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7. 05:21

2011 11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제목: 소망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그때는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우겠다고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끼리 모여 자연스럽게 교회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교회는 굉장히 자생적으로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이었다는 겁니다. 이 자발적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억지로 하면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일을 하면 헌신하게 되는 것이죠. 교회는 억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생적으로, 자발적으로 형성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훈련이 꼭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이니 성령께서 마치도록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일이 성령이 일이라는 것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들의 못난 욕심이 성령의 일을 자꾸 방해하고, 성령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영성 중, 우리가 가장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죠. 그들은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맡길 줄 알았습니다.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할거니까 내가 할 일이 없지 뭐하면서 뒤로 물러나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의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렇다고 성령의 역사를 거슬러 분에 넘치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전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3주 정도 밖에 안 됐었습니다.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데 박해와 방해가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나 베뢰아로 피신해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정말 짧은 시간입니다. ‘더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더 전하면 좋을 텐데..’, 이러한 아쉬운 마음으로 바울 일행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 일행의 전도사역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짧은 3주 간에 뿌려진 복음 위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은 고린도에 가서 전도사역을 펼치고 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씌어진 서신서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는데, 성령의 역사로 인해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3주 동안 머물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3주 동안 전하지 못하고 온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펜을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하고 그들에게 더 깊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우선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1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요약하면, 이들이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잘 성장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복음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그 안에서 잘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위로와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그 복음 위에 더 굳건하게 서 가라고 격려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단숨에 써내려 간 편지가 아닙니다. 몇 개의 편지를 엮어서 편집한 서신서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시간의 간격들이 보입니다. 그 중 하나가 3 6절입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다시 파송했었겠죠. 그곳에 상황을 더 살펴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의 명을 받아 데살로니가에 가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그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쁜 교제를 나누고 그들의 소식을 가슴에 담아 고린도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바울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을 보면 무엇인가가 달라졌습니다.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1 3절의 말씀과 이제 살펴볼 3 6절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3 6절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1 3절과 비교해 볼 때 여기에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소망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성장해 가고 있긴 했으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망 없이, 믿음과 사랑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으면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래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꾸 현세적인 축복만을 바라는 기복신앙으로 흐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 뭔가에 눌린다는 겁니다. 위로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바로 재림의 지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 이들이 갖게 된 소망 중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실 거라는 것이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들은 로마 황제의 귀환식에 빗대어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6절 말씀이 그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이는 로마 황제의 귀환식을 형상화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한 데는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도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당시 온 세계의 주님(퀴리오스)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온 세계의 주님(퀴리오스)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당국으로부터 박해 받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전도사역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일행의 전도사역을 방해하고 박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소란을 피웁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주님, 퀴리오스)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사도행전 17 7).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귀환할 때나 어딘가를 행차할 때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그렇게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은 로마 황제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나 어울리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로마 황제의 그것에 투영해서 생각하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의 모습에 투영해서 묘사했던 그 모습 그대로 오실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재림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확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다림 속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한 두 명씩 죽어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재림의 소망 가운데 박해를 견디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박해를 견디어낼 힘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딜레마였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아직까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긴 했으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디모데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소망을 다시 심어 주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소망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이유를 이제 좀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바로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다가 먼저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먼저 죽은 자들을 생각하며 슬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미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면서 그들을 소망 가운데 다시 거하게 합니다. 우선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 만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담보하는 약속이라는 겁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예수처럼 다시 살리실 거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의 부활보다 앞 설 거라는 복음을 전합니다. 부활의 순서를 굳이 정하자면, 예수가 가장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한 것이고,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고, 현재 살아 있는 자들이 부활의 몸을 마지막으로 입게 될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하는 걱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부활이 무엇인지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기우(불필요한 걱정, 쓸데 없는 걱정)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바울의 편지를 받아 든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소망을 회복하지 않았겠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셔서 우리의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부활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깨달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동안 잃었던 소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 회복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렇습니다. ‘위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서로를 위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위로할 여력이 없어서 못합니까? 나 먹고 살기 바빠서 못합니까? 마음이 강퍅해서 못합니까? 아직 믿음이 없어서 못합니까?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마음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소망입니까?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왜 없습니까? 내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선한 일도 많이 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내 안에는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이 마음에 위로가 없고 왜 저 마음에 위로를 전해주지 못합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평생 품고 살아야 할 부활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는 있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부족하여, 우리 가운데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된 위로는 결코 다른 데서 오지 않습니다. 각종 엔터테인먼트로 위로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마르게 하는 우물물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에 우리가 더 집중하고, 어디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부활의 소망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줍니다. 그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인입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0. 31. 05:15

2011 10 30일 주일 예배 설교 (종교개혁주일)

본문: 여호수아 3:5-17

제목: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개신교인이라면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종교개혁에 대해서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개신교는 태생부터가 개혁적입니다. 개혁이 개신교의 정체성이라면 개신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개혁적이어야 합니다.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슬로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늘 개혁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해서 종교개혁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새로운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승에게서 리더십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받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합니다.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은 요단강을 건너는 일에서 시작이 되는데,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철저하게, 늘 그랬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져야만 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의 하나님의 지시는 이렇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들러 멥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들러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앞서 요단강에 들어섭니다. 이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요단강은 멈추어 섭니다. 요단강에 댐을 하나 건설한 것처럼 물길이 막힙니다. 그리고 드러난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건너갑니다.

 

흐르는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하찮은 신으로 전락시키는 불경스러운 일에 해당됩니다.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선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10절 말씀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다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사실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는 일은 룰루랄라그렇게 휘파람 불며 할 수 있는 한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족속들(가나안, , 히위, 브리스, 기르가스, 아모리, 여부스: 가나안 일곱 족속이라 부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을 열고 어서 옵쇼하면서 반겨주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방법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희생이 불가피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여호수아도 사실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위로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이럴진대, 일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도 두려워 떨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징표가 바로, 요단 강물이 멈추는 것이었고, 마른 땅으로 그곳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 지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게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통해서 그 두려움을 가려주시고, 그 마음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세례를 받고(요단강 하면 세례가 떠오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죠. 세례 받는다고 ~’ 하면서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발 딛고 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고 시작된 천국의 삶을 살면서, 예수 믿기로 결단한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몰아내고, 나의 일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넘어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내 일상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와 손잡는 일이 더 쉬워 보입니다. 그러면 그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냥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살면 적어도 전쟁은 피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이 세상을 보니 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의롭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할 죽음의 일들뿐인데 어떻게 그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의 마음도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다 보니 그 당시 교회가 얼마나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면죄부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돈을 주고 ‘면죄부’만 사면, 자신의 죄는 물론이고, 죽은 조상, 곧 부모님, 조부모 그리고 그 윗대의 조상 누구의 죄도 면제되어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면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들은면죄부만 사면, 회개할 필요도, 선행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 시대로 하면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음식을 만드는 고생할 필요도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돈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1517 10 31일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논제1항에서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회개하라 …’( 4:17)고 선포하셨을 때, 그 말씀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참회, 회개가 되어야 한다고 게시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돈으로 값싸게 팔려 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루터의 눈에는 면죄부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과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개신교회도 면죄부만 팔지 않을 뿐이지 중세의 교회가 저지는 만행을 똑같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회개의 선포가 없는 설교를 통하여 오로지번영’, ‘일등’, ‘제일’, ‘축복’, ‘평안’, ‘큰 꿈등의 수식어를 붙인 축복만을 선포함으로써 영생을 위한 십자가의 복음을 값싸고 천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에 합당한 회개 없이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되는 듯이 예수의 이름을 면죄부로 팔아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거라는 값싼 복음에 속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르핀을 맞듯이 우리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불의,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불의와 맞서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깊은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가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안하다pax’, ‘평안하다pax’고 외치면 우리의 삶에 평안이 찾아옵니까?

 

삭개오처럼 뼈를 깎는 회개의 삶 없이( 19:8),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의 모든 죄를 면죄부 하나로 값싸게 용서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종교개혁 이전에 면죄부를 사서 값싸게 구원 받으려고 했던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파렴치한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평안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믿음으로 싸워 죄로 물들어 있던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몰아냈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과 내 안에 있는 죄(죽음의 세력)와 싸워 그러한 것들을 이 세상과 내 안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7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의 구원을 자판기에서 뽑아내듯이 값싸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 돈을 주고 값싸게 살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십자가 목걸이 걸고 다닌다고, 십일조 생활하고 주일성수 한다고 그것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값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치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이 값싼 면죄부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이 이 세상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죄(죽음의 세력)와 맞서 싸우는 믿음의 전투가 되게 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깊은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용서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우리의 삶에서 개혁해야 하는지 깊은 감동이 오시는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죄로 물든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어서 욥쇼~’라며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갈 때 죄로 물든 우리의 삶이 어서 옵쇼~’라며 우리를 반겨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입성한 순간 그들의 삶은 전쟁에 휩싸였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믿기로 결단한 순간 영적인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건 필연입니다. 구원은 자판기에서 돈을 넣고 물건 빼듯이 그렇게 값싸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시장에 가서 잘 차려놓은 반찬을 사다가 먹는 것과 같이 쉽게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히려 농부가 되어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농부의 수고가 열매를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수고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바라는 농부가 수고하는 것처럼, 구원을 받기 바라는 신앙인이 그에 합당한 수고(회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꼭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면죄부처럼 여긴 것은 아닙니까? 수고 없이 열매만 바란 것은 아닙니까? 회개 없이 구원만 바란 것은 아닙니까?

