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5. 04:24

2011 12 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0:1-11, 마가복음 1:1-8

제목: 주의 길을 준비하라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점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어른은 듣고 있는 것 같으나 듣지 않고, 어린아이는 듣지 않는 것 같으나 듣고 있습니다. 또한 어른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또는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대로 듣습니다. 그래서 어른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하고, 어린아이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를 듣고 나서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호소합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설교를 듣는 것 같으나 듣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들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설교말씀을 나의 생명()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설교말씀은 나의 삶과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나의 생명()과는 별로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설교를 듣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듣지 않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시죠. 지금 나는 부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로비에서 어느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서 소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음식 만드는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가게 됩니다. 듣지 않는 척 음식을 만들고 있긴 하나, 실상은 자신에 대해서 소근거리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죠. 자기 자신과 상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겁니다.

 

믿음, 영성, 이런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나의 생명()직접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느 사람을 가리켜 믿음이 좋다”, 또는 영성이 있다라고 할 때 이것은 그 사람이 신앙생활에 극성을 떤다의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극성을 떨면서 신앙생활을 해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명()과 연관시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는 신앙생활의 초점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극성을 부리는 경우입니다. 비유하자면, 엄마가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극성을 부리는 이유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엄마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러는 경우와 같은 것이죠. 엄마는 자신이 못 배운 한을 아이에게 푸는 것이고, 아이의 성공을 통해서 대리만족 하려는 것이지요. 대개 이런 마음으로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극성을 부리는 엄마는 자기가 속상해 죽거나 아이를 죽음에 내몰거나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극기훈련도 아니고 극성 떨 일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생명과의 일치가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니까, 곧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생명()과 일치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한 이래로 강단에서 계속해서 이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교회력입니다. 그래서 저는 컬럼버스교회를 개척한 이래로 말씀선포와 교회 운영을 교회력에 맞추어 했습니다. 올해로 새로운 대림절을 맞아 6번째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교회력을 무시하는 겁니다. 교회력이라고 하면 대개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정도를 생각합니다. 그 절기들만 지키고 맙니다. 그리고 그 절기에는 명목상 감사헌금을 더 풍성이 내야 하는 것만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력(절기)는 헌금내는 날로만 기억됩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보여드리고 실천하려고 우리 교회는 일명 절기 헌금이라는 것을 따로 걷지 않습니다. 절기마다 헌금봉투를 따로 나누어드리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력을 무시하는 다른 이유는 교회의 초점이 온통 부흥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흥회신앙을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회심하고, 예수 믿고, 뜨겁게 성령체험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 나와서 지금 당장 눈물 흘리고 감격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교회력이 무의미합니다. 신앙의 형태가 뜨거운 체험중심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은 별로 무의미합니다. 신혼부부가 결혼해서 뜨거운 사랑만으로 결혼생활을 지속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 뜨거운 사랑의 체험 이상이듯이, 그리고 결혼은 결국 환상이 아니라 일상이듯이, 신앙생활도 뜨거운 체험이상이요, 환상이 아니라 일상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 교회력은 대림절기부터 시작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첫 번째 오심)과 재림(두 번째 오심)을 주제로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에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그 사건을 준비하기 위해서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사람됨)을 증거하는 절기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로 시작되고 성탄절에서 정점에 이르는 이 시대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쓸려 정작 중요한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들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어떻게 잘 이용해서 돈을 얼마나 더 벌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갖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고 영성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돈이 나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그분의 인성은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무관심, 믿음 없음, 영성 없음에 대해서 경고하고 경각심을 불어 넣어 줍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영적 각성입니다. 이들의 생명은 지금 위태롭습니다. 생명은 온데 간데 없고, 죽음이 편만합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남의 나라로 끌려와서 사는데 거기에 무슨 생명의 기운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뿐이죠. 이들이 포로귀환에 대한 소망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해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70년 동안이나 이들은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의 심리는 기대했던 것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기소침해지고 실망하게 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렇게 의기소침하고 실망 가운데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장면입니다. 이들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기 전, 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상숭배에 대한 지적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메시지를 들었음에도, 이들은 끝내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이방신이었던 가나안의 바알, 아세라 같은 우상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포로신세가 되어서 고통 가운데 살다보니,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죠. 그 옛날 그토록 선지자들이 외쳤던 그 외침이 이제서야 귀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치욕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바로 이들이 생명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당연한 결론 같지만,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닙니다. 그 깨달음이 이사야서 40 2절 말씀에 이렇게 드러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이것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회개이기도 하지만, 소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고통 가운데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저버린 것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여호와의 손에 벌을 배나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벌을 배나 받았다는 선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벌을 다 받았다는 희망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나고 죄악이 사함 받았으니앞으로 이들에게 일어날 일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복귀입니다.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 일을 누가 이루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죽음과 같은 포로생활에서 생명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는 다른 어느 누구가 아닌,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등한히 여겼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나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선포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리라.”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야 말로 복음입니다. 생명 되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생명을 다시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0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눈에 들어옵니다. 이전에는 나의 삶(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내 생명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니, 그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지 보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40:11).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는 대림절기를 맞아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해야 합니까? 그 분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온통 그분을 맞이하는 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이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접고 산속으로 들어가, 또는 교회에 모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날만 기다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재림신앙을 오용하는 이단들이나 저지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그 분 맞이하는 일로 온통 채우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극성으로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로 그분을 맞는 일에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일상을 온통 그분을 맞이하는 일로 가득 채우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목놓아 외치고 있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는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전향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용어로 다시 설명하면, 나의 생명()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겁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설명으로, 또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끈임 없는 자기 성찰과 간구(기도) 끝에 오는 깨달음입니다. 이 말씀이 들리십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