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
ㅡ 저항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요한계시록 6:1-8)
봉인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이다. 봉인을 떼는 것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일을 어린 양, 즉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드러나는 역사의 진실을 서술하는데 헬라어 문법의 신적 수동태가 쓰였다. 행동이 모두 신적 수동태로 표현됐다. 그들(로마제국/지배자)의 행동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악행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어린 양이 일곱 개의 봉인을 차례 대로 떼면서 은폐된 역사와 진실을 드러내신다. 첫째 인에서 넷째 인은 은폐된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상황 폭로하고 있다. 악하고 폭력적인 체제가 드러난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것은 ‘역사인식’이 분명하다. 은폐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소양 아니겠는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역사에 눈을 감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면 끝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에 눈을 뜬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 저항하고 싸운다는 뜻이다. 신앙은 성육신이지, 탈육신이 아니다. 신앙은 성역사이지, 탈역사가 아니다. 신앙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인 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실천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창작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대응이다. 특별히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이다. 구약성경은 바벨론 제국에 대한 대응이고, 신약성경은 로마제국에 대한 대응이다. 인간의 역사는 곧 제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은 폭력적인 체제의 현실이고 상징이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창세기는 폭력적인 바벨론 창조 이야기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이 세상이 폭력적으로 창조되었다면, 세상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모두 정당화되고 만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평화롭게, 전혀 폭력적이지 않게,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 창조 이야기에 따라 평화를 간구하며, 평화를 창조하며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출애굽기는 폭력적인 지배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복음서는 로마 제국의 폭력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로마의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힘에 의한 평화)는 거짓 평화다. 폭력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것은 제국의 폭력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국의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즉, 우리 인간의 삶의 지향은 비폭력이어야 하고, 정의로운 사랑이어야 한다.
왜 12.3 비상계엄이 잘못된 것인지, 그것을 왜 거부해야 하고, 왜 거기에 저항해야 하는지, 아직도 헷갈려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계엄이 아니라 계몽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양심이 없거나, 공부가 부족하거나, 성경을 지독히 오해/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계엄(Martial Law)은 전형적인 국가 폭력이다. 계엄은 군사력(폭력)을 동원하여 통치하겠다는 선포이다. 폭력을 사용하여 국민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이것은 성경이 그토록 경계하고, 거부하고, 저항한 것이다.
봉인을 떼는 것은 로마제국의 실상에 대한 폭로이다.
1) 첫째 봉인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2절). 면류관이라는 용어 때문에 오해하면 안 된다. 여기서의 면류관은 좋은 뜻이 아니다. 흰색은 승리를 상징한다. 활은 전쟁 무기에 대한 상징이다. 면류관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말한다. 흰말을 탄 자가 ‘이기고 또 이기려 했다’는 것은 제국주의적 전쟁을 통해 주변 나라들을 식민지화하는 로마제국의 군사적 승리를 폭로하는 것이다. 첫째 봉인의 뗌은 로마제국의 군사주의 폭로이고,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드는 것에 대한 폭로이다. 제국의 군사주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나쁜 것이다. 성경은 군사주의를 거부하고 거기에 저항한다.
2) 둘째 봉인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4절). 붉은 말은 유혈사태를 보여준다. 큰 칼을 들고 붉은 말을 타고 있는 것은 정치적 억압을 말한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짓밟은 거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큰 칼은 ‘마카이라’ 칼이다. 로마군의 전쟁칼은 롬파이아이다. 마카이라 칼은 권력으로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땅에서 화평(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없애고, 서로 죽이게 한다. 둘째 봉인의 뗌은 정치적 억압과 살육의 현실 폭로한다.
3) 셋째 봉인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5절).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6절) 저울은 로마제국의 경제를 상징한다. 식량 가격의 폭등을 폭로한다. 되(코이닉스)는 남자 군인 한 사람에 필요한 하루치 식량의 양이다. 데나리온은 남자 노동자의 하루 임금 (여자는 반데나리온)이다. 남자가 하루 종일 일하여 자기 먹을 만큼 식량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면, 가족들은 굶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흉년 때문이 아니다. 부자들의 음식인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는 가격 변동 없고 충분히 공급된다(해치지 말라). 세 번째 봉인의 뗌은 부자들/지배자들에게는 별로 타격이 없지만, 서민들을 빈곤과 기아와 죽음으로 몰아넣는 불의한 경제 체제 폭로하고 있다.
4) 넷째 봉인
ㅡ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죽이더라”(8절). 청황색은 시체의 색이다. 청황색 말을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다. 이는 제죽의 체제가 죽음의 체제라는 것을 폭로한다. 음부가 뒤 따른 이유는 로마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함이다. 로마 제국의 정복 전쟁은 정복지 초토화시키고, 학살이 자행되며, 희생자들을 망각한다. 네 가지 살상 도구는 검(무기), 흉년(기근), 사망(전염병/온역/흑사병), 땅의 짐승들(부역자들/을사오적같은 인간들)이다. 네 번째 봉인의 뗌은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폭력적 죽임과 사회적 배제를 폭로 한다.
성경이 묵시의 형태로 로마제국의 불의한 역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로마제국의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 네 개의 봉인은 다음의 네 가지 로마 제국주의의 살인적 현실 폭로한다. 1) 군사적 침략, 2) 정치적 억압, 3) 경제적 착취, 4) 사회적 배제. 이러한 내용이 담긴 책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너무도 자명하지 않나? 어떠한 형태로든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들을 포착하고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이고, 신앙의 실제적 실천이다.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신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 땅의 불의한 현실을 파악하고 보듬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스교 신앙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이 아닐까? "저항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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