 

구원 받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넌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소망에 대한 징표였듯이,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영적인 전쟁을 치를 때 힘겹고 어렵지만 반드시 이기게 될 거라는 징표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맙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0. 25. 23:27

2011 10 2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신명기 34:1-12

제목: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죽음의 사진 3 , 아기의 죽음, 로마시대 사람들의 죽음, 가다피의 죽음

 

지금 보여드린 죽음의 사진 3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도 모세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0절이 전하고 있듯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절대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 이후에 등장한 그 어떤 선지자도 모세의 명성에는 필적하지 못했습니다. 이적을 많이 베풀었기로 유명한 엘리야 선지자도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큰 학자요 선지자였던 이사야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세 이후에 모세와 필적할만한 명성을 가진 사람은 다윗 왕 정도입니다. 그것도 그가 왕으로서 그러한 명성을 가진 것이지 선지자로서 그런 명성을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도 아닙니다.

 

모세만큼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산 사람도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고비를 넘겼고 죽을 때까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이스라엘의 둘 도 없는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모세가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고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계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다 보면 고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는 고생 때문에 우리가 영웅심리에 사로잡힐 수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은 고생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궁극적인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모세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의 수고와 고생이 하나님 앞에서 가 되지 못했습니다. 만약 모세의 수고와 고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었다면, 모세는 그것을 빌미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요구했을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수고했는데 그것을 봐서라도 나를 가나안 땅에 드리셔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받아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였던 모세가 사실 그렇게 공치사 할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모세의 인생의 목적은 가나안 땅 입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하나님과 대면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예수님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 변화산에 올랐을 때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면서 그곳에 눌러 앉아 있기를 청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영적인 체험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느보 산에 있는 비스가 봉우리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나안 땅을 보여주십니다.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그곳에 들이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었을 때(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소천이라고 합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은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은 죽을 때도 그냥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습니다.) “나이가 백이십 세였으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서 모세가 건강했다는 뜻이고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충분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기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자동차를 빗대어서 설명하면, 폐차시켜야 할 정도로 노쇠하고 망가져서 폐차시긴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쌩쌩한 차, 아직도 10년은 더 탈 수 있는 차를 그냥 폐차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이 한 가지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는가?’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세보다 여호수아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동안 모진 훈련을 받은 여호수아를 배려해서도 아닙니다. 모세가 미워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모세가 므리바 물 사건 때 자기의 의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드러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이 옹졸하게 보일 뿐입니다.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종, 그리고 그렇게 수고한 종을 내치신다는 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을 운운한다고 해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온전히 새로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던 겁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이전 것이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전 것의 대명사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 모세가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전 것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온전히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전 것인 모세를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모세를 온전히 보내게 하기 위해서 30일 동안 애곡하게 하십니다. 30일은 단순히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기간이 아니라, 모세, 즉 이전 것을 떠나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다음 단계로 온전히 접어들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일례로, 20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10대처럼 옷을 입고 다니고 행동하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한 남자와 또는 한 여자와 가정을 꾸렸다면 이제 부모의 그늘에 벗어나야 합니다. 아직도 부모 밑에서 응석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군다면, 온전한 가정을 꾸밀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소소한 것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존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시간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기로 정하셨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인하여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까?

 

예수 믿기로 정했다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우리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하늘 나라에 가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 때 가졌던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무리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하늘 나라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요.

 

제가 이 시간 그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알아 가는 중입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며 솔직해집시다. 다만 알고 있으면서도 알아 가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아직까지 이전 것을 버리기 아까워서 그냥 내 삶 안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겠습니까? 모세를 죽이고 살리는 건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하는 당신의 주권을 가르쳐 주고 싶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는 철저하게 믿고 따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납득되지 않게 비상식적으로 당신의 주권을 남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모세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죽음을 통해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으로 보게끔 온 정성을 다해 가르시고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저 십자가에서 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래한 새로운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시대, 은혜의 시대, 새창조의 시대, 새로운 피조물의 시대, 종말의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하지 않는 것들 을 나의 삶에서 지워버릴 것입니다.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죽어야, 다음 단계로 접어들 수 있을지 우리는 날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죽어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떠나 보내기 위해 애곡하십시오.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온전히 떠나 보내고 새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시오. 성령께서 도우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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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26. 03:34

2011 9 2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출애굽기 17:1-7

제목: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시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하루에 모든 가족이 먹을 양 만큼만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길 바라신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만나가 내리고 나면 언제 만나가 또 다시 내릴지, 솔직히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어 들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가운데 하루 이상 먹을 치의 만나를 거두어 저장해 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저장해 둔 만나는 곧 다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먹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 많이 갖고 싶어합니다. 욕심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너무 부리면 그렇게 좋은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을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검소하게 살기를 바라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것이죠. 광야에서 하루 하루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고 도전입니다. 인간 마음이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일을 준비해 두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 진짜로 자기들 가운데 있는지 확신이 안 섰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셨다고 하는 만나가 눈 앞에 있긴 하지만, 그것을 내려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그들 눈에는 만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에만 집착을 합니다. 만나를 거두어 들이는데만 신경을 골두한 나머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까마득한 이야기로 듣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만나를 필요 이상으로 모읍니다. 이미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나 즉 먹을 것이 이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은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였습니다. 이들은 진실로 헷갈렸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계신 걸까?’

 

이스라엘 백성은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을 해서 캠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나아와 극심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15장에서도 마라라고 하는 곳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한 것을 두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혜를 주셔서 해결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두고 또 불평을 합니다. 이번에는 매우 극렬하게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이 불평의 이면에는 이전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세의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물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할 때 모세는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바로 이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시험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의 시험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로 당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말로 계신지 안 계신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불경스러운 광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서도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실 때 마귀를 향해 이런 외침을 던지지 않으셨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무작정, 막무가내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시험은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라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나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애굽의 바로 왕과 맞서 싸워 이겨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이들은 어쨌든 바로 왕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희망 가운데 모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막막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삶에 혼란이 온 것이죠. 이들이 바로 왕을 피해서 도착한 곳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광야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구든지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커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커도 삼시 세끼 밥 먹고 살아야 하고, 믿음이 아무리 커도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16 3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17 3절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선 16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리고 17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적어도 이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이렇게 광야에서 불안에 떨면서 굶주리는 것처럼 그렇게 굶주리지는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간 취급 받지 못하고 개처럼 살았어도, 적어도 이들은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시겠다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무엇이 구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이들은 지금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처해진 것 같았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지금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처한 현실입니까? 예수를 믿기로 하고 교회 다니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오는 현실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누군가의 전도로 교회로 따라 나서긴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구원인지 모르겠다는 울림이 이 마음 속에서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이란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일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내가 올바른 선택을 내린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수 없이 이런 의심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이렇게 따라 나서긴 했는데, 바로의 손에서 구원을 베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이 또 다른 바로와 같은 신이 아닐까? 애굽의 바로 왕도 자기 자신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꼼짝 없이 바로 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덕에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배불리 먹고 목마르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바로의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왕의 한 마리 짐승처럼, 개처럼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큰 맘 먹고 따라 나선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바로 왕과 같지 않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행하셨던 10가지 재앙을 봐도 그렇고, 홍해를 가른 사건도 그렇고,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신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 가지고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죠.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또 한 번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명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 산에 있는 반석 위에 서서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 썼던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합니다. 그리고 반석에서는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시고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는 것 같았던 애굽에서는 결국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왕으로 인한 죽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 같았던 광야에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 같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참된 역사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산 것 같으나 죽은 자로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죽은 것 같으나 산 자로 살고 싶으십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의심이 들 때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죽은 것 같은 상황, 마른 뼈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의지하고 믿을 분은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안 계십니다. 끝까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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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19. 01:57

2011년 9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20장 1-16절
말씀: 지금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오늘 말씀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의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유의 말씀 앞에는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비유의 말씀 뒤에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포도원 품꾼의 비유,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도대체 어떤 연속되는 의미를 품고 있기에 성경에 나란히 기록이 되어있을까요.

