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0. 31. 05:15

2011 10 30일 주일 예배 설교 (종교개혁주일)

본문: 여호수아 3:5-17

제목: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개신교인이라면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종교개혁에 대해서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개신교는 태생부터가 개혁적입니다. 개혁이 개신교의 정체성이라면 개신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개혁적이어야 합니다.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슬로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늘 개혁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해서 종교개혁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새로운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승에게서 리더십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받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합니다.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은 요단강을 건너는 일에서 시작이 되는데,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철저하게, 늘 그랬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져야만 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의 하나님의 지시는 이렇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들러 멥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들러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앞서 요단강에 들어섭니다. 이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요단강은 멈추어 섭니다. 요단강에 댐을 하나 건설한 것처럼 물길이 막힙니다. 그리고 드러난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건너갑니다.

 

흐르는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하찮은 신으로 전락시키는 불경스러운 일에 해당됩니다.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선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10절 말씀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다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사실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는 일은 룰루랄라그렇게 휘파람 불며 할 수 있는 한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족속들(가나안, , 히위, 브리스, 기르가스, 아모리, 여부스: 가나안 일곱 족속이라 부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을 열고 어서 옵쇼하면서 반겨주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방법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희생이 불가피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여호수아도 사실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위로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이럴진대, 일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도 두려워 떨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징표가 바로, 요단 강물이 멈추는 것이었고, 마른 땅으로 그곳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 지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게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통해서 그 두려움을 가려주시고, 그 마음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세례를 받고(요단강 하면 세례가 떠오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죠. 세례 받는다고 ~’ 하면서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발 딛고 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고 시작된 천국의 삶을 살면서, 예수 믿기로 결단한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몰아내고, 나의 일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넘어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내 일상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와 손잡는 일이 더 쉬워 보입니다. 그러면 그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냥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살면 적어도 전쟁은 피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이 세상을 보니 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의롭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할 죽음의 일들뿐인데 어떻게 그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의 마음도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다 보니 그 당시 교회가 얼마나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면죄부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돈을 주고 ‘면죄부’만 사면, 자신의 죄는 물론이고, 죽은 조상, 곧 부모님, 조부모 그리고 그 윗대의 조상 누구의 죄도 면제되어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면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들은면죄부만 사면, 회개할 필요도, 선행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 시대로 하면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음식을 만드는 고생할 필요도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돈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1517 10 31일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논제1항에서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회개하라 …’( 4:17)고 선포하셨을 때, 그 말씀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참회, 회개가 되어야 한다고 게시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돈으로 값싸게 팔려 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루터의 눈에는 면죄부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과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개신교회도 면죄부만 팔지 않을 뿐이지 중세의 교회가 저지는 만행을 똑같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회개의 선포가 없는 설교를 통하여 오로지번영’, ‘일등’, ‘제일’, ‘축복’, ‘평안’, ‘큰 꿈등의 수식어를 붙인 축복만을 선포함으로써 영생을 위한 십자가의 복음을 값싸고 천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에 합당한 회개 없이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되는 듯이 예수의 이름을 면죄부로 팔아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거라는 값싼 복음에 속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르핀을 맞듯이 우리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불의,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불의와 맞서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깊은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가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안하다pax’, ‘평안하다pax’고 외치면 우리의 삶에 평안이 찾아옵니까?

 

삭개오처럼 뼈를 깎는 회개의 삶 없이( 19:8),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의 모든 죄를 면죄부 하나로 값싸게 용서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종교개혁 이전에 면죄부를 사서 값싸게 구원 받으려고 했던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파렴치한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평안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믿음으로 싸워 죄로 물들어 있던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몰아냈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과 내 안에 있는 죄(죽음의 세력)와 싸워 그러한 것들을 이 세상과 내 안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7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의 구원을 자판기에서 뽑아내듯이 값싸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 돈을 주고 값싸게 살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십자가 목걸이 걸고 다닌다고, 십일조 생활하고 주일성수 한다고 그것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값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치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이 값싼 면죄부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이 이 세상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죄(죽음의 세력)와 맞서 싸우는 믿음의 전투가 되게 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깊은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용서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우리의 삶에서 개혁해야 하는지 깊은 감동이 오시는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죄로 물든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어서 욥쇼~’라며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갈 때 죄로 물든 우리의 삶이 어서 옵쇼~’라며 우리를 반겨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입성한 순간 그들의 삶은 전쟁에 휩싸였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믿기로 결단한 순간 영적인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건 필연입니다. 구원은 자판기에서 돈을 넣고 물건 빼듯이 그렇게 값싸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시장에 가서 잘 차려놓은 반찬을 사다가 먹는 것과 같이 쉽게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히려 농부가 되어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농부의 수고가 열매를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수고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바라는 농부가 수고하는 것처럼, 구원을 받기 바라는 신앙인이 그에 합당한 수고(회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꼭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면죄부처럼 여긴 것은 아닙니까? 수고 없이 열매만 바란 것은 아닙니까? 회개 없이 구원만 바란 것은 아닙니까?

 

구원 받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넌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소망에 대한 징표였듯이,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영적인 전쟁을 치를 때 힘겹고 어렵지만 반드시 이기게 될 거라는 징표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맙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