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19. 01:57

2011년 9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20장 1-16절
말씀: 지금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오늘 말씀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의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유의 말씀 앞에는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비유의 말씀 뒤에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포도원 품꾼의 비유,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도대체 어떤 연속되는 의미를 품고 있기에 성경에 나란히 기록이 되어있을까요.

그 이유를 풀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율법을 지켰기에 영생을 얻을 줄을 확신하였기에 예수님의 입에서 "당신은 영생을 얻을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꺼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생,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예수님께 당당하게 말을 하였지만 정작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순종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19장 27절 말씀에서 주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자 청년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자신들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까 무엇인가 보상을 받지 않을까하는 것이 베드로의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심판하실 때 너희가 내 좌우편에서 그들을 심판하는 영광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한 전제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새롭게 될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예수님을 따른다는 조건이 붙어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제자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새롭게 되는 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거친 후에야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때까지 나와 함께하여야한다는 두 번째 조건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동참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입성만 하면 자신들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이 따를 것이고 그때에 자신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포도나무 품꾼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천국은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품꾼들의 삶은 지금 인력시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루를 일하지 못하면 하루 동안 주린 배를 채울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즘과 마찬가지로 일할 사람은 넘쳐나고 일할 자리는 너무나 적었기에 많은 품꾼들이 일을 구하고자 노력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품꾼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찾아간 것은 포도원 주인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렇기에 처음 구한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노라 말했을 때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포도원 주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는 왜 주인은 다섯 번에 걸쳐서 일꾼을 구했던 것인가? 이구요. 다른 하나는 왜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하였는가? 입니다.

우선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포도원 일꾼을 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 삼시에도 나가서 품꾼을 구하고 제6시, 제9시 그리고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인 제11시에도 품꾼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력시장에 가서 일꾼을 구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의 체격과 건강상태입니다. 많은 고용자들이 일꾼들 중에 가장 체격이 건장하고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을 뽑아내어 데려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하고 일을 하기 힘들 것만 같은 사람들이 남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매일 반복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늦은 시각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다음날도 일을 구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주인은 11시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일꾼을 불렀던 것입니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는다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은혜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천국을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인 왜 모든 일꾼에게 동일한 품삯을 지급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전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문화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의뢰인-후견인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제도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돌봐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에서 의뢰인은 후견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는 부자를 택할 수 없었고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 요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제도에 빗대어서 이 비유를 해석하자면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선택하여 품삯을 지급할 수 있지만 품꾼은 주인을 선택할 수도 품삯을 정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은 처음 부른 일꾼에게만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였고 나머지 일꾼들에게는 자신들이 한 일에 상당한 품삯을 지급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이 얼마를 주던지 간에 그것은 주인의 뜻이고 후견인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주인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품삯을 받는 시간이 되자 11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은근히 더 많은 돈을 받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들에게 한데나리온의 품삯이 돌아오자 주인을 원망하였습니다.

주인은 의뢰인-후견인 제도에 의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푼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일꾼들에게 일한만큼의 값을 쳐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만큼의 값을 쳐주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일꾼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을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들은 주인의 은혜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품삯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주장한대로 그들은 종일 수고하였고 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억울함만을 주장하는 그들을 보면서 주인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이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구원은 먼저 택함을 받은 자나 나중에 택함을 받은 자나 동일하게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이유는 제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수고하여 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한 일꾼들처럼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올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고 그 마음은 이미 권력이라는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19장 27절 말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의 질문과 같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생각하시는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저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열심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를 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살아갔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약속하였던 상당한 보응을 제자들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자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른 장작 같고 질그릇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포도원의 일꾼으로 삼으신 주님은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열심히 동참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이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한 만큼 값을 계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 수 있을 만큼의 크나큰 은혜로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보상을 바랄때가 아니라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신 사역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보답해야할 때라는 것입니다. '서로 누가 더 일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로 다투며 시기하며 질투하는 때가 아니라 서로 도와서 주의 일을 감당해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의 일을 잘 감당하며 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