

 

열 두 지파 중, 갈릴리 주변에 자리 잡은 5개의 지파가 있습니다.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므낫세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아셀과 납달리, 그리고 스불론은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이들은 그 땅의 거민을 몰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거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실패한 것이죠. 그러니까 갈릴리 지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방민족들에 의해서 타락한 문화가 형성된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 가장 무시를 당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 46절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납달리, 스불론 지역은 역사적으로 매우 불행한 지역이었습니다. 북쪽의 국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늘 이방민족과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전쟁터로 쓰이던 지역이다보니 경제적인 피해가 말도 못했고 이방민족에게 늘 짓밟혔습니다. 실제적으로도,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10년 전에 이미 납달리와 스불론 지역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가장 심한 지역임과 동시에 가장 수난도 많이 당한 지역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그곳이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였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불순종이 가장 충만한 곳에서, 순종이 가장 충만하신 분이 활동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 싶으셨는지, 금방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순종이 가장 심한 곳에서 순종의 삶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신 것이죠. 바로 불순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 자체가 순종의 삶을 가르치시는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에는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어부였던 이들을 부르셔서,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들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에 아멘하지만, 성경에 문외한인 사람이 들으면 무슨 인신 매매단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순종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부르심을 받는 제자들의 순종이 중요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불순종의 사람을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자신은 불순종 하면서 다른 사람보고 순종하라면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나를 따르라 Follow me”라고 했을 때 이들은 즉시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물과 가족들을 그 자리에 내려 놓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부르심의 사건 자체가 순종이었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유가 많아서 순종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즉시 응답한 것을 통해서 순종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Teaching, Preaching, Heal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르침(Teaching)은 윤리적인 삶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이어서 나올 산상수훈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부름 받은 성도로서의 삶, 즉 말씀대로 사는 삶에 대한 것이 가르침입니다. 가르침이 먼저 등장하는 이유는 마태복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Preaching을 듣지 못해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해서 욕을 먹습니다.

 

Preaching은 선포라고 하는데, 이는 회개를 불러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은 회개를 불러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왔다는데,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데 불의한 우리들이 거기에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부터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회개인데, 이게 철저하게 행해지지 않으니까 그 이후의 어떠한 가르침도 그들의 삶에 깊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 병고침의 사역도 굉장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병고침을 베푸신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곳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별 다른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병고침 사역을 하셨는가? 병고침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주는 표적이었고, 예수님께서 전하고 다니신 하나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병고침은 표적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을 이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병이 고쳐지는 것처럼 온전함의 나라입니다. 병든 사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배척당한 다른 뜻이 아니라, 병이 고쳐지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병고침의 역사를 바라면서 삽니다. 물론 현대 의학이 그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병이 고쳐진다는 그 사실 자체가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에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고,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행위였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의 삶을 몸소 보이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세월이 얼마나 화살같이 가는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주머니 파 보따리 속에서 파가 쑥쑥 자라고 있고, 아주머니 밤 보따리 속에서 밤꽃이 막무가내로 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사랑)해 볼 시간도 없이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방황, 고민, 불순종, 이런 것도 건강하니까 하는 겁니다. 납달리와 스불론 땅에 거하든 사람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 볼 겨를도 없이 , 하다가 나라가 망해 이방민족들과 섞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평생 한 많은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그곳에, 흑암에 앉은 백성에서 큰 빛이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았다면 이들은 그냥 그대로 불순종의 아들로 멸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은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가장 불순종이 심했던 곳에 가장 순종의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불순종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순종의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그 분의 부르심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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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 18. 23:12

2011 1 1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9:1-7, 요한복음 1 29-30, 35-42

제목: 택함 받은 자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본문은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 할 때,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나는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를 종이라고 고백할 때, 거기에는 겸손함이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 우선 종에 대한 잘못된 생각 중 하나가 종은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의 종은 마음 속에 한이 쌓입니다. 신분제도가 있었을 때에 종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양반 쌍놈 구분해서, 양반은 주인으로 군림했고 쌍놈은 종으로 지배 받았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런 세상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인간 세상과 같은 신분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분의 관계와 신앙 고백의 관계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신분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 사이에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지만, 신앙 고백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 사이에는 무한한 자유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 대하여 이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대로 부리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측면에서 우리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면, 우리는 그 고백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거기에 종속된 종으로 전락하면 자유를 박탈 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종으로 속한 사람, 하나님을 향해 자기 자신을 종으로 낮추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세상이 다른 이유고, 우리가 세상의 다른 무엇에게는 종으로 메이면 안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종으로 메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종이 신앙 고백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부르시고 기억하셨다고 말입니다. 우연히, 즉흥적으로 자기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계획 가운데 불렀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은 그냥 아무렇게나 길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이 그의 삶 전체 가운데 미칩니다.