그 이유를 풀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율법을 지켰기에 영생을 얻을 줄을 확신하였기에 예수님의 입에서 "당신은 영생을 얻을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꺼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생,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예수님께 당당하게 말을 하였지만 정작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순종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19장 27절 말씀에서 주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자 청년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자신들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까 무엇인가 보상을 받지 않을까하는 것이 베드로의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심판하실 때 너희가 내 좌우편에서 그들을 심판하는 영광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한 전제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새롭게 될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예수님을 따른다는 조건이 붙어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제자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새롭게 되는 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거친 후에야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때까지 나와 함께하여야한다는 두 번째 조건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동참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입성만 하면 자신들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이 따를 것이고 그때에 자신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포도나무 품꾼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천국은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품꾼들의 삶은 지금 인력시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루를 일하지 못하면 하루 동안 주린 배를 채울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즘과 마찬가지로 일할 사람은 넘쳐나고 일할 자리는 너무나 적었기에 많은 품꾼들이 일을 구하고자 노력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품꾼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찾아간 것은 포도원 주인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렇기에 처음 구한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노라 말했을 때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포도원 주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는 왜 주인은 다섯 번에 걸쳐서 일꾼을 구했던 것인가? 이구요. 다른 하나는 왜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하였는가? 입니다.

우선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포도원 일꾼을 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 삼시에도 나가서 품꾼을 구하고 제6시, 제9시 그리고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인 제11시에도 품꾼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력시장에 가서 일꾼을 구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의 체격과 건강상태입니다. 많은 고용자들이 일꾼들 중에 가장 체격이 건장하고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을 뽑아내어 데려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하고 일을 하기 힘들 것만 같은 사람들이 남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매일 반복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늦은 시각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다음날도 일을 구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주인은 11시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일꾼을 불렀던 것입니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는다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은혜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천국을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인 왜 모든 일꾼에게 동일한 품삯을 지급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전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문화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의뢰인-후견인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제도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돌봐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에서 의뢰인은 후견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는 부자를 택할 수 없었고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 요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제도에 빗대어서 이 비유를 해석하자면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선택하여 품삯을 지급할 수 있지만 품꾼은 주인을 선택할 수도 품삯을 정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은 처음 부른 일꾼에게만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였고 나머지 일꾼들에게는 자신들이 한 일에 상당한 품삯을 지급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이 얼마를 주던지 간에 그것은 주인의 뜻이고 후견인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주인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품삯을 받는 시간이 되자 11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은근히 더 많은 돈을 받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들에게 한데나리온의 품삯이 돌아오자 주인을 원망하였습니다.

주인은 의뢰인-후견인 제도에 의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푼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일꾼들에게 일한만큼의 값을 쳐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만큼의 값을 쳐주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일꾼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을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들은 주인의 은혜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품삯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주장한대로 그들은 종일 수고하였고 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억울함만을 주장하는 그들을 보면서 주인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이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구원은 먼저 택함을 받은 자나 나중에 택함을 받은 자나 동일하게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이유는 제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수고하여 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한 일꾼들처럼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올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고 그 마음은 이미 권력이라는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19장 27절 말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의 질문과 같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생각하시는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저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열심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를 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살아갔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약속하였던 상당한 보응을 제자들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자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른 장작 같고 질그릇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포도원의 일꾼으로 삼으신 주님은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열심히 동참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이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한 만큼 값을 계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 수 있을 만큼의 크나큰 은혜로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보상을 바랄때가 아니라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신 사역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보답해야할 때라는 것입니다. '서로 누가 더 일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로 다투며 시기하며 질투하는 때가 아니라 서로 도와서 주의 일을 감당해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의 일을 잘 감당하며 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12. 04:11

2011 9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18:21-35

제목: 용서는 권세다

 

오늘 본문은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의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한 마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 받는 것도 서툴고, 용서 하는 것은 더더욱 서툽니다. 인생을 살면서 용서 받지 못하고 살았거나,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더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경험과 이성을 모두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법을 뛰어 넘어 새로운 인생,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우리가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얼마나 깨달았느냐의 정도에 따라서 나의 삶을 붙들고 있는 분노와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언제나 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질문은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용서는 세 번까지 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번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세 번까지 용서하라니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노력해 보신 분은 잘 아실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과는 다를 것을 예상하고,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물었던 겁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완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시는 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의 질문에 칭찬을 받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상상할 수 없었던 용서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을 숫자적으로 계산하면, 490번입니다. 그러나 이는 문자적으로 용서를 490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곱이 유대인들에게 완전수임을 고려할 때 이는 무제한적인 용서를 가리킵니다.

 

말은 멋있어 보입니다. 대인배 같아 보입니다. “무제한으로 용서하라!”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천국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빗대어서 하신 이 천국의 비유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임금입니다. 다른 부류는 임금의 종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류는 종들의 동료입니다.

 

임금의 종들은 임금에게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 규모가 일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우리가 탈랜트라고 하는 그 달란트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쓰는 화폐 단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와 닿지 않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단위인가를 알고 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실 겁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1달란트는 6,000명의 하루 품삯입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0불로 치면, 1달란트는 60만불입니다. 한국돈으로는 6억정도가 되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종이 임금에게 빚진 것이, 1달란트가 아니라, 1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계산이 안 되니까, 쉽게 다시 설명하면, 한 사람이 평생 60만불(6) 정도 모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게 1달란트입니다. 이것을 1만 번 해야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우리가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1만번을 다시 태어나 평생동안 모으고 또 모아야 갚을 수 있는 규모의 빚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한 마디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죄를 빚의 개념으로 바꾸어서 설명하시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이처럼 우리 힘으로는 청산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니다. 조금 유식한 말로, 실존이라고 합니다. 우리 존재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종에게 임금은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합니다. 임금은 사실 이 종이 그 돈을 갚으나 갚지 않으나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거 없다고 임금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거 없어도 임금은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임금의 이 명령 앞에 어쩔 도리가 없는 종은 임금 앞에 바짝 엎드려 애원합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로서 다 갚으리이다.” 이렇게 바짝 엎드린 종의 모습이 애처로웠던 임금은 그 종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임금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 외에는 종이 빚을 갚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장면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빚는 자기의 동료를 만납니다. 그리고 낯을 변하여 동료의 멱살을 잡고 자기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종의 동료가 그에게 진 빚은 백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했습니다. 백 데나리온의 빚은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서 갚을 수 있는 정도의 빚입니다. 사실 이것도 그렇게 만만한 규모는 아닙니다. 그런데 종이 임금에게 진 빚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종은 잔인합니다.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둡니다. 이 일을 본 동료들이 이 일을 임금에게 가서 고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임금은 노하여 그 종을 잡아 들여 이렇게 훈계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임금은 그 종을 옥에 가둡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종은 임금의 용서를 악용한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악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이것을 악용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용서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기독교인이면서 어찌 성경말씀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요!’ 그렇게 되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무슨 감옥이 필요하겠습니까? 죄짓는 족족,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하고 풀어주면 되죠?

 

죄의 값은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에서도 보면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죄를 범합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충실한 장수, 우리야를 최전방으로 내몰아 전사시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잘 자랍니까? 아닙니다. 죄 값은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내 종 다윗아 내가 너를 용서하마하면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죄 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나은지 얼마 안 돼서 죽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값을 그렇게 혹독하게 치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안 좋은 일들이 죄값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죄의 숙명론에 빠지는 것도 건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죄의 값은 치러야 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건 죄 지은 쪽이 가져야 할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마음으로부터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으면, 결국 나만 다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밀양이라는 영화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연이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신정론과 용서의 문제를 절묘하게 그린 영화입니다.

 

서울에서 남편을 잃은 이신애(전도연 분)는 그와의 추억이 담긴 밀양에 내려와 아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아들마저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극복하려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신앙으로 잘 극복해서 살아가는 듯 합니다. 시간이 한 참 지나, 이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교회 성도님들의 격려와 도움에 힘 입어 그에게 용서를 건네러 교도소에 갑니다. 너무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인 범인을 대면했습니다. 용기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아들을 죽인 범인이 오히려 감옥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신애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인의 말인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이신애는 그 순간 실성합니다. 그의 마음에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 이신애는 모든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그때부터 교회를 헤집어 놓는 악녀로 변합니다.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그 사람(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 악마같은 죄인)을 먼저 용서한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의 온 존재를 통해서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서 하는 신앙생활이란 용서가 우리 삶의 근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삶 가운데 있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이 세상은 이 있어야 권세 있는 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돈이 곧 권세인 세상인 것이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영혼까지도 팔아 먹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돈을 쓰면서 권세를 누리려고 합니다. 이건 이 세상이 주는 헛된 욕망에 불과합니다.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우리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용서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용서는 권세가 아니라,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세상이 부끄러워하는 그것으로 우리 인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죠.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봤자, 그 돈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권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권세입니다. 용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권세를 받은 자만이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 권세를 왜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권세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는 분들은 아직 돈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지닌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권세, 헛된 권세를 부리지 마십시오. 하늘 나라의 권세, 영원한 권세인 용서의 권세를 부리십시오. 용서의 권세를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시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백을 예배 때마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8. 1. 04:37

2011 7 3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창세기 32:22-31

제목: 하나님과 더불어씨름하라

 

섬집아기 노래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스로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못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참 위태로운 광경입니다. 아버지는 죽었거나 고기 잡으러 먼 곳에 갔나 봅니다. 상황을 보니 엄마도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형편인 것 같습니다. 아이는 어립니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아이를 돌봐줄 여력이 없습니다. 엄마가 섬그늘에 나가 굴을 따서 내다팔지 않으면 아이를 굶길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위태롭지만, 아이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엄마는 눈물을 머금고 굴따러 바다에 나갑니다.

