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7. 05:21

2011 11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제목: 소망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그때는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우겠다고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끼리 모여 자연스럽게 교회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교회는 굉장히 자생적으로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이었다는 겁니다. 이 자발적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억지로 하면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일을 하면 헌신하게 되는 것이죠. 교회는 억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생적으로, 자발적으로 형성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훈련이 꼭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이니 성령께서 마치도록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일이 성령이 일이라는 것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들의 못난 욕심이 성령의 일을 자꾸 방해하고, 성령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영성 중, 우리가 가장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죠. 그들은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맡길 줄 알았습니다.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할거니까 내가 할 일이 없지 뭐하면서 뒤로 물러나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의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렇다고 성령의 역사를 거슬러 분에 넘치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전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3주 정도 밖에 안 됐었습니다.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데 박해와 방해가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나 베뢰아로 피신해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정말 짧은 시간입니다. ‘더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더 전하면 좋을 텐데..’, 이러한 아쉬운 마음으로 바울 일행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 일행의 전도사역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짧은 3주 간에 뿌려진 복음 위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은 고린도에 가서 전도사역을 펼치고 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씌어진 서신서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는데, 성령의 역사로 인해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3주 동안 머물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3주 동안 전하지 못하고 온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펜을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하고 그들에게 더 깊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우선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1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요약하면, 이들이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잘 성장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복음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그 안에서 잘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위로와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그 복음 위에 더 굳건하게 서 가라고 격려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단숨에 써내려 간 편지가 아닙니다. 몇 개의 편지를 엮어서 편집한 서신서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시간의 간격들이 보입니다. 그 중 하나가 3 6절입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다시 파송했었겠죠. 그곳에 상황을 더 살펴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의 명을 받아 데살로니가에 가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그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쁜 교제를 나누고 그들의 소식을 가슴에 담아 고린도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바울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을 보면 무엇인가가 달라졌습니다.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1 3절의 말씀과 이제 살펴볼 3 6절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3 6절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1 3절과 비교해 볼 때 여기에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소망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성장해 가고 있긴 했으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망 없이, 믿음과 사랑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으면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래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꾸 현세적인 축복만을 바라는 기복신앙으로 흐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 뭔가에 눌린다는 겁니다. 위로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바로 재림의 지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 이들이 갖게 된 소망 중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실 거라는 것이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들은 로마 황제의 귀환식에 빗대어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6절 말씀이 그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이는 로마 황제의 귀환식을 형상화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한 데는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도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당시 온 세계의 주님(퀴리오스)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온 세계의 주님(퀴리오스)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당국으로부터 박해 받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전도사역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일행의 전도사역을 방해하고 박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소란을 피웁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주님, 퀴리오스)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사도행전 17 7).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귀환할 때나 어딘가를 행차할 때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그렇게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은 로마 황제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나 어울리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로마 황제의 그것에 투영해서 생각하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의 모습에 투영해서 묘사했던 그 모습 그대로 오실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재림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확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다림 속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한 두 명씩 죽어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재림의 소망 가운데 박해를 견디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박해를 견디어낼 힘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딜레마였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아직까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긴 했으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디모데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소망을 다시 심어 주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소망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이유를 이제 좀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바로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다가 먼저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먼저 죽은 자들을 생각하며 슬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미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면서 그들을 소망 가운데 다시 거하게 합니다. 우선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 만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담보하는 약속이라는 겁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예수처럼 다시 살리실 거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의 부활보다 앞 설 거라는 복음을 전합니다. 부활의 순서를 굳이 정하자면, 예수가 가장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한 것이고,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고, 현재 살아 있는 자들이 부활의 몸을 마지막으로 입게 될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하는 걱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부활이 무엇인지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기우(불필요한 걱정, 쓸데 없는 걱정)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바울의 편지를 받아 든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소망을 회복하지 않았겠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셔서 우리의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부활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깨달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동안 잃었던 소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 회복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렇습니다. ‘위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서로를 위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위로할 여력이 없어서 못합니까? 나 먹고 살기 바빠서 못합니까? 마음이 강퍅해서 못합니까? 아직 믿음이 없어서 못합니까?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마음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소망입니까?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왜 없습니까? 내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선한 일도 많이 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내 안에는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이 마음에 위로가 없고 왜 저 마음에 위로를 전해주지 못합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평생 품고 살아야 할 부활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는 있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부족하여, 우리 가운데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된 위로는 결코 다른 데서 오지 않습니다. 각종 엔터테인먼트로 위로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마르게 하는 우물물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에 우리가 더 집중하고, 어디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부활의 소망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줍니다. 그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인입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