 

종은 계속해서 고백합니다. 자신의 인생은 돌 굴러 가듯이 막 굴러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 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일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연단하신다는 겁니다. 자신의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셨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화살통에 감추셨다고 합니다. 왜 감추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때에 정확하게 쓰시기 위해서 아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실 때 이 말은 우리 인간 세상에 있는 그런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인간 세상의 종은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그냥 소모되고 마는, 그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 그야말로 잡초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섭니다. 세상의 종과, 하나님의 종이 어떻게 다른 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4절에서 갑자기 종이 한탄합니다. 현재 자신의 주변여건상황을 살펴보니 모든 게 갑자기 부질 없어 보이고 허무해 보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질 없어 보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이 개입이 되어 있습니다. 아주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고민이고 번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하나님의 종으로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무너져 버렸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러한 역할을 한 사건이 바로,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바벨론 포로 사건은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되돌아 보게 하는 가장 뼈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민인 우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에게 이렇게도 무참하게 짓밟히고 포로로 잡혀 왔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런 순간이 없으셨습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자기 자신을 절실하게 돌아보는 순간이 없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단순히 인생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분명 자신들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하고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삶에는 이상하게도 우리가 뜻하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고, 내가 하나님 믿고 있는 사람이고, 내가 예수님 믿는 그리스도인인데, 왜 이런 일들이 이렇게 나에게 일어나는 건가?” 그러면서 이런 생각 들죠. “교회는 다녀서 뭐하나.. 예수는 믿어서 뭐하나.. 교회 다니면서 봉사한답시고 헌금도 하고 친교 하느라 힘들고 교회의 일 여러 가지 고생했는데.. 이게 뭔가..”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드는 시험거리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벨론 포로 사건을 통해서 이러한 시험에, 처절한 시험에 들었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자신들의 identity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구약성경입니다. 그 중에서 작은 한 부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처절한 질문 가운데서 그들이 내린 결론이 5절과 6절에 함축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그들은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5절 후반에 핵심적인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사실 현실은 비참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개처럼 끌려가서 포로생활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살던 고향은 이미 파괴되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도 이 종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영화롭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운 고백이지만, 신앙의 깊이가 우리와는 다른 엄청난 고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종이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5절에 나옵니다. 그가 그렇게 고백한 이유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과 자기에게 주어지 사명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 뜻과 사명이 6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 우리는 이 지점에서 복음서의 말씀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오늘 이사야서에서 벌어진 일들을 예수님에게 적용시켜 보십시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 즉 택함 받은 자입니다. 메시아 입니다. 그분은 30년 동안이나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상을 두루 다니며 입에서 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쏟아 내셨습니다. 입이 날카로운 칼 같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무슨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영광은 무슨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그의 삶 내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다니셨는데 영광은 무슨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그는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임 당했습니다.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49 4절에서의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런 고백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고백과 함께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49 5절의 마지막 부분과 상황이 같습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주 받아 죽은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이방의 빛으로 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에 이르게 하신 것처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고, 그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 번째로 안드레를 부르시고, 두 번째로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그렇게, 바로 여기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있는 우리 각자 각자를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다.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돌 굴러 가듯이 막 굴러 가는 인생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이 날카로운 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독설을 내뿜는 입이 아니라, 에베소서 6 17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내뿜는 거룩한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갈고 닦은 화살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탄 마귀를 심장을 꿰뚫어 버리는 날카로운 화살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받은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이 사명이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보이면, 포로로 잡혀가고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합니다.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것처럼 죽어갔을지라도, 영광 중에 부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듣기 좋으시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고 실재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실재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구나!”는 의심이 드십니까? 감당하기 힘든 일 가운데 신음하고 계십니까? 그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택함 받는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자,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 주십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부활의 역사가 꼭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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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 11. 00:03