 

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 영문도 모른 채 혼자 집에 남겨져서 혼자 집을 지키며 혼자 놉니다. 이 생활이 익숙한 것 같습니다. 엄마가 나갔는데도 보채거나 울지 않고 혼자서 잘 노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혼자 노는 아이의 모습이 여간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놀다가 지쳐서 잠이 듭니다. 늘 그랬듯이,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마루바닥에서 그냥 잠이 듭니다.

 

굴 따러 간 엄마는 집에 혼자 놓아두고 온 아이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굴을 따서 팔아야 먹고 사는 형편이지만, 그래서 몸은 바닷가 갯벌에 와 있지만 마음은 아이가 혼자 남겨진 집에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요? 이윽고 마음은 몸을 부릅니다. 아직 바구니를 다 채우려면 더 일해야 하는데, 일 손이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를 혼자 집에 놓아두고 온 것 때문에 엄마의 마음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엄마는 곧장 집으로 달려갑니다. 아직 채우지 못한 바구니를 옆에 끼고 말이죠.

 

이 세상에서 가장 위태롭고 슬픈 동요입니다. 이 동요를 들을 때마다 저는 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위태롭고 슬픈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해달라고요. 어서 빨리 당신의 나라가 임하여 우리 모두가 당신의 안전한 팔에 안기어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게 해 달라고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삶은 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위태롭습니다. 위태롭지만 그냥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요즘엔 경제 위기다, 환경 위기다 해서 세상이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그건 겉보기에만 그렇고, 속을 들여다 보면 우리 인류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경제의 위기가 닥치거나, 환경의 위기가 닥치면 거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그 위태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 속에서 위태로움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의 이름은 그 이름도 유명한 야곱입니다. 야곱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위태로웠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먼저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장자권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장자권을 모태에서부터 탐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날 때 형 발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름도 야곱이라고 지어졌습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또는 움켜쥐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성장하면서 남성답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통상관념으로 남자는 사냥 등 바깥 일을 해야 하는데, 그는 도통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집에 남아서 엄마를 도와 늘 집안 일만 했습니다. 그런 야곱을 아버지 이삭은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삭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장남 에서를 샌님 같은 작은 아들 야곱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엄마 리브가는 자신을 잘 도와주고 자신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호시탐탐 장자권을 노렸습니다. 장자권을 차지할 기회를 엿봤습니다. 그러다 결국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배고파 하는 틈을 타 밭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차지합니다. 야곱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장자권을 확실히 하고자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냅니다. 이것도 형 에서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에서로 분장하여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고 받아낸 겁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위태롭습니다.

 

그러다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동생에게 속아서 장자권도 빼앗기고 축복도 빼앗긴 것을 안 형 에서가 노발대발 하면서 동생 야곱을 잡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머나먼 곳에 있는 어머니의 동생, 즉 삼촌 집으로 무작정 발길을 옮깁니다. 이제는 돌아갈 집도 없습니다. 무작정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속여서 빼앗은 장자권과 속여서 받은 축복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장자권과 축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형상화 되어 야곱의 실제 삶에 이루어질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위태롭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야곱의 삶은 위태로웠습니다. 속이고만 살았던 야곱이 이제는 외삼촌 라반에게 오히려 속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속임수 때문에 야곱은 20년 동안이나 외삼촌을 위해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속이는 외삼촌에게 이기기 위하여 야곱은 지혜를 내어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도 대가족을 일구었습니다. 부인 넷에 아들이 11명이나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차지한 장자권과 축복이 형상을 이루어 야곱의 눈에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남부러울 것 없는 부를 이루고 가정을 일구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재산을 챙겨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 고향에 거의 다 도착해서 야곱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합니다. 형 에서가 거의 군대에 가까운 병력을 거느리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위기입니다. 20년 동안 뼈빠지게 일해서 일군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홀몸이었기 때문에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마음이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릅니다. 잃을까 봐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이름처럼 살아왔습니다. 나면서부터 움켜쥐는 자이었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은 움켜쥐는 데만 모든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형 에서가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도 야곱은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움켜쥐고 있을 방법을 간구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씨름을 했는지,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길 수 없으니까 순간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서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만듭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야곱은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보내달라는 그 사람에게, 야곱은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버팁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사람은 야곱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먹고 이렇게 힘이 셉니까?”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길래 이렇게 끈질깁니까?” “당신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 등 야곱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야곱에게 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고 이름을 물어봤습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사람 야곱은 평생 움켜쥐는 자로 살아왔습니다.


이 순간
,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줍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 사람, 야곱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움켜쥐는 자로 살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건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만약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지 않고 그냥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국 야곱은 움켜쥐고 있었던 모든 것을 그날 밤 잃었을 겁니다. 위태로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그 위태로움 속에서 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야곱, 움켜쥐는 자에서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바꿔주셨을 때, 야곱은 그 동안 움켜쥐었던 것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추겨 추악한 야곱이 되라고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움켜쥐라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싸워서 힘을 키우고 부를 쌓아서 미래를 튼튼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데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이 세어 보이고 자신들을 가장 잘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하나님께서 계신 교회로 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움켜쥔 것을 더 강하고 부하게 만들어 달라는 데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을 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그 사람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려고 했던 것처럼 열심을 냅니다. 그러다 자신이 원하는 축복이 오지 않으면, 이제는 대놓고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웁니다.


오늘날
, 우리에게 참으로 위기는 경제나 환경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상황이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위기는 교회 다니면서도 우리의 정체성(Identity)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야곱으로 움켜쥐는 자로 남아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항하여(against) 싸워 이기려 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태로운 삶 가운데,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이기려 들지 마십시오. 야곱의 정체성이, “움켜쥐는 자에서 이스라엘,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자로 바뀌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with) 싸워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겨먹을라고 싸우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로 거듭나라는 뜻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위태로운 삶은 마술처럼 평안이 넘치는 삶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는 삶이 무엇인지, 몇 마디의 말로 설명 가능하거나, 그러한 삶을 들어서게 되지 않습니다. 야곱도 이러한 삶에 들어서기 위해서 수많은 세월과 역경을 보냈습니다. 적어도 20년이 걸렸습니다. 외삼촌 라반 집으로 도망가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일이 없습니다. 20년이 지나 눈에 보이는 장자권과 축복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가에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삶을 완전히 변하게 하신 겁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 ‘나는 아직도 야곱인가?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려 드는 사람인가?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하나님의 힘을 빌어 더 많이 움켜쥐려 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의 삶은 온전히 변해서 이제는 이 험한 세상, 위기의 세상, 위태로운 내 삶을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겨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꼭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 위태롭게 달려 있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죽음을 이겨낸 우리 구주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길 때 부활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붙들 때, 우리의 위태로운 삶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7. 28. 06:56

2011 7 27일 수요 예배 설교

본문: 에스겔 28:1-9

제목: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의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의, 즉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의분이라는 것이 잘못 쓰이면 남을 정죄하는 데 쓰입니다. 나만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남이 불의한 만큼 자기 자신도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겸손한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의분을 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분을 낼 때는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분을 낸다고 하니까, 우리는 과격한 말과 행동을 떠올리지만, “의분은 꼭 과격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서 의분을 내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 상황이 매우 폭력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폭력성이 드러난 것이지, 그것에 대처하는 하나님의 의분은 인간들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심과 자비하심으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분은 사실 아무나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따르고, 그분께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절대로 의분을 올바로 낼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의분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 아래서만 의분이 나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란 하나님의 의가 이 땅 위에 올바로 실현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의가 올바로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애통해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의롭지 못합니다. 불의가 판을 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또는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는 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 구원을 말합니다. 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파괴하는 일, 구원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과 고통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 전 그 평화로운 나라 노르웨이에서 대량학살 테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무려 76명의 생명이 이슬같이 사라졌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일본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소설이 상실의 시대라는 소설인데, 한국말로는 그렇게 번역되었지만, 원작의 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러한 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그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또 비틀즈의 노래 중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비틀즈의 노래를 좋아했던 분들은 아실 겁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속삭인 사랑 또는 이별 노래죠. 비틀즈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또 있습니다. 노벨상은 원래 스웨덴 것이지만, 노벨 평화상 만큼은 노르웨이에서 선정하고 상을 줍니다. 그런 노벨 평화상이 베풀어지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러한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한 마디로, 불의하고 이해되지 않는 세상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것입니다.

 

이 사건도 불의하지만, 이 사건을 일으킨 학살자 안데르스 브레이빅의 삶 자체도 불의합니다. 부모의 이혼과 복잡해진 가족 관계 속에서 외롭게 십대를 보낸 브레이빅의 삶은 그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었고 정상적인 삶을 할 수 없는 비뚤어진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불의합니다. 불의한 삶에서 나온 불의한 일입니다.

