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21. 05:25

2011 11 2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스겔 34:11-16, 20-24

제목: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자요 왕이시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 제 2차 포로송환 때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습니다. 에스겔의 사명은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절망 속에서 희망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예언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에스겔 본문에는 메타포가 들어있습니다. 목자와 양이 그것입니다. 정황상 목자는 왕과 정치적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그리고 양은 그들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목자는 이스라엘의 왕들과 고관들을 가리키고, 양은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은 이 메타포를 들어 이스라엘의 왕들과 고관들을 힐난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이 왕으로서, 지도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서 이렇게 백성들이 고생하고 수치를 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직무를 유기했는지, 에스겔 34 3-4절 말씀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여기에서 정의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왕과 고관들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정의를 백성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과 고관들은 정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뱃속만 챙기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전혀 돌보지 않고 백성들에게서 오히려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 불의한 일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 온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진 나라, 그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것입니다.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34:8). ‘노략거리’, ‘들짐승의 밥’, 이러한 표현들은 이들이 나라를 잃고 이방 나라의 포로 신세가 된 처절한 시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목자가 정의로운 목자, 선한 목자가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죠.

 

목자(, 고관들)는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자가 행해야 하는 정의란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옳은 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가 행해야 하는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정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을 바탕으로 해서 그들에게서 기대되는 반응을 가리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의 목자(, 고관)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했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했고,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했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했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돌아보아 그들을 강하게 하셨고, 병들었을 때고 고쳐주셨고, 상한 자를 싸매주셨으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셨으며,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이라면, 이스라엘은 이것에 대한 기대되는 반을 보였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기대와 어긋나게 반응했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 그들은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당신의 종 모세를 보내어 바로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헤맬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담대함과 용기를 주시고 그들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살진 송아지로 풍성한 열매로 당신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부터 마땅하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비웃는 듯이 그들은 정의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불의한 일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요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배역하고 패역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크게 실망하셨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목자가 되어 당신의 백성을 찾아내고 건져내서 그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이는 포로귀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회복시켜 주신다니 말입니다. 이제 이들은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목자와 양의 메타포는 신약시대로 넘어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동안은 당신이 세우신 종들을 통해서 당신의 정의를 행하셨는데, 이제는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정의를 세우십니다. 참된 목자, 선한 목자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사명을 드러내십니다.

 

신앙은 이것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증적으로 체험하고 실천하는데서 신앙이 강화됩니다. 이것을 알았던 신앙인은 시편의 95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남의 노래로 다가오는지, 자신의 노래로 다가오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니라”(시편 95 7).

 

이와 비슷한 신앙고백은 성경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시편 23편도 그에 대한 고백이고, 누가복음 15장과 요한복음 10장에서도 이 고백이 이어집니다. 시편 23편은 이러한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누가복음 15장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돌보고 기다리시는지 보여주고,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양과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줌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도대체 누구의 고백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를 목자요, 왕으로 인식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들처럼 그리스도를 목자요 왕으로 깨닫고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의 입술에서는 이와 동일한 고백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고, 이보다 더 귀한 고백을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목자요 왕으로 고백하는 이 고백이 우리의 삶을 그의 양의 삶으로, 그의 백성의 삶으로 이끄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목자요 왕으로 고백하면서 목자를 따르지 않고 왕을 거슬른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양도 아니고 백성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바로 이렇게 표리부동한 삶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이시고 왕이신 그리스도의 양으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가 행하신 일에 근거해서 기대되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 위에서 이것을 일컬어 정의(Justice, Mishpat)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대되는 행동은 언제나 약자와 연관 됩니다. 성경에서 약자를 가리킬 때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부류는 언제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공격이 들어오거나 착취가 들어오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당할 수 밖에 없는 부류들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돈 없고, 빽 없고, 못 배운 사람들이 그런 취급을 당합니다. 돈 없다고 무시 당하고, 빽 없다고 착취 당하고, 못 배웠다고 구박 당하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죄성은 자기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화풀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돈 많고 빽 많고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당한 설움을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푸는 것이죠. 그래서 폭력은 노미노 현상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윗물이 맑아야 하는 겁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바로 윗물이 맑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자인 왕과 고관들부터 타락하다보니, 거기서부터 폭력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타락하고, 가장 밑에 있는 부류(고아, 과부, 나그네)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울음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겁니다. 그 울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정의이고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왜 우리의 목자이고 왕인지 이것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저 윗 선에서부터 내려오는 폭력의 도미노 현상을 온 삶으로 견뎌내야 했던 소외된 자들(세리, 창녀, 어린 아이들, 여인들)과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시고, 결국 힘 있는 자들에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고통스럽고 아픈 울부짖음을 다 끌어 앉으시고,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럽게 하는 폭력()의 도미노 현상을 끊어내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목자들(, 고관, 대통령, 정치인)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를 가리켜 선한 목자’, ‘왕 중의 왕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목자로, 왕으로 고백하며 섬기는 우리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power)로 누군가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힘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를 구원하는데 쓰십시오. 그것이 바로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자요 왕이시다라는 고백을 온전히 깨닫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자요, 왕이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