2011 1 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3:13-17, 10:34-43

제목: 세례, 증인으로 세움 받음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면서 주님의 수세 주일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을 수세 주일로 지키면서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바로 이 세례 받음을 통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그리고 세례 받으시고 난 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세례와 우리의 신앙 생활의 상관관계를 짚어볼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찬식을 하는 날이나, 세례식을 하는 날이나, 시간이나 잡아먹는 지루한 예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맙니다. 정말로 세례가 그런 것에 불과하다면 기독교 역사가 세례를 교회의 중요한 의식으로 정하고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례전으로 자리 잡았고,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앞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은 세례를 지루한 예식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알고 행해야 할 중요한 예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받으신 세례는 단순한 물세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즉위식이었습니다. 고대의 왕들은 왕으로 등극할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름 부음을 통해서 공식적인 왕으로 등극을 하고 그때부터 공적인 업무를 수행해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있어 세례는 기름 부음의 의식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례가 곧 기름 부음은 아닙니다. 세례는 기름 부음을 받기 위한 정결의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않으면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 의해서 요단강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왔습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정결의식과 기름 부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영적인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그때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시며 공식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또 하나의 본문인 사도행전에서도 이 사실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거기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이 세례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38절에서 베드로의 진술에 의하면, 세례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부으신 사건입니다. 세례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지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요약해서 잘 전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고 나신 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좀 더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세례 받으시고 난 후, 세 가지의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하늘이 열렸고, 둘째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고, 셋째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첫째로, 하늘이 열리는 현상은 매우 중요한 묵시(비밀)가 올 때의 징조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면 사도 요한이 종말에 있을 일을 알게 될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굉장히 시각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도 이 말을 가끔 씁니다. 뭔가 잘 모르겠고 답답했던 일이 한 순간에 풀릴 때, 우리는 하늘이 열리는 것 같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하늘에 무슨 문이 있어서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큰 비밀이 밝히 드러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비밀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큰 비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하늘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한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기독교 전문 연구 조사 기관인 바나그룹이 2010년도 리서치를 통해서 발표한, “미국 기독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6가지 변화라는 자료를 보니, 요즘 현대 기독교인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성령이 무엇인지 대개 하나님의 능력 정도로 생각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귀신과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오류는 성령을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귀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 분에 의해서 우리가 움직여 집니다. 성령님은 자유로운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십니다. 새창조의 영이십니다.

 

오늘 이 짧은 시간에 성령이 무엇인지, 성령님께서 누구시고 어떠한 일을 하시는지 다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령님에 대한 상식은 많은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무엇보다 새창조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 새로운 삶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사역을 감당하시게 될 거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새로운 세상을 여셨습니다.

 

셋째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확정해 주는 말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고, 그리고 이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라는 확정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하늘이 열린 정황입니다. 하나님의 큰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러한 정황 속에서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세례는 매우 드라마틱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아이덴티티가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인데, 그것이 세상에 공적으로 공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세상에 전하는 엄청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께서 드라마틱하게 새로운 삶의 국면에 들어서신 것처럼 우리도 드라마틱하게 새로운 삶의 국면으로 들어섭니다. 첫째,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의 행위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교회에 일원이 됩니다. 셋째, 새로운 삶을 부여 받습니다. 이것이 세례가 가져다 주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이 무엇인지 증인으로 세움을 받는 취임식입니다.

 

세례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례는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 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엄청난 순간입니다. 세례 받은 자는, 사도행전 말씀의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 하면서 세상을 향해 우리에게 주어진 증언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고,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이라고 에베소서 6 12절은 전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으로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들
.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언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일들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수세 주일을 맞아, 우리는 증인의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인지 돌아보면서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귀한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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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28. 08:44

2010 12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0-18

제목: 인간의 굴레와 그리스도의 구원

 