 

어제는 서울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곳곳이 침수되고, 특별히 우면산에서 토사가 흘러내려 그 주변의 주민들이 여러 명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은 개인적으로는 제가 살던 동네입니다. 지난 7년 동안 나의 살던 고향을 못 봤는데, 토사로 쓸려 내려가 전쟁터처럼 변해버린 동네를 인터넷 사진으로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러한 자연재해를 통한 일들도 의롭지 못합니다. 생명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생명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의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사건들이지만,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감지하지도 못하는 불의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한 불의한 일들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바로, 애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하면서 하나님께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의 나라가 하루 빨리 임하옵소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불의를 불의로 인식할 수 있고, 불의를 보고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불의한 일을 보고 애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만해지는 두로 왕의 간악한 마음입니다. 이번 주 성경통독 범위를 읽어보신 분을 알겠지만,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문구가 바로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에게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선포하시길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열방을 비추는 빛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열방을 일깨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인 것을 알기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일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쓰러지는 이스라엘을 보고 주변 나라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삼으시고 제사장 나라 삼으신 이스라엘이 망하는 일은 불의한 일입니다. 열방이 만약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했다면, 이스라엘이 멸망해 가는 그 불의한 일을 보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통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능멸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불의를 보고 애통하기는커녕, 불의를 보고 기뻐하며 마음이 교만해진 두로 왕을 심판하겠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말씀입니다. 각 나라마다 심판을 선포하시는 장면이 너무 장엄하고, 너무 심오하고, 너무 깊습니다.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이 읽어지는 듯 합니다. 그 중에서 두로 왕을 심판하시겠다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27장을 보면 두로에 대한 애가가 기록되어 있는데, 두로가 얼마나 부국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실로 잘 먹고 잘 살던 나라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국이나 일본쯤 되는 나라입니다.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두로의 입장에서 보면 이웃 나라였던 이스라엘(북이스라엘, 남유다)는 망해가는데, 자신들은 계속 부를 누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마음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심지어, 두로 왕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28 4-5절 말씀이 전해줍니다.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해졌도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입을 빌어 28 11절 이하에서 에덴동산의 아담으로 비유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과…”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어떻게 하다가 쫓겨났습니까? 불의한 일을 불의하다고 하지 못하고, 애통하지 못하고, 그저 불의한 일을 쫓아 행하다가 그렇게 망하게 되었습니다.

 

두로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불의한 일을 불의하게 보지 못하니까, 애통한 마음이 없고, 도리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안일한 생각을 갖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백성이 왜 망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의가 무엇인지 아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불의를 보고 그냥 있지 아니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아가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 마음은 의로움으로 가득 찹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마음은 생명으로 가득 차고, 구원으로 가득 찹니다. 생명과 구원이 가득한 의로운 마음은 절대적으로 불의를 미워하고 불의를 보면 의분이 생기고, 불의를 대하면 애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분을 아는 자는 의로움 가운데 살 것이요, 그분을 모르는 자는 불의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 애통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분께서 마음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7. 25. 03:54

2011 7 2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13:31-33, 44-52

제목: 천국은 마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계시와 은닉을 위해서 입니다. 계시는 드러내는 것을 말하고, 은닉은 감추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와 은닉을 위해서 비유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비유란 순우리말로 그림언어라고 합니다. 일단 그림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림을 보면 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도, 때로는 뭔가가 숨어 있는데 안 보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라는 그림을 보면, 모나리자의 미소는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그 뒤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는 이유는 바로 천국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보이시기 위함이고, 완악한 마음으로 천국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여는 자들에게는 천국이 보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닫는 자들에게는 천국이 감추어 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천국에 대한 갈망을 많이 합니다만, 잘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라는 질문에 사로 잡혀 허송세월 보내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 삶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천국이 드러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에 대한 다섯 가지의 비유를 보았습니다.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2)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

3)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4)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5)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대상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사는 민중들이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그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들이었습니다. 알아듣기 쉬우라고 하는 비유가 도통 모르는 것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실패하게 됩니다.

 

첫째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씨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 2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는 잡초입니다. 귀한 것이 아니라, 볼품없고 흔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취급 당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볼품없고 흔한 잡초인 겨자씨를 정원에 심어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세상 말로 하면, 시골 촌뜨기 아이를 잘 키워서 하버드 대학에 입학시키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고
,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이방의 갈릴리라고 멸시받으면서 잡초처럼 눌려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잡초 같은 갈릴리 사람들을 천국 시민으로 초청하고 계신 겁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그러한 사람들을 천국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잡초처럼 버려진 인생들을 집중적으로 찾고 심방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잡초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누구나 주류인생, 꽃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여,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나의 인생이 잡초 인생으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이라고 해서 낙심하거나 괴로워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천국으로 초청하는 인생은 바로 잡초 인생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우리는 잡초 인생으로 사는 것이 더 복되고 즐거운 인생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인생이 잡초 같은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잡초 같은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그들을 경멸하거나 깔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잡초 같은 인생을 사는 바로 그 사람이 나보다 천국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돈이 많이야 사람 구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없어 궁지로 내몰린 사람들이나 아예 집도 없고 가족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홈리스 같은 사람들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잡초 같은 그들의 인생이 돈 자랑 하면서 사는 인생들보다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욱더 입어 천국에 더 가까이 간 인생일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둘째로, 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은 이들이 매일 먹는 주식인 빵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것입니다. 한 말이 13리터 정도 되니까, 서 말은 39리터 정도의 양이 됩니다. 이는 약 1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양의 밀가루입니다. 가루 서 말에 들어가는 누룩은 아주 보잘것없이 적은 양입니다. 그러나 아주 보잘것없는 조그만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발효시켜 그 모양이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다니셨지만, 세상을 바라보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의 지배는 여전하고,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곤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이란 바로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보기에 미미해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온 천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예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이 온 천하게 드러나는 날이 올 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는 일이 때로는 헛된 일 같아 보이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낙심 될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보기에 미미한 것 같습니다. 시시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힘들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상황이 나빠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되, 낙심하지 말고 곧 드러나게 될 영광스러운 날을 위해서 쉬지 말고 일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보상해 주실 겁니다.

 

셋째로, 보화와 진주는 천국이 얼마나 감진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 또한 말해 줍니다. 보화와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너무도 귀한 것인데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것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소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요즘은 모든 것을 바쳐서 천국을 소유하라는 말을 이단들이 오염 시켜놓았습니다. 재산 다 교회에 바쳐라, 이런 뜻으로 둔갑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재산을 다 바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며 산으로 들어가서 사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재산을 다 바쳐 보십시오. 아무리 여러분의 재산을 다 바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을 살 수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그 돈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이건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지 보여주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비유가 사실로 둔갑해서 천국을 얻기 위해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바치라는 말로 둔갑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돈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집니다. 보잘것없어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어서 값없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소유한 백성이, 구원 받은 백성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시원치 않은 것이지요. 그만큼 값지고 소중한 것을 얻었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나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배설물로 여겨질 정도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 귀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보잘것없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보다 귀한 것이 우리의 삶에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로는 고백하면서도 우리 눈에 우리 마음에 더 귀해 보이는 것을 따라 발길을 옮기고 에너지를 쓰고 애정을 쏟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해 보십시오. 미움 다툼 시기 질투부터, 세상이 부추기는 부와 명예까지도 모두 시시해 보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물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살던 사람이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물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업이 주 산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거기에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물의 비유가 얼마나 이들에게 익숙했겠습니까?

 

이 그물 비유는 좀 섬뜩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가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미 앞에 나와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가 그것입니다. 가라지 비유나, 이 그물 비유나 똑같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그물에는 먹을 수 있는 좋은 물고기와 먹을 수 없는 나쁜 물고기가 함께 잡힙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세상 끝 날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봅니다. 천국에 초청된 자들은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좁혀서 교회를 통해서 이 비유를 설명하자면, 교회는 고기를 낚는 그물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좋은 신자도 있고 나쁜 신자도 있습니다. ‘그물에 가득하매는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의 때가 왔음을 연상시킵니다. ‘앉아서는 어부들이 물고기를 선별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 하실 인자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같이 잡히지만, 우리의 능력과 지혜와 영성으로는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누가 좋은 물고기이고 나쁜 물고기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서로를 섣부르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약간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알곡이다 좋은 물고기다판단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약간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가라지다 나쁜 물고기다판단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판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내가 저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내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교만입니다. 불경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인류 최고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판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그물이 가득한 때’ ‘앉아서심판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심판을 받고 어두운 데로 쫓겨나 이를 갈게 될지, 저 사람이 심판을 받고 어두운 데로 쫓겨나 이를 갈게 될지, 누가 그렇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옆 사람을 제발 판단하지 마십시오. 정죄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에게 기대를 걸지도 마십시오. 우리가 함께 배를 타고 거친 삶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믿음의 동지들은 나의 판단을 받고 나의 정죄를 받고 나의 기대를 받는 자들이 아니라, 나의 용서를 받고 나의 용납을 받고 나의 기도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판단하지 마십시오. 정죄하지 마십시오.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신 용서하십시오. 용납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우리에게 보이신 천국이 이제 좀 보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천국 백성이 된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천국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에게는 이 천국이 보일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 자에게는 이 천국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간, 천국이 손에 잡히고 보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6. 27. 04:39
 2011 6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2:1-14

