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8. 1. 04:37

2011 7 3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창세기 32:22-31

제목: 하나님과 더불어씨름하라

 

섬집아기 노래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스로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못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참 위태로운 광경입니다. 아버지는 죽었거나 고기 잡으러 먼 곳에 갔나 봅니다. 상황을 보니 엄마도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형편인 것 같습니다. 아이는 어립니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아이를 돌봐줄 여력이 없습니다. 엄마가 섬그늘에 나가 굴을 따서 내다팔지 않으면 아이를 굶길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위태롭지만, 아이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엄마는 눈물을 머금고 굴따러 바다에 나갑니다.

 

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 영문도 모른 채 혼자 집에 남겨져서 혼자 집을 지키며 혼자 놉니다. 이 생활이 익숙한 것 같습니다. 엄마가 나갔는데도 보채거나 울지 않고 혼자서 잘 노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혼자 노는 아이의 모습이 여간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놀다가 지쳐서 잠이 듭니다. 늘 그랬듯이,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마루바닥에서 그냥 잠이 듭니다.

 

굴 따러 간 엄마는 집에 혼자 놓아두고 온 아이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굴을 따서 팔아야 먹고 사는 형편이지만, 그래서 몸은 바닷가 갯벌에 와 있지만 마음은 아이가 혼자 남겨진 집에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요? 이윽고 마음은 몸을 부릅니다. 아직 바구니를 다 채우려면 더 일해야 하는데, 일 손이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를 혼자 집에 놓아두고 온 것 때문에 엄마의 마음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엄마는 곧장 집으로 달려갑니다. 아직 채우지 못한 바구니를 옆에 끼고 말이죠.

 

이 세상에서 가장 위태롭고 슬픈 동요입니다. 이 동요를 들을 때마다 저는 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위태롭고 슬픈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해달라고요. 어서 빨리 당신의 나라가 임하여 우리 모두가 당신의 안전한 팔에 안기어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게 해 달라고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삶은 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위태롭습니다. 위태롭지만 그냥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요즘엔 경제 위기다, 환경 위기다 해서 세상이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그건 겉보기에만 그렇고, 속을 들여다 보면 우리 인류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경제의 위기가 닥치거나, 환경의 위기가 닥치면 거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그 위태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 속에서 위태로움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의 이름은 그 이름도 유명한 야곱입니다. 야곱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위태로웠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먼저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장자권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장자권을 모태에서부터 탐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날 때 형 발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름도 야곱이라고 지어졌습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또는 움켜쥐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성장하면서 남성답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통상관념으로 남자는 사냥 등 바깥 일을 해야 하는데, 그는 도통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집에 남아서 엄마를 도와 늘 집안 일만 했습니다. 그런 야곱을 아버지 이삭은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삭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장남 에서를 샌님 같은 작은 아들 야곱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엄마 리브가는 자신을 잘 도와주고 자신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호시탐탐 장자권을 노렸습니다. 장자권을 차지할 기회를 엿봤습니다. 그러다 결국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배고파 하는 틈을 타 밭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차지합니다. 야곱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장자권을 확실히 하고자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냅니다. 이것도 형 에서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에서로 분장하여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고 받아낸 겁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위태롭습니다.

 

그러다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동생에게 속아서 장자권도 빼앗기고 축복도 빼앗긴 것을 안 형 에서가 노발대발 하면서 동생 야곱을 잡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머나먼 곳에 있는 어머니의 동생, 즉 삼촌 집으로 무작정 발길을 옮깁니다. 이제는 돌아갈 집도 없습니다. 무작정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속여서 빼앗은 장자권과 속여서 받은 축복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장자권과 축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형상화 되어 야곱의 실제 삶에 이루어질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위태롭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야곱의 삶은 위태로웠습니다. 속이고만 살았던 야곱이 이제는 외삼촌 라반에게 오히려 속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속임수 때문에 야곱은 20년 동안이나 외삼촌을 위해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속이는 외삼촌에게 이기기 위하여 야곱은 지혜를 내어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도 대가족을 일구었습니다. 부인 넷에 아들이 11명이나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차지한 장자권과 축복이 형상을 이루어 야곱의 눈에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남부러울 것 없는 부를 이루고 가정을 일구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재산을 챙겨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 고향에 거의 다 도착해서 야곱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합니다. 형 에서가 거의 군대에 가까운 병력을 거느리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위기입니다. 20년 동안 뼈빠지게 일해서 일군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홀몸이었기 때문에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마음이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릅니다. 잃을까 봐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이름처럼 살아왔습니다. 나면서부터 움켜쥐는 자이었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은 움켜쥐는 데만 모든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형 에서가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도 야곱은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움켜쥐고 있을 방법을 간구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씨름을 했는지,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길 수 없으니까 순간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서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만듭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야곱은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보내달라는 그 사람에게, 야곱은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버팁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사람은 야곱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먹고 이렇게 힘이 셉니까?”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길래 이렇게 끈질깁니까?” “당신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 등 야곱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야곱에게 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고 이름을 물어봤습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사람 야곱은 평생 움켜쥐는 자로 살아왔습니다.


이 순간
,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줍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 사람, 야곱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움켜쥐는 자로 살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건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만약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지 않고 그냥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국 야곱은 움켜쥐고 있었던 모든 것을 그날 밤 잃었을 겁니다. 위태로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그 위태로움 속에서 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야곱, 움켜쥐는 자에서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바꿔주셨을 때, 야곱은 그 동안 움켜쥐었던 것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추겨 추악한 야곱이 되라고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움켜쥐라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싸워서 힘을 키우고 부를 쌓아서 미래를 튼튼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데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이 세어 보이고 자신들을 가장 잘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하나님께서 계신 교회로 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움켜쥔 것을 더 강하고 부하게 만들어 달라는 데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을 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그 사람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려고 했던 것처럼 열심을 냅니다. 그러다 자신이 원하는 축복이 오지 않으면, 이제는 대놓고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웁니다.


오늘날
, 우리에게 참으로 위기는 경제나 환경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상황이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위기는 교회 다니면서도 우리의 정체성(Identity)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야곱으로 움켜쥐는 자로 남아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항하여(against) 싸워 이기려 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태로운 삶 가운데,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이기려 들지 마십시오. 야곱의 정체성이, “움켜쥐는 자에서 이스라엘,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자로 바뀌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with) 싸워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겨먹을라고 싸우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로 거듭나라는 뜻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위태로운 삶은 마술처럼 평안이 넘치는 삶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는 삶이 무엇인지, 몇 마디의 말로 설명 가능하거나, 그러한 삶을 들어서게 되지 않습니다. 야곱도 이러한 삶에 들어서기 위해서 수많은 세월과 역경을 보냈습니다. 적어도 20년이 걸렸습니다. 외삼촌 라반 집으로 도망가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일이 없습니다. 20년이 지나 눈에 보이는 장자권과 축복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가에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삶을 완전히 변하게 하신 겁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 ‘나는 아직도 야곱인가?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려 드는 사람인가?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하나님의 힘을 빌어 더 많이 움켜쥐려 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의 삶은 온전히 변해서 이제는 이 험한 세상, 위기의 세상, 위태로운 내 삶을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겨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꼭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 위태롭게 달려 있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죽음을 이겨낸 우리 구주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길 때 부활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붙들 때, 우리의 위태로운 삶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