어느덧 2010년도가 다 지나고 마지막 주일을 이렇게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선한 싸움을 함께 싸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한 해를 이렇게 보낼 때마다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많이 느낍니다. 특별히 우리 인생은 질병과 고통 가운데 있고, 그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한 해가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뉴스를 보니까, 즐거워야 할 성탄절기가 각종 사고로 얼룩이 졌다고 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성탄절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네 개의 촛불을 켰습니다.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의 촛불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전야 예배를 드리면서 그리스도의 촛불을 켰습니다. 그 촛불을 켜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것들,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을 가져다 주셨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그런 소식이 아니라, 각종 사건 사고 소식과 더불어 여전히 희망 없고, 평화 없고, 기쁨 없고, 사랑이 없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크리스마스 자체가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왠지 마음이 기쁜 것 같고, 분위기를 살려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추리도 하고 선물도 사고 맛있는 음식도 해서 가족들과 또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면 마음이 이전보다 더 허전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절을 복음으로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복음을 온 몸으로, 온 삶으로 받은 사람들은 그 기쁨이 날로 자라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격적으로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받은 사람에게는 그 기쁨이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심리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심리적으로 이용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쉽게 휘둘립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깨어 있던 선지자들도 성경에서 이 점을 계속해서 지적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언제든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아닌 것을 자꾸 심리적으로 그렇게 믿으라고 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예레미야 선지자와 대립했던 하나냐 선지자는 철저하게 남유다 백성의 심리를 이용해서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대중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말씀을 전했는데 비해, 하나냐는 절대로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말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는 말씀을 전했는데 비해,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손에서 저들을 구원해 줄거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냐의 예언이 더 좋아 보입니다. 누가 항복하고 정복당하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와 달랐습니다. 외롭게 힘겨운 싸움을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이토록 연약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 판단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쉽게 병들고, 결국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체는 모두 그렇게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심리적 장치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려서 기분에 따라 살아갑니다. 요즘 우리가 맞는 성탄절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성탄절을 보내고, 이제 2010년도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여러분과 심리적인 복음이 아닌, 심리적인 신앙이 아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 복음, 참 신앙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의 핵심 개념인 성육신대속적 고난에 대해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우리는 이 질문을 꼭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는가?”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그야말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그냥 한 말씀만 하시면 되지, 뭐 하러 번거롭게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사실을 전하면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의 실존은 혈과 육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많은 한계에 부딪히면서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혈과 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고통 가운데 신음합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씌워진 굴레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굴레가 인간의 궁극적인 약점이고,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15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존재라고 말입니다.

 

마귀는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됩니다.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을 넘어지게 합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끊임 없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헤롯 대왕을 통해서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죽음으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요셉에게 피신하라고 알려주었고, 그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의 삶은 죽음의 세력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종 질병과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시고 어루만져 주셔서 그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귀는 끊임 없이 예수님과 대립했습니다. 제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제사장들과 빌라도와 헤롯까지 한 통속이 되도록 공작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를 돌아서게 하고, 유다를 꾀여 음모를 꾸미게 해서 예수님을 결국 죽음에 몰아 넣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귀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죽음의 권세로 결국 예수도 죽게 만들었다는 승리의 미소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군중들도 모두 그렇게 그냥 끝나는 줄 알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잃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마귀를 멸하시는 방법이, 바로 그 죽음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통쾌한 역설이고, 기막힌 역전입니다. 죽음과 죽음의 폭군을 이긴 방법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되어 성육신 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혈과 육에 속한 인간이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으셔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던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과 육을 취하시고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혈과 육의 한계에 묶여 있는 인간을 도우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성육신과 대속적 고난을 체험하신 분이기 때문에 혈과 육의 한계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우리를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One of us, 되신 겁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를 기쁘게 하고 흥분되게 하고 소망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은 이 복음이지, 세상이 조작하는 심리적인 장치들이 아닙니다. 네온 사인이, 크리스마스 캐롤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들이, 분주하고 활기찬 쇼핑몰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혈과 육에 속한우리 인간들처럼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처럼 인간의 굴레를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 그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이 복음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겁니다.

 

크리스마스가 끝났는데도,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죽음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를 통해 각종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삽니다. 뉴스를 통하지 않더라도, 예수를 믿고 있는데도,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내 삶에 여전히 질병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 심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게 뭐야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라면서 투덜거리지만, 복음을 인격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받아들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내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질병과 맞서 싸웁니다. 이런 사람은 고통 가운데 기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합니다. 내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 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에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다. , 인간의 굴레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봅니다. 이게 보여야 합니다. 복음을 따라가면 이게 보입니다. 이게 보이시는 분은 복음을 잘 따라가고 계신 중이고, 이게 안 보이는 분은 좀 더 분발하셔야 합니다.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굴레에 매여 질병과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면서 살고 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이, 성육신과 대속적 고난의 복음이 우리들의 희망이요, 평화, 기쁨이요, 사랑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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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28. 08:42