제목: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어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린양처럼 천사 같은 어머니를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평소 종교에 심취해서 사건 발생일 얼마 전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방언을 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도(방언)을 통해서 신접(하나님을 만남)했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겁을 먹고 있는 딸을 달래는 도중 이러한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정신병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조사 도중 횡설수설하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존속살해(자기나 배우자의 직계가족을 죽이는 일)가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어머니를 죽인 아들의 진술을 보건 데, 아마도 어머니를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 진술로 살인에 대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김동인의 소설 <명문>이라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전 주사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노망이 난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을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독살합니다. 이 일로 전 주사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습니다.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간 전 주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법정에 또 다시 서게 됩니다. 자신이 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 받을 거라고 확신했던 전 주사는 하나님 앞에서 의기양양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죽인 것은 살인죄라며 그의 지옥행을 결정하시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렇게 존속살해 하는 장면이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산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보고 아멘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니까 앞뒤 다 떼어놓고 그 이야기를 거룩하게만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니까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예배 드리면서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이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하나님께 산제물로 바치라는 계시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요즘 시대에 이러한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가는 당장 경찰에게 붙잡혀서 철장 신세를 지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의 마음을 한 번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과 관련이 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 이런 약속을 받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러한 약속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낯선 땅에 이르러 거기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도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사라의 몸 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이 아니라, 인간의 조바심과 욕심에서 비롯된 자식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는 이제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의 약속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어렵게, 아니 불가능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얻은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하나님께 당신께 산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두 가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나안 족속들과 그 주변 나라들 사이에 만연했던 어린 아이의 희생제사를 싫어하셨는데, 그 싫어하시고 폐지하려 하셨던 바로 그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자식을 주시고, 이삭을 다시 산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당신의 약속을 거두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커다란 의구심이 들었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은 3일 걸렸습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3일 동안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모리아 산으로 향했겠습니까? 룰루랄라 하면서 갔겠습니까? 그러한 명령을 받아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극단적인 고뇌에 빠져 3일 동안을 끙끙거리면서 갔을 겁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 아래 남겨 두고, 아들 이삭하고만 산에 오릅니다. 장작은 이삭이 지고, 불과 칼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산에 오르면서 이삭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왜 제물로 드린 어린양은 없습니까?”

 

심장을 파고드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심장에는 화살이 꽂히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껴졌을 겁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냥 정직하게 말합니까? “네가 바로 제물이란다!” 이렇게 모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순간, 아니 아예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이 순간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끝이라는 절망에 빠졌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약속은 이제 없어지는구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거두시는구나! 이제 나는 미래가 없는 허망한 인생을 살게 되겠구나!’

 

이 순간, 아브라함은 온 힘을 다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온 존재가 젖먹던 힘까지 짜내며 지르는 영혼의 탄성이었습니다.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침묵 가운데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서의 제사는 진행이 됩니다. 제단을 쌓은 뒤 아들을 결박하여 제물 삼아 제단 위에 놓고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고(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을 막아 섰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영혼의 탄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아셨노라고 선포합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숫양 한 마리가 수풀에 뿔이 걸린 채 있었습니다. 그 숫양을 잡아다가 이삭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시험(Test)입니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신뢰하느냐 아니냐를 본 무시무시한 시험입니다. 견딜만한 시험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력화되고 인간의 힘으로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시험입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한 시험을 당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갈 때 아바 아버지를 외치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때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겁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을 처형한 무리들을 물리치시고 숨 넘어 가기 전에 있었던 예수님을 극적으로 구해내셨을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그렇게 아무런 힘 없이 죽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순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랬더니, 믿지 못할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꼭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신앙생활은 참 허무한 겁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붙잡지 못하고, 눈을 자꾸 딴 곳을 돌립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는 어떠한 영혼의 탄성이 흘러나옵니까? 어떠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신실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일이 잘 안 풀리고, 삶이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약속의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한, 그분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다는 믿음이 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희망을 전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십니다. 그러니, 갈등 되지만, 흔들리지만, 힘들고 어렵지만, 아브라함처럼 마음 속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탄성을 질러 보십시오! “아버지! 당신께서 친히 준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준비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6. 20. 05:34

2011 6 1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8:16-20

제목: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삶의 근거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교회는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가 다 드러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고백을 하는 교회는 모두 이단으로 분류됩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이단이냐 아니냐의 첫 번째 기준이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이 성경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리고 성령”, 이런 식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초대교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로 발전시켰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일컫는 독특한 언어입니다.

 

삼위일체는 영어로 Trinity라고 하는데, 이는 “three persons in one nature”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본질에 세 위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밝혀야 하고, 세 위격이 무엇이냐는 것을 밝혀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이 과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언제나 가장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동방정교회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주후 1054년 삼위일체 교리의 문제 때문에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이 종교적으로 분리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얘기하면 벌써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 그렇다고 해서 몰라몰라하면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과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가 되지 못합니다. 열심을 다해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도 세례를 베풀 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하라고 합니다. 세례는 단순한 통과의례,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타락한 세상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할 수 있는 한, 피 흘리기까지 최선을 다해서 이 세상을 이겨보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두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삶의 원리에 맞서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권력과 무한경쟁의 문제를 짚어볼까 합니다.

 

첫 번째로, 요즘 시대를 일컬어 ‘포트스 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절대 권력이 모두 부정된다는 겁니다. 일례로 예전에는 대통령의 권위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도 여론에 밀려 탄핵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역이라고 하는 성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승려라고 해서 그 성직을 감당하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권위를 인정 받지 못합니다. 어느 분야든지 어느 자리든지 그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권위가 허물어졌습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말세다’라고 혀를 쯧쯧 차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건 말세의 징조가 아니라 그만큼 세상이 더 평등해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다른 무엇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나는 저 사람하고 달라”, “나는 저런 것들(things)하고 달라”, 하는 마음은 이미 나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는 교만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밟고 다니는 흙하고 다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은 후에 어디로 돌아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는 누구든지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우리 인간은 흙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흙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제대로 알아도 우리는 함부로, ‘나는 달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절대 권력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 기꺼이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절대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그리고 죽으면서까지도 상대방의 용서를 구하신 사랑의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조차도 우리는 절대 권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오는 권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절대 권력을 바라면서 살까요?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절대 권력은 없습니다. 그건 속임수이고 헛된 꿈입니다.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존재해야 마땅합니다.

 

두 번째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삶의 원리인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신자유주의 기본 원리는 무한경쟁입니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우열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밑으로 내려갑니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원리입니다. 이게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TV에서만 보던 동물의 세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경쟁은 사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타락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같은 가치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것은 더 귀하고, 어떤 것을 덜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 것도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에서도 타락한 인간의 경쟁심이 살인을 불러왔습니다. 예배는 경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쟁적으로 예배 드리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그것입니다.

 

경쟁이 들끓는 곳일수록 타락이 극심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경쟁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자신들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서로 줄을 세웠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무엇인지 조금만이라도 맛본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경쟁이라는 단어를 그의 사전에서 지워버리게 될 것입니다. 경쟁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만들어낸 타락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백중지세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잘 난 사람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대로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야 할 형제자매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이 세상에 저항하십시오. 경쟁해서 이기려 들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요 계명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경쟁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천국입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존재하시는 분인지 우리가 알아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오늘은 권력과 경쟁의 문제를 들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삼위일체는 이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파헤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비가 바로 이 세상의 지식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거꾸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파헤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뒤집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 이 세상을 판단하고 뒤집어야 합니다. 이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비가 우리 삶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삶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앞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건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일입니다. 우리 삶의 근거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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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6. 13. 06:25

2011 6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사도행전 2:1-21

제목: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이자,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부활의 기쁨을 마무리 하면서, 성령을 통하여 그 부활의 기쁨을 세상에 전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과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그냥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말은 성령이 오순절에 내려오게 된 특별한 연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왜 성령이 하필이면 오순절에 내려오셨는지, 그리고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은 어떤 분인지를 살펴 볼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장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고, 보리의 첫 수확을 드리는 날입니다. 칠칠절(오순절) 10흘의 유월절 축제가 끝나고 40일 후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날을 기억하면서, 밀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장막절)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낸 것을 기념하면서 가을 수확을 끝내고 드리는 감사제입니다.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 할 당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여호와의 신이 들어가지 않았고, 그 피가 발라져 있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여호와의 신이 들어가서 장자를 모두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애굽의 바로 왕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유월절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유대인들이 구원 받았던 것처럼, 유월절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오순절(칠칠절)은 성령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면서 마침 수확한 밀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빵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빵을 구워 함께 나누면서 오순절의 기쁨을 나누었던 것이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초막절(장막절)은 현재까지 예수님과 상관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초막절을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아마도 초막절기에 재림하실 거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재림 장면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일곱 천사가 일곱 양각 나팔을 부는 장면이 있습니다. 초막절의 첫날을 나팔절이라고 하는데,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유대인의 달력 7월 초에 나팔을 불어 안식일로 정하여 쉬라고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하면 10월쯤 됩니다.