2010 12 1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7:10-16, 마태복음 1:18-25

제목: 사랑하면 들린다

 

아하스 왕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유약하다고 해야 할까요? 무지하다고 해야 할까요? 믿음이 없다고 설명해야 할까요? 아무튼,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대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불신앙에 빠지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하스 왕은 지금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아람 왕 르신하고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연합해서 자기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당시 남유다 왕국은 세력이 매우 약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예를 들면, 북한하고 중국하고 손잡고 한국을 치러 오는 형국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하스 왕은 마음이 마구 흔들립니다. 그의 마음을 7 2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오늘 말씀은 이렇게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나라가 망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굉장히 흥미로운 말로 표현을 합니다. 너무 유명한 구절이죠?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쓰인 말씀입니다. 14절입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에서의 핵심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징표를 말하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에서 아하스 왕은 위로를 받고 새힘을 얻었어야 합니다. 임마누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시는 말씀이, 이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나이가 되기도 이전에, 아하스 왕과 남유다 왕국을 괴롭히던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망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람은 주전 732년에 앗수르에게 병합되었고, 북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하스 왕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졌는데, 아하스 왕은 그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한 일이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안방에 적을 들여 놓은 일을 한 것이지요.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 지금 당장의 위기를 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앗수르는 결국 가장 큰 적이 될 나라지 아군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역대하 28장의 말씀을 보면, 앗수르는 도와주러 와서는 남유다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남유다를 침략해서 약탈해 갑니다.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또 다른 본문인 마태복음을 보면 요셉에게 같은 말씀이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법은 약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약혼이 곧 결혼은 아니지만 약혼한 사이는 결혼한 사이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서로에게 구속력을 가집니다. 만약 약혼 한 시기에 성적인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인데, 그만 마리아가 합방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한 겁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지금이야 혼전 임신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들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아무런 해가 끼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조용히, 아무도 눈치 못 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19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 때 의롭다는 의미는 율법을 잘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의로움과 명성에도 손상이 안 가고, 마리아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말합니다. 20절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그리고 이사야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내려졌던 말씀이 요셉에게도 내려집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오히려 마음이 강팍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리고 왔다고 오늘 말씀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구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 더 확실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하스 왕에게 전해진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고, 요셉과는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을 통해서 직접 눈 앞에서 전해진 말씀입니다. 보이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전해진 말씀은 현실이 아니라 꿈 속에서,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두 말씀 중 어떤 말씀이 더 확실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더 신뢰하십니까?

 

물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나, 꿈을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똑 같은 말씀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전해진 말씀이 더 확실한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말씀이니까요! 꿈 보다는 현실이 더 확실한 겁니다. 많은 분들이 꿈을 오히려 더 확실하게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긴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꿈을 통해서 뭔가 봤다, 들었다 하는 것 자체를 무슨 신통력을 지니고,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는데,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아하스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직접 듣고, 요셉은 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둘 중에서 더 확실한 방법으로 전해진 것은 아하스 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누가 더 잘 들어야 할 상황입니까? 아하스 왕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요셉은 그것이 꿈으로 전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마음만큼 듣게 되어 있습니다. 들음과 행동은 곧바로 연결 되는데,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행동하게 됩니다.

 

손쉬운 예로, 자식과 남편이 하는 말 중에 누구의 말을 더 잘 듣게 됩니까? 자식이 엄마, 이리로 와 보세요! 엄마, 이거 해주세요.” 그러면 이상하게도 자식의 말에는 능력이 있는지, 그래.. 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남편이 부르거나 뭐 해달라 그러면, “왜 자꾸 불러싸요! 왜 자꾸 사람 귀찮게 해요!”하면서 핀잔을 줍니다. 이미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똑 같은 말씀이 주어졌는데, 아하스 왕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분부대로 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아하스 왕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했는지는 아하스 왕의 행적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평소에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19절에서 그리고 있듯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의 다른 말입니다.

 

요즘에 한국에서 식사와 관련해서 이런 농담이 유행한답니다. 하루에 한 끼도 집에서 안 먹는 남편을 일컬어 영식이 양반이라고 부르고, 하루에 한 끼만 집에서 먹는 남편을 일컬어 일식이 분, 그리고 하루에 두 끼를 집에서 먹는 남편을 일컬어 두식이 놈, 그리고 하루에 세 끼를 집에서 챙겨 먹는 남편을 일컬어 삼식이 새끼라고 한답니다. 그러면 하루에 세 끼와 간식까지 꼬박 챙겨 먹는 남편을 뭐라고 부르는 지 아십니까? 삼식이 간나 새끼라고 한답니다.

 

사랑이 식으면, 밥 차려 달라는 말도 듣기 싫어집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서, 가족들 간의 사랑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이 하는 말이, 또는 부인이 하는 말이, 또는 자식이 하는 말이 들리십니까? 그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만큼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끼리도 때로는 말이 안 통한다, 하면서 서로를 헐 뜯고 미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일이 부족하니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마시고,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하십시오. 사랑하지도 않는데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하니까 그게 잘 안 되고 힘들고 그런 겁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말이 귀에 들리고,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저절로.

 

우리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만큼 듣게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고 싶어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다는 겁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 있는 형국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 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내 마음에 합한 것만,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임신한 여인을 데려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했던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입장에서 이 일을 묘사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입장에서 이 일을 묘사합니다. 거기에서도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일생일대의 위기요 위험한 일을 받아들입니다. 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자는 잠시 위험에 처해질 수 있으나, 결국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자는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나 결국 멸망 당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면 들립니다. 사랑하는 만큼 들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저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징표요 말씀입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전해졌던 말씀과 천사를 통해서 꿈에서 요셉에게 전해졌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모하십시오. 그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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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14. 14:27

2010 12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야고보서 5:7-10

제목: 기쁨은 인내의 열매다

 

“Are we there yet?” “아직 멀었어요?” 어린 아이들이 차 뒷자석에 앉아서 몸을 비비 꼬며 하는 말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 보려고 노래도 듣고, 책도 읽고, DVD 시청도 해봅니다. 그런데 아직도 달리는 차 안에서 점점 몸을 지쳐가고 더 이상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는 “Are we there yet? 아직 멀었어요?”라는 투덜거림이 튀어나옵니다. 인내를 가지고 조금만 더 참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길 바랄 뿐입니다. 너무 지루하다 보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지루해 보인다는 생각뿐입니다. “.. 지루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기다림일까요?

 

이 동요를 기억하시죠?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서울에 왜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오빠는 서울을 가면서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오겠노라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서울 간 오빠는 언제 돌아올는지 기약도 없고 소식도 없습니다. 오빠를 기다리는 이 소녀의 심정은 어떨까요?

 

이와 비슷하면서도 애절한 마음을 그린 소설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춘향전입니다. 조선시대 신분의 벽을 넘어서 서로 정인이 된 두 사람, 성춘향과 이몽룡. 두 사람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이몽룡은 과거시험을 치르러 한양(서울)에 갑니다. 이도령을 떠나보낸 성춘향! 이도령이 과거급제 해서 다시 돌아와 자신과 혼인할 거라는 걸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도령을 기다리는 성춘향은 마을에 새로 부임한 변 사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합니다. 성춘향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면서까지 저항하고 투옥까지 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성춘향은 굳게 믿었습니다. 이도령이 돌아올 거라고. 그러나 성춘향의 마음 속에는 점점 한이 서려갔습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수모를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위의 동요에서 등장하는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도, 성춘향도 누군가를 인내 가운데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 속에는 한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야고보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메시지입니다. 인내하라, 기다리라 합니다. 표면 상으로는 “Are we there yet?”의 기다림과 뜸북새 그리고 성춘향의 기다림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릴 때 지루해서 온 몸을 빌빌 꼬면서, 그리고 이 마음에 한을 품고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모티브는 농사일입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그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가나안 땅에서의 농사 문화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굉장히 척박한 땅입니다. 땅이 척박하다는 것은 물 구경하기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아무리 비옥해 보이는 땅도 물이 없으면 쓸모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는 대개 강물이 흐르는 곳을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짓기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요단강이 흐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 땅의 지형입니다. 요단강은 해발 -200미터 정도 지역을 흐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계곡을 흐르는 물입니다.