 

20년 전 다미 선교회라고 한국에서 떠들썩했던 이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주장한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10월이었습니다. 그들이 터무니 없이 그렇게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제가 지금 설명 드린 것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주장한 겁니다. 이단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평범하고 신실한 기독교 신자보다도 성경지식이 더 많습니다. 그들도 그럴진대, 우리들은 얼마나 더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까?

 

초막절과 예수님의 재림을 연관 짓는 것은 그냥 추측일 뿐입니다. 아무도 그 때를 모릅니다. 어느 때 오시는지 알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아마도 평소에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세상 사람보다 더 못되게 살다 주님 오신다고 한 때에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알 수 없고, 알아도 별로 유익이 되지 않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매일매일을 주님 오시는 날로 생각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사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매일매일을 주님이 오시는 날로 생각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능력이 임합니다.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어떻게 내리게 됐는가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실 그날이 언제인지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그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한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들이 약속을 붙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 보다는, 그 약속이 가져다주는 유익만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불경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특별히 샤머니즘 전통에서 형성된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은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령을 샤머니즘 전통에서 이해를 합니다. 그렇다 보니, 성령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자꾸 이해하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귀신이 부리는 능력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자꾸 열광주의적으로 생각합니다. 무당이 신 내리면 열광적으로 날뛰듯이, 성령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쳇말로 난리 뽕짝을 펴야 성령이 임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에서도 성령을 그렇게 묘사하는 듯 합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그들이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에서도 성령을 바람과 불의 혀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조심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우리의 감각으로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그것이 성령의 실제 모습은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성령을 자꾸 오해하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의 주권과 그분의 속성을 이해하고 아는 듯 하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우리의 인식 안에서 제한을 두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이것이 성령이다 저것이 성령이다하고 성령을 받았네 못받았네쉽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가 마음대로 인식하고 평가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곧 하나님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까?

 

성령은 자유롭게 활동하시고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도 보십시오. 성령이 임했을 때 그 임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모두 달랐습니다. 성령을 바람으로 보기도 하고, 불로 보기도 했습니다. 통일된 묘사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성령은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놓아두고,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인식했고, 어떤 사람들은 술 취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성령이란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이 스스로 우리에게 말씀 하셔야 우리가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베드로의 설교에서 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두고 이러 쿵 저러 쿵말이 많은 가운데,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의 입을 빌려서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성령은 이렇게 스스로 말씀하시고 자신의 역사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마음대로 성령의 역사를 해석하고 말은 만들어 냅니다. “성령이 이렇게 했어. 성령이 이렇게 역사했어. 이건 성령의 일이야. 이건 아니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당신의 때에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오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오지 않고,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당신의 때에 임하고 역사하고, 자유로운 바람처럼 당신의 뜻대로 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성령을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 불경한 생각, 이교도적인 생각을 버리시고, 성령께 여러분의 삶을 맡겨 보십시오. 성령께 여러분의 삶을 의탁하십시오. 바람처럼 임하시고 불처럼 임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온통 구원으로 채워주실 겁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6. 6. 04:35

2011 6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누가복음 24:44-53, 사도행전 1:1-11

제목: 예수는 주님이시다

 

오늘은 승천주일입니다. 다음 주는 성령강림절(오순절)입니다. 승천일은 정확히 지난 목요일이었습니다. 승천일로부터 열흘 후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는 주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두 개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읽지 않은 다른 본문들(에베소서 1:15-23, 시편 47)도 모두 예수님의 승천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문자에 집착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올바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잘 살펴야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특히나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다루고 있는 기사인데,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라는 서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하게 파악해야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즘 드라마들은 시즌 별로 제작이 됩니다. 그래서 시즌 1, 시즌 2, 이렇게 붙여져 드라마가 제작됩니다. 시즌 별로 주제와 중점이 다릅니다.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같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씌어진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라고 알려진 같은 저자가 이 두 개의 책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바꾸면, 누가복음은 시즌 1이고, 사도행전은 시즌 2입니다. 시즌 1인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1 1-2절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즌 2인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제자들이 받고, 교회를 이루어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을 어떻게 펼치는지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따로 읽으며 안 되고, 꼭 같이 읽어야 합니다. 드라마를 볼 때, 시즌 1을 알아야 시즌 2가 재미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셔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과 승천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할 것은 승천하시는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승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천이 담고 있는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 51절을 보십시오. 승천 장면을 간단하게 한 줄로 처리합니다.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사도행전에서도 같은 기사를 적고 있습니다. 1 9절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승천 장면이 한 줄로 처리됩니다.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게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승천의 상황이 중요했다면
,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한편의 드라마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그 상황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로 올려졌다라는 말 한 마디로 예수님의 승천을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날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공동신앙고백문이었기 때문에 길게 만들 수 없었고, 매우 짧게 핵심사항만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사도신경의 3분의 2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 가운데는 그의 태어나심, 고난 당하심,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그리고 다시 오심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신앙고백에 오늘 우리가 주제로 삼고 나누고 있는 승천하심이 들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고백은 그 진술 하나 하나가 담고 있는 뜻이 중요한데, 신앙고백은 단순히 예수라는 인물이 태어나고 고난을 겪고 죽었는데, 삼일 만에 부활해서 승천했고, 다시 올 거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하나가 담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오르사라는 구절, 즉 하늘로 올려지셨다, 승천하셨다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늘에 오르사”, 하늘로 올려지셨다라는 것은 바로 뒤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와 쌍을 이루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분인지 특별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런데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것에는 익숙해도, 신을 인격화시키는 데는 서툰 것이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형상을 가지고 이것이 신이다, 라고 우상숭배하는 것은 쉬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입었다라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습관과는 정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인 예수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파악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렇다 보니, 세상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인 예수를 급기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극악 무도한 일까지 저지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을 비롯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올바로 밝혀야 할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다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증거하기 위해서 외친 신앙고백이 바로, “예수가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것과 예수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라고 하는 진술입니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십자가에 매단 예수가 실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고백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옛날에 읽은 동화책 중에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책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분들이 왕자와 거지를 알 것입니다. 왕자는 거지 행세를 하고, 거지는 왕자 행세를 한 것이죠. 그러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그려놓은 동화책이 왕자와 거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지 행세를 하는 왕자가 어떤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 거지가 아니라 왕자였다는 것이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왕자를 죽인 그 사람들은 하늘이 내려 앉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겁니다. 왕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왕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제 이들은 꼼짝 없이, 왕의 명령에 의해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동일한 상황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한낱 시골 출신 뜨네기인 줄 알았는데, 그의 선동적인 사상과 연설 때문에 골머리를 썩어서 로마 당국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합작해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는데, 알고 보니 그가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섬뜩한 일입니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이 그랬듯이 저들의 손아귀에 놀아날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자신들이 생사박탈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했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진짜 생사박탈권을 쥐고 있는 분은 그들이 죽인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은 이 사실을 온 삶을 다해서 전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이들은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이었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을 이 상황을 에베소서 1 21절과 22절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모든 통치, 권세, 능력, 주권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했다는 진술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하늘로 올리셨다”, 즉 승천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도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이 주님이 되어야 한다면, 우주비행사가 우리의 주님이 되어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님이 되는 건 아닙니다.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는 주님이기 때문에, 모든 통치와 권세, 능력 주권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권세로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하늘로 올리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천주일을 맞아,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누가 여러분의 삶의 주인입니까? 누가,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누구의, 무엇의 발 앞에 엎드려 계십니까? 누가, 무엇이 여러분의 생사박탈권을 쥐고 있습니까? 승천주일을 맞아,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아멘 하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는 것을 고백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30. 06:45

2011 5 2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벧전 3:13-22

제목: 희망을 노래하라!


구약성경도 그렇지만, 신약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이 씌어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꼭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씌어지던 당시는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사용합니다. 개인신상조사 같은 것을 작성할 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사회적으로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대접까지야 못 받아도 적어도 함부로 취급 당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기독교는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씌어지던 당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기독교인’,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기 쉬웠고, 박해를 당하기 쉬웠고, 놀림을 당하기 쉬웠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끄러움 당하고, 박해 당하고 놀림을 당하면서까지 어떠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회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놀림을 당하고 있는데, 여기 나와서 앉아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든지, 존경 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 보상 받는 자리에 서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자리가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 보상 받는 자리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리, 박해를 받는 자리, 놀림을 받는 자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건 뭔가 혁명적인 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뭔가 확실한 것을 붙잡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이치와는 정반대되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세상의 원리와는 다른 삶을 살게 했을까요?