 

요즘에야 한일 자동펌프같은 것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다 쓰면 되지만, 고대 사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저 200미터 밑에서 흐르는 물을 퍼다가 농사짓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농사 지을 때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물의 원천은 빗물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 땅에는 비가 잘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타이밍입니다. 비가 제때 와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내리는 비, 그곳도 농사가 잘 되기 위해서 제때 와주어야 하는 비, 그 비가 바로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가나안 땅는 11-3월은 비가 오고, 5-9월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10,11월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하고, 3,4월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를 합니다. 파종과 수확에 있어서 이 비는 생명과도 같은 비입니다.

 

비가 내리느냐 안 내리는냐에 따라서 농사의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제때 잘 와줘야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는 생명줄과도 같았고 비를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었으니, “이른 비와 늦은 비신앙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농부는 땅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씨앗이 자라나 맺게 될 열매를 상상합니다. 이미 농부는 그 씨앗의 열매를 보면서 씨앗을 뿌립니다. 그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다림입니까? 그 비가 안 오면,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비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씨앗에서 이미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지만 그 마음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실 거라는 확신입니다. 비를 내려 주셔서 씨를 뿌리면서 보았던 열매를 거두게 하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야보고서 기자는 지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기다림이 어떠한 기다림인지 분명하게 깨달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이고 있는 인내, 기다림에 대한 용어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한 용어입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이 단어를 쓸 때 어떠한 뜻으로 썼는지 원어를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헬라어 원어를 인내, 기다림 정도로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에서 이 단어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줄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Spirited”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에너지가 가득한 상태, 결의, 결심, 또는 용기가 가득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위에서 “Are we there yet?”이나 뜸북새, 춘향전에서 살펴보았던 인내, 기다림과는 성격이 다른 인내,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의 인내, 기다림은 지루함이 가득한, 한이 서린 그러한 인내고 기다림이었지만, 야고보서 기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인내, 기다리는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에너지가 넘치고, 결의, 용기가 가득한 인내,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어 단어에서는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로 “Generosity, Magnanimity”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관대함, 기꺼움정도로 번역하죠.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대한 인내, 기다림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 기자는 이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겁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그 씨앗 속에 있는 열매는 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거나, 현재의 관점에서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나 현재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곳에 임했습니다.

 

이게 보이십니까? 이게 보여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씨앗에서 열매를 보지 못한다면 그 수고가 헛되고 고단하게 됩니다. 지루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열매가 맺어질 지 알 수도 없는 씨앗을 무슨 이유로 뿌립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뿌리는 정도 밖에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농부의 씨앗입니다. 열매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종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입니다.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서 열매를 이미 보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인내, 기다림이 어찌 에너지가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어찌, 기꺼운 마음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용기 백배한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대림절 기쁨의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쁘십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이생의 복들을 누리고 계셔서 기쁘십니까?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 주시는 소중한 기쁨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인내, 기다림에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인내이고 기다림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대한 인내,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기쁨은 인내의 열매입니다.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오는 필연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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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9. 23:29

2010 12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3:1-12

제목: 기본으로 돌아가라 하나님 나라가 정의다

 

영국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려서 엄마에게 버려진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입양을 갔는데, 한 명을 그렇지 못해서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는 평생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40년이 넘도록 이 사람은 엄마를 찾았습니다. 나이가 50세가 넘어서 비로소 그토록 꿈에 그리던 엄마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지독한 당뇨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40년 동안 그리면서 찾았던 엄마 앞에 자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엄마가 충격을 받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 앞에 나타나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엄마가 병원에 가서 병 치료를 먼저 받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병원에서 치료 받던 중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40년이 넘게 찾다 겨우 찾아낸 엄마를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만날 걸, 후회했습니다. 죽은 엄마 유품에서는 아들들을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유서들이 나왔습니다. 엄마도 힘든 인생을 살았고, 아들도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둘은 만나지 못하고 영영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미혼모가 두 아들을 키우다가, 아이들을 키우기 귀찮다며 이제 겨우 3살과 1살 먹은 아이들을 집에 놓아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집을 나갔습니다.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려 주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집에 가서 문을 두들겨도 아무 소리가 없어 경찰은 그냥 되돌아 갔습니다. 열흘이 지난 후, 세 살, 그리고 한 살 먹은 아이들은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경찰에서 이 아이들의 엄마는 단순히 아이들을 키우기 귀찮아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자식을 몇 명 살해한 싱글맘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세 번째 아이가 죽었는데, 이상하게 먼저 죽은 두 아이의 상황과 똑같은 바람에 경찰에 의심을 사 붙잡혔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이상하게 똑같이 장염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아이들 앞으로 사망 보험이 들어져 있었습니다. 아이가 죽고 나서 엄마는 보험금을 탔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 명의 아이들을 죽였는데, 그 중에 두 명은 입양한 아이들이고 한 명은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죽일 때 수법이 이랬습니다. 젖병 등 아이들의 입에 들어가는 기구를 소독하지 않았습니다. 소독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병균이 아이의 몸 속에 들어갔고 서서히 아이는 병균에 감염이 되고 결국 장염을 일으켜서 죽었습니다.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죽인 이유가 어이 없습니다. 애들이 딸린 몸으로 어디 취직하기도 힘들고, 돈도 필요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가슴이 아프죠? 여기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평화가 보이십니까? 정의가 보이십니까? 이러한 이야기는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 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셀 수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 어이 없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는 끊임 없이 우리 인생을 흔드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깨는, 우리 삶에 평화를 깨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옳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순간, 평화는 깨집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분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옳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지는, 아니면 생각과는 다르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우리가 하는 일의 결국은 허망할 뿐입니다. 인간이 쌓아놓은 공적은 결국 다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아무리 큰 공적을 쌓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면서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 삶 속엔 참 평화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인 평화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 마저 쉽게 쉽게 깨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사실 세상을 향해 외칠 말이 참 많습니다.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외쳤고, 공자 같은 분은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을 외쳤고, 수많은 선각자들이 세상을 향해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은 하필이면 그 많은 말들 중에, “회개하라!”를 외쳤을까요? 이는 세례 요한만이 외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향해서 외친 첫 마디가 회개하라!”였습니다.

 

여러분! “회개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표면적으로는 잘못한 것을 뉘우쳐라, 정도로 들립니다.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산다고, 교회만 오면 회개, 회개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오늘 교회 오시기 전에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50, 60, 70대의 세 남자가 모여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50대 남자가 먼저 말했습니다. 형님들 나는 오늘 배가 고프길래 집사람한테 밥 좀 차려줘라고 물어봤다가 뒤지게 맞았어요. 그랬더니, 60대 남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동생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오늘 집사람이 어디 가길래, “어디가?”라고 물어봤다가 뒤지게 맞았어!. 그랬더니, 70대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오늘 아침에 눈 떴다고 집사람한테 뒤지게 맞았어!

 

뭐가 그렇게 잘못입니까? 교회 올 때 스탑 싸인 좀 안 지키고 온 것이 그렇게 잘못입니까? 법규를 잘 지켜야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교회 와서 회개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까지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기를 바라십니까? (물론 지켜야 합니다만). 오늘 교회 오기 전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뭐가 그렇게 잘못을 했습니까? 무슨 죄를 그렇게 고백해야 하고, 무엇을 그렇게 회개해야 합니까?

 

이건, , 회개, 이런 것을 말하는 교회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겁니다. 죄나 회개를 위에서 말한 것 정도로 하찮게 생각하니까, , 회개 등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이죠.

 

회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하라!”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죄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신학적 개념의 죄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와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더 근원적인 죄를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 신학적 개념의 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옳은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우리가 잠깐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는 옳은 일을 할 수 있을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게 원죄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게 원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지혜가 없다는 겁니다. 이 상태가 바로 죄의 상태이고, 불의의 상태입니다.

 

오늘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칩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까 회개하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두 말은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니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회개를 이끌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피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한 사람에 대해서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통치의 개념이, 한 사람에게로 모아진다는 말씀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여기서 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절에서 요한의 모습을 기이하게 그리고 있는 것은 그가 종말론적 인물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종말이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사람으로서의 요한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그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묘사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한 사람에게로 모아진다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거부하는 뜻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고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능력도 지혜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어리석은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퍼붓고 있는 것처럼, 그 누구도 임박한 진노, 즉 하나님의 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10절 말씀처럼, 거부한 자는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 웁니다. 이는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을 정로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11, 12절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일상에서 옳지 못함을 끊임 없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는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삶 속에서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면, 다른 용어로 표현해서, 그를 믿는다면 우리는 옳지 못함 속에서 옳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평화롭지 못한 세계 속에서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어코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무리 불의해 보여도, 이 땅은 정의로 물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곧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곧 정의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의인되게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으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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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