 

우선 우리는 이들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Suffering)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이들은 미래에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자신들의 미래와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들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을 종말론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래라는 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그러한 미래가 아닙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미래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 도달하는 시간을 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미래입니다.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오는 미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신적인 시간의 미래입니다.

 

그때가 되면,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던 그리스도인 자신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상급을 받을 것이고, 자신들을 못살게 굴었던 박해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생각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현세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들에게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신념은 이들이 박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짜 삶인지 세상 사람들보다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오늘 우리가 읽은 14절 말씀에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세상이 십자가 위에 매단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입니다. “란 나이브하게 이야기해서, “옳은 일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옳은 일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고난을 받으면 그 옳은 일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셔서 그리스도로 세우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옳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고난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말입니다.

 

셋째, 이들이 고난을 감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를 믿는 자는 무조건 고난 당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이들이 깨달은 사실이 있다는 겁니다. 의인이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그러한 삶 자체가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 고통과 고난을 피하게 해주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자들에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고 복 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는데, 교회를 다니는데 저렇게 흉악한 일이 일어날 수 있어?”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사는 삶,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은 축복을 보장하지만, 그렇다고 고통과 고난을 피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고통과 고난이 불가피하게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 순종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초대 기독교인들은 고난 속에서 주님이 고난 당한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극복하느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을 배운 그리스도인은 결코 고통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인 신앙, 올바른 신념, 주님에게서 배운 의로운 삶의 원리 등으로 무장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사방으로부터 오는 고난을 두려움 없이 극복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그 당시 세상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주후 133년경 철학 교사 아리스테이데스가 로마 하드리안 황제에게 제출한 기독교를 위한 변증서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고 장사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자들은 예수님이 3일 후에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황제시여, 지금 기독교인들은 그들 마음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행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과 다가오는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간음을 범하지 않으며, 거짓 증언도 일체 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또 공정한 입장에서 판단하며,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지 않을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원수 된 자들의 유익을 위해 힘씁니다. 또 종이나 하녀,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기독교인이 되도록 설득하고, 종이나 하녀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면, 아무런 차별 없이 종이었던 자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또 그들은 신앙의 형제 가운데 누군가 감옥에 갇히거나 구세주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고 그가 옥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있고 형편도 그리 좋지 못하다면, 2-3일을 금식해서 아낀 양식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 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라도 생명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황제여,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사회적으로 칭찬과 부러움을 사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고, 부끄러움을 겪고 박해를 당하고 놀림을 당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희망이 없는 상황, 희망을 노래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들은 희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삶 자체는 희망 가운데 있었고, 이들의 삶 자체가 희망의 노래였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오늘 15절에서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따로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들의 삶 자체는 이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였습니다. 이유를 묻는 자에게 이들의 삶은 곧 대답이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인의 상황은 혁명적으로 변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마이너러티(minority)가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놀림을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의를 위해, 순종한 삶을 위해 무슨, 어떠한 고난을 당하면서 삽니까? 고난은커녕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의를 위해 살고, 순종하는 삶을 산 결과고 축복이라고 선전되고 있습니다. 무슨 의로움을 보였고, 무슨 순종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번영하고 잘 되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되어버렸습니다.

 

고난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때문에 포기하는 것들에서 오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특히 기독교가 중요 종교로 자리잡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이 겪는 고난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겪는 고난과 매우 다릅니다.

 

1) 요즘에는 교회 봉사를 위해, 예배를 위해, 해야 할 다른 활동들을 못하게 되는 것이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2) 그리고 요즘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고난은 다음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보상이 우리가 원하는 물질적인 보상, 더 많은 친구를 지니게 되고, 더 좋은 지위나 직장을 갖게 되는 형태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는 사회를 향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정의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한 사회를 견디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을 향해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도대체 요즘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고난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도 아닙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만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고난은 단순히 불편하고 억울하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고난은 희망을 노래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지만 고난이 아닙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마음에 품은 분은 희망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26. 22:25

2011 5 25일 수요 예배 설교

본문: 23:1-8

제목: 의로운 가지에 맺힌 열매가 되라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흐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흐름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지금 남유다의 흐름은 멸망입니다. 이 흐름을 바꾸어 보려고 몇 몇 선지자들이 부단하게 애를 씁니다만, 이미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흐름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동차가 지금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자동차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자동차 안에는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이 타고 있습니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를 온 몸으로 막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괴력 같은 힘이 나올 것입니다. 저 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탄성을 참을 수 없습니다.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를 막아보려고 죽을 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동차는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역부족입니다.

 

지금 남유다의 상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남유다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십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선지자가 이사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록한 예레미야입니다. 이사야서는 66장이나 되고, 예레미야서는 52장이나 됩니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비탄에 잠겨 애가를 따로 지었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서 다음에 나오는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이 두 선지자가 남긴 예언서의 분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예언서의 내용 또한 최고 수준의 예언들(문학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미 남유다는 자정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유능하고 강력한 선지자들이 그들 곁에 있어도 그들은 그 예언자들의 말씀을 알아들을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만큼의 비극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요즘 한국에서는 전문직 범죄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전문직은 사회 지도층을 말합니다. 지도층이란 무슨 뜻입니까?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도층, 즉 교수·변호사·의사·예술인 등 전문직 종사자가 저지르는 범죄가 크게 늘고 있고, 이들이 저지르는 폭행 방화 상해 절도 강간 등 강력 범죄도 증가 추세라고 합니다.

 

"나는 잡히지 않는다"는 지나친 확신이 전문직 종사자의 범죄가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사회지도층 인사가 지식이나 경험을 지나치게 믿고 완전범죄를 꿈꾼 채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번져 있는 도덕 불감증이 이러한 범죄를 더 부추긴다고 합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전문직 종사자들(모든 분야의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은 과도한 경쟁 속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이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올바른 방법으로 푸는 법을 몰라서 범죄의 형태 등으로 분노를 해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경찰대 표창원 교수)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이는 제도권 교육이 도덕이나 인격수양 등을 다루지 못하고 경쟁 위주의 지식 전달만 강조하다 나타난 폐해다. 그리고 전문직 종사자가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자격을 잃어가는 증거다.”

 

이런 것이 흐름이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도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도덕 불감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마음입니다. 게다가 과도한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도 매한가지 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삶 가운데 갈등과 다툼만이 증폭하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자살 같은 극단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은 대통령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 누구나 자살을 저지르는, 자살 공화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남유다의 상황이 이보다 더 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죄악상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예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나그네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힘 없는 자들을 강탈했으며 죄 없는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걸리지만 안으면 된다는 도덕불감증이 팽배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기들 마음대로 살면서 죄를 지으면서도 성전에 나가기만 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예레미야서 7 4절과 9-10절 말씀을 간추려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범죄를 보십시오. 모두 십계명에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거짓 맹세하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겁니다. 벼락을 따라가서 맞아 죽으려는 행동과 같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성전에 가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라고 외친답니다.

 

이는 도덕불감증을 넘어, 하나님 불감증에 걸린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종교적 현상으로 떨어지고 만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느 이방 종교처럼 죽은 신,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우상 섬기듯이 섬기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하시겠지만, 이는 지금 시대도 똑같이 일어나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고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들 사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정말 믿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저질러집니까? 우리야 그래도 좀 나은데,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있는 세상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세상입니까? 우리는 수많은 비극을 보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하나님 불감증에 걸린 죄인들이 저지르는 일들 때문에 이 세상은 슬프고도 또 슬픕니다.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이미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미 기울어진 민족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는 죽을 힘을 다해서 자신의 민족을 구해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지금 남유다의 상황이 어떠한지 말로 해서 못 알아 들으니까 눈에 보이게끔 퍼포먼스를 해가면서 예레미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봤자, 이렇게 험한 꼴만 당하게 될 텐데 무슨 가정을 꾸리겠습니까? 남유다의 상황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이죠.

 

항아리를 장로들 앞에서 깨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레미야 19 11절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항아리가 깨지듯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남유다가 이렇게 깨진 항아리처럼 될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처절하게 죽을 힘을 다해, 민족을 구해보려고 퍼포먼스까지 해가면서 영적인 각성을 위해 노력하건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백성에 머물렀습니다. 예레미야서 20장에 보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하는 제사장 바스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듣기 싫다는 겁니다. 이미 죄악에 빠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자를 오히려 욕하고 미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핍박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전하다가 결국 이렇게 수모를 겪습니다. 예레미야서 20 2절 말씀입니다.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예레미야서를 읽다 보면 기가 막힙니다
.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세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온 힘을 다했지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민족의 운명, 그 흐름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의 탓이 아닙니다. 죄악의 결과일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결국 동족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데 실패했지만,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기 대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새로운 계획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5절과 6절이 핵심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누구에 관한 예언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은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이 계획은 600년 정도 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인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그가 이 세상에 가져오신 정의와 공의를 바라보며 구원 받은 백성으로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세상이지만, 이러한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의로운 가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의로운 가지에 맺힌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마십시오. 의로운 가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딱 붙어서, 의와 평화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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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